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차범석
나오는 사람들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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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씨 (아들이 공산당에게 죽음) |
← 기본 대립 관계 → | 최씨 (사위가 국군에게 죽음) |
↓ | ↓ | |
점례 (며느리) |
←→ | 사월 (딸) |
↘ |
(삼각 관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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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복 (탈출 공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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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 1951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
곳 : 소백산맥 줄기에 있는 촌락
*도붓장수 :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
[막] 제1막
(무대)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P부락, 그 가운데 비교적 널찍한 마당이 있는 양씨의 집 안팎이 무대로 쓰인다. 무대 우편에 부엌과 방 두개와 헛간이 기역자형으로 구부러진 초가집이 서있다. 지붕은 이미 2년째나 갈아 이지 못해서 잿빛으로 시들어 내려앉았고 흙벽도 군데군데 허물어진 채로 서 있다.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 두 칸 남짓한 마루가 있고 건넌방은 제 4벽이 없어 내부가 환히 보인다. 마루 안쪽엔 뒤뜰로 통하는 나무문이 나지막이 걸려있다. 부엌과 안방이 이어진 모서리 처마 밑에 낡은 옹기 항아리가 놓여있어 낙숫물을 받을 수 있게끔 앉혀있다. 헛간은 문도 없이 다만 흙담으로 쌓아 올렸고 관객쪽은 그대로 훤히 트이어서 그 안이 샅샅이 들여다 보인다. 그 안에는 가마니며 짚단이며 몇자루의 농구가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무대 중앙에 간신히 사람이나 들어앉을 수 있는 움막이 서 있다. 이것이 뒷간인 동시에 이 집 마당과 한길가의 경계를 지어 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비바람에 삭아서 끊어진 새끼 토막으로 이 뒷간과 부엌 뒤쪽을 연결시켜서 구획을 삼고 있는 셈이다.
뒷간 옆으로 오르막길이 있어 무대 안쪽으로 통하며 이 길은 다시 무대 상하수로 뻗친 길과 교차된다. 그러므로 한길 위에 서 있노라면 이 집 마당이 눈아래 내려다 보임과 동시에 멀리 배경으로 소백산맥의 산줄기와 험준한 천왕봉이 바라보인다.
무대 좌편 한길 아래에 최씨네의 초가집이 도사리고 앉았다. 일자형의 집으로 부엌을 사이에 두고 방이 두개 나란히 보일 뿐 마당 안팎엔 별로 보이는 것이 없다. 다만 대문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사철나무가 서 있다. 지형상으로 보아 등장 인물들은 상하수 어디에서나 등장할 수 있다.
때는 구정이 가까와지는 겨울의 저녁때, 사방이 산이라 보기엔 포근해 보이지만, 사실은 분지가 되어서 눈이 많고 추위가 혹심한 고장이다. 막이 오르면 뒷산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멀리 바라보이는 하늘과 산에는 석양의 마지막 입깁이 지금 막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집 안팎에는 이미 산 그림자와 어둠이 내린 지 오래전이다..
마당 한쪽판에 멍석을 깔고서 그 주변에 동네 아낙네들이 제각기 식량 보따리를 들고 둘러서 있다. 멍석 위에 양씨가 올라앉아서 한 사람씩 차례로 내미는 곡식 아니면 감자를 되질(곡식이나 가루 따위를 되로 되어 헤아리는 일)해서는 각각 나누어 부어 놓는다. 그 옆에서 등잔불을 켜고 점례가 공책에다가 치부를 하고 몇 사람은 가마니에 담는다.
남자라고는 등에 업힌 젖먹이와 안방 안에서 상반신을 내민 채로 곰방대를 물고 있는 김 노인뿐,, 모두가 부녀자들이다. 추위도 추위려니와 차림새는 한결같이 허수룩 하고 불결하다. 노인네들은 마루에 앉아 있고 젊은이들은 마당에 서 있기도 하고 몇 사람 짝지어 쭈그리고 앉아서 쑥덕공론(숙덕공론, 여러 사람이 모여 저희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의견을 나눔. 또는 그런 의논)을 하는 축도 있다.)
[양씨] (홉되로 쌀을 되다 말고) 아니, 이건 한 홉도 못되는구먼 그래! (하며 최씨를 쳐다본다)
[최씨] (거만하게) 그것도 큰맘 먹고 퍼 왔어! 우리 살림에 쌀 한 홉이면 어디라고--- (하며 외면한다)
[양씨] 누군 쌀 귀한 줄 몰라서 그런가, 반회에서 일단 공출하기로 작정한 일이니까 홉은 채워야지--- 어서요, 사월이네!
[최씨] (비위가 상한 듯) 그것밖에 없는걸 어떻게 하란 말이우!
[양씨] (쓴웃음을 뱉으며) 궁하기는 매한가지지--- 그러지 말고 어서 채워와요--- 쌀이 없으면 보리, 보리가 없으면 감자라도---
[최씨] (성을 불쑥 내며) 없는 곡식을 나보고 도둑질하란 말이우?
[양씨] (약간 비위에 거슬린 듯) 사월이네! 악담도 작작하우, 누가 도둑질해 오랬소?
[최씨] 글쎄 없어서 못 내겠다는데도 꾸역꾸역 우기니까 하는 말이지
[양씨] 사월이네 보다 더 못 사는 집에서도 아무 말없이 내놓는 걸 가지고 뭘 그래요? 어서 가져와요
[최씨] (불쑥 일어서며) 싫으면 그만두구랴! 흥! 강 건너 마을까지 간신히 추수한 쌀이에요! (하며 양씨 손에 들린 홉되를 가로채어 자기 치마폭에다 쌀을 쏟고는 홉되를 양씨 눈앞에다 내동댕이 친다. 그 서슬에 되가 양씨의 손등에 부딪친다)
[양씨] 아얏! (하며 반사적으로 손등을 만진다) 아니, 이 여편네가 미쳤나?
(하며 성난 눈초리로 쳐다본다)
[최씨] (매섭게 노려보며) 뭣이 어째!
[양씨] 눈깔은 어디다가 쓰라는 눈깔이야!
(이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집중된다)
[최씨] 아니, 못된 소갈머리에 웬 시비야 시비가, 응?
[양씨] 내가 언제 시비를 했어? (하며 일어선다)
(지금까지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점례가 비로소 사이에 들어선다)
[점례] 어머니 그만 좀 해 둬요!
[양씨] 애미야! 너도 봤지? 우리가 어쨌다는 거야? 응?
[최씨] (입가에 조소를 띄며) 흥! 잘난 이장인가 반장을 맡았다고 세도를 부리긴가? 까마귀 똥도 약이라니까 칠산 바다에 찍한다더니--- 원---
(하며 비웃는다)
[양씨] (대들면서) 내가 언제 세도를 부렸단 말이야? 응? 내가 언제---
[최씨] (무섭게 쏘아보며) 아니, 웬 반말이야, 반말이? 응? 저놈의 혓바닥을 그냥 둔담?
[양씨] (대들며) 어떻게 할 테야? 찢을 테야? 응? 반말을 할 만도 하니까 했지! 자네보다 나가 열 살 위인데 반말 좀 썼기로 어때?
[점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왜들 이러세요? 제발 좀 참으시라니까요! (혀를 차며) 석양이 지났는데 언제 곡식을 모아요?
[양씨] 누가 하고 싶어하는 일이냐? 자위대에서 시키는 일이니까---
[점례] 허지만 안할려면 몰라도 책임을 맡은 이상은 정해진 시간에 해내야죠. 일 해놓고도 욕을 먹게 생겼잖아요---
[양씨] 우리가 게을러서 안 되는 일이냐? 자위대에서 나오면 이렇게들 협력을 안 하니까 못하겠다고 사실대로 말하지!
[최씨] 옳지! 그렇게 해서 은근히 나를 꼬아바치겠단 말이지? 꼬아바칠 테면 바쳐 보라지! 뉘 말을 더 믿는가 두고 봐!
[양씨] 뭐라고?
[점례] (불쾌감을 억지로 누르며) 아주머니도 그런 억지소리는 하시는 게 아니에요 한 두 살 난 애기도 아니고 누가 꼬아바친댔어요?
[최씨] (기고만장하여) 금방 그랬잖아? 여기 있는 사람이면 다 들었지, 안 들었수! (하며 옆사람을 둘러본다)
[점례] 딱한 소리 다 듣겠네요 이런 일을 누가 얼마나 하기 좋아라서 하는 일이겠수?
[최씨] (비꼬며) 흥!--- 싫다는데 맡길려구?
[양씨] 아니 그럼 내가 자진해서 맡았단 말이야? (하며 다시 덤빈다)
[최씨] 흥! 누가 그 속을 모를 줄 아나? 그렇지만 아무리 요사간사를 떨어도 반동이란 딱지는 안 떨어지지 안 떨어져!
(이 말에. 그러나 김 노인은 아랑곳없다는 듯 담배만 피우고 있다)
[점례] (정색을 하며) 말씀 다 하셨어요?
[최씨] 점례! 그럼 자네 집안이 반동이 아닌가? (대들며) 응? 자네 서방이 반동이 아니면 왜 도망갔지? 인민군에게 붙들려 죽을까 봐 도망갔잖아? (오금을 박으며) 아니면 아니라고 똑바로 말해 봐!
[점례] (분함을 억제하며) 제 남편이 반동이건 붙잡혀 죽건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양씨] 아니, 왜 남의 죽은 자식을 들먹거려?
[점례] 어머닌 가만히 좀 계세요!
[최씨] (유들유들하게) 상관이 있고 말고--- 자네 시어머니는 자위대에서 억지로 떠맡겼으니까 별 수 없이 이장을 지낸다지만 실상은 그 잘난 이장 노릇으로 충성을 다 바쳐야만 사람 행세를 할 수 있기에 맡았지! 안 그래?
[양씨] 옳지! 말 잘했다. 그래 내 아들이 반동으로 몰린 게 누구 때문이었지?
[최씨] 흥! 그러기에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되는 법이야. 내 사위를 빨갱이로 몰아 죽인 놈들은 모두 웬수야! 내 딸 사월이를 청상과부로 만든 놈을 왜 내가 가만 둬! 이젠 세상이 바뀌었으니까 우리도 잘 살아 봐야지!
[양씨] 흥! (비꼬며) 사위 하나는 고금천지에 없는 인물이었지! 술은 말술이요, 타작마당보다 투전 마당이 제격이었으니까! 홋호---
[최씨] 당신 아들은? 흥!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흉보는 격이군! 무슨 청년단 간부랍시고 낭패만 부린 일은 생각 못하나? 그래도 내 아들은 중학 공부 마쳤어?
[양씨] 신식 공부한 놈치고 잘 된 놈 없더라! (이 말에 어떤 사람들은 통쾌하다는 듯이 웃어 제친다)
[최씨] (더욱 약이 올라서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노려보며) 잘들 한다, 내 사위가 반동 손에 죽은 것이 애린 이빨 빠진 격이란 말이지? 네 것들은 모두가 반동이지? 쌀례네, 갑돌이네, 성만이네---
[쌀레네] 웃는다고 반동이라니, 그럼 안 웃으면 뭐가 되지? 홋호---
(다시 웃음이 퍼진다)
[정임] (최씨편을 들며) 쌀례 엄마도 말조심해요!! 도둑이 제 발 제리니까 그렇지!
[쌀레네] 내 발은 제릴것도 말 것도 없지--- (노랫가락조로) 팔자가 사나와서 서방 하나 잘못 만나 과부 된 것이 죄지! 아이고 내 팔자야---
(일동 한바탕 웃는다)
[김노인] (영문도 모르고 소리 내어 웃는다) 좋다--- 좋아!
[이웃아낙1] 말이야 바른말이지만 누가 빨갱이고 노랭이고 있어? 그저 못 먹고 못 배운 게 흠이지--- 미련한 백성이야 어느 세상이 되어도 매 일반이야, 이리 가라면 이리 끌리고 저리 가라면 저리 흔들려서--- 안그랬어?
(하며 좌중을 돌아보자 서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눈치들이다)
[점례] 그만 좀 해둬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빨랑빨랑 해치워야잖아요? 이제 곡식을 가지러 올 시간이 지났는데--- 그리고 오늘 밤 야경 나갈 사람은 그 채비를 해야지요
[이웃아낙2] 그렇게 합시다! 이장, 어서 해 치워요 (발을 구르며) 발이 얼어서 못 살겠어! 육시헐--- 언제나 따듯한 아랫목 차지하려나---
[점례] (양씨에게) 어머니! 이제 몇 사람 안 남았는데,
(하며 치부책을 들여다본다))
[양씨] 메시꼬아서 일을 보겠냐? 하고 싶은 년보고 하라지
(하며 코를 뎅 풀고는 마루로 간다)
[최씨] (다시 약을 올리며) 뭣이 어째?
[점례] (성을 내며) 왜들 이러세요, 글쎄? 슬하에 며느리, 사위 거느린 마나님들이 하는 짓을 꼭 어린애들 같이--- 제 시간까지 곡식을 준비 안 하면 우리가 어떻게 된다는 걸 잊으셨어요? 이 마을은 불바다가 되는 거예요?
[최씨] 가만히 있는 사람을 또 오장 뒤집게 하잖아?
[쌀례네] (혀를 차며) 옛 어른들 말이 옳지! 집안에 남자 어른이 없으면 똥개까지 잘난 척한다더니 원---
(군중, 다시 까르르 웃는다)
[쌀례네] 글쎄 이통에 웃음이 나오게 됐어? (넋두리를 하며) 우리 마을에 사내다운 사내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있던들 이렇진 않지 뭐야---
[이웃아낙1] 그러기 말일세, 경찰은 경찰대로, 인민군은 인민군대로 해방 후부터 이날 이때까지 번갈아 가면서 쓸어갔으니--- 글쎄 이 산골에 사내란 사내는 멸종이 되었잖아? (눈물을 찔끔거리며) 차라리 늙은 것들이나 잡아가잖구------
[김노인] 아가--- 저녁은 아직 멀었느냐? 왜들 안 가고 이렇게 떠드냐? 시장해서 못 견디겠다!
[양씨] (큰소리로)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 난리통이서 밥을 짓게 되었어요? 쯧쯧---
[이웃아낙1] 어이구, 진즉 가야 할 늙은이는 안 데려가고, 애매한 젊은 놈만 아깝게시리--- 귀신도 눈멀었지---
[이웃아낙2] (콧등이 재려오는지 코를 텡 풀며) 형님 말씀이 옳아요 사내들이 해야 할 일을 에편네들이 하나부터 열 까지 다 해야만 되니, 일이 제대로 될 게 뭐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데---
(이 사이에 점례는 몇몇 부녀자들에게 손짓을 하며 곡식 거두는 일을 대신한다. 그러나 집안의 분위기는 어딘지 우울하다 까마귀가 한바탕 요란스럽게 울어제친다)
[쌀례네] (좌편 한길 쪽을 향해) 빌어먹을 까마귀 떼들이 왜 또 극성이야! 저 소리만 들으면 똥물까지 넘어온다니까!! 저리 가!
[이웃아낙2] 쌀례네! 그건 또 왜?
(하며 쌀례네 쪽으로 다가온다)
[쌀례네] 작년 겨울에 아범 송장을 찾으러 갔을 때 일이에요,, 무네미 산골을 넘어가려니까 저 까마귀 떼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어요? 그때 문득 까마귀는 송장을 찾아다닌다는 말이 생각나서 그쪽을 더듬었지요! 그랬더니 토끼바위 바로 아래로 까마귀들이 새까맣게 모여서 무엇을 쪼아 먹고 있잖겠어요?? 그래 가까이 가 봤더니 그게 바로 아범의---
[이웃아낙2] 저런!
[쌀례네] 얼굴이며 손에 붙은 살은 까마귀 밥이 되고 뼈만 허옇게 남았는데---
(그때의 참경을 상기했는지 눈살이 찌푸려진다)
[정임] 그런데 어떻게 서방님인줄 알아봤수?
[쌀례네] 옷을 봤지요! 고동색 조끼와 회색 솜바지가, 게다가 재작년 대보름날 산불을 끄다가 태운 불구멍이 바지에 남아있는 게 틀림없었으니까--- (한숨을 내쉰다)
[정임] 송장을 찾아 줬으니까 까마귀에게 도리어 절을 해야죠, 형님!
[쌀례네] 그렇지만 그것들이 울어대지 않았던들 그 징그러운 꼴을 안 봤을게 아닌가? 눈알도 없고 코도 없이 허연 이빨과 광대뼈만 앙상하게 남은 꼴이---
(스스로의 감정을 억제치 못하여 흑흑 느껴 울기 시작한다. 몇 사람이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해 준다)
[이웃아낙1] (혼잣소리처럼) 젊은것들이 불쌍했지, 늙은이들야 다 산 목숨이지만 오뉴월의 은어처럼 펄펄 뛰놀던 젊은 놈들이 (눈꼽아 낀 뱁새눈을 찔끔거리며) 언제는 국군에게 아부했다고 경을 치고--- (한숨) 똥파리 만도 못한 목숨인 줄은 알지만 정말 억울했지! 억울해!
[양씨]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큰일 날 소리 다 하지! 지금이 어느 세상이라고--- 말조심해! 동생,
(이때 다시 까마귀가 울어대자 쌀례네는 미친 듯이 뛰어나가 고함을 지른다)
[쌀례네] 듣기 싫어! 저리 가지 못해!
(바로 이때 무대 우편 산길에 원태가 앞장을 서고 대장과 공비 세 사람이 내려온다 공비들은 남루한 차림이다. 다만 대장은 솜바지에 방한모를 썼다)
[원태] (쌀례네를 보며) 웬 지랄이야!
[대장] 우리 보고 그러는 거요? 동무---
[원태] 아, 아닙니다--- 저--- 어서 내려서십시오
(이 말에 쌀례네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겁에 질려 되돌아와서 사람들 틈바구니에 숨는다. 군중들은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며 헛간 있는 쪽으로 몰려온다. 양씨와 점례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비굴하리 만큼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한다 공비들은 감시하듯 한길에 서있다)
[원태] (거수 경례를 하며) 이장 동무 수고하오 (대장에게) 자 앉으십시오!
(하며 마루 쪽을 가리킨다)
(이 말에 양씨는 재빠르게 마루를 걸레로 훔친다)
[양씨] 누추하지만 잠깐 앉으실걸---
[원태] (앉으며) 그래, 준비는 다 됐어?
[양씨] (시원찮은 말투로) 예, 예---
[대장] 얼마나 모았소?
[양씨] 예--- 저--- (점례에게) 어떻게 되느냐?
[점례]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며) 저--- 쌀이 한 말 서되고요------ 보리가 서말 두되, 그리고 감자가 너말 엿되, 전부 그렇게 되나 봐요------
[대장] (만족한 웃음으로 가마니를 차며 원태를 향하며) 생각보다는 성적이 좋군--- 흠---
[원태] (아첨하듯) 헷헤--- 제가 단단히 일러두었더니만 어떻게 실수는 없었나 보군요--- 헷헤---
[대장] 자위 대장 동무가 하는 일인데, 어련하시겠소? 헛허---
(원태도 손을 부비며 따라 웃는다)
[대장] 그럼 우선 집합을 시켜 주시지--- 내가 먼저 얘기를 하고서---
[원태] (재빠르게) 예--- 그렇게 하시죠! (호주머니에서 호루라기를 꺼내서 요란스럽게 불어 제친다) 일동은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웅성거릴 뿐 질서가 없다)
[대장] (위엄을 보이려고 애를 쓰며) 뭣들 하고 있소--- 이쪽으로 가까이들 서시오--- 빨리빨리! (양씨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이장은 가만히 서 있으면 되오?
