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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전문

구효서 '카프카를 읽는 밤' 전문

by 열공햐 202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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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를 읽는 밤

-구효서

 

그녀는 아주 밝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패션 용어를 빌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이트 핑크/플레어 라인 실루엣을 걸치고 있었다고 해야 맞겠다.

지루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용어는 내가 그녀와 작별하고 대략 32시간정도 경과한 뒤 광주 고속버스 터미널 구내매점에서 산, 매일경제 신문사 발행 <시티 라이프>에서 발견했다.

<시티 라이프>를 산 건 거의 충동적인 동기에서였다. 표4에 장 콕토의 연필 데생인 듯한 카프카 초상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것이다. 을지서적 주식회사의 기업 광고였다. 서울행 버스에 올라 좌석을 확인하고, 카드를 섞듯 타르륵 책을 넘기다 우연히 패션 정보란을 보았다. 색깔만 조금 달랐을 뿐 그녀가 입었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옷을 옥소리라는 탤런트가 입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x라인 실루엣이라고도 부른다. 허리가 잘룩하게 들어가는 디자인으로, 몸의 곡선을 잘 살려주는 스타일. 날씬한 체형이 아니면 소화하기 어려우나 키가 크고 살이 찐 사람에게도 잘 응용하면 상쾌해 보인다. 부드럽고 여성답다.

그녀는 날씬한 체형도 아니었고, 키가 크고 살이 쪄 보이지도 않았다. 남의 눈에 띌 만한 특징이 없는, 그야말로 보통의 체구였다. 인류사 박물관 같은데 세워 놓고 '보통의 체구' 라는 팻말을 붙이기에 딱 알맞은, 그런 체구였다. 그럼에도 내가 그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건 바로 그 옷 때문이었다. 아닌게아니라 그녀의 옷은 상쾌해 보였으니까.

상쾌한 날의 상쾌한 옷차림이었다면 뭐 그리 돋보일 게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날은 때늦은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의 밝은 핑크빛 원피스.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떨어져 내리는 삼거리에 그녀는 서 있었다.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윗저고리 깃을 정수리까지 올리고 빗물로 번들거리는 아스팔트를 가로질렀고, 우산을 쓴 사람들도 바쁜 걸음으로 그녀 곁을 지나쳤다.

그녀 발치의 웃자란 풀줄기들이 길 가운데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차량의 왕래가 빈번하지 않은 곳이었다. 얼핏 봐서는 그녀가 사람을 기다리는 건지, 지나가는 자동차를 기다리는 건지 어쩐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만일 자동차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녀는 아마 신고 있는 신발을 다 적시고 무릎 밑의 스커트 자락까지 모두 적셔야 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한 시간 동안 기다려 봤자 이곳에서는 겨우 두 대 정도의 자동차밖에 구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틀 먼저 도착한 나로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난 우산을 쓰고 있었고, 반바지에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고, 무엇보다 빗길을 걷는 일밖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처럼 뛰거나 총총걸음 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내눈에 띈 까닭도 어쩌면 그녀가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 내 행보에 특별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적 시적 걷다 보면 시선마저 느긋해져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보아낼 수 있는 거니까.

마침 그때 봉고 한 대가 빗물을 튀기며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갔다.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그녀는 멈칫거리며 주위를 산만하게 두리번거렸다. 바람이 불면서 비는 점점 굵어졌고, 그녀 뒤의 어둔 숲이 서서히 몸을 뒤채기 시작했다. 바둑알 만한 개구리들이 숲에서 쏟아져 나와 아스팔트 위로 뛰어올랐다. 궂은 날의 산촌은 쉬 어둡게 마련이었다.

나는 그녀가 누군가에게 무슨 말인가를 물으려 한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그러나 뜸하게 오가는 사람들조차 비 때문에 지나치게 발걸음이 빨랐고, 그에 비해 그녀의 시도는 안쓰러울 만큼 미약했다. 사람이 다가오면 그녀는 결심을 한 듯 입술에 침을 바르고는, 발바닥을 10센티 가량 달싹거렸다. 어서 비를 그으려고 뜀걸음질 치는 사람들에겐 그녀의 미세한 동작 따위가 눈에 띌 리 만무였다.

그녀의 눈빛과 멈칫거림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이쪽에서 먼저 '뭘 도와 드릴까요' 라는 식으로 말을 걸어주기 전에는, 날이 저물도록 그녀는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못할 것 같았다. 저 사람은 말을 걸기에 충분할 정도로 느리게 걷는구나, 라고 그녀가 알아차릴 수 있도록, 나는 일부러 슬리퍼 뒤축을 끌며 빗길을 걸었다. 일기예보를 미처 듣지 못했던 걸까. 비 오는 날 저런 옷차림이라니. 그렇담 그녀가 들고 있는 멋진 우산은 또 뭐란 말인가. 아니 아니, 난 무엇보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의 색깔이 낯설단 말야. 저와 비슷한 색깔의 옷은 물론 많이 봐왔지만, 어쨌든 저건 굉장히 낯선 색상이거든. 단순히 밝은 분홍이라고만은 할 수 없어. 광택 소재가 섞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사람까지 낯설어 보이잖아.

그녀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난 나도 모를 묘한 기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고, 주위에선 츱츱한 냉기가 피어오르고, 날은 점점 어두워진다. 숲은 검은머리를 풀어헤치며 바람에 흔들리고, 인적 드문 산 마을의 젖은 풀 위에 낯선 입성을 몸에 걸친 묘령의 한 여인. 길을 잃고 홀로 서 있다. 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이라곤 그녀뿐이었다.

걸음을 멈출 수 없었으므로 그녀 곁을 지나쳤다. 잔뜩 분을 발랐나 싶었는데 원래 피부가 그렇게 흰 모양이었다. 스물 일곱쯤 됐을까. 몇 가닥의 붉고 가는 실핏줄이 그녀의 한쪽 뺨에 드러나 있었다. 내 눈은 그것까지를 보았다. 피부가 흰 것도 그냥 흰 게 아니라, 옷의 색상이 그렇듯 아주 낯선 흰색이었다.

"저......"

