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먹는 사람들
신경숙
나는 지금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을비는 병원 뜰의 메말라가는 누런 잔디를 싸악, 훑어내리고 있습니다. 가만히 얼굴을 숨기려던 오래된 것들이 저 빗방울에 쓰라리겠습니다. 창문을 슬몃 제껴봅니다. 훅, 밀려드는 찬 공기 속에 섞인 비 냄새가 쏴아, 창 안으로 밀려들어옵니다. 바람에 내 머리칼이 뒤로 휘날려서 갑자기 얼굴이 가볍게 느껴집니다. 가을이 왔군요, 산천에만 말고 이 병원에도. 어떤 젊은이들은 우산 하나에 두 몸을 숨기고 서로의 손이 우산 속에서 맞닿는 감촉에 볼이 발그레해져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겠지요. 같은 시간, 이 병원 저 위층 창가에서는 오래된 환자가 저 가을비를 내다보며, 생각하겠지요. 내가 내년에도 저 뜰을 내다볼 수 있을까? 저 빗속의 단풍이며 저 빗속의 아름드리 나무둥치며 저 빗속의 시계탑이며…… 추억들을.
찬 공기 속에 내맡겨진 얼굴로 비가 스치고 지나갑니다. 어디선가 아련히 기차의 강철바퀴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이따금 모든 생각이 끊기고 적요를 느끼는 순간이면, 창 안과 창 밖의 거리가 몇 천리는 되는 듯이 현실감을 상실할 적이면, 문득 저쪽 모롱이를 돌아 나타나서 쏜살같이 마을을 질주해 사라지는 기차의 강철바퀴 소리에 제 귀가 쩡, 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방금 전처럼요.
비가 멈추면 집에 들어가서 한숨 자고 나올 생각입니다. 아버지는 방금 잠이 드셨고, 한시간 후면 남동생이 아버지 곁에 있기 위하여 이 병원으로 올 것입니다. 나는 비만 그치면 남동생의 얼굴을 보지 않고서라도 집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어째서인지 몸은 너무 피로하고 마음도 몹시 힘겹습니다. 머릿속이 약간 복잡하기도 합니다. 며칠 후에 레코드사 기획자를 만나기로 한 약속이 무산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하고, 정체도 확실치 않은 대상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고여드는가 하면, 돌연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야할 텐데, 하는 생각이 끼여들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내 잠자리로 돌아가서 한숨 자고 나면 나아지겠지요.
멀리서 보면 나는 하나의 실루엣에 지나지 않겠지요. 비가 내리는 병원의 창가에 서 있는 하나의 어두운 실루엣.
이상한 일이지요. 이 병원의 이 창가에 서 있기는 처음인데 나는 언제인가 꼭 이 자리에 이렇게 서서 이렇게 생각에 잠긴 채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아마도 저 비 탓이겠지요. 세상에 이미 내렸던 그 많은 비는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을 창가로 가게 만들었겠지요. 나 또한 과거 속에서 그랬을 테지요. 처음 세상에 내놓은 내 첫 앨범의 참담한 실패로 2집 내는 일이 무산될 때마다, 깨고 싶지 않은 긴 낮잠을 자다가, 스튜디오에 서 있다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거나 책상서랍을 열다가…… 후두두거리는 빗소리에 슬몃 창가로 다가갔던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습니까. 그때 그때마다 무슨 생각인가에 깊게 잠겨 들었겠지요. 생각의 어느 언저리에 스며드는 적요, 그리고 그 적요를 뚫고 철거덕철거덕 달려오는 기차의 강철바퀴 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처지나 혹은 누군가의 처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대부분은 아직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나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며 창가에 서 있었겠지요. 닫혀져 있는 미래가 동반했던 그 야릇한 불안과 바람 같은 자유. 빗소린 아마도 그 두 감정을 동시에 드나들며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을 것입니다. 이상도 한 일이지요. 그럴 때마다 왜 내 귓전엔 모롱이를 돌아서는 기차의 강철바퀴 소리가 들리곤 했던 것인지요. 아주 오래 전에 내 태생지를 떠나올 때 누군가가 내게 말했지요. 기차역까지 바래다줄까? 나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야,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순간, 나는 멈칫했습니다. 내 몸속에서 무슨 메아리를 듣는 듯했지요. 그건 나의 말이 아니라 누군가의 간절한 심정이 내 입을 통해 나가고 있는 것 같았지요. 윤희언니. 나도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내 노래가 누군가의 몸속에 메아리로 들어가 있다가 다시 나와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그런 노래를.
내가 왜 윤희언니에게 이런 편지를 쓰기 시작하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하필 아버지의 병실에서요. 한때 나는 내가 봐도 마치 편지를 쓰기 위해 살고 있는 것처럼 참, 많은 편지를 썼지요. 이 도시로 처음 나왔을 때 더욱 그랬습니다. 창 밖은 낯설고 어디에고 마음 붙일 데가 없어서 내 태생지에 두고 온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지요. 이제는 나를 잊은 사람들에게 부쳤을 그 많은 편지들엔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그때의 내겐 편지 쓰기란 내 몸의 일부 같았어요. 그랬는데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부터 나는 사적이건 공적이건 편지를 못 쓰게 되었습니다. 아니 쓸 수가 없었다고 해야겠지요. 어쩌다가 쓰게 된다고 해도 부칠 수가 없었어요. 노래하는 사람이 되고 난 후에는 편지를 써놓고 다시 읽어보면 이상하게 이게 아닌데, 싶었어요. 노래 같지 않은 글이 거짓말 같았다고나 할까요. 매번 뭔가 지나치다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노래하는 사람이 되기 전엔 그토록 자연스럽던 편지 쓰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렵게 된 까닭은? 지금도 이 편지를 윤희언니에게 부치게 될 것 같진 않습니다. 노래라면 얼마든지 윤희언니 앞에서 부를 수가 있을 텐데.
빗줄기가 약해졌습니다. 집에 가야겠습니다.
어머니는 시골집에서 지금 뭘 하고 계실까요? 땅콩을 캐고 계실까, 아니면 이젠 다 시든 고춧대를 뽑고 계실까? 저 비가 그 마을에도 내린다면 아마도 뒷산의 상수리나무 떡깔나무 잎새들을 우수수 떨어뜨리고 있겠지요. 밤나무 밑엔 이제는 아무도 줍지 않는 밤이 여기저기 수북히 흩어져 쌓여 있을 테고, 밤이면 뒤꼍의 감나무 잎새들이 우우 - 거리며 앞마당으로 쓸려나와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닐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추수를 하고 계시겠지. 벼를 베고 말리고 뒤집고 탈곡하고. 그 지방의 병원에서 이 도시의 병원으로 아버지가 옮겨오실 때 따라나서려는 어머니께 아버진 크게 역정을 내셨지요. 논밭의 가을일을 내버려둘 참이냐고요. 봄 내내 씨뿌려서 여름 내내 한가지 것에 여든여덟 번씩 손을 갖다대고 인자 겨우 열매를 맺었는디 그것들 안 거두고 식구들 죄다 병원에만 있을 거냐구요. 결국 어머닌 눈물을 머금고 뒤처지셨습니다. 자식을 여섯이나 장성시켜놨지만 우리들 중 누구도 추수를 어떻게 하는지를 모릅니다. 설령 할 줄 안다고 해도 이 도시의 건물 안 책상에서 컴퓨터를 치고 전화를 받고 공문을 보내고 받으며 사느라 여러날 계속해야 하는 추수 기간만큼 자리를 비울 수도 없습니다.
칠년 만에 재발한 아버지의 병에 가장 놀란 분은 어머니인데 우린 부친이 쓰러지기 이틀 전에 술을 마셨다는 고모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들 어머닐 쳐다봤지요. 마치 부친의 병을 재발시킨 게 어머니나 된다는 듯이요. 설마 아버지의 병이 오로지 이틀 전에 마신 술 때문이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어디다 대고 원망할 데가 없는 우리들은 어머니이기 때문에 괜한 화를 내는 거지요. 그래요. 어머니이기 때문에. 여섯 명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만 해도 여섯 마디. 그 원망 속엔 부친의 건강에 대한 염려만 실려 있는 건 아니지요. 이 도시의 일상 속에 쌓여 있는 서류, 혹은 공적인 일로 만나야 할 사람들과의 일들이 중환자실에 며칠이고 누워 계시는 부친으로 인해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한 것에 대한 석연찮음이 괜한 어머니에게 쏟아지는 거지요. 왜 술을 마시도록 내버려두세요? 술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나쁘다는 거 뻔히 다 아시면서요. 최근에 집 짓는 일로 부친이 계속 어머니와 의견충돌을 일으켰다는 말을 들으면, 평소에 흔쾌히 집을 새로 짓겠다는 부친의 편을 들지도 않았으면서 또 여섯 명이 어머니께 대들지요. 어머니가 자꾸 아버지 심중을 건드리시깐 화를 끓이셔서 쓰러지신 거예요.
드디어 어머니께서,
너희들은 지난 칠년을 아버지 병을 잊고 살었겄지마는 나는 니 아비가 숨소리만 이상하게 내도 가슴이 철렁헌 세월이었다아,
시며 눈물을 보이고 마실 때 모두들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때도 들었던 것 같네요. 모롱이를 돌아선 기차가 철거덕철거덕 마을을 가로질러가는 강철바퀴 소리를.
칠년 전 한 해에 네 번을 혼절하신 아버지를 혼자 병원에 입원시킨 경험이 있는 어머니는 그때부터 아버지와 단둘이서 그 집에서 밤을 맞는 걸 두려워하셨지요. 한번도 도시에 살아본 적이 없지만, 그때부터 어머닌 이따금 이 도시로 터전을 옮겨오고 싶다는 희망을 내 보이곤 하셨습니다. 이 도시로가 아니라 이 도시를 떠날 수 없는 자식들 곁으로겠지요.
밤에 니 아비의 숨소리가 언덕 올라가드끼 가팔라지면 니 아비 임종을 나 혼자 지키야 허는 거 아닌가 싶은 게 무섭고 싫어야.
그러나 아버진 조금도 그 마을을 떠날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그곳엔 아버지가 돌봐야 할 선산과 문중 전답들이 있는 것입니다. 가산을 정리해 도시의 자식들 곁으로 오고 싶어하는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진 그 마을을 떠나오기는커녕 그곳에 새 집을 짓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집 짓는 일을 반대하셨습니다. 집 지을 경비도 경비지만 어머닌 부친과 단둘이, 그리고 언젠가는 기어이 혼자 그 집에 남게 되실 것이 두려우신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내가 자식을 여섯이나 길러놨는디 뭣 땜에 혼자 니 아비 임종을 지킨단 말이냐,는 어머니 마음속의 완강한 말씀을 읽습니다. 삶은 모를 일이어서, 저러다가 실상은 어머니께서 먼저 돌아가실 수도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모두 이상하게 어머니 건강은 염려를 안합니다. 하긴 원체 옆에서 병치레를 하는 사람이 있다 보면 곁에 있는 사람은 제대로 아프지도 못하는 법이지요.
