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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전문

최윤 '푸른 기차' 전문

by 열공햐 2020.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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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기차

- 최 윤

 

 

「이 사람에 대한 충분하고도 만족스러운 자서전을 위한 어떤 자료도 없음을 나는 확신한다. 이것은 문학으로서는 수리할 수 없는 손실이다.」

―허먼 멜빌, ‘법률서기 바틀비’

 

아 ―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이상, ‘권태’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해 충분하고도 만족스런 어떤 자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은 아닐 것이다. 그의 삶은 흔적 없고 매끄러우며 아무에게도 이해되지 못할 것이며 어쩌면 이해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삶의 애호가도 아닐 것이며 그렇다고 염세가도 아닐 것이다. 그는 고함치지 않으며 흥분하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불행해 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으며 눈물을 보이지 않지만 호들갑스럽게 웃지도 않는…… 그는 살 뿐이며 되도록 잘, 살고 있음을 잊을 정도로, 잘, 살려고 할 뿐이다.

군악대가 전자북을 두드리며 훨씬 이전부터 그는 눈을 뜨고, 침대 옆으로 늘어진 팔을 남의 것인 양 내버려둔 채 빛이 새어 들어오는 쪽에 빈잠이 덜 깬 동공을 고정시키고 있다. 한 시간 혹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그의 동공을 되비치는 거울이 있다면 그는 그 속에서 사고와 욕구나 몽상, 더 나아가 무서움이나 놀람 같은 것이 제거되어 있는…… 부피도 체적도 감정도 없는, 수많은 선이 가운데의 검은 점 주위로 모인, 수정체! 라는 말이 주는 느낌만큼이나 요원한 물체의 벽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군악대의 북장치를 꺼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군악대의 북소리는 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복도로 면한 창문 쪽에서는 늘 그렇듯이 그가 다가가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 세상이 먼저 그에게 다가온다. 사무실 임대용으로 지어진 이 건물을 향해 걸어오는 바쁜 발걸음과, 각자 문 뒤로 사라져버리기 전에 던지는 짧고 부산한 인사말들, 혹은 전동차 시간에 맞추어 출근을 서두르는 똑같이 바쁜 발자국 소리, 밤새 억눌려 있던 강한 수압의 수돗물 소리, 이미 하루를 시작한 사람들의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 이제 그만.

아직은 자제된 초여름의 열기가 그의 상체와 침대가 닿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그는 일어나지도, 커튼을 젖히지도, 창문을 열지도 않는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하는 첫 번째의 몸짓, 너무 자동적이어서 몸짓이라고 할 수도 없는, FM라디오의 버튼을 누르는 그 동작을 그는 하지 않는다.

방 안으로 스며 들어오는 빛은 희미하게 침대와 창문 사이에 놓인 사물들을 어슴푸레 비추고있지만 그 사물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 그는 빛이 필요하지도, 눈을 돌려 그곳을 볼 필요도 없다. 몇 개의 씻지 않은 식기와 커피 잔, 그리고 펼쳐진 책과 이국의 방언처럼 모호한 글자들로 장식된 종잇장들, 벗어놓은 속옷과 꺼진 화면, 구겨진 휴지와 꺼진 담배, 이 모든 색바랜 것들의 목록을 그는 보지 않고서도 볼 수 있다. 시계를 보지 않고도 시간을 알 수 있듯이, 시간을 알 필요가 없듯이. 시간은, 무엇을 위한 시간이건,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이제 그것은 그에게 확실해 보인다.

그는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전화를 걸 수 있다. 그는 구체적인 이유를 대면서 ― 예를 들면 치통이나 안질 같은 이유, 구체적이고 일상적일수록 그리고 적나라한 이유일수록 설득력이 있다. ― 학기 마지막 주일의 이 토론회에는 참여할 수 없노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일주일에 두 번, 지하철까지 가는 버스를 계산에 넣고 지하철 시간표를 꺼내어 알맞은 열차의 출발 시간을 확인하고 그 시간에 맞추어 모든 것을 준비했음에도 늘 빠듯해지는 짧은 여유 시간에, 어딘가 조금은 비린 냄새가 나는 잔에 커피를 풀어 마시고 지하철 안에서는 전날 준비한 강의나 발표 노트를 훑어보는 일들을 단지 머릿속으로 한 단계 한 단계 꼼꼼하게 떠올릴 뿐. 일주일에 한두 번, 대여섯 시간씩, 사회적인 활동과 비사회적인 활동을 구분하는 목록과 통계와 숫자에 대해 말하는 남자를, 불확실한 지식을 확실한 어조로 말하며 주관적인 견해를 그럴 듯한 이론으로 객관화하며, 민감한 이권을 저마다 대변하며 첨예하게 나누어지는 특정 분야의 계파에 대해 외울 정도로 빠삭하며, 침대에 누워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막연히 고개를 돌린 그곳에서 외출 준비를 하는 신경질적인 몸짓의 그 남자를 그는 그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바라보듯이 비스듬히 솟아올라 오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다.

그는 최소한 전화를 할 수도 있었다. 그의 예기치 않은 부재를 아무런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고지하며, 다음 주의 보충 토론회를 대비한 과제를 전달하게 하거나, 자유 토론의 주제를 즉흥적으로 제의하기 위해서, ‘복제물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거나 ‘대중화 사회에서의 극우의 정당화 경향’, 또는 ‘종말론과 계층 의식’ 같은 모호하게 광대하고, 허망하게 게으른, 위선적으로 선동적이며 현학적으로 은어적인 이런 주제를 제의하면서 당장 그를 사로잡는 이상한 힘의 사보타지를 한 주일 정도 연장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한 주일 후에는? 그는 전화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것이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수월한 일이기 때문에.

그는 침대의 경계를 넘는 지역으로 그의 몸을 이동하지도 않으며 이 아침, 세상이 그에게 보내는 어떤 유혹, 세상이 그에게 가해오는 어떤 도전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거의 습관적으로 그가 육체 가까이 끌어다 놓은 책들, 〈현대성의 비판〉, 〈주체의 개념에 대한 몇 가지 문제〉…… 는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말리는 속옷처럼 껄끄럽게 달라붙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몸을 일으켜 옆으로 젖혀놓을 정도로 불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점점 더 강한 빛을 들여보내는 창문, 그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에 시선을 준 채 누워 있다. 빛과 소리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문 밖의 소음도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건물에 들어찬 무수한 사무실에서 끝도 없이 울려오는, 어쩌면 단 일순간의 휴식도 없이 촘촘히 시간 분 초를 채우는 전화 소리, 응답하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들, 다시 의자를 끄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에게도 전화가 한 번 울렸다. 그는 전화에 대답하지 않았으며 아마도 그때, 그의 부주의한 발 동작에 걸려 전화 코드가 빠진다. 전화의 울림은 멎는다. 그것은 진정 의도적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다행스러운 부주의였다. 그는 그러므로 전화 코드를 제자리에 다시 꽂지 않는다. 70킬로그램의 그의 몸무게로 침대에 패인 불편한 자국에 점점 더 깊이 살덩이를 묻을 뿐이다. 서너 번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 중의 한 사람은 고집스러우며 필사적이다. 구성진 목소리를 금지당한 쎄에탁소 직원, 절대 사절 신문 배달원, 아니면 못생긴 교회천사. 그는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그는 가끔 침대 옆에 놓인 물을 마신다. 가끔은, 미지근해진 물에 탄 커피도. 커피의 미지근한 바로 그런 속도와 그런 색채로 시간이 지나가도 그는 그 뒤를 따라 뛰지도 그것을 앞질러가고자 허덕거릴 필요도 없다.

 

그는 숨을 쉴 뿐이다. 그의 숨결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 그는 균형잡힌 이음보의 숨을 쉰다.

