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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현대산문

성석제 '투명인간' 전문 일부

by 열공햐 2021.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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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문제로 아래 여러 링크들을 통해서 전문 일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투명인간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중단편 소설집으로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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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미리보기 - [도서] 투명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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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발 닳도록 가정에 헌신…베이비부머 가장을 위한 헌사"

장편소설 '투명인간' 출간한 성석제 씨

 

  소설가 성석제 씨(54)가 2년 만에 신작 장편《투명인간》(창비)을 냈다. 성씨가 말하는 투명인간은 학교나 직장 등 조직에서 눈에 잘 띄지 않거나, 있어도 외면당하는 사람이다.  그는 왜 투명인간을 주목했을까.

  “가정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많은 가장들이 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사회적으로도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됩니다. 가족을 위해 모든 걸 바친 자에겐 남은 게 없겠죠. 그러다 투신까지 하게 되는 사람들의 속내가 궁금했어요.”

  작품의 주인공은 두메산골 가난한 집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김만수다. 시골에서나 서울에서나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그는 전문학교를 다니면서 돈을 벌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의경으로 입대해 교통경찰을 보조하며 뇌물도 성실히 챙겨 집에 보탠다. 혼신을 다해 일하던 공장이 경영난에 빠지고 얼떨결에 마지막까지 남아 공장을 지키던 만수는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 책임을 떠안게 된다. 아내는 신장병을 앓고, 친자식처럼 키운 조카는 자폐증에 왕따까지 당한다.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족을 위해 끝까지 열심히 산 만수.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고 결국 투명인간이 되고 만다. 작가는 이 투명인간의 삶을 그와 관계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재구성했다. 그는

 

“한 사람의 생애는 시간적으로 길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성하는 기술적 방법이 필요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 가진 자연스러움을 활용했다”

 

라고 설명했다.
  
  투명인간은 세상과 어울릴 수 없어 비극적이다. ‘손발이 닳도록’ 직장과 가족에 헌신한 만수는 결국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작가는

 

  “그냥 착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별히 소설을 바칠 만하다”

 

라고 말했다.

  사실 이 소설은 특별한 인생을 산 어떤 한 사람을 다룬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평범한 베이비붐 세대 가장을 위한 헌사(獻詞) 혹은 조사(弔詞)다.
 
  투명인간 만수는 결국 드러나지 않았던 삶을 마친다. 최근 동료 병사들에게 총구를 겨눈 임모 병장도 자신이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 모두 얼마든지 김만수나 임 병장이 될 수 있기에 슬픈 소설이다.

2014-07-02.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

 

 

 

 

줄거리

  김만수의 조부는 일제의 억압을 피해 산골 깊은 곳에 숨어 살고, 김만수의 부친은 지식인이었던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공부 대신 농사일에 전념하며 6남매를 낳고 살아간다.

 

  첫째 아들인 백수는 똑똑하여 서울대에 입학하지만,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병사한다. 백수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가족과 형제들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둘째 아들인 만수는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기술을 배우고, 큰딸인 금희는 구로 공단에 취직하기 위해 가출한다. 대학생이 된 셋째 아들 석수는 공활에 참여했다가 수사 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그들의 수하가 된다.

 

  서울 생활 도중 연탄가스 사고로 인해 똑똑하던 둘째 딸은 바보가 되고, 자동차 부품 회사에 취직한 만수는 바보가 된 둘째 누나를 돌보며 살아간다. 또한 만수는 종적을 감춘 석수의 아들을 맡아 키우고, 막내 여동생의 결혼 자금과 살림집을 마련해 주고 식당을 차릴수 있게 도와준다. 만수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자, 만수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공장을 불법 점거하게 되고, 결국 손해 배상 소송을 당해 큰 빚을 지게 된다. 만수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돈을 벌어 빚을 갚다가 ‘투명 인간’이 된다. 