부친은 변하셨어요. 표정에 마음의 일을 전혀 내비치지 않던 분이 자주 우십니다. 당신의 눈물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얼른 고개를 돌리지요. 가장 많이 고갤 돌려야 하는 상대가 나랍니다. 다른 가족들이 직장 일에 아이들 돌보는 일에 바쁜 탓으로 아무래도 아버지 곁에 자주 있게 되는 사람은 단출한 나이기 때문이지요. 아버지가 울 적이면 나는 그저 들고 있던 물주전자를 내려놓거나, 괜히 소형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거나 그럽니다. 우는 사람 곁에 있기는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힘이 들지요. 더구나 우는 사람이 아버지이다 보니 여러 날에 걸쳐 여러 번 아버지의 눈물을 보건마는 그때마다 매번 당혹스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내가 허둥거리면 아버지는 이제는 주무시는 척하십니다. 얕게 콧소리조차 내시지요. 방금 울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금세 잠이 들겠는가만 나는 아버지가 잠드셨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는 듯이 조심조심하는 테가 역력하게 발소리를 죽이며 문을 가만히 여닫고서 병실 바깥으로 나오곤 합니다.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나는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과거에 쓰라림을 갖게 됩니다. 누가 실루엣으로 서 있는 저 과거를 저버릴 수 있겠어요. 결국 오늘도 내일의 과거일 텐데. 그런데도 때로는 갑옷 같은 과거에 저항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 옷만 벗어버리면 숨통이 트일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누가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지금 병실에 누워 남몰래 울고 있는 아버지가 한때 마을에서 가장 미남인 청년이었다고, 팽나무 밑에서 팔씨름을 하면 누구도 그 힘을 꺾을 수 없다던 청년이었다고요. 검은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위로 넘기고 부릉부릉 오토바이로 산길을 질주하시던 젊은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남동생의 종아리를 쪼아서 피를 내곤 하던 사나운 장닭을 눈 깜박할 새에 잡아올려 목을 비틀 때 아버지 팔뚝에 불끈 치솟던 힘줄도 기억합니다. 큰오빠에게 먹일 오리의 생피를 얻기 위해 희뿌연 새벽에 오리 정수리에 칼을 내리치던 모습도요. 원체 말씀이 없으신 분이었지만, 아아, 소리를 뽑아올리실 적의 아버지의 젊은 날들을 기억하지요. 삼월 삼짓날 연자 날아들고 호접은 편편 나무 나무 속림나 가지꽃 피었다 춘몽을 떨쳐 원산은 암암 근산은 중중 기암은 죽죽 메산이 울어 천리 시내는 청산으로 돌고 이 골몰이 주루루 저 골몰이 퀄퀄 열이 열두골 물이 한데로 합수처 천방자 지방자 얼턱쳐 구비져 방울이 버큼져 건너 병풍속에다 아주 쾅쾅 마주 때려 산이 울렁거려 떠나간다 어디메로 가잔말 아마도 네로구나 요런 경치가 또 있나 - 아버지의 탄력있는 젊은 목에서 뿜어올려지던 그 소리들. 부친의 영혼 속에 스며들어 있는 소리를 누르고 이 삶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건 쑥쑥 발목이 굵어지고 있는 우리 형제들 때문이었을 테지요. 그렇게 좋아하던 낡은 가죽북을 선반에 올려놓았던 건 자식들 앞에선 오로지 현재와 미래에 충실할 수밖에 없어서였겠지요. 그럴 적마저도 탄탄했던 부친의 어깨였는데, 문득 지난 생애의 자취를 한몫에 싹, 문질러버리고 울고 계시는 겁니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느냐? 하시면서요.
과연 목이 쑥 파인 환자복을 입고 초점이 흐린 눈빛으로 겁에 질린 아이처럼 병상에 피로한 몸을 파묻고 있는 저 사람과, 그 옛날 검정 가죽잠바 속에 탄탄한 육체를 숨겨가지고 다니며, 광풍을 못 이기어 너울너울 춤을 춘다네…… 소리를 내지르던 그 사람이 무슨 연결점이 있다는 것이지요?
근년에 부친이 하셨던 일은 조상들의 묘를 손질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성묘 가는 길에 섞이게 되면 나는 매번 선산의 총총한 묘지들에 눈이 시어져 깜박이곤 합니다. 저 묘지의 주인들이 다 누구란 말인지. 부친은 언제부턴가 한해 한해 계획을 세워 선조들의 허름한 묘지를 다듬고 묘비를 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부친이 진짜로 꼭 세우고 싶었던 묘비는 부친의 부친이신 나의 조부의 묘비였습니다. 어느 해에 그러시더군요. 조부의 묘지 앞에 비석을 세우고 싶으나 윗대의 묘지에 묘비가 없는 터에 나의 조부의 묘 앞에만 불쑥 비석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라 난감하다고요. 그때도 저는 알 수가 없더군요. 부친이 아버지를 여읠 때의 나이가 겨우 열한살이었다는데, 그 기억 속에서조차 가물가물할 아버지에게 무슨 정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어 묘비를 세우는 일에 저리 정성이실까? 하고요. 아버지는 당신 부친의 묘 앞에 묘비를 세우기 위해 윗대, 그리고 그 윗대의 묘비부터 세우기 시작했지요. 경비도 수월치 않거니와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맡아 해내야 하는 주변 일거리들도 큰일이어서 어머니와 자주 마찰을 빚었습니다. 하긴, 생각해보세요. 가족 중의 누군가의 결혼식에 들어온 축의금으로 묘비를 세우려는 남편을, 인공수정 주사를 맞히고 열달이나 기다려 얻은 소가 낳은 송아지를 정성들여 길러 내다 판 돈으로 묘비를 세우려는 남편을, 어떤 아내가 매번 흔쾌히 찬성만 하겠는지요. 그러나 부친은 한해 한해 묘비를 세우기 시작해서 작년엔 드디어 부친이 원하셨던 당신의 부친 묘 앞에 묘비를 세우셨지요. 나의 조부와 조모의 묘 앞에요. 크나큰 일을 치러내신듯 부친이 너무 흐뭇해하셔서 나는 묘비에 새겨진 비문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어보았으나 새길 만한 뜻도 없었습니다. 그저 언제 태어나셔서 언제 가셨으며 그들의 자손은 누구누구이다,는 정도였지요. 무엇 때문에 노년을 묘비 세우는 일을 하시며 지내시는지, 아직 젊은 저로서는 의아하기만 할 따름이었지요. 형제들 이름 속에 섞여 있는 제 이름을 바라볼 적에도 그저 무연했습니다. 단 한번 얼굴을 뵌 적도 없는 조부의 묘비에 저렇게 이름을 새겨놓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그저 나는 산길을 타고 올라온 일이 피로하기만 했습니다. 부친은 조부의 묘 아래켠에 당신의 가묘까지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여기가 내 자리다. 그 옆은 당연히 어머니 자리겠지요. 부친은 당신의 가묘를 손바닥으로 짚고 서서 조부의 묘를 쳐다보셨습니다. 어찌나 쓸쓸히 서 계시는지 조부의 묘를 향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도 같았지요. 나는 부친의 뒤에서 털썩 주저앉아 푸르른 산을 다 깎아먹고 있는 수많은 다른 묘지들을 이윽히 바라보는데 또 마음이 적요로워지더니 기차의 강철바퀴 소리. 철거덕철거덕 기차는 쏜살같이 적요를 뚫고, 아버지 뒷모습을 밀어뜨리며 지나갔습니다.
지금 아버진 병실에 안 계십니다. 수면상태를 체크받기 위해 검사실에 들어가셨어요. 오늘밤은 거기서 주무실 겁니다. 아버지께서 종일 누워 계시던 병상에 배를 대고 엎드려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받아온 숙제를 하던 자세입니다. 그땐 방바닥의 따뜻한 온기, 저만큼 상보로 덮어놓은 밥상에서 흘러나오는 김치 냄새 같은 것이 났는데, 지금 내 팔꿈치 밑에서는 아버지의 체취가 은은히 배어나옵니다. 깎아놓은 지 오래 되는 배에서 풍기는 냄새 같기도 하고, 여름날 밥을 퍼담아 부엌에 매달아놓은 밥소쿠릴 열 적에 확, 끼쳐오던 냄새 같기도 합니다. 오늘은 낮에 아버지께서 제 이름을 부르셔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왜 전주 병원에 있을 때에 내려오지 않았느냐고 그러시는 거예요. 나는 잠시 멍해졌어요. 그곳에서 보름이나 함께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시나 봐요. 닷새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으니 당연히 그럴 거고요. 부친은 그곳 중환자실에서 의식은 없는데 팔과 다리를 너무 움직이고 가끔씩 뭔가에 놀란 듯이 벌떡 일어나곤 하셨어요. 중환자실엔 원래 면회시간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 건 언니가 더 잘 알겠죠. 보호자라고 해도 면회시간 외엔 병실에 들어가는 게 금지되어 있는데 아버진 팔과 다리를 침대에 묶어놓고도 너무 움직이셔서 보호자가 곁에서 돌봐드려야 했어요. 가족들이 번갈아 그곳에 드나들곤 했었죠. 나머지 열흘 가량은 일반 병실에 계셨는데, 그때는 사람들도 알아보시고 집안 일 걱정도 하시고 그랬는데, 갑자기 왜 병원에 오지 않았느냐고 물으시네요. 아무래도 당신 자신을 시험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기억력이 어떤 상태인가를 알아보시려 말이죠. 아버지께서 가장 실망하시는 게 바로 그 점입니다. 당신은 잠을 잤는데 병원에 와 있다는 것이었고 그저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닷새가 지났다고 하니 답답하신 거죠. 의식이 없을 때의 일이니 그거야 어쩌겠어요. 아버진 모르시지만 의식이 돌아오고 난 후에도 그러셨어요. 남동생이 종일 함께 있다가 저녁에 들어갔는데 금방 더듬더듬 제게 물으세요. 야, 야…… 근디…… 철이란 놈…… 갸는 어쩌 얼굴을 안 비이냐? 나는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리기도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싫어서 그냥 웃었습니다. 얼마 지나서 이번엔 아버지께서 야속한 사람에게 화를 내듯이 왜 그때 안 풀어줬느냐고 그러세요. 이따금 의식이 돌아오실 때마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침대에 묶어놓은 팔과 다리를 풀어달라고 애원하셨습니다. 너무나 답답하셨던 게지요. 내가 그건 기억나세요? 하고 물었더니, 저 보고 나쁜놈이래요. 그렇게 풀어달라고 애원을 했건만 안 풀어줬다구. 갑자기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저는 풀어드렸어요. 간호사가 풀어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저는 아버지의 그 흐릿한 눈, 그러나 그 간절한 눈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팔과 다리를 한꺼번에 다 풀 순 없었어요. 오른팔을 풀어놓은 다음에 다시 묶고 왼팔을 풀고 왼쪽다리를 풀어놓은 다음에 다시 묶고 오른쪽다리를 풀고 그런 식이었지요. 부친의 손목과 발목은 묶어놓은 붕대로 인해 피가 통하지 않아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움직일 때마다 쇠침대에 부딪쳐서 피멍든 자국이 여러 군데였습니다. 수건을 찬물에 헹궈와서 붓거나 멍든 데에 대고 토닥이다 보면 눈이 시어지곤 했어요. 부친은 원체 말씀을 짧게 하시고 조용한 분이십니다. 조용한 정도가 아니라 어쩌다 고수처럼 가죽북을 앞에 놓고 앉아 장단을 맞추며 수궁가나 심청가의 한 대목을 내뽑으실 때 말고는 말씀을 더듬으시는가 싶을 정도로 그 짧은 말도 어둔하게 하시지요. 그런 분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저토록 몸부림을 치실까, 아버지의 뇌수 속에 떠 있다는 그 움직이는 석회질이 원망스럽곤 했습니다.
부친의 체취가 밴 이 병상에 엎드려 있자니 어렴풋이 내가 왜 하필 윤희언닐 상대로 이 글을 쓰고 있는지가 느껴집니다. 언니가 이 냄새를 알고 있을 거란 생각에서겠지요. 병약한 근친이 풍기는 이 초라하고 가련한 냄새를 윤희언닌 알고 있을 것 같아요. 목덜미…… 탄력이 빠져나간 자리에 검버섯이 핀 얼룩덜룩한 피부와 마주칠 적이면 황황해지는 마음을 어쩐지 윤희언니는 알고 있을 것 같아요. 그냥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바닷가의 불가사리 이야기를 하는군요. 별불가사리는 어린애의 다섯 개 손가락같이 생겼답니다. 그 별 모양의 손바닥으로 여린 어족들을 잡아먹고 다녀서 불가사리를 만나면 여린 어족들은 혼비백산 달아나기에 바쁘답니다. 별 모양의 불가사리의 한쪽을 잘라내고 잘라내도 곧 다시 돋아난다고 하는군요. 마술이 아니라 그것이 불가사리의 특성이라고 설명하는 내레이션에 나는 그때야 텔레비전을 쳐다보았습니다. 오각형의 불가사리는 정말 별 모양 같기도 하고 어린애 손바닥 모양 같기도 하네요. 사진을 찍은 곳은 일본 홋까이도오의 얕은 해안입니다. 불가사리는 물속에 납작하게 엎디어 있습니다. 저 움직이는 한 각을 잘라내도 다시 돋아난단 말이지요? 불가사리는 다섯 개의 각을 하느작거리며 물결을 헤치고 나아갑니다. 세상의 생명 있는 것들마다 각기 다른 독특한 특성이 있겠고, 저 손바닥 같은 것의 한 손가락을 잘라내도 다시 돋아나는 건 우리 인간의 특성이 아니라 불가사리의 특성이겠지만 다시 돋아나는 불가사리의 저 특성이 부러워집니다.
