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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고전운문

정인보 '자모사' 전문

by 열공햐 2021.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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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을은 그 가을이

 바람불고 잎 드는데(떨어지는데)

 

 가신 님 어이하여

 돌오실 줄 모르는가

 

 살뜰히 기르신 아이

 옷 품 준 줄 아소서

 

가을은 다시 오건만 어머니는 오시지 않고 어느새 아이의 몸은 커져 옷 품이 줄었다. (구별 배행)


 2
 부른 배 골리보고 나은 얼굴 병만 여겨

 하루도 열두 시로 곧 어떨까 하시더니
 밤송인 쭉으렁*인 채 그저 달려 삽내다

부른 자식의 배도 고파보이고, 나은 얼굴도 병든 것 같아 종일 걱정하시더니 자식은 찌그러진 밤송이처럼 달려 삽니다. (장별 배행)

* 쭉으렁 : 속담 '쭉으렁 밤송이 삼년 달린다.' 인용. 다병(多病)한 사람이 그대로 부지하는 것과 못 생기고 오래 사는 것에 견주어 말함.

 

 3
 동창에 해는 뜨나 님 계실 때 아니로다
 이 설움 오늘날을 알았드면 저즘미리
 먹은 맘 다 된다기로 앞 떠날 줄 있으리 

 

해는 뜨나 어머님은 안 계시고 서러운 마음에 후회하나 맘먹은 대로 될 리 없다.


 4
 차마 님의 낯을 흙으로 가리단 말
 우굿이 어겼으니 무정할 손 추초(秋草)로다
 밤 이여 꿈에 뵈오니 편안이나 하신가

돌아가신 어머님 얼굴은 흙에 묻히고 무성한 가을 풀, 꿈속에 뵈니 편안하신지 여쭈어본다.

*우굿이 : 풀이나 나무 따위가 우거지어 성(盛)함, 무성함

 
 5
 반갑던 님의 글월 설움될 줄 알았으리
 줄줄이 흐르는 정 상기 아니 말랐도다
 받들어 낯에 대이니 배이는 듯하여라

 

반가운 어머님의 글을 보니 서럽고, 흐르는 정은 아직도 마르지 않아 얼굴에 대보니 배이는 듯하다.


 6
 므가나 나를 고히 보심 생각하면 되 서워라
 내 양자(樣子) 그대로를 님이 아니 못보심가
 내 없어 네 미워진 줄 어이 네가 알것가
 

*므가나 : 미운.  *고히(고이) : 1.겉모양 따위가 보기에 산뜻하고 아름답게. 2.정성을 다하여. 3.편안하고 순탄하게.  *양자 : 모양
 

7
 눈 한번 감으시니 내 일생이 다 덮여라
 질 보아 가련하니 님의 속이 어떠시리
 자던 닭 나래쳐 울면 이때리니 하여라
 

*질 : 저를 , 나를

 

 8
 체수는 적으셔도 목소리는 크시더니
 이 없어 옴으신 입 주름마다 귀엽더니
 굽으신 마른 허리에 부지런히 뵈더니

 

작은 몸에도 기운이 있으셨던 / 이 없이 오므리신 입주름도 귀엽고 / 굽은 허리에도 부지런하셨던
 

 9
 생각도 어지럴사 뒤먼저도 바없고야
 쓰다간 눈물이요 쓰고 나니 한숨이라
 행여나 님 들으실까 나가 외워 봅니다

 10
 미닫이 닫히었나 열고 내다보시는가
 중문 턱 바삐 넘어 앞 안 보고 걸었더니
 다친 팔 도진다마는 님은 어대 가신고

 11
 젖 잃은 어린 손녀 손에 끼고 등에 길러
 색시꼴 백여가니 눈에 오즉 밟히실가
 봉사도 님 따라간지 아니 든다 웁내다

 봉사 : 봉선화의 와(訛), 소녀들이 봉선화를 짓찧어서 손톱에 홍색을 들이니 이를 봉사들인다고 한다.

 12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되고 말어라

*바릿밥 : 바리(놋쇠로 만든 여자의 밥그릇)에 담아 둔 밥. 놋그릇에 담은 따뜻한 밥은 아들에게 주시고 어머니는 늘 찬밥을 잡수셨다.
*보공 : 사람이 죽은 뒤에 관의 빈 곳을 채우는 옷. 겨울에는 솜치마 좋다고 하시면서도 그것을 아끼시느라 입지 않으시더니, 끝내 그 솜치마는 돌아가신 뒤에 관의 빈 곳을 채우는 옷이 되고 말았다.

