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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비문학

[수능 비문학 대비] 수특 독서 주제문 읽기 3

by 열공햐 2021.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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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비문학 대비] 수특 독서 주제문 읽기 3

구분 주제 (관련 글 읽기)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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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사관의 형성과 변화 과정 [1] [2] [3] 하단 붙임1) 참조

17~18세기 인류의 진보와 역사 발전을 낙관하는 진보 사관, 19세기 헤겔과 마르크스에 의한 갈등론적 진보 사관, 20세기 세계 대전, 냉전, 환경 문제, 핵전쟁의 위협에 의한 진보 사관의 약화
인문
22

존재론적 환원주의 [1] [2] [3]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가 연속적인 분해를 통해 구성 성분으로 환원된다고 보는 현대 물리학의 입장을 정신적 존재의 환원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살펴보고 있다. 정신적 존재의 환원은 이원론과 유물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이원론의 입장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세계가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존재론적 환원의 입장과 함께 수용될 경우 정신적 존재의 속성이 물질적 속성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두뇌와 같은 특정한 물질의 경우는 환원이 불가능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존재론적 환원에 대해 반론이 제기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인문
23

고대 그리스 건축의 주범 [1] [2] [3]

고대 그리스 미술을 대표하는 건축물들이 어떤 배경에서 세워졌는지 간략히 제시한 후, 기둥과 엔태블러처의 결합이 신전 건축의 외형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주범'이라는 건축 양식이 고안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주범에는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토스식이 있다고 밝힌 후, 대표적인 건축물을 사례로 제시하며 각각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건축에 이용된 주범인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토스식의 특징
예술
24

니체의 언어관과 진리 [1] [2] [3]

언어와 개념의 본성으로 인해 인간의 인식과 진리 탐구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니체의 철학을 다루고 있다. 니체는 외부 자극을 이미지로 옮기는 첫 번째 메타포와 이미지를 음성으로 만드는 두 번째 메타포를 통해 만들어진 언어는 사물 자체가 아닌 자의적으로 연결된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표현할 뿐이라고 하였다. 또 니체는 개념이 동일하지 않은 것들을 동일하게 나타내는 메타포를 통해 생겨나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는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면서도 다양한 해석이 모여 만들어진 삶에 유용성이 큰 해석, 즉 해석적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진리에 대한 이러한 니체의 생각은 우리 모두가 해석적 진리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니체가 지적한 언어와 개념의 한계 및 해석적 진리
인문
25

'음악적 시간'의 발전 과정 [1] [2]

'음악적 시간'을 나타내는 주요한 방법인 리듬과 템포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리듬은 '규칙적 또는 불규칙적으로 시간을 분절하는 음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패턴'을 나타내는 말로, 처음에는 가사의 흐름에 의존적인 형태로만 존재하였다. 이후 다성 음악이 발전하면서 6개의 정형적 리듬을 갖는 모드 리듬이 사용되었다가 13세기 중엽 이후 멘수라 기보법이 발달하며서 각각의 음표가 특정한 음가를 지니게 되어 세분화된 리듬을 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7세기 들어 일정한 박자가 주기적으로반복되는 박절적 시간 구조가 나타나며 하나의 음악 작품이 동일한 시간적 단위로 통일되고, 강세를 표현하게 되면서 음악을 통한 주관적 정서의 전달이 가능해졌다. 한편 템포는 음악적 시간을 구체화하고 운동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악상 기호를 통해 음악 작품의 개성을 드러내는 요소로 기능하였다. 1800년대 초반 매트로놈이 발명되면서 템포에 대한 정확한 측정과 표시가 가능해졌으며, 메트로놈은 현재까지도 음악 연주에서 특정한 템포의 규정과 유지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예술
26

유럽의 대서양 진출과 그 영향 [1] [2] 붙임2) 참조

 

해양 권역 중심이 대서양으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명 간의 충돌 및 세계 질서의 변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유럽은 더 넓은 세계로 시장을 확대하여 경제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양 진출을 꾀한 결과, 전 세계의 패권을 쥘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다른 문명에 대해서는 파괴적인 모습을 보였고, 유럽과 다른 국가들 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유럽의 대서양 진출은 파괴적 폭력과 새로운 질서의 창조라는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이 동반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유럽의 대서양 진출과 그로 인한 세계 질서의 변화
예술
27

위험 분석 모델 [1] [2] [3]

위험 평가와 관리에 관한 여러 모델을 통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위험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 1983년 미국의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보고서인 '레드북'의 특징과 한계를 설명한 다음, 그 한계를 보완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인 '오렌지북'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 발전한 내용을 담은 IRGC의 '통합 모델'의 특징과 한계를 설명하고, 그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적응적 모델'이 제시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위험의 효과적인 관리를 위한 모델의 발전
인문
28

지리적 집중 모형 [1] [2] [3]

리카도의 비교 우위론이 수확 불변을 전제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후, 수확 체증이 나타내는 현상을 폴 크루그먼의 견해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제조업 벨트가 형성된 과정을 수확 체증, 수송비, 수요라는 세요소의 상화 작용에 기초하여 설명하였다. 특히 지리적 집중 모형을 통해 제조업이 집중된 곳에서 수확 체증을 통한 비용 감소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많은 수요가 존재하고, 수송비도 절담된다는 것을 간명하게 분석하였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미국의 제조업 벨트가 여러 조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강한 견인력 때문에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하였다. 폴 크루그먼의 지리적 집중 모형
사회
29

행정 관료의 책임성 문제  [1] [2]