 

 

 

성석제(成碩濟, 1960년 7월 5일 ~ )

  대한민국의 시인, 소설가이다.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1974년에 서울로 이사했다. 경신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문학 동아리인 "연세문학회"에서 활동하였다. 1986년 6월 문학사상의 시 부문에서 신인상을 받아 등단하였다. 1986년에 [문학사상]에 시 「유리닦는 사람」을, 1995년 [문학동네] 여름호에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소설가로서의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1년 첫 시집 《낯선 길에 묻다》를 펴냈다. 1994년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펴내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특히 1995년 계간 《문학동네》에 단편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을 발표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1996년 첫 소설집 《새가 되었네》(강출판사)를 펴 냈다.

  해학과 풍자, 과장, 익살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국면을 그려내는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희비극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서사와 독창적인 문체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단편소설, 중편소설, 장편소설, 짧은 소설, 에세이, 칼럼, 산문 등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지속해 왔으며 2권의 시집, 30여 권의 소설집과 장편소설, 산문집, 동화 등을 발간했다. 그의 작품은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으로 번역되어 중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출간되었다.

 

  평론가 우찬제는 그를 거짓과 참, 상상과 실제, 농담과 진담,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선을 미묘하게 넘나드는 개성적인 이야기꾼이며, 현실의 온갖 고통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올바로 성찰하면서도 그것을 웃으며 즐길 줄 아는 작가라 평했다. 또한 평론가 문혜원은 “성석제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농담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막힘없이 풀어놓으며 '마치 무협지의 고수들처럼'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입담을 펼친다.”라고 전한다. 이런 평론가들의 말처럼 성석제는 미묘한 경계선을 거닐면서 재미난 입담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소풍』은 흥겨운 입담과 날렵한 필치가 빛나는 산문집이다. 저자는 음식을 만들고 먹고 나누고 기억하는 행위가 곧 일상을 떠나 마음의 고삐를 풀어놓고 한가로운 순간을 음미하는 소풍과 같다고 말한다. 음식은 “추억의 예술이며 오감이 총동원되는 총체예술”이며, “필연코 한 개인의 본질적인 조건에까지 뿌리가 닿아 있다”는 지론은 곧 우리 세대가 잃어버린 사람살이의 다양한 세목을 되살려온 성석제 소설세계와 상통한다. 십수년간 각종 매체에 연재하며 갖가지 음식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낸 작업이 ‘음식의 맛, 사람의 맛, 세상의 맛’을 함께 음미하게 한다. 

  단편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모든 면에서 평균치에 못 미치는 농부 황만근의 일생을 묘비명의 형식을 삽입해 서술한 표제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포함하여, 한 친목계 모임에서 우연히 벌어진 조직폭력배들과의 한판 싸움을 그린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 돈많은 과부와 결혼해 잘살아보려던 한 입주과외 대학생이 차례로 유복한 집안의 여성들을 만나 겪는 일을 그린 「욕탕의 여인들」, 세상의 경계선상을 떠도는 괴이한 인물들의 모습을 담은 「책」, 「천애윤락」,「천하제일 남가이」등 2년여 동안 발표한 일곱 편의 중 · 단편을 한 권으로 엮었다. 이번 작품집도 예외없이 세상의 통념과 질서를 향해 작가 특유의 유쾌한 펀치를 날리는데, 비극과 희극, 해학과 풍자 사이를 종횡무진한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이후 성석제가 3년간 발표한 단편들을 모았다. 혼기에 이른 맏딸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이야기와 딸이 어머니에게 읽어드리는 옛이야기를 교차 시키며 유려하게 텍스트를 직조해낸 표제작을 비롯,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내 고운 벗님' 등 총9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기성의 통념과 가치를 뒤집는 화려한 수사와 “웃음의 모든 차원을 자유자재로 열어놓는 말의 부림”으로 우리 주변에 있음직한 각양각색 인물들의 삶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표면에 드러나는 유쾌한 재미와 해학, 풍자 밑에는 세상을 보는 날카로운 통찰이 번뜩이기도 하고 그리움이나 인간을 향한 건강하고 따뜻한 시선이 은근히 깔려 있다. 