그녀가 입을 떼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치려 했었다.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다가가 '무얼 도와드릴까요?' 라고 말하는 건 내 방식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나를 불러 놓고 몇 초 더 머뭇거렸다. 나는 그녀의 분홍색 옷과 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쪽이 대흥사로 가는......"

말을 무척 아끼는 여자로구나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내가 묵고 있는 모텔이 바로 대흥사 입구에 있었으므로 대흥사라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녀는 15미터남짓 거리를 두고 내뒤를 따라왔는데, 무척 느린 걸음이었다. 숙소 입구를 들어서며 슬쩍 돌아봤을 때는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70미터쯤 벌어져 있었다. 그녀의 작은 모습은 빗줄기에 가리워져 얼굴이며 옷매무시의 윤곽이 분명치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옷을 벗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해남의 친구가 준 창부타령 카세트 테이프를 3분 동안 듣다 꺼버렸다. 바르가스 요사를 열두 페이지 읽고,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저녁으로 전복죽을 먹었다. 지독하게 맛이 없었으나, 두터운 사기그릇에 반 넘어 담긴 전복죽을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집을 떠나면 뭐든지 끝까지 먹어치우는 게 나였다.

계곡 쪽으로 큰 창문을 낸 2층 바에 들러 홍차를 마셨다. 아무리 봐도 모텔에서 가장 쓸 만한 곳은 그곳뿐인 것 같았다. 마지막 한 모금을 남겨 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가 다 탈 때까지 어두워져가는 계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시 방으로 올라온 나는 소파에 누워 전날 그리다 만 대흥사 건물 배치도를 연필로 손질하기 시작했다. 실제론 단층인 장경각을 목탑형식으로 개조하고, 그곳 5층에다 사경실을 앉혔다. 사경실 남쪽으로 작은 창을 하나 내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다. 여백에다 이곳 창문으로 두 사람이 떨어져 죽는다, 라고 메모한 뒤 잠속으로 떨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니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아내였다.

"석 달 거르면 연재를 끊을 수도 있대요."

나는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대흥사 건물 배치도를 발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곧 된다구 해. 다 됐다구 해."

아내는 내 양말과 속옷 걱정을 했고, 나는 아이들 잘 노느냐고 물었다. 언제 올라올 거냐고 아내는 다시 물었다. 곧 올라간다고 대답했지만 아내가 믿지 않길 바랐다.

"병원엔 가요?"

생각났다는 듯 아내가 물었고,

"병원? 응, 가, 봤어." 라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내 귀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적어도 의사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처음엔 중이염이었고, 나중엔 고막도 붓고 어쩌고 했는데 꾸준히 치료를 해서 오래 전에 다 나았다. 의사는 분명한 어조로 더 이상 나오실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의사의 말이었다. 난 아직도 오른쪽 귀가 대단히 불편한 것이다.

해마다 장마철만 되면 귓속이 눅눅해지고 곰팡이가 끼고 하다가 중이염이 됐다. 중이염을 자가 진단하는 내 방식이란 간단하다. 어느날 갑자기 내 목소리가 낯설어지는 것이다. 내 목구멍을 통해 발화된 음성이 전혀 타인의 것처럼 느껴지면 영락없는 중이염이었다.

이비인후과에 가서 귀를 소독하고, 자외선인지 적외선인지 하는 걸 잠깐 쏘이고, 엉덩이에 아주 뻐근한 주사를 맞으면 곧 나았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장마철도 아닌데 재발했고, 통 낫지를 않았다. 3일이면 충분했던 것이 올해는 석 달을 넘게 다녀도 좋아지질 않았다.

해남 친구가 두고 간 르망 승용차를 몰고 모텔을 나섰다. 당초에는 대흥사에 들러 배치도를 마저 완성할 생각이었으나, 큰길에 들어서자 맘이 바뀌었다. 근처에 김영랑 생가가 있다는 얘기를 언젠가 해남 친구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낯선 지역이었으나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지도에만 의지해 영랑의 생가를 찾기로 했다. 될 수 있으면 대흥사니 배치도니 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대흥사를 공간배경으로 하는 내 만신창이 된 연재소설에서 떠나 있고 싶었다.

산에서 내려오자 곧장 들판이 펼쳐졌다. 백미러로 바라보니 금방 내가 떠난 두륜산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광활한 지평선이 보일 뿐이었다. 산 속에선 모든 게 산이더니, 들판에선 모든 게 들이었다.

차 안에 널려 있는 이런저런 테이프를 들었다. 창부타령과 육자배기가 있었고,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의 운명이 있었고, 셰니스와 조정현이 있었다. 그런 것 말고도 차 안에는 곡명을 알 수 없는 테이프들이 두어 말쯤 들어 있었다.

해남 친구의 집에 가도 그런 것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다.엘피와 시디, 카세트 테이프와 비디오 테이프, 연주회 팜플렛, 책, 김지하의 묵난,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는 녹차들. 그런 것들이 32평 아파트에 수북히 쌓여 있다.

해남읍의 어느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한때 나와 같은 부대에 근무했었다. 외출증을 끊어 가지고 위수지역을 이탈해 서울까지 달려가 무슨 연주횐가를 듣고 오는 바람에, 그는 밤새도록 손을 뒤로 묶이고 가슴으로 연병장을 도는, 이른바 올챙이 포복을 해야만 했고, 나는 그를 감시했었다. 이튿날 아침 그는 나에게 <백년 동안의 고독>이란 책을 주었다. 마르케스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4년 전이었다.

그 책을 나한테 준 이유를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그날 연주회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거의 반 년 뒤에나 알 수 있었을 정도로, 그는 말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런 그에게 이것저것 묻지 않는다.

