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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현대산문

김유정 '봄봄' 전문

by 열공햐 2022.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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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

김유정

 

 

 



"장인님! 인제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이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 하고 꼬바기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장 영문 모른다. 일 을 좀 더 잘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이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 말이 많다. 허지만 점순이가 아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고만 빙빙하고 만다. 


이래서 나는 애최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태면 이태, 삼 년이면 삼 년, 기한을 딱 작정하고 일을 해야 원 할 것이다. 덮어놓고 딸이 자라는 대로 성례를 시켜 주마, 했으니 누가 늘 지키고 섰는 것도 아니고, 그 키가 언제 자라는지 알 수 있는가. 그 리고 난 사람의 키가 무럭무럭 자라는 줄만 알았지 붙배기 키에 모로만 벌어지는 몸도 있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때가 되면 장인님이 어련하랴 싶어서 군소리 없이 꾸벅꾸벅 일만 해왔다. 그럼 말이다. 장인님이 제가 다 알아채서, 


"어참, 너 일 많이 했다. 고만 장가들어라." 

하고 살림도 내주고 해야 나도 좋을 것이 아니냐. 시치미를 딱 떼고 도리어 그런 소리가 나올까 봐서 지레 펄펄 뛰고 이 야단이다. 명색이 좋아 데릴사위지 일하기에 싱겁기도 할뿐더러 이건 참 아무것도 아니다. 


숙맥이 그걸 모르고 점순이의 키 자라기만 까맣게 기다리지 않았나. 


언젠가는 하도 갑갑해서 자를 가지고 덤벼들어서 그 키를 한번 재볼까 했다. 마는 우리는 장인님이 내외를 해야 한다고 해서 마주 서 이야기도 한마디 하는 법 없다. 


우물길에서 언제나 마주칠 적이면 겨우 눈어림으로 재보고 하는 것인데 그럴 적마다 나는 저만침 가서 '제에미 키두!'하고 논둑에다 침을 퉤, 뱉는다. 아무리 잘 봐야 내 겨드랑(다른 사람보다 좀 크긴 하지만) 밑에서 넘을락 말락 밤낮 요 모양이다. 


개 돼지는 푹푹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 크는지, 한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궁리도 해보았다. 아하, 물동이를 자꾸 이니까 뼈다귀가 움츠라드나보다, 하고 내가 넌즛넌즈시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하러 가면 서낭당에 돌을 올려놓고 '점순이의 키 좀 크게 해줍소사. 그러면 담엔 떡 갖다 놓고 고사드립죠니까.' 하고 치성도 한두 번 드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돼먹은 킨지 이래도 막무가내니……. 


그래 내 어저께 싸운 것이지 결코 장인님이 밉다든가 해서가 아니다. 


모를 붓다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또 싱겁다. 이 벼가 자라서 점순이가 먹고 좀 큰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못한 걸 내 심어서 뭘하는 거냐. 해마다 앞으로 축 불거지는 장인님의 아랫배(가 너무 먹는 걸 모르고 냇병이라나, 그 배)를 불리기 위하여 심곤 조금도 싶지 않다. 

 

"아이구 배야!"


"아이구 배야!" 


난 몰 붓다 말고 배를 쓰다듬으면서도 그대루 논둑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겨드랑에 꼈던 벼 담긴 키를 그냥 땅바닥에 털썩 떨어치며 나도 털썩 주저앉았다. 일이 암만 바빠도 나 배 아프면 고만이니까. 아픈 사람이 누가 일을 하느냐. 파릇파릇 돋아 오른 풀 한 숲을 뜯어 들고 다리의 거머리를 쑥쑥 문대며 장인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논 가운데서 장인님도 이상한 눈을 해가지고 한참 날 노려보더니, 


"넌 이자식, 왜 또 이래 응?" 


"배가 좀 아파서유!"하고 풀 위에 슬며시 쓰러지니까 장인님은 약이 올랐다. 저도 논에서 철벙철벙 둑으로 올라오더니 잡은 참 내 멱살을 움켜잡고 뺨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 자식아. 일 허다 말면 누굴 망해 놀 속셈이냐. 이 대가릴 까놀자식?" 

누굴 망해 놀 셈이냐


우리 장인님은 약이 오르면 이렇게 손버릇이 아주 못됐다. 또 사위에게 이자식 저 자식 하는 이놈의 장인님은 어디 있느냐. 오죽해야 우리 동리에서 누굴 물론하고 그에게 욕을 안 먹는 사람은 명이 짜르다 한다. 조그만 아이들까지도 그를 돌아 세놓고 욕필이(본 이름이 봉필이니까) 욕필이, 하고 손가락질을 할 만치 두루 인심을 잃었다. 허나 인심을 정말 잃었다면 욕보다 읍의 배 참봉댁 마름으로 더 잃었다. 번히 마름이란 욕 잘하고, 사람 잘 치고, 그리고 생김 생기길 호박개같애야 쓰는 거지만 장인님은 외양이 똑 됐다. 장인에게 닭 마리나 좀 보내지 않는다든가 애벌논 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해 가을에는 영락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 미리부터 돈도 먹고 술도 먹이고 안달재신으로 돌아치던 놈이 그 땅을 슬쩍 돌라 안는다. 이바람에 장인님 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동리 사람들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면서도 그래도 굽실굽실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내겐 장인님이 감히 큰소리할 계제가 못된다. 


뒷생각은 못하고 뺨 한 개를 딱 때려놓고는 장인님은 무색해서 덤덤히 쓴 침만 삼킨다. 난 그속을 퍽 잘 안다.