[양씨] (어찌할 바를 모르며) 예-- 예-- (군중에게) 자--- 어서들 이쪽으로 가까이 모여봐요--- 어서--- 그쪽에 서 있지 말고---
(군중들은 어슬렁거리며 가까이 온다. 공비는 무대 중앙 한길에서 써래기 담배를 말아서 피워 물려다 말고 서로 눈짓을 하고는 웃는다 아마 대장을 경원하는 눈치다)
[원태] (부러 점잔을 부리나 두서없는 연설조로)에---) 에--- 오늘 여러분들을 모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상부에서 이렇게 나오셔서 여러분들께 직접 지시하실 중대 지사가 있기 때문이오, 따라서 끝까지 조용한 가운데 잘 들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아울러 우리 마을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를 자위대 대장으로서 간절히 부탁하는 바이며 끝으로 한 가지 여러분께---
(이때 대장은 이상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원태의 귀에다 대고 몇 마디 소곤거린다)
[원태] (굽실거리며) 예--- 예--- 알겠읍니다--- 예--- 그러시다면 대장 동무께서 직접? 예--- 그렇게 하시죠
(이 사이 군중은 긴장을 잃고 얼어붙은 발을 동동거린다)
[원태] (엄숙하게) 조용히--- 그럼 지금으로부터 상부에서 나오신 동무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하고 깍듯이 경례를 붙이고는 자기 자리를 비켜선다. 대장은 권총 혁대에 한
손을 대고 다른 한 손으로 야무지게 경례를 붙이고는 날카롭게 훑어본다.. 군중들은 저마다 침을 꿀컥 삼키며 귀를 쫑그린다)
[대장] 동무들! 날씨가 추운데 수고들 하시오, 그러나 이제 한 고비만 넘기면 노동자 농민들이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오,그저께 보위부에서 들어온 무전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 민족의 영도자 김일성 수상께선 남반부에서 투쟁하고 있는 우리들께 최후의 일각지 미 제국주의의 압잡이 이승만 도당과 싸우라는 격려 멧쎄지를 보내왔다오
(여기까지, 여기저기서 손뼉 치는 소리가 퍼져 나온다))
[대장] 항간에 유엔군과 이승만 괴뢰군이 전승을 거듭하고 있는 듯이 소문을 퍼뜨리고 있지만 우리들의 뒤에도 중국과 쏘련의 거대하고도 영웅적인 군대가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되요
[원태] 옳소! (하며 박수를 치자 군중들도 마지못해 손뼉을 친다)
[원태] (윗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며) 그럼 다음은 여러 동무들에게 내린 새로운 과업을 말하겠소------
[김노인] (방문을 홱 열어 제치며) 에미야! 저녁은 아직 멀었냐?
[양씨] (질겁을 하며) 어이구, 주책이지! 어서 문 좀 닫아요 어서!
(하며 문을 밖에서 닫아 버리자 방 안에서 뭐라고 투덜대는 소리가 난다 양씨는 대장과 원태에게 송구스런 듯이 시선을 돌린다)
[대장] 이미 자위 대장을 통해서 시달은 했으니까 다 알고 있겠지만---
[원태] 예! 벌써 이장 회의에서 말했고, 또 반회에서도 말했습죠!!
[대장] 오늘부터 다시 야경 근무를 해줘야 되겠는데---
(군중들 가운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장] 이 고장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대라 원수의 경찰들이 감히 침범을 못하고 있는 천연의 요새이기도 하오. 따라서 백오십 리 밖엔 이승만 도당이 판을 치고 있지만 저기 흐르는 남강을 경계로 한 이 고을은 아직도 엄격한 인민 공화국이란 말이오. 그러나 요즘 최후 발악을 꽤하는 원수들은 가소롭게도 탐색대를 파견하여 민심을 교란시키려는 망상을 하고 있다니, 다시 야경을 하기로 결정을 봤오.
(군중들, 숙덕거리는 소리, 점차로 펴져간다)
[대장] 내가 알기에 이 고장은 8.15 해방 후 많은 동무들이 미제와 이승만 괴뢰들에게 항쟁하여 가장 영웅적이었다는 사실이오. 따라서 동무들의 아들, 동무들의 남편, 그리고 동무들의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도 다음의 조항을 엄수해야 하오. (사이) 첫째,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을 땐 곧 이장이나 자위대에 신고할 것! 둘째, 원수에게 식량을 제공하거나 기타 이적행위를 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 셋째, 야경 근무를 태만히 하는 자도 엄벌에 처함!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는) 만약 한 사람이라도 어길 땐 이 마을은 잿더미가 된다는 걸 잊지 마시오. 우리는 저 산에서 모든 정보를 다 듣고 있으니까!
[원태] 다들 알아들었오? 한 집에서 한 사람씩은 꼭 나와야 합니다!
(좌중은 다시 웅성거린다 이때 최씨가 앞으로 나온다)
[최씨] 나으리!
[대장] 뭐요?
[최씨] 한 마디 올릴 말씀이 있어요---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최씨에게 모인다)
[원태] 무슨 얘기요?
[최씨] 우리 같은 사람은 야경을 할 필요가 없지 않아요?
[대장] 필요가 없다고?
[최씨] (양씨 쪽으로 흘겨보며) 반동들의 경찰에 아들과 사위를 한꺼번에 몰상 당한 것도 분한데 이 엄동설한에 야경까지 서라니 말입니다.
[원태] 아니, 남편과 아들을 빼앗긴 사람이 동무뿐이겠소??
[최씨] 그러니까 말씀이에요. 이런 일은 지난날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에게 시키면 된단말이에요. 이젠 그 사람들이 고생을 해야 할 차례가 아니겠수? 흥!
(군중들의 동요가 확대되어 간다)
[쌀례네]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마을 일은 온 마을 사람이 함께 해야지!
[정임] (최씨 편을 들며) 쌀례네는 언제부터 그렇게 의리에 밝았수?
[최씨] 대한민국 시대에 날뛰던 것들이 인민 공화국이 되어도 행세할 수는 없잖아요!
[대장] 그야 그렇지! 아니 그럼 동무들 가운데 아직도 그런 반동이 있단 말이오?
[최씨] (머뭇거리며) 없다곤 할 수 없죠
[이웃아낙1] 그만 좀 덮어 둬요 사월이네!
[최씨] (악에 받쳐) 내 사위 죽은 것도 뼈가 아픈데 이제 와서 되지도 못하게시리 세도를 피우려니 말이지!
(하며 양씨를 노려보자 군중은 두 파로 갈라져서 웅성거린다)
[원태] 조, 조용히! 왜들 이러는 거야?
[양씨] (앞으로 나서며) 제가 말씀드리겠어요, 말은 바른말이지, 지금 우리 살림에 양식이 남아 처진 집이 어디 있겠수? 그렇지만 다 내기로 작정되었으니 내줘야 한다니까 글쎄 사월이네는 저렇게---
[대장] (위엄을 보이며) 알았어! 조용히! 동무들이 모든 어려움을 참아 가면서 투쟁하고 있다는 건 상부에서도 잘 아는 사실이오! 그러나 저 천왕봉 험한 준령을 파면서 주야 불철 투쟁하는 우리들의 노고를 생각했다면 그와 같은 개인 불평은 있을 수 없소! (차츰 위협적으로) 우리가 산에서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동무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라는 걸 모르오?
(군중들은 완전히 맥이 없다 이때 멀리서 총포 소리가 은은히 들리자, 대장은 긴장의 빛을 보이며)
[대장] 알겠소? 우리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이 가운데 한 사람의 반동 한 사람의 불순분자가 있을 땐 여러분의 집과 생명은 이 수중에 매달려 있다는 걸 아시오!
(하며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공갈한다. 공비들에게) 자, 동무들! 이 식량을 가지고 가!
(하고 명하자, 공비들은 제각기 가마니를 등에 메고 산길로 올라간다 대장은 원태에게 몇 마디 소곤대더니 민첩하게 사라진다)
[원태] (그가 사라진 뒤를 바라보고 나서) 야경에 나올 사람은 일곱 시 반까지 당산나무 아래로 나오시오 알았어!
(하고는 좌편으로 퇴장, 이때 군중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최씨는 자기 집 부엌으로 들어간다 마당엔 양씨가 우두커니 서 있고 점례는 멍석이며 되를 치운다)
(무대는 전보다 더 어둡고 멀리 밤하늘에 초저녁 별이 떴다 말할 수 없는 적막과 허무가 산보다 더 무겁게 내려 누른다)
[양씨] (중얼거리며) 이제 뭘 먹고 살아간담--- 보름이 멀다 하고 양식을 빼앗어 가니--- 우라질 것들! 우리를 잘 살리기 위해서라고?
[점례] (주위를 경계하는 듯) 어머니! 말조심하세요 아까 얘기 못 들었어요?
[양씨]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며) 이젠 정말 못 살 것 같아 (멍석을 헛간에다가 내동댕이치며) 어느 세상에 두 다릴 펴고 산다더냐? 이렇게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먹지도 못하며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상팔자지! 어유!
(하며 마루 끝에 앉는다 이때 방문 열리며 김 노인이 나온다)
[김노인] 에미야! 아니 저녁은 아직 멀었어? 뱃가죽이 등에 붙게 생겼는데 왜 밥을 안주냐?
[양씨] (성을 내며) 누가 밥을 안 준댔어요? (투덜거리며) 늙은이가 어서 죽어 버리기나 하지--- 어유--- 이게 무슨 팔자람!
[점례] 할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수건을 머리에 쓰며) 그런데 귀덕 아가씨가 웬일일까요?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양씨] 빌어먹을 년, 나무는 안하고 또 어디서 까치알이나 구워먹고 있겠지!
(점례, 뒤뜰에서 땔나무를 한 아름 들고 나와 부엌으로 들어간다)
[양씨] 에미야, 감자는 얼마나 남아 있냐?
[점례] (부엌에서 나뭇가지를 꺾으며)작은 항아리에 반은 남았어요
[김노인] 아가! 오늘 저녁엔 이 밥이냐? 감자는 이제 삶지 마라---
[양씨] (심술궂게) 이 난리에 이 밥이 어디 있어요? 원 늙으면 양도 준다던데, 저 늙은이는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나?
(이때 산길에서 지게에다 나무를 해서 진 귀덕이가 무엇에 쫓기듯 내려온다. 멀리서 아이들의 희롱하는 소리와 함께 비웃는 소리, 귀덕의 헝클어진 머리며, 옷차림도 그렇거니와 어딘지 등신 같다. 그러나 젖가슴은 그녀가 성숙한 여성임을 보여준다. 귀덕은 사나운 눈초리로 뛰어 오더니 오던 길을 향해 돌을 던진다.)
[귀덕] 영감 땡감 불알이 홍시감 힛히------
[양씨] (금시 눈에 살기가 돌며) 아니, 저년이 또--- 귀덕아! 귀덕아!
[귀덕] (사내처럼) 머!
[양씨] 이년아! 나무를 했으면 빨랑빨랑 돌아오지 않고서 무슨 개소리냐? 응?
[귀덕] (마당으로 들어서며) 저 새끼들이 막 내 치마를 벗기잖아!
(멀리서 아이들이 놀리는 소리가 들린다 귀덕은 지게를 뒷간 앞에다 세운다)
"곰보딱지, 콧딱지, 아가리 딱딱 벌려라 열무김치 담아 주마!"
[귀덕] (다시 응수하려고) 영감 땡감---
[양씨] (가까이 가서 머리채를 휘어쥐며) 그 아가리 좀 닫지 못해! 남 부끄럽게시리! (하며 몇 번 등을 친다)
[귀덕] 아얏, 아얏! (하며 도망을 가자, 점례가 부엌에서 나오며 감싸준다) 형님! 형님!
[점례] 어머니, 그만 좀 해두세요! 말귀를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그만둬요
[귀덕] (매달리며) 형님! 나 좀 살려줘
[점례] 그래, 어서 방으로 들어가요
[양씨] 어유! 열일곱 살이나 처먹은 게 저 꼴이니, 어서 뒈져! 뒈져! (하며 쥐알리려 하자, 귀덕은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뛰어들어가며 소리를 내어 운다)
[점례] 어머니! 귀덕 아씨가 불쌍하잖아요!
[양씨] 불쌍하긴? 이제 와선 자식이 아니라 원수다! 원수야! 저런 병신이 될 바엔 차라리 뒈지게 내버려 둘걸---
[점례] 어머니두--- 원, (하며 부엌 벽에 걸린 시래기 말린 것을 풀며) 난리가 나기 전에도 저랬던가요? 그 공습 통에 놀란 후부터 제정신을 잃어버린걸--- 저래 봬도 속은 다 있어요! 나이가 말하잖아요
[양씨] 듣기 싫어! (사이) 제 오래비를 닮았던들 저런 등신은 안되었을 텐데
(허공을 쳐다보며) 이 자식은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기별이라도 있었으면 차라리 잊어버리기라도 하잖아---
[점례] (한숨을 길게 뿜으며 부러 감정을 억제하며) 살았으면 여태 소식이 없겠어요? 2년이 되어가는데---
[양씨] 망할 녀석! 조상이 남겨 준 땅이나 파 먹고살 것이지, 제놈이 뭘 안다고 청년단은 무슨 지랄이야--- (혀를 차며) 에미 생각을 손끝만큼이라도 했던들 이렇게는 안됐지!
[점례] 그렇지만 어머니에겐 효성이 지극했어요--- 그건 누구 보담도 제가 잘 알아요.
[양씨] (문득 며느리가 가엾어지면서) 그렇지 그래 이야기는 네가 잘 알 테지!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씨라도 떨치고 갈 게 아냐? 손주만 하나 있어도 난 덜 외롭지! 분명 어디서 얼어 죽고 말았을 거야?
(얼마 전부터 최 씨 집 안방에선 호롱불 밑에서 저녁을 먹는 세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더니 마침내 아기 우는 소리가 나자, 사월이의 앙칼진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사월] (소리만) 뚝 그치지 못해! 이년이 꼭 밥상을 받으면 울음이라니까! 응,
(하며 매질을 하자, 아이 우는 소리가 더 높아진다)
[최씨] (소리만) 왜 때리긴! 어린것을 때리면 그게 알아듣겠니!말로 하잖구
[사월] (소리만) 어머닌 가만히 계세요! 이렇게 두둔을 하니깐 버릇이 잘못 들어서 더 하잖아요!
(하며 사월이 문을 요란스럽게 열고 밖으로 나온다 방안에선 손주딸을 어르고 달래는 최 씨의 소리가 한결 구슬프게 들린다. 사월은 병석에서 일어난 사람인지 차림이 한층 허수룩 하다. 그녀는 쏟아지는 슬픈 눈물을 삼키려고 사철나무에 기대어 흐느낀다 부엌에서 나와 땔감을 가지러 가려던 점례가 가까이 다가온다)
[점례] 사월이--- 왜 그래?
[사월] (여전히 소리 죽여 운다)
[점례] 감기는 다 나았어? 날씨가 찬데 왜 밖에 나왔어? 응?
[사월] 난--- 난---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이렇게 살바엔 차라리 (하며 구슬피 운다)
[점례] (쓸쓸히 웃으며) 원 말끝마다 죽는다지--- 죽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가? 이따가 밤에 놀러 나와 응? 야경은 어머니가 나갈 테지!
[사월] 응---
[점례] 꼭 놀로 나와! 쌀례네도 온다고 했으니까! 버선 볼이나 대면서 얘기하게---
[사월] (수그러지며) 응--- 갈게---
[점례] 어서 들어가!
(이때 안방에서 김 노인이 나오며 또 밥 재촉을 한다)
[김노인] 에미야! 밥은 아직 멀었냐? 응? 집안에 어른이 있는 것도 몰라? 천하에 배우지 못한 것들! (곰방대로 마루를 치며) 천도가 없는 줄 아느냐?
(부엌에서 고개를 내미는 양 씨와 바삐 돌아서는 점례가 우연의 일치로 대꾸를 한다)
[점례] (농조로) 예--- 알았어요!
[양씨] (농조로) 예--- 알았어요!
(막)
[막] 제2막
[무대 배경]무대 전막과 같음. 전막부터 약 세 시간 후 밤하늘에 초승달이 걸렸다. 멀리서 산새 짖는 소리가 들린다. 막이 오르면 점례의 방에 점례와 사월이 그리고 쌀례네가 버선볼을 뀌매고 있다. 점례가 재빨리 기름 심지를 돋우자 방안이 훤해진다. 방안엔 질화로와 앞닫이 이외엔 세간살이라곤 별로 없다. 점례는 벽에 기대어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사월의 옆얼굴을 보자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눈치이다.)
[점례] 누룽지 안 먹어?
[사월] (한숨) 응--- 이가 아파---
[점례] (꽁꽁 얼어붙은 듯한 누룽지를 툭 분질러서 내밀며) 먹어 봐! 처음엔 단단해서 깨물기가 싫지만 침이 배어들면 괜찮아! 제법 구수한데--- 자--- 어서---
[사월] (마지못해 입에 넣으며) 응---
[쌀례네] (힐쭉거리며)힐쭉거리며) 별 수 있어? 그대로 사는게지--- 안 그래?
(하며 뜻있는 듯이 웃는다)
[점례] 뭐가?
[쌀례네] 글쎄 사월이가 저렇게 맥이 없이 앉아 있는 게 보기가 딱해서 하는 말이지---
[점례] 앓고 난 사람이 그럼 맥이 있을라구?
[쌀례네] 앓긴! 흠--- (의미 있는 미소로) 새파란 과부의 병이란 속 아는 병이니 무서울 건 없대두! 홋호---
[점례] (무슨 뜻인지 비로소 알겠다는 듯 웃으며) 아이 망할 것! 쌀례네는 남의 병 진맥도 잘하니 속 편하겠구먼! 홋호---
[쌀례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낸들 말은 안 하지만(한숨) 그렇지만 과부 속을 과부가 안 알아주면 누가 알겠어? 홋호---
(점례와 쌀례네가 소리 내어 웃다 말고 쓸쓸히 앉아있는 사월이에게 시선을 돌린다)
[사월] 자네들은 웃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쌀례네] 그렇다고 울 수는 없잖아?
[사월] (혼잣소리처럼) 시집이나 가 버릴까?
[점례] 시집?
[쌀례네] 누가?
[사월] 누구긴 누구? 내가 가는 거지!
[쌀례네] (어이없다는 듯)어이없다는듯 뭐라구?
[사월] 왜 나는 시집 못 가나? (하며 두 사람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쏘아본다)
[쌀례네] 그, 그야 못 살건 없지만---
[사월] 흥! 나 같은 과부를 누가 맞아 주느냐 말이지? 더구나 자식까지 딸렸으니까 (그녀의 얼굴엔 일종의 광기가 깃들어 보인다)
[점례] (부러 태연한 척하며) 홋호--- 갑자기 미쳤어? 시집이 다 뭐야 시집이--- 홋호---
[사월] 아니 내가 시집을 간다는 게 그렇게 우스워? 흥! 나는 이렇게 산골짜기에서 과부로 썩는 게 더 우습단 말이야!
