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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전문

성석제 '오렌지맛 오렌지' 전문

by 열공햐 202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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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맛 오렌지

성석제

 

 

비읍은 편집부에 새로 들어온 1)신참치고는 아는 게 많았다. 그런데 그가 아는 건 모두 조금씩 틀렸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보다는 사전이나 그 사전을 끼고 십 년 이상 먹고 살아온 우리를 의심하는 쪽을 택해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실수를 할 때마다 그의 별명을 그 실수를 상징하는 말로 바꾸어 줌으로써 복수를 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비읍 씨. 일 안하고 아침부터 거기서 뭐 해요?”

“차장님. 저 문방구 앞에서 우산 들고 있는 아가씨 다리 참 죽여 줍니다. 가히 뇌살적이군요.”

“비읍 씨. 이거 비읍 씨가 교정 본 거죠? 그렇게 2)뇌살 좋아하면 3)쇄도(殺到)를 살도라고 하지 왜 그냥 놔 뒀어요?”

“하하하. 리을 선배님. 선배님의 다리 역시 뇌살적이지만 저 아가씨는 4)춘추가 선배님의 5)연치에 비해 6)방년 이십 세는 적어 보이고 따라서 또 뭐냐, 7)원스 어폰 어 타임 8)투기9)칠거지악으로…….”

“지금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얏!”

그 다음부터 한동안 그의 별명은 ‘살도’가 되었다. 한동안이란 그로부터 한 달 뒤 ‘흥미 율율’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여름철이 되고 고등학교 야구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비읍은 제가 나온 학교도 아니면서 고향 고등학교라는 이유로 열렬히 응원을 하고 있었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그로서는 표 사서 야구장에 갈 일은 없었고 편집부 안에서 신문을 보면서 입으로 하는 응원이 전부였지만.

“우와아! 차장님. 어제 우리의 경상고 피처가 연타석 홈런을 깠습니다. 캐처는 6타석 4타수 4안타, 유격수는 도루가 네 개, 결승 진출은 맡아 놨구만.”

“이거 봐요. 비읍 씨. 그 학교가 자네 학교야? 그 동네는 그 학교 근처만 갔다오면 다 한 학교 출신이 되나?”

“헤헤. 차장님, 모르시는 말씀. 경상시야 한국인의 영원한 10)구도(球都) 아니겠습니까. 야구 하면 경상, 경상 하면 야구지요.”

듣고 있던 리을이 나섰다.

“그럼 동네 이름을 야구시로 짓지 그랬어요. 아냐, 비읍 씨 고향을 기리는 의미에서 앞으로 우리가 비읍 씨를 야구 씨라고 불러 줄게.”

*칠거지악 : 아내를 내쫓는 이유가 되는 일곱 가지 사항. 곧,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不順父母〕, 자식을 못 낳는 것〔無子〕, 행실이 음탕한 것〔淫〕, 질투하는 것〔妒〕, 나쁜 병이 있는 것〔有惡疾〕, 말이 많은 것〔多言〕, 도둑질하는 것〔竊盜〕. 칠출(七出). [준말] 칠거(七去)

 

어지간하면 질릴 법도 하련만 비읍은 천하 태평이었다.

“이거 사방에 적군의 노래뿐이니 완전히 11)사면 초가(四面楚歌) 일세. 오호 통제라.”

“비읍 씨,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말예요. 사면 초가에서 왜 적군이 초가를 불러요?”

“역시 리을 선배님은 여자라서 역사는 잘 모르시누만. 그게 말임다. 12)항우13)적벽대전에서 14)유방에게 포위가 됐는데 말임다.”

“적벽이 아니라 15)해하(海河)겠지.”

“차장님, 적벽이나 해하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말임다. 한나라 군사가 초나라를 포위하고 오래 있다가 보니까네 초나라 유행가를 다 배웠다는 검다. 항우가 듣다가 그 노래가 너무 슬퍼서 아, 졌다 하고 자살을 했단 말임다.”

“한나라 군사가 초나라 노래를 불러 줬다구?”

“그쵸. 그게 16)장량의 작전이었다 이 말임다. 아, 근데 차장님은 한참 이야기가 흥미 율율할 만하면 꼭 초를 치십니까, 그래?”

“흥미, 뭐?”

“또 초 치셔.”

“비읍 씨. 나도 못 들었어요. 흥미 뭐라고 했어요?”

“아, 율율!”

“율율?”

“율! 율! 왜 욧!”

흥미 진진(興味津津)을 흥미 율율(興味律律)로 우겨 바라던 ‘야구’말고 ‘율율’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가 한동안 17)자중을 하는 듯하더니 문득 결혼을 했다. 편집부에서 집들이차 그의 집을 가면서 오렌지 주스를 샀다.

“이봐. 거 뭐 마실 것 좀 내오지.”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비읍은 십 년 넘게 마누라를 18)호령하며 살아온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체면이 깎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타깝게도 그의 부인 역시 십 년 넘게 살림을 해 와 살림에 19)이골이 난 여인네 같은 몸빼 차림으로 나타나 20)홍분(紅粉)의 아리따운 새댁을 보러 갔던 사람들의 기대를 꺾었다. 그리고 그 부인이 내온 음료수가 비읍에게 새로운 별명을 선사했다.