우리가 만난 지도 벌써 꽤 되었네요. 문이는 잘 있는지요? 이제 새학기면 삼학년이 되겠군요. 아직도 일요일이면 성당에 나가겠지요? 프라이드 자동차를 타고 문이와 나들이도 가겠고요. 프라이드 자동차라고 써서 미안해요, 언니. 하지만 늘 언니가 언니의 자동차를 말할 때면 내 프라이드 자동차라고 해서 그래요. 언니는 그랬지요. 내 프라이드 자동차로 집까지 데려다줄까? 내 프라이드 자동차 타고 점심먹으러 갈까? 언니가 직접 언니의 자동차를 두고 내 프라이드 자동차! 하면 이상하게 거기엔 이 세상의 수많은 프라이드 자동차가 언니 거가 되는 것같이 힘이 붙었는데, 내가 프라이드 자동차라고 하니까, 그냥 한 대의 소형 자동차밖에 안되는 것 같네요.
방송국에서 언니가 프로듀서로 있는 음악 프로그램의 리포터로 함께 일할 적에 꼭 윤희언니가 지금의 내 아버지처럼 울곤 했지요. 그때 내가 하는 일은 성악가나 작곡가, 음악가나 피아니스트들을 만나서 그들이 애호하는 클래식 한 곡을 추천받고 왜 그 곡을 좋아하는지 사연을 테이프에 담아와 편집하는 일이었지요. 선곡한 CD를 찾으려고 레코드실에 들어간 언니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아 어쩐 일인가 하고 찾아가보면 언닌 바하나 도니제띠 롯시니나 비제 사이에서 울고 있곤 했어요. CD가 빼곡히 쌓여 있는 칸막이 사이에 눈시울이 붉어진 채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언니를 보면 나는 그냥 돌아서 나오곤 했지요. 스튜디오에서 일요일분 녹음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 언니의 눈이 눈물에 젖고 그걸 감추기 위해 일어서서 창가로 가면 나 또한 의자에서 일어나서 스튜디오 바깥으로 나오곤 했습니다. 그래도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기에 어쩔 수 없이 우는 모습을 나에게 보이게 되면 언니도 내 아버지처럼 얼른 고갤 돌리곤 했죠. 내 꿈이 가수라는 걸 말했을 때 놀라던 언니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가수를 하겠다고? 이후로 나는 언니 앞에서 참 많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언니는 언니의 이모가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내가 노랠 부를 수 있게도 해주었고 실패했지만 첫번째 앨범을 낼 수 있게 음반회사 사람들을 만나게도 해주었습니다. 첫 앨범이 그렇게 죽을 쑤지만 않았다면 지난 일년 동안 언니를 찾지 않는 일 같은 건 없었을 텐데.
오늘, 아버지의 수면상태 결과가 나왔습니다. 수면체크는 연속 사흘간 실행되었지요. 아버지는 밤이 되면 수면실로 실려 들어갔다가 아침에 나오곤 하셨습니다. 아침에 내가 잘 주무셨어요? 하고 물으면 아버진 그저 웃으셨어요. 잠들려고 하면 자꾸 이름을 불러서 깨곤 했다, 하시면서요. 나도 그냥 웃었습니다. 깊은 잠을 주무신다면 아버진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셨겠지요. 수면엔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려면 부친은 당신을 부르는 소릴 듣지 못하셔야 했습니다. 예상대로 아버지 수면상태는 심각한 장애로 나왔습니다. 뇌가 잠을 자지 않는답니다. 그래도 아버진 나는 잤다,고 하십니다. 아마도 뇌는 깨어 있고 피로한 육신만 혼절한 게지요. 잠을 자지 않는 뇌라니? 아버지 뇌는 잠도 자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의사에게서 아버지의 뇌 상태에 대한 설명을 들을 적마다 나는 마치 블랙홀에 빠진 기분이에요. 아버지 뇌수 속엔 석회질이 떠 있답니다. 신경을 쓰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석회질이 움직이고 그 석회질이 움직이게 되면 엄청난 고통과 함께 의식을 잃어버리는 게 아버지가 앓고 있는 병이지요. 다시 깨어날 때까지 아버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세요. 정신이 돌아오면 맨 처음 묻는 말이 내가 왜 여기에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때마다 엄청난 기억력 감퇴가 찾아옵니다. 방금 전의 일도 다 잊어버리지요. 거기다 이제 잠을 자지 않는 뇌라니요.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아버지의 병을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뇌속에 흐르는 물이라니. 그 물속에 떠 있는 석회질이라니. 어쩌다가 그 미로 속에 석회질이? 그 석회질은 저절로 발생한 것일까요?
잠깐만요, 저게 무슨 소리죠. 세탁실에서 누군가 넘어졌나 봐요. 우당탕,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울음소리가 들리네요. 기다려요. 다녀올게요.
잠깐만 다녀온다는 것이 두 시간이나 지나버렸네요.
세탁실에 가보니 누군가 넘어진 게 아니라 옆 병실 환자의 아내되는 사람이 빨래를 하다가 빨래를 내팽개치고는 울고 있었어요. 이 병원 안엔 종교를 가진 환자들을 위해서 절도 있고 성당도 있고 교회도 있어요. 물론 형식만 갖춘 것이지마는요. 부친도 성당에 나가고 계셔서 미사가 있는 날에 아버질 모시고 성당에 내려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였어요. 미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인사를 나누게 된 후론 서로 과도도 빌려 쓰고 책도 바꿔 보고 하는 아주머니죠. 부친은 독실을 쓰고 계셔서 이따금 병실에 혼자 계시게 될 때엔 가끔 들여다봐달라고 부탁도 하곤 하던 분이었어요. 남편이 공사장 인부였는데 사년 전에 건물 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진 목재에 머리를 얻어맞고 뒤로 넘어진 후론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고 해요.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그 아주머니의 남편은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고 먹는 것밖에 모릅니다. 자식들을 보고도 누군가? 하죠. 소변이고 대변이고 가리질 못하니 언제나 보호자가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그 아주머닌 참 밝은 웃음을 잃지 않고 지내시는 분이었어요. 어쩌면 저럴 수 있나, 싶게요. 아까 나는 처음에 그 아주머니가 넘어져서 어디가 다쳐서 우는 줄 알고 왜 그러시냐고, 어딜 다쳤느냐고, 물었어요. 아주머닌 나를 보더니 그나마 눌러 참고 있었던지 눈물을 훅, 터뜨리셨어요. 빨고 있는 건 남편의 속옷이었습니다. 비누칠을 한 자리에 대변 자국이 누렇더군요. 아주머니가 너무도 나를 붙잡고 서럽게 우셔서 그냥 나오질 못하고 아주머니가 붙잡는 대로 붙잡혀서 가만히 있었네요. 지나가던 간호사가 들어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을 때까지 아주머닌 울었어요.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뜻으로 간호사에게 눈짓을 했어요. 다행히 이 병원에 처음 왔을 때 나를 알아보던 간호사였습니다. 다음날 내 음반을 가지고 와선 싸인까지 받아갔는 걸요. 그 몇십장 안 팔린 음반 중의 하나를 그 간호사가 가지고 있을 줄이야. 간호사가 가고 나서야 아주머닌 울음을 그치더군요. 팔 소매로 쓱쓱, 눈물을 닦아내고 아주머니는 다시 똥이 묻은 남편의 속옷에 대고 비누칠을 했습니다.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지난 생이 어땠는지를 안다지요. 물에 불어서 더욱 두터워 보이는 손마디가 꺾이도록 아주머닌 남편의 속옷을 빨래판에 대고 문질렀습니다. 잘 지워지지 않는 대변 자국에 대고 다시 비누칠을 하면서 아주머닌 잠긴 목소리로 내가 죄가 많은 사람이에요, 하더군요. 하느님을 섬기면서도 하느님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구요. 나는 아주머니의 하느님,이라는 소리에 병원 엘리베이터 안에 붙은 문구를 떠올렸습니다. 거기엔 마음이 슬픈 자는 행복하다. 그는 위로받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지요.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그 문구는 울분을 돋우었다가 기쁨을 주었다가 합니다. 마음이 심란한 날은 그래서? 반문하지요. 위로받기 위해 마음이 슬퍼야 한단 말인가, 얄궂게도 미묘한 저항심에 마음이 분란을 일으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날은 그 말씀이 차분하게 가슴에 젖어들기도 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속수무책의 막다른 슬픔에 빠질 때는 그 말 자체가 또 도리없이 비빌 언덕이 되어 가슴을 쓸어내려주기도 합니다. 마음의 조석지변과는 상관없이 그 문구는 언제나 거기에 붙어 있지요. 아주머닌 아이가 둘인데 남편이 저리 되고부터는 큰애는 친정어머니가 둘째아인 시어머니가 맡아 기르고 있대요. 둘째아이가 오늘 생일이라서 얼굴이나 보고 빵이라도 사주고 싶어서 잠시 다녀왔더니, 남편이 바지에 똥을 가득 싸놓고 뭉개고 있더라구요. 똥을 싼 채로 걸어다니고 뛰어다녀서 허벅지고 종아리고 온통 똥 투성이었다고요. 남편의 옷을 벗기고 물을 받아 몸을 씻기는데 죽어라, 차라리 죽어라……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더랍니다. 문지르고 문지른 속옷을 헹구려고 대야에 새 물을 퍼 담으면서 아주머닌 다시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나를 쳐다봤어요. 내가 나쁜년이지요? 나는 난감해져 그냥 서 있기만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도 행동도 없었습니다. 아주머닌 마치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듯이 오늘만 그런 게 아니랍니다, 하는 거예요. 매일매일이 그랬어요. 매일매일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으면…… 하고 바라지요. 그러고는 죽기를 바랐다는 생각이 죄스러워서 성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한답니다. 그것의 반복이었어요. 그래도 지금까진 마음속으로만 그랬어요. 그런데 오늘은요, 나도 모르게 남편을 막 꼬집으면서 큰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죽어라, 차라리 죽어라……구요. 남편은 내 저주도 알아듣지 못하고 물장난을 쳤어요. 하긴 자기는 그러고 있는 게 속편하겄죠. 회복돼봐야 갈 곳은 공사판뿐이니…… 아주머니 눈에선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이제 아무래도 기도도 못할 것 같어요. 아주머닌 빨래하던 손으로 얼굴을 싸안더니 무릎에 푹, 묻고선 또 우셨습니다. 나는 멋쩍게 서 있는 일밖에 할일이 없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말 중에선 그 아주머닐 위로할 말이 없었어요.
