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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전문

김소진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전문

by 열공햐 2020.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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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사회와 그 적들

 

김소진

 

 

"아따, 목젖이 따땃해짐시러 가슴이 후끈허고 붕알 밑까지 다 노글 노글헌 게 이제사 내 몸띵이가 오붓이 내 거 같네그려."

담벼락에 바투 지퍼 올린 화톳불 가로 다가선 브루스 박이 엉거주춤 자세를 잡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아무도 돌아보거나 대꾸를 하는 사람은 없다. 불가에 둘러 앉은 사람들의 얼굴에 월렁월렁 끼얹어지는 불기운 때문에 눈동자에는 이글이글한 눈부처가 섰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씻지 않고말린 대낮의 땀자국이 번들거려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은 마치 가면을 둘러쓴 질겨 보인다.

"코피는 역시 목젖이 확 뒤집어번지도록 따끈할 때 빨아뿌는 게 제 맛이어라우."

브루스 박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가 뜨거운지 한 손씩 번갈아 들며 귓볼에 손을 갖다 댄다. 그는 자칭 '색소폰의 명수'로 밤무대 악사로 뛰는 사내다. 옷차림에서부터 이미 딴따라 냄새가 풍긴다. 한때는 '초원의 집'무대에서도 반주를 넣었다고 은근히 자랑 삼아 떠벌리곤 했는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구두에 흰 나팔바지, 그리고 가슴팍에 요란한 꽃술 장식이 돼있는 분홍색 블라우스가 왠? 주변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반죽이 좋아서 아무 사람들하고 나 잘 어울린다. 사수대 학생들, 일반 시민들, 대책위한테도 접근해 엉너리를 쏟아 내며 어느덧 구면지기처럼 시시덕거리는 품을 여러 번 보았다. 종이컵에 얻어 온 커피도 학생 사수대가 직접 끓인 걸 얻어 온 게 틀림없을 성싶다. 어쩔 땐 그의 속없는 너울가지가 역겨울 때도 있었지만 그것을 버르집고 나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새벽 한시를 넘은 시각이지만 병원 앞마당은 구석구석 서린 팽팽한 긴장감으로 초롱초롱하기만 하다. 규찰대에게 경찰의 동태를 묻는 소리, 삼삼오오 앞으로의 진행 사항을 숙의하는 모습, 간간이 터지는 구호와 졸음을 쫓는듯한 노랫소리.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오늘 새벽 경찰이 전격적 행동을 취할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병원 앞 도로 양쪽에 쌓아 둔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학생들이 교대를 하기 위해서 정문을 들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땜에 저그 밖에서 밤새는 갱찰은 모다 몇이나 될꼬?"

표천식 씨가 혼잣소리로 묻는다.

"글씨 한 천오백쯤 될끄나?"

"그럼 여긴 학생이고 으른이고 다 따져설랑 삼백도 채 안 되고 말이야. 근디 왜 당최 쳐들어 오지를 못한디야?"

"웬 봉창 뚜딜기는 소린. 아, 열사가 있응게 그렇제."

"그려 그런가부지. 열사 한나가 천군만마를 당해 내는겨."

"그러치도 않은 거 같구먼. 먼젓번에 안양 거시기 병원에서는 거기두 박머시기라는 열사가, 아무래도 배 만드는 노동자라구는 해쌓는디, 거긴 여기부덤 나긋나긋한 학생두 아니구 툽툽한 노동자들이 몇 백 명씩 떼루다 지켰는데두 모다 성한 데 없이 얻어터지고 열사 몸띵 이두 빼앗겨 갈갈이 찢겼다는디 건 뭐가 되는겨. 워치된 일인지 갈피 를 잡기 에려워설랑."

화톳불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옹송그린 자세로 얼굴을 구우려는 듯 불가로 바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난 빈 종이 컵을 화톳불 위로 내던진 브루스 박은 어느새 왼손목이 잘려 외팔이로 불리는 강종천씨 뒤에 깔린 스티로폴 위에 몸을 모로 뉘고 팔베개를 한 채 풋코를 곤다.

"제복이 뭘 혼자 그렇게 맛있게 먹나 그래 응."

표천식이 가슴에 고개를 쑤셔박고 있다가 입맛을 쩍쩍 다시며 눈을 뜨고 정재복을 보며 농지거리를 지른다.

"먹긴 멀 먹었다구 그 야단이구만. 아저씨두 참. 도시긴 엄연히 돌았나봐유. 아,오늘 낮부텀 여그 사람들 달라진 눈빛을 아저씨두 뻔히 보시믄서 그야말로 각통을 지르고 그래유? 민주불량배구 거리시위꾼 이구 어찌된 것이 끄나풀이라구들 난리를 치두만. 얻어먹을 건덕지가 무에 있다구설랑."

"그럼 영각쓰는 암소처럼 그렇게 되새김질하듯 입아구 좀 놀리지 말라구 그러잖아두속에서 회가 끓는지 헛헛한 게 생침이 솟구치는구만. 그리고 밤도둑은 절대 아녀. 그게 워치크롬 도둑질이여. 난 말이여......."

표 씬? 아래턱이 불쑥 튀어나오며 입이 흘끗 돌아간다.

"으이구. 징혀 저 인간. 또 그 씨나락 까묵는 소리여 잉? 저승사자도 도대체 뭘 허는 건지. 직무 유기야 직무 유기."

강종천 씨는 혀를 끌끌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병원 현관 앞으로 왜죽왜죽 걸어간다. 표씨는 어깨를 짓누르는 밤기운을 흠칫 밀려오는 몸서리로 털어내며 가늘게 찢은 눈을 들어 뿌연 밤하늘을 바라본다. 구멍 난 구름 사이로 미끄럼을 탄 달빛이 담장 밖 가로등 어깨 위로 새벽 안개처럼 축축하게 쏟아진다.