 
조금 있으면 갈도 꺾어야 하고 모도 내야 하고, 한참 바쁜 때인데 나 일 안 하고 우리 집으로 그냥 가면 고만이니까. 


작년 이맘때도 트집을 좀 하니까 늦잠잔다구 돌멩이를 집어던져서 자는 놈의 발목을 삐게 해 놨다. 사날씩이나 건숭 끙끙, 앓았더니 종당에는 거반 울상이 되지 않았는가…… 


"예, 그만 일어나 일 좀 해라. 그래야 올 갈에 벼 잘되면 너 장가들지 않니." 


그래 귀가 번쩍 띄어서 그날로 일어나서 남이 이틀 품들일 논을 혼자 삶아 놓으니까 장인님도 눈깔이 커다랗게 놀랐다. 그럼 정말로 가을에 와서 혼인을 시켜 줘야 온 경우가 옳지 않겠나, 볏섬을 척척 들여쌓아도 다른 소리는 없고 물동이를 이고 들어오는 점순이를 담배통으로 가리키며, 


"이 자식아, 미처 커야지 조걸 무슨 혼인을 한다구 그러니 원!"하고 남 낯짝만 붉혀 주고 고만이다. 


골김에 그저 이놈의 장인님, 하고 댓돌에다 메꼰코 우리 고향으로 내뺄까 하다가 꾹꾹 참고 말았다. 


참말이지 난 이꼴하고는 집으로 차마 못 간다. 장가를 들러갔다가 오죽 못났어야 그대로 쫓겨왔느냐고 손가락질을 받을 테니까……. 


논둑에서 벌떡 일어나 한풀 죽은 장인님 앞으로 다가서며, 


"난 갈 테야유. 그동안 사경 쳐내슈." 


"너 사위로 왔지 어디 머슴 살러 왔니?" 


"그러면 얼찐 성례를 해줘야 안하지유. 밤낮 부려만 먹구 해준다, 해준다……" 


"글쎄, 내가 안하는 거냐, 그년이 안 크니까."하고 어름어름 담배만 담으면서 늘 하는 소리를 또 늘어놓는다. 


이렇게 따져나가면 언제든지 늘 나만 밑지고 만다. 이번엔 안 된다, 하고 대뜸 구장님한테로 판단 가자고 소맷자락을 내 끌었다. 


"아, 이자식이 왜 이래 어른을." 


안 간다구 뻗디디구 이렇게 호령은 제 맘대로 하지만 장인님 제가 내 기운은 못 당한다. 막 부려먹고 딸은 안 주고, 게다 땅땅 치는 건 다 뭐야……. 


그러나 내 사실 참 장인님이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전날, 왜 내가 새고 개 맞은 봉우리 화전밭을 혼자 갈고 있지 않았느냐. 밭 가생이로 돌 적마다 야릇한 꽃내가 물컥물컥 코를 찌르고 머리 위에서 벌들은 가끔 붕, 붕, 소리를 친다. 바위틈에서 샘물 소리밖에 안 들리는 산골짜기니까 맑은 하늘의 봄볕은 이불속같이 따스하고 꼭 꿈꾸는 것 같다. 나는 몸이 나른하고 몸살(병을 아직 모르지만)이 날려구 그러는지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이랬다. 


"어러이! 말이! 맘 마 마……" 


이렇게 노래를 하며 소를 부리면 여느때 같으면 어깨가 으쓱으쓱한다. 웬일인지 밭을 반도 갈지 않아서 온몸이 맥이 풀리고 대구 짜증만 난다. 공연히 소만 들입다 두들기며…… 


"안야! 안야! 이 망할 자식의 소(장인님의 소니까) 대리를 꺾어들라." 

 


그러나 내 속은 정말 안야 때문이 아니라 점심을 이고 온 점순이의 키를 보고 울화가 났던 것이다. 

 

점순이는 뭐 그리 썩 예쁜 계집애는 못된다. 그렇다구 또 개떡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꼭 내 아내가 돼야 할 만치 그저 툽툽하게 생긴 얼굴이다. 나보다 십 년이 아래니까 올해 열여섯인데 몸은 남보다 두 살이나 덜 자랐다. 남은 잘도 훤칠히들 크건만 이건 위아래가 뭉툭한 것이 내 눈에는 헐없이 감참외 같다. 참외 중에는 감 참외가 제일 맛 좋고 예쁘니까 말이다. 둥글고 커다란 눈은 서글서글하니 좋고 좀 지쳐 찢어졌지만 입은 밥술이나 톡톡히 먹음직하니 좋다. 아따, 밥만 많이 먹게 되면 팔자는 고만 아니냐. 헌데 한 가지 과가 있다면 가끔가다 몸이(장인님이 이걸 채신이 없이 들까분다고 하지만) 너무 빨리빨리 논다. 그래서 밥을 나르다가 때 없이 풀밭에서 깨빡을 쳐서 흙투성이 밥을 곧잘 먹인다. 안 먹으면 무안해할까 봐서 이걸 씹고 앉았노라면 으적으적 소리만 나고 돌을 먹는 겐지 밥을 먹는 겐지……, 


그러나 이날은 웬일인지 성한 밥채루 밭머리에 곱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또 내외를 해야 하니까 저만큼 떨어져 이쪽으로 등을 향하고 웅크리고 앉아서 그릇 나기를 기다린다. 