“내가 산 건 백 퍼센트 천연 무가당 오렌지 주스였단 말야. 그런데 그게 언제 오렌지 맛 음료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어. 정말 환상적인 부부야.”

일동은 그의 집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그를 당분간 ‘오렌지 맛’이라고 부르기로 만장 일치로 합의했다. 백 퍼센트 오렌지 주스를 혼자 마시고 있을 그의 부인은 ‘오렌지 부인’으로 부르기로 했고.          ―〈재미나는 인생〉(1997)

 

 

 

성석제 (成 碩 濟, 1960 ~ )

1960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1986년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86년 6월 월간 「문학 사상」의 신인발굴에 시 ‘유리닦는 사람’외 4편으로 등단하였다.

1997년에 제 30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짧은 소설을 모은 책으로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재미나는 인생〉을 냈고, 중단집으로 〈새가 되었네〉,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호랑이를 봤다〉, 〈홀림〉을 냈다. 장편 소설로는 ‘왕을 찾아서’, 〈궁전의 새〉, 〈순정〉이 있다.

 

 

핵심 정리

▷갈래 콩트(conte), 장편(掌篇) 소설, 우화(寓話) 소설

▷성격 우화적, 해학적, 풍자적, 교훈적

▷배경 시간적 - 현대의 어느 시점.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음

공간적 - ‘비읍’이 입사한 회사 편집부, 그의 집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주제 가식적인 인물에 대한 풍자와 그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

 

 

등장 인물

▷비읍 지적 소양이 부족하고 고집이 세며, 인색하면서 체면과 허례를 중시하는 인물

▷회사 사람들 ‘비읍’의 실수와 단점들을 비꼬는 관찰자적 인물들

 

 

구성

▷발단 ‘비읍’이 새로 편집부에 입사함

▷전개 ‘비읍’이 그의 실수와 고집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당함

▷절정 ‘비읍’의 집들이 날, 선물로 받은 ‘오렌지 주스’가 아닌 ‘오렌지 맛 음료’를 대접함

▷결말 사람들이 그의 별명을 ‘오렌지 맛’으로 정함

 

 

줄거리

‘비읍’은 편집부에 새로 들어온 신참이다. 그는 아는 것은 많지만 조금씩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는 자신이 틀렸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해서 회사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회사 사람들은 그의 틀린 지식을 별명으로 지어 줌으로써 그를 비꼬기 시작한다.

그는 뇌쇄(惱殺)를 “뇌살”로 잘못 말하고, 출신 학교도 아니면서 자신의 고향 학교 야구부를 응원하고, 유방과 항우의 고사를 엉뚱하게 이야기하고, 흥미 진진(興味津津)을 “흥미 율율(興味律律)”이라고 말하는 등 실수투성이이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살도’, ‘율율’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어 그의 부족한 소양을 꼬집는다.

어느 날 ‘비읍’이 결혼을 하자 사람들은 그의 집으로 집들이를 가는데, 새댁은 회사 사람들이 선물로 사간 ‘오렌지 주스’를 대접하지 않고, ‘오렌지 맛 음료’를 내온다. 사람들은 정색을 하면서, ‘비읍’을 ‘오렌지 맛’이라고 부르고, 그의 부인을 ‘오렌지 부인’이라 부르기로 결정한다.

 

 

작품의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해학적인 수법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수필 형식의 콩트(conte)이다. 콩트는 일반적으로 단편 소설이라고 간주되는 것보다 더 짧은 것, 말하자면 손바닥에 쓸 수 있는 정도라 화여 ‘장편 소설(掌篇小說)’이라고도 한다. 인생의 순간적 한 단면을 예각적(銳角的)으로 포착, 표현한 가장 짧은 소설로, 기지․유머․풍자를 주로 다루고 있다. 대개는 프랑스에서 발달한 것으로 모파상, 도데, 투르게네프 등의 작품이 본래의 콩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우화(寓話)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인간 이외의 대상에 인격을 부여하여 풍자적인 수법으로 교훈을 전달한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이 비록 동물은 아니지만, 소설의 방식 자체가 특정한 한 개인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 전반적인 인간의 왜곡된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화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화적 특징은 그들이 빚어 내는 유머 속에 교훈을 드러내고자 한다.

성석제의 ‘오렌지 맛 오렌지’는 다소 지적 소양이 부족한 인물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이러한 인물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적인 시각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이 공격적이거나 날카로운 어조로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소설적 묘사의 저변에는 ‘비읍’과 같은 인물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즉 인간의 삶은 실수투성이이고, 이런 점이 삶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는 작가의 견해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해학성을 공격적이고 냉철한 비판적 요소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통해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태도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해학성과 관련하여 1930년대의 김유정과 비교할 수 있다. 김유정의 ‘봄봄’이나 ‘동백꽃’에서 나타나고 있는 해학성이 토속적인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성석제의 해학성은 현대적이면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유정과 성석제는 대상에 대해 애정어린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두 작가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어리숙하고 이기적인 인물들은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어조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도 동정하면서, 이해하는 과정 중에 건강하고 따뜻한 ‘웃음’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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