  이외의 소설집으로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새가 되었네』 『재미나는 인생』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호랑이를 봤다』 『홀림』 『지금 행복해』 『첫사랑』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참말로 좋은 날』 『이 인간이 정말』 『믜리도 괴리도 업시』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등과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궁전의 새』 『순정』 『인간의 힘』 『도망자 이치도』 『위풍당당』 『투명인간』 『왕은 안녕하시다』(전2권) 등, 산문집 『소풍』 『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 『칼과 황홀』 『꾸들꾸들 물고기 씨, 어딜 가시나』 『근데 사실 조금은 굉장하고 영원할 이야기』 등이 있으며, 명문장들을 가려 뽑아 묶은 『성석제가 찾은 맛있는 문장들』이 있다. 

  1997년 단편 「유랑」으로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2000년 「홀림」으로 제13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고, 2001년 단편「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제2회 이효석문학상, 같은 작품으로 2002년 제33회 동인문학상을 받았으며, 2004년 「내 고운 벗님」으로 제4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전 문학을 통해서 전형을 보여주기 보다는 패턴을 제시하고 싶어요. ‘나는 좌파다, 우파다’ 말하기보다 ‘이런 경우도 있다’는 상황을 제시하고 '이 사람은 이렇게 했다. 언제나 옳은 건 아니지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물음을 던지고 싶어요." 주간한국 2008-10-24 


  "소설은 '대화'다. 그러니, 나는 '대화하는 사람'이겠지. 내 소설이 '재미만 있다'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그랬는데... 세상엔 진지한 대화만큼이나 재미있는 대화도 필요한 것 아닌가?" 오마이뉴스 2006-11-18 

1986년 문학사상 신인상 , 『유리닦는 사람』 
1997년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 , 『유랑』 
2000년 제13회 <동서문학상> , 『홀림』 
2001년 제2회 <이효석문학상> ,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2005년 제13회 <오영수문학상> , 『내 고운 벗님』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소설, 세태 소설 
• 성격 : 사실적, 해학적, 역사적, 풍자적, 비판적

• 배경: 시간 → 일제 강점기~2000년대 초, 공간 →  개울리, 서울 
• 시점: 1인칭 시점(장면마다 서술자 교체) 
• 주제 : 산업화 과정에서 우직하게 살아온 인물이 겪게 되는 비극적인 삶의 모습
• 특징 : 

다수의 1인칭 서술자가 번갈아 교체되면서 한 인물을 형상화 
② 다양한 삽화(에피소드)가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특정한 사건에 무게를 두지 않음
③ 구체적인 지명과 사회상,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제시하여 사실성을 높임

④ 인물이 처했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냄 

 

제목의 의미

  투명 인간은 외모나 능력이 별 볼 일 없어 무시당하고, 사회적으로 인정 못 받는 약자이자,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모자랐던 주인공 '만수'를 상징하는 말이다.
또한 가족을 향한 끝없는 희생과 헌신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소진해서 결국 닳아 없어진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 

  투명 인간 시점의 특징은 만수의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다수의 1인칭 서술자가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눈에 비친 만수의 삶을 서술하지만 만수는 서술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다양한 인물들이 만수의 삶을 다채롭게 서술함으로써 인물의 특성이 입체적으로 부각되어, 독자는 만수를 구조적, 심리적으로 멀리서 바라보게 하여 인물의 소외감과 고립성을 강화하게 된다. 그리고 만수가 겪는 고통을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조명함으로써 객관성과 신빙성 및 설득력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등장인물

- 만수의 조부 : 김용식. 부잣집 삼대독자로 태어나 독립운동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잡혀갔다가 풀려난 후 집안이 몰락하자 야반도주해 아들 충현과 가족을 이끌고 인적 드문 산골 개운리에서 정착해 삶.

 

- 만수의 부친 : 김충현. 공부를 많이 했지만 결국 개운리에 숨어 살 수밖에 없게 된 아버지의 삶에 반감을 갖고 공부를 멀리하고, 농사에 전념하며 살아감.

 

- 백수 : 장남. 똑똑하고 공부를 잘해 서울대에 갔지만, 베트남 전쟁에 지원하여 참전했다가 병사함.