내가 다 먹고 물러섰을 때, 그릇을 챙기는데 난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고개를 푹 숙이고 밥함지에 그릇을 포개면서 날더러 들으라는지, 혹은 제 소린지, 

밤낮 일만 하다 말텐가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 


하고 혼자서 쫑알거린다. 고대 잘 내외하다가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난 정신이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무슨 좋은 수가 있나 없는가 싶어서 나도 공중을 대고 혼잣말로, 


"그럼 어떡해?" 


하니까, 


"성례시켜 달라지 뭘 어떡해." 


하고 되알지게 쏘아붙이고 얼굴이 빨개져서 산으로 그저 도망친다. 


나는 잠시 동안 어떻게 되는 심판인지 맥을 몰라서 그 뒷모양만 덤덤히 바라보았다. 


봄이 되면 온갖 초목이 물이 오르고 싹이 트고 한다. 사람도 아마 그런가 보다, 하고 며칠 내에 부쩍 (속으로) 자란 듯싶은 점순이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이런 걸 멀쩡하게 아직 어리다구 하니까……. 


우리가 구장님을 찾아갔을 때 그는 싸리문 밖에 있는 돼지우리에서 죽을 퍼주고 있었다. 서울엘 좀 갔다오더니 사람은 점잖아야 한다구 웃쇰이(얼른 보면 지붕 위에 앉은 제비꼬랑지 같다) 양쪽으로 뾰죽히 삐치고 그걸 애헴, 하고 늘 쓰담는 손버릇이 있다. 


우리를 멀뚱히 쳐다보고 미리 알아챘는지, 

 

츰에 계약하기를


"왜 일들 허다 말구 그래?" 하더니 손을 올려서 그 애헴을 한번 후딱 했다. 


"구장님! 우리 장인님과 츰에 계약하기를……" 


먼저 덤비는 장인님을 뒤로 떠다밀고 내가 허둥지둥 달려들다가 가만히 생각하고, '아니 우리 빙장님과 츰에.'하고 첫 번부터 다시 말을 고쳤다. 장인님은 빙장님, 해야 좋아하고 밖에 나와서 장인님, 하면 괜스레 골을 내려고 든다. 뱀두 뱀이래야 좋으냐구 창피스러우니 남 듣는 데는 제발 빙장님, 빙모님, 하라구 일상 당조짐을 받아 오면서 난 그것두 자꾸 잊는다. 


당장두 장인님, 하나 옆에서 내 발등을 꾹 밟고 곁눈질을 흘기는 바람에야 겨우 알았지만…… 


구장님도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퍽 딱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구장님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다 그럴 게다. 


길게 길러둔 새끼손톱으로 코를 후벼서 저리 탁 튀기며, 


"그럼 봉필 씨! 얼른 성례를 시켜 주구려, 그렇게까지 제가 하구싶다는 걸……" 


하고 내 짐작대로 말했다. 그러나 이말에 장인님이 삿대질로 눈을 부라리고, 


"아 성례구 뭐구 계집애년이 미처 자라야 할 게 아닌가?" 


하니까 고만 멀쑤룩해져서 입맛만 쩍쩍 다실 뿐이 아닌가. 


"그것두 그래!" 


"그래, 거진 사 년 동안에도 안 자랐더니 그 킨 은제 자라지유? 다 그만두구 사경 내슈……" 


"글쎄, 이자식아! 내가 크질 말라구 그랬니. 왜 날 보구 떼냐?"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사실 빙모님은 점순이보다도 귓 배기가 작다)


장인님은 이 말을 듣고 껄껄 웃더니(그러나 암만 해두 돌 씹은 상이다) 코를 푸는 척하고 날 은근히 곯리려고 팔꿈치로 옆 갈비께를 퍽 치는 것이다. 


더럽다. 나두 종아리의 파리를 쫓는 척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그 궁둥이를 콱 떼밀었다. 장인님은 앞으로 우찔근하고 싸리문께로 쓰러질 듯하다 몸을 바로 고치더니 눈총을 몹시 쏘았다. 이런 쌍년의 자식, 하곤 싶으나 남의 앞이라니 차마 못하고 섰는 그 꼴이 보기에 퍽 쟁그러웠다. 

그러니까 자네가


그러나 이밖에는 별반 신통한 귀정을 얻지 못하고 도로 논으로 돌아와서 모를 부었다. 왜냐면 장인님이 뭐라구 귓속말로 수군수군하고 간 뒤다. 구장님이 날 위해서 조용히 데리고 아래와 같이 일러주었기 때문이다(뭉태의 말은 구장님이 장인님에게 땅 두 마지기 얻어 부치니까 그래 꾀였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않는다) 

 


"자네 말두 하기야 옳지, 암 나이 찼으니 아들이 급하다는 게 잘못된 말은 아니야. 

허지만 농사가 한층 바쁜 때 일을 안 한다든가 집으로 달아난다든가 하면 손해죄루 그것두 징역을 가거든!(여기에 그만 정신이 번쩍 났다) 왜 요전에 삼포 말서 산에 불 좀 놓았다구 징역 간 거 못 봤나. 제 산에 불을 놓아도 징역을 가는 이땐데 남의 농 사를 버려두니 죄가 얼마나 더 중한가. 그리고 자넨 정장을(사경 받으러 정장 가겠다 했다) 간대지만 그러면 괜스레 죄를 들쓰고 들어가는 걸세. 또 결혼두 그렇지. 법률에 성년이란 게 있는데 스물하나가 돼야지 비로소 결혼을 할 수가 있는 걸세. 자넨 물론 아들이 늦을 걸 염려하지만 점순이루 말하면 이제 겨우 열여섯이 아닌가. 그렇지만 아까 빙장님의 말씀이 올 갈에는 열일을 제치고라두 성례를 시켜주겠다 하시니 좀 고마울겐가. 빨리 가서 모붓든 거나 마저 붓게, 군소리 말구 어서 가." 

