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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고전운문

부벽루(浮碧樓) - 이색

by 열공햐 2021.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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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벽루(浮碧樓)    이색(李穡) 

昨過永明寺 (작과영명사) 
暫登浮碧樓 (잠등부벽루) 
城空月一片 (성공월일편)   
石老雲千秋 (석로운천추) 
麟馬去不返 (인마거불반) 
天孫何處遊 (천손하처유) 
長嘯倚風岉 (장소의풍등) 
山靑江自流 (산청강자류)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성은 텅 빈 채로 달 한 조각 떠 있고 
오래된 조천석 위에 천 년의 구름 흐르네. 
기린마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데 
천손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가? 
돌다리에 기대어 휘파람 부노라니 
산은 오늘도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영명사 : 평양 금수산에 있는 절. 고구려 광개토왕이 지은 아홉 절 중의 하나라고 전함 
*부벽루 : 평양 모란봉 아래 절벽, 대동강 변에 위치한 누각으로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조천석 : 평양 기린굴 남쪽의 큰 바위 
*오래된 조천석 위에 천년의 구름은 흐르고 있네 :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 
*기린마 : 고구려 동명성왕이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상상의 말 
*천손 : 하늘의 자손으로 여기서는 동명왕 
*기린마는 - 노니시는가? : 시상이 전환되는 연으로 이전의 건국 영웅 동명왕을 회고하는 대목이다. 옛 고구려 동명왕이 웅대했던 포부와 장엄한 기상에 대한 회고를 읊었다. 작가는 옛 왕조의 자취를 회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건국 영웅이었던 동명왕의 일을 떠올림으로서 나라의 오랜 침략으로 쇠약해진 고려의 국운이 다시금 일어나기를 소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돌계단에 기대에 - 강은 저절로 흐르네 : 변함없는 자연의 영원한 모습을 노래하고, 인간 역사의 흥망성쇠가 대비되면서 간접적으로는 인간 역사의 유한함과 자신의 쓸쓸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리

 갈래 : 오언 율시(五言律詩)
 연대 : 고려 말
 표현 : 대구법, 대조법
 구성 : 4단 구성(수함경미 : 부벽루에 오름 - 조망 - 회고 - 자연의 변함없는 모습) 
 어조 : 지난 날의 찬란한 역사를 회고하며 그와 대비되는 현재의 모습에서 인생 무상에 젖어 있다.
 성격 : 회고적, 충의적
 제재 : 옛 성터에서의 풍경과 감상, 부벽루
 주제 : 지난 역사의 회고와 고려의 국운(國運) 회복의 소망과 인생 무상
 출전 : 목은집(牧隱集)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었던 작가고구려의 유적지인 평양성을 지나다가 지은 한시이다. 작가는 과거의 찬연했던 모습과 달리 퇴색한 자취만이 남아 있는 고구려의 옛 성터를 보며 지난 역사를 회고하고 있다. 하늘에 걸린 한 조각의 달과 천년을 흐르는 구름으로 대변되는 자연의 영원함과 대비되는 역사의 유한함 무상함과 쓸쓸함을 자아낸다.

 

  그러면 그가 이 시를 지은 동기는 이러한 회고적 정서에 그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막연하게 옛 왕조의 자취를 읊기보다 위대한 건국 영웅이었던 동명왕의 일을 노래한 점에 주목하게 된다. 이 당시 고려는 원(元)나라의 오랜 침략을 겪고 난 뒤여서 국가적으로 극히 쇠약한 형편이었는데, 시인은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고구려의 웅혼한* 역사를 일으킨 동명왕의 위업을 다시금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로 소급해 올라가는 한편, 과거의 역사를 통해 다시금 현재를 비추어 보는 양면적 시각을 내포한다고 하겠다.

*웅혼하다(雄渾하다) : [형용사] 글이나 글씨 또는 기운 따위가 웅장하고 막힘이 없다.

 

  ≪목은시고 牧隱詩藁≫ 권2에 실려 있고, 그 밖에 ≪동문선≫ 권10, ≪기아 箕雅≫ 권5, ≪대동시선≫ 권1 등에도 전한다. 내용은 부벽루에 올라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고사를 회고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조화있는 묘사를 통하여 수준높은 한시의 세계를 과시한 작품이다.

 

  이색의 시편(詩篇) 중에는 이 밖에도 〈독두시 讀杜詩〉 등 명작이 수없이 많지만, 특히 이 〈부벽루〉는 그의 시를 대표하는 절창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시의 장처(長處)*를 잘 지적한 것은 조선 후기의 신위(申緯)일 것이다. 


  그는 정지상(鄭知常)의 〈송인 送人*〉과 이색의 이 〈부벽루〉를 비교하여 한 마디로 ‘위장부전요조랑(偉丈夫前窈窕娘 : 대장부 앞의 요조숙녀)’이라고 하였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훤칠한 위장부의 모습은 이색의 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면이다.≪참고문헌≫ 東文選, 大東詩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희망의 문학 

 

*장처(長處) : ①마음씨나 행실(行實)의 가장 나은 점(點)  ②여러 일 가운데 아주 잘 하는 점(點) 
*송인(送人) : 고려(高麗)의 정지상(鄭知常)이자 대동강(大同江) 변에서의 이별을 읊은 칠언절구의 한시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 개인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은 그언제 다할 것인가,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송인>
  




작가 이색(李穡)

  이색(李穡, 1328년 6월 17일(음력 5월 20일)[1] ~ 1396년 6월 17일(음력 5월 20일)[2])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며 유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의 제자로서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자들은 다시 역성 혁명파와 절의파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 유창 등의 스승이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역성혁명에 협조하지 않았고 조선 개국 이후에도 출사하지 않았다. 그는 이종학의 아버지이고 박상충의 손윗처남이며 박은의 외숙부이고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해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귀국해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 해 귀국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해 1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좌승선·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보문각과 예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 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해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별세하였다.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의 수용과 척불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으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해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와 ≪목은시고 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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