국가가 부여한 권한을 가지는 관료가 지니는 책임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책임성은 어떤 행위자가 주어진 권한에 의거한 자신의 행위를 다른 중요한 대상에게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의무를 지는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책임성이 성립하려면 책임을 지는 자, 책임을 묻는 자, 책임성에 대한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 책임을 묻는 자의 위치와 책임성에 대한 판단 기준의 특성을 조합하여 책임성을 유형화할 수 있는데, 계층적 책임성, 전문가적 책임성, 정치적 책임성이 그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행정체계인 관료제는 여러 측면에서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이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관료제의 관료들은 여러 가지 책임성을 지고 공공의 목적 달성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책임성의 개념 및 유형과 관료제에서의 책임성
사회
30

부가가치세 [1] [2] [3]

부가 가치세의 개념과 계산 방법, 감면 제도 등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부가 가치세는 국세의 하나로 재화의 공급 또는 수입, 용역의 공급 과정 각 단계에서 덧붙은 부가 가치에 대해 부과하는 조세이다. 세법상의 납세 의무자는 사업자이지만 결과적으로 부가 가치세를 부담하는 이는 최종소비자이다. 부가 가치세를 계산하는 방법에는 일정 기간 동안 발생한 부가 가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더하고 여기에 세율을 곱하는 방법인 가산법과 이전 단계까지의 거래액 또는 부담 세액을 공제하여 세금을 계산하는 방법인 공제법이 있다. 공제법에는 거래액을 공제하는 전 단계 거래액 공제법과 부담 세액을 공제하는 전 단계 세액 공제법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전단계 세액 공제법을 택하고 있다. 부가 가치세를 면하게 해 주는 제도로 수축하는 재화 등에 적용되는 영세율 제도와 기초 생활필수품 등에 적용되는 면세 제도가 있다. 부가 기치세는 정부가 국가를 운영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가 가치세의 대상 및 계산 방법과 관련된 제도
사회

*위 글을 읽고난 뒤 주요 개념 정리 및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게 서술할 것

 

 

※ 정리의 예

 

 

붙임 1) 진보 사관

계몽주의 사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혁명의 세기를 지내면서 인류의 역사가 시간에 따라 발전해나간다는 진보 사관이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고전고대 사회에는 진보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E.H. 카는 고대 그리스인의 미래관은 어둡다고 말했다. T. 보만(T. Boman, 1894~1978)은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에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는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에스키모들은 눈을 지칭하는 말로 수십 가지를 사용한다.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눈의 상태에 따라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그 대처 방식이 다양하다. 이처럼 언어는 삶의 표현이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도 문화의 차이로 인해 성격이 이질적이었다. 그리스어는 공간을 지칭하는 개념이 탁월했지만 시간을 지칭하는 개념은 한 마디로 대책이 없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얼버무리기도 했고 시제에 관해 예민하지도 않았다. 반면 히브리어는 상대적으로 시간에 관한 단어, 개념이 잘 정돈되어 있다. 이런 이유에서 고전고대 문화에는 진보 의식이 없었다. 유대교, 기독교 사관에서도 인간 드라마는 일정한 과정을 따라 움직인 뒤 종말이 온다는 측면에서 볼 때 진보 의식이 없다. 이처럼 서양 양대 문명의 역사관에서 진보 사건은 찾아볼 수 없다. 동아시아의 중화문명도 이하동문이다. 동양에선 요순 시대를 이상적인 정치의 표본으로 설정하고 그 이후의 역사는 퇴보의 연속으로 간주했다. 
구원에 가까워간다는 점에서 기독교에는 진보 의식이 있다고 보는 것도 가능한 듯 보인다. 하지만 미래에서의 인류 발전을 기대하지 않고 또한 계시적인 종말을 예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진보 사관이라고 볼 수 없다. 랑케는 진보 사관을 비판하고 부정할 때 그 근거로 기독교를 내세웠다. 기독교 사관에는 예수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획기적인 시간 단절이 생기고 역사는 두고두고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서 움직인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서 이뤄지므로 진보 사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8세기 계몽주의의 절정기를 살아간 볼테르는 인간 정신이 어떻게 발전해왔는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과거에 이런 종류의 사고 방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볼테르의 말은 계몽주의 사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제 만나게 되는 마르크스의 역사관도 이런 진보 사관을 잘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역사관 

인간 세상을 시간 속에서 바라보는 틀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사고의 틀이 다른 것의 존재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를 감싸고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그 틀은 삶의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관이다. 삶에서 객관성이 나오더라도 순환적 시간관과 직선적 시간관 중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논할 수 없다. 
담론 중에서 좀 더 현실을 잘 설명하고 실천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있지만 역사관의 문제에서는 조금 난감해진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은 아무래도 계절의 순환처럼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순환적 시간관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근대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토대로 앞날의 시대가 이전보다 더 진보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계몽주의의 영향이다. 계몽주의는 시간에 관해 앞으로 죽 진보해간다고 봤지만 삶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맥락에 따라 개별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역사주의가 계몽주의에 내재한 문제점을 강력히 비판했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계몽주의와 역사주의 양자를 종합하려고 했다. 오늘은 이 둘에 대해 알아보자(헤겔의 관념론은 앞서 설명한 것으로 대신한다). 