끙이야 깡이야.

표천식 씨는 달빛을 받으며 묏자리의 굿을 꾸리던 그 날 일이 생각났다.

그는 밤늦게 운구가 돼 하관시를 놓친 무덤을 헤설픈 달구질로 다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운구 행렬이 도중에 교통 사고를 당해 예정된 시간이 턱없이 넘어 버려 밤을 도와 서둘러 하관 작업에 임했던 거다. 웬만하면 달구질 때 치는 선소리를 빠뜨리는 법이 없건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대충대충 생략하고 넘어갔다. 산등성이까지 송 판으로 짜인 관을 목도로 옮기는 바람에 처진 어깨를 추스르느라 들 이부은 막걸리 기운 때문에 속이 활활 달아올랐다. 그 와중에서도 관을 털었을 때 망자의 옆구리에 꿰인 귀금속 두루주머니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손끝에 스친 염낭 쌈지는 묵중했다. 아, 이것이 그대로 땅에 묻혀 녹이 슬고 만단 말인가. 그는 명치끝에 괴어 있는 묵은 한숨 을 빨아들였다. 흥흥, 여보 노랑털이 벗겨지지 않은 황소의 누린내 나는 뒷다리 사골을 푹푹 고아 먹으면 살 것만 같아요. 부황이 들어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보며 나자빠져 있는 마누라의 노랑꽃 핀 얼굴 위로 검은 흙덩이가 쏟아졌다.

그는 그 날 새벽 아직 떼도 입히지 못한 그 묏등을 찾아 허위단심 산등성이를 밟았다. 땀이 밴 고무신 9안에선 능노는 발바닥 때문에 마치 밤새 내린 첫눈을 밟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느덧 하늘은 맑게 개 있었고 이곳 저곳에서 별똥별이 부싯돌 모양 떨어졌다. 땀이 흘러 눈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시야가 자꾸 흐려졌다. 망자의 엉덩이 살을 한 삽 찍어 내고 나서야 염낭 주머니를 찾아 냈다. 그러고는 삽을 그 자리에 버려둔 채 된비알을 어빡자빡 내달렸다. 그의 입에서 꾸역꾸역 새나온 기다란 신음이 발목에 자꾸 되감겨 왔다.

― 나는 도둑이 아니라고 했지만 무서운 순사 아저씨들은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어. 그렇게 경을 치는 분들은 아마 머리나 가심 어느 한구석이 무쇠일지도 몰라. 숙직실에서 곡괭이 자루가 두 개나 부러져 나가고 나서야 난 내가 어쩜 도둑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무서운 아저씨들이 하자는 대로 다 했는걸 암. 내 삽날에 찍혀 걸레처럼 해진 너덜너덜한 살덩이가 눈앞에 팔랑거리고 정말 사람 미치겠더라구.

"당신들 밥풀때기들 때문에 민주화 시위가 일반 시민들한테 얼마나 욕을 먹는 줄이나 아쇼? 당신들 도대체 누구, 아니 어느 기관의 조종을 받고 이런 망나니짓을 하는 거요?"

병원 현관 쪽에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외팔이 강종천 씨가 웬 사내와 드잡이를 하고 있었다. 병원 마당의 모든 시선이 그리고 쏠렸다.

"그래 우리는 밥풀때기다. 근데 당신이 뭐 보태준 거 있냐고 쌍."

"당신들이 뭔데 초대되지도 않은 곳에 끼여들어서 감 놔라 배놔라 판깨는 짓거리를 하냔 말이오."

서로 단단히 멱살을 거 섟?틀어쥐는 바람에 단추 두엇이 바닥에 떨어지며 곧이라도 종주먹을 들이댈 기세였다. 강씨의 멱살을 거머쥔 사내는 뜯어말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서부투자금융 홍보실 대리라는 신분증을 제시했다.

"아, 그러잖아도 병원 관계자들로부터 강력 항의를 받아 조심조심하는 판국에 왜 갑자기 병원을 향해 돌을 던지고 침을 뱉는 행위를 하느냔 말이죠 난. 이건 분명 우리 학생들과 대책위의 위상을 떨어뜨리려는 저의가 있는 고의적행동임에 틀림없다 이겁니다. 이제는 우리 시민들이 나서서 저런 밥풀때기에 대해 분명 선을 긋고 검찰에서

도 수사 의지를 밝힌 만큼 적극 수사에 협조해서라도 정화를 하든지 해야지 여론도 계속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흰 와이셔츠의 팔소매를 걷어붙인 사내는 허릿장을 지른 채 버티고 서서는 연설 조의 푸념을 털어놨다. 학생들과 주변 사람들에 떠밀려 화톳불 가로 떠밀리다시피 다가온 강종찬 씨는 바닥에 마른침을 세게 뱉으며 뇌까렸다.

"니기미 씨펄, 그래 시민, 시민 해쌓는데 느그덜 판이 을매나 오래 갈런지 두고 보자고."

"어따 웬일이여. 가 敾犬? 우리덜얼 바라보는 눈길들이 점점 사나워지는디 쌈박질까지 하고 나서면 워쩌자는겨?"

"얼룩이 성님은, 말이라도 고로케 창알머리 없게 허믄 내가 섭하지라. 조것들 말하는 뽄새 좀 보고도 그라요? 같이 민주화 투쟁 하며 기껏 고생함시러도 시상에 밥풀때기가 뭐라요, 열통 터지게. 사람이 입성이 누추하고 행동이 거칠다고 그렇게 깔보는 경우가 제대로 된 경우라요? 아 우리가 뭐 기생충이라? 싸가지 없는 것들 같으니라구. 민주화 투쟁 허기 전에 저런 고상짜들하고 먼저 와장창 한판 붙어야지라."