 

그는 점점 커지고 복잡해지는 밖의 소음을 죽이기 위해서 혹은 어떤 다른 상태로 이전하기 위해서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놓아둔 오디오의 작동 장치를 누르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켜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그의 방까지 새어 들어온다. 얼마 전부터, 혹은 기억도 할 수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서히, 그는 다른 것에 앞서, 먼저 음악에 대해서 변덕스러워지며 까다로워지기 시작한다. 음악이 그에게 해를 입힌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한 것이 있다면 그를 행복하게 해 주려고 부단히 노력한 것뿐이다. 음악은 그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맨 먼저 부당하게도, 음악에 대해서 까다로워진다. 그는 한 곡을 끝까지 듣는 일이 점점 힘겨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가 참을 수 있는, 그의 상태에 정확히 상응하는 음악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확인한다. 그가 한 소절 혹은 두 소절까지 듣는 일은 아주 드물어진다. 어떤 날은 한 시간에 서른여섯 장의 판을 바꾼다. 그의 방에 쌓여 가는 음악의 종류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많아지지만 그가 부분적으로나마 참을 수 있는 곡의 숫자는, 열서너 곡에서 대여섯 곡으로 대여섯 곡에서 한두 곡으로, 대폭적으로 줄어든다. 그는 더 이상 그에게 알맞은 곡을 찾지 않는다. 그는 이제 음악을 듣지 않는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는 아무 음악이나 들을 수 있다. 열어 놓은 어떤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곡이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방에 스며 들어오듯이. 그는 어쩌면 한 번도 진정으로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다. 그는 뒤척이고 눈을 감고 뜨며 창문을 보고 커튼 주름의 불규칙한 간격을 수없이 쫓아가고 밖에서 다가오는 소리의 멀고 가까움을 구별해 보고 다시 돌아눕고 눈을 감는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침대 위의 수평의 자세에서 침대가의 수직의 자세로 이동하는 데는, 생물계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시간만큼이나, 혹은 인류가 태어나서 죽음을 깨닫고 장례 절차를 고안해 내는 데 걸린 시간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는 연필을 깎는다. 여섯 자루의 연필을. 정성들여 뾰족하게 선정적으로. 꽃을 화병에 꽂듯이 먼지 낀 유리컵에 깎인 연필들을 꽂는다. 그는 보풀이 일어나는 싸구려 양탄자 위에 흩어져 있는 빨랫감을 주워 올린다. 서너점의 더러운 옷가지들을. 그는 세면대의 하수구를 막는다. 세면대에 물을 채운다. 세제를 풀고 속옷을 담근다. 양말과 수건과 팬티를. 자, 트라이.

그가 세면대 위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보지 않으려고 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게다가 거울을 피할 이유도 딱히 없다. 그 속에는 과잉으로 자란 수염과 플라스틱처럼 결연하게 무관심한 동공, 무정부 상태로 뻗친 머리카락과 거부적인 몸짓으로 구겨진 속내의가 그를 마주보고 서 있다. 그는 자신의 신원을 확인한다. 그렇다. 그는 대낮의 무수한 얼룩이 방향 없는 지도를 그려내고 있는 거울 속에서 모호한 의문부호를 양미간에 그려내는 스물여덟의 남자.

세상을 기쁘게 해 주려고 고생하면 고생할수록 세상은 그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그런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 서투르고 미지근한 방식으로 삶에 아침인사를 하고 저녁마다 영혼의 과장된 신음소리를 내는 한 남자, 그는 그런 사람에 불과하다.

설탕을 질료로 하는 몇몇 상품을 둘러싼 욕구의 다원구조를 통해 현대성을 고찰하고자 한 그의 논문, ‘현대적 주체의 비판적 고찰’은, 지금의 꺼진 컴퓨터 속에 SUGAR.HWP, SUGAR2.HWP, SUGAR3.HWP……잠들어 있다. 갑자기 부상한 유행성 주제인 설탕, 그것은 거울 속에서 드러난 또 다른 화면, 지금은 꺼져 있는 컴퓨터 화면 저쪽에 녹아 있다. 이렇게, 설탕에 대해 논문을 준비하는, 일주일에 세 시간의 강사 월급과 설탕을 근간으로 하는 회사 부설 연구소가 특정 자료와 함께 지급하는 경향성 소액 장학금을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이어 봐도, 월세 지급일을 맞을 때마다 일곱 평의 공간이 무한히 넓어만 보이는, 그런 사람이 하나 거울 저편에 서 있다.

세면대의 거품이 다 꺼지기 전에 그는 양말과 수건과 팬티를 주무른다. 수건과 팬티와 양말의 순서로. 역시 같은 순서로 그는 한 개의 수건과 두 벌의 팬티, 역시 두 켤레의 양말을 여러 번 물을 갈아주며 헹군다. 물에 양말의 보풀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여러 번. 오로지 오후의 한가한 시간에 속옷을 빨기 위해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그는 막 빨래를 마치고 얼굴을 든 남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행복한가?

 

늦게, 아주 늦게 저녁 열시나 열한 시쯤 그는 허기를 느낀다. 그는 침대 바로 옆에 허물로 벗어두었던 청바지를 주워입고 밖으로 나간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현기증이 뒤통수를 당기기도 하지만 그 현기증은 그에게 처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오래전부터 병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잠복 기간이 일 년 혹은 이 년 정도가 되는 그런 불치의 병원균이 오래전부터 그의 몸 속에 서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후두암이나, 악성 간염, 최초로 그에게 옮겨붙은 전대미문의 전염병. 그러기나 하라지. 차라리 그러기나 하라지. 불치의 병에 대한 가능성은 그를 오히려 안심시키는 쪽이다.

그렇지만 현기증은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 미증유의 병에 걸리지도 않은 그는 조용히 문을 나선다. 문 밑에 떨어져 대낮의 분주한 발길에 밟혀 온 아무도 줍지 않는 신문을 그도 주워들지 않는다. 그는 밖으로 나간다. 그는 신문지가 되고 수많은 사람이 그를 밟고 지나간다. 밟을 테면 밟아라. 끽소리 없이 밟혀 주리.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는 역 쪽을 향해 걷는다. 어쩌면 시간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를 수도 있다. 세상이 비쳐 울렁거리는 유리를 통해, 안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카페와 편의점, 그는 편의점에서 주간 시사지와 담배와 샌드위치를 사고 카페에서는 레귤라 커피 두 잔을 마신다.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어느 곳에서도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다시 그의 방으로 돌아온다. 일종의 관성의 법칙으로. 버려둔 더러운 식기, 읽히지 않은 채 며칠을 열려 있는 책, 구겨진 종이와 와이셔츠, 코드가 뽑힌 벙어리 전화, 정리되지 않은 빈약한 통장, 이제는 생산되지 않는 구형 오디오, 아무런 기억도 없는 침대 …… 옆으로.

그는 다시, 진화를 허락하지 않는 청바지 허물을 벗어 놓고 조금 전과 동일한 자세로, 패인 자리에 몸을 맞추기 위해 서너 번 뒤척여 그의 몸에 알맞은 자세로 돌아간다. 그는 눈을 감는다. 멀지 않은 곳에 생긴 고속도로, 도시 외곽을 끼고 도는 일종의 간선 도로, 그는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 바퀴가 시멘트 바닥에 내는 파찰음의 고속도로 음악을 듣는다. 한밤중에, 두세 시쯤? 시멘트 침묵의 사막 위에 생겨난 일종의 묵시록적인 음악을 듣는다. 그는 눈을 뜨고 있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눈을 감고 또다시 잠을 청하지도 않는다. 잠이 그에게 스며들뿐이다.