오늘밤은 오빠가 병원에서 잔다고 하길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야근이 있다길래 그냥 집으로 가라고 했는데도 열두시가 다 되어 기어이 병원엘 왔더군요. 부친은 오빠와 함께 있는 걸 별로 달가워하질 않아요. 여러 오빠들 중 가장 화를 잘 내는 오빠거든요. 그 사람은 그래요. 너무나 잘하려고 해요. 특히 아버지한테는요. 그러다가 제 마음대로 안되면 화를 내지요. 화내는 이유도 아주 사소해요. 아버지가 식사를 못하시고 계셔서 힘이 없으니까 오빠 생각에는 소변을 그냥 병상에서 소변통에 보았으면 좋겠는데 부친은 그걸 또 끔찍하게 여기거든요. 혼자서 링거병을 들고서 기어이 화장실엘 가십니다. 오빠가 링거병을 들고 따라가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소변기가 있는 데는 절대로 못 들어오게 하시거든요. 그러다보면 혈관에서 피가 흘러요. 링거병을 너무 낮게 든 탓이지요. 그 피를 보고선 오빤 화를 내지요. 제가 좀 따라가면 왜 안된다는 겁니까, 예? 오빠가 화를 내면 비척비척 걸으시던 부친은 정신이 사나워져서 넘어지시죠. 그러면 이제 내가 그에게 화를 냅니다. 오빤 왜 그래? 왜 소릴 질러? 아버진 만사가 다 귀찮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아버리십니다. 그러면 오빤 이제 미안해서 더 화를 내지요. 눈을 질끈 감고 계시는 부친을 향해 늙으신 양반이 자존심만 강하셔가지고 어쩌구저쩌구…… 하지만 사실은 그만큼 부친에게 섬세한 사람은 없죠. 그는 아침마다 아버지께 전화를 드려요. 우리는 시골집 소식의 대부분을 그를 통해 듣죠. 아버지의 관절염이나 어머니의 십이지장궤양이나 모를 심었는지, 벼를 다 베었는지 어쩐지를요. 심지어는 시골집에서 부친과 함께 소를 돌보는 낙천이 아저씨가 집 나간 소식들도 다 그를 통해 듣습니다. 아버진 그런 오빠보고 미친놈이라고 그래요. 여전히 어둔하신 말투로 미친놈이다, 전화비가 얼만데 매일 전화질인지 원. 하지만 내심은 좋으신가봐요. 미친놈이라고 하시면서도 함빡 웃고 계시거든요. 아마도 오빠의 전화질은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그놈의 석회질이 불안해서일 거예요. 그놈의 석회질은 자기가 언제 움직이겠다고 통보를 하질 않거든요. 그런 불안은 빗나갈수록 좋은 것이지만 이번처럼 들어맞을 때도 있죠. 오빠가 출근하기 전에 시골집으로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전화를 안 받더래요. 아침 먹을 시간이라 안 받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생각하고선 출근해서 다시 전화를 하니 낙천이 아저씨가 받아서 아버지께서 새벽에 병원에 실려갔다고 하셨답니다. 고모와 작은아버지께서 앰블런스를 불러 함께 가셨다고요. 읍에서 다시 시로 그리고 다시 이 도시로 옮겨오셨지요. 칠년 만의 재발이었죠. 근본적인 원인을 없애는 치료는 아니긴 했습니다. 석회질이 떠 있는 장소가 뇌수여서 섣불리 칼을 댈 수도 없었습니다. 그동안의 아버지 치료법이란 약을 써서 그놈의 석회질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켜놓는 것이었죠. 사년 동안 꼬박꼬박 약을 드시던 아버지께서 이년 전부턴 조금씩 약을 줄이기 시작해서 일년 전엔 거의 끊다시피 했어요. 약을 끊게 되었을 때 부친의 즐거워하시던 모습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내가 이제 남은 생을 이렇게 약을 한주먹씩 먹으면서 살아야 되느냐고 실망이 대단하셨거든요. 그런데 약을 끊고도 별일없이 일년이 지났으니 아버지는 물론 우리들도 석회질이 사라진 줄 알았네요.
윤희언니.
나는 아무래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근친의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석회질 말고 다른 병으로 자주 병원을 드나드셔도 나는 아버지께서 이 세상을 뜰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해봤어요. 그냥 아프시다,고만 생각했죠. 얼마간 병원에 있다가 퇴원할거야,라고요. 심지어는 칠년 전, 그 한 해에 아버지는 네 번이나 의식을 잃었었죠. 그때도 난 아버지가 돌아가시리란 생각을 해보지 않았어요. 한번 의식을 잃으면 사흘 만에, 나흘 만에 깨어나셨고, 한번은 보름이 지나도록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의사에게서 임종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냥 농담 같았죠. 늘 아버지께 불효했다고 생각하는 화 잘 내는 오빠가 중환자실 문 밖에서 눈물로 밤을 지우새는 날이 여러 날 이어졌어도 나는 염려하지 않았어요. 부친의 의식 없는 날이 길어지자 오빤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중얼거렸었죠. 아버지, 살아만 주세요. 이젠 잘할게요. 살아만 주세요, 살아만 주세요.
그래요, 오빤 그렇게 말했어요. 아버지, 살아만 주세요,라고.
그때 나는 아버지 때문에 우는 성인 남자를 보았지요. 행여 그대로 돌아가실까 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덩치 큰 남자를요. 그때 그랬어요. 이 세상의 많은 남자들 중에 저 사람이 내 오빠라는 것이 믿음직스러웠어요. 비록 울고 있는 연약한 모습이긴 해도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게 된 건 그때부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본래 활달한 사람이었어요. 마을 여자아이들이 공터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면 면도칼로 고무줄을 끊고 달아났고, 밤이면 마을 사내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는데 꼭 밀밭이나 보리밭으로 숨어 뒹굴어서는 다 자란 밀이나 보리들을 쓰러뜨려놓곤 했죠. 뿐인가요. 여름밤이면 마을 여자들이 또랑에서 목욕을 하곤 했는데, 어느날 오빤 사내아이들 몇과 함께 또랑가에 서 있는 고목 팽나무에 미리 올라가 있었어요. 어두워져 목욕 나온 여자들의 벌거벗은 몸을 나무 위에서 훔쳐보자는 심보였죠. 여름밤엔 남자들은 그 또랑가를 지나다니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는데 오빠가 주동이 되어 그걸 깨뜨린 거예요. 나도 그날 엄마랑 또랑물 속에서 첨벙거리고 있었는데 나무 위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처음엔 팽나뭇잎이 밤바람에 스치는 소린가 했지요. 훔쳐보는 자들은 숨을 죽이고 죽여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나 봐요. 결국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고 너무 웃느라 오빤 또랑에 첨벙, 빠졌답니다. 그때 삔 팔이 지금도 삐틀어져 있어요. 그런 소년이 덩치 큰 남자가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실까 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다니. 그때 그렇게 아버지께 회초리질을 당하고도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사람이 말이에요. 여기서 그때란 오빠가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졌던 때를 말합니다. 그땐 고등학교를 시험 쳐서 들어갔잖아요. 오빤 공부를 참 잘했어요. 그런데 우리 태생지의 도청소재지에 있는 고등학교에 시험을 쳤는데 그만 떨어졌지요. 누구도 오빠가 떨어지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오빤 중학교에서 늘 일등이었거든요. 십오등짜리도 합격했는데 누가 일등이었던 오빠가 떨어지리라, 생각했겠어요. 오빤 그때 중학교의 학생회장이었는데 졸업반에게 나눠줄 저금돈을 가지고 가출했지요. 거의 두 달 동안 오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아버진 얼굴이 노랗게 되어 온갖 데를 다 찾아다녔지요. 누가 무주에서 봤다고 하면 무주로 갔고, 누가 남원에서 봤다고 하면 남원으로 갔어요. 후기 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내놓고서 군산으로 김제로 샅샅이 찾으러 다녔지만 아버지는 늘 터벅터벅 혼자 돌아왔죠. 겨울이었고 힘없이 돌아오는 아버지는 꽝꽝 얼어 있곤 했죠. 오빤 아버지가 찾아낸 게 아니라 후기시험 보기 이틀 전 밤, 나흘째 펑펑 내리는 눈속을 뚫고 돌아왔지요. 어쩌면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는지요. 돌아온 오빤 꼭 눈사람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오빠 몸에 쌓인 눈을 털었어요. 눈을 털어놓고 보니 오빤 영락없이 부랑자꼴이었죠. 머리는 텁수룩한 장발이고 눈은 퀭하고 옷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고 발가락은 동상에 걸려 있었어요. 아버지는 오빠가 눈물을 삼키며 꾸역꾸역 밥을 먹는 동안 대나무 회초리를 한다발은 되게 묶었어요. 오빠가 밥을 다 먹자 어머니에게 절대로 따라오지 말라고 하시고선 오빠를 데리고 마을 끝의 빈집으로 갔어요. 불안해진 엄마는 아버지의 말씀을 어기고 그들 부자의 뒤를 따라갔지요. 어머닌 그렇게 노여워한 부친을 본 적이 없으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어린 나도 어머니 치마를 붙잡고서 따라나섰습니다. 어머니가 집에 들어가라고 하면 치마를 놓았다가 조금 잠잠해지면 또 쫓아가서 잡고 졸래졸래 따라갔어요. 귀찮아하는 주인을 따라가는 개를 생각하면 그게 그때의 내 모습이지요. 눈은 여전히 계속 내리고 있었어요. 눈 때문에 마을의 모든 길은 환하디환했지요. 마을을 둘러싼 야산과 논둑과 신작로에 하얀 눈은 다복하게도 쌓였습니다. 아버진 빈집의 큰방 문을 열고 오빠를 먼저 들여보냈어요. 그리고선 아버진 꽤 시간을 들여 신발을 벗더군요. 어머니와 나는 빈집의 대문에 서서 신발을 벗는 아버질 쳐다보고만 있었어요. 빈집의 토방이나 마루에도 눈이 소복했고 마당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지요. 불을 켜지 않아 방 안은 어두웠습니다. 창호지에 아버지가 오빠의 종아리에 회초리를 내리치는 게 그림자졌습니다. 아무 말이 없었어요. 아버지는 내리쳤고 오빠는 맞았어요. 회초리 꺾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지요. 어머니는 빈집의 눈 내리는 마당에 서서 아버지가 오빠의 종아리에 회초리를 내리칠 적마다 몸서릴 쳤지요. 마치 그 회초리가 어머니의 종아리에 닿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나는 어머니나 아버지나 오빠나 다 무서웠습니다. 거지꼴이 되어서 돌아온 아들에게 회초릴 드는 아버지나, 그걸 소리없이 고스란히 맞고 있는 오빠나,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고 보고 있는 어머니가 왜 그렇게 무섭던지요. 아버지가 묶어간 회초리가 반쯤 오빠의 종아리 위에서 부러뜨러졌을 땐 마당에 서 있는 어머니와 나의 검은머리 위에도 소복히 눈이 쌓였습니다. 와아, 하고 눈물을 터뜨린 건 저였습니다. 빈집의 눈밭에 털썩 주저앉아 발을 뻗대고선 죽어라고 울었지요. 한밤중 눈 쌓인 마당에서 발악하듯이 울어대다가 어느 순간 내 기가 넘어갔어요. 정신이 돌아왔을 땐 나는 부랴부랴 집을 향해 뛰는 부친의 등에 엎어져 있었습니다.
칠년 전이면 오빠가 지금의 제 나이였네요.
어쩌면 그때 그도 지금의 나처럼 처음으로 근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해서 그렇게 울었던 것일까요? 삶이 가져다주는 것 중엔 우리가 물리쳐볼 수 없는 절대의 상실이 있다는 것을 그도 그때 처음으로 인지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버질 보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눈물이 고이는 까닭도 그것일까요? 혹시 오빤 그때 중환자실의 아버질 두고서 옛날의 아버지, 그의 종아리에 그토록 모진 회초리질을 하던 부친의 건강한 팔뚝을 그리워한 건 아니었을는지요. 생각해보면 부친과 늘 함께 살았던 것도 아닙니다. 십수년 전에 이 도시로 떠나온 후론 아버진 시골에 우린 이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슨 상징처럼요, 언제나 그곳에 계시는 분이었지 이 세상에 안 계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내게 나쁜 일이 생길 적마다 마음속으로부터 저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별 잘못도 없는 그 사람을 그렇게 저버려서 내가 이런 시련 앞에 섰구나, 생각하죠. 도저히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일들 앞에선 특히 그래요. 내가 그때 그 사람을 저버렸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구나, 생각하면 그때서야 그 납득되지 않는 일이 받아들여지지요. 비겁한 화해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의 증인들을 저 공기 속으로 보내야 하는 일은 내가 저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로는 모자라는지 화해가 되질 않네요. 아마도 그래서겠지요. 내가 이렇게 언니에게 필사적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까닭은 겨우 서른다섯에 남편을 저 공기 속으로 보내야 했던 언니여서겠지요.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는데 언닌 그 절대의 상실 앞에선 무얼 딛고 일어섰는지요?