얼룩이 성님이라고 불린 전을룡 씨는 은평구 일대에서 고물 줍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거렁뱅이 두엇과 함께 천막 생활을 하는데 오른쪽 눈가에서 빰자위가 시커먼 기미로 뒤덮여 별명이 얼룩이였다.

"애초에 왜 병원에다 대고 돌을 던진감? 이 안동답답이야."

"그건 제가 잘못했지라. 근디 저그 오줌 좀 싸려고 백인제 선생인가 뭔가 하는 동상 앞을 지나려는데 현관 벽에 뭔 동판이 붙어 있어서 보니, 거시기 '산업재해보상보험 지정의료기관'이라는 글씨가 써 있더라구요. 그게 눈에 띄는 순간 가슴에서 불꽃이 파바박 일어납디다."

흰자위가 많아진 강씨의 눈에서는 수은등 불빛이 퍼렇게 되비쳐 나왔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프레스 밥'이 된 왼쪽 손목을 멋도 모르고 회사관리 직원의 사탕발림과 은근한 협박에 녹아 알지도 못하는 종이짝에 오른손 엄지를 꽉 눌러 주곤 돈 오백만 원에 팔아 먹었다. 그 통에 산업재해 지정을 받지도 못했고 받은 돈은 치료비 빼고 나니 기껏 길거리 완구 노점상 차릴 밑천만 달랑 남았다. 그나마 시작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노점상 일제 단속 ㅓ?때문에 밑천마저 홀랑 날렸다. 그 때 강씨가 노점 손수레에 쇠사슬로 목을 연결하고는 처연하게 버티는 사진이 몇몇 신문에 나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자연 술로 보낸 시간이 많아졌고 삶의 의지를 잃은 그를 두고 아직 애도 없고 혼인 신고도 생략한 채 동거를 하던 마누라가 밤봇짐을 쌌다.

― 거 이상하더라고요. 손이 없어지고 나서는 마누라랑 그 짓을 하려고 해도 꽝이더라고. 물건이 말을 안 듣는거야, 좆도 나는 열심히 마누라의 속살을 쓰다듬어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보니 뭉턱 왼손이 허공을 긁고 있는거야. 그러고 면 그년의 자궁은 용접한 철제 금고처럼 잠기고 몸띵이에는 오동잎 지는 찬바람이 일고 그렇더라구. 그러니 그런 놈팽일랑 어떻게 뭐 빨 게 있다고 따르겠냐고. 더구나 원체 색이 센 여자라놔서 밤마다 등허리를 활등처럼 휘어뜨리고는 도지개를 트는데 미치겠더라구. 그런데두 정작 도망질을 치니깐 눈깔이 뒤집어지더라구. 언 년이 그러는데 그 화상이 이 백병원에서 부엌데기로 일하고 있는 걸 봤다구 찔러 주두만. 그 길로 댓바

람에 달려왔지만서두 그런 년은 없다구 허더구만. 정은순이란 년은 듣도 보도 못했다잖아.

"쟈 숨소리가 왜 저리 거칠다냐? 여 재복아 상선이 좀 깨워 봐."

상선은 브루스 박의 본명이었다. 그는 스티로폴 위에 말린 새우처럼 허리를 돌돌 말고는 사레가 든 사람처럼 불규칙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재복은 쭈볏쭈볏 일어나 다가가서는 잠자는 사람의 발뒤꿈치를 툭툭 찼다. 그러자 브루스 박은 고개를 슬그머니 쳐들고는 게슴치레한 눈으로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선 형, 죽은 겨유, 산 거유?낮에는 그렇게 타잔 빰치게 팔팔 뛰며 다니더니 서리 맞은 가을 살무사 모양 뭔 꼬라지유."

"괜찮여, 증말로 난 괜찮여, 아무 걱정 말라구들 혀. 잠깐 졸려서 그런 것뿐이여."

브루스 박은 고개를 힘없이 늘어뜨리면서도 허공에 대고 손사래를 치며 다시 잠을 청하려는 듯 사추리 사이로 두 손을 깊숙히 찔러 넣고는 끙 하는 신음을 깨문다. 그러나 곧 가슴을 쥐어뜯듯 쓸어안고는 고통스런 기침을 한바가지 쏟아 놓는다. 재복은 자신이 입고 있던 카키색 작업복을 벗어서는 상선의 상체를 덮어 준다. 기침을 참고 있는지 상선의 어깨가 몹시 타객? 윤곽이 뚜렷이 드러난 엉덩이께에는 벌써 며칠째 뭉게고 지낸 때문인지 흐릿한 얼룩이 묻어났다.

재복은 호주머니를 뒤져 구깃구깃한 휴지를 꺼내 들고는 물코를 요란하게 풀었다. 그러고는 휴지에 묻어 있는 최루탄 가루에 코끝이 매워져 억지로 재채기를 서너 번 해 댔다.

재복은 날품팔이 인력시장에서 만난 상선을 떠올린다. 특이한 복장으로 항상 모인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즉석 투전판을 벌여 놓고 가끔씩 날품팔이들의 얄팍한 호주머니를 터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상선은 자신이 비록 인력시장을 떠도는 신세지만 막일꾼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예술인이라고 흰소리를 쳐 댔다. 그러나 재복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어쨌거나 정말로 악기를 켜며 밥그릇을 뽑아 내는 사람이라면 그를 청계천 6가 동화시장 뒤나 남대문의 북창동 어귀에서 만날 까닭이 없는 거다. 그가 악사 자리를 구하려면 낙원상가 2층에서 오후 4~6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동화시장은 봉제기능공 시장이고 북창동 어귀는 중국집 주방장이나 배달원 또는 요리사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곳이 아니던가.