[점례] 별 수 없잖아! 이제 와서 탓한들 무슨 소용 있어? 죽은 자식 나이 세기지! 깨진 그릇인걸 (한숨)
[쌀례네] (버선을 꿰매며 노랫가락으로) 아이구 내 신세야 미투리도 짝이 있고 헌 버선도 짝이 있는디 어쩌다 이내 신세는---
[사월] (신경질적으로) 듣기 싫어!
[쌀례네] (질겁을 하며) 아이 깜짝이야 애를 안 뱃기에 다행이지 하마터면---
[점례] 홋호--- 겁도 많지---
(두 사람은)
[사월] (신경질적으로) 자네들은 홀어미 신세가 되어도 아무렇지 않단 말이군? 흥! (날카롭게 쏘아보며) 거짓말 마! 내가 모를 줄 알구?
[점례] 아니 뭘 말이야?
[사월] (낮은 소리로) 자네들은 이태동안 서방 없이 살아도 아무렇지 않았어?
(쌀례네에게) 바른대로 말해봐! 말해보래두!
[쌀례네] 홋호--- 그걸--- 누가--- 홋호---
[사월] 점례는 왜 말 못 해?
[점례] (얼굴이 붉어지며) 오, 몰라! 어떻게 내가 그걸!
[사월] 우리끼리 사이에 말 못 할게 뭐람! 나는 정말이지 이대로는 못 살 것 같아! 자식이고 부모고 없어! 우선 내가 살고 봐야지!
[점례] 그렇다고 혼자서만 잘 살 수도 없지 뭘 그래 죽을 먹건 헐벗건 식구가 한자리에서 사는 게 좋지! 사월이네처럼 그렇게---
[사월] (다시 흥분해지며) 내가 어떻다는 거야! 이 나이에 사람 구경도 제대로 못하면서 한 평생을 도토리 껍데기 되란 말인가! 내일 모래면 우리도 서른이야! 알겠어?
[쌀례네] 누가 제 나이도 모를까 봐 (하며 실꾸리를 들어 바늘귀에 실을 꿴다)
[사월] 말이 있잖아? 설 지난 무와 서른 지난 계집이라고---
[점례] (담담하게) 머지 않아 한 세상 볼 때가 오겠지 뭐
(하며 누룽지를 소리 내어 깨문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한결 이 분위기를 처량하게 만든다. 이따금 솔바람소리)
[사월] 그래 한 세상 살 때가 올까?
[쌀례네] 암 와야지! 자네 말대로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대로 썩어?
[사월] 그렇지만 지금 같아선 어림도 없는 생각이지! 누워서 떡 떨어지기만 기다리다간 할망구가 돼 버려! 더구나 저렇게 길이 막혀서 마음대로 나다닐 수도 없고 건뜻 하면 산에서 내려와 노략질이나 당하고---
[쌀례네] 쉿! 말 조심해요!
(바람이 차츰 강하게 분다)
[사월] 우린 가난한 죄밖에 없어! 우리 서방이 죽고 자네 서방이 없어진 것도 못 먹고 못 배운 탓이지! 안 그래 점례!
[점례] (깊은 한숨) 누가 아니래--- 그러기에 가난은 나라에서도 못 막는다고 했잖아!
[쌀례네] (소리를 죽여)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언제 세상이 또 뒤바뀔지도 모르겠지!
[점례] (겁을 먹으며) 왜?
[쌀례네] 아까 그 산 도적놈들 얘기로는 우리들을 잘 살게 해 준다지만 두더지처럼 산속으로만 파고드는 주제에 어떻게 우리를 잘 살릴 것 같아? 게다가 우리가 겨우 먹고 살 식량까지 빼앗아 가니---
[점례] 그렇다고 누굴 붙잡고 통사정할 수도 없잖아?
[쌀례네] 그러니 우리는 속아 넘어가고 있는 거지 뭐야! 자기들만 믿고 살란 얘기겠지만 뒷집 총각만 믿다가 처녀 귀신이 되는 것이지!
[사월] (비뚤어진 어조) 처녀 귀신이 아니라 청과부 귀신이야
[쌀례네] 핫하--- 맞았어! 과부 귀신--- 핫하---
(이내 한길 쪽에 끝순이가 등장, 얼굴을 온통 보자기로 싸서 생김새를 분간할 수 없다. 손에 작은 죽창을 들었다. 뜰안에 들어서자 입에 손을 모아 김을 훅훅 분다)
[끝순이] 귀덕아!
[점례] (두 사람에게) 누가 부르잖아?
[쌀례네] (경계하며) 누굴까? 아이 무서워! (이불을 둘러쓰며) 난 안나가!
[점례] 나가 봐!
[끝순이] 아무도 안 계세요? (가까이 오며) 방에서 인기척이 나던데---
[점례]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누구요?
[끝순이] 어머 방에 있으면서도 대답도 안 했어요? 끝순이에요!
[점례] (안도감에 가슴을 쓰다듬으며) 오 끝순아! 어서 와! 웬일이냐?
[끝순이] 여기 쌀례 엄마 왔어요?
[쌀례네] 왜그래왜 그래! (하며 하물며 걷어 젖히며 나온다)
[끝순이] 야경 다음 차례라고 빨리 나오래요!
[쌀례네] 육시럴! 이럴 땐 시간도 빨리 가더라! 벌써 그렇게 됐어?
[끝순이] 예, 쌀례 엄마가 나와야 다른 사람이 집에 들어갈 수 있대요
[점례] 거기 서 있지 말고 방에 들어와!
[끝순이] 들어가도 괜찮아요?
[점례] 그럼! 어서
(끝순이가 죽창을 마루 끝에 세워놓고 머리를 싸맨 보자기를 풀어 옷을 털며 들어간다)
[쌀례네] (무명 목도리로 얼굴을 싸며) 이 추운 밤에 야경을 서면 뭘 해!! 사람만 못살게 들볶는 지랄이지!
[점례] 또 고생해야겠군! 나는 어머니가 돌아오셔야 갈 테니까!
[쌀례네] (마루로 나오며) 어잇 추워! (신을 신고서) 그럼 나 먼저 가!
[점례] 응---
[사월] (꿰매던 버선을 주워 들고 나오며) 나도 가봐야지!
[점례] 왜 더 놀다가 가지---
[사월] 일찍 방돌이나 짊어지고 자야지! 과부 재미는 잠자는 재미니까!
(하며 나와서 신을 신는다. 이 사이에 끝순이는 방 한가운데 놓인 깨진 질화로를 안고서 불을 쬔다. 그리고 옆에 있는 누룽지를 날름 집어서 오도독 깨문다)
[점례] (나가는 두 사람에게) 조심들 해!
[쌀례네] 이따 만나!
(쌀레네는 한 길로 나와 좌편으로, 사월은 자기 집 방으로 퇴장한다. 바람소리가 더욱 세게 분다)
[점례] (방에 들어오면서) 춥지?
[끝순이] (무를 캐먹다 들킨 사람처럼 깨물던 누룽지를 꿀꺽 삼키려다가 목에 걸려 캑캑거린다))
[점례] 왜 그래? 응?
[끝순이] (간신히 누룽지를 삼키며) 누, 누룽지가--- (하며 사래가 들어 기침한다)
[점례] 홋호--- 천천히 먹지 않구--- (하며 앉아서 하던 일을 계속한다)
[끝순이] 귀덕이는자나요?
[점례] 응, 저 방에서 할아버지 하고---
[끝순이] 어머! 할아버지하고요할아버지 하고요? 홋호--- 아니 다 자란 계집애가 할아버지하고 자요? 홋호--- 그 앤 정말 병신인가 봐!
[점례]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야--- 불쌍하잖나---
[끝순이] 흠--- (하며 빨갛게 상기한 볼을 문지른다)
[점례] 참, 엄마 병이 다시 도졌다면서?
[끝순이] (무표정하게) 이제 죽을 날이 닥쳐왔나 봐!
[점례] 그게 무슨 소리냐? 벌 받을라고!
[끝순이] 우리 팔자에 이상 더 받을 벌이 있을라구요?
(점례는 그 한마디에 응수할 길이 없어 길게 숨을 모아서 뱉는다)
[점례] 밥은 먹었니?
[끝순이] 서울네 집에서 제사 지냈다고 호박나물 하고 명태전을 가져와서 끼니를 때웠다우---
[점례] 엄마는 굶고?
[끝순이] 먹을 것도 없지만 입맛이 없대요! 그러니까 죽을 날이 가까왔지---
[점례] 너는 말끝마다 죽는다는 소리구나!
[끝순이] 정말 어서 죽었으면 좋겠어!
[점례] 누가?
[끝순이] 우리 엄마!
[점례] 어머!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야
(개가 다시 짖는다)
[끝순이] 형님--- (사이) 저--- 나 말이야--- (부젓갈을 찔벅 거린다)
[점례] 어서 말하래두---
[끝순이] 엄마가 죽으면 서울이고 부산이고 갈래---
[점례] (놀라며) 네가?
[끝순이] 그럼 나밖에 갈 사람이 우리 집에 누가 있수?
[점례] 어떻게?
[끝순이] (씩 웃으며) 그러는 수가 있어! 저--- 형님만 알고 있어야 돼요!
[점례] 그래 말해 봐!
[끝순이] 엄마한테 꼬아 바칠려고?
[점례] 나 혼자만 알고 있겠대도--- 누가 데리고 간다던?
[끝순이] 응--- (다가오며) 우리 마을에 드나드는 병영댁 있잖아?
[점례] 병영댁이라니? 오, 옷감 가지고 다니는 도봇장수? 얘기는 들었지---
[끝순이] 응! 지난 추석 대목에 왔을 때 하는 말이 도회지에 가서 식모살이하면 배부르게 먹고 월급 받고 그런데---
[점례] (혼잣소리로) 식모살이를?
[끝순이] 정말 여기선 못살겠어 아버지가 그렇게 안 죽었어도 또 모르겠는데--- 게다가 엄마는 아버지가 죽은 뒤부터 저렇게 일 년 가까이를 운신도 못하니 누구를 믿고 살아요?
[점례] 끝순이 지금 몇 살이지?
[끝순이] 설 쇠면 열일곱!
[점례] 열일곱 살--- 벌써 그렇게 돼?
[끝순이] 그러니까 실속을 차려야죠. 식모살이해서 돈 모으면 장사를 할래---
(끝순의 눈에는 희망이 떠돈다)
[점례] 어디서!
[끝순이] 타관이면 아무데서나?
[점례] (한숨을 뱉으며) 끝순이는 그렇게라도 할 수 있으니 마음 편하겠어!
[끝순이] 형님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 뭐!
[점례] 나는 안돼! 내게 걸려 있는 사람이 몇이라고--
(절망적인 한숨)
[끝순이] (조소를 뱉으며) 그까짓 시집 부스레기가 무슨 소용 있어!
[점례] 아니 너는 정말--- 홋호--- 못할 소리가 없구나!
[끝순이] 나 살고 남도 있지--- 이렇게 한 세상도 못살아 보고 죽으려고!
[점례] 그게 아니야--- 너는 몰라 내 마음을---
[끝순이] 왜 몰라! 홋호---
[점례] 뭐가 우습니?
[끝순이] (은근히) 귀덕이 오라버니가 살아서 돌아올지도 모른다 이 말이죠?
(하며 힐쭉 거린다)
[점례] (침착하게) 사실이야 꼭 살아 있을 것만 같어--- 난 믿어!
[끝순이] (단정적으로) 죽었을 걸요!
[점례] 아냐 틀림없이 살아 있을게다---
[끝순이] (잠시 눈치만 보다가) 살아 계시다고 해도 무슨 소용 있어요?
[점례] (의아한 표정으로) 뭐라고?
[끝순이] 이제 살아 나와도 사람대접받기는 틀렸죠 이 고장에선 백날 살아봐야--- 그러니 형님도 나하고 같이 가요.
[점례] (말없이 돌아본다)
[끝순이] 형님은 얼굴도 예쁘고 간이 학교를 다녔으니까 더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걸! 예? 내가 도봇장수 병영 댁이 오면 알아봐 드릴까? 시집도 갈 수 있대요.
[점례] (어이없다는 듯) 시집? 홋호--- (허탈한 웃음)
[끝순이] 정말이래두---
(이때 산길 쪽에서 규복이가 나타난다. 남루한 옷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데다 다리를 다쳤는지 절뚝거린다. 그는 사방을 휘돌러 보며 숨을 곳을 찾는다. 한길 위에서 여기저기 보더니 점례네 집 뒷간으로 급히 숨는다. 그가 급히 내려오는 바람에 돌멩이가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점례] 누구여? (하며 바깥 기색을 살핀다. 이 서슬에 끝순이는 점례의 등에 찰싹 붙어서 와들와들 떤다. 밖엔 어느새 눈송이가 하나 둘 흩날린다. 먼 데서 개 짖는 소리가 있을 뿐이다.)
[끝순이] 아무도 아닌가?
(멀리서 비상소집용으로 쓰이는 깡통이 흔들리는 소리)
[끝순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어마나! 무슨 일이 있나 봐
[점례] 그렇게--- 또 산에서 내려왔을까?
[끝순이] 저녁나절에 식량을 빼앗아 갔는데 또 올리가 있어요?
[점례] 나가 보고 올게. 너 여기 있을래?
[끝순이] 싫어! 나 혼자 무서워서 어떻게---
(이때 다시 깡통 흔드는 소리, 잠시 후 최 씨가 몸을 술 항아리 싸듯 싸매고 한길에서 등장, 역시 손에 죽장을 들었다. 이와 반대쪽에서 두 사람의 아낙이 총총걸음으로 나오다가 한길에서 마주친다)
[아낙1] 무슨 일이에요??
[최씨] 함덕이네가 서 있는데 숲 속에서 무엇이 바시락거리더래!
[아낙2] 그럼 도둑놈일까?
[최씨] 그렇지 않아도 다들 나오래! 어서들 가보게!
[아낙1] 형님은요?
[최씨] 우리 손주 망가로(망으로 곡식을 갈아서 낸 가루) 좀 끓여 멕이고 곧 갈게!
(하며 바삐 언덕길을 내려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 아낙1, 2도 불안한 표정으로 좌편으로 퇴장)
[끝순이] (보자기를 쓰며) 그만 가 봐야겠어!
[점례] 그래 먼저 가봐 나도 곧 갈 테니까!
[끝순이] (밖으로 나오며) 예--- 지금 얘기 아무한테도 하지마!
(이때 한길에는 여기저기서 아낙네들이 몰려나오며 서로를 불안한 얼굴로 수군거린다))
[군중 1]!
(이 말에 한층 떠들썩해지며 좌편으로 나간다. 최 씨는 다시 방 안에서 나와 한 길로 올라간다. 마루에 서 있던 점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점례] 무슨 일이 터지기는 터졌나보군!
(하며 방으로 들어가 목도리로 머리를 쓰고 불을 끈 다음 마루로 나온다. 무대는 잠시 바람소리와 눈송이가 있을 뿐 태고의 적막이 흐른다. 점례가 헛간으로 들어가 죽창을 찾는 사이에 뒷간에 숨어있던 규복이는 뜰 안으로 들어서 부엌 쪽으로 들어간다)
[점례] (헛간에서 나오며) 죽창이 여기 있었는데--- 부엌에다 뒀나---
(하며 부엌으로 들어간다. 다음 순간 규복이와 마주친다. 규복, 칼을 들이대며 위협한다)
[점례] 누, 누구요?
(그러나 소리는 목에 걸려 떨리며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규복] (낮은 소리로) 소리를 지르면 알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점례는 와들와들 떨면서 뒷걸음쳐 나간다.)
[규복] (점례에게 바싹 다가오며) 우선 먹을 것 좀 줘! 물 하고---
[점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규복] 그리고 석유 있지?
[점례] 석유를? 앗! 그건 안 돼요 불을 지르시면--- 안돼요!
[규복] 불? 아냐! 다친 다리의 상처를 우선 소독 좀 해야겠어
[점례] 다리를 요?
[규복] 빨리! (하며 아픔을 못 이기겠다는 듯 두 손으로 다리를 짓누르며 신음한다.)
[점례] (차츰 마음의 여유가 생기며) 예--- 어디서 다치셨어요?
[규복] 낭떠러지에서 아--- (아픔을 이기려고 애쓴다.)
(이때 멀리서 인기척이 난다.)
[규복] (당황하며) 무, 무슨 소리요? 일루 오나? (하며 한길 쪽을 살핀다)
[점례] 그래요!
[규복] (매달리며 간절하게) 나 좀 살려 줘! 은혜는 잊지 않겠소! 나는 빨갱이가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몰라!
[점례] 그럼 천왕봉에서? (하며 새삼스럽게 훑어본다)
[규복] 예? 예! 그러니 어서 나를 살려 줘요! 어디가 숨으면 돼?
(점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규복의 어깨를 잡아 일으킨다)
[점례] 내 어깨를 붙잡아요!
[규복] (채 알아듣지 못하며) 예?
[점례] 서둘러요 사람이 온다니까! 어서---
(점례는 규복을 이끌듯 하며 무대 우편 대밭 쪽으로 급히 퇴장한다. 잠시 무대가 비더니 양 씨가 숨을 헐떡거리며 등장)
[양씨] 아가! 아가! 잠이 들었나?
(죽창을 마루에 걸쳐 세우며 옷을 턴다. 눈이 펑펑 쏟아진다.)
[양씨] (방문을 열어보고 아무도 없음을 알자) 이상하구나 벌써 이렇게 나갈 차례는 안되었을 텐데---
(이때 우편에서 점례가 나오다가 양 씨를 보자 몹시 당황한다.)
[점례] 어머니 벌써 오셨어요?
[양씨] 아니 한밤중에 대밭엔 왜?
[점례] 예--- 저 죽창이 없어서 대를 깎을까 하고요--
[양씨] 죽창은 내가 가지고 간다고 그랬잖아? 거기 있다---
[점례] (마음의 동요를 감추려고 애쓰며) 홋호--- 참 그렇군요--- 내 정신 좀 봐
[양씨] 별일 없었지?
[점례] 예? 예--- 참 아까 깡통은 왜 흔들었어요?
[양씨] 글쎄 함덕이네 얘기는 분명히 뭣이 산 쪽에서 내려와 도망쳤다고 수선을 떨지만 누가 믿을 수 있니?
[점례] 원래 그분은 겁이 많잖아요?
[양씨] 그러기 말이다! 우리들이 똑똑히 봤느냐고 물었더니 제 눈을 빼라면서 우기는구나 글쎄--- 홋호---
[점례] 어머니 어서 방에 들어가 쉬세요.
[양씨] 오냐--- 어서 가봐라--- 모두들 기다리더라---
(하며 방으로 들어간다)
(무대에 혼자 남은 점례는 허공의 일침을 쳐다보며 걸어 나온다.)
[점례] 분명히--- 분명히 빨갱이가 아니라고 그랬어--- 어디서 왔을까?
(그녀는 괴로운 듯이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어 눈을 감는다. 눈이 함부로 얼굴에 쏟아진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막)
[막][장] 제 3막 1장
[무대 배경]무대- (제1막과제 1 같음. 1막부터 약 3주일 후 오전 따스한 햇살이 마루와 헛간을 비추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바람은 차다. 막이 오르면 양 씨가 마루에 앉아서 계란을 짚 꾸러미에 넣고 있다. 그 옆에서 귀덕이가 멍청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점례가 부엌에서 설거지통을 들고 나와서 변소 옆 거름통에다가 버리고는 돌아선다. 그녀의 얼굴은 전보다 명랑해 보인다.)
