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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전문 104

전상국 '우상의 눈물' 전문

우상의 눈물   전상국         학교 강당 뒤편 으슥한 곳에 끌려가 머리에 털나고 처음인 그런 무서운 린치를 당했다. 끽소리 한 번 못한 채 고스란히 당해야만 했다. 설사 소리를 내질렀다고 하더라도 누구 한 사람 쫓아와 그 공포로부터 나를 건져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토요일 늦은 오후였고 도서실에서 강당까지 끌려가는 동안 나는 교정에 단 한 사람도 얼씬거리는 걸 보지 못했다. 더우기 강당은 본관에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아주 까마득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재수파(再修派)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들은 무언극을 하듯 말을 아꼈다. 그러나 민첩하고 분명하게 움직였다. 기표가 웃옷을 벗어 던진 다음 바른손에 거머쥐고 있던 사이다   병을 담벽에 깼다. 깨어져 나간 사이다병의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그의 걷어올린..

문학/소설전문 2024.12.17

황순원 '학' 전문

학 황순원  삼팔 접경의 이 북쪽 마을은 드높이 개인 가을하늘 아래 한껏 고즈넉했다. 주인 없는 집 봉당에 흰 박통만이 흰 박통만을 의지하고 굴러 있었다. 어쩌다 만나는 늙은이는 담뱃대부터 뒤로 돌렸다.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멀찌감치서 미리 길을 비켰다. 모두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동네 전체로는 이번 동란에 깨어진 자국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자기가 어려서 자란 옛마을은 아닌 성싶었다. 뒷산 밤나무 기슭에서 성삼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거기 한 나무에 기어올랐다. 귓속 멀리서, 요놈의 자식들이 또 남의 밤나무에 올라가는구나, 하는 혹부리할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 혹부리할아버지도 그새 세상을 떠났는가, 몇 사람 만난 동네 늙은이 가운데 뵈지 않았다. 성삼이는 밤나무를 안은 채 ..

문학/소설전문 2024.07.10

주요섭 '인력거꾼' 전문 및 해석

인력거꾼 주요섭 1   밤 새로 두시에야 자리에 누웠던 아찡이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졸음 오는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잠자리라는 것이 되는 대로 얼거리 해놓은 막살이 속에 누더기와 짚을 섞어서 깔아 놓은 돼지우리 같은 자리였다. 그 속에서는 그야말로 돼지처럼 뚱뚱한 동거자가 아직도 흥흥거리며 자고 있는 것을 억지로 깨워 일으켜 가지고 아찡이는 코를 힝 하고 풀어서 문턱에 때려 뉘면서 찌그러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잠자던 거리가 깨기 시작하는 때이었다. 상해 시가의 이백만 백성이 하룻밤 동안 싸놓은 배설물을 실어 내가는 꺼먼 구루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잔돌 깔아 우두럭투두럭 한 길 위로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고 하는 것이 아찡이 눈앞에 나타났다. 동편으로 해가 떠오르려고 하는 때이다. ..

문학/소설전문 2024.06.14

주요섭 '사랑손님과 어머니' 전문 및 해석

사랑손님과 어머니 주요섭  나는 금년 여섯 살 난 처녀애입니다. 내 이름은 박옥희이고요. 우리 집 식구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이쁜 우리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아차, 큰일났군, 외삼촌을 빼놓을 뻔했으니…….지금 중학교에 다니는 외삼촌은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집에는 끼니 때 외에는 별로 붙어 있지 않아, 어떤 때는 한 주일씩 가도 외삼촌 코빼기도 못 보는 때가 많으니까요. 깜박 잊어버리기도 예사지요, 무얼.우리 어머니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둘도 없이 곱게 생긴 우리 어머니는, 금년 나이 스물네 살인데 과부랍니다. 과부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몰라도, 하여튼 동리 사람들이 날더러 ‘과부 딸’이라고들 부르니까, 우리 어머니가 과부인 줄을 알지요. 남들은 다 아버지가 있는데, 나만은 아버지가 없지요..

문학/소설전문 2024.05.24

하근찬 '수난이대' 전문 및 해석

수난이대 하근찬 진수가 돌아온다. 진수가 살아서 돌아온다. 아무개는 전사했다는 통지가 왔고, 아무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이 없는데, 우리 진수는 살아서 오늘 돌아오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어깻바람이 날 일이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박만도는 여느때 같으면 아무래도 한두 군데 앉아 쉬어야 넘어설 수 있는 용머리재를 단숨에 올라채고 만 것이다. 가슴이 펄럭거리고 허벅지가 뻐근했다. 그러나 그는 고갯마루에서도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 건너 멀리 바라보이는 정거장에서 연기가 물씬물씬 피어오르며 삐익 기적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아들이 타고 내려올 기차는 점심때가 가까워 도착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해가 이제 겨우 산등성이 위로 한 뼘 가량 떠올랐으니, 오정이 되려면 아직 차례 멀은 것이다. ..

