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정념의 기(旗) - 김남조
*정념(情念) :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
*기(旗) : 깃발, 화자의 마음과 동일시되는 존재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낭만적, 애상적, 종교적, 기원적, 시각적
- 표현 : 반복, 직유, 은유
- 심상 : 시각적, 청각적 심상
- 구성 :
1연 : 고독한 존재로서의 자아
2연 : 고뇌하고 번민하는 자아
3연 : 평온과 안정을 되찾은 자아
4연 : 순수하게 살고 싶은 자아의 바램
5연 : 초월적 존재에 대한 희구
6연 : 깨달음을 얻은 자아
7연 : 울며 기도하는 자아
- 주제 : 순수한 삶에 대한 열망과 종교적 기원, 순수한 영혼과 삶의 인식 추구
- 특징: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순수한 삶을 기원하는 마음을 노래
구체적인 사물을 매개로 내면의 여러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
직유, 은유, 반복 등의 다양한 수사법을 활용하여 내면 심리를 형상화
애상적 정서를 바탕으로 비애를 극복하며 영혼을 구원받으려는 모습을 형상화
의문형 어미를 사용해 화자의 정서와 소망을 효과적으로 표현
변형된 수미상관의 구성으로 안정감을 주고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냄
김남조(金南祚, 1927년 9월 26일 ~ )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했으며, 일본 규슈 후쿠오카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1944년 귀국 후 경성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다녔지만 결국 중퇴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학사 학위 취득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마산고등학교와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성균관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4년부터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0년 연합신문에 《성숙》, 《잔상》으로 등단하였고, 1953년 첫시집 《목숨》을 출판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초기에는 인간성과 생명력을 표현하는 시풍을, 이후에는 로마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적 사랑의 세계와 윤리 의식을 표현하였다.
이해와 감상
김남조가 자신의 시에서 추구하는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자, 신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신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끝없는 자기 초월과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언제난 완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녀의 시는 언제나 신의 세계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시인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인간에게나 신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시인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노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념의 기'라는 제목은 그와 같은 염원을 암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情)'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염(念)'은 신에 대한 염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시적자아는 자신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랑과 염원을 품고 있는 '정념의 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모양 걸려 왔더니라.
1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는 깨달음을 얻기 전의 상태로 순수한 삶과 신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지닌 자아의 마음을 나타내며, '보는 이 없는 시공에'는 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전의 고독한 상태를 의미한다.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2연의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는 인간 존재로서 겪어야 하는 욕망, 갈등, 번민을, '눈 오는 네거리'는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다스리기 위한 공간(눈='정화'의 의미)을 상징한다.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3연의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을 통해 마음의 평온을 되찾고 있으며, '눈의 음악'에서는 순수하고 평온한 소리가 들려온다.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4연의 '뉘우침 없는 일몰이 /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 그 일'이란 후회없는 순수한 삶과 평화와 안식의 고요한 내면세계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5연 '황제의 항서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 맑게 가라앉은'에서 인간 존재가 지니는 무거운 비애를 초월한,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 벗' 즉, 순수한 삶을 갈망하는 내가 진실로 믿고 의지할 만한 깨끗하고 순결하며 절대적인 벗(신)을 갈구한다.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6연 '내 마음은 / 한 폭의 기'는 깨달음을 얻은 후의 상태로 '마음 속의 번민, 갈등'을 극복하고 내면 세계의 평화를 성취하는 경지로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의 모습을 보여준다.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7연 '때로 울고'에서는 자기 존재의 미미함(자기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슬픔이 드러난다. 슬픔을 극복하고 갈망을 이루기 위해 '때로 기도드리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이 시는 결국, 깃발이라는 구체적 사물에 마음을 비유하여 모든 욕망과 번뇌, 갈등을 극복하며 그와 같은 임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소망을 가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우리말 사랑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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