[귀덕] (응석을 부리며) 나도 따라갈 테야!! 엄마! 응?
[양씨] (여전히 꾸러미를 만들며) 안된다니까--- 네 올케하고 집을 봐!
[귀덕] 싫어! 장 구경하고 싶어!
[양씨] 이년이! 오고 가기 육십 리를 어떻게 걸어간다고 그래? 잠자코 에미말 들어라---
[귀덕] 백리라도 갈 수 있다니까---
[점례] (부엌으로 들어가다 말고) 어머니 데리고 가세요. 모처럼의 장날인데 구경도 시킬 겸---
[양씨] 너도 소갈머리 없기시리--- 오늘은 대목 장날이라 장터가 여간 붐비지 않을게다.
[귀덕] 그러니까 재미나지 뭐!
[양씨] 안돼! 또 언젠가처럼 사람사태에 길을 잃어버리면 누가 애간장 녹일려고! 집에 있어! (달걀을 헤다가) 아니! 또 두개가 없어졌구나? (하며 귀덕을 쏘아본다) 이년아! 네가 또 훔쳤지?
[귀덕] (펄쩍 뛰며) 아냐 난 몰라!
[양씨] (주먹으로 귀덕의 등을 치며) 이 등신아! 왜 먹지 말라는데도 솔랑 솔랑 빼먹느냐 말야!
[귀덕] (금시 눈물을 짜며 등을 만진다) 정말 안 먹었다니까
[양씨] 내년이 안 먹었으면 이 집구석에서 누가 먹어? 응 뱀이 삼켰단 말이냐 쥐가 훔쳤단 말이냐? 망할 년!
(점례는 듣기가 민망스럽다는 듯 황망히 부엌 쪽으로 간다)
[양씨] 전에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년이 갑자기 식충이가 됐나? (일을 계속하며) 이 달걀마저 없으면 우린 굶어 죽어! 새 보리가 나올 때까진 이거라도 모아서 양식과 바꾸어야 한다는 걸 몰라? 이년아 이제 설 쇠면 열여덟이야! 옛날 같으면 자식새끼를 낳고 엄씨말 들을 나이래두!
[귀덕] 난 안 먹었어!! 형님 보고 물어봐! 내가 언제 닭장에 가 보기나 했나?
[양씨] 지난번에도 먹었다면서?
[귀덕] 그때는 형님이 한 개 줘서 먹었지만 이번엔---
[양씨] 듣기 싫다! 어유 망할 년! 저렇게 등신이 되어 에미 속 썩일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뒈지게 내버려 둘 것을--- 없는 돈에 약까지 썼지!
[점례] (손을 씻으며 부엌에서 나온다) 원 어머니두--- 살아난 것만이라도 다행이지--- 그런 말씀 마세요
[양씨] 하늘도 무심하지 기둥같이 믿던 아들이 없어지고 병신 딸을 남겨줄 게 뭐람!
[점례] 배안의 병신인가요 뭐? 제가 시집왔을 때 만해도 얼마나 상냥하고 야무졌는데---
(하며 귀덕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양씨] (귀덕에게) 썩 나가지 못해! 산에 가서 땔감이나 긁어 와!
[귀덕] (한걸음 물러서며) 싫어 나도 갈 테야!! 엄마가 안 데리고 가면 나 혼자 가서---
[양씨] 저년이 쥐둥이는 살아서---
[점례] 데리고 가세요! 저렇게 가고 싶어 하는데---
[양씨] 집을 비워서야 되겠니!
[점례] 제가 있잖아요?
[양씨] 너 혼자서? 세상이 이렇게 뒤숭숭한데 혼자서 무섭지 않어?
[점례] (웃으며) 어머니두--- 그렇다고 한낮에 호랑이가 나오진 않겠죠! 괜찮아요---
[귀덕] 산손님이 나온대! 힛힛---
[양씨] 원 빌어먹을 것! 귓구멍을 뚫려서 남이 하는 소리는 잘도 귀담아 들었지! 쯧쯧
[점례] 귀덕 아씨가 집에 있으면 도리어 마음이 안 놓여요. 데리고 가세요!
[양씨] (잠시 생각하다가) 그럼 어서 세수하고 머리나 빗어.
[귀덕] 힛히--- 세수는 했어! 이봐
(손을 펴 보이며 웃는다)
[점례] 홋호--- 오늘은 웬일이야? 세수를 다하고---
[양씨] 병신이 육갑한다더니--- 원 (하며 옷을 털고 계란 꾸러미를 망태에 담는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간다)
[점례] (귀덕에게) 이리와요 머리 좀 쓰다듬게!
[귀덕] 응
(하며 마루 끝에 와서 천연스럽게 앉는다. 점례는 머리를 풀며 방을 향해 말한다)
[점례] 어머니! 빗 좀 주세요! (귀덕에게) 갔다 오면 머리 좀 감아요-- (하며 이를 잡아준다.) 한 살 더 먹게 되니 착해져야지---
[귀덕] (힐쭉 웃으며) 응---
(양 씨가)
[양씨] 옛다!
(점례는 빗을 주워 들고 머리를 빗기기 시작한다.)
[귀덕] 형님!
[점례] 응?
[귀덕] (혼자서 웃으며) 나--- 시집갈까?
[점례] (어이가 없다는 듯) 시집을?
[귀덕] 응--- 나보고 시집가제!
[점례] (흥미를 느끼며) 누가? 언제!
[귀덕] 꿈에!
[점례] 꿈에? 홋호--- 난 또---
[귀덕] 정말이야!
[점례] 그렇지만 꿈은 꿈이지 뭐야---
[귀덕] 장터에 가면 총각들 많이 있지?
[점례] 글쎄--- 있을 테지---
[귀덕] 여긴 총각도 없으니까 시집 못 가잖아? 훗후--- 장에는 많은 거야!!
(이때 양 씨가 풀을 빳빳이 먹인 저고리 치마로 말쑥하게 갈아입고 나온다. 허리띠를 질끈 맨다.)
[양씨] 머리 다 빗었으면 거서 가자!
[점례] (따 내린 뒷머리채를 눌러 주며) 다 됐어요.
(귀덕은 어린애처럼 껑충껑충 뛰며 뜰에 내려선다)
[양씨] (신을 신으며) 이 목도리 둘러라!
[귀덕] 난 안 추워! 엄마가 둘러!
[점례] 그럼 (계란 꾸러미를 들며) 이걸 들고 가자!
[귀덕] 응! (하고 손을 내밀자 양 씨가 손을 털며 가로챈다)
[양씨] (점례에게 눈을 흘기며) 말이라고 하느냐? 쥐에게 곡식 가마니 지키라는 격이지! 내가 들어야 해!
(점례는 무안해서 얼굴을 붉힌다)
[양씨] 그럼 내 다녀올테니 집을 잘 봐라! 참 할아버지 일어나시면 죽을 데워 드려!
[점례] 예--- 다녀오세요.
[양씨] 집을 비게 하지 말고-- 끼니 먹을 것은 없어도 도둑맞을 것은 있단다---
(어느새 귀덕은 한 길로 뛰어나가고 없다. 양 씨가 신바람 나게 나가 버리자 점례는 푹 숨을 내리 쉰다. 문득 생각이 난 듯 부엌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계란 두 개와 밥그릇을 치맛자락에 싸며 바삐 나온다. 까마귀가 까욱거리며 지나간다.
점례는 헛간 앞에서 잠시 주위를 경계하더니 급히 오른편 대밭 쪽으로 퇴장)
(이때 좌편에 도봇장수 병영 댁이 들어온다. 큼직한 보따리에 자를 끼워서 들었다. 집 안을 기웃거리며 들어선다.)
[병영댁] (혼잣소리로) 아무도 없나--- 좀 쉬어 갑시다---
(마루에 보따리를 부러 놓고 한숨을 후유 쉰 다음 치마를 걷어 젖히고 값싼 궐련을 꺼내어 피워 문다)
[병영댁] (집안을 둘러보며) 아침부터 마실을 돌 리가 만무하고--- 어딜갔나---
(하며 뜰로 내려서 부엌을 들여다보며) 아무도 없나? (하며 돌아선다)
(이때 안방 문이 열리며 김 노인이 고개를 내민다. 자다가 일어난 백발머리가 마치 사자머리 같이 흉하다)
[병영댁] (질겁을 하며) 에그머니! 사, 사람살려사람 살려! (하며 토방 아래에다 엉덩방아를 찧는다)
[김노인] (멍청하게) 아가--- 어디 갔니? (눈을 부비며) 원 이놈의 눈이---
[병영댁] (일어서며) 방에 있으면서 대꾸가 없다니 원!
[김노인] (무슨 말인지 못 알아차리며) 요강은 어디 있어---
[병영댁] 뭐 요강이라고? (손을 떨면서) 휴유--- 난 낮도깨비인 줄 알았지!
(가까이 오며) 할아버지 혼자 계세요!
[김노인] (딴전을 부리며) 머리가 가려운 게 비가 오려나--- (하며 머리를 득득 긁는다) 다들 어디 갔수?
[병영댁] (어이가 없다는 듯) 아니 누가 물어볼 말인데요? 참---
[김노인] 글쎄 밥을 주고나 나갈 일이지--- 쯧쯧--
[병영댁] 귀머거리 마귀시군! 흥! (소리를 돋구어) 할아버니! 다들 어디 갔소?
[김노인] (눈부신 햇살을 가리며) 글쎄!-- 요즘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어! 어른을 몰라보고서--- 에미야--- 귀덕아! (하고는 가래를 뱉는다)
[병영댁] 이건 정말 솜방맹이로 다듬이질 하기군 그래!
(이때 우편에서 점례가 나오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빈그릇을 어떻게 처리할까 망설인다. 다음 순간 그녀는 헛간에다 그릇을 내던지고는 시치미를 떼고 나온다.)
[점례]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김노인] (돌아보며) 아니 어디 갔다가 오니?
[점례] 예--- 저--- 잠깐---
[병영댁] 날도둑이 집안을 몽땅 뒤져 가도 모를 뻔했구려!! 할아버지께서 요강을 찾아요. 어서 가 보우!
[점례] (방으로 들어가며) 할아버지 들어가세요. 요강은 뒷 토방에 있잖아요---
[김노인] 어서 밥을 가져와! (하며 방 안으로 사라진다. 점례는 방안에 들어가더니 다시 나와서 문을 닫는다.)
[병영댁] (직업적인 미소를 띠며) 구경 좀 하시구려!
[점례]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예! 뭔데요?
[병영댁] 옷감이죠--- 새로 나온 저고리 치맛감을 가져왔어요
[점례] (마루를 돌아오며) 우리 형편에 옷 걱정하게 되었어요? 알몸만 가리고 살면 다행이지!
[병영댁] (능청스럽게) 어이구 젊은 새댁 말씀 좀 들어 보라지 아니 젊었을 때 옷 욕심 없다니 될 말이우? 어서 이리 와 봐요.
[점례] 욕심이야 왜 없겠어요. 원수의 돈이 없지.
[병영댁] 돈이 없으면 곡식이라도 돼요 어떻든 구경이나 하고 나서---
(하며 차곡차곡 얹힌 물건을 하나씩 펴 보인다.. 형형색색의 인조견이 햇살 아래 한층 눈부시다.)
[점례] (무심코 손이 가며) 어머나! 곱기도 해라!
[병영댁] (간사스럽게 웃으며) 거 봐요 홋호------ 색시 보고 침 안 흘리면 고자요, 비단 보고 욕심 안내면 절구통이지-- 홋호---
[점례] (따라 웃으며) 아주머니는 말주변도 좋으시네--- 마음 내키는 대로 하자면 하루에 열두 벌도 갈아입고 싶지만---
[병영댁] (앞질러 말하며) 사람 있고 돈 있지! 그러지 말고 두 눈 딱 감고 끊어요! (하늘빛 인조견을 자르르 풀어내며) 자 이걸로 들여놔요! 헐값으로 드릴 테니------ 응? 의복이 날개라고 이것으로 차려 보시지 물 찬 제비처럼--- 홋호--- 길에 나가면 동네방네 잡놈들이 오뉴월 거름통에 구데기 끓듯 할 텐데--- 힛히---
[점례] 어마! 나 같은 게 어디---
[병영댁] 어이구 별말씀을--- 이런 산골에서 썩기는 아까운 일색이오. (낮은 소리로) 아직도 혼자 지내우?
[점례] (쓴웃음을 뱉으며) 별수 있나요---
[병영댁] (사뭇 동정하는 척하며) 저런--- 정말 언제나 마음 놓고 살 세상이 될는지 원--- (자 끝으로 턱밑을 긁으며) 참 오는 길에 들은 얘기지만 이 근방에는 아직도 산손님이 있다면서요?---
[점례] (놀라며) 예? 예--- 그렇다나 봐요
[병영댁] 그래서 버스를 타고 오는데도 그렇게 조사가 심했군. 그래 그저 정류소마다 헌병이다 순경이다 향토 방위대다 하고 도민증을 보자니 처음부터 숫제 도민증을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니까--- 이거 봐요 이건 도민증이 아니라 휴지 조각이지!
(하며 쌈지에서 구겨진 도민증을 내보인다)
[점례] (신기하게 보며) 우린 아직 이런 것도 없어요.
[병영댁] 하긴 나같이 일 년 열두 달 떠돌아다니는 사람 아니면 도민증이야 있으나 마나지! 허지만 요즘 이것 없으면 오리 밖에도 못 나가요!! 차표도 안 파니 말이우
[점례] (생각에 잠기며) 참--- 댁에선 이곳저곳 널리 돌아다니시니까 바깥세상 돌아가는 꼴을 잘 아시겠네요.
[병영댁] 뭐 잘 알 것도 없지만--- 읍내만 하더라도 사람 살기가 괜찮은데 강 하나 넘으면 벌써 딴 세상이야. 더구나 이 산골에 들어선다 치면 찬바람이 휑하지 뭐유, 글쎄 논두렁이며 들판엔 강아지 새끼 한 마리 볼 수가 없으니---
[점례] 그래요--- 하긴 빨갱이들이 산으로 도망간 뒤엔 경찰도 한두 번밖에 안다녀 갔으니까요---
[병영댁] 그래서 요즘도 가끔 그놈들이 내려와서 노략질이군! 지척이 천리라더니 강 하나 사이에 두고 이렇게 세상이 멀 수가 있담! 꼭 백 리 길을 걸었으니---
[점례] 그래도 아주머니는 그렇게 해서 돈도 벌고 세상 구경도 하니 오죽이야 좋겠어요---
[병영댁]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살기 위해선 별 수 없어요 이젠 웬만한 촌에 가봐야 누가 물건을 사야지--- 그러니까 하는 수 없이 이렇게 깊숙한 마을까지 왔지뭐유!!
[점례] 정말 아주머니는 용하시네요---
[병영댁] 내가 이 지랄을 안 하면 다섯 식구가 굶는 건 고사하고 우리 아들이 학교를 그만둬야 하니---
[점례] 아주머니도 바깥 주인이 안 계시나 봐---
[병영댁] (금시 눈시울이 젖으며) 예-- 빨갱이들이 들어와서 그만---
[점례] (동정의 빛을 보이며) 예--- 그러세요?---
[병영댁] 국민학교 교원으로 있었는데 글쎄 반동이라고---
[점례] (크게 놀라며) 국민학교 교원?
[병영댁]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준 죄밖에 없는 위인인데 글쎄---
(울먹거리며) 사람 하나 없어지니 집안에 저축이 있소, 집 한 칸이 있오? 학교 다니는 아들을 맏이로 오남매만 댕그라니 남았으니--- (속치맛자락으로 코를 풀고 나서) 그러니) 나라도 뭘 해야겠다고 시작한 게 이 장사지요--- 어휴! 정말 몹쓸 놈의 세상 만나 고생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인가 싶으니까 살아왔지, 양잿물을 먹으려고 마음먹기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점례] 그러시겠지요 (사이) 참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아요?
[병영댁] 뭐예요?
[점례] 입산하면 죽이나요!
[병영댁] 입산이라뇨?
[점례] 저 빨갱이를 따라서 산에 들어간 사람 말예요
[병영댁] 암! 빨갱이야 죽여야죠!
[점례] 속아서 따라갔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도요?
[병영댁] (뜻하지 않는 질문에 난색을 보이며) 그 글쎄요--- 허지만 뭐가 이뻐서 살려 놓겠수?
[점례] (풀이 죽으며) 역시 죽이겠죠--- 죄는 죄니까---
[병영댁] 아니 갑자기 그건 또 왜 물우?
[점례] 그저 물어보는 말이에요.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자수해서 죽음을 당하나 산에서 굶어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니까 잘 죽었다 싶어서---
[병영댁] (위로하며) 그렇지만 또 알우? 죽었던 사람이 살아 나오는 수도 있으니까! 글쎄 이런 일이 있었죠. 우리 먼 일가 되는 분인데 지난 가을 빨갱이들이 후퇴하면서 마을 유지란 유지들을 굴비 두름 엮듯 해서 끌고 가지 않겠우? 그래 큰 구렁에다 몰아넣고서는 창으로 마구 쑤셔 죽였는데 온 몸에 열두 군데나 상처를 입고도 살아 나왔지 뭐유 글쎄 그래 집안에서는 선영께서 돌봐주셨다고 하면서 전에는 돌보지도 않던 선산을 고치고 다듬고 하며 그런 야단이 있었다우--- 홋호
[점례] 이 마을에도 그런 일이 있었죠. (쓰라린 과거를 더듬으며) 인민군이 처음으로 쳐들어오자 하루는 집안의 남자들은 토끼바위 아래로 모이라지 않겠어요.
[병영댁] 왜? 죽일려고?
[점례]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으면 누가 따라나섰겠어요? 무슨 시국 강연회인가 뭔가 있으니 한 사람 빠짐없이 나오라고 해서 집집마다 남자란 남자는 다 나갔죠. 그때가 석양 때여서 아낙들은 저녁을 짓느라고 한창 서두는 판인데--- 얼마 후에 요란스런 총소리가 나지 않겠어요?
[병영댁] 저런--- 가지 말 것이지------
[점례] 그렇지만 설마 그렇게 무참하게 죽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지난날을 회상한다)
[병영댁] 그래 왜 죽였대?
[점례] 기가 막힌 일이죠. 토끼바위 아래에 모이자 난데없이 대한민국 국군이 총칼을 들이대면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은 줄 밖에 나오너라!" 하더라나요 그래 모두들 겁에 질려서 손을 들고 너나 할 것 없이 줄 밖으로 나가니까 금시 총을 쏘더래요.
[병영댁] 옳지! 그게 국군이 아니라 빨갱이들이 마음을 떠보려고 꾸민 짓이었구먼! 쯧쯧---
[점례] (눈물을 글썽이며) 두 눈으론 차마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속에서 총알 두 발이나 맞고도 살아 나온 분이 있었어요. 끝순이 아버지라고 아주 착한 어른인데 결국은 몇 달 후에 그로 인해 죽었지만서두---
[병영댁] (한숨을 쉬며) 지지리도 박복한 백성이지! 올라가면서 죽이고 내려오면서 쳐붓구--- 백성이 무슨 동네 북인가! 생각나면 때리구 죽이구---
[점례] 이런 난리가 또 있을까 무서워요. 제 남편은 그 난리가 일어나기 전에 피해 버렸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종무 소식이고--- (하며 고름 끝으로 눈시울을 누른다.)