그가 만능 기능인이 아닌 바에야 그는 기껏해야 하발이 시다나 잡역부, 짐꾼에 불과할거다. 재복이 토요일이나 공휴일께 가끔 새벽시장에서 허탕을 쳐 이사짐 센터짐꾼으로나 하루를 죽일까 싶어 남대문시장 퇴계로 어귀께로 가 보면 어김없이 거기서 짤짤이판을 벌이고 죽때리고 있는 상선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어디서나 눈에 잘 띄었고

반죽이 좋아서 그런지 잘 떠들어 준 대가로 생면부지의 사람들한테도 심심찮게 순두부나 사발면을 얻어먹곤 했다. 재복도 그에게 몇 번인가 말품을 팔아 준 대가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두부를 사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어딘가로 팔려 가는 걸 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혹 재복이 조건이 맞은 사람의 봉고차를 타고 갈 짝시면 상선은 한없이 부러운 눈길로 입가에 떨떠름한 미소를 베어문 채 우두커니 바라보거나 손가락을 까댁이며 인사를 하곤 했다. 한 번은 너무 안됐다 싶어 재복이 자신을 데리고 가던 털수세이 건축 현장 오야봉에게 저기 전봇대에 기대 선남자도 같이 데리고 가면 안 되겠냐고 은근히 근중을 떠봤더니 시동을 건 채 창문으로 빼고 상선 쪽을 힐끗 바라본 다음 킁킁 코웃음을 쳤다.

― 하하, 저 양반은 안 되겠시다. 여기가 뭐 딴따라 시장도 아니고 말이우다. 데려다 놔도 어디 지대로 품삯을 치러 내겠습디까?

재복은 흔들리는 봉고차 안에서 어디 가서 짱이라도 박혀야지 드러워서 다시는 이 날품팔이 인간시장을 기웃거리나 봐라 하는 오기를 어금니 위에 올려놓고 지그시 깨물었다.

영안실에서 나온 몇 사람이 화톳불가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걸어오면서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학생들의 말을 경청하는 걸로 봐서 대책위의 간부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뭐 불편한 점은 없는지요. 제가 대책위 집행위원으로 있는 현대영입니다. "

삼십을 갓 넘었을 듯한 얼굴의 사내는 한 표를 부탁하는 선거철 입후보자처럼 깍듯이 인사말을 건넸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썹이 유독 진한 얼굴이었는데 두터운 입술에다 사모턱이 져서 그런지 뚝심깨나 있어 보였다. 멀쑥한 덩치에 사수대 티셔츠를 입은 학생 하나가 자꾸만 흘러 내리는 뿔테 안경을 치켜올리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현대영 씨는 야자수 그림이 그려진 사파리 남방 윗주머니에서 88 라이트 담배를 꺼내 한 개비씩 두루 정중히 권했다. 담배는 빠른 속도로 뽑혀 나갔다.

"대책위 간부님이라니까니 한 말씀 올리겄는디 오늘 낮 같은 경우는 지가세상 살아 가며 어처구니없는 일일랑 한두 번 당한게 아니지 만서두 개중기가 막히고 복장 터질 일이지라."

전을룡 씨가 두런두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말꼬리는 사뭇 떨려 나왔다. 현대영 씨는 두 손으로 감싼 라이터를 전씨의 입가로 들이대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터 불 때문에 전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발그스레 달아올랐다가 시퍼런 낯빛으로 돌아왔다.

"야, 저기 숨겨둔 두 살짜리 두꺼비 하나 모셔 내오라구. 그래두 이렇게 손수 오셨는데 뭔 변변한 대접은 아니라두 쓴 쐬주 한잔은 디려야지 헐헐.

아니, 아니 그렇지 그 화단 덤불 뒤 시멘트 종이에 싼 거, 그렇지."

"원래 이 병원 마당에서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 화툿불이나 음주는 돼있습니다만. 경건한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워낙 병원 입원 환자들의 항의가 엄중할 뿐 아니라 여론도 그걸 파고들면서 대책위를 곤란하게 만들어 놔서요. 여러분들 이미지에도 별로 안 좋을 듯 싶습니다만. 그리고 전 가톨릭 신자여서 되도록이면 술을 삼가고 있 죠."

"그럼 댁은 신부라도 되려는 거요? 보니깐 술 담배 골초인 신부도 내 억수로 봤시다. 난 종교에 대해선 개뿔도 모르지만 뭐 전생 따지고 후생 따지고썰 풀라치면 아예 때려치우쇼. 씨도 안 먹힐 테니. 우린 그저 이 소주 한 모금이면 전생이고 후생이고 나란히 목구멍을 타고 뻐근히 녹아드는데, 안 그렇소 행님?"

강종천 씨가 이빨 사이로 소주 뚜껑을 뱉어 내고는 그대로 병을 쳐들고 하늘을 보며 깡소주 나발을 불어제친 뒤 전을룡 씨에게 건네주었다. 현대영씨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이맛살에 깊은 주름이 스쳤지만 곧 사라졌다.

"오늘 지냑에, 누가 쓰기 시작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소위 밥풀때기라고 불리는 우리 같은 축들을 학생인지 아니믄 대책위 사람들인지가 손가락 끝으로 백골단에 찍어 주는 바람에 달려 갔시다. 그래도 같이 이뤄 보자고 싸우던 사람덜인데 그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구만요. 듣자니 대책위 쪽에서 백병원과 시위 현장에서 민주 시민을 가장 한 폭력배들이 온갖 행패를 부리며 폭력을 선동하는 등 대책위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고 있는데 규찰대를 조직해 이를 막고 배후를 밝히겠다는 성명을 냈다고도 허는데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겝디다."

"우선 그런 일이 일어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책위에서 알아본 바에 따르면 누구누구를 찍어 준다거나 하는 일은 논의된 바도 지시한 바도 확인했습니다. 전혀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봅니다만. 어디까지나......."