말이 없지만 그는 커다란 눈으로 사람이나 세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보는 것 같다. 그곳에 좀 내려가야겠다, 고 내가 전화를 하면 그는 나 자신이 해놓은 것처럼 예약을 하고 일정을 잡아놓는다. 이번에도 나는 대흥사엘 가야겠다고 그에게 말하지 않았으나, 그는 다 알고 대흥사 밑에다 숙소를 정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두 말이 넘는 테이프를 승용차에 싣고 다니거나, 영화나 연주회 실황 같은 걸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녹화하거나, 기를 쓰고 절판된 책을 사들이거나, 중요한 문화 행사가 있을 적마다 서울에 홍길동처럼 나타나거나 하는 그를 볼라치면, 왠지 나는 그것들을 그가 즐기는 게 아니라, 삶을 견디는 그 나름의 방식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영랑 생가에 다녀오는 내 머릿속은 온통 빨갰다. 대문과 마당과 마루, 지붕, 기둥, 벽, 뒤안들이 다 빨갰다. 복원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문설주와 상기둥에선 짙은 송진내가 풍겼고, 마당과 벽과 담장들에 사용된 적토는 완전히 마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유약 바르기 전의 옹기들이 그런 색깔이던가.

오래된 건물이라곤 세 칸짜리 하나뿐이었는데, 그곳 툇마루에 검은 표지의 방명록이 한권 놓여 있었다. 이름, 주소, 직업, 방문목적 등을 적도록 되어 있는 방명록에는 사뭇 시적인 표현들로 어지러웠다.

---영미 만나러 왔다가 바람만 맞고 간다.------맹구.

---해를 따라 서쪽으로 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왜?------겔로퍼.

---서태지는 내꺼, 현진영은 미란이년꺼.------김여정.

---나가 영길이 너 성공헐 줄 풀쎄 알아부렀다 잉!------영길 애비.

---박시표 외 3인. 충남 청양문학회. 시인.영랑님 생가탐방.

그리고 마당 한 귀퉁이에 꽃이 다 떨어져 이미 씨앗을 맺기 시작하는 십여 그루의 모란들. 그런 것들이 모두 색보정 필터를 통해 보는 것처럼 빨갛게 떠올랐다.

영랑 생가를 생각하다가 나는 그만 그녀를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그 삼거리쯤에서였다. 전날 입었던 낯선 분홍색 원피스를 입기만 했어도 그녀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오금이 훤히 보이는 짧은 스커트의 주황색 원피스 차림으로 걷고 있었다. 조세핀이 즐겨 입었었고, 브리짓트 바르도도 자주 입었던 복고풍 의상. 등에 멘 베개만한 륙색은 검은색이었고, 어깨에맨 숄더백엔 초록색 줄무늬가 어른거렸다. 그녀 곁을 막 스치려는 순간 눈이 잠깐 마주쳤던가 그랬다.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레이크를 밟으려다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실수는 아니었고(그런 실수는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고의도 아니었다. 단지 오르막길이었다는 말이다.

어깨에 멘 그녀의 숄더백이 백 그램만 더 무거워 보였어도 난 그녀를 태웠을 거야. 그녀를 스쳐 지나면서 나는 나한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녀를 태울 마음 같은 건 애시당초 없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낯선 분홍색 원피스를 입었다면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거라는 말은, 그냥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뿐이라는 말이겠다.

태우고 말고와는 상관없이.

그래도 짐을 든 그녀를 그냥 지나쳐 버린 게 맘에 걸리긴 걸린 모양이었다. 숙소에 닿을 때까지 나는 줄곧 별나고 긴 문장 하나를 계속 되뇌었으니까. `내가 인정머리 없는 놈이라고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선전할 여자로 보이지도 않지만, 난 여기서 곧 떠날 사람이니까 그런데도 상관없지 뭐.'

설마 그녀와 다시 마주치겠냐는 심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나는 그녀를 정면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내가 묵고 있는 모텔의 식당에서. 모닝 빵에다 나이프 끝으로 버터를 바르고 있는 그녀를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 식탁에 앉아 무얼 먹을까 궁리하며 메뉴를 들치는데 그녀가 목례를 보내 왔던 것.

그때의 내 표정이 어떠했을까. 지금까지 궁금하다. 당황하거나 놀라거나 뭐 그런 단순한 표정은 아니었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나는 그녀를 단계적으로 인식했으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그녀가 목례를 보내 왔을 때는 그 여자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 상기되었으므로 반가웠고, 0.2초쯤 뒤엔 짐을 든 그녀를 그냥 지나쳤다는 기억까지 되살아나 뜨끔했고, 곧이어 그녀와 다시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 장담했던 일이 떠올라 낭패스러워졌다는 얘기다. 내가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이토록 게으르고 둔하다.

적어도 세 가지 표정이 아주 짧은 순간에 내 얼굴 거죽에서 버라이어티하게 스쳐 지났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식당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토스트 정도라면 2층 바에서도 주문이 가능했으므로 나는 곧장 그곳으로 올라가 통유리로 만든 창가에 앉았다.

<THE FIRST TIME EVER I SO YOUR FACE>라는 노래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딱딱하게 굳은 토스트를 뜯었다. 밤새 계곡까지 내려왔던 구름들이 오페라 무대의 막처럼 천천히 걷히며 두륜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노래가 뚝 그치고 그녀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둡고, 썰렁하며, 두 대의 승용차밖에 주차할 수 없는 그 작은 모텔에 마침내 또 한 명의 손님이 들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 나 혼자 모텔을 전세 내다시피 하고 있었다. 비수기였으니까. 식당에 내려가거나 이곳 2층 바에 들를 때마다 혹시 문을 닫지는 않았을까 아침마다 맘졸이지 않으면 안 되었었는데, 새손님이 들었으니 그런 부담이 정확히 반으로 나누어진 셈이었다. 그녀가 고맙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엔 아직 난감한 기분을 처리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홀에는 나와 그녀뿐이었다. 내게 커피와 토스트를 갖다 준 종업원은 다시 내실로 들어가 잠이 들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음악도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모텔의 모든 시설이 좁았지만 2층 바는 더욱 비좁았다. 종업원도 없고 음악도 끊어진 아침의 어둑한 바. 그리고 단 두 사람. 서로에게 무관심하기가 고문을 견디는 것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무엇 좀 드시겠습니까?"

굳이 일어서고 할 것도 없이 앉은 채로 내가 물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주스같은 거......"라고 간신히 대답했다. 주스라는 발음이 그녀의 분홍빛 원피스 색상만큼이나, 그녀의 흰 피부만큼이나 이색적이었다. 그녀의 놀라는 표정에 감사의 뜻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걸 나는 왠지 저절로 알았다.