마르크스의 사상

마르크스는 당대 서양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헤겔의 철학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부분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마르크스에 대한 상식은 정작 마르크스 본인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고 하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를 계승했다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체제를 구성하는 바람에 마르크스의 사상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체계적 지식으로 굳어졌다. 때로는 마르크스와 정반대의 주장이 마르크스의 생각처럼 떠돌고 있는 실정이다.
마르크스는 보편적이고 지식으로 굳어진 철학에 대해 빈곤하다고 표현(철학의 빈곤)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빈곤을 반대로 해석하여 철학을 옹호하였다. 마르크스의 저작 중 <철학의 빈곤, The Poverty of Philosophy>(1847)이 있다. 서명을 보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심지어 옮긴이가 제목의 뜻도 모르고 역자 서문을 쓴 적도 있었다. ‘철학의 빈곤’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철학이라는 것이 빈곤하니까 때려치우자. 다른 하나는 올바른 철학이 없으니까 제대로 된 철학을 갖추자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후자의 의미로 착각하지만 정작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전자의 의미였다. 마르크스는 이런 철학은 집어치우고 대산 역사과학을 주장했다. 역사과학은 자연과학과 인간과학으로 나눌 수는 있어도 결코 분리될 수는 없다.
 그리고 누구나 그 말을 수긍할 정도로 마르크스의 지식이 철저히 왜곡되었다. 경제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신적, 정치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중요해진 이유를 삶과 연관시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마르크스를 비판하고자 했던 정치경제학자들의 주장이 오히려 마르크스의 것으로 호도되고 있다.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부는 부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표현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나오는 말이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시했던 생각이 마치 마르크스 고유의 주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마르크스는 국가, 지역 등 여러 범주가 있지만 그중에서 생산을 둘러싼 예속과 지배의 관계로서의 계급 개념을 도입했다. 이제까지 통용되던 국가, 국민, 백성이라는 개념을 좀 더 세분화시켰다. 자국민과 외국인을 구분하듯이 사회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삶이 지역과 나라로 실재화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들으면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화이트칼라 계층이 연상될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미국인이 뉴요커는 아니다. 중서부에서 목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목동의 삶은 미국이라는 이미지로 실재화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움직임 속에서 계급을 중요시했다. 물론 그만이 계급을 중시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비판하고자 했던 정치경제학자 리카르도는 저서에서 인간을 자본가, 지주, 노동자 3계급으로 구분하면서 첫 장을 시작했다. 계급투쟁은 마르크스 고유의 창작물이 아니다. 그때에는 누구나 고대 로마사와 프랑스 대혁명을 논할 때마다 언급했던 용어다.
공교롭게도 마르크스가 언론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었을 때 그의 직장은 계급 문제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언론사에서 계급투쟁을 논하던 어느 회의를 보도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 회의에서 논의된 사안은 프랑스 대혁명에서 부르주아가 귀족을 타도했으므로 앞으로의 혁명은 노동자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을 몰아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당시에는 계급투쟁이라는 관념이 일반적이었다. 마르크스가 유명해지자 미국 사람들은 그를 계급주의자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오히려 마르크스가 생각한 부분이 정반대로 실현되어 이른바 마르크스의 오류가 생겨났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집단주의적이고 평균주의적인 사회로 바라봤다. 대규모화된 생산 수단이 소수의 손에 독점되면서 다른 사람들은 평균화되었다. 이렇게 발생한 빈부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단순히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대규모 및 독점화된 생산 수단과 개인들의 관계가 과거처럼 친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새로운 사회의 방향으로 처방했다. 과거에는 자영농이 자신의 토지에서 애착을 가지며 농사를 지었지만 집단화, 평균화가 된 자본주의 시대에서 노동자는 낯선 자본주의 시스템의 일개 구성품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재밌게도 유토피아주의자인 마르크스가 동시대 사회주의자들을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비판한 것이 많았다. 왜일까? 마르크스가 말한 유토피아주의자에 대해 사람들은 착각에 빠져 있다. 그는 꿈이 작은 사람들을 일컬어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말했다. 집단주의와 평균주의는 자본주의 단계에서 완성되었다. 그러한데도 몇몇 공산주의자들은 집단화와 평균화를 완성시키겠다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이미 자본주의가 이룩한 것을, 헛된 망상으로 또 완성시키겠다고 말한다면서 그들을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유토피아주의자는 일종의 망상주의자, 공상주의자를 의미한다. 
우리 시대의 의미에서는 마르크스야말로 진정한 유토피아주의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진단은 틀렸다. 그가 인정하지 않았던 체계가 20세기 초에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실현되었다. 자본주의가 이미 이룩한 성과를 볼 때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여러 이유로 인해 집단주의적, 평균주의적인 국가가 성립되었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망상주의자들의 주장이 성공했다. 마르크스가 20세기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지만 그의 고유 사상이 잘 반영된 결과는 아니다. 

 