관자놀이께에 힘줄이 불끈 솟쳐 오른 강씨가 결기 때문에 잠겨 버린 목소리로 외쳤다.

"쓰레기통의 고등어 대가리같이 썩고 무능한 정권 아래서는 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돼 몇 년 전부터 야당이 개최하는 집회를 쫓아다녔수다. 그러나 야당 사람들도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학생들의 시위로 옮겨 왔는데 우리들이 학생들과 달리 움직인다고 해서 기충 민중인 우리를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는가, 이 말이우?"

"그러게 첨부터 눈 먹는 퇴끼 얼음 되는 퇴끼 따루 있다 이거 아닙니까?"

현대영 씨는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대책위의 얼굴에 먹칠을 하기 위해 정보기관에서 꾸미는 공작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생겼었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또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 대책위는 검.경으로부터 아마도 여러분들을 일컫는 말인 듯한데, 과격 폭력 시위를 일삼는 밥풀때기들의 수사에 협조해 달라는 제안을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찰에 여러분들도 김귀정 양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객임이 분명하므로 연행에 협조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럼 공식 입장 따루 안으로 꼬불여 둔 입장 따루 이렇게 따루 국밥집이라도 차려서 그렇게 허나사나 같이 투쟁하는 동지들 등에다 칼을 꽂는답디까?."

재복은 가슴팍을 펑펑 두들기며 울부짖었다.

"같이 애써 주시는 건 충심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조직이 꾸려진 이상 그에 걸맞는 규칙과 체계가 있는 법이지요."

"누구한테서 고마움 사려고 투쟁을 했 ?건 아니니까요, 공치사는 허실 필요 없시다. 어떤 사람들은 좀 빼뚤하게 행동한 게 사실이쥬. 뭐 대가나 바라고 싸우는 듯이 음식을 달라 어쩌라 하는 얼빠진 치들도 있었고, 아무 허락도 맡지 않고 병원 사무실이나 빈 입원실에 몰래 들어가 떼잠도 잤으니깐 영락없이 꼴사나운 부랑아 행티를 낸 거죠. 지들도 잘 알아요."

바닥에 펼쳐 놓은 신문지 쪼가리를 간신히 더듬던 표천식 씨가 실성실성한 목소리로 끼여들었다.

"헌디 꼬르비초빠가 당최 뭐 하는 치가? 이크, 요 입초사. 사진 봄 시러 먼젓번 아닌감?"

"천식이 형님은 좀 국으로 가만히 있으시소 마. 절대루다 개안심더."

"그래 말이다이. 그분이 그래도 명관이었지. 끽소리 없이 해치우는게 보통 수완이가?"

"그런 것들이 사소한 문제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만 해도 옷차림 보니깐 저기 누워 계신 분인 듯싶은데 저 명동성당 앞 공중전화 박스를 깨트리고 그 유리 족각으로 자해 소동을 벌이고 하면 모두가 정말 난처해집니다. 어제 검사들과 부검 의사들이 병원 구내에 들어왔을 때 일부 사람들이 거친 행동을 보여서 언론에는 봉변 운운하는 기사가 나갔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그들이 진짜 부검을 하기 위해서 들어온 게 아니고 차후 병력 투임을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 축적용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사람들 대충 혼내주는 건 단순한 화풀이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들의 의도에 말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민주화 운동 세력은 일반 국민이나 시민들과, 말하자면 물줄 기와 물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 우리 민족민주 세력은 대중의 지지 없이는 존립할 수 없죠. 그런데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아무한테나 심한 욕설을 퍼부어서 토론 분위기를 망치거나 국민대회가 다 끝났는데도 계속 지나가는 차량에 돌을 던지며 시민들의 일상 생활에 불편을 주는 것, 그리고 같이 죽자는 말로 공포 분위기를 부추기는 일이 솔직히 많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어떤 분은 한국은행을 불태우러 가시는 얼토당토 않은 발언도 하시더군요."

"낮에 핏방울 튄 런닝구 입구 댕기다가 주의를 받은 친구가 바로 저기 누워있는 상선이가 맞기는 허지만 자해헌 거는 아뉴. 최류탄 파편이 살 속을 파고든 거라니까유. 아, 남은 가라곤 몸띵이밖에 없는 사람들이 워치케 지 손으로 몸을 상허게 허것슈."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의식했는지 상선은 가는 한숨소리를 길게 내쉬다 말고 잠꼬대를 몇 마디 주절댔다.

"나두 델고 가..... 더두 말고 이만 원....... 응 좋다구."

"은행을 불싸지르러 가지는 말은 지가했구만요."

강종천 씨는 사위어 가는 화톳불을 쏘삭거리며 느럭느럭 입을 뗐다.

"까놓구 야그하자면 지가 뭐 은행에 알토란처럼 묻어 둔 통장이 있남요 아니믄 새록새록 붓는 적금이나 주택부금이 있는감요. 거미줄 한 올 같은 인연도 없어라. 한여름 더위를 먹다 못 해 은행에 들어가 보면 괜히 은행강도 취급을 하는지 청원경찰들이 페쇄회로 켤라 두 눈 부라리며 사납게 눈치 주는 턱에 괜히 캥기는 신세다 보니......."