문학/소설전문 2023.06.21

박영준 '모범 경작생' 전문 및 해석

모범 경작생(模範耕作生) 박영준 등장인물 • 길서 주인공인 모범 경작생으로 마을에서는 유일하게 보통학교까지 나온 청년이다. 동네 사람들의 어려운 생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입신(立身)과 이익만을 위해서 관리들의 비위를 맞추는 반민족적 기회주의자이다.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인간으로 일제의 수탈 정책에 이용당하며 군(郡)을 대표하는 ‘모범 경작생’이라는 칭호를 받지만, 결국 이기심으로 인해 마을 주민들로부터 배척을 당한다. 표면적으로는 순종적이고 부지런한 농군(일제의 관점에서는 모범적 인물)으로 비춰지지만, 이면적으로는 일제에 동조하는 이기주의자(농민의 관점에서는 ‘반민족적 기회주의자’)이다. • 의숙 성두의 여동생이자 길서의 연인이다. 길서를 사랑하지만 소극적이며, 비판 의식을 갖추지 못한 전통적..

문학/소설전문 2023.05.25

채만식 '태평천하' 전문 및 해석

태평천하[太平天下] 채만식 1. 尹直員[윤직원] 영감 歸宅之圖[귀택 지도] 더보기 추석을 지나 이윽고 짙어가는 가을해가 저물기 쉬운 어느날 석양. 저 계동(桂洞)의 이름난 장자(富者[부자]) 윤직원(尹直員) 영감이 마침 어디 출입을 했다가 방금 인력거를 처억 잡숫고 돌아와 마악 댁의 대문 앞에서 내리는 참입니다. 간밤에 꿈을 잘못 꾸었던지, 오늘 아침에 마누라하고 다툼질을 하고 나왔던지, 아뭏든 엔간히 일수 좋지 못한 인력거꾼입니다. 여느 평탄한 길로 끌고오기도 무던히 힘이 들었는데 골목쟁이로 들어서서는 빗밋이 경사가 진 20여 칸을 끌어올리기야, 엄살이 아니라 정말 혀가 나올 뻔했읍니다. 28관(105kg, 1貫 = 3.75kg, 척관법), 하고도 6백 몸메!…… 윤직원 영감의 이 체중은, 그저께 춘심..

문학/소설전문 2023.05.16

염상섭 '만세전(萬歲前)' 전문

만세전(萬歲前) 염상섭 1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던 전해 겨울이다.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휴전조약이 성립되어서 세상은 비로소 번해진 듯싶고, 세계개조의 소리가 동양 천지에도 떠들썩한 때이다. 일본은 참전국이라 하여도 이번 전쟁 덕에 단단히 한밑천 잡아서, 소위 나리킨(成金), 나리킨 하고 졸부가 된 터이라, 전쟁이 끝났다고 별로 어깻바람이 날 일도 없지마는, 그래도 또 한몫 보겠다고 발버둥질을 치는 판이다. 노래가 끝나기 전 읽기 도전! 동경 W대학 문과에 재학 중인 나는 때마침 반쯤이나 보던 연종시험(年終試驗)을 중도에 내던지고 급작스레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해 가을부터 해산 후더침(아이를 낳은 뒤에 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생기는 여러 가지 병)으로 시름시름..

문학/소설전문 2021.10.28

황석영 '삼포 가는 길' 전문

삼포 가는 길 황석영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 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그가 넉 달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한참 추수기에 이르러 있었고 이미 공사는 막판이었다. 곧 겨울이 오게 되면 공사가 새봄으로 연기될 테고 오래 머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예상했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현장 사무소가 사흘 전에 문을 닫았고, 영달이는 밥집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밭고랑을 지나 걸어오고 있었다...

문학/소설전문 2021.10.22

차범석 '산불' 전문

산불 차범석 나오는 사람들 주요 인물 양씨 (아들이 공산당에게 죽음) ← 기본 대립 관계 → 최씨 (사위가 국군에게 죽음) ↓ ↓ 점례 (며느리) ←→ 사월 (딸) ↘ (삼각 관계) ↙ 규복 (탈출 공비) 때 : 1951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 곳 : 소백산맥 줄기에 있는 촌락 *도붓장수 :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 [막] 제1막 (무대)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P부락, 그 가운데 비교적 널찍한 마당이 있는 양씨의 집 안팎이 무대로 쓰인다. 무대 우편에 부엌과 방 두개와 헛간이 기역자형으로 구부러진 초가집이 서있다. 지붕은 이미 2년째나 갈아 이지 못해서 잿빛으로 시들어 내려앉았고 흙벽도 군데군데 허물어진 채로 서 있다.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 두 칸 남짓한 마루가 있고 건넌방은 제 4벽..

문학/소설전문 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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