 

이튿날, 그 이튿날도.

그는 아무 때나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아무런 목적 없이 대중에게서 버림받은 시간의 거리를 돌아다닌다. 다음날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약속도 없이 해가 뜨고 다시 기울 때까지 잠을 잔다. 혹은 기다릴 것도 놓쳐야 될 것도 없으면서 밤새 내내 깨어 있기도 한다. 그의 머릿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이제 헛된 가능성의 기대로―오 제발!―흥분하는 일도 없으며, 꼭 그래야 되리라고 믿는 일이 마치 공동 연대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또는 연속적으로 어긋나버릴 때, 더 이상 소리를 치지도,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꼭 그래야 되리라고 믿는 일이 더 이상 그에게는 없는 것처럼 한다. 꼭 그래야 되리라고 믿는 일은 이제 없다.

그의 논문, SUGAR.HWP……로 입력되어 있는 현기증 나는 액정 상태의 글자들은 유령처럼 끝없이 떠돌 뿐, 끝내 종이 위에 사정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단 몇 번의 손놀림으로 그것을 단번에 지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기까지 이르는 여러 단계의 육체의 움직임이 번거롭기 때문이다. 수없이 수정된 문장들, 수없이 덧붙여지고 지워진, 어쩌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갈 미미한 용어와 표현들을 좀더 나은 것으로, 좀더 적합한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단 하나의 토씨나, 엇비슷한 두 음절짜리 단어를 세 음절짜리 단어로 바꾸기 위해 한밤중에 일어나는 일은 이제 그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그의 숨쉬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를 한밤중에 깨어 있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설탕이 아니며, 그에게 소리지르지 않을 제어의 힘, 분노하지 않을 무관심의 힘, 괴로움을 무화하는 무감각의 힘을 기르라고 종용하는 것은 더 이상 설탕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그의 부재는 이토록 소박하게 이토록 무심하게 아무런 환상 없이 열심히 계속된다.

한 잡지에 그가 쓰기로 약속한, 동인지 형식의 변변치않은 잡지에서 특집으로 부탁한 ‘부스러기 사회의 생리’라는 제목의 글도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부스러기를 던지는 사회와 부스러기에 달겨드는 사회, 부스러기에서 제외된 사회적 주체의 생리학, 부스러기 지구와 부스러기 대륙, 부스러기 국가의 생리학. 그 엄청난 것을 요구하는, 그가 눈을 껌뻑거리며 약속한 그 글은 단연코 쓰여지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인류라느니 미래라느니 진리라느니 하는 얘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멍청하고 불쾌한 사람이 있다니! 어떻건 그 글의 마감 날짜가 이미 한 주나 혹은 세 주쯤 어떻건 회복 불가능한 시간만큼 지나가 버렸다. 그는 중얼거릴 뿐이다. 원고 마감 날짜까지 지나가 버렸군.

그의 예고 없는 부재에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그의 전화 번호를 돌렸을 O의, Y의 P……의 전화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두 번이나 그들 중의 서너 명은 그의 방문 앞에서 그의 이름을 외쳤으며 문 밑의 좁은 틈으로 메모를 밀어넣거나 문위에 끼워놓고 가기도 한다. 누군가의 결혼식, 시시껄렁한 술자리나 기껏해야 여나믄 명을 위한 인쇄물을 출판 기념을 그와 함께 하기 위해, 그들이 임의로 결정한 많은 약속들을 그는 지켜줄 수도 없으며, 그의 부재에 대한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만한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그를 보러 지방에서 올라오는 C, 한 달에 한 번 정도 주말에, 토요일 저녁쯤에 올라와 월요일의 출근을 위해 마지막 버스에 올라타는 C, 그를 형이라고 부르며, 그에게서 사랑과 미움을, 안정과 자극을, 행복과 미래를, 유년과 노년을, 형제와 정부를, 애인과 동지를 찾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에 대한 확신의 부재로, 한 달에 한 번쯤저녁을 같이 먹고 같이 외출을 하며 같이 침대에 눕고 같이 등에 있는 점이나 세며 시시덕거리기도 하는, 그가 늦게 들어오는 비 오는 저녁, 어느 만화 영화의 주인공처럼, 방문 앞의 추운 복도에서 오래오래 기다린 후, 독감이나 걸려서 죽어버렸으면 하고 비장하게 희망 사항을 말하는 그녀를 그는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영원히,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이상이다. 영원하리라는 단어가 남기는 여운은 그에게 아무런 멜랑콜리도 전해주지 않는다. 적어도 이제 영원은 없다.

 

그에게 도착한 무수한 공식적인 우편물은 며칠씩 지나서 무작위적 선택에 의해 뜯겨지기도 하지만, 예고하고 촉구하고 명령하고 요구하며 독촉하고 광고하고 비판하고 위협하고, 그러다가는 다시 바라고 싶어하고 감사하며 원하고 명령하는 그 어떤 우편물도 그의 행동을 유발하지 못한다. 그는 그 현란한 다양성의 일원화 현상에 식욕을 잃는다. 식욕을 잃을 것까지도 없다. 현란한 다양성의 일원화 현상을 볼 것조차 없다. 그는 아직도 식욕을 잃을 여지가 남아 있는 자신에게 가벼운 실망을 표시한다. 너, 정말 한심한 너…….

그는 극기훈련을 한다. 가시나무 덤불 숲을 벌거벗고 지나간다. 절벽 위에서 몸을 던진다.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린다. 달리는 기차 밑의 철로에 눕는다. 달리는 모든 것에 뛰어든다. 해고된다. 체포된다. 강요된다. 구타당한다. 죽는다. 매장된다. 그것은 그에게 덧없는 웃음조차 유발하지 않는다. 그는 때려눕힌다. 고발한다. 고소한다. 성숙한 시민적 양식에 호소한다. 뺨을 갈긴다. 침을 뱉는다. 타락시킨다. 강간한다. 죽인다. 매장한다. 어느 것도 그에게 조금만큼의 흥분을 일으키지 않는다. 정말 한심한, 너무도 한심한 너…….

혹은 좀더 미묘하고 악의적이며 의도적으로 파괴적인 이런건 어떤가.

그 어느 날, 어둡고 차가웠던 어느 날, 그가 낮잠에서 깨어 일어났을 때 세상은 비어 있다. 일곱 살. 여덟 살.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방과 부엌과 마당과 동네, 그의 협소한 천지는 비어 있다. 그는 밖으로 나간다. 집에서 멀어지며 식구에게서 학교에서 멀어지고 세상에서 멀어진다. 그의 첫 번째 가출. 세상이 그를 버리므로 그도 이렇게 세상을 버린다. 너의 그 불치의 감상성.

어떤 모임에서 그가 피력한 ‘담론의 정치 의존과 그 해탈의 필요성’에 대한 견해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용이 문제되는 경우는 드문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다. 쉽사리 분류될 수 없는 그의 모호한 신상과, 모임에 대한 당근적 채찍을 아끼지 않았던 그의 평소의 태도 때문에, 전망 부재적이며 대중 모독적이며 자기 비하적이라는 수식어로 통렬히 반박된다. 그는 반박의 반박문을 뒤늦게 작성하나 그것은 우송되지 않는다. 너무 진지한 너, 한심한.

그가 진정한 열정으로, 분명한 소유욕에 부추겨져 무조건적으로 사랑한 동네의 여학생이 어느 날 사라져 버린다. 그녀의 집에 강타한 가스 폭발로 그녀의 식구와 함께. 그리고 그가 보낸 연애편지와 함께. 이튿날 교실에서 그에 앞서 변성기로 외래인이 돼 가고 있는 친구들은 폭발 사고 현장을 찍은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를 보았다고 떠들어댄다. 그에게도 변성기가 닥쳐온다. 그때부터 그는 ‘변신’, ‘날개’, ‘구토’, ‘백경’ …… 같은 작품에서 성적인 장면만 골라 읽기 시작한다. 그것은 본격적인 에로물의 에로티시즘보다 한층 예리한 감각을 제공한다. 가스 폭발은 너무…….