"아, 지금 비난을 하기 위해서 그런말을 꺼낸 건 아닙니다. 다만 그런 과격하고 충동적인 발언은 지금 우리의 투쟁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것 이렇게 말이죠. 폭압적인 반민주적 통치기구, 고질적 악법과 불평등한 제도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의당 철폐돼야 하지만 예를 들어 은행 같은 제도는 그것과 다르다 이 말씀입니다. 그것은 시민사회의 고유한 제도요 핵심적 현상이기 때문이죠. 파출소를 기습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어려운 말 허지 마슈. 내가 보시다시피 외팔이 빙신이다 보니 겨우내 일자리도 못 찾고 세종대왕님이 그리워 껄떡거릴 때도 은행 창고에는 돈이 썩어났시다. 그게 억울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면서 은행이 배고픈 사람 구제하는건 제벌들 돈 대 줘서 땅투기나 허게 하고 알 만한 사람에게 떡고물 잔치나 베푸는 데루다 밑구멍 틀어막는, 그따우 마름 노릇밖에 헌 게 뭐가 있었냐 이 말이우. 그리고 막말루다 우리 사회가 돈으로다 돌아가는 자본주의사회 아니유? 그렇다믄 문제는 돈이지. 독재도 지들 잘먹구 잘살려고 허는거고 민주화 투쟁은 그와는 다른 맘에서 잘먹구 살려는 건데 그 와중에서 돈줄을 거머쥔 은행을 호령할 수가 없다믄 되레 없애는게 뭔가 시상이 변하는 데 보탬이 될 거란 밑천 짧은 생각을 먹어 봤던 거우다."

"아무튼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경찰이 여러분들이 삐삐에다 일당 운운 하는 걸로 봐서 조직적 배후가 있다고 몰아치며 시경 특수대까지 낀 전담반을 편성해 전원 검거할 계획이라니깐 나름대로 신변 안전에 각별히 신경 쓰여야 할 줄로 압니다."

"허허, 삐삐요?애, 덕길아 천식이 허리에 있는 그 고장난 삐삐 좀 보여드려라. 시위 현장에서 주운 건데 망가져서 먹통이야요. 저 천식이란 사람이 실성기가 좀 있어서 아마 장난으로 가지고 놀기는 했어도...... 그리고 아누가 일당 받고 이런 짓거릴 허겠수?

유서를 대신 써 줬다는 괴상망측한 억지하고 수법이 똑같은 건데 왜들 그러는디..... 날품팔이들이야 어디든 모이면 일당 얘기 아니냐구요. 아, 이바구를 어디서 듣겠남?이 시위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제까닥 밥그릇 찰 수 있도록 짬짬이 단도리를 해놔야죠."

"근디 집행위원의 말씸이 쪼까 요상시럽네요 잉. 갱찰에서 우리덜 얼 때래잡으려고 작정을 오지게 해뻔졌으니깐 더이상 대책위 쪽도 신변 안전을 보장헐수 없으니 알아서들 토껴라 이것이어라? 그것이 갱찰을 폴아서 손 안 대고 코 좀 풀어 보겠다는 심산이어라?"

"그래 그렇게 계속 억지를 부려들 보쇼."

현대영 씨는 짐짓 화가 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서슬에 꾸벅꾸벅 턱방아를 찧으며 졸던 표천식 씨가 눈을 휘둥그래 뜨고는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현대영 씨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는 읍소를 시작했다.

"애고 행님, 그저 목심만 살려 줍쇼. 이렇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겠심더.

하모 제가 훔쳤제라. 그거 한나도 빼쓰지 않고 여기 있제라. 어어,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이게 어디로 갔지, 애고 나는 이제 영락없이 황천길이다. 사잣밥을 덜미에 짊어졌네 응."

표시는 양짓녘에서 서캐를 뒤지는 동냥아치처럼 자신의 허리춤을 이리저리 까발리면서 끊임없이 구두덜냈다. 거기에 화답이라도 하는지 브루스 박상선도 암만 몸을 흔들어 대도 질기딘질긴 잠꼬대를 푸닥지게 쏟아 냈다.

"저놈 잡아라.... 적이다 적.... 난 시민이야.... 문좀 열어 달라고.....나좀.... 헉헉.... 내게도 열어줘.... 아우....."

"제발 그만둬, 이 바보 멍충이야. 열리긴 무가 열렸다는 거야. 다 닫혔엉, 다 닫혔다구."

재복은 갑자기 疸??두 손으로 감싸고 쥐어뜯으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때맞춰 정문을 들어서는 구급차의 전조등이 무대 조명처럼 들이닥쳐 그를 어둠 속에서 판재 갔다.

전날 오후 백병원 구내에서 시국 대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둥그렇게 모여 앉은 오륙백 명의 시민 학생들은 발언권이 주어지는 대로 한가운데로 나와 핸드 마이크를 받아 쥐었다. 새벽에 있었던 경찰의 바리케이드 기습 철거 사건 때문이지 핸드 마이크를 타는 목소리들은 자못 격양된 음조를 띠고 있었다.

"민주화 투쟁을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만 우리 입원 환자 일동은 나름대로의 쾌적하게, 아니 쾌적하지는 않을망정 시달리지 않으면서 치료를 받을 권리도 존중되어야 하며 이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주장으로서 마땅히 그리고 즉각적으로 관철돼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우리 시회가 건전한 시민사회냐 아니냐 또는 민주화 운동이 건전한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하는 중대한 지표로서 간주되리라 확신합니다. 지금 각종 신경 계통 질환을 겪는 환자들도 그렇지만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이 백병원 이층 정신병동의 오십여 정신질환자들이 곧이라도 소음 발작을 일으킬것 같다는 담당 과장의 소견이 이미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모쪼록 잘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입원 환자를 대표해서 나온 듯 오른 다리에 석고 붕대를 한 스포츠형 머리의 사십대 남자는 차분하게 마무리를 한 뒤 핸드 마이크를 사회자에게 넘기고는 목발을 추스르며 빠져 나왔고 잔잔한 박수가 그의 뒤를 따랐다. 시국 대토론회는 거의 정리 단계에 들어선 듯했다. 사회자는 더 이상 발언해 줄 사람이 있는가를 찾는 눈치더니 자, 그럼 오늘 이 자리에서 나왔던 얘기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면서 분위기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애국 시민이 아니면 꽃을 보낼 자격이 없다니깐. "

영안실 쪽에서 왁자한 고함이 터져 나오며 돌연 시골 난장이라도 선 듯 왁자해졌다. 몇몇 사람이 큼직한 화환을 땅바닥에 태질을 치고는 그 위로 올라가 작신작신 짓뭉개느라 널을 뛰는 게 보였다. 서너 사람은 곁에서 그들을 마리느라 진땀을 빼는 모습이었다. 뭐야, 뭐 하면서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리고 답쌓여 들었다.