 

- 금희 : 첫째 딸. 백수가 죽은 후에 서울로 와서 공장에서 번 돈으로 동생들을 보살피며 살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명희 대신 고압 산소 치료 탱크에서 치료를 받게 되어 살아남.

 

- 명희 : 둘째 딸. 백수가 죽은 후에 서울로 와서 공장을 다니면서 공부를 열심히 함.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병원으로 갔지만 하나밖에 없는 고압 산소 치료 탱크에 언니 금희가 먼저 치료받게 되면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평생 바보처럼 살게 됨.

 

- 만수 : 둘째 아들. 허약하게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악착으로 농사일을 배워 일을 잘함. 백수가 죽은 후 서울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형제들과 석수가 버린 자식을 돌보며 살아감. 결국 ‘투명 인간’이 됨.

 

- 석수 : 막내 아들. 욕심이 많고 악착같은 성격으로 대학까지 들어가지만, 공활 운동에 참여했다가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수사 기관의 앞잡이가 됨. - 옥희 : 막내 딸. 백수가 죽은 후에 오빠, 언니들을 따라 서울에 와서 살게 됨. 만수의 도움으로 식당을 차려 잘 살아감.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전쟁과 분단,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라는 현대사의 격동적이며 굴곡진 여정을 살아가는 삼대의 이야기를 김만수의 삶을 중심으로 다룬 현대 소설이다.

 

  주인공 만수를 제외한 작품 속 여러 인물이 1인칭 서술자로 번갈아 교체되고, 그에 따라 수많은 삽화를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전개 방식을 통해 특정한 사건에 무게를 두지 않고 객관적·총체적으로 상황을 전달하며 사건이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김만수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 사회가 거쳐 온 분단 이후의 근대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경제 발전과 함께 급격하게 산업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주변인으로서의 삶을 힘겹게 살았지만, 결국 뚜렷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투명 인간’이 되고 마는 비극적인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특정한 사건에 무게를 두고 사건을 전개하기보다는 수많은 삽화와 인물을 엮어서 거대한 풍속화를 완성하는 방식으로 서사가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서술자의 잦은 교체를 통해 특정한 상황에 대한 각 서술자의 입장과 생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투명 인간’은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존재이자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다. 이 소설에서는 경제 중심의 근대화 과정에서 주변부적인 삶을 강요받은 인물, 고난과 역경 속에서 분투하며 살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 인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의미로 투명인간은 ‘내면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람’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익을 위한 가면을 쓰지 않은 인간형을 말한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가면 없이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우직한 인물을 의미한다.

 

 

 

yes24 리뷰 k**3

1. 다시 성석제를 읽어야 한다

 

  성석제라는 이름을 보면 벌써 그 무게와 두께가 다르다. 지금에 와 듣지 않아도 처음부터 그 이름에는 오래 전 일제 하 사실주의와 근대 단편소설의 황홀했던 태동기에서 존재했던 가슴 뛰는 저 소설가들의 도서관 목록들이 주르르 딸려 나올 것만 같은 것이다. 성.석.제. 소설보다 더 소설같이 자꾸만 읽어 들어가 보고 싶어지는 작가.

거짓과 참, 상상과 실제, 농담과 진담, 과거와 현재, 개성, 풍자, 해학, 입담, 나아가 무협지의 고수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그를 표현하는 수식은 더 이상의 수식이 아닌 대명사를 넘어 관용명사가 되어버리기까지 한 정도이다. 이쯤에서 그에 대한 평론과 그의 소설 읽기는 다시 새로워져야 한다. 아니, 그의 이야기 자체가 자꾸만 새로워질 수밖에 없는 대단한 마법을 지니고 있다. 다른 어느 소설을 보더라도 그의 이야기에는 예외 없음, 종횡무진, 특유의 말부림 등등 엎어 치고 뒤집고 날려 보내며 마침내는 유쾌, 통쾌한 무언가가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재주꾼, 소리꾼, 온갖 꾼 꾼 중에서도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리고 여기에 몇 가지 그의 이야기를 높이는 다른 찬송들이 더 있다.