징역을 가거든


그래서 오늘 아침까지 끽소리 없이 왔다. 


장인님과 내가 싸운 것은 지금 생각하면 전혀 뜻밖의 일이라 안 할 수 없다. 


장인님으로 말하면 요즈막 작인들에게 행세를 좀 하고 싶다고 해서, 


"돈 있으면 양반이지 별게 있느냐!" 


하고 일부러 아랫배를 쑥 내밀고 걸음도 뒤틀리게 걷고 하는 이판이다. 이까진 나쯤 두들기다 남의 땅을 가지고 모처럼 닦아놓았던 가문을 망친다든가 할 어른이 아니 다. 또 나로 논지면 아무쪼록 잘 봬서 점순이에게 얼른 장가를 들어야 하지 않느냐 … 이렇게 말하자면 결국 어젯밤 뭉태네 집에 마슬간 것이 썩 나빴다. 낮에 구장님 앞에서 장인님과 내가 싸운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대구 빈정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 맞구두 그걸 가만 둬?" 


"그럼 어떡허니?" 


"인마, 봉필일 모판에다 거꾸로 박아놓지 뭘 어떡해?"

 

하고 괜히 내 대신 화를 내 가지고 주먹질을 하다 등잔까지 쳤다. 놈이 번히 괄괄은 하지만 그래놓고 날더러 석유값을 물라구 막 찌다우를 붙는다. 난 어안이 벙벙해서 잠자코 앉았으니까 저만 연신 지껄이는 소리가, 


"밤낮 일만 해주구 있을 테냐?" 


"영득이는 일 년을 살구두 장갈 들었는데 넌 사 년이나 살구두 더 살아야 해?" 


"네가 세 번째 사윈줄이나 아니? 세 번째 사위" 

네가 세 번째 사윈줄 아니?


"남의 일이라두 분하다. 이 자식아, 우물에 가 빠져 죽어." 


나중에는 겨우 손톱으로 목을 따라고까지 하고, 제 아들같이 함부로 훅닥이었다. 


별의별 소리를 다해서 그대로 옮길 수는 없으나 그 줄거리는 이렇다.


우리 장인님 딸이 셋이 있는데 맏딸은 재작년 가을에 시집을 갔다. 정말은 시집을 간 것이 아니라 그 딸도 데릴사위를 해가지고 있다가 내보냈다. 그런데 딸이 열 살 때부터 열아홉 즉 십 년 동안에 데릴사위를 갈아들이기를, 동리에선 사위부자라고 이름이 났지마는 열네 놈이란 참 너무 많다. 장인님이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고로 그 담 딸을 데릴사위를 해올 때까지는 부려먹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머슴을 두면 좋지만 그건 돈이 드니까, 일 잘하는 놈을 고르느라고 연방 바꿔들였다. 또 한편 놈들이 욕만 줄창 퍼붓고 심히도 부려먹으니까 밸이 상해서 달아나기도 했겠지, 점순이는 둘째 딸인데 내가 일테면 그 세 번째 데릴사위로 들어온 셈이다. 내 담으로 네 번째 놈이 들어올 것을 내가 일도 잘하고 그리고 사람이 좀 어수룩하니까 장인님이 잔뜩 붙들고 놓질 않는다. 셋째 딸이 인제 여섯 살, 적어두 열 살은 돼야 데릴사위를 할 테므로 그동안은 죽도록 부려먹어야 된다. 그러니 인제는 속 좀 채리고 장가를 들여달라구 떼를 쓰고 나자빠져라, 이것이다. 


나는 겉으로 엉, 엉, 하며 귓등으로 들었다. 뭉태는 땅을 얻어 부치다가 떨어진 뒤로는 장인님만 보면 공연히 못 먹어서 으릉거린다. 그것도 장인님이 저 달라고 할 적에 제 집에서 위한다는 그 감투(예전에 원님이 쓰던 것이라나, 옆구리에 뽕뽕 좀 먹은 걸레)를 선뜻 주었더면 그럴 리도 없었던 걸……. 


그러나 나는 뭉태란 놈의 말을 전수히 곧이듣지 않았다. 꼭 곧이들었다면 간밤에 와서 장인님과 싸웠지 무사히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딸에게까지 인심을 잃은 장인님이 혼자 나빴다. 


실토이지 나는 점순이가 아침상을 가지고 나올 때까지는 오늘은 또 얼마나 밥을 담았나, 하고 이것만 생각했다. 상에는 된장찌개 하고 간장 한 종지, 조밥 한 그릇, 그리고 밥보다 더 수부룩하게 담은 산나물이 한 대접, 이렇다. 나물은 점순이가 틈틈이 해오니까 두 대접이고 네 대접이고 멋대로 먹어도 좋으나 밥은 장인님이 한 사발 외엔 더 주지 말라고 해서 안된다. 그런데 점순이가 그 상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제 말로 지껄이는 소리가, 

 

그냥 온담 그래


"구장님한테 갔다 그냥 온담 그래!"

 

하고 엊그제 산에서와 같이 되우 쫑알거린다. 


