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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전문100

황석영 '삼포 가는 길' 전문 삼포 가는 길 황석영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 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그가 넉 달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한참 추수기에 이르러 있었고 이미 공사는 막판이었다. 곧 겨울이 오게 되면 공사가 새봄으로 연기될 테고 오래 머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예상했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현장 사무소가 사흘 전에 문을 닫았고, 영달이는 밥집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밭고랑을 지나 걸어오고 있었다... 2021. 10. 22.
차범석 '산불' 전문 산불 차범석 나오는 사람들 주요 인물 양씨 (아들이 공산당에게 죽음) ← 기본 대립 관계 → 최씨 (사위가 국군에게 죽음) ↓ ↓ 점례 (며느리) ←→ 사월 (딸) ↘ (삼각 관계) ↙ 규복 (탈출 공비) 때 : 1951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 곳 : 소백산맥 줄기에 있는 촌락 *도붓장수 :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 [막] 제1막 (무대)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P부락, 그 가운데 비교적 널찍한 마당이 있는 양씨의 집 안팎이 무대로 쓰인다. 무대 우편에 부엌과 방 두개와 헛간이 기역자형으로 구부러진 초가집이 서있다. 지붕은 이미 2년째나 갈아 이지 못해서 잿빛으로 시들어 내려앉았고 흙벽도 군데군데 허물어진 채로 서 있다.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 두 칸 남짓한 마루가 있고 건넌방은 제 4벽.. 2021. 9. 17.
현기영 '순이삼촌' 전문 순이삼촌 현기영 내가 그 얻기 어려운 이틀간의 휴가를 간신히 따내가지고 고향을 찾아간 것은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 제삿날에 때를 맞춘 것이었다. 할머니 탈상(脫喪) 때 내려가보고 지금까지이니 그동안 8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었다. 바쁜 직장 핑계 대고 조부모 제사에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으니 큰아버지나 사촌 길수형은 편지 글발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무던히도 욕을 하고 있을 터였다. 물론 일본에 있는 아버지가 제사 때가 되면 잊지 않고 제숫감 마련에 쓰고도 남아 얼마간 가용에 보탬이 될 만큼 넉넉하게 큰집으로 송금하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선산을 못 돌아보고 기제사에 참례 못하는 죄스러움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요 며칠 전에 큰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만 것이었다. 가족묘지 .. 2021. 8. 1.
이호철 '나상(裸像)' 전문 나상(裸像)* 이호철 *裸 : 옷 벗을 나, 像 : 형상 상 시원한 여름 저녁이었다. 바람이 불고 시커먼 구름 떼가 서편으로 몰려 달리고 있었다. 그 구름이 몰려 쌓이는 먼 서편 하늘 끝에선 이따금 칼날 같은 번갯불이 번쩍이곤 했다. 이편 하늘의 별들은 구름 사이사이에서 이상스레 파릇파릇 빛났다. 달은 구름 더미를 요리조리 헤치고 빠져나왔다가는, 새로 몰려오는 구름 더미에 애처롭게도 휘감기곤 했다. 집집의 지붕들은 싸늘한 빛으로 물들고, 대기에는 차가운 물기가 돌았다. 땅 위엔 차단한 정적이 흘렀다. 철과 나는 베란다 위에 앉아 있었다. 막연한 원시적인 공포같은 소심한 감정에 사로잡혀 둘이 다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철은 먼 하늘가에 시선을 준 채 연방 담배를 피웠다. 이렇게 한 시간쯤 묵묵히 앉았다가 .. 2021.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