자고 있는 종업원을 깨워 파인주스와 음악을 주문했다. 종업원은 그때까지도 모텔의 손님이라고는 나 하나뿐인 걸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전에 그쳤던 노래가 다시 처음부터 흘러나왔고, 종업원이 잔을 들고 걸어왔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몰랐는데......"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를 그녀는 아주 작고 어눌하게 했다. 무엇엔가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비수기에, 이런 곳에, 젊은 여자가, 혼자서, 무엇하러 왔을까.

"혹시 어제 삼거리에서 저와 마주쳤던 것 기억합니까? 전 승용차를 타고 있었고, 그쪽은 짐을 들고 있었죠."

그녀는 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는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녀의 얇은 눈꺼풀이 치켜지며 큰눈이 순간적으로 더 커졌다. 푸른 실핏줄이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희고 투명한 무릎에다 뜨거운 커피를 쏟고 싶다는, 정체불명의 충동이 나의 늑막쯤에서 솟구쳤다.

"태워드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어째서죠? 라고 그녀는 묻지 않았지만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제가 요즘 중이염을 앓고 있거든요."

그게 중이염과 무슨 상관일까라는 의구심을 그녀는 그쯤에서는 어떻게든 표시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진지했기 때문에 나는 우롱을 당하고 있다는 기분에 잠시 사로잡히기까지 했다. 나는 자꾸 조급해졌다.

"귀가 정상이 아니니까 평형감각에 자꾸 장애가 생기는 겁니다. 운전하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남까지 불행해지면 안 되지요......"

꾸며댄 말이 아니었다. 사실이 그랬다. 그즈음 나는 내 감각이란 걸 될 수 있으면 믿으려 하지 않았다. 감각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입을 딱 벌리는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리곤 여전히 고개를 끄덕끄덕.

"내가 말을 하는데 내 목소리 같지가 않은 거예요. 굉장히 낯선 음성이거든요. 나중에는 말의 내용조차 장애를 일으키는 거예요. 그런 현상이 시선에까지 옮아가 시야가 아리아리해지더니 급기야는 어땠는 줄 아세요? 이젠 제가 쓰는 글에까지 전염이 됐죠. 써놓고 나면 이건 당최 제 문장이 아닌 거예요. 문장은 고사하고 주부와 술부의 상응관계라든지 시제라든지 하는 게 제멋대로라구요. 지평선을 수평선으로 쓰질 않나, 있었다를 한 문장에 세 번 중복해 쓰질 않나, 엉망이예요. 언술체계가 막 무너지는 거예요, 막. 이러다간 언어를 몽땅 잊어버릴 것만 같아요.",

말을 쏟아놓는 나를 그녀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갑자기 뜨악해져서 입을 다물고,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했나 곰곰이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글......쓰나요?"

그녀의 표정에 갑작스런 생기가 돌았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인지 아닌지 그것을 대단히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겐 그런 게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낯선 표정과 눈빛이지만,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그런 또 하나의 기묘한 낯설음.

나는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손목시계를 보고 창 밖을 보고 식은 커피를 마시고 다시 시계를 봤다. 의자에서 엉거주춤 엉덩이를 뗀 채 윗주머니에서 쿠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바를 나오려고 문을 밀쳤을 때 그녀의 두 번째 질문이 날아왔다.

"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묻는 건데, 무......슨 글 쓰나요?"

"소, 소설입니다."라고 대답한 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내 방으로 뛰어올라왔다.

내 입에서 소설 어쩌구 하는 말이 더 이상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방바닥엔 전날 그리다 만 대흥사 건물 배치도가 떨어져 있었고, 부팅된 내 노트북 피시에선 녹색 커서가 소리 없이 명멸하고 있었다. 키보드의 알파벳과 한글 자모들이 촌충 마디에 새겨진 이상한 갑골문자들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귀가 또 멍멍해지면서 벽이 기우뚱했다. 디스켓을 빼고, 모니터를 닫고, 전원을 껐다. 창문을 열고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자 귓가에 묻어온 그녀의 목소리가 쟁쟁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어투마저 낯선 것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별뜻은 없어요'라고 하지 그녀처럼 `특별한 건 없어요'라고 말하진 않으니까.

해남읍으로 달리면서 나는 대흥사를 부쉈다 세우고 다시 부수었다. 사경실 창문 아래로 투신한 스님을 두 명에서 여섯 명으로 늘렸다가 나중에는 스님이 아닌 거사 정도로 바꾸었다. <아육전>이라는, 아소카왕의 일대기를 사경하기 위해 전국의 명필들을 비밀리에 초대해 놓았다가 금방 워드프로세서 오퍼레이터로 바꾸었다.

얘기가 한 발자국도 나가질 않았다. 차도 제대로 달리지 못했다. 점점 귀는 멍멍해지고, 나는 경사진 벨로드롬을 달리는 사이클 선수가 되었다가, 전투기 파일럿이 되기도 했다. 나는 핸들을 부여잡고 땀을 뻘뻘 흘렸다. 읍내로 진입하기 전에 잡화점에 들러 차가운 이온음료를 거푸 마시며 20분 정도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운전할 만해?"

해남 친구가 물었다. 나는 대답은 않고 스파게티 접시만 핥았다. 패스트 푸드점 유리 밖으로 키 큰 두 처녀가 지나가며 안을 들여다봤다. 나는 그중 때청바지를 입은 한 여자에게 핫소스 묻은 입술을 비죽 내밀어 보였다. 놀라 종종걸음 치던 그녀들은 모퉁이를 돌기 전에 이쪽을 흘끗 바라보고는 활짝 웃었다.

패스트 푸드점 2층에 이비인후과가 있었다. 난 친구에게 귀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지 않고 그냥 그를 따라 올라갔다. 안 이상 어떻게 알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 다만, 친구가 미리 병원엘 가보자고 말해 줬더라면 나는 스파게티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스파게티 먹은 얼얼한 입으로 이비인후과엘 가는 건 아무래도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사와 친구는 잘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누구네 큰아이가 아홉 살인데 아직도 오줌을 싸서 큰일이라며 그들은 웃었다.