또 어느 날 고교 동창회 모임에서 그는, 한때 교회 문턱을 열심히 같이 넘던 친구를 만난다. 간헐적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헌금통에서 헌금을 훔쳐 그를 술집에 데려갔던 그 사업가 친구는, 그의 공모의 미소에 조소를 되돌려 준다. 정말 너는…….

또 어느 날은 …… 또 어느 날은…….

그는 이제 백지를 꺼내 놓고, 손을 씻고 잘 깎인 연필을 집어 들고 쓰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일과, 싫어하는 일의 목록을, 그를 화나게 하는 것과 그를 우울하게 하는 일, 그를 실망시키는 일과 절망시키는 일, 그를 슬프게 하는 것과 무섭게 하는 일의 완전한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엄살 많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지 않는다. 그는 이제 그런 식으로 자위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일화도, 어떤 망각의 뒷전에서 건져내 온 기억의 조각도 그의 혈액 순환의 속도나 호르몬 분비의 양을 변화시킬 수 없다. 어떤 기억도 기의 기쁨이나 분노, 감격이나 후회, 욕구나 구토, 불편함이나 우수……를 유발하기는커녕, 어떤 미묘함도 어떤 악의도 어떤 파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누워서 이렇게 오래, 충분한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방수 처리를 한다. 무엇의? 하다 동사는 자동사인가 타동사인가? 골치가 아픈 이런 질문은 던지지조차 않는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잠시 눈을 뜬다. 빈 복도에 울리고 있는 C의 목소리. 주말? 아마도. 그는 창문 쪽으로 돌아누우며 혀를 입천장에 살짝 부딪친다. 아아, C! 오, 제발 C! 이름을 부르고 방문을 두드리면 없는 사람이 나오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둔하다니. 교양 있고 세련된 그녀가 저렇게 결례를 하다니.

 

비가 온다. 그는 이제 편지함을 비우기 위해 일층까지 내려가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어떤 기적도 편지 형태로 그에게 다가온 적이 없다. 더욱이 열 개의 사은품이 증정되는 수입 카메라 광고나 늘 회원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함에도 다섯 이상을 넘지 않는 이름뿐인 무슨 연구회의 모임 날짜를 알리는 갱지라니. 게다가 그가 기다리는 기적은 없다. 기적은커녕 그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삼십 분을 걸어서 은행에 간다. 땅따먹기 놀이처럼 조각조각 부서지던 통장의 돈을, 간헐적인 과외 수입, 남의 이름으로 출판되는, 갑각류의 생태나 에스페란토의 기원 또는 암퇴치의 비결에 대한, 저자를 알 수 없는 글들의 조각난 번역비……. 몇 달 동안의 저금을 그는 모두 현금으로 찾는다. 밑부분이 겨우 채워진 누런 봉투를 들고 다시 삼십 분, 빗속을 걸어 그의 방으로 돌아온다. 인스턴트 요깃거리 몇 점, 담배와 함께. 그는 카펫 위에 비에 젖은 지폐 몇 장을 늘어놓아 말리면서 침대 가에 앉아 삶은 달걀을 먹으면서 담배를 피운다. 그는 샤워를 한다. 살이 물렁물렁해질 정도의 뜨거운 물에. 그는 녹지 않았다. 그의 뼈는 액체로 변하지 않았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그는 다시 침대 가에 앉는다. 그는 다시 담배 한 대를 피운다. 딱히 채울 거리를 찾지 못한 무료함은 긴 담배에 불을 당기지만 담배가 타들어가는 만큼 무료함을 줄어들지는 않는다.

침대와 책상, 열려진 채 잊혀진 서너 권의 책과 이제는 제법 두꺼운 먼지가 덮인 사물들. 씻지 않은 식기와 커피 잔, 깎여진 연필을 꽂고 있는 유리잔이 놓여 있는 식탁 겸 책상. 책상의 반대편 벽을 반쯤 채우고 있는 사 층의 책장. 책장이라기보다는 약 사십 센티미터 정도의 높이로 간격이 벌어진 네 장의 널빤지. 널빤지의 어느 것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끔 놀라운 균형으로 책장의 기둥 노릇을 하고 있는 책더미들.

이미 오래전에 폐기 처분했어야 할, 여러 시간대를 거쳐 오면서 누적된, 그에게 달라붙어 있던 약간의 기우―언젠가는 한 번쯤 쓰일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우―와 결단력의 부족으로 시골에서 하숙집으로 하숙집에서 누나네 집으로 누나네 집에서 이 방까지 따라오게 된, 물론 책의 내용보다는 책의 크기와 두께에 의해 분류되어 정연한 더미를 만들면서 얇고 좁은 널빤지를 받쳐주는, 언제라도 눈에 띄기를 기다리며 제목을 앞쪽으로 내보이며 쌓여 있는 수직적 투자가치 전문 서적과는 구별돼, 수평으로 무더기로 뒤죽박죽 쌓여 있는 책더미들을 그는 위에서 아래로 따라간다. 교과서와 잡지들, 교양 서적과 소설류, 한 번도 읽히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끼어들게 된 자서전류와 사전류, 충동으로 구입되어 한두 장 넘겨진 후 폐기 처분되기 전에 그의 방에 임시 주차하고 있는, 심령과학, 경제정보, 육법전서…… 같은, 그의 방에 들어왔기 때문에 받침대 구실을 하는 책들의 제목을 그는 읽지 않는 채로 보고 있다. 방심한 그의 시선은 아래층까지 내려오고 두드러지는 두께와 짙은 표지의 〈최신 지리부도〉에 잠시 머무른다.

그는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기차나 버스로. 비행기를 탈 수도 있다. 산간 지방이나 제주도, 홍콩과 마카오, 대만이나 하와이 정도까지는. 혹은 배를 타고 일본의 큐슈나 오사카까지는. 거리에 따라, 이박 삼일 정도, 혹은 삼박 사일, 최대한 사박 오일 정도까지는 문제없이. 당일이라면 어디든 비행기로 편도 여행 정도는 할 수 있다. 칸이나 뉴욕, 블라디보스톡이나 통부크투까지. 그는 언제든지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야자수 밑을 반바지를 입고 거닐며 호텔의 수영장에서 마사지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호화 호텔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카지노에서 일확천금을 벌 수도 있다. 향료 냄새가 풍기는 이국 식당에서 바닷가재 요리를 맛볼 수도 있다. 안내서를 펴들고 박물관을 거닐고 접는 의자를 들고 공원의 녹음을 바라보며 신문을 볼 수도 있다. 혹은 호텔 방 안에서 모르는 나라 말의 텔레비전 앞에 누워 지구 어디에나 풍성한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야자수 열매를 깨물어 먹을 수도 있다.

딱딱한 장정과 크기 때문에 맨 밑층으로 가게 된, 책장 전체의 무게를 받고 있는 그 책을 꺼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정화된 집중력과, 놀라운 체계를 동원해 그 방법을 생각하면서 담배를 핀다. 한 층 한 층 비우면서 맨 밑층의 책더미에 다다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널빤지가 약간 왼쪽으로 기운 것을 감안하면서, 좀 힘이 드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무릎으로 널빤지를 받친 후, 그 책이 끼어 있는 맨 밑의 더미에서 그 한 권만을 빼낼 수도 있다. 혹은, 그보다 나은 방법도 있다. 아래층의 널빤지를 메우는 책의 높이보다 약간―일 이 센티미터 정도―더 높은 책더미를 바로 옆에 준비해 밀어넣은 다음 그 책이 끼어 있는 더미를 빼내 절망적으로 밑에 깔린 그 책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그 모든 해결책은 그를 설득하지 못한다. 그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며, 지리부도를 꺼내는 일을 포기한다. 설령 애를 써서 그 책을 꺼냈다고 하자. 이미 출판된 지 십 년이 넘은 〈최신 지리부도〉가 지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사이 너무도 많은 국경이 변경되었고 지금도 변경 중이다. 게다가 꼭 필요한 장소는 늘 지도에 나와 있지 않다.

