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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악 3

낡은 집 -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래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 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문학/현대운문 2021.03.05

오랑캐꽃 - 이용악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 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이용악, '오랑캐꽃' *오랑캐 :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두만강 일대에 살던 여진족(女眞族)을 미개한 종족이라는 뜻으로 멸시하..

문학/현대운문 2021.03.04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 이용악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이용악 삽살개 짖는 소리 눈보라에 얼어 붙는 섣달* 그믐* 밤이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걸어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은 자옥* 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 어머닌 서투른 마우재 말*도 들려 주셨지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등불이 깜빡 저절로 눈 감을 때꺼정 다시 내게로 헤여드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문학/현대운문 202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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