오늘은 뜻밖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침에 늦잠을 자고 있는데 아주 오래 전에 헤어진 유순이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여덟살에 헤어졌으니 이십년도 넘는 만남이었습니다. 처음 유순이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나는 그가 누군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유순이가 옛날에, 어렸을 적에 말이야, 내촌댁네에서 아기 보던 여자애야, 기억 못하겠니? 했을 때야 아아, 유순이, 했지요. 나는 겨우 유년시절의 한 귀퉁이에서 겨우 유순이를 떠올렸습니다. 학교도 가지 않고 늘 등에 아기를 업고 있던 여자애. 바싹 마른 검은 얼굴. 검정고무신. 붉은 땡감물이 든 셔츠. 내촌댁이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면 그 곁에서 햇볕을 쬐며 끄덕끄덕 졸던 여자애, 그애, 아기를 보던 소녀, 유순이. 수화기 저편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유순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참 이상도 한 일이지요.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반사적으로 현관문에 붙여놓은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쳐다봤습니다. 언젠가 광화문의 판넬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저 감자 먹는 사람들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어요. 왠지 그 사람들이 저를 잡아당기더군요. 단순한 그림이었어요. 그들은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허름한 옷차림으로 낡은 탁자에 둘러앉아 감자를 까먹고 있었죠. 모자를 쓴 남자도 있었고, 팔소매를 약간 접은 여자도 있었습니다. 등잔불 아래의 그 사람들은 거칠고 강한 선으로 묘사되고 있었습니다. 낡은 의복과 울뚝울뚝한 얼굴은 어두웠지만 선량해 보였습니다. 감자를 향해 내밀고 있는 손은 노동에 바싹 야위어 있었지요. 나는 감자 먹는 사람들 복제화를 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현관문에 붙여놓았죠. 현관문을 열고 닫을 적마다 그 그림을 쳐다보면서 생각했어요. 저 사람들의 무엇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을까, 하고요. 그들은 막 노동에서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등잔불을 켜놓은 걸 보면 밤이 아니겠습니까. 등잔불은 낡은 탁자를 온화하게도 비추고 있었습니다. 하루분의 노동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는 것일까? 저녁식사가 저 몇알의 감자일까? 그래도 그들의 표정은 무척 풍부했습니다. 태양 아래의 감자밭이 그들 얼굴 위로 펼쳐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참에 억눌릴 만도 한데, 오히려 그들의 표정은 인간에 대한 깊은 공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눈빛과 손짓과 낡은 의복으로요. 어쩌면 나는 그들이 먹는 것이 알감자라는 것에 혹했는지도 모르지요. 기름에 튀겨서 칩을 만든 것도 아니고, 강판에 갈아서 감자전을 부친 것도 아니고, 마요네즈에 버무려 샐러드를 만든 것도 아니라는 점에 말이에요. 그들이 노동에 단련된 굵은 손으로 덥썩 집어먹고 있는 것이 그저 삶아 그릇에 담아 내놓은 순수한 알감자라는 점에 말이에요. 아무튼 유순이가 수화기 저편에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해올 때까지 나는 현관문에 붙여놓은 감자 먹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저만큼에서 나를 보고 반짝거리고 있는 별빛을 보듯이요. 유순이가 반갑기는 했으나 만나고 어쩌고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 안했어요. 더구나 밤에는 병원에도 가봐야 했고 사실 아주 오랜만에 나야, 하면서 걸려오는 전화가 가끔 있지만 내쪽에서도 그래 너구나, 하고서 서로 잠깐 반가워하고 얼마간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대답하고 그리고 기약없이 언제 한번 보자고 하며 전화를 끊게 되지 당장에 약속해서 만나게 되는 일은 드물잖아요. 그렇게 반가워서 당장 만날 사람들이었으면 그토록 오래 소식을 모르고 지내지도 않았겠죠. 그런데 유순인 당장에 오겠다는 거였어요. 이년 전부터 나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식당에 틀어놓은 라디오의 추억의 노래에서 내가 부른 가을비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답니다. 늘상 라디오는 틀어놓지만 그저 습관적으로 그럴 뿐 귀기울여 노랠 듣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 그날은 노래하는 목소리가 귀에 익은데다 노래가 끝나고 가수이름을 말하는데 나와 이름이 같더라고요. 설마, 나일까 싶어 동네 음반가게에 갔는데 음반 사진을 보니 내가 맞더라고 했어요. 방송국과 음반회사에 대여섯 번 전화를 해서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했습니다. 유순인 그러더군요. 나는 니가 노래하는 사람이 돼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해서 긴가민가했어. 내가 가끔이라도 노랠 듣는 사람이었다면 널 금방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토록 나를 찾았다는 유순일 안 만날 배짱이 내겐 없었습니다. 안양에서 작은 한식당을 한다는 유순이어서 오히려 시간을 빼내기가 나보다도 더 힘들 것 같았는데 유순인 괜찮다고 했어요. 우린 시골에서 유년을 함께 보낸 사람들답게 덕수궁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지요. 나는 서먹해 있는데 유순인 대번에 나를 알아봤어요. 가을날의 덕수궁 안은 쇠락의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잔디는 누렇게 변해 있었고 생쥐가 담장 돌틈 사이에 끼여 새까만 눈동자를 불안스럽게 굴리면서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쇠락의 빛 속에서 오로지 유순이만이 물이 올라 있었습니다. 자주색 투피스에 크림색 블라우스를 받쳐 입은 유순이는 활짝 개어 있었어요. 바싹 마른 상체에 비해 치마밑의 종아리도 아주 탄탄했습니다. 오랫동안 서서 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건강한 종아리였어요. 나의 희멀건하고 말랑말랑한 종아리가 갑자기 부끄러워질 만큼 유순이의 종아리에선 힘이 넘쳐나왔습니다. 세상의 습진 곳을 참 굳세게도 헤치고 걸어나온 힘이 유순이의 종아리에선 느껴졌습니다. 그 종아리에선 앞으로도 어디든지 굳세게 걸어갈 수 있을 것같이 탄력이 넘쳤어요. 덕수궁을 한바퀴 빙 - 돌고서 우린 아름드리 은행나무 밑의 나무의자에 앉았습니다. 유순이가 한순간 조용해지더군요. 나는 의아해져서 유순이를 건너다보았죠. 유순인 울고 있었어요. 이게 꿈이니, 생시니, 하면서요. 시종일관 우리 사이를 아주 어렸을 때 잠깐 함께 지낸 사이로밖에 더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던 나는 유순이의 느닷없는 눈물 앞에 더 서먹해졌죠. 어쩌나, 하는 심정으로 난감해 있는데 유순이가 그러더군요. 지금까지 나를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대요. 유순이가 기억하고 있는 나는 여섯살 유순이에게 삶은 감자를 건네준 나, 다락에 잠을 재워준 나, 거지라고 놀려대는 마을 아이들 속에서 유일하게 제 편이 되어준 나,였어요. 나는 전혀 기억에도 없는 나였지요. 생각 안 나니? 배나무집의 임옥이가 나보고 야, 식모, 너 식모지? 했을 때 넌 임옥이에게그러지 말라고 막 임옥일 쫓아보냈지. 그러지 마, 그러지 마, 하면서 말이야. 너, 나중엔 임옥이한테 돌까지 던져가지고 임옥이 머리에 혹이 생겨가지고 임옥이 엄마한테 혼났었지, 기억 안 나?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나는 유순이가 내촌댁네 연년생 아기들을 늘 등에 업고 있었다는 기억밖에 없어요. 아기를 업고 너무나 있어서 등이 짓무른 유순이만 생각났어요. 그러다가 문득 내촌댁은 참 쌀쌀맞은 아주머니였다는 기억이 나더군요. 내촌댁네 대문은 또랑을 향해 나 있어서 지나가다 보면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였죠. 내촌댁은 걸핏하면 유순이를 쥐어박았죠. 걸핏하면 저녁밥을 주지 않았고, 걸핏하면 밤에 내쫓았어요. 유순이의 자주색 투피스 위로 가을 햇살이 아련하게 젖어드는데 얄궂어라, 내겐 돌연 유순이 머리에 들끓던 흰 서캐가 생각났지, 임옥이와의 일은 생각이 나질 않았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울고 있는 유순이 머리를 쳐다봤어요. 푸른색 핀으로 단정히 묶어 내린 유순이의 숱 많은 검정머리 위로 빛바랜 은행잎이 슬며시 내려앉았습니다. 유순인 눈물을 그치고선 내게 주었던 색동 코고무신도 생각 안 나니? 하고 물었어요. 색동 코고무신이라니? 글쎄…… 색동 코고무신이라니? 유순이 말에 의하면 마을에서 유일하게 내가 색동 코고무신을 신고 있었다는군요. 신고 다녔다기보다는 거의 들고 다녔다는군요. 아끼느라고. 유순이가 서울로 가게 되어 있던 날 저녁이었대요. 내촌댁네 동생이 서울에서 식당을 하는데 유순인 그곳의 잔심부름꾼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고요. 그날 저녁에 또랑에서요, 내가 유순이의 구멍난 검정고무신을 쳐다보더니 내 색동 코고무신을 벗어서 유순이에게 주었다는군요. 그거 신고 서울 가라고요. 넌 어쩌려고 그러냐고 하니까요. 또랑물에 떠내려갔다고 하면 또 사줄 거라고 했대요. 유순이가 처음부터 그 마을에 살았던 건 아닙니다. 유순인 군산에서 왔다던 젓갈장수가 내촌댁네에서 하룻밤 묵어가면서 몰래 두고 간 여섯살 난 여자아이였어요. 이태가 지나도록 그 젓갈장수는 유순일 찾으러 오질 않았죠. 내촌댁네 동생은 유순이에게 식당의 잔심부름을 시키면서 학교에도 보내준 모양이에요. 중학교까지요.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역시 식당에서 만난 남편과 결혼을 했고 이젠 살 만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보리밥을 전문으로 하는 작은 한식집인데 종업원도 둘이나 있다고 했어요. 목이 좋아서 벌이도 괜찮다구요. 그 식당의 삼층에 살림집이 있답니다. 어느날 밤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깼는데 물을 마시고도 잠이 오질 않더래요. 그래서 창가에 서서 셔터를 내린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를 오랫동안 내다보게 되었답니다. 가로수의 가는 잎새가 보도블록에 검은 그림자를 만들면서 바람이 부는 대로 출렁거리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내 얼굴이 떠오르더래요. 너무나 생생하게 내 얼굴이 떠오르더라는군요. 그날부터 나를 한번만 만났으면 했답니다. 왜 그렇게 보고 싶은지 애가 타서 죽겠더랍니다. 내가 보고 싶어서 밤에 자다가도 벌떡 깨어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대요. 처음으로 떠나온 그 마을에 다시 가볼까도 생각했대요. 그런데 자신은 그 마을 이름도 그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도 전혀 기억에 없다는군요. 내게 물었어요. 그 마을이 어느 도에 있고 마을 이름이 뭐며 여기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느냐구요.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대로 자세히 가르쳐주었습니다. 유순인 꼭 한번만 만나봤으면 원이 없을 것만 같던 나를 만났으니 행복하다고 했어요. 나는 유순이가 행복하다는 말을 너무나 분명하게 발음해서 아찔했어요. 행복하다고 그렇게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본 게 너무 오랜만이었거든요. 우리는 그렇게 지난 얘길 하면서 덕수궁에서 두 시간쯤을 보냈습니다. 덕수궁 안의 이 의자 저 의자로 옮겨다니며 팝콘도 사먹고 별것도 아닌 일에 꺄르륵 웃기도 하면서요. 이상도 한 일이지요. 유순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무슨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것처럼 즐거웠어요. 부친이 쓰러지신 후 처음으로 가져보는 평화롭고 온화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유순이와 함께 고궁의 나무의자 밑에 신발을 벗어놓고 춤도 출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블루스나 탭댄스나 그런 것도요. 나는 유순이의 청으로 빛도 못 보고 추억의 노래가 되어버린 내 노래 가을비를 불러주었지요. 유순인 내 목소리가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나 되는 듯이 귀기울여 들어주었습니다. 유순인 내게 이 저물어가는 가을날의 쇠락 속에도 톡 쏘는 향기 같은 게 있다고 말해주려고 나타난 사람 같았지요. 유순이가 실수로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말하지만 않았으면 나는 아직도 꼭 그런 기분에 휩싸여 있겠지요. 어느 순간, 유순이가 이젠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했어요. 병원이라니? 내가 놀라서 되묻자 유순인 당황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병원이라니? 유순인 처음부터 내게 병원 이야긴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았어요. 사실은…… 유순이가 사실은,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만 고궁의 담장으로 시선을 외면해버렸지요. 사실은 아이가 병원에 입원중이랍니다. 세살도 안됐는데 소아당뇨라는군요.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벌써 두 해째라고 했습니다. 어린애의 혈맥을 찾지 못해 이마에 주삿바늘을 꽂아야 할 때마다 무릎이 푹푹 꺾인다고 했어요. 이제 세살인데 그애가 무얼 알겠느냐고 아마도 유순이 자신이 자기도 모르게 지은 죄가 아이에게 간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만 할말을 잃었습니다. 소아당뇨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를 알기에 더욱 할말을 잃었지요. 몇해 전인가 조카가 소모성 질환으로 소아과에 입원했을 때 옆 병상에 누워 있던 아이도 소아당뇨였죠. 어느날 조카에게 들렀는데 올케가 안절부절했어요. 어제까지도 조카의 옆 병상에 누워 있던 어린애가 죽어나가는 걸 보고 마음이 심란해졌던 거죠. 헤어질 때 유순이가 아주 조심스럽게 가방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주더군요. 내가 받지 않으려고 하니까 유순인 꼭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간 다음에 펴보라며 매우 부끄러워하는데 받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지하철을 타고 돌아간다기에 나는 표 끊는 데까지 그녀를 배웅하려 했습니다. 그때 그녀가 말했어요. 그러지 말아. 그건 매우 슬픈 일이야. 그때서야 깨달았지요. 내가 내 태생지를 떠나올 때 누군가에게 했던 말. 내가 뱉은 그 말이 어쩐지 메아리 같고 내 말 같지가 않더니 바로 유순이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까마득히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이제 마을을 떠나려는 색동 코고무신을 손에 쥐고 있는 아기 보는 여자애에게 맨발의 내가 말했지요. 기차역까지 바래다줄까? 그 여자앤 고갤 저었습니다. 아니야.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그렇지요? 보내거나 떠나야 하는 일은 너무 슬픈 일이지요. 그럴밖에 별 도리가 없지마는요. 유순인 도망치듯 지하철역 안으로 사라졌어요. 이제 연락처를 알았으니까 이따금 전화를 하겠다고 하면서요. 그런데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기는 한 걸까?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봉투 속의 것을 꺼내보았더니 구두티켓이었습니다. 은박이로 금강,이라고 찍힌 구두티켓엔 십이만원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에 의사가 병실에 들러 한 시간을 있다가 갔습니다. 아버지의 의식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 의사는 여러가지를 테스트했어요. 자, 백에서 칠을 빼면 몇이지요? 구십삼. 구십삼에서 다시 칠을 빼면은요? 팔십육. 팔십육에서 다시 칠을 빼면은요? 칠십구…… 숫자가 육십으로 내려왔을 때 아버진 아무렇게나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육십에서 칠을 빼면은 몇이죠? 팔십. 아니, 육십에서 칠을 빼면은요? 이십. 아니, 육십에서 칠을 뺀다구요…… 구십…… 그러다가 아버진 화가 나신 것같이 더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끈기를 가지고 다시 시작했습니다. 자,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걸 잘 기억하고 계세요. 비행기, 기차, 연필. 오분 있다가 제가 뭐라고 했는지 물어볼 테니까 그때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보세요. 오분 후. 의사가 물었습니다. 방금 전에 제가 뭐라고 했죠? 아버진 대답이 없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죠? 비…… 행…… 기. 그리고 또? 비…… 행기. 다른 건 기억나지 않으세요? 잘 생각해보세요. 아버진 이젠 비행기조차 잊으셨는지 입을 꾹 다물고 마셨습니다. 댁이 어디시죠? 아버진 눈을 껌벅이시더니 역촌동, 그럽니다. 의사가 제게 물었습니다. 맞습니까? 나는 아니라고 고갤 저었습니다. 역촌동이라니? 그곳은 오빠네가 이 도시에 처음으로 집을 샀던 동네입니다. 그 동넬 떠나온 지가 칠년인데.