여행이라니. 그는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야 할 것이다.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구입해야 할 것이며 여행 가방을 꾸리고 도시를 가로질러야 하며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고 여행지의 공항에서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며 호텔까지 이동해야 하며……. 결정적으로 그는 모든 절차를 해낼 정도의 참을성이 없다. 야자수 부근에는 벌레가 많을 것이며, 2등급 호텔로 지정된 그의 호텔 목욕탕의 수도에서는 그의 방의 수도꼭지와 다를 바 없이 아무리 잠가도 약간의 물이 샐 것이며, 해변의 모래에는 발목에 걸리는 해초가 널브러져 있을 것이며 자세히 보지 않아서 그렇지 이름도 알고 싶지 않은, 암수 한몸인 지렁이강의 크고 작은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수영을 하기에 물은 너무 깊을 것이다. 카지노에서 양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간을 넘기도 전에 쫓겨날 것이며 박물관에서는 문명 초기의 상상력의 빈곤을 알려주기 위해 끝도 없이 나열되어 있을 수렵과 농경의 지루한 기구들. 타제 석기와 마제 석기, 활촉과 절구, 투박한 유리 귀걸이와 즐문토기, 유인원의 해골과 잠견이나 잠지를 닮은 옹관…….

그는 당장이라도, 어디라도 떠날 수 있는 여행을 포기한다. 밖에는 비가 오고, 여전히 요깃거리와 담배가 남아 있는 한, 그리고 비에 젖은 지폐 몇 장이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시 빗속을 걸어 여행사를 찾아, 더 싸고, 더 우아한 코스의 패키지 상품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러 빗속을 돌아다니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설령 비가 오지 않는다 해도. 설령 여행사가 그의 방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사무실에 있다고 해도.

 

어느 날 아침, 그는 한 벌 있는 여름 양복을 220볼트 다리미로 다린다. 그를 늘 지하철 역까지 내려다 놓던, 지하철 역 정류장 이상 더 멀리까지 타 본 적이 없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까운 곳까지 간다. 버스 안은 거의 비어 있으며 운전사가 켜 놓은 라디오에서는 정류장 이름을 알리는 낡아서 궁글려진 녹화된 목소리 사이사이로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차창 밖으로는 개발에 뒤쳐진 지역이 지니는 표시들을 나열하며 거리들이 스쳐 지나간다. 보라색이나 하늘색의 타일로 드문드문 복(福) 자나 수(壽) 자를 새겨 넣은 건물들, 오 층 혹은 육 층 정도의 건물 속에 볼링장과 목욕탕과 치과와 호프집이 뒤섞인 건물들, 상가 사이에서 우뚝 가릴 것 없는 하늘을 가려버리는 준공 중인 아파트 건축장, 기사 식당과 노점상과 시들한 고목나무, 벤자민, 오손이 나무 사이에 분홍 리본이 나부끼는 신장개업 다방 〈개미〉,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타고 점점 혼잡해지는 거리의 차량이 그의 시야를 가리고 유행가가 뉴스로 바뀌면서 시간은 한가하게 지나간다.

그는 충무로 쯤에서 내린다. 그리고 걷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끔 풀려나가는 운동화의 끈을 매기 위해서만 멈추면서. 무수한 사람들이 그의 뒤에서부터 걸어와 그의 앞 저쪽으로 멀어져가고,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먼 산의 나무들처럼 앞에서 다가온 사람들은 그를 스치고 사라져 버린다. 그는 걷는다. 충무로에서 명동 쪽으로, 명동에서 퇴계로 쪽으로, 퇴계로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끔 그의 운동화 뒤축을 밟으며, 거칠고 무딘 표정으로 그의 어깨에 부딪쳐오는 사람들, 앞을 보고 빨리 걸으며 어떤 사건에도 무심하게 그만큼 빨리 멀어져 가는 사람들, 가족과 돈과 탄생과 죽음에는 이의가 없이 감격하며, 이권과 권력과 민족과 핏줄에 대해서는 세 줄을 넘지 않는 논의 끝에 무조건 동의하는 사람들……. 그는 그를 스쳐 지나가는 그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그가 모르는 모든 거리를 그는 걷는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타성으로 가두 신문 판매대에서 주간지, 일간지와 주머니에 넣기 좋을 정도의 얇은 생활 교양지 ―「일과 삶」, 「나는 전문가」, 「우물터」같은 ― 도 한 권 집어든다. 그는 그것을 팔밑에 느슨하게 끼고 걷는다. 가끔 반투명한 유리 사이로 긴머리 여인들의 다리가 내보이는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가서 브랜드 커피를 마신다. 시선의 반쯤은 밖에 부유하는 사람들을, 반쯤은 펴 놓은 주간지에 던지면서, 사실을 말하면 아무것도 읽지 않으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커피 전문점의 소파는 편안하며 실내는 비좁지 않고 장식은 쾌적하며 간단한 점심식사 정도와 맞먹는 커피 맛은 인스턴트 커피와는 확실히 맛이 다르다.

그는 또 걷는다. 서울역에서 남영동 쪽으로 남영동에서 용산 쪽으로. 마치 이렇게 끝없이 거리를 걷는 것에 그의 운명이 바치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도시의 풍경이 그에게 미치는 심리적이며 육체적이고 이념적인 영향력의 미미한 정도를 시험해 보려는 사람처럼. 그의 사 분의 사 박자 걸음은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는다.

그가 밖으로 나갈 때는 지폐 한 장씩을 주머니에 넣는다. 지폐 한 장의 하루 경영은 그에게 약간의 질서를 제공하며, 지폐 한 장의 한계는 선택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그를 지켜주고, 지폐 한 장의 자유는 하루의 일정에 리듬을 부여한다. 그는 아무 곳에나 들어갈 수도 없으며 아무 곳에서나 식사를 할 수 없다. 그는 고궁이나 전시장, 야구장이나 동물원, 공원이나 도서관이나 화랑 주변을 맴돈다. 때때로 그는 영화관이나 백화점, 레코드 가게, 오디오 상점이나 책방 근처를 오래 배회하기도 하지만, 어떤 기이한 발명도 어떤 새로운 상표도 그의 욕망을 자극하지 않으며, 어떤 서적도 어떤 음악도 그의 꺼진 눈빛에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며, 어떤 놀라운 주제의 강연도 그의 심장을 뛰게 하지 않으며 어떤 전시회의 소식도 어떤 영화나 음악회의 예고도 그의 내부에, 은근한 기다림이 만들어내는 절제된 쾌락을 지피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찾았던 책이나 자료가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에도 그의 손은 나른하게 주머니에 꽂혀 있을 뿐이다. 모든 음악은 결정적으로 너무도 늦게 작곡되었거나 너무 이르게 연주되었으며, 모든 발명품은 그의 욕구에 비해 너무도 늦게 혹은 너무 빨리 발명되었음을 그는 미미하게 확인한다. 그에게 욕구가 있었을 때는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이 없었으며,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이 저기 보였을 때 그는 이미 욕구가 없어져 버렸음을 알아차린다.

