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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전문

황석영 '삼포 가는 길' 전문

by 열공햐 2021.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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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 가는 길

황석영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 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감독: 이만희, 출연자: 김진규, 백일섭, 문숙, 제작사: 블루키노, 레이블: 한국영상자료원, 출시일: 2009년12월24일

  그가 넉 달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한참 추수기에 이르러 있었고 이미 공사는 막판이었다. 곧 겨울이 오게 되면 공사가 새봄으로 연기될 테고 오래 머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예상했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현장 사무소가 사흘 전에 문을 닫았고, 영달이는 밥집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삼포가는 길(1975) / The Road to Sampo

  누군가 밭고랑을 지나 걸어오고 있었다. 해가 떠서 음지와 양지의 구분이 생기자 언덕의 그림자나 숲의 그늘로 가려진 곳에서는 언 흙이 부서지는 버석이는 소리가 들렸으나 해가 내려쪼인 곳은 녹기 시작하여 붉은 흙이 질척해 보였다. 다가오는 사람이 숲 그늘을 벗어났는데 신발 끝에 벌겋게 붙어 올라온 진흙 뭉치가 걸을 때마다 뒤로 몇 점씩 흩어지고 있었다. 그는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영달이 쪽을 보면서 왔다. 그는 키가 훌쩍 크고 영달이는 작달막했다. 그는 팽팽하게 불러 오른 맹꽁이 배낭을 한쪽 어깨에 느슨히 걸쳐 메고 머리에는 개털 모자를 귀까지 가려 쓰고 있었다. 검게 물들인 야전잠바의 깃 속에 턱이 반 남아 파묻혀서 누군지 쌍통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몇 걸음 남겨 놓고 서더니 털모자의 챙을 이마빡에 붙도록 척 올리면서 말했다.

 

  “천씨네 집에 기시던 양반이군.”

 

  영달이도 낯이 익은 서른 댓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공사장이나 마을 어귀의 주막에서 가끔 지나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아까 존 구경 했시다.”

 

  그는 털모자를 잠근 단추를 여느라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고 나서 비행사처럼 양쪽 뺨으로 귀가리개를 늘어뜨리면서 빙긋 웃었다.

 

  “천가란 사람, 거품을 물구 마누라를 개 패듯 때려잡던데.”

 

  영달이는 그를 쏘아보며 우물거렸다.

 

  “내...... 그런 촌놈은 참.”

 

  “거 병신 안 됐는지 몰라, 머리채를 질질 끌구 마당에 나와선 차구 짓밟구...... 야 그 사람 환장한 모양이더군.”

 

  이건 누굴 엿 먹이느라구 수작질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불끈했지만 영달이는 애써 참으며 담뱃불이 손가락 끝에 닿도록 쭈욱 빨아 넘겼다.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불 좀 빌립시다.”

  “버리슈.”

  담배 꽁초를 건네주며 영달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긴 창피한 노릇이었다. 밥값을 떼고 달아나서가 아니라, 역에 나갔던 천가 놈이 예상외로 이른 시각인 다섯 시쯤 돌아왔고 현장에서 덜미를 잡혔던 것이었다. 그는 옷만 간신히 추스르고 나와서 천가가 분풀이로 청주댁을 후려 패는 동안 방아실에 숨어 있었다. 영달이는 변명 삼아 혼잣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계집 탓할 거 있수, 사내 잘못이지.” 

 

  “시골 아낙네치곤 드물게 날씬합디다. 모두들 발랑 까졌다구 하지만서두.”

 

  “여자야 그만이었죠. 처녀 적에 군용차두 탔답니다. 고생 많이 한 여자요.”

 

  “바가지한테 세금두 내구, 거기두 줬겠구만.”

 

  “뭐요? 아니 이 양반이......”

 

  사내가 입김을 길게 내뿜으며 껄껄 웃어제꼈다.

 

  “거 왜 그러시나. 아, 재미 본 게 댁뿐인 줄 아쇼? 오다가다 만난 계집에 너무 일심 품지 마셔.”

 

  녀석의 말버릇이 시종 그렇게 나오니 드러내 놓고 화를 내기도 뭣해서 영달이는 픽 웃고 말았다. 개피떡이나 인절미를 전방으로 호송되는 군인들께 팔았다는 것인데 딴은 열차를 타며 사내들 틈을 누비던 계집이 살림을 한답시고 들어앉아 절름발이 천가 여편네 노릇을 하려니 따분했을 것이었다. 공사장 인부들이나 떠돌이 장사치를 끌어들여 하숙도 치고 밥도 파는 사람인데, 사내 재미까지 보려는 눈치였다. 영달이 눈에 청주댁이 예사로 보였을 리 만무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곱게 치떠서 흘기는 눈길하며, 밤이면 문밖에 나가 앉아 하염없이 불러대는 <흑산도 아가씨>라든가, 어쨌든 나중엔 거의 환장할 지경이었다.