"3당 야합의 장본인이며 현 시국 불안의 주범 가운데 한 사람인 변절 정치인의 화환이 어떻게 무자비한 공권력에 무참히 숨진 우리의 순격한 동생 귀정이의 영안실에 버젓이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밥풀때기들이잖아."

둘러선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듯 뇌까렸다.

"그 말에 반대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러한 행동은 너무 과격하오. 우리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으로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기로 이미 의견을 모은즉슨 앞으로는 그러한 감정적 행위를 삼가 주기 바랍니다."

머리에 희끗희끗한 새치가 섞인 오십대 가량의 사내가 점잖게 오금을 박고 나왔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말들이 간간이 터져 나왔다.

"지금은 열사의 주검을 지키는 일이 그런 쓸데없는 일로 저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여론에 빌미만 제공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사수대 셔츠를 입은 대학생이 한마디로 간추려 대답을 했다.

"무슨 소리야. 가장 앞장 서서 싸워야 할 대학생들이 시신 사수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시위를 해서 싸울 생각은 안 하니 그게 바로 문제가 아니고 뭐란말이야. 싸우기가 겁나는 놈들은 당장 이 자리를 뜨라구."

"아무렴, 백골단이 귀정이를 죽였으니 너희들도 의당 백골단을 죽여야 야퀴가 맞아떨어지지 않냐 이거야. 아, 안그래? 내 말이 틀렸냐구?"

그러나 그 목소리는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화환을 짓밟았던 사내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한 발짝씩 더 죄어들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그러한 단세포적 복수 심리를 갖고 모이진 않았소. 우리는 또다시 누구의 피를 보자고 그러는게 아니란 말이오. 분명해 말해 두지만, 우리는 다만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 싸우려 할 뿐이란 말이오."

"아, 그러니깐 그런 걸 위해서라도 열심히 싸워야 한다는 거 아뇨? 아무도 용감하게 나서서 싸우지도 않는데 누가 거저 그런 자유와 평화를 선떡 돌리듯 집어 준답디까?이마빡이 터지도록 허벌나게 싸워도 될까말까 한데....."

"그렇게 책임성 없는 말이 어디 있소?모든 걸 적대시하고 파괴하려고만하는 건 기회주의자의 또 다른 측면일 뿐이오. 민주화 시위도 이제는 마구잡이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이렇다 할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어느 정도 룰을 지켜야 하는 경기나 마찬가지란 말이오."

"뭐요?그러면 이게 무슨 심심풀이 고스톱판이오 아니면 섯다판이란 말이오 잉? 목심을 걸고 뛰어든 판 琯? 그러면 내 말 좀 듣소, 저쪽은 항상 단풍잎 두 장짜리 장땡 들고 판쓸이를 헐려고 대들 판국인데 그깟 룰인지 뭔지 지켜감시롱 시위는 애시당초 혀서 뭣 헐라까나 잉?

아, 안그렇소?

지 말이 틀렸으면 으디가 틀렸는지 꼬잡아 좀 주소."

메기처럼 커다란 입을 가진 사내는 답답한지 그 자리에서 쿵쿵 발을 구르며 한 발짝 성큼 사람들 앞으로 다가섰다.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봐도 그렇고 그간 우리가 쌓아 온 경제․사회적인 역량을 보더라도 우리 사회가 열린 사회의 구조로 접근해 가고 있는 것은 틜サ?부인할 수 없는 흐름이잖소. 이제 그 흐름의 물꼬를 정치 쪽으로 돌리려는 과도기적 진통을 지금 겪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오."

"무슨 비맞은 중의 염불 소리런가 잉. 사회가 무슨 대문짝이어라? 열리고 닫히게?"

"여기서 열린 사회라는 긴 계급이나 종족 그리고 이데올로기라는 신화가 더 이상 개인에게 굴레가 되지 않고 개개인이 사회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질적으로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 물질적 풍요와 평등을 이룰 수 있는 마당이며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눈뜬 다수에 착실하고도 양심적인 사회 운영이 기본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가르키는 것이오."

"당신네들 지금 자꾸 어려운 말을 씀시롱 머리 속을 헷갈리게 하는데 한번 물어나 봅시다. 우리, 우리 하는데 도대체 거기에 낄 수 있는 축은 누가 되는거요? 이데올로기니 신화니 이성적 원리니 하며 거창하게 빚어 내는 사회라면 우리 같은 못 배우고 빽줄 없는 떨거지들은 여전히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할게 불 보듯 뻔한데 뭐가 진정한 사회란 거요?"

"그건 기회의 문제인데 그 기회의 범주는 갈수록 넓어....."

"필요 없다. 기회를 따지는 놈들이야말로 바로 기회주의다. 우리에게 토론은 더 이상 팔요 없어. 당장 청와대로 가자."

밥풀때기로 불린 사내들은 들고 있던 각목으로 시멘트 바닥을 두들기며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살인자들을 타도하자!"

"도둑놈들을 몰아내자!"

그러자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포위망을 압축시켜 왔다. 기세가 등등해서 구호를 외치던 사내들은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는 듯싶자 멀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들 두지 못해!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구. 이따위로 나오면 우리는 당신들을 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어. 어서 그 각목을 바닥에 놓고서 순순히 물러서라구. 아니면 이후로 당신들이 어떻게 되든 우리 책임이 아냐."

