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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전문100

김유정 '땡볕' 전문 땡볕 김유정 우람스레 생긴 덕순이는 바른팔로 왼편 소맷자락을 끌어다 콧등의 땀방울을 훑고는 통안 네거리에 와 다리를 딱 멈추었다. 더위에 익어 얼굴이 벌거니 사방을 둘러본다. 중복 허리의 뜨거운 땡볕이라 길 가는 사람은 저편 처마 밑으로만 배앵뱅 돌고 있다. 지면은 번들번들히 달아 자동차가 지날 적마다 숨이 탁 막힐 만치 무더운 먼지를 풍겨 놓는 것이다. 덕순이는 아무리 참아 보아도 자기가 길을 물어 좋을 만치 그렇게 여유 있는 얼굴이 보이지 않음을 알자, 소맷자락으로 또 한번 땀을 훑어본다. 그리고 거북한 표정으로 벙벙히 섰다. 때마침 옆으로 지나는 어린 깍쟁이에게 공손히 손짓을 한다. “얘! 대학병원을 어디루 가니?” “이리루 곧장 가세요!” 덕순이는 어린 깍쟁이가 턱으로 가리킨 대로 그 길을 북으로.. 2021. 2. 26.
이효석 '산' 전문 산 이효석 가 나무하던 손을 쉬고 중실은 발 밑의 깨금나무 포기를 들쳤다. 지천으로 떨어지는 깨금알이 손안에 오르르 들었다. 익을 대로 익은 제철의 열매가 어금니 사이에서 오도독 두 쪽으로 갈라졌다. 돌을 집어던지면 깨금알같이 오도독 깨어질 듯한 맑은 하늘, 물고기 등같이 푸르다. 높게 뜬 조각구름 때가 해변에 뿌려진 조개껍질같이 유난스럽게도 한편에 옹졸봉졸 몰려들 있다. 높은 산등이라 하늘이 가까우련만 마을에서 볼 때와 일반으로 멀다. 구만 리일까 십만 리일까. 골짜기에서의 생각으로는 산기슭에만 오르면 만져질 듯하던 것이 산허리에 나서면 단번에 구만 리를 내빼는 가을 하늘. 산 속의 아침나절은 졸고 있는 짐승같이 막막은 하나 숨결이 은근하다. 휘엿한 산등은 누워 있는 황소의 등어리요, 바람결도 없는데,.. 2021. 2. 26.
신경숙 '감자 먹는 사람들' 전문 감자 먹는 사람들 신경숙 나는 지금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을비는 병원 뜰의 메말라가는 누런 잔디를 싸악, 훑어내리고 있습니다. 가만히 얼굴을 숨기려던 오래된 것들이 저 빗방울에 쓰라리겠습니다. 창문을 슬몃 제껴봅니다. 훅, 밀려드는 찬 공기 속에 섞인 비 냄새가 쏴아, 창 안으로 밀려들어옵니다. 바람에 내 머리칼이 뒤로 휘날려서 갑자기 얼굴이 가볍게 느껴집니다. 가을이 왔군요, 산천에만 말고 이 병원에도. 어떤 젊은이들은 우산 하나에 두 몸을 숨기고 서로의 손이 우산 속에서 맞닿는 감촉에 볼이 발그레해져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겠지요. 같은 시간, 이 병원 저 위층 창가에서는 오래된 환자가 저 가을비를 내다보며, 생각하겠지요. 내가 내년에도 저 뜰을 내다볼 수 있을까? 저 빗속의 단풍이며 저 .. 2021. 2. 26.
전상국 '우리들의 날개' 전문 우리들의 날개 전상국 내가 국민학교 이학년 때 두호가 태어났다. 여덟 살 터울의 동생을 본 것이다. 두호의 출생은 우리 식구들뿐만 아니라 가깝고 먼 친척은 물론 이웃 사람들까지 떠들썩하게 했다. 칠대 독자 집안에 사내아이가 또 하나 태어난 이 경사야말로 결코 예삿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뜻하지 않은 기쁨 뒤에는 으레 그 기쁨이 무엇인가에 의해 허물어져 내릴 것 같은 위구심이 일게 마련이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게 마련이고 드디어는 그 두려움의 뿌리를 뽑아버리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처음의 그 기쁨이 형체도 없이 사라진 뒤이기 예사다. 우리집의 경우가 꼭 그랬다. 그때 아직 정정한 모습으로 살아 계셨던 할머니는 둘째 손자를 본 기쁨으로 동네 노인들 앞에서 덩실덩실 춤까지 추어 보였다. 하.. 2021.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