유물론과 관념론

마르크스는 헤겔을 공부한 사람으로 우리들의 삶이 중요하다며 이성에 반발했다. 그 시대의 이성도 결국 삶에서 나왔다. 보통 사람들이 중시하지 않는 물질적인 삶, 먹고 생산하는 삶의 방식이 유지되는 방식이 이성이나 의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그것을 규정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흔히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일컫는다.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견해가 오간다. 관념론에서는 사물이든 인간 현실이든 내 정신이 대상의 정신을 파악한다. 그런데 인간 대 물질의 구조에서는 인간이 물질을 파악한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한 번 발생한 사건은 물질적으로 지나갔지만 정신이 있으므로 파악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유물론은 이것을 거부한다. 유물론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강조한 근대적 자유 의식과 이성을 삶, 즉 사회적 존재가 규정했다고 봤다. 마르크스 사상의 토대가 되는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이 수용하고 있다. 우리는 감옥 속에 살고 있다. 다른 시대를 연구할 때에는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감옥에 살았는지 알아야만 한다. 다시 말해 그 시대 분위기에 젖어들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마르크스의 틀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마르크스는 사회적 삶의 중요성, 역사에서 삶의 생산이 갖는 궁극적인 규정성을 강조했다. 이 생각은 이른바 유물사관, 역사적 유물론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일컬어진다. 유물론은 관념론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관념론은 배격하기 어려운 인식 틀이다. 만일 사람에게 정신이 없다면 우리는 단순한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에는 내적 원리가 존재한다. 내 정신이 이 원리를 파악해야 나는 자유로워진다. 인간 현실에도 정신이 내재해 있다. 유물론적 입장에서는 이미 지나가고 없어진 과거 사건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사건의 정신과 내 정신이 상호 소통을 한다. 어떻게 감히 관념론을 배격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의 착각과 달리 유물론은 사회 발전 단계 법칙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유물론은 사물과 인간에는 정신적인 것이 있지만 그것은 사물과 나의 삶 또는 존재의 일부분이라고 본다. 우리와 우리가 보는 사건, 사물에는 헤겔이 생각했던 정신보다 더 온전한 것이 깃들어 있다. 정신은 두뇌 의식에서 나오는데, 두뇌 의식은 우리 삶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유물론은 기본적으로 근대 과학의 정신으로 자연, 인간 현실에 정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 포착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정신은 우리 존재의 일부이고 이것을 통해 이해한 사물은 그 사물의 온전성의 일각이다. 
관념론에 따르면 우리는 개념 파악을 통해 사물을 장악한다. 그러나 유물론에 따르면 우리가 개념을 파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물이 주체가 되어 우리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목수가 나무로 책상을 만들려고 하는 순간부터 나무는 목수에게 자기 목소리를 들려준다. ‘나는 불에 탄다.’ ‘과도(果刀)로 나를 자를 수 없다’. 인간 현실도 똑같다. ‘현대 사회에는 물물교환으로 거래를 할 수 없다.’ ‘판서 출신의 조상이 없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무시하지 마라’. 이처럼 사물과 인간 현실이 주체가 되어 자기를 표현한다. 이것이 유물론의 두 번째 특징이다. 
관념론자 헤겔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 정신이 사물의 정신과 소통하며 내 정신이 그곳에 머무르면 나는 자유로워진다. 훈련소에 갓 입소한 훈련병들은 군대라는 새로운 사회의 모든 면이 낯설지만 점차 그 흐름을 파악하게 되면 여유로워진다. 호랑이가 육식 동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생존을 위해 피하게 된다. 이것은 대상을 자기 정신이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물론자 마르크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삶의 존재에 사랑, 육신의 요구 같은 더 근원적인 개별성이 존재한다. 정신만이 아니라 이런 것들도 온몸에 머무른다. 헤겔의 자유는 정신이 대상을 관찰할 때 생겨나는 반면 마르크스의 자유는 개별성이 관찰되는 것이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즉, 삶이 의식을 규정한다. 사물이나 다른 존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것은 관찰자의 임의대로 변경이 불가능하며 그 표현을 존중해주어야만 한다. 개별성과 생명성의 의미에서 온갖 사물에는 창조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 일부가 정신과 과학이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서구의 형이상적인 전통 그 자체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어떤 측면에서는 동양의 전통 사상과도 비슷하다. 
마르크스는 계몽주의의 극치에 이른 철학 사조의 시선을 정신이 아닌 삶의 문제로 되돌렸다. 사물과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정신적인 존재로 볼 것인가? 정신은 우리 삶의 욕구 중 일부이다. 이것이 유물론의 핵심이다. 흔히들 포이어바흐(1804~1872)를 감성적 유물론의 극치라고 한다. 예술이나 감성적 활동을 정신으로 대하는 것이다. 과학과 정신은 이것이 발현되는 일부분이다. 헤겔 철학을 이런 식으로 많이 비판했다. 헤겔은 진리가 우리 정신에 있다고 했다. 노동 등 다양한 형태로 접할 수 있거늘 왜 유독 정신만을 우위에 놓는가? 사물과 나는 그 정신보다 더 온전하고 넓은 곳이다. 이것이 유물론이다. 관념론에 대한 비판도 똑같다. 관념론은 우리 의식이 삶의 존재임을 망각하는 근대 특유의 현상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18세기 말엽에 정치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등장했다. 미국 독립 혁명이 발발한 1776년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경제학을 이야기했다. 당시에는 경제라는 말이 가사를 돌보는 뜻으로 쓰였고 여기에 국가와 사회를 가리키는 정치를 붙여 국가와 사회의 가사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정치경제학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저술 가운데 상당수는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 유명한 <자본론>조차 부제가 정치경제학이었다. 정치경제학, 곧 경제학 비판은 마르크스의 필생 작업이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이 근대 사회에서 부르주아가 일궈낸 최고의 지적 성취로 봤다. 그만큼 마르크스가 비판하고자 한 정치경제학에는 근대 사회의 논리가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한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와 대등한 사회와 경제상을 제시하는 태도가 바람직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죽는 순간까지 정치경제학 비판에 삶을 바쳤다. 즉,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 체제를 평생 동안 비판했다. 이는 그것이 근대 사회의 논리를 가장 과학적으로 대변하는 사상 체계였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사회가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그는 완벽한 체계로 무장한 기존의 논리를 반드시 타파해야만 했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평생의 과제로 삼은 이유였다. 