이 책 투명인간 속의 표현처럼 정말 ‘지지리도 복이 없던’ 주인공 김만수처럼 작가의 다른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들은 언제나처럼 한 마디로 지지리도 못.났.다. 거기에다 작가의 놀랄만한 입담이 가세해 불쌍하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하다. 여기 김만수의 다른 절친들을 한 번 보자. 단편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농부 황만근은 모든 면에서 평균치에 훨씬 못 미친다. ‘욕탕의 여인들’의 주인공 대학생이 한다는 짓은 겨우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해 한 번 잘 살아보려고 차례로 유복한 집안의 여성들을 만나러 돌아다니는 일이고, 또 다른 책 속에서도 주인공들은 마치 이상한 친목모임의 같은 동호회원들인 것처럼 대부분 세상과 섞이지 못하고 그 주변에서만 맴돈다.


2. 우리의 위대한 투명인간, ‘김만수’

  성석제 작가와 작가의 소설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끝맺기 전, 오늘의 소설 ‘투명인간’에 대해 먼저 얘기를 나눠보자. 저 19세기 말과 20세기 중엽에 걸쳐 대단한 SF 환상문학 작품을 남겼던 허버트 조지 웰스의 소설 속의 초인과는 조금 다르다. “조금 다르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우리의 김만수 또한 진짜 투명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니, 정말로 남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투명인간이 된 것이다. 소설 속 1인칭 화자인 김만수는 분명히 말한다. “어느 순간, 갑자기, 투명인간이 됐다.” 그런데 웰스의 주인공과 그 조금 다른 부분은 옛날의 투명인간이 자기 인체의 세포에 유리와 같은 성질의 빛의 굴절도를 줄 수 있게끔 해서 결국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약품을 발명한 사나이였다면, 공교롭게도 김만수는 스스로의 과학적 발명을 통하여 투명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세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투명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사람들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되었다는 이것이다. 김만수는 비정한 현실의 무게 속에서 끝내 투명인간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투명인간은 역시나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참 모자라다. 너무 모자라서 기가 차 쓴웃음이 나올 정도다. 소설의 말미를 우선 보자. “투명인간이 되고 난 뒤에도 보통의 세상처럼 해도 되는 일, 안 되는 일의 한계가 있더라. 우리는 천사나 악마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냥 인간이다. 뭔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고 다 같이 노력을 해야 한다.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것처럼.” 이미 이 투명인간 이야기의 첫머리와 끝자락에서 주인공 김만수는 동일하게 푸념한다. “그래서, 도대체, 투명인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웰스의 투명인간은 자기 육체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을 이용하여 그때부터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한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지금의 투명인간은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고달프며, 위태롭고, 절망적이다. 정말이지 엉망진창이다. 그리고 과거의 투명인간이 예견된 고립과 파멸의 길을 갔다면, 지금의 투명인간은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더 깜깜하고 암담하다. 장님에, 앉은뱅이에, 말더듬이에, 어눌하기까지 온갖 불행상표를 다 붙여 놓아도 모자랄 판이다. 그러니 차라리 쓴웃음이 나올 수밖에.