딴은 내가 더 단단히 덤비지 않고 만 것이 좀 어리석었다, 속으로 그랬다. 


나도 저쪽 벽을 향하여 외면하면서 내 말로, 


"안된다는 걸 그럼 어떡헌담!"

 

하니까, 


"쇰을 잡아채지 그냥 둬, 이 바보야!" 

 

쇰을 잡아채지 그냥 둬. 이 바보야!


하고 또 얼굴이 빨개지면서 성을 내며 안으로 샐죽하니 튀들어가지 않느냐, 이때 아 무도 본 사람이 없었게 망정이지 보았다면 내 얼굴이 에미 잃은 황새 새끼처럼 가여웁다 했을 것이다. 

 


사실 이때만치 슬펐던 일이 또 있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은 암만 못생겼다 해두 괜찮지만 내 아내 될 점순이가 병신으로 본다면 참 신세는 따분하다. 밥을 먹은 뒤지게를 지고 일터로 갈려하다 도로 벗어던지고 바깥 마당 공석 위에 드러누워서 나는 차라리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 생각했다. 


내가 일 안 하면 장인님 저는 나이가 먹어 못하고 결국 농사 못 짓고 만다. 뒷짐으로 트림을 꿀꺽하고 대문 밖으로 나오다 날 보고서, 


"이자식아, 왜 또 이러니." 


"관격이 났어유, 아이구 배야!" 

아이구 배야


"기껀 밥 처먹구 무슨 관격이야, 남의 농사 버려주면 이 자식아 징역 간다 봐라!" 


"가두 좋아유, 아이구 배야!" 


참말 난 일 안 해서 징역 가도 좋다 생각했다. 일후 아들을 낳아도 그 앞에서 바보, 바보, 이렇게 별명을 들을 테니까 오늘은 열 쪽이 난대도 결정을 내고 싶었다. 장인님이 일어나라고 해도 내가 안 일어나니까 눈에 독이 올라서 저편으로 힝하게 가더니 지게막대기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걸로 내 허리를 마치 돌 떠넘기듯이 쿡 찍어서 넘기고 넘기고 했다. 밥을 잔뜩 먹어 딱딱한 배가 그럴 적마다 퉁겨지면서 밸창이 꼿꼿한 것이 여간 켕기지 않았다. 그래도 안 일어나니까 이번에는 배를 지게막대기로 위에서 쿡쿡 찌르고 발길로 옆구리를 차고 했다. 장인님은 원체 심청이 궂어서 그러지만 나도 저만 못하지 않게 배를 채었다. 아픈 것을 눈을 꽉 감고 넌 해 라 난 재밌단 듯이 있었으나 볼기짝을 후려갈길 적에는 나도 모르는 결에 벌떡 일어 나서 그 수염을 잡아챘다. 마는 내 골이 난 것이 아니라 정말은 아까부터 벽 뒤 울타리 구멍으로 점순이가 우리들의 꼴을 몰래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말 한마디 톡톡히 못한다고 바라보는데 매까지 잠자코 맞는 걸 보면 짜장 바보로 알 게 아닌가. 또 점순이도 미워하는 이까짓 놈의 장인님하곤 아무것도 안되니까 막 때려도 좋지만 사정 보아서 수염만 채고(제 원대로 했으니까 이때 점순 이는 퍽 기뻤겠지) 저기까지 잘 들리도록

 

 '이걸 까셀라부다!'

 

하고 소리를 쳤다. 


장인님은 더 약이 바짝 올라서 잡은 참 지게막대기로 내 어깨를 그냥 내려 갈겼다. 정신이 다 아찔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때엔 나도 온몸에 약이 올랐다. 이 녀석의 장인님을, 하고 눈에서 불이 퍽 나서 그 아래 밭 있는 넝알로 그대로 떠밀어 굴려버렸다. 조금 있다가 장인님이 씩, 씩, 하고 한번 해보려고 기어오르는 걸 얼른 또 떠밀어 굴려버렸다. 기어오르면 굴리고, 굴리면 기어오르고, 이러길 한 너덧 번을 하며 그럴 적마다, 


"부려만 먹구 왜 성례 안하지유!" 


나는 이렇게 호령했다. 허지만 장인님이 선뜻 오냐 낼이라두 성례시켜 주마, 했으면 나도 성가신 걸 그만두었을지 모른다. 나야 이러면 때린 건 아니니까 나중에 장인 쳤다는 누명도 안 들을 터이고 얼마든지 해도 좋다. 


한 번은 장인님이 헐떡헐떡 기어서 올라오더니 내 바짓가랭이를 요렇게 노리고서 단박 움켜잡고 매달렸다. 악, 소리를 치고 나는 그만 세상이 다 팽그르 도는 것이, 

"빙장님! 빙장님! 빙장님!" 


"이자식! 잡아먹어라, 잡아먹어!" 


"아! 아! 할아버지! 살려줍쇼, 할아버지!"

 

하고 두 팔을 허둥지둥 내절 적에는 이마에 진땀이 쭉 내솟고 인젠 참으로 죽나 보다 했다. 그래두 장인님은 놓질 않더니 내가 기어이 땅바닥에 쓰러져서 거진 까무러치게 되니까 놓는다. 더럽다, 더럽다. 이게 장인님인가? 나는 한참을 못 일어나고 쩔쩔맸다. 그러나 얼굴을 드니(눈엔 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지가 부르르 떨리면서 나도 엉금엉금 기어가 장인님의 바짓가랭이를 꽉 움키고 잡아나꿨다. 