의사가 진찰노트의 새 페이지를 펴고 볼펜으로 나비모양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버지보고 따라 그려보라면서 볼펜을 아버지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아버진 겨우 나비의 날개를 그리려다 말고 그리려다 말고만 반복하셨습니다. 여기가 어디인 줄 아세요? 병…… 원. 이 병원 이름을 한번 써보세요. 아버진 소리나는 대로 해성으로원,이라고 쓰셨습니다. 그러고는 나를 힐끗 쳐다보셨습니다. 아버지의 흐릿한 시선 위에 겹쳐지는 불안. 다시 써보세요. 나는 의사에게 속삭였습니다. 아버진 소리나는 대로 글씨를 쓰세요, 아버지 법대로 하면 맞게 쓰신 겁니다. 의사는 그때야, 아, 네…… 하더니 아버질 향해 빙긋 웃었습니다만 이미 아버진 시선을 창 밖으로 옮겨버리고 의사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이 도시로 처음 나왔을 때는 전화가 흔치 않았지요. 아버지가 전화를 하시려면 읍내 우체국까지 가야 했고, 저도 전화를 받으려면 세들어 있는 집 안방으로 가야만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따금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곤 했습니다. 잘 지내느냐. 여기는 다 무고허다. 모쪼로기 몸 건강허고 형지간에 우애있시 지내야 헌다. 쌀 80키로를 화물편으로 보낸다. 차저다가 먹거라…… 1978년 4월 17일. 아버지 씀. 그적에 나는 아버지 씀…… 이라는 글씨를 오래 들여다보곤 했지요. 어째서인지 아버지 씀…… 이라는 그 글자는 그저 글자로 보이질 않고 내 가슴속에 물이랑으로 퍼져들곤 해서 접었다가 펴보고 다시 접었다가 펴보곤 했지요.
윤희언니.
나는 처음엔 언니가 왜 그렇게 남몰래 우는지를 몰랐습니다. 언니가 겨우 서른다섯에 서른일곱의 남편을 여읜 사람이라는 걸 나는 뒤늦게야 알았어요. 비가 내리던 날이었던가요.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인데 뜻밖에 언니가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그 유명한 아리아 아, 나의 에우리디체를 돌려주시오 한 대목을 노래했지요. 절망과 비통이 섞인 오르페오의 노래 한자락을 부르다가 언니가 그랬습니다. 나, 성악과 나온 거 모르지요? 내가 놀라며 나도 성악과 나왔는데요, 했을 때 언니의 휘둥그래졌던 눈. 그런데 왜 가요를 부르려고 해요? 성악이 좋아서 어렵게 성악과에 들어갔지만 성악과는 사년 동안 내가 얼마나 성악에 재능이 없는 사람인가만 일깨워준 셈입니다. 물러서고 물러서다 졸업을 할 즈음엔 무슨 노래든 노래를 부를 수만 있다면 괜찮다고까지 물러나왔죠. 하지만 지금 보세요. 나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마음껏 부르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바보같은 질문이네. 언니는 피식, 웃으며 언니 얘길 했지요. 한때는 비가 많이 내린 밤의 새벽이면 북한산에 올라가곤 했었어요. 북한산은 돌산이잖아요. 비가 내리면 곧장 계곡에 물이 불어 콸콸거리며 아래로 급하게 흘러나와요. 그 계곡 어느 틈에 앉아 목청 연습을 했지요. 집에서 노래하면 마음껏 소릴 못 지를 때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 물소리 속에 섞여서 노래했던 때도 있었어요. 내 소린 콸콸거리며 쏟아져 흘러가는 물소리에 묻혀 있었으므로 그 누구에게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거든요. 그렇게 한 시간쯤 노랠 부르고 내려오는 그런 때도 있었어요. 나는 언니가 성악과 출신이라는 건 정말 몰랐습니다. 언니 얘길 들으며 나는 농담을 했지요. 좋은 성악가가 되려면 덩치가 크고 가슴이 풍만하고 숨소리도 거칠어야 되는데 언닌 자그맣고 가슴도 작아서 성악가가 못된 모양이라구요. 사실 언닌 발소리조차 가만가만 내는 그런 조용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날 언닌 남편 얘길 했지요. 나는 그때껏 언니의 남편이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같은 학교의 작곡과 선배라고 했지요. 그 방면에서 상당한 명성이 있었고 음대 교수이기도 했다고요. 일찍 알고 지냈지만 스물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한 건 시어머니 되는 분이 언니를 탐탁치 않게 여겨서였다지요. 내가 키가 좀 작아? 언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는 듯 피식, 웃었어요. 다른 부부들같이 살아본 건 딱 육개월이었어. 문이를 뱃속에 가졌을 때 남편이 이상하게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운동을 따로 시작한 것도 아니었는데 체중이 한달 사이에 4킬로그램이 빠져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니 위암이었다고 했어요. 언니 앞에 앉아 있던 제 눈앞으로 또 기차가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철거덕철거덕 강철바퀴 소리를 내면서. 아이를 낳기 전에 남편 수술을 먼저 했고, 다행히 경과가 좋아 남편이 나가던 학교에 다시 나갈 수 있을 만큼 회복이 되었는데, 다시 재발되었다고 했지요. 그렇게 오년을 병상의 남편과 함께 살았다고 했어요. 사람들은, 심지어는 그 사람의 어머니조차도 이제 남은 사람 그만 고생시키고 조용히 눈을 감아주었으면 할 정도로, 상황이 힘들었고 상태도 좋지가 않았다구요.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며 살았다구요. 그래도 언니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했어요. 링거를 오래 꽂아 주삿바늘 자국이 수두룩하고 앙상히 메마른 손이었지만 언니가 출근할 적마다 남편은 그 손으로 언니의 손을 잡아주곤 했다고요. 그렇게 손을 잡히고 나면 하루분의 영양분을 공급받은 것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를 버틸 수가 있었다고요. 남편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할 적에도 이상하게 언닌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더라고 했어요. 평소때보다 침착해지기까지 하더라구요. 세상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마저도, 자식의 회생을 믿지 않게 되었을 때, 남편이 언니에게 그랬다지요. 여보, 날 포기하지 말아줘. 당신마저 나를 포기하면 나는 정말 죽을 것 같아. 언니는 단 한 번도 남편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언니는 겨우 서른다섯이었고 결혼한 지 여섯해 동안 남들같이 살아본 건 육개월뿐이라서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요. 성악을 포기하고 그 사람과 사랑을 시작할 때 내 꿈이 뭐였는 줄 알아요? 배시시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는 언니의 얼굴은 해맑았습니다. 고통도 그리움도 지워진 얼굴이었죠. 나중에 나중에 말이에요. 내가 먼저 그 사람 품속에서 죽는 것이었지요. 남편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출근할 때까지도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던 모습이었는데 방송국에 도착하자마자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았다구요. 다시 차를 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갈 때 처음으로 남편과의 작별을 예감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지금 남편과 헤어지려고 가는구나, 싶었다고 했죠. 남편에게 급히 돌아가는 길목, 어느 건널목 앞에서 언니는 남편을 봤다고 했어요. 사람이 건너게 되어 있는 녹색등이 켜지지도 않았는데, 건널목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틈 속에서 남편이 환한 모습으로 손을 내밀며 언니의 차를 향해 가볍게 뛰어왔다구요. 병상에서의 모습이 아니라 언니가 결혼해서 남들같이 살았던 그 육개월 중의 어느 하루 둘이서 강가로 소풍을 가던 날의 모습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언니의 차를 향해 너무나 가볍게 뛰어오는 통에 기겁을 하며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언니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작별인사를 하고가려고 왔어.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바로 그때가 언니 남편의 임종시간이었다지요. 언니는 그랬지요. 그 사람은 갔는데 언니는 출근할 때마다 문득 늘 남편이 누워 있던 곳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가 허망해진 빈손을 거두곤 했다지요. 퇴근해서 문을 열면 버릇대로 남편이 누워 있는 방문을 향해 문이아빠! 하고 부른댔어요. 문이아빠, 저 왔어요,라고요. 들리지 않는 대답. 그 사람이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깜박 잊고는 잠들었나, 싶어 조용히 방문을 열어본다고 했지요. 그러나 텅 빈 침대. 언니가 울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랬지요. 등을 받쳐 일으켜세워 약을 먹이고, 소변을 보게 하기 위해 부축해서 화장실에 데려가는…… 일이 어느새 언니의 삶이 되어 언니의 몸에 배어 있었다고요. 그날 처음으로 언닌 내게 눈물이 고인 눈을 감추지 않았지요. 시선을 내리거나 먼데를 보거나 저쪽으로 비키는 식으로 외면만 했는데. 남편이 죽은 후에야 언니가 그 사람을 지켜주고 있던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언닐 지켜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 했던가요. 병상에서의 모습으로라도 그 사람이 살아 있어주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했던가요.