저녁나절 그는, 조간지와 주간지, 월간지와 석간지, 안내장과 팸플릿, 설명서와 초대장, 정보지와 광고문, 이런 저런 인쇄물을 주머니에 가득 꽂고 투명으로 벽을 넘는 남자처럼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방으로 돌아온다. 친구의 메모 대신 관리비 용지가, 일거리를 맡기는 편지 대신 월말 영수증이 문 밑에서 그를 기다리지만 그는 허리를 굽혀 줍지 않는다. 발로 밀어 침대 옆에 쌓아놓을 뿐이다.

그는 미지근한 물에 인스턴트 커피를 풀어 덜 씻긴 찻잔에 부어 마시면서 무심한 손에 집히는 종이를 속삭이며 읽는다. 관리비 용지의 내역과 불상의 종류를 설명하는 전시회의 안내장, 관념 작업을 하는 민중 화가의 약력과 죽음을 이겨 낸 국제적 테너 가수의 불굴의 이력을.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참착하며 그의 음독은 정확하고 부드럽다. 모르는 단어 앞에서 망설이지 않으며 불분명한 인쇄는 한두 줄 뛰어넘는다. 그의 목소리가 음독하는 내용은 무리없이 그의 머리에 각인된다. 그의 모든 세상의 활동을 모든 사회의 소식을 소리내어 읽는다.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점점 희미해지는 일조에 그의 동공이 견뎌낼 때까지.

그는 종이 수거함이다. 그는 모든 소식을 삼킨다. 그는 서류 정리 파일이다.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희비애락, 모든 우여곡절과 삶의 부침을 묵묵히 저장한다. 어떤 소식도 그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먼 나라에서 날아온 대학살의 소식도, 광기로 치닫는 세계의 어떤 패권 다툼도, 어떤 유년이 조숙하게 경험한 끔찍한 살해 소식도, 세상이 애통해 하는 어떤 지성의 종언도, 그 어떤 파국, 그 어떤 파괴, 그 어떤 파행 조짐도 그의 목소리를 떨게 만들지 못한다.

머리 쳐들 때만 기다리는 모든 배덕의 기호들, 다시금 죽을 필요도 없는 모든 죽은 가치의 지치지 않는 부활, 무한히 반복되는 동일한 생존의 기교들……. 그 어떤 것도 그를, 더 이상,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그를 놀라게도, 분노시키지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그 어떤 것도 그를 절망시키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입력할 뿐이다. 실수 없이, 누락 없이, 과장 없이, 그 어떤 파국의 입력도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제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는다. 이제 아무도 그에게 약속 시간과 장소를 알리는 쪽지를 그의 방문 틈에 끼워놓지 않는다. 방을 청소하고 먼지를 털어냈으며 더러운 잔과 식기를 씻고 전화 코드를 꽂아 놓았음에도 아무도 전화를 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의 부재에 지쳐버린다. 이름도 잊고 있었던 뒤늦게 군대 간 격조했던 친구의 짤막한 안부 편지나 어떤 모임에서 만나 하루 저녁 어울린 아방가르드 화가의 전시회 팸플릿, 이 계절이면 얼마 전부터 심심찮게 도착하는 소식 끊긴 여자 친구들의 청첩장.

열어 놓은 창문으로는 그의 체온보다 몇 도씩 높은 것만 같은 열기가 새어 들어올 뿐, 그는 웃통을 벗고 앉아서 가상적인 구직 편지를 작성하고 그의 이력서를 덧붙이며 그 모든 것을 펜글씨 연습을 하듯 자필로 써내려 간다. 그의 주소를 쓰고 이름을 쓰고 우아하게 새겨진 인감도장까지 찍어 봉투에 감금한다. 그렇지만 어떤 편지도 우송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면담 요청이나 증빙 서류를 보충하라는 어떤 답장도 받지 않는다.

장마는 멀었지만 잘 닦아 논 투명한 유리의 저쪽 구석으로부터 검은 구름 때가 시야를 덮을 때도 있다. 그는 속삭이듯이 중얼거린다. 그는 결코 목청 높여 외치지 않는다. 번개야 쳐라. 벼락아 떨어져라. 그러나 하늘에는 늘 동일한 궤도를 움직이는 단조로운 디자인의 엇비슷한 구도가 아침이고 저녁이고 어김없이 계속된다. 그는 팔 층 창문턱에 팔을 늘어뜨리고 만유 인력의 법칙을 실험한다. 그의 팔은 그의 어깨에서 분리되어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의 두부는 목에서 떨어져 창문 저쪽으로 늘어지지 않는다. 그는 입 안에 고인 침을 둥글게 돌려서 밑으로 뱉아 본다. 그것은 상대성 원리에 따라 점점 빠르게 밑으로 내려가 희끄무레한 점이 되었다가 이내 공중분해되어 버린다.

 

우연히, 그가 도시의 남서쪽에 위치한 공원까지 걷게 된 어느 날 저녁, 그는 한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른다. 그의 큰 누이가 문을 열어 준다. 그의 조카―글쎄 그 아이는 벌써 초등학교 일 학년이 되었다.―는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며 매부의 상점이 문을 닫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매부의 상점은 잘 되는 편이고 아직은 기반이 확실치 않아 일찍 문을 닫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누이는 행복하다. 그는 여러 가지 소식을 듣는다. 두 달 후에 있을 모친의 제사에 그녀는―아마도 남편 없이 혼자―내려갈 것이다. 고향의 관공서에 근무하는 큰형은 곧 진급될 예정이며 부친의 고질적인 관절염을 치료할 획기적인 수술법이 고안되었으며, 사람은 머지않아 불사(不死)의 시대로 진입할지도 모른다.

저녁 준비를 하면서 누이는 비밀스런 인생관의 일단을 펼쳐 보인다. 누이는 그를 정말로 아끼기 때문에. 사는 것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우울한 것보다는 명랑한 것이 좋다. 가난한 것보다는 부자가 낫다. 혼자 사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다. 누이는 안정되지 않은 동생의 장래에 대한 걱정을 아끼지 않는다. 동생이니까. 그는 아슬아슬한 미소를 지으며 누이의 동어 반복을 경청하고 누이가 식탁에 꺼내 놓은 고등생선의 꼬리를 잘라 준다.

조카애가 귀가한다. 매부도 귀가한다. 조용한 가운데 저녁식사가 끝나고 누이가 그를 위해 준비한 방이 있지만 조카가 조른다. 아이는 외삼촌과 나란히 한 방에서 자고 싶어한다. 아이의 요구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들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는 자그마한 조카아이 방에 조카와 나란히 자리를 깔고 눕는다. 아이는 곧 고른 숨을 쉬며 잠이 들고 그는 누워서 벽의 보라색 꽃무늬를 따라가며 오랫동안 잠이 들지 못한다. 그의 삶은 어쩌면 잘못되었다. 아니, 확실히 잘못되었다. 아마도 누이의 삶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삶만큼이나.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정도로 서서히, 오래전부터. 그는 돌아눕는다. 그는 다시 돌아눕는다. 그는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온다. 그는 네온이 켜진 응접실의 어항 옆에 앉는다. 그는 그의 앞에 펼쳐져 있는 먼 미래까지의 항로를 어항 속의 물고기의 부유만큼 투명하게 들여다본다.