[병영댁] 항상 흐린 날씨겠수---? (화제를 돌리며) 한 감 안 들여놓겠우??
[점례] 지금은 안 돼요. 추석 대목에나 모를까---
[병영댁] (금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차라리 손주 환갑 때나 봅시다!
(하며 보따리를 싸려고 한다. 이때 한길 쪽에서 끝순이 정임 등장)
[정임] 여기 있구먼!
[점례] 어서 와 정임이!
[정임] (끝순이를 돌아보며) 도붓장수 아주머니가 왔다기에--- 무얼 샀어?
[점례] 돈이 있어야지! 정임이네는 부자니까 한 벌 살 테지만
[병영댁] (비위를 맞추며) 어서 구경들이나 하세요. 사고 안사고는 둘째고 우선 물건 구경부터 하세요. 장사라는 것도 기분이니까요--- 자 이거 어때요?
[정임] 속 치맛감 있어요
[병영댁] 있구 말구요 자--- (천을 펴며) 이 새로 나온 다이야 무늬! 질겨요!
[끝순이] 이왕이면 치마저고리를 사시지!
[점례] 치마저고릴?
[끝순이] (정임을 가리키며) 정임 언니 시집간대!
[점례] 그래? 그게 정말이야
[정임] 끝순아! (하며 눈을 흘긴다.)
[끝순이] 어때요? 어차피 다 알게 될 텐데요 뭐--- 홋호---
[병영댁] 거 참 경사로군! 그럼 이걸로 하실까? 살결이 희니까 이 빛깔이 어울릴 거야! 응? 어때! (하며 천을 정임의 어깨에다가 걸친다.)
[끝순이] 아이 예쁘기도 해라!
(점례는 어느새 그들에게서 밀려 나온 사람처럼 저만치 않아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본다 세 사람은 이것저것 고르느라고 수선을 떤다 이때에 안방 문이 열리며 김 노인이 소리를 지른다)
[김노인] 뭣들 하는 거야!
(세 사람)
[끝순이] 아이 깜짝야!
[김노인] 왜 밥을 안주냐? 응? 불사스런 것들! 어른 배 끓이고 잘 되는 놈 못 봤다!
[점례] 지금 차릴 테니 기다리세요. (하며 부엌으로 들어간다.)
[병영댁] (보따리를 싸며) 아씨 남의 집에서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댁으로 가서 차분히 고르시지!
[끝순이] 그렇게 하세요 형님! 그리고 나하고 할 얘기도 있고!
[병영댁] (보따리를 싸며) 응? 응--- 홋호--- 그래 처자에게도 할 얘기가 있고 말고---
[정임] 같이 갑시다
(세 사람은. 이때 바른편 헛간 뒤에서 규복이가 조심스럽게 등장한다. 면도질을 해선지 전보다 혈색이 좋고 다리 상처도 나아가는지 전보다는 자유스럽다. 멀리서 비행기 폭음 소리, 방에서 나오던 점례가 보자 낮은 소리로 부른다.)
[규복] 이봐요! 점례! 점례!
[점례] (소스라치게 놀라 신을 끌고 오며) 안돼요! 여기까지 나오시면--- 앗! 저리 가요! 하며 헛간으로 떼밀고 들어간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서로 안은채 짚더미 위로 쓰러진다.)
[점례] 앗!
[규복] (힘껏 안으며) 점례!
[점례] 지금은 안 돼! 할아버지가 아직 계세요! 할아버지가 마실에 나가시면 갈 테니까 어서 대밭에 가서 기다려요!
[규복] 대밭 속에 않아있으면 산속에서 지내던 일이 자꾸만 생각나서 못 견디겠어! (괴로움을 씹으며) 점례, 난 어떻게 하면 좋아? (하며 점례의 손목을 잡으려 한다. 점례는 주위를 살피며 뿌리친다.)
[점례] 이러시면 안 돼요! 어서 돌아가 계세요! 곧 갈 테니까요!
[규복] (절실하게) 같이 있어 줘! 점례! 나하고 같이 있어줘! (하며 손목을 잡아 끈다)
[점례] (이끌려가며) 예--- 가겠어요 가겠어요! 누가 보면 어떻게 해요! 자--- 손을 놓고 가 계세요! 곧 갈 테니까---
[김노인] (방 안에서) 에미야 숭늉을 가져와!
[점례] 부르고 있어요. 난 가 봐야 돼요!
[규복] 할 얘기가 있으니까 와야 돼!
[점례] 예--- 어서 가 봐요!
(규복이가 미련이 서린 표정으로 다시 대밭 쪽으로 사라지자 점례는 안도의 숨을 몰아쉰다. 이때 무대가 서서히 회전되면서 어두워진다)
[막][장] 제 3막 2장
[무대 배경](대밭 속에 사람 하나 들어앉을 움을 파고 짚과 가마니로 간신히 지붕으로 가렸다. 낙엽이 수북히 쌓여서 얼핏 보기엔 알아볼 수가 없다. 굵은 대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바깥세상은 안 보인다. 움 앞에 큼직한 바위가 놓여 있다. 대나무 앞에 가리어서 한낮에도 음침하고 햇볕도 안 든다 무대가 밝아지며 움 속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다. 말은 없지만 서로가 의지하고 사랑하는 기색이 농후하다. 이따금 바람이 대밭을 흔들고 지나가는 소리가 으시시 한 기운을 돋운다. 규복은 점례의 허리에 손을 감고 열띈 시선으로 돌아본다.)
[규복] (더 힘껏 안으며) 점례! 나를 버리지 말아 줘!
[점례] 꼭 어린애 같은 소리!
[규복] 나는 이제 비로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안 것 같아! 점례가 나를 대밭 속에 숨겨주던 그날부터 나도 줄곧 그것만을 생각했으니까!
[점례] 저는 무식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규복] 몰라도 좋아! 이렇게 둘이서 가까이만 있다면---
(하면서 더 굳세게 허리를 죈다)
[점례] (끓어오르는 욕정을 이겨 내려고 눈을 감으며) 아--- 이러지 말아요--- 이러시면--- 저는---
(그러면서도 규복이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긴다)
[규복] 그래, 점례 말대로 나는 죄인이야. 그렇지만 점례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속일 수 없어! 내 생명을 구해주고 내게 잃었던 사랑을 되찾아주고 그리고---
(스스로의 욕정을 지탱 못하는 괴로움이 짙다)
[점례] 그만! 그만 해 둬요! (하며 규복의 목을 꼭 껴안는다. 멀리서 까치가 운다)
[점례] 선생님---
[규복] 응? (꿈꾸듯)
[점례] 역시 내려가셔야 돼요---
[규복] (제정신으로 돌아오며) 내려가다니--- 나보고 자수하란 말이야?
[점례] 언제까지나 이렇게 숨어서 살 수는 없지 않아요? 다른 생각일랑 마시고 자수하세요.
[규복] (고민이 짙어 가며) 그렇지만 나는---
[점례] (자신을 가지며) 어때요? 선생님이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그저 끌려 다녔을 뿐인데--- 그만큼만 벌을 받으시면 되잖아요?
[규복] 그만큼만? 안 돼 나는 살고 싶어! 나는 내려갈 순 없어!
[점례] 그렇다고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요? 네?
[규복] 자수하면 나는 총살당할 거야! 부모들도 친구들도--- 그리고 내가 가르쳤던 어린것들까지도 나를 보고--- 그러니! 나는 올 수도 갈 수도 없는 몸이야! 점례! 내가 살 수만 있다면 대밭이고 돼지우리고 상관없어!
[점례] 그럼 산으로 도로 올라가세요!
[규복] 뭣이! (분노가 끓어오르며) 그걸 말이라고 해? 응? 그 산이 싫어서 도망쳐 나온 나더러 다시 돌아가라니! 그놈들은 내게 죽음으로 맞아 줄 거야! 점례! 그러니!
[점례] (자신의 고민을 억제하려고 애쓰며) 그러니 저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내게 돈이 있수 권력이 있수, 학식이 있수, (울먹거리며) 내 몸 하나도 갈피를 못 잡고 송장처럼 사는 년더러 어떻게 하라고--- 난--- 아무것도 없는 몸이야요! 있는 거라곤 상처투성인데--- (하며 느껴 운다.)
[규복] (잠시 점례를 내려다보며 냉정하게) 알았어! 점례는 역시 내가 옆에 있는 게 겁이 나는 거야--- 귀찮을 테지! 싫을 거야! (하며 낙엽을 움켜쥔다.)
[점례]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들어 보이며) 예? 그런 말씀 마세요! (울먹거리며) 싫어하는 남자한테 제 몸을 내맡기는 여자도 있나요? 예? 남편도 아닌 남자한테---
[규복] (감격하며 손목을 쥐며) 그럼 나를 살려 줘! 아니 점례만 좋다면 우리 둘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 가! 이제부터라도 나는 사람답게 살고 싶어!
[점례] (눈물이 글썽거리며 바라볼 뿐 말이 없다.)
[규복] 굶어도 좋다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지만 사는 날까지 살고 싶어! 점례! 어때 나와 같이 가겠어?
[점례] 어디루?
[규복] 아무 데나---
[점례] 그렇지만 도민증이 없는걸 어떻게 가요?
[규복] 도민증이라니?
[점례] 요즘은 5리 밖엘 나가더라도 도민증이 없으면 차표도 안 준대요!
[규복] 그래?--- (실망의 빛이 짙다) 여기서 2백 리만 벗어나가면 친구네 집이 있는데---
[점례] 그 친구가 반겨 줄 것 같아요?
[규복] 사범학교 동기생이야! 아주 친한---
[점례] 그건 지난날의 얘기가 아니에요?
[규복] 뭐라구?
[점례] 선생님이 산에 들어가지만 안 했던들 그 친구분도 반가이 맞아 줄 테죠! 그렇지만 지금은---
[규복] 안될까? 내가 빨갱이라고 싫어할까?
[점례] (똑바로 쳐다보며) 선생님! 제 말대로 자수를 하세요 몸소 가기가 어려우시다면 제가 가서 얘기할게요.
[규복] 경찰서에다가?
[점례] 예--- 그리고 20일 동안 선생을 감추어 준 죄는 저도 함께 벌을 받겠어요.
[규복] 점례!
[점례] 법에 의해 처벌을 받고 난 우리들 이 세상의 아무도 우리 두 사람을 욕하지도 건드리지도 못할 거 아니에요? 네?
[규복] 그렇지만 경찰에서 나를 살려 주지 않을 거야!
[점례] 그럴 리가 없어요. 자수해서 용서받은 사람이 많았대요.
[규복] 그렇지만---
[점례] 그렇게 되면 나는 선생님을 따라가겠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규복] 점례! 고마워! 그럼 나도 며칠만 더 생각해 볼게 응!
[점례] 예---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아요. 비는 사람의 목은 못 벤다고 무턱대고 죽이는 게 법은 아닐 테니까요.
[규복] 그래! 점례말대로! (희망과 고민이 교차되며) 언제나 밝은 태양 아래서 고함을 지르며 살까? 이렇게 그늘에서 숨을 죽이며 살기는 지긋지긋해! 마음껏 소리 좀 질러 봤으면---
[점례] 쉿! 소리가 너무 커요!
[규복] (긴장했다가) 차차--- 내 소리는 점례 밖에 들을 수 없으니까 괜찮아! (하며 포옹한다) 점례!
(이때 돌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바시락 거리는 소리가 나자 규복이가 소스라치게 깨어나 두리번거린다)
[점례] 무슨 소리예요? (하며 일어나서 소리 나는 쪽을 본다)
[규복] 아니 왜 그래?
[점례] 분명히 사람 발자국 소리 같았어요!
[규복] 사람이? 아니 그럼 누가---
[점례] 글쎄요--- 이 대밭에 들어올 사람은 없는데--- 죽순이 나오기 전엔---
[규복] 다람쥐 아니면 들쥐겠지---
[점례] (불안한 한숨을 돌리며) 이만 가 봐야겠어요.
[규복] 좀 더 말동무가 되어 줘!
[점례] 집을 너무 비워 뒀어요. 자리가 습하면 가마니를 한 장 더 가져올까요?
[규복] 괜찮아! 아무리 불편해도 산에서 지내던 때 보다는 천국이니까! (미소를 지으며) 지금의 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것을 점례는 이해 못할 거야!
[점례] 그럼 이만 가 봐야겠어요.
[규복] 밤에 와 주겠소? (손목을 쥐었다가 놓는다)
[점례] 예--- 그렇지만 기다리지 마세요. 야경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며 걸어 나가자 규복은 안타깝게 바라본다 바람이 대밭을 불어 간다)
[막][장] 제 3막 3장
[무대 배경]. 사월은 마루 끝에 멍하니 앉아 있다 그러나 눈빛엔 일종의 광기가 돈다)
[최씨] 미친 년! 맘대로 해! (침을 뱉고서) 그래 자식새끼 있는 년이 새서방을 얻어? 응? 그게 무슨 화냥년 짓이라던?
[사월] (자포자기한 빛이나 냉소하듯) 내가 화냥년이면 어때요! 어머니가 무슨 상관이오? 상관이! 나는 한번 한다면 해요!
[최씨] 해라! 마음대로 부산이고 갑산이고 가서 갈보가 되든 식모가 되든 맘대로 해!
[사월] 걱정 말아요 누가 어머니더러 여비 대라고 할까 봐 걱정이오?
[최씨] 꼴 좋겠다 네가 타관에 가면 어느 놈이 밥상 받쳐들고 기다릴게다!
[사월] 흥! 산 입에 거미줄은 안 쳐요
[최씨] 가거라 가! 이 에미는 까치밥이 돼도 네년만 잘 살면 된단 말이냐?
[사월] (히스테리컬 하게) 그러니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언제까지나 이렇게 죽은 송장이 살아나기를 기다리란 말이에요? 못하겠어! 난 못해!
[최씨] 그러니 자식새끼가 있잖아?
[사월] 흥! 자식이 무슨 소용이에요? 그게 나를 잘 살게 해 줘요?
[최씨] 아니 이년이 정말 환장을 했나? 갑자기 왜 이러냐? 응? 무얼 못먹어서 이 발광이냐?
[사월] (한숨을 푹 돌리며) 다 귀찮아요! 이것이 사는 것이라면 차라리 부엉이가 되어서---
[최씨] 마음대로 해! 네년 신상 네가 알아서! (하며 밖으로 휭 나가 버린다.)
(사월이는 갑작스레 치밀어 오르는 허무감에 못 참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대밭 쪽을 향한다. 이때 대밭에서 내려오는 점례를 발견한다.)
[사월] (가까이 오며) 점례!
[점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응? 응--- 인제 좀 나아?
(하며 억지로 미소를 짓는다)
[사월] (부러 점잖게) 재미가 좋아?
[점월] 재미라니? 홋호--- 아니 이 산골에 무슨 재미가 있겠어--- 야경 하는 재미와 도둑맞는 재미나 있을까?
[사월] (눈빛이 날카로와지며) 나는 못 속여!
[점례] 뭘 말이야 사월이?
[사월] (바싹 다가서며) 지금 그 사람이 누구야? 응?
[점례] (당황하며) 아, 아니--- 누군 누구야?
[사월] 내가 묻고 있는 거야! (달래듯) 아무한테도 말을 안 할게 어서대!
[점례] 도대체 무슨 얘기지?
[사월] 아니 정말 이렇게 헛소리만 뱉을 턴가? 좋아! 그럼 내가 직접--- 물어보고 올 테니까!
(하며 대밭 쪽으로 간다. 몇 발 옮길 때까지 보고 있던 점례의 얼굴에서 새하얗게 핏기가 가신다.)
[점례] (사월을 따르며) 어딜 가는 거야?
[사월] 찾아볼 사람이 있어 그래!
[점례] 누군데?
[사월] 젊은 남자! (돌아보며) 누구지?
[점례] 아니--- 그럼 사월이는---
[사월] 알고 있었지! 홋호--- (속삭이듯) 어디서 왔지? 서방님은 아닐 테고? 응? 말 좀 하라니까!
[점례]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럼 역시 아까 그 소리는---
[사월] 친척? 점례에게 그런 친척이 있었던가? (하며 딴전을 부린다.)
[점례] 아니---
[사월] (추궁하듯) 왜 이렇게 우물 쭈물하고 있지? 응? 누구란 말이야?
[점례] (큰 결심이라고 하듯) 사월이! 나하고 약속해 준다면 가르쳐 주지!
[사월] 뭘 말야?
[점례] 다른 사람에겐 말 안하기로---
[사월] 홋호--- 누굴 어린 앤 줄 아나?
[점례] 정말이지? 그 약속을 어기면 우린 다 죽고 말아!
[사월] (심상찮게 여기며) 죽다니---
[점례] 그러니까 사월이만 알고 있어! 응?
[사월] 그래! 어서 말이나 해!
(점례는 사방을 훑어보더니 사월의 귀에다가 뭐라고 귓속말로 소곤거린다. 듣고 있던 사월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간다.)
[사월] 아니, 그럼 빨갱이 아냐?
[점례] 쉿!
[사월] (생각에 잠기며) 그래--- 그러니까 지난번 눈 오던 날 밤에--- 천왕봉에서 내려온---
[점례] (고개만 끄덕거린다)
[사월]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려는 듯) 알 수 없는 일이야! 점례가 어째서 그런 사람을 살렸을까?
[점례] 어째서라니? 그건--- 저--- (말문이 막히지 사월의 시선을 피한다.)
[사월] (눈빛이 달라지며) 점례는 그 사람을 왜 살려 줬지 밉지 않아?
[점례] 밉고 곱고가 있어? 그저 어쩐지 불쌍해서---
[사월] 불쌍해서?
[점례]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대--- 그런데 친구를 잘못 만나 그만 꾐에 넘어가 이산 저산으로 끌리어 다니다가---
[사월] (점례의 속셈을 떠 보려고) 어떻든 빨갱이 아냐? 점례 남편을 죽였을지도 모를--- 죽건 말건 내버려 두지 왜 데려다가 숨겨 가면서 살리지? 아무도 모르게 말이야---
[점례] 어디 그럴 수가 있어? 사정을 들어 보니까 딱해서---
[사월] (넌지시) 점례 사정이 더 딱하지! 흠---
[점례] 내가?
[사월] (단정적으로) 그리고 나도! (한숨) 우리보다 가엾은 인생이 어디 있겠어?--- 산 송장이나 마찬가지지---
[점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왜?
[사월] 왜냐구? 그럼 내가 말해야 알겠어? (비웃듯) 하긴 지금 점례는 그런 괴로움을 잊어버렸을 테지!
[점례] 그런 괴로움이라니?
[사월] (점례에게 정욕에 타오르는 시선을 퍼부으며) 그래! 나이 찬 여자가 홀몸으로 지내야 하는 괴로움을 모를 리 없잖아? 점례는 다행이지!
[점례] 내가?
[사월] 좋은 남자가 생겼으니까! 안 그래?