  “얼마나 있었소?”

 

  사내가 물었다.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보니 그리 흉악한 몰골도 아니었고, 우선 그 시원시원한 태도가 은근히 밉질 않다고 영달이는 생각했다. 그가 자기보다는 댓 살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 바람 부는 겨울 들판에 척 걸터앉아서도 만사태평인 꼴이었다. 영달이는 처음보다는 경계하지 않고 대답했다.

 

  “넉 달 있었소. 그런데 노형은 어디루 가쇼?”

 

  “삼포에 갈까 하오.”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용히 말했다. 영달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방향 잘못 잡았수. 거긴 벽지나 다름없잖소. 이런 겨울철에.”

 

  “내 고향이오.”

 

  사내가 목장갑 낀 손으로 코 밑을 쓱 훔쳐냈다. 그는 벌써 들판 저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달이와는 전혀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그는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영달이는 또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길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 집에 가는군요.”

 

  사내가 일어나 맹꽁이 배낭을 한쪽 어깨에다 걸쳐 매면서 영달이에게 물었다.

 

  “어디 무슨 일자리 찾아가쇼?”

 

  “댁은 오라는 데가 있어서 여기 왔었소? 언제나 마찬가지죠.”

 

  “자, 난 이제 가 봐야겠는걸.”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척이는 둑길을 향해 올라갔다. 그가 둑 위로 올라서더니 배낭을 다른 편 어깨 위로 바꾸어 매고는 다시 하반신부터 차례로 개털 모자 끝까지 둑 너머로 사라졌다. 영달이는 어디로 향하겠다는 별 뾰죽한 생각도 나지 않았고, 동행도 없이 길을 갈 일이 아득했다. 가다가 도중에 헤어지게 되더라도 우선은 말동무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그는 멍청히 섰다가 잰걸음으로 사내의 뒤를 따랐다. 영달이는 둑 위로 뛰어올라 갔다. 사내의 걸음이 무척 빨라서 벌써 차도로 나가는 샛길에 접어들어 있었다. 차도 양쪽에 대빗자루를 거꾸로 박아 놓은 듯한 앙상한 포플라들이 줄을 지어 섰는 게 보였다. 그는 둑 아래로 달려 내려가며 사내를 불렀다.

 

  “여보쇼, 노형!”

 

  그가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보고 나서 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영달이는 달려가서 그 뒤편에 따라붙어 헐떡이면서

 

  “같이 갑시다, 나두 월출리까진 같은 방향인데.......”

 

  했는데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영달이는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말했다.

 

  “젠장, 이런 겨울은 처음이오. 작년 이맘때는 좋았지요. 월 삼천 원짜리 방에서 작부랑 살림을 했으니까. 엄동설한에 정말 갈데없이 빳빳하게 됐는데요.”

 

  “우린 습관이 되어 놔서.”

 

  사내가 말했다.

 

  “삼포가 여기서 몇 린 줄 아쇼? 좌우간 바닷가까지만도 몇백 리 길이요. 거기서 또 배를 타야 해요.”

 

  “몇 년 만입니까?”

 

  “십 년이 넘었지. 가 봤자...... 아는 이두 없을 거요.”

 

  “그럼 뭣하러 가쇼?”

 

  “그냥...... 나이 드니까, 가보구 싶어서.”

 

  그들은 차도로 들어섰다. 자갈과 진흙으로 다져진 길이 그런대로 걷기에 편했다. 영달이는 시린 손을 잠바 호주머니에 처박고 연방 꼼지락거렸다.

 

  “어이 육실허게는 춥네. 바람만 안 불면 좀 낫겠는데.”

 

  사내는 별로 추위를 타지 않았는데, 털모자와 야전잠바로 단단히 무장한 탓도 있겠지만 원체가 혈색이 건강해 보였다. 사내가 처음으로 다정하게 영달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침은 자셨소?”

 

  “웬걸요.”

 

  영달이가 열적게 웃었다.

 

  “새벽에 몸만 간신히 빠져나온 셈인데.......”

 

  “나두 못 먹었소. 찬샘까진 가야 밥술이라두 먹게 될 거요. 진작에 떴을걸. 이젠 겨울에 움직일 생각이 안 납디다.”

 

  “인사 늦었네요. 나 노영달이라구 합니다.”

 

  “나는 정가요.”

 

  “우리두 기술이 좀 있어 놔서 일자리만 잡으면 별 걱정 없지요.”

 

  영달이가 정씨에게 빌붙지 않을 뜻을 비췄다.