깊은 밤중에 누군가 자꾸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서 눈을 떴습니다. 창으로 흘러들어온 달빛 속에 아버지가 우두커니 앉아 계셨습니다. 커튼을 친다는 게 그만 내가 깜박했나 봐요. 몸을 일으키려다가 나는 그만 멈칫했습니다. 아버지가 어린애같이 훌쩍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를 깨운 건 아마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때문이 아니라, 훌쩍이는 소리 때문이었나봅니다. 민망하실까 봐, 나는 내가 잠을 깼다는 기척을 보이지 않기 위해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훌쩍이실 때마다 부친의 늙은 어깨가 솟았다가 가라앉곤 했습니다.
야아, 자냐?
분명히 나를 향해 하는 말씀이실 텐데도 나는 안 자요,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왠지 그랬어요. 내가 누워 있는 침대는 간이침대라서 아버지의 병상보다는 훨씬 낮았습니다. 나는 어둠속에서 눈을 뜬 채 자느냐고 물은 병상 위의 아버지를 올려다보고만 있었어요.
나는 내 병이 어쩌서 생겼는지 다 안다. 내가 어쩌서 이렇게 말을 어둔하게 하는 지도 다 알어야.
그래도 나는 가만히 있었어요.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아시면 어째 아버지께서 다시 입을 다물어버리실 것 같았거든요.
이 천지간에…… 아베 어메를 이틀 사이로 다 잃고 나니께는 입이 닫혀버리더라. 아베 어메를 다 묻고 나서는 그만 나도 죽어버리야지 했다. 단 하루도 살어갈 자신이 없드라. 눈을 뜨면 무서운 생각만 왈칵 들고 문을 열고 대문을 보먼 금세 아베 어메가 들어설 것만 같고…… 세상 사람덜이 모두 다 나를 잡아먹을 것만 같고 그만 죽어버리야지 해서 철길로 안 나갔냐. 근디 죽게 되질 않더라. 기차가 오먼 뛰어들어버릴 생각으로 나갔는디 마음과는 달리 멀리서 기찻소리가 들리면 논둑 뒤로 몸을 숨기곤 했어. 기찻길 너머로 멀리 선산이 보이지 않겄냐. 온종일을 그 자리에 앉어서 울었다. 그 어디께 아베 어메가 있겄지 쳐다봄서 온종일을 울었더니만은 목이 쇠어서는 그나마 닫힌 입이 더는 한마디도 안 나오더라.
……
그날 이후로 생각혔지. 기차가 그르케 무서운 걸 보면 그나마 죽기는 다 튼 거고 어찌던지 살아야 쓰겄는디 어찌 살꺼나…… 어찌 살아야 쓸꺼나…… 그르케 일찍 돌아가실 거머는 핵교에나 보내주지…… 니 할베한티 원망도 솟더라. 살았이믄 니 큰아베 될 사람이 셋이나 있었단다. 근디 전염병으로 셋을 다 잃고선 니 할벤 나를 사람 많은 디는 아예 보내덜 않았니라.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천지간에 양친 잃고 혼자 되고 보니 그만 입이 딱 닫히더라. 죽으러 나갔다가 종일 울기만 하니라고 목이고 얼굴이고 팅팅 부어 기찻길에 쓰러져 있으니께는 니 고모가 날 찾으러 와서는 그러더라. 누구라도 너보고 부모 없는 자석이라고 놀리기만 허면 물어뜯어 쥐어뜯어 갈기갈기 찢어놓을 테니 염려 말라고 허더라. 허지만 나는 니 고모허곤 반대로 생각혔다. 나는 인자부텀은 내쪽에서는 먼저 말을 안해야 쓰겄다고 생각혔다. 배운 것도 없고 양친도 없으니 아예 말을 말어야지. 암 말도 않고 살어야지. 암 말도 안허는데 해하지야 않겄지. 그날로 난 암 말도 않고 살었다.
……
너그덜이 생기고부터는 세상이 덜 무섭고 조금은 만만해 비더라. 나는 암 말도 않고 너그덜 가르치는 일로만 살았어야. 누가 시비를 붙여도 속으로 그릿다. 내 자석들이 핵교 다니고 있으니께 너그덜이 나한테 그리봐야 암 소용없다. 한때 집을 버리고 다르케 살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근디 양친 잃고서 그토록이나 무섭든 내 맴이 나를 붙들더라. 내가 다르케 살자고 너그덜을 무섭게 할 수가 없드라. 나는 가진 것은 없으니께 어떡해든 핵교에나 보내서 배울 만큼은 배우게 혀서 지 걸음들을 걷게 해주야지…… 그 생각이 마음조차 다물게 허더라. 입 다물고…… 또 입 다물고 말았던 내 맴이 내 병이다. 그것이 내 머릿속을 그르케 만든 것이여. 너거 어메조차 나한티 어째 그르케 말을 안허냐고 답답히서 살지를 못허겄다고 해도 나는 암 말도 안허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였다. 말이 무서웠지야. 천지간에 양친도 없는 사람이 허는 말을 누가 듣기나 허겄나 싶기도 허더라. 근디 그것이 병이 되야서 돌아왔는갑다…… 안 글면 어쩌서 내가 이렇다냐?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독백이었어요. 조부는 한의원이었답니다. 전쟁이 이 땅을 황폐하게 쓸고 가기 훨씬 전에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답니다. 대 종가 큰형님이 그 병이 들어 조부는 모두가 말리는데도 종가 형님이 돌아가시는 걸 어떻게 앉아서만 보고 있느냐며 약을 지어 찾아갔다가 병을 옮겨왔고 조부를 지켜보던 조모에게 옮겼고 두 분은 이틀 사이로 세상을 뜨셨다는 얘긴 들어서 알고 있었지요. 조부는 돌아가시기 전에 마당으로 나와 집안 여기저기를 빙 둘러보시며, 헐거워진 두레박 끈을 짱짱하게 묶고, 삐틀어진 닭장문 판자를 반듯하게 펴놓고, 방에 들어가 돌아가셨답니다. 어린 아들이 곁에 오지 못하게 단속을 해놓으신 이야기도. 하지만 그때의 어린 부친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세대는 어차피 어렵지 않았습니까. 식민지시대, 전쟁의 시대…… 그 시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양친이 없는 일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들렸지요. 가엾은 아버지…… 나도 모르게 제 뺨을 타고 눈물이…… 그래도 가만 있었네요. 혹시 내가 움직이면 아버지께서 다시 입을 다물어버리실까 봐. 아버진 앉으신 채로 계속 훌쩍이셨어요. 아버진 아무래도 양친을 처음 잃었던 그때, 이 세상이 무섭고 무섭기만 했다던 그때로 돌아가 계신 것 같았어요. 그후의 세월, 부모 없이 전쟁을 치러내야 했던 세월조차도 다 잊어버리고, 암 말 않고 살아낸 그 모질었던 세월들을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부모를 처음 잃었던 그때로 돌아가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래서 그렇게 우리들을 문자의 세계로 내보내는 일에 사력을 다하셨군요. 부친은 우리들이 이 도시에서 졸업을 할 적마다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진을 커다랗게 확대해서 보내라 하시곤 했습니다. 학사모를 쓰고 찍은 우리들의 사진들을 오래된 가족사진틀 밑에 차례대로 죽 - 걸어두고 바라다보셨던 마음속엔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묻어 있기도 했겠군요. 그르케 일찍 돌아가실 거머는 핵교에나 보내주지…… 얼마 지나 부친은 스르르 다시 침상에 누우셨습니다. 나 또한 누워 있는 채로 눈을 감았습니다. 나는 곧 다시 잠들겠지만 수면장애인 부친의 뇌는 이 밤 내내 깨어 있겠지요.
병실 안이 쥐죽은 듯 고요합니다.
누워서 내다보이는 창 밖의 밤 하늘엔 둥그런 달이 빠꼼히 떠 있었습니다. 달을 보면 생각나는 얼굴이 하나 생겼습니다. 이름은 모르고 우는 얼굴만 생각납니다. 지난 일월이었을 거예요. 제 집 근처의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저 달을 보고 달이 떴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무슨 일로인가 귀가가 늦었어요. 집 앞에서 택시를 세우고 막 내리는데 안면있는 음반 기획자를 만났습니다. 이미 전작이 있어 취한 그들은 한잔만 더 하자고 한사코 제 귀가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이미 자정이 다 되어 마땅히 갈 데도 없었어요. 놓고 붙잡고 하는 실랑이 끝에 우리는 근처의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창가에 가서 앉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새벽 2시까진 영업을 하거든요. 그 자리에 가서야 일행 중에 처음 보는 중년의 남자도 끼여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미 취해서 그 중년 남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탁자에 얼굴을 묻고 있었지요. 모두들 취했는데 혼자 말짱한 정신으로 앉아 있기도 뭐하고 해서 창 밖 하늘을 보게 됐는데 둥근달이 떠 있었어요. 그때 내가 무심코 달이 떴네, 웅얼거렸죠. 내 목소린 그다지 크지도 않았기 때문에 음악소리에 또 서로들 떠드는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도 않았을 텐데 탁자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 중년 남자가 누가 불렀기나 한 듯이 스르르 얼굴을 드는 거예요. 아주 피로한 얼굴로 밤 하늘의 둥근달을 한참 멀건히 쳐다보더군요. 그러더니 막 우는 거예요. 나한테 니가 달에 대해서 뭘 아느냐고 손가락질을 해대면서 엉엉. 모두들 느닷없는 그의 울음소리에 당황한 채로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울다가 제게 막 소릴 질렀어요. 니가 달에 대해서 뭘 안다고 달이 떴네, 어쨌네, 하느냐면서요. 당황한 음반 기획자가 그 남자를 달랬지만 남잔 막무가내였어요. 니가 뭘 알아? 니가 뭘 알아? 소릴 버럭버럭 질렀죠.
그러니까 형님. 이름을 왜 달님이라고 지었습니까. 달은 강에 빠지게 되어 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그를 위로하는 투로 보아 그 중년 남자가 내게 왜 그러는지를 알고 있는 듯한 사람은 그 음반 기획자뿐인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잠시 잠잠해 있다가 다시 울다가 그랬어요. 그러고는 또 나를 향해 당신이 부른 노래를 들어보니 사랑에 대해서 꽤나 아는 척 하던데 당신이 알아? 사랑이 뭔지나 알아? 그러는 거예요.
사랑이란 그렇게 말이 많은 게 아니야. 못해준 것만 생각나는 것이 사랑이라구. 그걸 당신이 알기나 해?
그 남자는 또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야 이젠 얼굴도 생각이 안 나. 얼굴이 생각 안 난다구.
나는 달 좀 떴다고 말한 대가로 그 남자에게 한참 시달렸어요. 얼마간 그러더니 그 남잔 엉뚱하게 비난을 퍼부었던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선 잠이 들더군요. 울어서 부은 얼굴이 달님만 해져가지고서요. 나중에 음반 기획자가 그 남자에 대해 해준 얘기는 이런 것이었어요. 그 남잔 홍천강 근처에 마당이 넓은 집을 짓고 산답니다. 남매를 두었는데 여자아이 이름을 달님이라, 사내아이 이름을 해님이라 했답니다. 여자애와 남자애가 다니는 학교는 강 건너에 있었답니다. 학교에 가려면 강변을 질러서 오래 걸어야 했는데 아이들은 임시로 놓은 나무다리를 건너 학교 가기를 좋아했다는군요. 이웃이 없어서 둘이 친구이기도 했던 해님이와 달님이의 놀이터는 거의 반이 그 나무다리였답니다. 다리 가까이에 오면 서로 먼저 다리를 건너기 위해서 막 달려갔다구요. 즐겁기도 했겠지요. 삶의 공포를 모르는 아이들은 하지 말라고 하는 일, 가지 말라고 하는 길, 만나지 말라고 하는 사람, 어른들이 금지시킨 것들을 배경삼아 노는 일을 즐기지요. 하물며 다리와 강물이니 웬만했겠습니까. 손이 닿을 듯 나무다리 아래로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은 아이들의 충분한 놀이터가 되었겠지요. 엎드려서 강물에 손을 담가봤을 것이고 장대에 찌를 달아 낚시를 했을 테지요. 그 아이들에겐 나무다리가 삐걱삐꺽, 위험한 소리를 내며 흔들릴수록 더욱 그 다리를 건너기를 즐겼을 테지요. 달님이가 여덟살이 된 여름이었답니다. 폭우가 쏟아져서 강물이 엄청 불었던 때랍니다. 폭풍까지 불어대서 강물이 요동을 치곤 했답니다. 학교에 보내면서 강변으로 돌아가라고 나무다리를 건너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목으로 나무다리를 택했답니다. 둘이서 손을 붙잡고 나무다리를 반쯤 건넜을 때였대요. 강풍에 높아진 물결이 두 아이를 똘똘 말아 강물 속으로 휩쓸어가버렸답니다. 엄청나게 불어 있던 강물은 눈 깜박할 사이에 어린아이 둘을 삼켜버렸다구요. 다행히 남자앤 건져냈는데 급류에 쓸려간 여자앤 찾아낼 수가 없었다구요. 홍천강에서 북한강까지를 몇날 며칠이나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강물에 빠진 달님이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는군요. 달님이가 강에 쓸려내려가지 않았다면 지금 열여섯살이랍니다. 달님이 엄마는 아직도 달이 뜨는 밤이면 집안의 불을 다 끄고 달빛이 온전히 집안으로 스며들어오게 한답니다. 우리 달님이가 왔네, 하면서요.