 

 13
 썩이신 님의 속을 깊이 알 이 뉘 있스리
 다만지 하루라도 웃음 한번 도읍과저
 이저리 쓰옵던 애가 한 꿈되고 말아라

 14
 그리워 하 그리워 님의 신색 하 그리워
 닮을 이 뉘 없으니 어딜 향해 찾으오리
 남으니 두어 줄 눈물 어려 캄캄하고녀

 

그리운 어머니를 닮은 이 없으니 찾아갈 데가 없고 눈물만 어린다

 15
 불현듯 나는 생각 내가 어이 이러한고
 말 갈 데 소 갈 데로 잊은 듯이 열흘 달포
 설움도 팔자 없으니 더욱 느껴 합내다

 16
 안방에 불 비치면 하마 님이 계시온 듯
 닫힌 창 바삐 열고 몇 번이나 울었던고
 산 속에 추위 이르니 님을 어이 하올고

 17
 밤중만 어매 그늘 세 번이나 나린다네*
 게서 자라날 제 어인 줄을* 몰랐고여
 님의 공 깨닫고 보니 님은 벌써 머셔라

*밤중만 어매 그늘 세 번이나 나린다네 : 아이가 잘 때에도 어미의 이슬(어머니의 눈물, 정성, 사랑)이 세 번 내린다’라는 속신(俗信)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어머니의 끊임 없는 정성을 인유적(引誘, 주의나 흥미를 일으켜 꾀어냄)으로 서술하고 있다.
*어인 줄을 :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을 표현

 

 18
 태양이 더웁다 해도 님께 대면 미지근타
 구십춘광(九十春光)이 한 웃음에 퍼지서라
 멀찌기 아득케나마 바랄 날이 언제뇨

 19
 어머니 부르올 제 일만 있어 부르리까
 젖먹이 우리 애기 왜 또 찾나 하시더니
 황천(黃泉)이 아득하건만 혼자 불러 봅내다

 20
 연긴가 구름인가 옛일 벌써 희미(熹微)해라
 눈감아 뵈오려니 떠오느니 딴 낯이라
 남없는 거룩한 복이 언제런지 몰라라

 21
 등불은 어이 밝아 바람조차 부는고야
 옷자락 날개 삼아 훨훨 중천 나르과저
 이윽고 비소리나니 잠 못 이뤄 하노라

 22
 풍상(風霜)도 나름이라 설움이면 다 설움가
 오십년 님의 살림 눈물인들 남을 것가
 이저다* 꿈이라시고 내 키만을 보서라

*이저다 : 이것 저것 모두


 23
 북단재 뾰죽집* 이 전에 우리 외가(外家)라고
 자라신 경눗골*에 밤동산은 어디런가
 님 눈에 비취던 무산* 그저 열둘이려니

*뾰죽집 : 천주교당(天主敎堂)의 속어
*경눗골 : 정릉동(貞陵洞)
*무산 : 巫山十二峰

무산십이봉. 하단 블로그 참조

 

장강 크루즈 여행기(5)-'신녀계(神女溪)'의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18-06-26-02)

장강 크루즈 여행기(5)-'신녀계(神女溪)'의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18-06-26-02) ㅇㅇㅇ 1. 현재 우리가 탄 크루즈는 '무협(武峽)'을 지나간다. '신녀상(神女像)'을 찾아라. 지나면서 명패를 분명하

blog.daum.net

 


 24
 목천(木川)집 안방인데 누우신 양 병중이라
 손으로 머리 짚자 님을 따라 서울길로
 나다려 말씀하실 젠 진천인 듯하여라

 25
 뵈온 배 꿈이온가 꿈이 아니 생시런가
 이 날이 한 꿈되어 소스라쳐 깨우과저
 긴 세월 가진 설움 맘껏 하소 하리라

 26
 시식(時食)도 좋건마는 님께 드려 보올 것가
 악마듸* 풋저림을 이 없을 때 잡숫더니
 가지록* 뼈아풉내다 한(恨)이라만 하리까

*악마듸 : 억세인 것, 억센 *가지록 : 갈수록


 27
 가까이 곁에 가면 말로 못할 무슨 냄새
 마시어 배부른 듯 몸에 품어 봄이 온 듯
 코끝에 하마 남은가 때때 맡아 봅내다

 28
 님 분명 계실 것이 여기 내가 있도소니
 내 분명 같을 것이 님 가신지 네 해로다
 두 분명 다 허사외라 뵈와 분명하온가

 29
 친구들 나를 일러 집안 일에 범연*타고
 아내는 서워라고 어린아이 맛없다고
 여린 맘 설움에 찢겨 어대 간지 몰라라

 

*범연하다 : 차근차근한 맛이 없이 데면데면하다. 