할아버지 살려줍쇼


내가 머리가 터지도록 매를 얻어맞은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가 또한 우리 장인님이 유달리 착한 곳이다. 


여느 사람이면 사경을 주어서라도 당장 내어 쫓았지, 터진 머리를 볼솜으로 손수 지져 주고, 호주머니에 희연 한 봉을 넣어 주고 그리고, 

"올 갈엔 꼭 성례를 시켜 주마. 암만 말구 가서 뒷골의 콩밭이나 얼른 갈아라." 

올 갈엔 성례 시켜주마


하고 등을 뚜덕여 줄 사람이 누구냐. 나는 장인님이 너무나 고마워서 어느덧 눈물까지 났다. 


점순이를 남기고 인젠 내쫓기려니 하다 뜻밖의 말을 듣고, 


"빙장님! 인제 다시는 안 그러겠어유!" 


이렇게 맹세를 하며 부랴부랴 지게를 지고 일터로 갔다. 그러나 이때는 그걸 모르고 장인님을 원수로만 여겨서 잔뜩 잡아당겼다. 


"아! 아! 이놈아! 놔라, 놔." 

아! 아! 이놈아! 놔라! 놔!


장인님은 헷손질을 하며 솔개미에 챈 닭의 소리를 연해 질렀다. 놓긴 왜, 이왕이면 호되게 혼을 내주리라 생각하고 짓궂이 더 댕겼다. 마는 장인님이 땅에 쓰러져서 눈에 눈물이 피잉 도는 것을 알고 좀 겁도 났다. 


"할아버지! 놔라, 놔, 놔, 놔, 놔라." 


그래도 안되니까, 


"애 점순아! 점순아!" 


이 악장에 안에 있었던 장모님과 점순이가 헐레벌떡하고 단숨에 뛰어나왔다. 나의 생각에 장모님은 제 남편이니까 역성을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순이는 내 편을 들어서 속으로 고수해 하겠지... 대체 이게 웬 속인지(지금까지도 난 영문을 모른다) 아버질 혼내 주기는 제가 내래 놓고 이제 와서는 달겨들며, 


"에그머니!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


하고, 귀를 뒤로 잡아댕기며 마냥 우는 것이 아니냐. 그만 여기에 기운이 탁 꺾이어 나는 얼빠진 등신이 되고 말았다. 장모님도 덤벼들어 한쪽 귀마저 뒤로 잡아채면서 또 우는 것이다. 이렇게 꼼짝도 못 하게 해 놓고 장인님은 지게막대기를 들어서 사뭇 내려 조졌다. 그러나 나는 구태여 피하려지도 않고 암만해도 그 속 알 수 없는 점순이의 얼굴만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이 자식!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가 나오도록 해?" 

이자식!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가 나오도록 해?

 

 


-끝 -

 

 

 

 

<작품해제>

  • 갈래: 단편 소설, 토속적 소설, 향토적 소설, 농촌 소설
  • 성격: 해학적, 토속적
  • 문체: 향토적 어휘 속에 희극적 어투와 문장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고 있음. 
  • 주제: 향토적 서정의 세계. 인간 본연의 갈등과 그 해결. 시골 남녀의 진솔한 사랑. 의뭉하고 교활하기까지 한 장인과 어리숙한 데릴사위 사이의 해학적 갈등. 마름인 장인의 간교함과 우직한 머슴 사이에 혼인 문제로 드러난 해학적 갈등과 해결.
  • 구성: 단순 구성. 역순행적 구성. ‘나’의 회상에 의해 진행됨.
  • 시점: 1인칭 주인공 시점-우직하고 순박한 성품과 행동을 생생하게 묘사
  • 특징: 과장된 희극적 상황 설정. 유머러스한 토속적 언어와 구어체 사용. 엇갈린 시간 구성
  • 특이: 사건의 시간과 서술의 순서가 바뀌어 있는 역순행적 구성, 결말이 절정 속에 삽입됨(절정의 희극적 싸움이 주는 긴장감과 해학성을 살리기 위한 의도적 배치). 절정과 결말 부분이 명확히 나뉘지 않음. 
  • 배경: 1930년대 강원도 산골 마을.(공간적 배경은 강원도 산골 마을인 점순이의 집과 전답이며, 시간적 배경은 연대기적 시간이 설정되어 ‘나’와 장인의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다.)

 

 

 

김유정(金裕貞, 1908년 2월 12일 ~ 1937년 3월 29일)

 

  일제 강점기 조선의 소설가이다. 대한제국 강원도 춘천군 신남면 증리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방 돈녕계 니동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1937년 3월 29일을 기하여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에서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김유정의 본관은 청풍(淸風)으로 족보에는 조선 현종의 왕비 명성 왕후의 친정 아버지로 왕의 장인이었던 김우명의 넷째 손자 도택(道澤)을 김유정의 선조로 적고 있다. 할아버지 익찬(益贊, 1845년 ~ 1909년)은 자를 자영(士英)이라 했으며, 1891년에 증광시 진사시에 급제하여 통 사랑 행의 금부도사를 지냈다. 익찬의 아들인 춘식(春植), 즉 김유정의 아버지는 자를 윤주(允周)라 하였는데, 1894년에 식년시 진사시에 급제하여, 사마좌 임금 부주사(司馬座任禁府主事), 예식 부주사, 궁내 부의관을 역임하였다.