의사는 내 귓속을 들여다보거나 따뜻하고 매끄러운 철사 끝을 넣어 보거나 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친구와 얘기를 나눴다. 계기와 표시등이 잔뜩 달려 있는 어떤 기기로 바람도 넣어보고 흡입해 보기도 했지만, 나는 그의 손길을 전혀 느낄 수 없어서 졸음이 올 지경이었다. 방향을 바꾸기 위해 가끔씩 그는 내 머리통에다 손을 댔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이발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의사는 장갑을 벗고 손을 씻은 뒤 , 아무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다며 나에게 교양 있는 웃음을 지여 보였다. 푹 쉬거나, 마음을 안정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의 웃음은 정말이지 교양 있는 웃음의 전형 같았다. 광고에 팔아도 될 만큼.

친구가 갈비탕 한 그릇을 다 비울 동안, 나는 우두커니 앉아 그의 튼튼한 턱만 바라보았다. 패스트 푸드점에서 만나자고 하길래 나는 그곳에서 점심을 먹자는 뜻으로 스파게티를 주문했었다. 핫소스가 너무 아리고 매웠던 나머지 나는 아무것도 더 먹고 싶지 않았다.

그의 턱을 바라보다가 심심해진 나는 밖으로 나와서 내 창작집 한 권을 사들고 들어갔다. 그에게 의사의 이름을 물어 적고 사인을 했다.

"만나면 전해 줘. 진료 고마웠다고."

땀으로 번들거리는 턱을 들고 그가 나를 봤다. 재미없다는 이유로 반 넘어 진행된 연재소설 제8회분이 네 번 연거푸 반송됐던 사실까지 저 친구는 다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뜬금없이 궁금해 졌다. 귀에 심각한 이상이 생긴 걸 안다면 그것 정도 모를 위인이 아니지.

"중단된 연재에 대해선 어째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거지?"

내가 물었다. 그는 대답은 않고 번들거리는 턱을 손등으로 닦았다. 물을 마신 뒤 넥타이를 조여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당 밖으로 나와서야 그는 겨우 입을 뗐다.

"땅끝이란 마을이 가까우니까, 한번 가봐."

그리고 친구는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땅끝, 혹은 토말(土末)이라 불리는 동네로 차를 몰면서 모텔에 두고온 노트북 피시를 떠올렸다. 전원을 확실히 껐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30여 킬로를 달릴 때까지 나는 줄곧 노트북에 붙들려 있었다. 언젠가 전원을 끄지 않은 채 2박 3일 집을 비운 적이 있었는데 키보드의 ㅈ자판에 이상이 생겼다. 눌러도 모니터에 글자가 잘 뜨지 않았다. 가뜩이나 글이 써지지 않는데 초성이 ㅈ자로 시작되는 단어가 떠오르면 반사적으로 긴장이 되고 짜증이 났다. 귀에 이상이 생겼던 바로 그 무렵에 자판에도 이상이 생겼던 것이다.

머리 한구석에는 전원을 끈 기억이 엄존했지만, 다른 한구석에서는 과연 껐겠느냐는 의문이 연막처럼 피어올랐다. 그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아파트 현관을 잠그고 경비실까지 나왔다가는 다시 올라가 점검하기 일쑤였다. 화장실 등을 분명 끄고 나왔는데도 책을 읽다 말고 다시 나가 스위치를 확인했다. 연재를 계속하는 데 문제가 생긴 이후론 한 문장을 써놓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염없이 들여다 보는 습관이 생겼다. 나중에는 한 단어를 적어놓고 그랬다. 단어 하나를 수백 번 되풀이해 읽으면 뜻이 바래져 하얗게 날아갔다. 그런 기이한 체험을 나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반복했다.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비석들 때문에 나는 겨우 노트북에서 놓여 날 수 있었다. 비석들이 도로변까지 쑥 나와 있다는 게 다른 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점이었다. 망자의 신원을 음각한 묘지 비석이 아니라, 그것들 대부분은 한 씨족의 권위와 토지소유 영역 등을 은근히 내세우는 석물처럼 보였다. 재밌는 것은 비문에 적힌 거의 모든 성씨가 영남을 본관으로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곳은 호남에서도 서남단이 아니던가.

자동차로는 더 이상 남쪽으로 갈 수 없는 한반도 끝점에 다다랐을 때 시각은 3시를 막 넘고 있었다. 이 땅의 땅끝에 세워졌다는 토말탑(土末塔)을 보고 전망대에 올라 멀리 바다와 섬을 바라보다가 난 거기서 또 그녀를 보았다.

그렇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녀 얘기인 것이다. 내 얘기는 아닌 것이다.

햇빛은 해수면에 곧장 떨어져 내렸고, 바다는 거대한 은박지처럼 번쩍거렸다. 드문드문 떠 있는 크고 작은 까만 섬들이 숯덩이 같았다. 비 오는 날 입었던 밝은 분홍색 원피스를 그녀는 입고 있었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바다 때문에 그녀의 옷은 제 색상을 내지 못했다. 눈이 부셨다.

"아......"

그녀가 나를 보고 짧은 탄성을 질렀다. 전망대 안에는 나와 그녀뿐이었다.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건 그녀의 일상처럼 보였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그녀는 입을 다물고 다시 바다를 굽어보았다. 해수면에 반사된 빛이 그녀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녀의 눈 속에 야울거리는 바다가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오백 페이지 분량의 국판 사이즈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표지 그림은 칸딘스키의 <즉흥 10>이었다. 표지 우변에 <カフカ選集>이라고 내려쓴 글씨가 보였다.일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토말이라고 할 때의 토......그뜻은 무엇인가요?"

그녀가 간신히 물었다. 그녀의 음성은 늘 간신히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흙이라는 뜻이죠."

조잡하게 나뭇결을 그려 넣은 긴 시멘트 의자에 앉아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가 앉은 것과 가장 가까운 의자 한 모서리에 엉덩이를 대며 대답했다. 대답을 하고 나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흙 토자를 몰라서 물은 걸까.