삶의 토대

정치경제학은 인간 사회에 있어 경제적 동기와 요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는 경제적 요인의 원인을 분석하는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아담 스미스가 살아 있을 때 미국의 펜실바니아 주에서 노예제 폐지 운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 아담 스미스는 인간적인 대우라는 명분은 겉치장에 지나지 않고 노예가 수지타산에 맞지 않아 고상한 빌미를 끌어들였을 뿐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터지자 노예제 폐지를 외치던 물결이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대규모 농장에서 대량 생산에 노예들을 이용하다보니 노예제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비인간적이라며 폐지를 주장했던 시절의 노예제는 장난이었고 산업 혁명 이후에는 그 절정에 치달았다. 아담 스미스의 말이 옳았다. 수지타산에 맞으니 이전보다 수십, 수백 배나 확대되었다. 경제적인 요인과 동기를 중요시한 결과였다. <국부론>은 근대적 사고의 틀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부는 무엇인가? 가난한 자로부터 부자를 보호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다. 동시대 현실을 노골적으로 통찰했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요인이 지배적이라는 당대 주류의 견해에 맞서지 않았다. 우리 삶의 방식에서 나온 경제적 구조가 당시의 전반적인 사회적 틀을 만든다.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857~1858)을 출간하자 많은 사람들은 오해해 마르크스를 공격했다. 고대에는 정치, 중세에는 기독교가 중요했듯이 오늘날에는 경제가 중요하다. 고대에서 정치의 역할을, 중세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무시하고 어떻게 과거에도 경제적 동기를 중시했냐며 혹평이 쏟아졌다. 사실 이런 비판은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정치경제학자들에게 할 말이지 마르크스에게 할 말은 아니다. 
“우선 중세와 고대 세계에 대한 그 진부한 이야기를 누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중세가 가톨릭에 의해, 고대가 정치에 의해 먹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만은 명백하다. 오히려 왜 후자에선 정치가, 전자에선 가톨릭이 주역을 맡았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사람들이 그들 생계를 획득한 양식인 것이다. 예컨대 로마 공화정의 역사를 거의 모르는 사람도 토지 소유의 역사가 그 이면사라는 것쯤은 다 안다. 오래 전 돈키호테는 기사의 무사 수업이 모든 사회의 경제적 형태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오인한 탓에 봉변을 당한 것이다.”- 마르크스 -

고대 세계에서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중세 세계에서 기독교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 자체가 어떤 구조, 양식에서 비롯되어서였다. 즉, 어떤 사회적 양태가 생기고 그것을 토대로 구조가 이뤄지면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돈키호테는 기사 수업이 모든 시대에 통용되는 것으로 착각한 탓에 봉변을 당했다. 따라서 요인과 동기가 경제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 바탕이 되는 사회 구조의 큰 틀에서의 경제 요인과 동기를 말했을 뿐 이념적인 것을 지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마르크스가 비판하고자 했던 고전 정치경제학의 입장이었다. 
21세기의 사람들이 조선 시대의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의 사람들도 21세기의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도 없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큰 틀에서의 경제 구조를 강조했다. 이렇게 구조와 그 흐름을 강조했으니 헤겔의 시대정신이나 시대이성과 통용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목적론적 역사관 배격

마르크스는 목적론적 역사관을 일체 배격하고 인간들의 삶이 만들어내는 구조, 양식, 관계를 중시했다. 구조 자체가 일정한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다. 

“과거 목적론자들에게 식물은 동물에게, 동물은 사람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헤겔주의 철학에서는 역사가 이론적 먹힘의 소비 행위를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역사가 존재하기 위해, 역사는 진리들의 증명이 존재하기 위해 존재한다...그래서 역사도 진리도 하나의 동떨어진 인격, 형이상학적 주체가 되고 현실적인 개개 인간들은 단지 그 대리자일 뿐이다.”

헤겔의 섭리사관을 빈정거리며 비판했다. 삶의 관계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주체가 아니라 단지 대체로서만 살아간다고 한다. 식물은 동물에게 먹히기 위해서 존재하는가? 미리 주어진 섭리로써 사람을 수단이나 대리자로 만드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며 역사를 만들어간다. 역사에는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부리며 섭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관계가 역사를 만들어내지 삶과 동떨어진 이성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렇게 마르크스는 일체의 목적론적 입장을 배격했다. 사람들이 주어진 조건에서 역사 과정을 만들어간다. 자기 삶을 살면서 끊임없이 여러 길을 만들어낸다. 

마르크스와 계급투쟁

마르크스는 생전에 많은 오해에 시달렸다. 마르크스는 그때까지 중심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던 계급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이 화제는 마르크스의 창작품이 아니다. 당시에 이미 쓰이던 말이 마르크스를 통해 유명해졌을 뿐이다. 계급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표현은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이다. 이 문구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언이다. 