  1908년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 씨 사이에서 2남 6녀의 일곱째로 태어났다. 김유정의 고향은 실레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의 경춘선 신남역(2004년 김유정역으로 변경)이 있는 이곳은 김유정의 선대 집안이 몇 대에 걸쳐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기도 했다. 흔히 김유정의 출생지를 춘천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김유정의 셋째 누나였던 김유경은 김유정의 출생지가 서울 진골(지금의 종로구 운니동)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현재 실레마을의 주민들 가운데 김유정이 춘천에서 태어났음을 증언하는 사람은 없다. 전상국은 대대로 춘천의 실레마을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김유정의 선대가 춘천 의병이 잇따라 봉기하던 구한말 경술국치 때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식솔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고 김유정도 이 무렵에 태어났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혹은 일본의 재산 몰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한편 김유정 본인은 자신의 고향을 춘천으로 생각하여, 「오월의 산골작이」라는 수필에서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20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 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친 안윽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친 모양이 마치 옴푹한 떡시루 같아 하야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중략) 주위가 이렇게 시적이니만치 그들의 생활도 어데인가 시적이다. 어수룩하고 꾸물꾸물 일만 하는 그들을 대하면 마치 딴 세상 사람을 보는 듯하다."라고 적고 있다.

  김유정의 어머니는 김유정을 낳은 뒤 딸 하나를 더 낳고, 그가 일곱 살이 되던 1915년 3월 18일에 그만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도 2년 뒤 5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죽은 뒤 집안 살림을 도맡게 된 형 김유근은 집안에 여자들을 끌어들이는 등 방탕한 짓을 일삼아서 가세는 기울었고, 진골에서 관철동으로, 다시 숭인동, 관훈동, 청진동 등으로 옮겨 다니게 되었고 그때마다 집의 규모도 줄어들었다.(이러한 김유근의 모습은 훗날 김유정 자신의 단편소설 「형」에 한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16년부터 1919년 봄까지 김유정은 4년 동안 이웃 글방에 다니며 《천자문》, 《계몽편》, 《통감》 등을 배우고, 붓글씨를 익혔다. 만 12세에 에울입월초등학교 이듬해 3학년으로 월반한 뒤에 4학년으로 졸업할 정도로 그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으며, 1923년 4월 9일에는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5년제)에 검정으로 입학하였다. 휘문고보에 입학하면서 김유정은 이름을 잠시 나이(羅伊)로 바꾸었다가 3학년 때 다시 본래 이름으로 되돌렸다. 숭인동 80번지로 다시 이사하였는데, 휘문고보에서 안회남(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저자 안국선의 아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야구 · 축구 · 스케이팅 · 권투 · 유도 등의 스포츠와 소설 읽기, 영화 감상, 바이올린 연주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동장에서 투포환을 가슴에 맞고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였던 그는 교내에 하모니카 서클을 만들기도 했으며, 3학년 때 몸이 좋지 않아 1년 휴학하고 집에서 쉴 즈음, 당시 단성사 개관기념행사에서 단상에 올라 하모니카 독주를 하기도 했다.

  김유정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형 김유근은 마침내 서울에서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아내와 자식들도 남겨둔 채로 춘천 실레마을로 낙향해 버렸다. 형으로부터의 생활비와 학비 보조를 받지 못하게 된 김유정은 봉익동에서 적십자 병원 의사 일을 하던 삼촌집에 잠시 머무르다 곧 누나들과 형수의 집을 전전했고 이때부터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특히 휘문고보 재학 시절부터 치질을 앓게 된 김유정은 삼촌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게 된 뒤에도 늑막염이나 폐결핵 등의 병이 연속적으로 발생하여, 친구 안회남에게 "가슴이 뜨끔뜨끔 아프다"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고 한다. 21세 때 휘문고보를 졸업(제21회)한 김유정은 이듬해인 1930년 4월 6일에 경성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두 달 만인 6월 24일에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중퇴하고 만다. 제적 사유에 대해서는 퇴학자 명단에만 기록이 있을 뿐 상세한 기록이 없지만, 대체로 수업 일수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을 가능성이 지적된다.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김유정은 4살 연상의 기생 박록주를 보고 한눈에 반해 짝사랑하게 되었는데, 밤새워 편지를 써서 보내는가 하면 혈서를 써서 전하기도 하고, 선물도 보냈지만 번번이 되돌아왔으며, 직접 찾아가 구애하기도 하고 박록주가 나가는 요정 앞에서 밤새워 기다렸다가 인력거에 탄 그녀를 끌어내려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2년 가까이 지속된 김유정의 병적인 짝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괴로워하던 김유정은 어느 날 갑자기 형 김유근이 있는 고향 춘천으로 내려갔다. 앞서 김유근에게 병 치료와 생활비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한 상황에서 마침 둘째 누이의 동거남이었던 매형 정 씨의 부추김을 받아, 집안의 남은 재산까지 탕진하고 있는 형 김유근을 상대로 재산 분배 소송을 내기 위한 낙향이었지만, 춘천에서 김유정은 고향의 순박한 정취와 가난한 당시 농민들의 삶을 직접 체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춘천에서 김유정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들병이(이리저리 떠돌며 술을 파는 여자)들을 찾아다니며 술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대학 공부에 대한 미련으로 1931년 다시 상경한 김유정은 경성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그곳에서도 곧 퇴학하고 말았고, 매형 정 씨의 주선으로 병도 휴양할 겸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가게 되지만, 이곳에서조차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다가 결국 건강만 더 악화된 채 서너 달 만에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왔는데, 이곳에서의 경험은 훗날 그의 소설 「금 따는 콩밭」, 「노다지」, 「금」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