물고기는 잠을 자지 않는다. 그는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일 자리는 약간의 진부한 난항을 거치면서 어렵지 않게 구해질 것이고 그는 일의 종류에 관한 한 그다지 까다롭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받은 교육이나, 그가 쓰던, 거의 완성한 논문, 그의 관심―그렇지만 정말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이던가―이나, 한때 가졌을지도 모르는 그의 미지근한 정열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떤 직장. 쓰르라미 보청기 회사나 제약회사 외판원 자리는 어떤가. 혹은 한 미생물 연구소 구석방에 있는 자료 보관실에서 하루 종일 서류 정리에 혹사하다 실명으로 순직하는 것도 괜찮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그는 굶지도 않을 것이다. 굶다니. 그는 지금보다 더 풍요롭고 지금보다 더 쾌적한 삶의 조건들을 구비하게 될 것이다. 이미 익숙해진 쾌락과 안락이 요구하는 최저 생계비는 매년 증가할 것이며, 세상이 제공하는 쾌락을 향유할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어느 날 향유를 씁쓰름한 여운 끝에 그는 가끔 양념 같은 향수를 느낄 것이다. 한때 누군가를 사랑한 일이나, 한때 쓰다만 논문이나 편지나 글들, 그는 그것을 옛사랑의 그림자를 들추어 보듯, 무책임하게 애무하기 위해서 한두 번쯤 꺼내 볼 것이다. 아 내게도 한때는, 설탕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이토록 두툼하게 매달린 적이 있었군. 여가를 이용해, 혹은 다른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즐거이 착각하기 위해, 그는 무비 카메라나 바다 낚시, 컬트 영화나 행글라이더에 전문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중해 볼 것이다. 그도 어딘가에 미쳐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탐닉해 보기 위해서. 정말 그럴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어떤 감독의 숨겨진 실험작, 신형 무비 카메라에 대한 정보, 괴팍한 축구 선수의 경기나 희귀 음반, 요절 화가의 회고전…… 주위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다. 그들 사이에는 내밀한 경탄과 공모의 침묵이 형성되고 그렇게 생소한 이들은 서로의 익숙한 고독을 알아볼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 속에, 아주 주변적인 것에 몰입하는 아마추어적인 정열은 한동안 그의 삶의 잠정적인 문법이 될 것이다.

한 해가, 두 해가 가고…… 그가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지역의 환경 정화를 위한 주말 꽃 심기 운동이나, 불우 난민 돕기 바자에 아내와 같이 참석하거나……. 그는 또 어항을 들여다본다. 그는 음악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뛰어난 학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국경을 변화시키는 외교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진실을 말하면 그는 그 어느 것도 애호하지 않으며 그 어느 것도 진지하게 되고 싶지 않다. 그것들은 애호하기에는, 욕구하기에는 너무 거추장스럽다. 어떤 종류의 가상적인 삶도 그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삶도 그의 자장가가 되어 주지 않는다. 그는 오랫동안 어항 옆에 앉아 있다.

주말이 되고 그는 누이의 식구들과 고기 뷔페에 가서 외식을 한다. 그의 매부는 고학력의 처남 앞에서 세태 얘기를, 정치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날이나 전전날쯤 하루 종일 점포에서 들은 라디오 프로, 저녁 나절의 텔레비전 뉴스에서 들은 것을 반복하면서 질문을 던지고 아나운서만큼 흥분하며, 아나운서만큼 실망하며 아나운서만큼 감격한다. 조카는 졸고 누이는 고기를 뒤집느라 여념이 없고 그는 고기를 씹으며 아스라한 원시 시대의 소식을 듣듯이 매부의 얘기를 듣는다.

외식 후에는 고기 뷔페 바로 옆의 지하 노래방에 간다. 아이는 ‘핑계’와 ‘겨울비’를 부르고―조카는 엄청 조숙하다―누이와 매부와 그는 ‘산넘어 남촌에’, ‘목포의 눈물’과 ‘사랑만은 않겠어요’…… 같은 매부가 고른 노래를 부른다. 노래방을 나오기 전, 식구 전체는 그의 누이의 원대로 ‘네 꿈을 펼쳐라’를 합창한다. 그들의 합창곡은 93점을 기록한다.

이틀이나 사흘, 이렇게 그는 누이의 집에서 조금 머문다. 아무도 없는 아침나절 그는 먼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매일 외출한다. 나가기 전에 서랍에서 지폐 한 장씩 집어들고, 그는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가지 않는다. 기껏해야 서울역이나 남산, 야구장 근처나 대공원.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사람들, 엉덩이를 긁으면서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 손을 잡고 의자에서 침묵하는 연인들, 그처럼 가만히 앉아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돌아온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붙이지 않고, 성냥불 부탁이나 시간을 묻는 일 이외에 그도 그들도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은 야만의 시대를 터득한 그들의 철학에 어긋나는 일이다.

어느 날 서랍을 열었을 때, 그를 바라보던 지폐의 얼굴 대신 빈 서랍 밑바닥의 누런 합판이 잘못 숨긴 거짓말처럼 드러난다. 그렇지만 그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는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굶어죽다니. 그는 외출을 멈춘다. 그렇지만 꼭 더 이상 지폐가 없어서는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그는 이제는 어떤 이유건 꼭 외출을 할 필요도 없으며 외출이라면 할 만큼 했다. 없어지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라면 할 만큼 했다.

무엇에 대해서나 모른다고, 싫다고, 아마라고 대답하면서 이방인을 꿈꾸는 사람들, 완벽한 척하는 세상의 실추를, 부재를 통해 증명해 보이려고 잠자는 사람들, 천재가 되어버린 박제들, 그는 수많은 그들조차 되지 못했다. 그들의 길고 긴 계보는 아득히 끝이 없지만 그는 그 비밀결사에 입적을 할 수도 없다. 그들은 무서워했고 걱정했으며 경종을 울렸고 좌절하거나 이겨냈다. 그들은 너무 완벽했으며 비극적이었고 진지했으며 감동적이었다.

그가 부재한 사이 세상이 개과 천선을 한 것도 아니고, 그의 발밑에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지도 않았으며, 그는 그 사이 더 현명하게 사는 법을 터득하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시간을 멈추면서 주인이 되어 보려는 것도 아니었고 현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며 증명할 것도 없었다. 그는 더 비싸지지도 않았으며 더 싸지지도 않았다. 어떻건 그는 살았다. 그동안 잠시 잘, 살고 있음을 잊을 정도로 잘, 살았을 뿐이다.

 

어느 날 그는 군악대의 북소리와 함께 일어난다. 잠시 죽은 척하고 있다가 사 분 후면 다시 호들갑 떠는 북소리와 함께. 그는 전화를 한다. 아무 용건도 없이. 그는 편지를 쓴다. 그는 찻잔을 씻고 책상을 정리하며 침대보를 갈고, 저 더운 대륙의 늙은 대령을 흉내 내며 병 밑에 눌어 붙은 커피를 긁어낸다.

책상에 앉기 전에 그는 자동적으로 오디오의 버튼을 누른다. ‘푸른 기차’. 그가 다시 들은 음악의 제목은 이렇다. 모든 음악을 듣는 이유가 늘 그렇듯이, 이유 없이. 어떤 음악이 있다. 처음 듣고 조금 좋아한다. 혹은 처음 들었을 때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기지 않는 음악도 있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어쩌다 한 소절이 머릿속에서 돌아다닌다. 그리고 이 곡은, 서서히, 하루를 지내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된다. 다른 곡, 다른 핑계에 매달리기 전, 잠시 동안. ‘푸른 기차’는 그를 사랑한다. 그러니 어쩌잔 말인가.

―〈푸른 기차〉(1994)

 

 

최 윤 (崔 允, 1953 ~ )

최윤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최현무이다. 1966년 경기여중과 1969년 경기여고를 거쳐 1972년 서강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고, 1976년 서강대학 대학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주제와 문체 서술 방식 등에서 전통적 기법의 틀을 벗어나 다채로운 소설 문법을 시도하는 작가이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사회와 역사, 이데올로기 등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다룬다.