 30
 집터야 물을 것가 어느 무엇 꿈아니리
 한 깊은 저 남산이 님 보시던 옛 낯이라
 게섰자 눈물이리만 외오 보니 설워라

 31
 비 잠깐 산 씻더니 서릿김에 내 맑아라
 열구름 뜨자마자 그조차도 불어 없다
 맘 선뜻 반가워지니 님 뵈온 듯하여라

 32
 마흔의 외둥이를 응아하자 맏동서께
 남없는 자애렸만 정 갈릴가 참으셨네
 이 어찌 범절만이료 지덕(至德)인 줄 압내다

 34
 어느 해 헛소문에 놀라시고 급한 편지
 네 걸음 헛디디면 모자 다시 안 본다고
 지질한 그날 그날을 뜻 받았다 하리오

 35
 백봉황(白鳳凰) 깃을 부쳐 도솔천궁 향하실 제
 아득한 구름 한점 옛 강산이 저기로다
 빗방울 오동에 드니 눈물 아니 지신가

 36
 엽둔재 높은 고개 눈바람도 경이랏다
 가마 뒤 잦은 걸음 얘기 어이 그쳤으리
 주막집 어둔 등잔이 맛본상*을 비춰라
 

*맛본상 : 겸상으로 보아 놓은 밥상


 37
 이 강이 어느 강가 압록(鴨綠)이라 엿자오니
 고국산천이 새로이 설워라고*
 치마끈 드시려 하자 눈물 벌써 굴러라
 

*고국산천이 새로이 설워라고 : '새삼 고국 생각이 나서 서럽다고 하시고’ 고국을 떠나 유랑민이 된 어머니의 설움이 치마끈과 눈물로 새삼 복받치고 있음을 표현

 


 38
 개울가 버들개지 바람 따라 휘날린다
 행여나 저러할라 돌이고도 굴지 마라
 이 말씀 지켰다한들 누를 향해 사뢸고

 39
 이만 사실 님을 뜻조차도 못받든가
 한번 상해드려 못내 산 채 억만년을
 이제와 뉘우치란들 님이 다시 오시랴

 40
 설워라 설워라해도 아들도 딴 몸이라
 무덤풀 욱은 오늘 이 살붙어 있단 말가
 빈 말로 설운 양함을 뉘나 믿지 마옵소

*설워라 설워라해도 아들도 딴 몸이라 : 어버이의 사랑이 자식의 어버이에 대한 사랑보다 크다.
*욱은 : 어머님 묻히신 곳에 풀이 우거진 오늘날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바쁜 일상 생활에 찌들려 어머님 생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돌아가신 후에야 뼈저리게 뉘우침을 표현한 것이다.
*빈 말로 설운 양함을 뉘나 믿지 마옵소 : 전체를 요약하는 성격의 장, 어머니 생전에 효를 다하지 못한, 그리고 후일의 효마저 겉모습만을 보이는 자식 으로서의 회한을 노래 (반어적으로 부각, 풍수지탄)

 

 

 핵심 정리

  • 갈래 : 평시조. 연시조(40수). 현대시조. 정형시
  • 형태 : 구별 배행(句別 排行)
  • 율격 : 3(4).4조. 4음보. 3장 6구의 외형률
  • 성격 : 의고적(擬古的). 회고적
  • 어조 : 후회와 그리움
  • 심상 : 비유적 심상
  • 제재 : 어머니의 자애와 희생. 아들로서의 불효
  • 주제 : 어머니의 자애와 희생에 대한 회고와 그리움
  • 출전 : <신생(新生)>(1925). <담원 시조집>(1947)

 

이해와 감상

  이 작품에 보이는 어머니는 한국의 전통적인 어머니 상(像)이다. 지은이는 그 어머니를 회상하며 자신의 보잘것없는 정성을 자책하고 있다. 수능특강에 실릴 부분은 전체가 40수로 이루어진 연시조의 일부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사모의 정이 전아한(법도에 맞고 아담한) 언어 속에 잘 융합되어 있다. 특히, 시조의 형식과 자수율을 맞추기 위해 옛말이나 옛글에서 시어를 선택하여 현대어로 풀어 쓴 기교가 돋보인다.

  대부분의 시조가 그러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적인 말은 종장의 마지막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라게만 하소서' 와 '나 같은 이 있으리' 가 그러하며, '발 못 돌려 하노라' 에서는 간절함과 애틋함이 심화되면서 종결된다.