"그럼 땅이라는 건...... 한자로 어떻게 쓰나요?"

적어도 일본 책자를 읽을 정도라면 그런 질문 따위는 하지 말아야 옳은 거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라고 쓰죠. 땅 지, 혹은 따지."

일일이 대답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대답이 빠져 나왔다. 그녀의 진지한 표정 탓이었다. 그녀는 내가 중이염 때문에 당신을 차에 태울 수 없었노라는 까닭 모를 변명을 했을 적에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녀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면 땅끝이라는 말은 토말......보다 지말이라고 해야 맞나요? 그런데 왜 토말인가요?"

싱겁기 짝이 없게 이어지던 물음이 갑자기 뒤통수를 쳤다. 토말을 직역하면 흙끝이 되는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 하면 정말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깊이 따져볼 의향도 없었으니까.

대답이 없자 그녀는 다시 시선을 바다 쪽으로 돌렸다. 바다라기보다 수평선을 아련히 바라보았다고 해야 더 정확한 말이겠다. 그 수평선 너머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아니면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영토의 끝이라는 말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토말......"

전망대 밑으로 네 척의 미역 채취선이 지나간 뒤 그녀가 입을 뗐다. 아주 느린 속도로 지나가 버렸는데도 바다 위에는 배 지나간 자리가 오래도록 선명했다. 그 동안 그녀는 영토라는 말 하나를 침묵 속에서 건져냈던 것이다.

"그렇군요. 국토, 영토. 다 토자가 들어가네요."

"혹시 영토를......떠나 보신 적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아직. 그쪽은 어떤가요?"

"전, 영......토가 없어요."

그런 사람도 있던가. 난 뜨악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재일......한국인 2세예요."

그랬었구나. 그제서야 그녀에 관한 모든 게 확연해지는 거 같았다.

"학생이십니까?"

내가 물었고,

"6년 전에 졸업했고, 지금은...... 네, 소설 쓰며 살아요."

"아......"

이번엔 내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아까, 아침에 말예요. 모텔 2층 바에서. 당신 얘기 참 공감이 갔어요."

"무슨......?"

"엉망이 되는 문장. 언......술이 막 무너진다. 언어를 잊어먹겠다. 그런 말들 전부."

이번에는 내쪽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자와 아침에 하던 얘기를 계속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가리사니가 서질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마냥 주억거렸다.

"혼자, 무슨 일로 오셨나요?"

리시브가 부정확한 배구공을 얼떨결에 상대편 코트에다 넘겨버린 세터의 기분이 되어 내가 물었다.

"장 그르니에를 읽다가...... 섬이란 글에 이런 말 있어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보았었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무엇보다 나만의 `비밀'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봐요, 당신은 혼자 무슨 일로 모......텔에 묵고 있는 거죠?"

나는 그런 귀족스런 동기로 떠나온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려다, "연재에 문제가 생겼어요." 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얼마 안 있어 딴 나라로 떠나버릴 사람 앞이라는 게 이상스레 마음이 놓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 여자가 다 꾸려 가겠지, 저 바다 건너로 가져가 주겠지.

"소설이 통 되질 않아요."

나는 고개를 떨궜다.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이에 전망대 밑으론 또 몇 척의 미역 채취선이 번들거리는 해초를 가득 싣고 기다리는 사람들 곁으로 귀항했을 것이다. 그녀는 오른손에 쥐었던 책을 왼손으로 옮겨 쥐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신발 끝을 바라보았다.

"올라오다 커......피 파는 곳을 봤어요."

나는 그녀를 따라 전망대를 내려왔다. 어느새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섬들은 더 검고, 바다는 눈부신 주황빛이었다.

"저, 오해하지 않았음 좋겠는데...... 한국에서 한국 문학하는 한국 사람들, 아무리 힘들다 해도 다...... 행복한 고민으로 보여요."

그녀는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척의 배가 물위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쓴 커피를 입술 끝에 한번 댔다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벽에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적어도 제...... 생각엔 그렇다는 얘기예요. 일본에서 일본 문학하는 일본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녀의 말은 느리고, 안쓰러울 만큼 어눌했다. 그러나 뭔가 많은 말을 내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만 보고 있으면 나는 그녀의 마음을 저절로 읽을 수 있었다. 남의 속을 꿰뚫는 재주 같은 건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녀의 얼굴은 매우 희었고, 표정은 투명했다.

"어째서죠?"

그렇게 물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들고 있던 책을 두어 번 타르륵타르륵 넘겼다. 표지 날개에 카프카의 눈과 귀가 보였다.

그녀는 어깨까지 내려온 긴 머리카락을 등뒤로 넘기고 손가락 끝으로 귓등을 쓸어넘겼다. 작은 칠보 귀고리가 귓불에서 흔들렸다.

"저는 어머니가 소리 없이 얻어맞는 걸 보고......소설을, 처음 썼어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나도 어떤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다.

"친아버지는 제가 열두 살 때 폐렴으로......죽었어요. 어머닌 일본 남자한테 재가했는데, 이틀이 멀다 하고 주먹으로 맞았어요."

자식들이 볼까 봐 어머니는 비명을 참았고, 의붓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주먹과 발길로 폭행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찻잔을 기울였다 세우고 다시 기울였다 세우는 그녀의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손톱 속살이 그녀의 원피스 색상과 잘 어울렸다.

그런 광경을 종종 문틈으로 엿보면서 자신은 거의 실어증에 걸리다시피 했고, 밤마다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종이 위에 쏟아놓는 게 일이었다고 했다. 이런 말들을 하는 데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을 들였다. 어쩌다 재수없게 더러운 인간이 걸려들었다고 치부해 버리기엔 그녀가 겪은 일본은 너무 야비했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한국인이란 이유로 수도 없이 쫓겨나야 했으며, 아르바이트 자리를 빼앗겨야 했다는 것. 어떤 국민학교에 한국인 아이 하나가 전학을 왔는데 학교장이 조회시간에 그 아이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담임은 그 아이 하나를 위해 한국어를 공부하는 열의를 보였다는 일화가 한국에서 화제가 됐던 모양이라면서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다. 일본인 교사들은 그 일화가 한국에서 화제가 되는 것만을 목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않느냐면서.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그녀로서는 그런 불이익들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건지 잘은 알 수 없었어도,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비열함만큼은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체험할 수 있었으므로 의붓아버지를 별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그들의 만행은 오히려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에 대한 구타는 일......상적인 것이었어요. 나중에는 어땠냐면......의붓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린다는 생각마저 못하면서 때리는 거예요. 마치 채찍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기둥이나 벽에 때려본다는 식이었죠. 어머니는 지치고 체념을 하면서도 아픔을 견디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자기 팔을 물고, 머리를 쥐어뜯었죠. 그런데도 의붓아버지는 자동적으로 팔을 뻗고 발길질을 하는 거예요. 표정도 없이. 담배 따위를 피우면서......"