“근대 사회에서 계급의 존재나 계급 간의 투쟁을 발견한 것은 나의 공적이 아니네. 나보다 오래 전에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을 서술했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계급의 경제적 해부학을 서술했다네. 내가 새롭게 한 것은 첫째, 계급의 존재는 생산의 일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 둘째,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테타리아 독재에 이른다는 점. 셋째, 이 독재 자체도 모든 계급의 폐지와 계급 없는 사회로의 이행기를 이룬다는 것을 입증한 것뿐이네. 
1852년 마르크스가 바이데마이어(1818~1866)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내용이다. 바이데마이어가 마르크스에게 말하기를, 미국의 민주주의자들은 당신을 계급투쟁 운운하며 사회를 분열시키는 해악으로 본다고 했다. 미국의 민주주의자들은 계급투쟁 얘기만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신이 처음으로 계급과 계급투쟁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영국의 재무장관 디즈레일리(1804~1881)가 유권자들에게 이미 이야기한 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계급이라는 말만 들으면 기겁부터 하는 사람들은 지나간 계급의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간 계급이 귀족 계급을 했다는 식으로 역사서술을 저술한 부르주아 역사가 기조(1787~1874)와 존 웨이드(1788~1875)의 저술을 먼저 공부해야 한다. 
부르주아가 귀족을 몰아냈듯이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몰아낼 것이라는 주장은 마르크스와는 관계없이 이미 동시대에 존재하는 담론이었다. 계급투쟁은 마르크스의 것이 아니다. 동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읽고 접하는 철학서에는 이것이 마치 마르크스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모름지기 역사는 맥락의 과학이다.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혜성처럼 갑자기 튀어나와서 계급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근대 사회에서 계급과 계급투쟁은 누구나 언급하는 주제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싶었던 바는 계급이 없어질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관해서였다. 계급이 역사의 특정 단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 상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단 독재라고 해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시절에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히틀러, 스탈린의 독재라는 개념이 없었다. 군주정이 일반적이었던 시기였기에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오히려 독재는 로마 공화정기의 비상조치권을 가진 독재관(dictator)의 독재, 즉 임시적 독재를 뜻했다. 독재관은 특수한 비상사태에 한해 집정관(consul)의 권한을 확대하고 임기를 연장시킨 직책이었다. 19세기의 독재는 20세기의 독재와 다르다. 역사의 맥락이란 이런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철학과 우리 시대의 철학은 다르다. 언어는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 의미가 설명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철학이 역사를 제외한 모든 과학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모름지기 역사를 배운다는 사람은 이런 감각을 가져야 한다. 그 시대의 분위기에 젖어 들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지적 담론 세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계급과 계급투쟁은 마르크스 시대의 일반적인 담론이었다. 마르크스의 모든 저술은 체계를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이 반영되어 비판 형식을 띈다. 정치경제학을 비판하기 위해 타인의 글을 자주 인용했다. 심지어 정치 강령인 <공산당 선언>조차 비판하는 글이 태반을 차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용된 문장을 마르크스의 말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얼핏 보면 단어가 너무 비슷해서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1846)에서 “요즘 프랑스, 영국, 미국 저술가들은 모두 국가란 모름지기 사적 소유를 위해 존재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으며, 그 결과 이런 견해는 또한 상식으로 되어 있다”라고 생각한 것은 동시대의 너무 일상적인 담론이었다.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를 인용한 이유였다. 아담 스미스, 리카르도의 글에서도 계급, 계급투쟁이 언급된다. 따라서 시중에 나도는 사회과학 개론서는 모두 틀렸다. 

마르크스와 평등

근대 사회의 빈부 문제에 대해 공동체 우위냐, 개인 우위냐의 문제로 접근했던 동시대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와 달리 마르크스는 발전된 생산력을 둘러싼 개인들 관계의 지배예속이냐, 자유냐의 문제로 다가갔다. 그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다. 대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은 개인의 자유를, 사회주의자는 집단의 이익을 우위에 둔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발전된 생산력을 둘러싼 개인들 관계의 지배로 파악했다. 개인을 존중하는 개인주의, 집단을 존중하는 공산주의라는 발상법을 공격하기 위해 공산주의는 도그마라고 표현했다. 마르크스는 자유와 평등의 문제에서 단지 자유만을 이야기했지 평등을 논하지는 않았다. 공산사회를 평등 이상의 왕국으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지배와 예속을 폐지하더라도 각 개인의 성격과 특질의 차이가 있을 터인데 어떻게 평등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공산사회가 평등의 왕국이라는 관념을 극복하자. 평등의 왕국이라고 생각하면 정신적 혼돈만 낳을 뿐이다. 서로 서로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다툼과 불화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각자 처한 상황은 분명히 다르다. 수확이 적을 수도 있고 많을 수도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정확한 해법은, 지배와 착취를 폐지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모든 사회와 정치의 불평등을 제거하고자 한다는 동시대 공산주의자들의 강령에 반론을 제기했다. 거기서도 같은 내용이 반복되었다. 자신은 계급에서 비롯되는 예속과 불평등만 제거하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인간 사이의 불평등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는 평등이라는 표현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배, 예속, 착취가 없어진 사회를 원했을 따름이었다. 

 

 

 

붙임 2) 대항해시대의 신항로 발견이 유럽 경제에 미친 영향

경제학부 201242199 최주호

<서론>
 “새로운 지식에 대한 유럽 세계에 대한 태도는 이슬람이나 중국과 대조를 이룬다. 중국을 보면 그들은 근대를 탄생시킨 주요한 발명을 모두 해냈지만, 이 새로운 지식을 대중적으로 확산하고 이용함으로써 다시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도록 하기보다 그것들을 특수한 목적과 범위에 가두려고 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서도 새로운 지식 체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데 실패해 그들은 세계사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조준현 「교양인을 위한 경제사」 
 아는 것과 아는 것을 활용하는 것은 다르다. 16, 17세기의 동양과 서양은 지금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중국과 인도로 대표되는 동양이 영국와 서유럽의 GDP보다 높았지만 그 격차는 줄어들어 반대가 되어 버린다. [표 1] 이 변화는 어디서 온 것일까? 중국은 화약과 나침반을 발명했고, 항해술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유럽은 이슬람 상인들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단계였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은 받아들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항해술을 이용해 발전된 배를 건조하고, 나침반을 이용해 대서양을 항해하며 신대륙을 개척했고, 화약을 이용해 아메리카의 왕국들을 정복했다. 유럽이 동양을 앞지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신대륙 발견이다. 신대륙 발견은 유럽의 사회, 경제, 정치 시스템을 뒤흔든 큰 사건이었다. 여기선 유럽의 경제가 신대륙 발견으로 인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겠다.