(하며 야비한 웃음을 던진다)
[점례] (홍당무가 되며) 어머--- (하며 외면한다)
[사월] (바싹 다가서며) 점례!
[점례] (상대방의 얘기를 경계하며 서 있다)
[사월] 나도 그 남자를 돕고 싶어!
[점례] (생기가 돌며) 정말?
[사월] 점례가 그 남자를 동정하는 마음씨를 나도 알고 있어!
[점례] (손목을 잡으며) 고마워! 그럼 아무에게도 말 안 하겠지?
[사월] 그럼! 그 대신 나하고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점례] 약속이라니?
[사월] 우리 둘이서 하루씩 번갈아 가면서 그분을 돌봐 주잔 말이야
[점례] (의아한 표정으로) 번갈아 가면서?
[사월] 그래! 나도 그이에게 밥을 해 주겠어! 산속에서 고생하면서 얼마나 굶주렸겠어! 점례 혼자선 짐이 무거울 테니까!
[점례] (감격하며) 그렇게만 해 준다면 얼마나 좋아! 정말 그이는 착한 사람이야! 자기가 빨갱이들 말에 속았다는 걸 뉘우치고 있어---
[사월] 그 대신 내가 하는 일에 참견해서는 안돼!
[점례] 참견이라니?
[사월] 내가 그 사람을 만날 때는 점례는 모르는 척하란 말이야! 어때---
[점례] (괴로워하며) 사월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어! 허지만 그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제발 괴롭히지 마! 응?
[사월] (비위가 상한 듯) 아니, 그럼 나더러 가까이하지 말란 말이야? 점례만이 그 사람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권리가 어디 있어?
[점례] 그런 게 아니라 그분은---
[사월] 듣기 싫어! 그런 점례 마음대로 해!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하면서 점례를 뿌리치고 가려고 하자 점례가 길을 막는다)
[점례] 사월이 그게 아니라--- 난---
[사월] 마음대로 하라는데 왜 그래---
[점례] (울음을 터뜨리며) 제발 소원이야!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으니 그이만은 살려 줘! 그이는 불쌍한 분이야!
[사월] (씩 웃으며) 약속을 지키겠어?
[점례] 그러니 밖에 말이 안 새도록만 해 줘! 그이도 상처만 나으면 제 발로 가서 자수하겠대! 그러니---
[사월] 염려 말래두! 점례에게 소중한 남자는 내게도 소중하니까! (불타오르는 욕정을 억제하며) 고이 간직하겠어! 염려 말어!
(점례는 미어질 듯한 가슴을 안고 마루 끝에 가서 쓰러져 운다. 사월은 천천히 대밭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막)
[막] 제 4막
[무대 배경]무대 전막과 같음. 전막부터 약 3개월 후 이른 봄 오후 양지바른 언덕길이며 뜰 한구석에 파릇파릇한 풀이 돋아나고 개나리가 피었을 뿐 모든 것은 전과 다름이 없다. 하늘엔 폭음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간 밀려간다. 이따금 총포소리가 멀리서 터지며 산골짜기에 메아리 져 펴진다. 그리고는 다시 고요가 깃들인다. 양 씨집 마루 끝에 양 씨,, 이웃 아낙 갑, 을 쌀례네가 쑥이며 산나물 캐어 온 걸 다듬고 있다. 최 씨는 자기 집 마루 끝에 멍하니 앉아있다.)
[쌀례네] (비행기 소리를 따라 하늘을 쳐다보며) 저렇게 빙빙 돌지만 말고 한바탕 결판을 내지 않구--- 원 답답해서---
[이웃 아낙을] 겁도 없지! 난 그 대포 소리며 총소린 지긋지긋해!! 또 난리가 터지면 어떻게--- 어유---
[쌀례네] 난리는요--- 이제 국군이 쳐들어왔으니 (산을 가리키며) 저놈들은 독 안에 든 쥐새끼지 뭐요.
[이웃 아낙 갑]] 좀 더 일찍 왔던들 우리가 고생을 덜했지 뭔가? 그동안 저놈들에게 빼앗기고 시달린 일 생각하면 치가 떨리지---
[양씨] 지난번에 경찰지서에서 나오신 분 얘기 못 들었어요? 이 고장은 산이 험해서 겨울엔 싸움하기가 힘들어서 늦었다구--- 그렇지만 이제 해동이 되었으니 아마 대판 콩 볶듯 하려나 봐!
(쿵하고 포 터지는 소리)
[이웃 아낙을] 국군이 들어온다니 한시름 덜었지만 앞으로 보리고개가 걱정이죠. 그동안 마음 놓고 농사도 짓지 않았을 테니---
[양씨] 허지만 산 목구멍에 거미줄 치겠어요? 칡뿌리만 있으면 살 수 있으니까---
[이웃 아낙을] 칡뿌리 캐는 게 그렇게 수월해요? 게다가 캐러 갈 사람이 있어야지--- 형님댁엔 며느리 있겠다 딸이 있으니까 꼼짝없지만 우리 집엔------ 어유 정말이지 못살아.
[쌀례네] (뜰 가운데 나오다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최 씨에게)) 아니 왜 그렇게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앉아만 있수? 일루 건너와서 얘기나 합시다.
(최씨 서서히 걸어온다)
[이웃 아낙을] 참 사월이 몸은 어떻수?
[최씨] (한숨) 매한가지예요---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를 깬다더니--- 집안에 우환이 그칠새 없으니
[이웃 아낙을] 왜 그럴까? 지금 그 나이면 솔잎도 달게 먹는 나이인데---
[최씨] 글쎄 먹는 것마다 토하니 사람이 살 수가 있어야죠. 없는 돈에 미음을 쑤어서 줘도 오약! (하며 손을 입에대고 토하는 시늉) 죽을 먹어도 오약 하니 옆에서 볼 수가 있어야죠!
[쌀례네] 속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애기를 가졌다겠네요. 홋호
[이웃 아낙을] 망할 것! 서방도 없이 애기를 낳나?
[쌀례네] (주위를 살피며) 아주머니만 알고 있어야 돼요.
[양씨] 어서 말이나 해! (쑥을 다시 고르며)
[쌀례네] 저 우리 마을에 낯선 사내가 드나든대요!
[양씨] 낯선 사내?
[쌀례네] 예 그것도 야밤에 저 토끼바위 쪽에요.
[양씨] (놀라며) 아니 그 귀신이 난다는 토끼바위엔 왜 가나? 개도 얼씬 안 하는 곳인데---
[쌀례네] 게다가 꼭 사내하고 계집 하고 한 쌍이니 이상 하잖아요?
[양씨] 도깨비라도 본 게 아냐?
[쌀례네] 아니요 그걸 먼눈으로 본 사람이 있다니까요!
[양씨] 누가?
[쌀례네] (낮은 소리면서 자신 있게)) 제가 봤어요
[양씨] 응? 쌀례네가? 아니 언제?
[쌀례네] 지난 한식날 밤이었지요. 죽은 쌀례 아범 생각이 나서 발길 쏠리는 대로 간 곳이 바로 토끼바위 쪽이 아니겠어요!
[양씨] 그래서?
[쌀례네] 그런데 분명히 계집과 사내가 쏜살같이 숲 속으로 숨어 버리는 걸 봤다우. 저는 어찌나 놀랐던지 그만 얼굴을 감싸고 돌아섰지요.
[양씨] 거 참 이상한데--- 이 마을에 사내가 어디 있어?
[쌀례네] 그런데 용식이네도 한번 봤대요.
[양씨] 역시 토끼바위에서?
[쌀례네] 예---
[양씨] (생각에 잠기며) 하필이면 그런 끔찍스러운 곳엘 갈까? 귀신이 난다고 대낮에도 가기 꺼리는 곳인데.
[쌀례네] 그래야만 남의눈을 피할 수 있을 게 아니에요?
[양씨] 옳아--- 하긴 그럴 법도 해! 그래 그 계집이란 누구야?
[쌀례네] 그게 말이에요--- 저
[양씨] 응? 누구? 아이 답답도 해라!
[쌀례네] (최씨집 쪽을 가리키며) 사월일 거라는 소문이에요?
[양씨] (크게 놀라며) 사월이가 아니 그럼---
[쌀례네] 그러니 수상하잖아요? 저렇게 건구역질만 하고 음식을 통 먹질 못하니
[양씨] (이제 비로소 알았다는 듯) 옳지! 그러니까 사월이는 애기를---
[쌀례네] 예--- 그렇게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죠. 에편네 병은 빤한 걸
[양씨] 그렇지만 그 사내가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지?
[쌀례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죠. 그렇다고 직접 본인더러 물어볼 수도 없구요.
[양씨] 사월이가 애기를 뱄어? 과부가 애기를---홋호호
[쌀례네] 아니 왜 그러세요? 예?
[양씨] 그 그런 뚱딴지같은 일이 어디 있어! 잘못 본 게 아냐? 정말 봤어?
(날카롭게 추궁한다)
[쌀례니] (약간 뒷걸음질 치듯)) 밤이라 얼굴을 똑똑히 보지는 못했지만서두 사월이가 자리에 눕기 시작한 시기와 병세로 봐서 빤하지 뭐유? 누군 애기를 안 낳아 봤어요?
[양씨] (낮게) 쌀례네! 자네 정말 그 입 좀 조심해! 그런 소릴 어디 가서 함부로 했다간 없는 상투를 뽑힐 거야!
[쌀례네] 그러니까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린다고 했잖우?
[양씨] 그래! 그 이야기는 이걸로 딱 끊어요! 괜한 소문 퍼뜨렸다가 생사람 죽이지 말구!
[쌀례네] 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하며 한길 쪽으로 나간다 혼자 앉아있는 양 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최 씨 집 쪽으로 간다. 그녀의 얼굴엔 호기심이 가득 차 있다)
[양씨] 사월이네 있수? (방에서 대꾸하는 소리) 나야 좀 어때?
[최씨]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며) 글쎄 밤낮 그래요. 지금도 똥물까지 토했다우! (하며 머리를 득득 긁는다) 좀 들어와요.
[양씨] (시치미를 떼며) 예--- 어서 좋아져야 할 텐데 어떻게 하누---
(하며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
(이때 우편 대밭 쪽에서 규복이가 조심스럽게 나타난다) 전보다 혈색이 창백하긴 하나 살도 쪘다 그는 물그릇을 들고 사방을 살핀 다음 부엌으로 들어간다 이때 방 안에서 김 노인이 기지개를 키며 나와 마루끝에 앉는다 물그릇에 물을 채워 나오던 규복과 김노인 시선이 마주친다 규복은 벼락 맞은 사람처럼 제자리에 서 버린다)
[김노인] 자넨 언제 들어온 머슴인가?
[구복] (말문이 막혀) 예--- 저--- 예---
[김노인] 망할 년들! 일하기 싫으니까 머슴까지 들여놓고 음 고이얀--- 것들---
(규복은 당황하여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른다. 이때 한길에 귀덕이가 나타난다. 한 손으로 피리를 불며 한 손에는 나물바구니가 들렸다. 인기척을 알아차리자 규복은 급히 우편으로 도망쳐 버린다. 김 노인은 저고리를 벗어 이를 잡는다. 그러나 눈이 어두워서 잘 안보이는 눈만 비빈다. 귀덕이가 피리를 불며 들어 서도 김노인은 모르고 있다.)
[귀덕] 할아버지! 엄마 어디 갔어?
[김노인] (딴전을 부리며) 글쎄 봄이라서 그런지 가려워 못 살겠구나.
(하며 몸을 긁는다)
[귀덕] 헷헤--- 할아버진 말귀도 못 알아듣는 바보야!
[김노인] 내가 좀 잡아라!
[귀덕] 싫어 (바구니를 토방에 내려놓고) 엄마! 엄마!
(이때 최 씨 집에서 양 씨가 나온다)
[양씨] 잘 조섭 해!(건강이 회복되도록 몸을 보살피고 병을 다스리다) 길만 가까우면 무당에게 푸닥거리나 시킬 걸! 난 가요!
(하며 문을 닫고 나온다. 그녀의 얼굴엔 비뚤어진 웃음이 서렸다) 그랬으면 그랬지! 흥! 혼자서 잘난 척하더니 꼴좋지! (하며 뜰 안으로 들어선다)
[귀덕] 엄마! 밥줘!
[양씨] 뭐 밥? 내년 뱃속엔 걸구가 들었냐? 해도 안 넘어갔는데 무슨 밥이냐! 망할 것!
(하며 소리를 지르자 김 노인도 알아차린다)
[김노인] 나도 시장해서 못 살겠다! 밥을 가져와!
[양씨] 어이구! 조부님과 손녀께서 어쩌면 저리 장단이 맞누! (혀를 차며 가까이 가서) 밥이 어디 있어요? 하루에 두 끼니 먹는 것도 다행으로 아셔야죠!
[김노인] (화를 내며) 그래 늙은이 밥 먹이는 것은 아깝고, 젊은 머슴 밥멕이는 건 장하단 말이냐?
[양씨] 아니 난데없이 머슴은 무슨 말라빠진 머슴이요? 우리가 언제 머슴을 부릴 팔자였다구!
[김노인] 늙은이 괄시한 놈치고 잘 되는 집 못 봤다. 머슴 멕일 밥이 있으면 내게 가져와! 가져오래도!
[양씨] 아니 정말 노망기가 났나? 별안간 머슴을 들먹거리고---
[귀덕] 할아버진 병신이야 힛히
[양씨] (밉살스럽게) 어이구 네년은? 일 없으면 산에 가서 칡뿌리나 캐와! 네 올케도 갔으니까!
[귀덕] 싫어! 이렇게 나물을 캐 왔는걸 (하며 바구니를 내민다.)
[양씨] (바구니를 받아 보며) 아니 이걸 나물이라고 캐왔니?
[귀덕] 나물 아니구---
[양씨] 이년아! 이게 나물이야! 응? 어디서 먹지도 못할 풀만 뜯어 와 놓구서! 어유! 뒈져 어서! (하며 귀덕의 머리채를 잡아챈다)
[귀덕] 아야아! 아야!
(이때 정임이가 곱게 단장을 하고 한길에서 내려온다. 먼길을 떠나려는지 낡은 트렁크가 들렸다. 하늘빛 인조 치마에 분홍 저고리가 한층 촌스럽게만 보인다.)
[정임] 아주머니!
[양씨] 정임이! 웬 일인가? 그렇게 곱게 차리고서--- 응? 어딜 가나?
[정임] (수줍어하며) 예--- 떠나기 전에 인사나 여쭈고 싶어서
[양씨] 그래! 역시 가는구먼 참 신랑이 부자라며?
[정임] 그저 먹고 살기엔 그만하면---
[양씨] 잘 생각했어! 정임이는 홀몸이니까 쉽게 개가할 수도 있지만.
(귀덕은 정임의 옷을 앞뒤로 돌아가며 부러워한다)
[귀덕] 시집가나 베? 흠---
[정임] 귀덕이도 잘 있어. (양씨에게) 점례오면 못 보고 간다고요.
[양씨] 그래 어서 가봐!
[정임] (밖으로 나오며) 막상 떠나가자니까 서운해요.
[양씨] 어디 가든지 서방님 잘 섬겨! 뭐니 뭐니 해도 계집은 서방을 잘 만나야 해!
(귀덕이도 따라 나온다))
[정임] 참 사월이도 좀 만나 보고 가야지
(하며 최 씨 집으로 들어간다)
[정임] (방문 앞에서) 계세요?
[최씨] (방에서) 누구요?
[양씨] 정임이가 오늘 떠난대요?
[최씨] (방문을 열고서) 정임이가? 어이구 이거 시원섭섭해서 어떻거우?
[정임] 사월이는 어때요?
(이때 사월이가 나온다 머리를 끌어 헤쳐서 한층 여위고 신경질적으로 보인다)
[정임] 사월이!
[사월] (손목을 작으며) 시집간다 간다 하더니 기어코 가는구먼!
[정임] (눈을 내리까며) 새서방 얻는다고 흉본다나??
(이 말에 최 씨와 양 씨는 서로 멋쩍며 외면한다.)
[사월] 흉보는 사람이 덜 됐지 뭐야!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홀몸으로 살 수는 없어! 정임이는 참 잘했어!
[정임] (속삭이듯) 사월이도 어서 해 버려!
[사월] (동요의 빛을 보이며) 아냐 난--- (사이) 어서 가 봐!
[정임] 응! 그럼 잘 있어!
(하며 한 길로 나간다 양 씨, 최씨, 그리고 귀덕이가 뒤를 따르며 퇴장. 멍하니 문에 기대어 선 사월이의 눈에 금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산새가 울어댄다)
[사월] 새라도 되었던들 훨훨 날아버릴 걸--- 날이 갈수록 괴롭고 무거우니---
(하며 배를 만져 본다)
(이때 산속에서 점례가 칡뿌리를 망태에다가 담아 이고 내려온다.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문에 기대어 서 있는 사월을 보자 가까이 간다)
[점례] (사무적으로) 좀 어때?
[사월] 그저 그래--- 칡을 캤어?
[점례] 심심풀이로 씹어 보겠어? (하며 조그마한 칡 토막을 골라준다.)
[사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나지막이 떠가는 정찰기의 폭음 소리))
[점례]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지?
[사월] 뭘?
[점례] 나는 못 속여! (사월의 복부를 주시하며) 애기 말이야!
[사월] 아--- (괴로운 듯 배를 가린다)
[점례]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사이)
[사월] 내가 벌을 받았나 봐 내게 애기가 무슨 소용이람 (괴로움을 참으며) 아--- 이젠 죽고만 싶어!
[점례] 죽는다고 일이 끝장이 나나?
[사월]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점례] 그이와 함께 도망을 가든지 해야지. 이대로 있다간 모든 일이 탄로 나잖아?
[사월] 왜 내가 그이와 도망을 간단 말이냐? 응? 그럼 점례 너는?
[점례] 나는 그이와 같이 살 계집이 못돼--- (하며 한숨을 내리 쉰다)
[사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점례] 난 비로소 알았어 전 남편과 같이 산 지가 6년이 되도록 애기를 못 가졌을 때 나는 남편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이번에 내가 애기를 못 가질 여자라는 걸 알았어 (한숨) 그러니까 사월이는 나보다 더---
[사월]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나는 자식은 싫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 해!
[점례] 그런 소리 말어 여자가 애기를 못 가진다는 건 병신이야! 귀덕이가 병신인 것처럼 나도 병신이라니까! (하며 울기 시작한다)
[사월] 아--- 하느님도 짓궂지!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에겐 안 주고 가지기 싫어한 사람에겐 몇이고 주다니.
[점례] 그런 소릴 하면 벌 받어
[사월] 벌? 홋호--- (히스테리컬 하게 웃는다.)
[점례] 왜 이래?
[사월] 우리에게 그만큼 벌을 줬으면 말지 이상--- (울먹거리며) 이상 더 벌을 받아야겠어? 응
[점례] 그렇지만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 것만은 빤하니까 별수 없어!
[사월] (눈빛이 벌겋게 타오르며) 한 사내를 둘이서 좋아한다는 게 잘못일까?
[점례] (고민을 깨물며) 이만저만한 잘못이 아니지! 더구나 죄를 지은 사내를 지금까지 숨겨 놓고서 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난---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
(하며 운다)
[사월] (무섭게 쏘아보며) 점례가 모르면 누가 알아?