3. 이것이 투명인간이다

  자, 3대에 걸친 김만수의 가족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그대로 겪으며 살아 왔다. 여기까지는 염상섭 소설 ‘삼대’가 겹쳐진다. 제1대, 독립운동 관련 책을 소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던 만수의 할아버지가 바로 이 투명인간이 된 인과의 시작이다. 그로 인해 가세가 기운 것에 대해 만수의 아버지는 평생의 반발심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엄청난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김만수가 투명인간이 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약물로 작용한다. 이제부터는 과연 어떤 놈의 투명인간이 되어가는지를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큰형,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다 고엽제로 병사한다. 누나, 연탄가스 중독을 제 때에 치료받지 못해 바보가 된다. 여동생, 가열하게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동지 남자에게 그만 원치 않은 일을 당해 버린다. 남동생은 고문을 당한 이후 연락이 끊긴다. 그렇다면 결정적으로 투명인간인 김만수는 어떠한가. 오히려 형제들에 비해 못나고 못 배웠던 탓에 어려서부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늘 원치 않게 당해왔다는 것이다. 그 당해온 것이 온갖 불행이란 불행은 다 모아놓은 것이라 더욱 놀랄 만하다. 그러다 끝내는 투명인간이 되는 운명을 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회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도리어 손해를 끼쳤다며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떠안고, 실종된 남동생의 새끼까지 맡아 키우지만 이 아이는 학교에서의 괴롭힘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아까운 생을 마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만 고된 노동과 참을 수 없는 외면, 그리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알 수 없는 불행의 그림자는 끝내 그에게 투명인간이라는 운명의 마침표를 찍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끝은 절대 아니다. 다시 한 번 소설의 말미 김만수의 푸념을 리와인드해 보자. “투명인간이 되고 난 뒤에도 보통의 세상처럼 해도 되는 일, 안 되는 일의 한계가 있더라. 우리는 천사나 악마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냥 인간이다…… 그래서, 도대체, 투명인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4.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

  성석제 작가의 가장 최근 작품 투명인간은 겨우 지난 해 여름에 출간된 도서이다. 바로 그 점에서 최근 한국사회의 가장 이슈화된 문제점과 폐부를 정곡으로 찌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투명인간의 주인공과 주인공의 주변을 맴도는 인물들이 모두 현 정권 하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면들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주인공 김만수는 분명히 우리와 똑같은 시대의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를 고군분투하는 인물이지만, 이 주인공을 통해 보는 소설 속의 배경은 삼대에 걸친 한국 현대사회를 병풍처럼 모조리 껴안고 있다. 여기에 놀라운 사실 하나는 과거의 역사나 오늘의 역사나 한 치도 다름없이 문제를 거듭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의 시대에서 읽는 투명인간 속의 과거 역사는 전혀 낯설거나 고루하지 않고, 여전히 반복되는 과오이기에 오히려 공감이 되고 새롭기까지 하다. 이 점을 작가는 잘 알고 있었기에 지난 현대사를 소설적 소재로 삼을 수 있었고, 김만수라는 지금을 사는 인물을 통해 그 때 그 시절의 부정을 오늘의 시대로 그대로 옮겨놓음으로써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문제를 환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그 시대를 대변해 주는 소설 속 여러 주인공들을 우리는 숱하게 읽고 느껴 왔다. 심지어 지난 19세기 천재 여성작가였던 메리 셸리의 소설에서는 프랑켄슈타인 박사라는 인물을 통해 경악스런 괴물이 탄생되기까지 하였다. 투명인간의 주인공 김만수는 인간임과 동시에 인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김만수가 진짜로 투명인간이 된 장면에서는 저 라틴아메리카의 비참한 고독을 눈물겹게 보여주었던 남미 작가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 속 환상적 인물들이 잠깐 떠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백년의 고독’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마콘도 가문 최후의 인간이 돼지꼬리가 달린 채 태어나자마자 바로 새하얀 개미떼들에게 둘러싸여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고, ‘투명인간’에서는 무엇에 의할 것도 없이 한 번에 투명해져 사라져 버린다. 환상적 결말이지만 그렇게도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주인공 김만수의 무게가 고스란히 지금의 나에게 피부로 다가와서일 것이다. 거기에 어떤 함의나 은유를 찾을 것도 없이, 우리 모두는 투명인간임에 분명하다. 이것은 환상이 아닌 사실이다. 사실 마르케스의 소설 속 몽환적 인물들 또한 거기에 어떤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온몸이 개미떼에 사로잡혀 하루아침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려도, 목구멍이 찔려 분명히 죽었는데도 그 상태 그대로 끝까지 홀로 늙어가도, 평생을 흙과 석회만 씹어 먹으며 죽기 살기로 고독을 달래는 것도, 모두 그렇게나 외롭고 아팠던 그들이 처한 현실과 하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소설 속의 인물들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소설 ‘투명인간’ 속의 전쟁과 고문, 배신과 희생, 소외와 착취, 그 모든 극한의 고통들을 어찌 현실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차라리 투명인간이 지금 시대의 그냥 인간보다 더 현실적인 인물일 것이었다.
 