<본론>
⑴ 대항해 시대의 전개
 대항해 시대는 15,16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의 신항로 개척이 활발하던 시대를 말한다. 유럽인들은 왜 15,16세기에 대서양으로 진출해야만 했을까. 십자군 원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십자군 원정은 실패한 원정이지만 유럽인들의 인식을 바꿔놓는다. 전쟁 물자를 보급하던 이탈리아 상인들이 이슬람 상인들과도 교역을 하면서 동방의 진귀한 물건들이 유럽으로 유입된다. 대표적인 물건들이 서론에서 언급한 화약, 나침반, 항해술 등이 있는데 유럽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것은 바로 향료였다. 이 당시 유럽인들의 음식은 보관이 힘들었는데 향료가 이 역할을 해주었고, 맛도 좋게 해주었다. 하지만 유럽과 교역하던 원이 망하고 명 왕조가 들어서면서 활발했던 실크로드 무역은 활기를 잃어갔다. 결정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유럽과의 중계무역을 전면 금지하면서 유럽으로의 향신료 공급이 끊기게 되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바꿔놓았다. 중국과 인도에 대해 소개한 이 책들은 유럽인들의 궁금증을 유발했다. 이러한 국제적, 내부적 상황은 대항해 시대를 촉발시켰고, 선두주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다. 포르투갈은 엔리케 왕자의 정책에 따라 항해연구소를 세우고, 항해술을 발전시키면서 아프리카를 탐험했다. 또한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최초로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스페인 역시 활발한 해상활동을 했는데 콜럼버스는 처음으로 지금의 서인도제도에 상륙, 신대륙을 발견했고, 마젤란은 세계 일주 항해를 최초로 완성했다. [그림 1] 

<본론>
(2) 신항로 개척의 영향 - ⓵ 상업혁명
 자급자족적 성격인 중세 유럽의 상권은 고작 해봐야 한 도시 혹은 두 세 개의 도시에 불과했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은 이 상권을 유럽 전역과 동방으로 확장시켰다. “십자군은 상업을 크게 촉진했다. 수만 명의 유럽인들이 이슬람 교도들에게서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육로와 해로로 대륙을 건넜다. 그들은 원정 내내 물품이 필요했고, 상인들이 이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동행했다. 동방 원정에서 돌아온 십자군 전사들은 그들이 보고 즐긴 진기하고 사치스러운 음식과 옷에 대한 욕구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의 수요가 이런 상품을 위한 시장을 탄생시켰다.”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신항로 개척은 유럽인들에게 동방보다 더 크고 새로운 시장이 있음을 알게 해 준 역사적인 기회였다. 동방과의 무역은 소규모에서 대규모로 변한 규모의 변화였다. 하지만 신대륙과의 무역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동방무역은 지중해에 국한되어 있던 무역이었다. 하지만 신대륙이 발견되고, 신항로가 개척되면서 무역은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세계적 상업권이 대상이 되었다. 상업혁명은 이런 무역권의 대상이 세계로 확대됨에 따라 발생한 상업의 규모와 체제에 있어서의 대변혁을 말한다. 상업혁명이 야기한 유럽 경제의 변화를 살펴보겠다. 우선 무역의 중심지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스페인, 포르투갈의 이베리아 반도로 이동했다. 이탈리아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동방 중계 무역으로 큰 이익을 보고 있었고, 독일은 한자 동맹이라는 상인들의 동맹으로 이익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베네치아 상인들의 무역은 지중해에 국한된 상업이었다. 대서양 신항로가 발견되고 동방에서 직접 향료를 가져올 수 있게 되자 동방 중계 무역은 빠르게 쇠퇴했고 베네치아 상인들 역시 몰락했다. 한자 동맹 역시 비슷한 길을 걷는다. 한자 동맹의 상인들은 지역 특산물을 가지고 베네치아 상인들과 교역을 했는데 주로 육로를 이용했다. 이들은 중간지점인 지금의 프랑스 상파뉴에서 만나 상거래를 했다. 하지만 지중해가 대서양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은 상파뉴를 몰락하게 했다. 육로 이동보다 해상 이동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굳이 육로를 이용해서 상파뉴에서 거래를 할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또한 독일은 이 당시 은광 산업이 발달해서 유럽의 경제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신대륙의 발견으로 아메리카에서 엄청난 은이 유입되고 독일(알프스)의 은광들은 경쟁에서 밀려났고 독일 도시들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었다. 또한 신항로 개척으로 인해 발견된 신대륙은 유럽에게 엄청난 시장을 제공했다. 따라서 신대륙에 물건을 공급하기 위해선 산업 전체적으로 대규모 변혁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에 모직물을 판매하기 위해 양모의 수요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중세의 길드적 소규모 공업 보다는 매뉴팩처의 형태의 대규모 생산형태를 취했다. 인클로저 운동이란 땅을 가진 영주들이 양을 기르기 위해 소작농들을 내쫓고 울타리를 친 토지변화를 말한다. 이렇게 내쫓긴 농민들은 토지라는 속박에서 해방되어 도시의 임노동자가 되어가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노동자의 본원적 축적이다. 매뉴팩처는 공장제 수공업이다. 가내 수공업은 자급자족적 성격이기 때문에 높은 수요를 감당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신대륙의 높은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선 매뉴팩처 생산양식이 효율적이었다. 