[점례] 이제 멀지 않아 국군이 이 산을 둘러싸게 되면 그이도 어느 때고 붙잡히게 될게 아냐?
[사월] 그래? 아니 그게 사실이야? 점례?
[점례] 천왕봉에 숨어 있는 빨갱이들을 깡그리 없애 버리기 위해서 산에 불을 놓는다는 소문도 있으니
[사월] 불을? (다시 가까와지는 비행기 소리) 저렇게 갑작스리 비행기가 뜬 것도 산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소리래
[점례] 그러기에 내가 시킨 대로 진작 자수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월] (매섭게) 나 때문에 못했단 말이지?
[점례] 사월이의 탓도 없는 건 아니야---
[사월] 아니 이제 와서 내 탓이야? 응? 그래 내가 그이를 못 살게 했단 말이야?
[점례] 그렇지 그래 사월이가 나를 눈감아 줬던들 우리 두 사람은 자수를 해서 멀리 타관으로 떠났을지도 몰랐어! 그런데 사월이가 한사코
[사월] 듣기 싫어 볼장을 다 보고 나니까 내게 뒤집어 쒸울려고? 점례가 그이를 좋아했다면 나도 마찬가지였어! 나도 점례와 꼭 같은 과부였으니까--- 2년 동안을 서방 없이 살아 나온 여자였다는 건 매한가지야! 그러니 이제 와서 우리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잘하고 못하고 가 있어?
[점례] 그렇지만 우리는 이대로 있다간 다 함께 죽는 거야
[사월] 그럼 어떻게 허지?
[점례] (문득 생각이 난 듯) 사월이 우리 셋이서 도망을 칠까?
[사월] 도망친 다음은?
[점례] (말문이 막힌다)
[사월] 죽을 때까지 셋이서 같이 살겠다는 건 아니겠지?
[점례] (당황하며) 그 그야 물론 셋이서 어떻게---
[사월] (괴로와하며)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다는 거야? 이렇게 배는 불러 오르기 시작하니--- (하며 벽에다가 이마를 치며 운다. 점례는 물끄러미 그 모양을 내려다보다 말고 말없이 일어서 나온다.)
[사월] (히스테레컬하게) 점례! 우린 우린 어떻게 하면 좋아!
(그러나 점례는 입을 꼭 다물고서 천천히 걸어 나온다.. 그녀는 헛간 쪽으로 가다가 현기증을 느꼈는지 그대로 헛간 벽에 기대어 멍하니 눈을 감고 서있다. 사월은 괴로운 듯 방 안으로 들어간다. 이때 귀덕이가 천천히 나타난다. 점례를 보자 가까이 와서 선다.)
[규복] 점례 점례!
[점례] (번쩍 눈을 뜨면서) 아니 왜 여기까지 나왔어요?
[규복] 할 얘기가 있어서--- (하면서 헛간 쪽으로 끌고 간다.)
[점례] 안 돼요. 이 손을 놔요! 누가 오면 어떻게 어서요!
[규복] (표정이 굳어지며) 오면 어때?
[점례] 나 혼자 있게 내버려 둬요!
[규복] 그렇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소나 돼지 노릇을 하고만 있을 순 없잖아?
[점례]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규복] (자신을 저주하며) 울안에 갇힌 채로 가져다준 먹이나 먹고 억지로 붙여준 암컷과 자는 돼지!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되고 말았어 돼지야!
[점례] 선생님!
[규복] 이상 참을 수는 없어 난 결심을 했어!
[점례] 어떻게요?
[규복] 이제 국군들의 공비 소탕 작전이 시작된다니까 그전에 내 자신을---
[점례] 자수하겠단 말인가요?
[규복] 그 길밖에 없잖아?
[점례] 그럼 나와 사월이는 어떻게 되죠? 선생님을 의지한 우리는
[규복] 의지했다고? 거짓말 마라!
[점례] (매달리며) 가지 마세요! 안돼요
[규복] 나를 의지한 게 아니라 이용했어 2년 동안 굶주려 온 당신네들의 욕망을 내게서 채워 보려고 나를 짐승처럼 길렀어.
[점례] 그렇지만 애당초엔 제가 선생님 보고 자수하라고 권했잖아요?
[규복] 그런데 왜 지금은 말리는 거야? 응 (사이) 왜 말을 못 해!
[점례] 아! 모르겠어요 몰라!
[규복] 좋아! 이제 나 따위는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단 말이지! (하며 나가려 하자 말린다.)
[점례] 안돼! 지금 가면 안 돼요. (하며 매달린다.)
[규복] 놔요!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야 사월이도 나를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서 며칠 전부터는 그림자도 안 보이고--- 내가 죄인이라고 깔보고 있는 거야!
[점례] 선생님! 그건 아니에요 사월이는 지금 선생님의---
[규복] 내가 어쨌단 말이야?
[점례] (냉정하게 또렷한 어조로) 사월이는 애기를 가졌어요.
[규복] 응? 애기를 (사이) 아니 그럼---
(이때 비행기에서 쏘아 붓는 기관총 소리와 경폭탄 터지는 소리가 전보다 가까이서 퍼져온다.)
[규복] 이게 무슨 소리야!
[점례] 어서 들어가 숨어요. 그 얘기는 나중에 하구요 어서!
(이때 한길 쪽에 군중들이 몰려나와 천왕봉 쪽을 보며 웅성거린다.)
[점례] 어서요! 사람이 와요!
(규복, 잠시 망설이더니 급히 우편 대밭 쪽으로 사라진다. 모질게 퍼지는 기총소사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가운데 점례는 넋 잃은 사람처럼 땅 위에 쓰러진다.)
-막-
[막] 제 5막
[무대 배경]무대 전막과 같음. 전막부터 이틀 후. 저녁때 포탄 터지는 소리며 기총 쏘는 소리가 한바탕 요란스럽게 퍼붓는 가운데--- 막이 오른다 뜰 한복판에서 양 씨와 최 씨가 서로 옷소매를 걷어붙이며 다투고 있다. 두 사람을 에워싸듯 이웃 아낙 갑, 을, 귀덕,을, 그밖에 몇 사람이 둘러서서 싸움 구경을 하고 있다.)
[최씨] (삿대질을 하며) 어느 년이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대라니까
[양씨] 아니 뉘 앞에서 삿대질이야!
[최씨] 삿대질 좀 하면 어때? 글쎄 내 딸이 애기 뱄다는 소문을 퍼뜨린 년을 대면 되잖아!
[양씨] (거만하게) 못 댄다면 못 대! 몇 번 말하면 알아듣겠어?
[최씨] 정말 말 못 하겠어? (하며 위협한다)
[양씨] (빳빳이 대꾸하며) 그래 못하겠으니 어쩔 테야? 응! 산손님에게 가서 꼬아바칠 테야? 세상이 바뀌었으니까 내 목을 베라고 해 보시지! 흥 (하며 웃는다)
[최씨] 옳지! 말 한번 잘했다 이제 국군이 들어왔다고 보복을 할 셈이군! 좋아 마음대로 하래두! (악에 받쳐서) 그렇지만 경을 치기는 매일반이지 이 마을에서 산사람들에게 협력 안 한 년이 있으면 나와 보라지! 어차피 망칠 바엔 나도 다 걸고 넘어질 테니까! (옆사람들이 불안하게 동요되자 한층 신바람이 나서) 산사람들에게 양식을 안 대준 사람이 있어? 야경을 안한 사람이 있느냐 말이야! 응 게다가 이장이랍시고 충성을 바친 년은 누구지?
[양씨] 환장했나 보군
[최씨] 복도깨비가 복은 못 줘도 화는 준단 말이야! 자 어서 그년 이름을 대!
[이웃 아낙갑] (사이에 들며) 무슨 소리들이야! 지나간 일 캐내면 가물치가 용될라구 쯧쯧 요즘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있어? 우리가 언제는 제 주견대로 살아왔던가? 안 그래? (모두들 동요의 빛을 나타낸다) 왜정 시대는 어떻고 해방 후는 어떻고--- 누가 누구 잘못을 캘 필요도 없어 그래 봐야 제 낯에다가 침 뱉기지 그러니 그만들 덮어 둬요!
[최씨] 내 딸이 새파란 과부된 것만도 머리가 희게 생겼는데 난데없이 애기를 뱄다니 생사람 잡을 일이 아니유? 글쎄
[이웃 아낙을] 딸자식 가진 사람은 으례 빈총 맞기가 일쑤라우 지금 그 얘기도 공연히 누가 지어낸 얘기겠지 글쎄 이 과부 마을에서 애기를 뱄다면 누가 믿겠수? 홋호
[최씨] 그러니까 그 말을 지어낸 년이 누군가 대면 될텐데 저렇게 빳빳이 버티잖아요!
[양씨] 나보고 물을 게 아니라 자네 딸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흥
[최씨] 뭐라구?
[양씨] (참았던 화를 풀며) 그렇게 딸이 귀엽고 예쁘면 본인 보고 물어보란 말이야 한 지붕 밑에서 딸 몸이 어떤지 눈치도 못 채? 응 자네는 애기도 안 낳아 봤어?
(양씨의 말이 너무나 자신 있고 조리가 있었던지 최 씨는 잠시 말문이 막혀서 어리둥절해한다))
[이웃 아낙갑] 제발 그만들 덮어 둬요 내일 모래면 할미 소리 들을 나이에 그까짓 헛소문 가지고 싸울 게 뭐람
[최씨] (양 씨에게 다시 도전하며) 내 딸에게 물어봐서 헛소문이면 어떡 허지?
[양씨] 내 머리를 뽑아 신을 만들지!
[최씨] (다짐을 받으며) 정말이지? 가만히 있어
(하며 가려고 하자 이웃 아낙 을이 말린다.)
[이웃 아낙을] 꼭 어린애들 같군! 그런 시간 있으면 나물이나 캐요 과부끼리 사느라면 으레 헛소문이 나는 법이래두!
[최씨] 끝까지 결판을 짓고야 말걸! 이런 억울함을 당하고도 그대로 있어요? 기가 막혀서 원---
(이때 한길 좌편에서 국군 사병 두 사람이 완전무장을 하고 등장한다 모두들 불안에 떨며 한 귀퉁이로 몰려 서서 주시한다)
[사병1] 여기가 이장댁이오?
(서로들 눈치만 보고 대답이 없다)
[사병2] 누가 이장이오?
(역시 공포에 떨며 대답을 못한다)
[사병1] (최씨에게) 아주머니오?
[최씨] 아니에요 (사이 눈치를 보다가 양 씨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에요!
[사병2] 왜 알면서도 대답을 안하오?
[양씨] (굽신거리며) 예 저--- 저는 이름만 이장이지 실은 제 며느리가 다 알아서 해 왔죠 눈에 식자라도 든 사람이라고는 며느리밖에 없어서---
[사병1] 어디 갔소?
[양씨] 예 저---
(두 사병은)
[사병1] 그럼 아주머니라도 상관없으니 같이 갑시다
[양씨] (감전된 사람처럼) 예? 제 제가 (남은 사람들은 금시 비명이라도 지를 듯이 놀란다.)
[양씨] 저는 아무 죄 없어요 저는---
[사병2] 글쎄 따라와 보면 알 테니까 가요!
(양씨,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발을 동동 구른다)
[양씨] 왜 하필 나보고 가자는 거예요? 못 가요! 나는 못 가!
[사병2] 허 글쎄 누가 죽인다고 했수? 소대장이 보자니까 따라와요
[양씨] 싫어 못 간단 말이오!
[사병1] 아니 대관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사병2] 우리는 데리고 오라는 명령만 받았으니까 자 어서 일어나요
[이웃 아낙을] 귀덕엄마! 가 보세요 설마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어요?
[양씨]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최 씨를 쳐다보더니) 알았다 네년이 꼬아바쳤지?
[최씨] (무슨 영문인 줄 몰라서) 내가 꼬아바쳐?
[양씨] 그렇지 뭐야 오냐 좋아! 가지! 네가 끝내 나를 못살게 한다면 나도 가서 말하지! 누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 입이 없어서 말을 못하는 줄 아나베! 흥 좋아 (불쑥 일어나서 옷을 털며 사병들에게) 갑시다 할말이 있으니까요 (하며 앞장을 서서 나간다. 사병1,2는 서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간다.)
[귀덕] 엄마 어디 가 나도 따라갈래
[이웃 아낙을] 귀덕아!
[양씨] (돌아다보며) 귀덕아! 네 올케 오거든 곧 내려오라고 해!
[귀덕] 엄마! 나도 갈 테야 (하며 따라나서자 모두들 말린다. 양 씨가 퇴장하자 모두들 가슴을 치며 당황해한다 그러나 최 씨만은 저만치 서서 생각에 잠긴다)
[이웃 아낙갑] 무슨 일일까?
[을] 누가 또 고자질을 한 게 아니에요?
[이웃 아낙갑] 그렇지만 지난번에 국군이 나왔을 때도 지난날의 허물은 탓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잖아?
[이웃 아낙을] 하긴 그래요
(멀리서 다시 기관총 소리)
[이웃 아낙을] 귀덕아! 그렇게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올케를 불러와야지 어디 간다던??
[귀덕] 우물가에 빨래하러 갔어
[이웃 아낙갑] 그럼 어서 데리고 와! 네 어머니가 국군에게 붙잡혀갔다구 어서
[귀덕] 싫어! 엄마가 나 안 데리고 갔으니까 나도 말 안 들을래!!
[이웃 아낙을] 어유 이 등신아 말귀도 못 알아듣긴--- 어서 데리고 와! 우리 집에 오면 색 헝겊을 줄게!!
[귀덕] 정말? 그럼 곧 다녀올게요 색 헝겊 많이 줘요 힛힛 (하며 토끼처럼 뛰어나간다)
[이웃 아낙갑] (한숨) 또 걱정이 생겼구랴
[을] 뭐가요?
[갑] 저렇게 한 사람씩 불러들이기 시작하면 꼭 누가 다치고야 말지! 관에서 사람 오라 가라 하는 날엔 무슨 변통이 나지 않던가 배
[이웃 아낙을] 글쎄요.
(이때 최 씨는 서서히 자기 집으로 건너간다 총소리가 다시 요란하며 멀리 아래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군중들 "불이야 불났어" 하며 언덕 위로 올라간다)
[이웃 아낙갑] 불이 났어?
[을] 모르죠 저렇게 총을 쏘니 불도 나게 됐지뭐유
(이때 하수에서 쌀례네가 숨을 헐떡거리며 바삐 올라온다)
[이웃 아낙을] 무슨 일이 났수?
[쌀례네] 이제 빨갱이들이 영락없이 몰쌀당하게 됐어
(하며 속 시원하다는 듯 웃는다)
(군중들 다시 쌀례네를 둘러싼다)
[이웃 아낙을] 어떻게 된 일이야?
[쌀례네] 잘은 모르지만 숲이란 숲엔 불을 질러 버린대 그러면 숨을 곳이 없어질 게 아냐 아까 보니까 석유를 뿌리고는 총을 몇 방울 쏘니까 화악 하고 타오르는 게 아주 속이 시원해! (하며 옆 사람에게 자랑삼아 말한다)
[이웃 아낙갑] 속이 시원하다고? 아니 자네는 미쳤나?
[쌀례네] 허지만 이 불은 좀 다르잖아요 내 욕심 같아서는 아주 이 산을 불살라 버렸으면 좋겠어
[이웃 아낙을] 뭣이?
[쌀례네] 이제 이곳에서 살긴 지긋지긋해! 우리도 끝순이나 정임이처럼 자리를 떠야지 이런 촌구석에 백 년 있어봐야 고생문만 환하지 아---
[이웃 아낙을] 참 길에 귀덕 어머니 못 봤어?
[쌀례네] 아뇨 (모두들 웅성거리자) 왜요?
[이웃 아낙갑] 글쎄 국군에게 붙들려 갔어!
[쌀례네] 예? 아니 귀덕 어머니가 무슨 죄가 있다구
[이웃 아낙을] 사실 따지자면 죄가 없는 것도 아니지 이장을 지냈으니까
[쌀례네] 원 형님두 이장이야 대한민국의 이장이었지
[이웃 아낙을] 허지만 빨갱이들이 들어와도 했지 뭐야
[쌀례네] 그 까닭만으로 데려가지는 안 했을 거예요!
(이때부터 불은 점점 퍼지기 시작한다 우편에서 점례가 급히 내려온다 광주리에 흰 빨래가 들렸다)
[점례] (숨 가쁘게) 우리 어머니가 붙들려 갔다구요?
[이웃 아낙갑] 그러기 말야 어서 가 봐요 뭐 소대장이 불렀다니까 그저께 여기서 연설한 군인이겠지
[점례] (마루에다 빨래 광주리를 놓고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슨 일일까요? 저렇게 불길이 솟고 비행기가 지져대고--- 아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쌀례네] 나하고 같이 갈까?
[점례] 괜찮아 저 빨래나 손 봐줘! (앞치마를 풀어서 던지고) 저 아래로 내려갔어요?
[이웃 아낙을] 응! 어서 가봐! 어쩌든지 잘못되었다고 빌어 비는 죄인의 목은 못 벤다니까 응
[점례] 예 그럼 다녀올게요! (하며 바삐 비탈길을 올라서자 귀덕이가 부른다.)
[귀덕] 어디가 형님! 나도 갈래!
[점례] 집에 있어요.
[귀덕] 싫어 따라갈래
(점례는 하는 수 없이 귀덕을 데리고 퇴장한다 모두들 이 광경을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찬다)
[이웃 아낙을] 망할 것 무슨 명절인 줄 아나 부지!
[이웃 아낙갑] 그러기에 사람은 속이 차야 하고 대나무는 껍질이 차야 쓸모가 있다니까
[쌀례네] 어유 저 불 좀 봐 (하며 감탄하는 표정이다)
(이때 최 씨,, 집에서 모녀가 다투는 소리가 왁자지껄하더니 마침내 최 씨가 문을 열고 나온다. 눈빛에 살기가 등등하다 사월이는 문지방에 기댄다.)
[최씨] 그래 천지간에 하나밖에 없는 이 에미를 속여? 응? 이년아! 하고 많은 사람들 두고 에미를 속일 게 뭐냐?
[사월] 어머니 이제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최씨] 아니 도대체 어느 놈의 씨냐? 그놈 이름을 대라 너를 이 꼴로 만든 그놈이 누구야?
(이 사이에 우편에 모인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며 웅성거린다)
[사월] (담담하게) 말할 수 없다니까요
[최씨] 말할 수 없어? 아니 그놈이 만석꾼의 아들이냐? 정승댁 대감이냐?
(최 씨는)
[최씨] 어서 말해! 이제 이렇게 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사월] (말없이 견디고 참는다)
[쌀례네] (뛰어가면서 말리며) 아주머니 이 손을 놔요! 오랫동안 앓고 난 사람에게 약은 못 줄망정 매질을 할 거야 없잖아요? 자 놔요!
[최씨] 저리 비켜! 이건 내 딸이 아니라 원수라니까
[쌀례네] 참으세요 앓는 사람을 이렇게
[최씨] (쌀례네의 힘에 못 이겨 저만치 밀려나가며) 이년아! 누가 애를 배랬어? 응? 어느 놈의 씨인데 이 꼴이 되어서 아이구---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해 땅바닥에 주저 앉아 버린다) 아이구 이년아--- 아이구
(하며 슬피 울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월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벽에 기대어 앉아 있을 뿐이다))
[쌀례네] 사월이! 어서 안에 들어가 누워 있어! 어서
[사월] 괜찮아!