해가 지면서 바다는 더욱 잔잔해졌다. 발동선 소리가 차츰 가깝게 들리고, 벽에서 끼쳐오는 냉기가 춥게 느껴졌다. 그녀나 나나 잔 속의 내용물을 반 이상 남긴 건 마찬가지였다.

가까운 섬자락들이 하나 둘 불을 켜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15도 정도 숙이고 찰랑거리는 물 끝을 바라보거나 찻잔의 둥근 아가리를 내려다보았다. 흰 얼굴에 푸른 저녁빛이 어리어 있었다.

내가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듯, 그녀도 이 땅을 떠나기 전에 누구에겐가 자신의 보따리를 풀어버려야 한다는 강박증에 줄곧 시달린 듯 했다. 한 시간쯤 더 그곳에 머무르며 나는 그녀의 느리고 어눌한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할 수 있었던 건, 그녀의 친아버지가 고향인 그곳 땅끝에서 일본인들에게 끌려갔다는 것, 그뿐이었다.

어두워져서야 땅끝에서 떠났다. 차도 사람도 없는 깜깜한 길을 달렸다.

"귀가 불편해서......어떡하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진땀을 흘렸다. 그녀를 곁에 태울 수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더욱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계속해 주길 바랐다.

"전 요즘 한 사찰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변사사건을 쓰고 있어요. 물론 백 퍼센트 픽션이죠. 불교 교리든 기독교 교리든 모두 하나의 거대한 담론일 뿐이지 않느냐는 조심스런 접근입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이 되어버린 `말씀'의 생성과 발전과 소멸을 사회고고학적 방법론으로 다루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가 없나 봐요...... 사찰의 모델이 대흥사죠."

"아......"

그녀는 내가 대흥사 입구의 모텔에서 아침마다 쓸쓸하게 토스트를 씹고 커피를 마시는 이유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숙소와 땅끝 사이가 이렇게 먼 줄 몰랐어요. 일본 여행사에서 정해 주는 대로 왔을 뿐인데......대흥사 남쪽으론 그런 모텔조차 없다나 봐요."

각기 먼 곳에서 온 두 명의 남녀가, 승용차에 나란히 앉아, 어둔 저녁길을 달려, 동일한 숙소로 향하고 있다. 왠지 설레게 하는 문장이다, 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평형감각에 장애가 올 때마다 이 문장을 생각하는 게 좋겠어.

어쩌다 맞은편에서 자동차가 달려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지나치고 나면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어 보였다.

"전 지금까지 당신과 같은 그런 거......창한 소설 써본 적 없어요."라고 그녀가 말했고,

"거창할 것 없어요. 거창하다뇨."라고 내가 말했다.

"적어도 내겐 그런 주......제 자체가 거창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전 그저 집안 얘기를 썼을 뿐이에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과, 아빠 엄마가 서로 다른 형제들 얘기. 일번인 오빠에게 강......간당하는 한국인 동생 얘기......"

"다른 걸 써볼 생각은 하지 않나요?"

"전 소설을 썼던 게 아녜요. 그저 답답해서 무언가를 써냈을 뿐이지요. 무얼 쓰겠다는 생각 이전에 벌써 쓰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5년을 줄곧 써온 셈이에요."

"그래도 오래 쓰다 보면 탈피하고 싶어지지 않나요?"

그녀는 금방 대답하지 않고 무릎에 놓인 책을 만지작거렸다. 밭 가운데로 난 길을 달릴 때 한 무더기의 날파리들이 한꺼번에 후드 위를 미끄러져 와 앞유리에 부딪쳤다. 나는 놀라서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날파리 떼가 얼마나 많았던지, 눈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탈......피하고 싶지만 될 수가 없어요. 자기 영토에서 문학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것도 바로 그점 때문이에요. 영토를 갖지 못한 작가는 소......외감에서 벗어나기 힘들거든요. 숙......명적으로 벗어 날 수 없는 건지도 몰라요. 보세요, 제가 일본에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건 특이한 제......재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재일 한국인 2세의 재일 한국인 이야기. 여기서 그들은 부분적인 문학적 효용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발견하고 인정하게 된 거죠. 그런데 제가 그런 이야기를 집어치워 봐요. 작가로서의 김유미는 끝이죠. 그들이 저로부터 바라는 것은 바로 재일 한국인 2세의 재일 한국인 이야기뿐인 거예요. 얼마 전에는 자그마한 문학상을 탔어요.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제 소설의 작품성을 기리는 게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바를 충실히 따라 주었기 때문에 기특해서 주는 상처럼 여겨진 거예요. 불우한 민족의 유랑하는 가족 얘기를 고개도 안 쳐들고 두더지처럼 맹렬히 파냈으니 장하다는 거죠. 수상식장에서 저는 말했어요. 이제 재일 한국인 얘기는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재일소수민족에 대한 일본인들의 천박한 호기심과 흥미를 충족시키는 존재로서의 작가는 되지 않겠다고. 그때부터 글이 써지지 않더군요. 무슨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어요.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제가 구사하고 있는 언어에서 발견됐어요. 식민시대 한민족의 언어를 혹독하게 지배했던 원수의 언어, 지금은 제 의식과 재일소수민족들의 삶을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는 지배자의 언어를 가지고 과연 무얼 쓸 수 있을까. 문장이 뒤틀리고 얘기가 빗나가 괴상한 몰골의 소설들만 나왔어요. 물론 아무도 읽지 않았죠. 저들의 언술 체계가 내 안에서 막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던 거예요. 그때부터 저는 이미 저들의 영토에서 떠나 있었던 거지요."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범퍼 바로 앞에 경주 김씨의 한 파조(派祖) 기단(基檀)의 진입로임을 알리는 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1초만 늦게 밟았어도 비석이나 자동차 중 어느 하나는 박살이 났을 것이다. 나는 핸들에 댔던 이마를 들어 비석 주위를 어지러이 떠도는 날파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석 뒤로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의 심연이 놓여 있었다. 왠지 큰일날 뻔했다는 생각 같은 게 들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지나치게 많은 말을 했나봐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 젓고는 물었다.