긴 침묵의 대치 끝에 시멘트 바닥에 너덧 개의 각목이 나뒹굴었다. 사람들이 물러가자 한 사내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푸른 하늘 한구석빼기만 후벼파고 있었다.

화톳불이 사윈 지는 오래되었다. 가끔씩 밤바람에 소스라쳐 올랐던 숯덩이들이 서로의 몸뚱이를 부비는 소리만 푸시식 귓가를 스칠 뿐이었다. 초여름이긴 했지만 옹송그린 채 밤바람을 고스란히 맞기에는 몸 한구석 어디쯤에 이미 은절을 먹어 체온이 휘딱휘딱 가신 사내들의 기력이 너무 부쳤다. 사내들은 화톳불이 사그라져 가는 정도에 비례해서 더욱 작은 원을 그리며 서로에게 바짝 다가들었다. 벌써 밑바닥까지 바싹 말라 버린 소주병을 누군가가 쭉쭉 소리를 내며 빨았다.

"깼니? 뭐 하간?"

"별 세."

― 미친놈.

"재복아, 여긴 별이 안 보이는구나."

재복은 힐끗 일별을 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재건대 마을엔 어릴 적 별두 많았는데.별이 빛나는 밤이라구 했지. 후후, 웃기지 마. 관할서 백 경장이 붙였어. 우리 동네엔 옥살이를 한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그 치는 동네 순찰을 나오기만 하면 이러는 거야."

― 아, 요 다 합쳐 봐야 열 댓두 안 되는 게딱지 동네에서 땅별이 백 개는 뜨는구나. 하니 밤중에 댕겨도 뭔 후라시가 필요허것어? 별이 빛나는 밤의 마을이라. 멋져, 완전히 한 편의 시야 시. "어쩌다 일제 단속 때는 심심찮게 사람 사냥이 벌어지는 동네였어. 툭하면 백차를 앞세우고 경찰을 잔뜩 태운 트럭이 들이닥쳐서는 거기서 뛰어내린 푸른 제복들이 동네를 에워싸고는 곤봉을 꼬나잡았어. 동네의 어지간한 남정네들은 모두 가을철 메뚜기 뛰듯 뒷산으로 파고들었지. 나두 무서우니깐 엉겁결에 이리저리 뛰는 거지. 벌집 쑤신 듯한 아우성, 애와 아낙이 뒤엉켜 울부짖는 소리, 짤막짤막 끊어지는 무전기 소리 속에서.... 헉헉,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 큰 은빛 잎사귀 두 장이 올라줘은 견장을 떠받치고 있던 색안경은 사냥감이 어느 정도 엮어지면 이렇게 무전을 날리지."

― 토끼 몰이는 성공적이다 독수리들은 퇴로를 열어 주고 돌아와 산토끼들의 가죽을 벗겨라 오버.

"사람들은 경찰이 물러간 뒤에도 밤이 이슥토록 산을 내려오지 않았어. 풀벌레 울음소리가 커지면 산마루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는데 그러면 하나둘씩 등불이 켜지지. 그 등불이 그 땐 얼마나 그리도 포근하게 느껴지던지.... 우리는 먼 길에서 돌아온 길손 같고......"

아무도 상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막막한 자신의 앞날을 부여안고 어떻게 하면 날이 새기 전에 병원을 빠져 나갈까를 궁리하는 표정들이었다.

― 천막에 웬 놈들이 들어와 자리 차지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만. 터가 기운이 다됐어. 옮길 때가 마땅찮은데 큰일이로고.

― 이 드런 화냥년을 어딜 가믄 찾을꼬나. 공사판 함바집이나 한번 사그리 훑어 볼까. 지년두 어지간히 박보한 신세 그저 단념할끄나 어쩔끄나.

― 피곤하다. 우선 어디 쩔쩔 끓는 구들장이라도 지고 등짝이 물러지도록 지지면서 잠 늘어지게 자 봤으면.

― 육덕 좋은 그 송탄댁에서 그저 볼목하니 노릇이나 꺽실히 잘 헐걸. 나 겉은 허랑한 눔을 또 누가 받아 주려고.

― 드러운 세상. 이젠 떠돌면서는 못 살겠네. 붙박이로 살려면 전공을 정해야겠는데 뭘로 한다? 공제공? 보일러공? 주방장? 한번 비계공으로 나서볼까. 오야봉을 하나 잡아서 말이야. 여의찮으면 내가 오야봉으로 나서지 뭐.

그 쪽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판수가 익은 터니. 일산이나 분당 쪽은 사람이 달려서 아우성이라는데.

그 다음날 이른 아침 D일보 경찰 기자가 백병원 경비실의 전화를 붙들고 악을 써가며 두 줄짜리 기사를 부르고 있었다.

"예, 중부서의 김승일이라구요. 예, 변사입니다, 타살이냐구요. 그냥 실족사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무직자인 것 같은데, 저 백병원 근처에서 노숙을 하던 밥풀때기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 그럼......"

31일 새벽 3시 30분께 서울시 중구 저동 백병원 앞의 저동 건물 신축 공사장에서 박상선 씨, 괄호 열고, 이십팔 무직 주거 부정, 괄호 닫고, 가 이건물 지하 4층 바닥에 떨어져 이마 등에 피를 흘리고 숨져 있는 채 발견됐다. 줄바꾸고, 경찰은 이 날 새벽까지 근처에서 시민, 학생 등 삼십여 명이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새우고 있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에 따라 함께 있던 박씨가 땔감을 구하기 위해 공사장 담을 넘다가 지름 3m의 환기통에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는 바람에 실족사한 것으로 보고 박씨를 처음 발견한 성균관대생 설경훈 군, 괄호 열고, 이십이 유교학과 삼년, 괄호 닫고, 을 불러 정확한 사인을 조사중이다. 예.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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