  고향에서 1930년부터 1932년까지, 1년 7개월을 머무르면서 김유정은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하고, 고향집 언덕받이에 움막을 짓고 옛날 자신의 마름집 아들이었던 조명희나 조카 김영수(김유근의 아들) 등과 뜻을 함께 하여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여는 등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춘천문화방송에서 김유정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김유정은 민중들을 사랑하여, 명문 집안의 자손인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소작인들에게도 존댓말을 하였다고 한다. 김유정이 조직한 농우회는 뒤에 '금병의숙'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간이학교로서 인가를 받은 뒤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지금엔 그곳에 면에서 운영하는 마을회관이 서있고 그 옆에 김유정의 뜻을 기리는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1932년 6월 15일에 김유정은 자신의 첫 작품인 「심청」을 탈고하였다(이 작품은 4년 뒤인 1936년 조선중앙일보사 발간 『중앙』지에 발표되었다).

  한편 김유근은 고향 춘천에서도 가산을 완전히 정리한 뒤, 그곳에 있던 조상의 무덤까지 파서 화장해버렸다. 형으로부터 '청산된 금액의 1/30' 만큼의 돈을 얻은 김유정은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둘째 누나의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이때 김유정은 늑막염이 악화된 상태였고 병원에서는 폐결핵 진단까지 받게 되었다. 여기에 당시 공장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던 누나의 히스테리 증세에 그 누나에게 얹혀사는 건달이나 다름없는 매형 정 씨에 대한 미움까지 겹쳤는데, 이것은 훗날 김유정의 문학세계에도 적지 않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4년에 김유정은 사직동에서 혜화동으로 이사하였고, 누나의 집에서 식객살이를 시작했다. 김유정에게는 무수히 많은 원고 청탁이 쏟아져 들어왔고, 김유정 자신도 약값을 벌기 위해 청탁이 오는 대로 글을 썼지만 그나마도 돈이 생기면 술값으로 써버리기 일쑤였다. 《여성》이라는 잡지에 자신이 기고했던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라는 글과 나란히 실린 박봉자(시인 박용철의 여동생)의 글을 읽게 된 김유정은 다시 얼굴도 모르는 박봉자라는 여인을 향해 무려 31통에 달하는 구애의 편지를 썼지만, 답장은 한 통도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얼마 뒤 김유정 자신도 잘 알고 지낸 평론가 김환태와 박봉자가 약혼을 했으며 곧바로 결혼했다는 비극적인 소식만 듣게 되었다.

 

  1936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김유정은 형수가 사는 단칸 셋방에 함께 살며 폐결핵이 더욱 악화되어 고생하였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매형 유세준(다섯째 누나인 김유흥의 남편)의 집으로 내려가면서도 자신의 조카 김진수를 데리고 갈 정도로 조카에 대한 애정을 쏟았던 김유정은 죽기 11일 전인 3월 18일에 방안에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놓고 글을 썼는데, 친구 안회남 앞으로 남긴 「필승전」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김유정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고 있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렬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채리지 않으면 이 몸을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라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둬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허거든 네가 적극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엎집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딱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1937년 3월 29일 아침 6시 30분에 김유정은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폐결핵. 향년 30세였다.

김유정의 유해는 가족에 의해 광주에서 서울 서대문 밖의 홍제동 화장터(현재의 고은초등학교부지, 현재 화장장은 벽제로 이전)로 옮겨져 화장되었다.

 

 

 

동백꽃ㆍ봄봄 : 김유정 BEST 단편선 -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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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생활

  이미 단편 소설 '소낙비'로 1935년 《조선일보》에 당선되기 2년 전에, 김유정은 「산골 나그네」라는 소설을 개벽사의 문예지 『제일선』에 발표하였다. 이 「산골 나그네」는 김유정이 춘천에 있을 때,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다 길가 오막살이에 살던 돌쇠라는 사람의 집에서, 돌쇠 어멈으로부터 그 집에 며칠 머물다 도망친 어떤 들병이 여자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지은 것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에 「총각과 맹꽁이」(『신여성』 9월호), 「흙을 등지고」 등을 발표했지만, 이들 소설은 그렇게 좋은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하던 차에 1934년 말에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등 세 개의 신문사에 나란히 소설을 응모하였고 그 가운데 『조선일보』에 응모했던 「소낙비」는 1등, 『조선중앙일보』에 응모했던 「노다지」가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비로소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등단한 해에 김유정은 자신의 생에 대표작이라 불릴 작품 대부분을 발표하였다. 「금 따는 콩밭」 · 「금」 · 「떡」 · 「만무방」 · 「산골」 · 「솟」 · 「봄봄」 · 「안해」 등의 단편 10편과 수필 3편이 그가 등단한 바로 그 해에 쏟아져 나왔는데, 춘천에서 보고 느꼈던 고향의 정취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 그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에서 체험한 감상 등이 그의 소설의 주요 모티프였다. 문단에 이름을 올린 김유정과 절친했던 문우(文友)로는 휘문고보 때부터의 동창이었던 안회남 말고도, 사직동의 매형집에 살 때부터 앞뒷집에 살며 김유정의 생활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이석훈도 있었고, 이석훈의 소개로 구인회에 가입한 뒤에 알게 된 이상(李箱)도 있었다. 1937년에 똑같이 「남생이」라는 작품으로 『조선일보』에 등단한 현덕(玄德)도 김유정의 문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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