5. 누구나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

  존재감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그간 투명인간이라는 말로 빗대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이제부터 투명인간은 사회 속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없는 듯 죽어 살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비참한 인간의 상징과 전형으로 새롭게 표현되어야 할 것 같다. 지금부터는 이런 사람이 투명인간이다. 가장 못생기고 가장 덜 떨어진 것은 기본이고, 여기에다 쓸데없는 배려와 양보심은 가장 높아서 언제나 자신보다 가족과 친구, 동료들을 먼저 생각하는 바보 같은 이타주의자와 박애주의자. 그런데 우리의 투명인간의 대표 김만수만 투명인간인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실패하고, 천대받고, 무시되고, 외롭고, 슬프고, 아프고, 힘들어 죽고 싶은 사람들은 다 투명인간인 것이다. 이제부터 여기저기 손만 들면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 자기 피를 팔아 학비를 마련하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고엽제로 죽은 것이 인생인 형, 연탄가스를 마셔 그만 지능이 떨어져 버린 누나, 학생운동을 하다 강간을 당해 시집 간 여동생, 노동운동 하다 고문 받은 남동생, 그리고 학교에서 따돌림을 참지 못해 자살한 우리 가엾은 조카새끼까지 다 다 투명인간 놈들이다.

만수네 6남매는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과 60년대 중반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다. 영락없이 우리 세대의 가장들이다. 그들은 모두 지난 시기의 국가적 성장 속에서 편리와 안녕을 배운 것이 아니라, 돌이켜 보면, 오로지 ‘포기’라는 단 하나만을 머리에 지긋하게도 익혔을 뿐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던 오늘의 청년들 또한 결혼, 출산, 연애를 포기한 ‘삼포세대’라는 것이다. 이토록 심각한 취업난 속에서 삼포만이 아니라 인간관계도 집도 꿈도 희망도 모두 다 포기해버리고 마는 ‘다포세대’, ‘올포세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큰일이다. 이러 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 다 투명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책 ‘투명인간’은 오늘의 시대에 너무도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이, 사회가 이 지경이라면, 여기에 구원은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어디에 있는 것일까?


6. 개인과 사회의 구원

  이 책에서 ‘투명인간’이란 저주스런 삶 자체이지만, 반드시 부정적 함의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고통이 극한으로 치달아 견딜 수 없을 때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또는 몸을 지우고) 투명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복이다.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면 이게 구원일까? 아니다. 어떻게 말하든, 이 사회에서 버티지 못하고 밀려나 소외된 존재,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지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 투명인간(아마도 사라진 석수일 것이다.)이 김만수와 이야기를 나눈다. 투명인간 이전에도 그랬던 김만수는 투명인간 이후에도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에게 상대 투명인간은 세상의 악한 시스템을 거론하며 단정한다. “나 혼자 깨끗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라고. 그러자 김만수가 대답한다.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이 방법뿐인가? 이 소설은 강요하지 않지만 물음표를 던져 준다. ‘이게 최선인가? 고착화된 세상의 악마적 현실 구조를 타파할 방법이, 아니 고통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방편이, 고작 긍정의 힘과 세상 질서에 순응하는 우직함뿐인가?’라고 말이다. 힘을 모아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아군 적군도 구분 못 하고 계급배반투표 같은 자폭 행위만 일삼는 게 하층계급이다. 이런 자들에게 무슨 희망을 걸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저자는, 자본주의에 밀려나 이름만 덩그러니 남은 민주주의에 대하여 답답한 냉소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아니면 이 현실을 덤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나는 악 자체가 되어버린 사회구조 속 우매한 민중들에게 개혁과 변화를 얘기해 본들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확 든다. 하지만, 이런 고통 속 민중들을 변증법적 ‘정’(正)으로 보았을 때, ‘절대정신’이 보낸 구원투수 ‘반’(反)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압제를 해방으로 바꿔 줄 그들은 지성과 비판력을 갖추고 민중과 사회정의를 위해 격렬히 저항하는 진보주의자, 즉 운동권들이다. 그런데 정치사회적 함의로 가득한 영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이 운동권 출신들이 주류권으로 편입해 권력과 부의 단맛을 보며 서서히 기득권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인격적 이상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로 묘사한 386 운동권들이 실제로 정치.경제.사회의 주역으로 대거 진출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타도 대상’으로 여기던 세력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건전한 프롤레타리아에게 상해를 입히고,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민중은 어리석고, 진보세력은 타락했으며, 상황은 더 악화되어 간다. 그러니, 인간 해방, 민중 해방, 사회 구원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런데 정작 구원은 전혀 다른 데 있다. 투명인간은 김만수가 교통사고를 당한 줄 알고 그를 찾아 나선다. 이것이 결국 죽었다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김만수는 그 시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건지 모호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뒤로 하고 소설의 마지막에 주목하자, “형. 만수 형.” 사회악에 적응하기 위해 영혼까지 내줄 작정으로 살던 석수의 외마디 외침이다. 석수의 자책과 개심을 말해 주는 절규다.