(2) 신항로 개척의 영향 - ⓶ 가격혁명
상업혁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중요한 현상으로 가격혁명이 있다. 가격혁명이란 신대륙이 발견된 후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대량의 금은이 유럽 각 국으로 유입됨에 따라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한 현상을 말한다. 이 당시 유럽은 중상주의로 대표되는 경제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중상주의는 중금주의를 표방했다. 중금주의란 금이 곧 국부라는 사상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생각은 타당하게 보인다. 금이 많으면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당시 화폐는 금화, 은화 등 귀금속 자체가 곧 화폐이거나 화폐가 귀금속과 교환될 수 있는 태환화폐였다. 귀금속이 많아진다는 것은 귀금속으로 돈을 많이 만들 수 있다는 것이고 돈이 많아지면 화폐의 가치는 낮아진다. 물가 역시 상승할 수 밖에 없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이다. [그림 2] “서유럽에서는 16세기 초에서 중반까지 아주 미미하게 상승하던 밀의 가격이 16세기 말에는 4배로 뛰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520년에서 1599년 사이에 3.3배 뛰었고, 영국에서는 2.6배, 프랑스에서는 2.2배 올랐다. 각국의 사정에 따라서 달랐으나 물가는 대체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걸친 약 100년 동안에 3배에서 5배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조준현 「교양인을 위한 경제사」
 [그림 3] 화폐 가치가 하락하다 보니 정액소득자들의 불만은 심화되었다. 이 당시 지주들은 지대의 금납화를 실시하면서 정액지대를 받고 있었는데 화폐가치가 낮아지니까 실질소득이 낮아졌다. 또한 노동자들 역시 실질소득이 낮아졌는데 물가는 빠르게 올라가는 것에 비해 임금은 상대적으로 천천히 상승했다. 이에 비해 기업 경영자나 상인의 이윤은 증가해서 자본축적과 경영규모의 확대를 촉진했다. 이는 대량의 잉여자본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고 상공업 분야에서 대규모 경영의 발전이 이뤄졌다. 

 (2) 신항로 개척의 영향 - ⓷ 자본주의적 발전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은 봉건체제가 주류이던 유럽사회를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영국에서는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는 자본과 노동의 본원적 축적을 달성한다. 토지에 귀속되어 있던 농민들은 이중적 의미의 자유인이 되어 도시로 가고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미래의 임노동자의 신분으로서 축적되었다. 또한 직접 생산자를 생산수단에서 분리시켰다는 점에서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기능을 수행했다. 자본의 축적은 가격혁명에서도 나타난다. 가격혁명으로 인해 노동자의 임금이 하락했고 기업가들은 더 많은 자본을 축적했다. 신흥 상공업 계급은 화폐 자산을 집적시키면서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 자본과 노동의 본원적 축적은 근대국가의 형성과 자본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큰 역할을 담담했다. 또한 동인도회사와 같은 주식회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림 4] 동인도회사는 설립 당초 정부통제를 배제하고 유한책임제에 영속적 자본 조직 확립과 중산층의 투자를 조장하는 등의 민주적 운영방식으로 성공을 거뒀다. 은행업 역시 발전했다. 이탈리아에서 환전업무취급에서 나타났던 은행업은 그 후 환전ㆍ예치ㆍ대체ㆍ대부업무까지 확대되었다. 17세기 경제중심이 암스테르담으로 이동면서 이를 모델로 유럽각국에 은행이 설립되었다. 또한 보험업도 동시에 발전했는데, 원격지무역에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해상보험이 16세기 후반 영국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하고, 17세기에는 고도의 전문화가 이루어져 전문적인 해상 보험업ㆍ보험집단이 형성되어 생명보험ㆍ화재보험업종으로 확대되어갔다. 

<결론>
 고대 문명 발원지는 풍족한 땅은 아니었다. 어떻게 비옥한 곳을 두고 이런 곳에서 문명이 일어났을까. 바로 덜 풍족해서이다. 풍족하다면 발전을 생각할 수 없다. 부족하기 때문에 풍족할 방법을 찾고 싸우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이 당시 서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이었다. 반면 동방의 이슬람과 명 왕조는 엄청난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 역시 풍족한 자연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유럽이었다. 부족해서 풍족한 곳을 찾아 떠난 유럽인들은 아시아를 찾고 아메리카를 찾고 종국에는 이들보다 강해져서 오히려 이들을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신대륙 발견은 유럽인들의 사고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새로운 문물들이 들어오고 그에 따라 봉건체제가 자본주의로 바뀌고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진행되면서 유럽은 세계사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된다. 특히 유럽의 경제는 신대륙 발견 후에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발전했다. 상권이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상업혁명이 나타났고 대규모의 금, 은 유입으로 인한 물가가 폭등한 가격혁명이 발생했다. 또한 자본과 노동의 본원적 축적이 이루어지며 자본주의의 맹아의 단계가 나타났다. 이런 경제적 발전은 사회, 정치적으로도 이어지는데 봉건제가 해체되고 절대주의국가와 근대시민국가가 출현한다. 또한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서유럽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커진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나타나게 된 배경을 산업혁명으로 꼽는다. 하지만 산업혁명의 배경엔 자본과 노동의 본원적 축적이 있고 이는 다시 인클로저 운동을 바탕으로 하며 인클로저 운동은 신대륙 발견으로 인한 것이다. 결국 오늘날의 유럽과 자본주의는 신대륙 발견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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