[쌀례네] 글쎄 어서 들어가! (하며 억지로 부축하여 방으로 들어민 다음 방문을 닫는다)
[최씨] (울음 섞인 소리) 설마가 사람 잡는 다더니 정말 나를 두고 하는 말이지 내 딸을 화냥년으로 만들고 내 신세를 이 꼴로---
(하며 땅을 친다 동네 사람이 와서 최 씨를 부축하여 양 씨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웃 아낙갑] 참아요! 참는 수밖에 없어 우린 이날 이때까지 밤낮 참고만 살아왔으니까 잊어버려
[최씨] 어이구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어떻게 잊어버려요 나 물 좀 줘 물
(최씨의 말은 어떤 때는 노랫가락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우는 소리 같기도 들린다. 최 씨는 물을 마시고 나서 다시 낮은 곡성을 올린다)
(이때 좌편 한길에 양 씨,, 점례, 사병1,2, 그리고 귀덕이가 쫄랑 거리며 따라온다. 사병의 한 사람은 석유통을 들었다)
[이웃 아낙을] 귀덕 어머니가 돌아오는구먼
(모두들 반가워서 몰려온다 그러나 양 씨와 점례의 얼굴엔 각각 저마다의 근심이 가득 찼다))
[이웃 아낙갑] 또 무슨 일이야?
[양씨] (시무룩해지며)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저 대밭이라고
[이웃 아낙을] 아니 대밭이라니?
[양씨] 글쎄 저 뒷산에 있는 우리 대밭에 불을 지르겠으니 그리 알라는 거야
[쌀례네] 그건 또 왜요?
[사병1] 여러 아주머니들도 잘 아시겠지만 앞으로 대대적으로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서는 공비들이 숨을 수 없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려다볼 때 환히 보일 수 있어야만이
(군중들은 그 참뜻을 있다는 듯 수긍을 한다)
[양씨] 그렇지만 저 대밭만은 안돼요. 우리 조상 대대로 지켜 내려온 대밭을 내 눈앞에서 불사르다니 그게 될 말이오?차라리 나를 죽이고 나서 해요.
[사병을] (딱하다는 듯) 몇 차례 설명하면 알겠소? 쳇! 자 가세
(두 사람이 우편 헛간 쪽으로 가려고 하자 사병1에게 점례가 길을 가로막는다))
[점례] 가까이 가서는 안돼요.
[사병 1]?
[점례] (빌면서) 그 대밭만은 태우지 말아요. 그걸 잃어버리면 우린 다 죽어요. 우리 식구를 살리려거든 대밭을 살려 주세요.
(점례의 진실한 태도에 모두들 절박감을 느낀다.)
[사병 1]!
[점례] 제발 소원이에요 (하며 매달리자 양 씨는 사병 2에게 매달린다)
[양씨] 여보시오 당신네 집에선 제사도 조상도 모르오? 제발 우리 사정 좀 봐줘요. 내 아들이 팔아서 장사하겠다고 조를 때도 내가 싫다고 우긴 대밭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제발
[사병 2]휙 뿌리치며) 어서 가 (하며 급히 뛰어가자 사병도 급히 뒤를 따른다)
[점례] (미칠 듯이) 안 돼요! 거기 들어가면 안 돼요!
[양씨] 아이고 우리 집이 망한다! 우리 집이
(하며 덤비자 옆에서 들 말린다.)
(잠시 후 총소리가 연달아 일어나자 대나무에 불붙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퍼져 나온다. 점례와 양 씨는 넋 나간 사람처럼 말없이 뒤 걸음 쳐 나간다. 거기엔 절망이라기보다 공허감이 더 짙다.)
[쌀례네] 정말 아까운 대밭이었는데
[이웃 아낙을] 이게 얼마 있으면 죽순이 한창인데 아깝지
[이웃 아낙갑] 어이구 우리 살림은 하나씩 하나씩 없어지기만 하지 느는 것은 나이뿐이니
(하늘엔 불꽃이 모란보다 더 곱게 물들어 간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인다. 훨훨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그저 혀만 차고 있는 허탈한 얼굴들)
[점례] (갑자기 일어서며) 선생님! 선생님 안 돼요!
(하며 뛰어가려 하자 몇 사람이 붙들고 말린다.)
[쌀레네] 참어! 점례, 정신을 차리라니까
[점례] 나도 같이 타 죽을 테야 대밭으로 보내줘
[양씨] (이제 지칠 대로 지쳐서) 아이구! 이 자식아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네 말대로 팔아나 버릴 것을
(이때 "저놈 잡아라!" "누구야" 하며 외치는 군인들의 목소리 그와 함께 총소리가 연달아 일어난다. 모두들 겁에 질려서 오른편으로 몰려간다 점례는 그 자리에 서 있다.)
[쌀례네] 무슨 소리야?
[이웃 아낙을] 누가 있었나 부지?
(이때 방에서 김 노인이 나온다)
[김노인] 오늘은 귀가 신통히도 잘 들리는구나---
(이때 사병1와 2가 총에 맞아 의식을 잃은 규복을 질질 끌고 나온다 군중들 사이에 새로운 파동이 퍼진다 규복을 무대 한복판에 눕힌다음 사병은 군중을 휘둘러본다)
[사병1] 이 사람이 누구요?
(아무도 대답이 없다.)
[사병을] 이 마을 사람이 아니오?
[이웃 아낙갑] 우리 동네에서 사내 냄새가 없어진 지는 벌써 이태나 된걸요.
(사병, 두 사람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뭐라고 소근거린다.)
[이웃 아낙을] 정말 귀신 곡할 일이지? 그 대밭 속에 사내가 숨어 있다니?
[이웃 아낙갑] 혹시 산에서 내려온 사람 아닐까?
(사병1 급히 한길 쪽으로 퇴장한다)
[사병을] 대밭에다 파고 오랫동안 살아온 흔적이 있던데 아무도 모른단 말이오?
(서로가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점례는 멍하니 내려다보고만 있다.)
[양씨] 우리 대밭에 사내가? (점례에게) 너도 못 봤지?
[점례] (고개만 저을 뿐 대답이 없다.)
[쌀례네] 이상한 일이지 (하다 말고 양 씨에게 눈짓을 하자 그것이 무슨 전염병처럼 퍼져 최 씨에게 집중된다. 아까부터 반신반의 상태에 있던 최 씨가 자기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있음을 의식하자 화를 낸다.)
[최 씨] 왜 나만 보고 있어? (하며) 옳지 내 딸이 이 사내하고 정을 통했단 말이지? 좋아! 그럼 내가 데리고 나와서 담판을 지을 테니
(하며 사월을 부르며 자기 집으로 간다 이때 가까이 와서 시체를 들여다본 김 노인이 무릎을 탁 치며 소리를 지른다.)
[김노인] 이놈은 바로 새로 들어온 머슴이구먼!
[일동] (약속이나 한 듯)) 머슴?
[양씨] (큰 소리로) 아버님 아는 사람이에요?
[김노인] 우리 집 머슴 아니냐?
[양씨] 노망했어 노망! 우리가 머슴 부릴 팔자예요?
(일동 크게 웃는다 이때 최 씨의 비명 소리가 들리며 내다본다.)
[최씨] 사람 살려요 우리 딸이 우리 딸이
[쌀례네] 사월이가?
(군중을 우하니 그쪽으로 몰려간다 최 씨의 통곡 소리가 높아가고 애기 우는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이웃 아낙갑] 양잿물을 먹었지? 저런
(점례는 말없이 규복의 시체 옆에 다가와서 손발을 반듯이 제자리에 놓는다.)
[사병] 손을 대지 말아요.
[점례] (거의 무표정하게) 내가 손을 댄다고 시체가 되살아나서 말을 하진 않을 거예요 모든 것은 하진 않을 거예요. 모든 것은 재로 돌아가 버렸으니까.
(하며 서서히 일어선다.)
(하늘이 피보다 더 붉게 타오르자 규복의 얼굴에도 반영이 되어 한결 처참하게 보인다.)
(멀리서 까치 우는 소리 마루 끝에 앉아있던 김 노인이 또 밥을 재촉한다)
[김노인] 밥은 아직 멀었냐? 오늘은 귀가 터진 것 같구나
(최 씨의 곡성이 높아간다)
(막)
핵심 정리
- 갈래: 장막극(5막), 비극, 사실주의극
- 배경: 6·25 전쟁 중, 소백산맥 줄기의 어느 촌락(과부촌)
- 성격: 사실적, 고발적
- 제재:탈출 공비와 산골 여인들의 비극적인 사랑
- 주제: 이념의 허구성,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빚은 비극과 인간의 본원적 욕망
- 특징:
① 사실주의 희곡의 전형을 보여 줌
② 이념의 대립이나 분단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유지함
③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인간의 본질과 존엄성을 표현함
④ 인간의 보편적 본능 앞에서 이념은 허위에 불과함을 드러냄
⑤ 전쟁의 잔인성과 인간의 애욕이라는 이중적 사건 구조로 이루어짐
- 출전:「현대문학」(1963)
- 구성
- 제1막 : 양 씨와 최 씨가 공출해야 하는 곡식의 양 때문에 다툰다. 양 씨의 아들은 우익쪽 사람인데 반동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으며, 최 씨의 사위는 좌익쪽 사람인데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 제2막 : 과부들만 사는 마을에 공비들의 소굴에서 탈출한 규복이라는 전직 교사 출신의 남자가 숨어 들어온다. 양씨의 며느리인 점례는 그를 숨겨 주고 과부의 욕정을 채운다.
- 제3막 : 젊은 과부인 최씨의 딸 사월이가 규복과 점례의 만남을 눈치채고, 강제로 규복을 가로채다시피 하여 욕정을 채운다.
- 제4막 : 국군이 마을에 들어와서 공비를 토벌하기 시작하고, 마을에는 사월이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나돈다.
- 제5막 : 공비 토벌 작전으로 국군이 대나무 밭에 불을 지르고, 규복은 그 과정에서 총에 맞아 죽고 사월이도 양잿물을 먹고 자살한다.
“산불”은 ‘도입부–상승부–정점–하강부–파국’이라는 극의 구성 단계가 비교적 명확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대단원에서는 극의 중심 갈등축이 해결되고 인물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 작품에서는 대밭이 불에 타 버리는 것을 통해 중심인물의 운명이 파국을 맞게 된다. 규복은 잠복 중인 빨치산으로 오인받아 죽고, 사월은 자살하고 만다. 점례는 둘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속죄를 위하여 삭발한 뒤 떠나게 된다. 파국에서는 비극적 결말을 통해 이념의 잔혹성과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하고 있다.
- 등장인물
-점례:남편이 반동으로 몰려 죽어 과부가 된 인물로, 양 씨의 며느리이다. 규복을 대밭에 숨겨 주고 돌보면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해소한다. 그러나 규복을 사이에 두고 사월과 삼각관계에 빠지면서 갈등을 겪는다.
-사월:최 씨의 딸로, 남편이 빨갱이로 몰려 죽어서 과부가 된 인물이다. 규복과 점례의 관계를 눈치챈 후, 점례를 협박하여 자신도 규복을 상대로 욕망을 해소한다. 결국 규복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규복이 총에 맞아 죽자 자신도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한다.
-규복: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빨치산에서 탈출하여 마을로 내려와 점례의 도움으로 대나무 밭에 은신한다. 점례와 사월의 애욕의 노예로 지내다가 공비 소탕 작전으로 인해 죽게 된다.
-양 씨와 최씨:점례의 시어머니인 양씨와 사월의 어머니인 최씨는 이념적 적대감으로 사사건건 대립한다.
이 작품은 인물 설정에서 정교함을 드러낸다. 먼저 공산당에 의해 아들이 죽은 양씨와 국군에 의해 사위를 잃은 최 씨가 일상생활에서 대립하며 갈등을 일으키는데,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그 근본적인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은 규복을 둘러싼 양 씨의 며느리인 점례와 최 씨의 딸인 사월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지는데, 이들의 갈등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작품은 이와 같은 중심인물 외에 주변 인물도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노망난 김 노인과 귀덕이 그 대표 격이다. 김 노인은 노망이 난 사람으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시도 때도 없이 밥을 달라고 하는데, 이러한 김 노인의 행동은 극적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면서 전쟁으로 인하여 제대로 먹고살 수 없는 상황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귀덕이는 전쟁으로 인해 등신이 되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 전쟁의 참회를 딛고 살아가야만 하는 민중들의 아픔을 보여 주고 있다.
줄거리
소백산맥의 어느 산골에 노인 하나와 여인네들만 사는 마을이 있다. 전쟁으로 인해 마을 남자들 대부분이 죽거나 끌려갔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점례는 빨치산에서 탈출하여 마을로 온 규복을 몰래 자기네 대밭에 숨겨 주고 규복과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곧 사월에게 발각되고, 사월은 점례를 협박한다. 이에 점례는 규복을 사월에게 양보하고 갈등한다. 이후 사월은 규복의 아이를 갖게 되고, 마을에는 공비 소탕을 위해 국군이 들어온다. 국군은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 산에다 불을 지르고 급기야 규복이 숨어 있는 마을 대밭에까지 불을 지른다. 결국 규복은 국군의 총에 맞아 죽고 사월은 자살한다.
‘산불’은 사실주의 희곡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으로,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한 마을에 축약시킨 사건과 인간의 원초적인 애욕과 관련된 사건을 극히 자연스럽게 뒤섞음으로써 내용을 밀도 있게 구성하고 있다.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마을은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남자들이 죽거나 끌려가고 없는 상태이다. 이곳에 한 남자가 나타나 반목 중인 두 여인 양 씨와 최 씨의 갈등을 증폭시킨다. 그의 존재는 전쟁 중에 억압되고 있는 여성들의 본원적 욕망을 드러내는 구실을 하고 있다. 전쟁의 비인간성의 극점을 보여 주는 것은, 국군이 공비 토벌 작전의 일환으로 대나무밭에 불을 질러 규복이 타 죽게 되는 결말의 비극성이다. 공산주의자도 아니면서 우연하게 빨치산이 된 소학교 교사 출신 규복의 비참한 죽음은 결국 전쟁의 잔인함과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고발하는 휴머니즘적인 작가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대나무 밭'의 이중적 의미
대나무 밭 | 양씨네의 미래를 위한 살림 밑천 | 공비 토벌 작전의 일환으로 불 지름 | 삶의 터전 파괴 |
두 여자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남자의 은신처 | 본원적 욕망 억압 |
- ‘대나무 밭’의 다양한 의미
‘대나무 밭’은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곳에 난 ‘산불’도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국군들 |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불을 질러야 하는 장소 |
점례네 식구와 마을 사람들 | 죽순을 채취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를 지닌 대상 |
점례, 사월 | 숨기고 싶은 그 무엇이 있는 대상으로, 규복과 은밀히 애정을 나누던 곳 |
규복 |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은신처 |
차범석(車凡錫, 1924년 11월 15일 ~ 2006년 6월 6일)
대한민국의 극작가, 연극 연출가이다. 전라남도 목포 출생이다. 1948년 연희대학교 영문과를 나온 후, 목포 북교 국민학교, 목포중학교, 덕성여자고등학교의 교사를 지냈고,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밀주》가 가작으로 입선하면서 등단했다,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귀향》이 당선되었다.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및 한국예술문화총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고 청주대학교 연극영화과 전임교수로서 강단에 섰으며, 극단 ‘산하’ 대표였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밀주'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차범석은, 1950년대를 사회성이 강한 전통적 사실주의 극에 담아내었다.사실주의는 연극이 사회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연극관을 뒷받침해 주는 창작 원리이며, 그의 사실주의 극은 1950년대의 현실에 대응하는 정신이자 방법이었다.
그는 등단 이후, 1960년에 이르는 동안에만도 10여 편의 사실주의 극을 창작하였다. 1950년대 작품들은 전쟁을 겪으면서 받은 상처와 전쟁의 파괴력을 전후 사회의 모순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으며, 인간에게 소외와 좌절을 가져다준 전후 사회의 변화와 그 모순을 비판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 극복의 대안으로 전통적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한국 극작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쓰고 지은 작가이고, 연출가로서도 큰 역할을 했으며, 사실주의 연극의 확립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해와 감상
“산불”은 소백산맥 줄기에 위치한 촌락을 배경으로, 6·25 전쟁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그린 장막 희곡이다. 외부와 격리된 산촌에서 살아가는 여인들과 불구적인 노인의 삶을 통해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과 이념의 허구성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동족 분단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6·25 전쟁으로 인해 희망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의 애욕을 표현한 사실주의 극이다.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남자들이 죽거나 끌려가고 여인네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마을에 숨어 들어온 공비와, 그를 숨겨 두고 벌이는 두 여인의 갈등이 극을 진행해 가는 중심축이다. 여기에 국군이 공비 토벌을 위해 진입하고 대나무밭을 불태움으로써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때 난 산불은 전쟁의 비극성을 선명하게 보여 주는 상징적인 소재이다. 두 여자의 욕망을 해소해 주던 한 남자의 은신처이기도 한 대밭이 산불로 인해서 사라지게 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희망과 욕망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한 마을의 비극이지만 우리 민족 전체의 비극으로 일반화하여 이해할 수 있다.
차범석의 ‘산불’이 사실주의 극의 최고봉이라는 찬사까지 듣는 것은, 바로 극 구성과 인물 설정에서 작가의 테크닉이 단지 기교에 머물지 않고, 삶의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특히 주변적 인물의 묘사를 통해 나타난다. 그중에서 양 씨와 최 씨를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이데올로기를 가졌기 때문에 희생된 아들을 두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앙숙의 사이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을 그들의 잘못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시대와 역사의 탓으로 보고 있다. p부락을 장악하는 군대가 누구냐에 따라, p부락 주민을 ‘공산주의’나 ‘반동’으로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차범석은 이데올로기 분열과 분단, 동족 전쟁의 격동기에 있어서 한국인의 정신적 방황과 그로 인한 엄청난 파국을 민족의 불행으로 아주 리얼하게 그렸던 것이다.
- 무천 극예술 학회, “차범석 희곡 연구”, 2003
1962년 국립 극단에서 공연되었으며 1963년 5월 “현대문학”에 게재된 차범석의 장막극. 전쟁이 남긴 상흔을 수난의 민족사적 입장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전쟁으로 남자들이 거의 끌려나간 한 산촌에 인민군 낙오병이 찾아오고, 그를 은닉시켜 준 여인과 그 비밀을 이용해 남자를 공유하려는 다른 과부 간의 갈등이 그려진다. 그 인민군 낙오병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 친구의 유혹으로 일시 좌경하였던 인물로서 공산주의의 비인간성과 허위에 환멸을 느끼고 탈출한 경우에 해당한다. 작가는 이데올로기와 동족상잔의 희생물로서 그를 등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비극적인 희생은 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어서,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마을의 모든 남자들, 또 마을에 남아서 남자들의 몫까지 맡아 힘든 생존을 지탱해야 하는 숱한 과부들의 삶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낙오된 인민군의 대사를 통해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무의미함이 폭로되고, 빈곤과 무기력은 물론 부역죄와 밀고가 횡행하는 살벌한 마을 분위기를 통해 전쟁의 참상이 제시된다.
- 권영민, “한국 현대 문학 대사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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