그렇다. 바로 이거다.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책 ‘철학적 탐구’에서 말하듯, 사람이 죽은 것이지, 언어는, 의미는, 살아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김만수는 없지만, 그의 이타적 삶과 선의는 ‘만수 형’이라는 이름(언어) 속에 응축되어 되살아나고, 그것이 전달되어 속물 같은 석수를 변화시키는 힘(에네르게이아)으로 작용한다. 어떤 대상이든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것은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머물기 때문이다. 마치 김춘수의 시에 나오는 ‘꽃’처럼 말이다. 이제, 투명인간 김만수 개인의 구원이, 석수의 구원으로, 다시 사회의 구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이런 과정적 구원이 ‘궁극적 실재’의 구원 방법이 아닐까.
  

7. 투명인간의 삶, 투명인간의 희망

  ‘범죄의 재구성’, ‘타짜’, ‘전우치’, ‘도둑들’에 이어, ‘암살’에 이르기까지 현란한 이야기의 끝판왕을 보여 준 영화감독 최동훈은 한결같이 자신의 영화적 신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재밌어야 한다고. 뭐니 뭐니 해도 성석제 소설의 최고 장점은 한 마디로 끝장나게 재미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통찰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 자체에 대한 항상 그립고 애틋한 시선이 깔려 있다. 절망적인 주인공의 상황 속에서도 이상하게도 성석제의 소설은 따듯하며 가슴 아리다. 그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작중 인물과 여러 장치와 상황들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 있는 신기에 가까운 그의 능력을 입증한다. 여기에다 그 이야기를 구성해 내는 방식에 있어 자기 소설과 소설의 독자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애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져 더욱 그는 특별하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서 작자는 묘비명의 형식을 빌어다 쓰는 신기함을 보였고, 어느 때에는 과거와 현실의 서로 다른 인물들이 기가 막히게 한 장 안에서 꼭 같이 있는 것처럼 어우러지기도 하는 등 과연 자유자재하며 신통방통하게도 여기저기의 차원에서 이야기들을 다 끌어내 와 때마다 한 상 제대로 차려 내어 보이는 것이다.

“우리를 제외한 온 세상이, 힘 있고 백 있고 돈 많은 인간들과 법과 체제가 한통속이 되어 우리의 명줄을 조르고 있었다.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무력했고 두려웠고 절망에 빠졌다. 마누라부터 매일 울고불고했다…….” 형의 똑똑함도, 누나의 밝은 미래도, 그리고 우리 만수의 성실함도 다 사라져갔다. 그렇게 만수는 투명인간이 되었고, 우리 모두도 결과적으로는 다 투명인간이 될 것이다. 결국 투명인간은 다른 세계의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시대의 지극히 평범한 이웃, 너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성석제 소설의 다른 주인공들이 언제나처럼 우리에게 사방팔방으로 온 몸과 온 힘을 다한 곡예와 신기의 일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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