못해준 것만 생각나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여태껏 사랑도 한번 제대로 못해본 셈입니다.
오늘은 지하철에서 내려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서 이 병원까지 왔습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가을햇살은 참, 따스한데 도로 양변에 가볍게 피어 있던 코스모스들은 사그러들고 없더군요. 꽃을 피웠던 흔적으로 코스모스의 가는 허리가 휘어진 채 쓰러져들 있었습니다. 이 병원은 도시의 외곽에 있어서 집에서 병원을 향해 출발할 때마다 아주 먼 곳에 가는 기분이지요. 집에서 택시를 타고 나와 사오십분 정도 지하철을 타고 다시 택시를 타야 합니다. 병원에 들어서면 여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높은 빌딩들, 빽빽한 자동차들이 반짝거리며 서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신문사와 인쇄소와 중앙우체국과 대형 음반가게와 사차선 도로와 시청이 있다는 것이, 박물관과 스튜디오와 광장과 고궁이 있다는 것이, 그 안에서 누군가 바쁘게 팩스를 보내고 가사를 쓰고, CD 속지를 찍어내고,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꿈결만 같지요. 지하철에서 내리기만 하면 병원으로 가는 택시는 인도를 따라 길다랗게 줄을 서고 있습니다. 오늘 그 택시들을 지나 나를 걷게 한 건 아마도 저 사위어가는 가을햇살이었겠지요. 나의 태생지, 추수가 끝난 들판도 텅 비었을 겁니다. 밤마다 빈 들판에 들쥐들만이 벼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발목을 삐면서도 양식을 찾아 헤매다니겠지요. 벌써 겨울의 냉기가 느껴지는 한낮의 숲속에선 다람쥐들이 상수리며 도토리들을 오목한 곳에 수북히 물어다놓고 있겠지요. 그렇게 세상은 다시 한번 동면에 들겠지요. 때로는 제가 차디찬 설원을 헤매고 다니는 승냥이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찬달을 보고 울부짖는 허기진 승냥이 말이지요. 삶을 향한 허기의 구멍이 바다만 해서 달마저 먹어치우려고 사납게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는 굶주린 승냥이. 설령, 그 달을 먹어치운다 해서 이 허기의 구멍이 메워지겠는지요. 차디찬 달을 먹어치운 대가로 등뼈나 다리가 휜 채로 설원에 절뚝이는 발자국을 찍으며 불안한 눈동자를 희번덕대면서 어슬렁거리겠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병실에 들어서면 나는 얌전한 승냥이가 됩니다. 마치 나는 오래전부터 이 병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곳에서 긴 낮잠을 자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이 병실에선 이따금 생각하지요. 한 사람의 일생으로부터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요.
무엇일까요? 사진틀 속에서 노랗게 바래져가는 가족사진? 가슴속에 간직된 사랑의 얼굴? 돌보는 이 없는 무덤? 살면서 의지해왔던 친구들의 주소나 몇개의 전화번호들? 그리고 언니에겐 문이? 나에겐 나의 음반? 나는 그만 물끄럼해져서 창에 이마를 갖다대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내 가슴속을 잠식하기 시작한 이 마음시림을 투명하게 걷어내주진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미 누군가의 존재를 잊었듯이, 나의 존재를 기억할 나의 증인들도 사라지겠죠. 나의 아버지를 시작으로 해서 이제 나는 끝도 없이 나의 증인들을 잃어갈 것입니다. 가을이 끝나가는 저 하늘에 잠시 모였다가 흩어지는 저 구름처럼,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겠죠. 존재의 無. 그러나 끝없는 순환. 한편에서 나의 증인들은 사라지고 다른 한편에서 나의 증인들은 태어나고…… 생의 갑옷은 철갑옷인가 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해지는 건 또 어인 까닭인지.
병원에 당도해 아버지를 모시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지난 어느날 밤에 문득 일어나 앉아 훌쩍이셨던 일을 아버진 제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봅니다. 이젠 모든 정밀검사가 끝났어요.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온다는군요. 일주일 후. 그때면 알 수 있을까요? 칠년 동안 잠잠하던 그 석회질이 왜 다시 움직였는지를? 이제 내일이면 아버진 오빠 집으로 우선 퇴원하실 겁니다. 그 다음의 일은 일주일 후에 다시 생각해봐야 되겠지요. 그저 병원 뜰을 조금 걷다 들어올 양이었는데 아버께서 자꾸만 저만큼만 더, 저만큼만 더…… 하시는 바람에 꽤나 먼 걸음이 되었습니다. 테니스 코트를 지나 좁다랗게 난 맨땅을 더 걸어들어갔더니 고구마밭이 나오더군요. 병원 안에 고구마밭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요. 아니, 그 아주머니가 병원 공터에 고구마를 심었겠지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어쩌면 그 고구마밭엔 병원 별관이 들어서거나 그러겠지요. 아버진 그 고구마밭에 이르러서야 저만큼만 더…… 를 끝내셨습니다. 아주머니 한 분이 고구마를 캐고 있었어요. 고구마순을 우두둑 잡아당긴 후에 호미로 땅을 파서 고구마를 캐는 아주머닐 보고 아버진 어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고구마는 비가 온 다음에 캐야 쓰는디요. 나는 부친의 팔을 붙잡고 서서는 감자도요, 실없이 덧붙였습니다. 그런 일은 상관 말구 아저씬 아프지나 말아요. 늙으면 그저 건강하게 있어주는 것이 자식들 도와주는 것이라구요. 고구마를 캐는 아주머닌 내 얼굴과 부친의 얼굴을 번갈아 보시더니 흙 묻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가을햇살을 가리셨습니다. 우린 고구마나 감자를 비가 온 뒤에 캤지요. 찬비가 그친 후 밭에 가서 감자나 고구마순을 잡아당기면 뿌리에 감자나 고구마가 주렁주렁 달려나왔지요. 감자 뿌리에 쑥쑥 딸려나오는 감자 캐는 일은 얼마나 풍요롭고 재미있던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맨발이 되어 감자밭을 휘젓고 다니곤 했습니다. 고구마나 감자는 푸지고 푸져서 한 고랑만 캐도 수북히 쌓였습니다. 캐도 캐도 또 나오고 또 나오고 그랬지요. 다 캤나 보다 해도 밭을 갈 적에 뒤집어지는 흙 속에 고구마나 감자는 또 나오곤 했습니다. 아버진 고구마 캐는 아주머니 곁에서 한참을 서성서성거렸습니다. 바람이 차다고 그만 들어가자고 해도 고구마밭 주위를 빙빙 도셨습니다. 아마도 부친은 당신이 직접 고구마를 캐보고 싶으셨던 게지요. 방금 전에 비는 내리지 않았어도 어쩐지 고구마 줄기를 잡아당기면 예전처럼 고구마가 주렁주렁 딸려나올 것만 같았던 게지요. 내 팔에 이끌려 고구마밭으로 들어가는 좁다란 맨땅을 다시 걸어나올 때도 아버진 자꾸만 고구마밭을 향해 몸을 돌리시곤 했습니다. 병실로 돌아오자 피로하셨던지 잠시 누워 계시던 부친은 시골의 어머니께 전화를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벨이 울리고 어머니 목소릴 확인하고 아버지께 수화기를 건네드렸더니 어머니를 향한 부친의 첫마디는,
고구마…… 고구마는 캤는가?
였습니다. 부친은 수화기를 귀에 바싹 대고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안 캤이믄 기냥 놔두소. 내가 내리가서 캘 테니께는.
나는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려다 말고 아버지의 귀를 물끄러미 바라봤습니다. 부친의 야윈 귀가 멀리 어머니에게 무슨 말씀인가를 하고 계신 것 같았어요. 나는 그 말씀을 들어보려고 주스병이 기울어지는지도 모르고 내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버지의 귀가 어머니께 말씀하시는군요. 나는 오늘같이 가을볕이 좋은 날, 밭에서 고구마를 캐다가 그렇게 갈라네. 늦봄 볕이 따사로운 날 감자를 캐다가 가만히.
두서없는 글이 길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글을 부치기나 할는지요. 그만 안녕,이라고 쓰려니까 어디선가 또 기차의 강철바퀴 소리가 들립니다. 철거덕철거덕 그 무서운 소리에 그만 논둑 뒤로 몸을 숨기는 소년도 어른거립니다. 그래도 오늘은 내 마음이 평화로운가 봅니다. 고구마밭에서 돌아오느라 엘리베이터를 탔을 적에 마음이 슬픈 자는 행복하다. 그는 위로받을 것이다,라는 그 문구가 차분히 가슴에 젖어드는 걸 보니 말이지요. 문구가 약간 삐틀어져 있어서 손을 뻗어 바로 해놓기까지 했습니다.
이젠 언니도 그때처럼 그렇게 자주 울진 않겠지요?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 야채며 김밥이며 과일을 담을 수 있는 야외용 대바구니는 구했어요? 언젠가 언니와 함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는데 그 드라마 속의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소풍을 가는 장면이 나왔지요. 노란 챙이 달린 모자를 거꾸로 쓰고 함빡 웃음을 짓는 아이를 앞세우고 시종 즐거워하는 아내와 남편을 보면서 괜히 내 가슴이 서걱거렸어요. 나도 모르게 아빠를 잃은 문이를 생각했고, 나도 모르게 남편을 잃은 언니를 생각했던 게지요. 잠시, 어색해지려는데 뜻밖에 언니가 밝은 목소리로 그랬지요.
저거 너무 예쁘지 않니?
언니가 가리킨 저거는 소풍 가는 가족 중에서 무릎길이의 연두색 에이라인 원피스 위에 같은 색 시폰을 걸친 아내가 들고 있던 대바구니였습니다. 내가 보기엔 별로 예쁘지도 않았어요. 그저 평범한 손잡이가 달린 대바구니였지요. 아마 그 안에는 딸기를 재서 담은 찬합이나, 김밥을 싸서 담은 도시락, 그리고 과도며 땀 닦을 타올, 여분의 스타킹이나 아이의 또다른 간식이 담겨져 있었겠지요. 나는 그저 그런 대바구니를 두고 얼른 예쁘다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죠. 소풍 가는 장면이 화면에 잡혔을 적부터 내가 이미 문이나 언니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을 상실을 감지하고 있는데, 당사자인 언니가 아무렇지도 않았을 리가 없었거든요. 아마도 그래서 언니도 뜻밖의 그 대바구니 얘기를 꺼냈던 게지요. 그저 그런 대바구니를 참, 예쁘다고 칭찬했겠지요. 시장에 나가면 저거와 비슷한 걸 하나 사야겠다고도 했지요. 그래서 도시락을 싸서 바구니에 담아 문이와 함께 고궁에 가야겠다고요. 그래요. 그때만 해도 눈물 대신 까닭없이 대바구니 타령을 할 수는 있었으니까, 그로부터 세월이 일년이 더 흘렀으니까, 이제는 많이 단련이 되었겠지요. 설마, 아직까지 출근할 적이면 남편이 누워 있던 침대를 향해 손을 내밀진 않겠지요? 설마, 아직까지 퇴근해 돌아와 현관문을 따고서는 문이아빠 나, 왔어요? 하진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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