  여기에서는 작품 속에 담긴 모정(母情)에의 그리움이 시대를 초월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라는 점을 간파하는 데 중점이 있다. 또한, 시조의 전통이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음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 문학의 특질을 확인할 수 있다.

  작자에게는 생모(生母-대구 서씨)와 양모(養母-양자로 간 집, 월성 이씨) 두 어머니가 계셨는데 두 어머니가 다 숙덕(淑德, 착하고 아름다운 덕행)이 장하고 자애(慈愛)가 깊었다고 한다. 이 시조는 두 분이 다 돌아가신 후에 쓴 작품이며, 이 시조에서 읊어지는 어머니는 그 중 어느 한 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어느 분이나 생각나는 대로 한 수씩 지어 나간 것이다.

 

  작가는 '생어머니는 높고 양어머니는 크다. 어머니 한 분을 먼저 여읜 뒤는, 한 분마저 여의면 나는 부지하지 못할 줄로 알았다. 그러다가 목천서 어머니 상사(喪事)를 당했다. 그 가을에 서울로 이사하여 오니 갈수록 서러워 길 가다가도 가끔 혼자 울었다. 이 시조는 병인년 가을에 지었다.' 라고 해제를 통해 자모사의 창작 배경을 밝혔다.

 

정인보(鄭寅普) 1892(고종 29)∼? 

  한학자·교육자. 본관은 동래(東萊). 유명(幼名)은 경시(景施).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饋園)·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는 위당(爲堂). 서울 출신.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유길(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상 원용(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호조참판을 역임한 은조(誾朝)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그의 문명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0년 일제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여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국제 정세를 살폈다. 얼마 후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상해로 건너가 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부인 성씨(成氏)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노모의 비애를 위로하고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서울로 이사한 뒤 연희전문학교·협성학교(協成學校)·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다.

  후배들을 가르쳐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교수 생활에 힘쓰는 한편, ≪동아일보≫·≪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의 정기를 고무하는 논설을 펴며 민족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1926년 순종이 죽었을 때는 유릉지문(裕陵誌文) 찬술의 일을 맡아보았다. 다음 해 불교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에도 출강하였다.

  1931년에는 민족문화의 유산인 고전을 민족사회에 알리고자 다수의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1935년 조선 후기 실학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 사후 100주년을 맞아 조선 후기의 실학을 소개하기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 실학연구를 주도하였다. 실학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 때부터 사용되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조선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일련의 양명학자들의 학문을 추적하였고, 1933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양명학연론 陽明學演論〉을 연재해 많은 호응을 얻었다.

  양명학이나 실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으로 볼 때, 단순한 한학자가 아니라 성리학과 더불어 유학의 또 다른 유파(流派)나 성리학 내에 자생적으로 일어선 새로운 실(實)의 유학풍을 밝혀, 조선 유학의 폭넓은 이해를 시도해 보고자 하는 진취적 학풍을 가진 학문활동으로 이해된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좌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산중에 은거하였다.

  광복이 되자 곧 서울로 상경, 일제의 포악한 민족말살정책으로 가려졌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교육에 힘을 쏟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1946년 9월 ≪조선사연구 朝鮮史硏究≫를 간행하였다.

  그의 역사의식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는 하나 독립투쟁의 방도로서 민족사 연구를 지향하던 신채호의 민족사학과 달리, 엄밀한 사료적 추적에 의한 사실 인식과 그에 대한 민족사적 의미의 부각을 의도하는 신민족주의 사학의 입장에 서는 것이었다.

  1947년 국학의 최고학부를 표방하고 설립된 국학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 일제의 광폭한 식민정책으로 일시 단절된 듯하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키려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금 육영사업에 투신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의 간곡한 청으로 신생 조국의 관기(官紀)와 사정(司正)의 중책을 지닌 감찰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정부의 간섭으로 의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 미련없이 자리를 사임하였다. 이후 한때나마 학문과 교육을 떠났던 심정을 달래고자 남산동에 은거하며 오로지 국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50년 6·25가 일어났던 그 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시문·사장(詞章)의 대가로 광복 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서예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었고, 인각(印刻)에도 능하였다.

  30여 년을 두고 대학 강단에서 국고(國故)·절의(節義)·실학·양명학과 역사학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국혼(國魂)·경세(警世)·효민(曉民)의 학덕이 높았던 학자이며 교육자였다. 저서로는 ≪조선사연구≫와 ≪양명학연론≫이 있고, 시문과 국학 논고의 글은 ≪담원시조집 饋園時調集≫·≪담원문록 饋園文錄≫·≪담원국학산고 饋園國學散藁≫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饋園鄭寅普全集.(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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