‘벙어리 창(唱)’(1989), ‘아버지 감시’(1990), ‘속삭임, 속삭임’(1993) 등은 이데올로기의 화해를,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88), ‘회색 눈사람’(1992)은 시대적 아픔을, ‘한여름 낮의 꿈’(1989), ‘너는 더 이상 너가 아니다’(1991), ‘푸른 기차’(1994), ‘하나코는 없다’(1994) 등이 관념적인 삶의 의미를 다룬 작품으로서 그의 소설은 다분히 관념과 지성으로 절제되어 남성적인 무게를 지닌 작가로 평가된다.

 

 

핵심 정리

▷갈래 단편 소설, 심리 소설

▷성격 관념적

▷배경 시간적 - 1990년대

공간적 - 서울의 8층 오피스텔. 서울역을 중심으로 한 시내 중심가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특징 ① 인물간의 갈등이나 특정한 사건 전개 없이, 한 인물의 내면 의식과 무의미한

행위가 건조하게 서술되고 있음

② 반복적인 일상의 행위를 부정하는 ‘~않는다’의 구문으로 서술되고 있음

③ 집에서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순환 구조를 가지고 있음

▷주제 도시 문명 속에서 삶의 의미와 정체성을 잃어 가는 현대 지식인의 초상

 

 

등장 인물

▷그 스물여덟 살의 대학 강사. 일체의 사회 관계 속에서 탈출하고픈 욕구를 가지고 있

으나 때로는 안락한 소시민적 삶을 꿈꾸기도 함

 

 

구 성

특별한 사건 없이 며칠 동안의 지루하고 무의미한 행위가 나열되고 있다.

▷발단 반복적인 일상을 거부하는 ‘그’

▷전개 목적 없는 외출을 하고, 가끔 소시민적 삶을 꿈꾸는 ‘그’

▷결말 외출을 멈추고, 일상생활로 돌아오는 ‘그’

 

 

줄거리

그는 아무 때나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기상을 알리는 시계 소리가 나도 그는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 멍하게 누워 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 연필을 깎고, 세면대에서 속옷을 빤다. 저녁 열 시나 열한 시쯤 허기를 느끼면 밖으로 나가 편의점에서 요기를 하고 그의 방으로 돌아온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그는 아무 때나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다음날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약속도 없이 해가 뜨고 다시 기울 때까지 잠을 잔다. 혹은 밤새 깨어 있기도 한다.

때로는 버스를 타고 가까운 시내에 나가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이곳 저곳을 배회하기도 한다. 그는 삼십 분을 걸어 은행에 가서 몇 달 동안의 저금을 모두 현금을 찾는다. 인스턴트 요깃거리 몇 점, 담배와 함께 그는 돌아온다. 한 벌 있는 여름 양복을 다려 입고, 버스를 타고 시내 가까운 곳까지 간다. 그는 충무로 쯤에서 내려서 걷는다. 충무로에서 명동 쪽으로, 명동에서 퇴계로 쪽으로, 퇴계로에서 서울역 쪽으로 걷는다. 그가 모르는 모든 거리를 그는 걷는다. 그는 고궁이나 전시장, 야구장이나 동물원, 공원이나 도서관이나 화랑 주변을 맴돈다. 영화관이나 백화점, 레코드 가게, 오디오 상점이나 책방 근처를 배회한다.

저녁나절, 그는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방으로 돌아온다. 그는 미지근한 물에 인스턴트 커피를 풀어 덜 씻긴 찻잔에 부어 마시면서 무심히 손에 잡히는 종이를 속삭이며 읽는다. 그는 웃통을 벗고 앉아서 가상적인 구직 편지를 작성하고 그의 이력서를 덧붙이며, 그 모든 것을 펜글씨 연습을 하듯 자필로 써 내려간다. 그렇지만 어떤 편지도 우송되지 않는다.

우연히 큰누이의 아파트를 찾아 하룻밤을 조카와 함께 자면서 지금보다 풍요롭고 더 쾌적한 삶을 보장해 줄 일자리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아주 사소하고 주변적인 일상에 몰입하는 정열의 삶을 꿈꾸어 본다. 주말에 그는 누이의 식구들과 외식을 하고, 노래방에 가고, 일상의 평화와 안락을 꿈꿔 본다. 이틀이나 사흘, 이렇게 그는 누이의 집에서 조금 머문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아침나절 그는 먼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서랍 속의 지폐 한 장을 들고 매일 외출한다. 서울역이나 남산, 야구장 근처나 대공원 등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돌아온다. 어느 날 서랍을 열어 더 이상 지폐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는 외출을 멈춘다.

어느 날 군악대의 북소리와 함께 일어나며 관습과 규칙의 생활로 돌아온다. 그는 전화를 하고 편지를 쓰고, 찻잔을 씻고 책상을 정리하며 침대보를 갈고, 커피를 타며, 오디오의 버튼을 누른다.

 

 

작품의 이해와 감상

이 작품에는 ‘그’라는 익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스물 여덟 살의 대학 강사이다. 어느 날 그는 반복되는 일상의 규칙과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는 일상적으로 해 왔던 모든 것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해야 할 직업인으로서, 생활인으로서의 모든 일을 갑자기 중단한다.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고, 하루 종일 멍하게 누워 있다. 또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기를 줄 여행 계획도 포기한다. 그러다가 그는 버스를 타고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시내로 나가 여기 저기 배회하다가 돌아온다. 그가 가는 곳은 은행, 편의점, 카페, 공원, 백화점 등 도시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곳이지만, 그는 겉돌 뿐이고 아무런 욕망도 느끼지 못한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는 어떤 감정의 교류도 갖지 못한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식도 그의 마음을 자극하지 못한다. 가끔은 취직을 한다든가, 소시민적인 취미 생활을 꿈꾼다든가 하는 소망을 가져 보기도 하지만, 그는 실행에 옮길 의사가 없다.

그는 일상의 관습과 규칙, 그리고 타인과의 일체의 관계로부터 철저히 벗어나 있다. 즉 현실에서 부재(不在)하고 있다. 그는 살 뿐이며 되도록 잘, 살고 있음을 잊을 정도로, 잘, 살려고 할 뿐이다. 그러나 어떤 부재의 현실도 일상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그는 관습과 규칙과 관계의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푸른 기차’는 이러한 인물을 통해 도시 문명 속에서 삶의 의미와 정체성을 잃어 가는 현대 지식인의 초상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일상을 거부하는 등장 인물의 심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않는다.”라는 문구를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 최 윤은 문체를 중요시한다. 그것은 “문체가 전부죠. 저 같은 경우는 여행지에서 사람 얼굴 볼 때마다 자꾸 끼적거려서 표현하고 싶어져요. 소설이란 삶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삶을 어떻게 다루는가는 결국 언어를 어떻게 다루는가에서 결정되니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죠. 문체는 꾸밈이 아니라, 신체에 비유하자면 혈액 같은 것이라고 봐요. 뼈가 이야기라면 혈액이 순환되면서 혈색으로 드러나듯이 문체는 겉으로 나타나죠. 글에는 목소리가 없지만, 그걸 들려줄 수 있는 것이 문체라고 봐요. 그러나 한국 문학에서는 아직도 문체론을 너무 외면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늘 갖고 있어요.”처럼 작가의 말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의 빈번한 서구어 번역체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문체뿐 아니라 소설의 기법에 있어서도 새로움을 추구한다. 특별한 사건을 만들지 않고 인과 관계 없는 행위들을 나열하고 있는 ‘푸른 기차’는 작가의 실험 정신을 보여 주는 대표적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 윤이 전통적 기법의 틀을 벗어나 다채로운 소설 문법을 시도하는 작가이면서도 이상적 단편 소설의 전범으로 불리는 작품을 내놓은 것은 그의 소설론이 전통과 실험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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