"경주 김씨세요?"

"아녜요. 광......산 김씨랬어요."

누군가가 지어놓은 농사를 망치면서 나는 큰길로 빠져나왔다.

"천천히 가세요."

그녀가 말했고,

"저, 금방 우리말을 굉장히 유창하게 했다는 거 알아요?" 라고 내가 말했다.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내가 우산 쓴 그녀를 처음 보았던 삼거리에 닿을 때까지 그녀와 나는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내가 비석을 받아버릴 뻔한 일이 그녀의 입을 무겁게 한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밤길을 달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나는 멋대로 생각했다.

"한국인 동생을 강간한 일본인 오빠, 그거 소설일 뿐이죠?

대흥사 입구로 진입해 들어가면서 내가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빨랐다.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대답이 따라붙었던 것.

"아이까지 낳았죠. 아이는 세 살 때 13일 하고도 일곱 시간 동안 지독한 독감을 앓다가 죽었어요."

"아, 그랬었군요."

공연히 물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더 이상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그런 얘기를 썼더니 문학상 하날 주더군요. 우리한테 삶과 죽음의 문젠데 그들에겐 단지 작은 화젯거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나는 또 아, 그랬었군요, 라고 말했다.

모텔에 도착한 나는 식당 먼저 기웃거렸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그녀가 좋다면 함께 저녁이라도 먹을 작정이었다. 주방 아주머니 둘은 무슨 연속극인가에 빠져 있었다.

"좀 쉬고 싶어요."

그녀가 긴 머리를 연거푸 쓸어올리며 말했다. 나도 저녁 먹는 것을 포기하고 그녀를 3층 복도까지 바래다 주었다.

어둡고 긴 복도를 지나 그녀는 자기방 방문의 열쇠 구멍에다 키를 꽂았다.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나는 그녀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건너다보았다. 함께 저녁을 먹자고 내 입으로 말하지 못한 게 갑자기 후회스러웠다. 내 방에 가서 함께 창부타령이라도 듣는 게 어떻겠습니까, 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입은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불현듯 불러놓고 수습을 하지 못했다.

"김유미씨!"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만이라도 그녀를 안아보면 어떨까 싶었지만 내 손은 잘 쉬라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그녀가 사라진 방문 밖 빈 복도에서 나는 약 20초쯤 서성거리다가 내 방으로 내려왔다.

연재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훌쩍 서울로 올라온 나는, 밤 깊도록 노트북에 전원을 넣어놓고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범우사판 <카프카 선집>을 집어들었다. 고향의 한 설화를 가지고 장편 하나를 쓸 때 참고가 될까 해서 다시 읽던 책이었다. 고등학교 때 의무적으로 읽었던 때와 그리 많이 다르지 않은 독후감을 나는 아직도 갖고 있다; 그는 왜 이런 글을 써야만 했는가. 난해하고, 비정상적이고, 끊임없이 무슨 착각엔가 빠져들게 만드는 글을, 무너져 내리는 글을.

흰 드레스 셔츠에 모범생처럼 앞가르마를 탄 그의 사진을 바라보며 삼성판 <세계 현대문학 전집> 제17권마저 꺼내 읽기 시작했다. 안방에서 떠들던 아이들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문틈으로 새어들던 더빙된 외화 대사도 들려오지 않았다.

유태인에 관한 거라면 나는 저지 코진스키의 <더 페인티드 버드>를 잊지 못한다. 매 장마다 소름이 끼치는 그 소설 9장에는, 집단학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알아버린 유태인들이 어린 자식들을 달리는 열차 밖으로 내던진다. 열차가 지나간 마을엔 바퀴에 찢긴 아이들의 사지가 건초 더미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요행히 목숨이 붙은 아이들은 가난한 마을 사람들한테 신발과 옷을 빼앗기고 얼어죽거나, 여자 아이일 경우엔 거기에다 강간까지 당한다.

자신에게 그 소설과 같은 내용의 쓰라린 고통만을 안겨주고 나중에는 정치적으로 억압하기까지 한 조국을 탈출해 저지 코진스키는 미국에서 전혀 새로운 언어로 소설을 썼다. 전혀 새로운 언어로. 그러나 선배 유태인인 카프카는, 프라하에 끝까지 웅크리고 앉아, 저 독일인의 언어로 <변신> <실종자> <심판> <성>과 같은 소설들을 써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밤이 깊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밤중인지 새벽인지도. 이유를 따져보진 않았지만 왠지 연재에 대한 강박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난 어쩌면 한국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곳은 내 영토가 아닐지도......

스탠드 불빛이 점점 눈에 부셔오는 데 반해 모니터에서 명멸하는 작은 녹색 커서는 맛있게 느껴졌다. 그때 아내가 내 방문을 노크했다.

"아직 일 안 끝났어요?"

밖에서 아내가 물었다. 나는 책을 읽고 있는 중이라고 더 크게 대답했다. 잠들었나? 하고 아내는 혼자 중얼거렸다. 문이 열리고, 당근 사과즙이 담긴 컵과 쟁반이 내 눈에 들어왔다. 손잡이를 가만히 밀어 문을 닫고 아내가 몸을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내는 헉, 소리와 함께 눈과 입을 크게 벌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토록 공포스러운 아내의 얼굴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잠시 후 컵과 쟁반이 방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소설 전문 #구효서 #카프카를읽는밤 #카프카를 읽는 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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