 

  “알고 있소, 착암기* 잡지 않았소? 우리넨, 목공에 용접에 구두까지 수선할 줄 압니다.”

 

*광산이나 토목 공사에서 바위에 구멍을 뚫는 기계

 

  “야 되게 많네. 정말 든든하시겠구만.”

 

  “십 년이 넘었다니까.”

 

  “그래도 어디서 그런 걸 배웁니까?”

 

  “다 좋은 데서 가르치고 내보내는 집이 있지.”

 

  “나두 그런 데나 들어갔으면 좋겠네.”

 

  정씨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두 쉽지. 하지만 집이 워낙에 커서 말요.”

 

  “큰집.......”

 

  하다 말고 영달이는 정씨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씨는 고개를 밑으로 숙인 채 묵묵히 걷고 있었다. 언덕을 넘어섰다. 길이 내리막이 되면서 강변을 따라서 먼 산을 돌아 나간 모양이 아득하게 보였다. 인가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황량한 들판이었다. 마른 갈대밭이 헝클어진 채 휘청대고 있었고 강 건너 곳곳에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정씨가 말했다.

 

  “저 산을 넘어야 찬샘골인데. 강을 질러가는 게 빠르겠군.”

 

  “단단히 얼었을까.”

 

  강물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얼음이 녹았다가 다시 얼곤 해서 우툴두툴한 표면이 그리 미끄럽지는 않았다. 바람이 불어, 깨어진 살얼음 조각들을 날려 그들의 얼굴을 따갑게 때렸다.

 

  “차라리, 저쪽 다릿목에서 버스나 기다릴 걸 잘못했나 봐요.”

 

  숨을 헉헉 들이키던 영달이가 투덜대자 정씨가 말했다.

 

  “자주 끊겨서 언제 올지도 모르오. 그보다두 현금을 아껴야지. 굶어두 돈 있으면 든든하니까.”

 

  “하긴 그래요.”

 

  “월출 가면 남행열차를 탈 수는 있소. 거기서 기차 탈려오?”

 

  “뭐..... 돼가는대루. 그런데 삼포는 어느 쪽입니까?”

 

  정씨가 막연하게 남쪽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남쪽 끝이오.”

 

  “사람이 많이 사나요, 삼포라는 데는?”

 

  “한 열 집 살까? 정말 아름다운 섬이오. 비옥한 땅은 남아돌아 가구, 고기두 얼마든지 잡을 수 있구 말이지.”

 

  영달이가 얼음 위로 미끄럼을 지치면서 말했다.

 

  “야아 그럼, 거기 가서 아주 말뚝을 박구 살아 버렸으면 좋겠네.”

 

  “조오치, 하지만 댁은 안 될걸.”

 

  “어째서요.”

 

  “타관 사람이니까.”

 

  그들은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눈이 올 거 같군. 길 가기 힘들어지겠소.”

 

  정씨가 회색으로 흐려 가는 하늘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산등성이로 올라서자 아래쪽에 작은 마을의 집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가물거리는 지붕 위로 간신히 알아볼 만큼 가느다란 연기가 엷게 퍼져 흐르고 있었다. 교회의 종탑도 보였고 학교 운동장도 보였다. 기다란 철책과 철조망이 연이어져 마을 뒤의 온 들판을 둘러싸고 있는 것도 보였다. 군대의 주둔지인 듯했는데, 마을은 마치 그 철책의 끝에 간신히 매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읍내로 들어갔다. 다과점도 있었고, 극장, 다방, 당구장, 만물상점 그리고 주점이 장터 주변에 여러 채 붙어 있었다. 거리는 아침이라서 아직 조용했다. 그들은 어느 읍내에나 있는 서울 식당이란 주점으로 들어갔다. 한 뚱뚱한 여자가 큰 솥에다 우거지국을 끓이고 있었고 주인인 듯한 사내와 동네 청년 둘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서울 식당 주점에서 주인 사내와 동네 청년 둘이 떠들고 있다.

 

  “나는 전연 눈치를 못 챘다구, 옷을 한 가지씩 빼어다 따루 보따리를 싸 놨던 모양이라.”

 

  “새벽에 동네를 빠져나간 게 틀림없습니다.”

 

  “어젯밤에 윤하사하구 긴밤을 잔다구 그래서, 뒷방에서 늦잠자는 줄 알았지 뭔가.”

 

  “새벽에 윤하사가 부대루 들어가자마자 튄 겁니다.”

 

  “옷값에 약값에 식비에...... 돈이 보통 들어간 줄 아나, 빚만 해두 자그마치 오만 원이거든.”

 

  영달이와 정씨가 자리에 앉자 그들은 잠깐 얘기를 멈추고 두 낯선 사람들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영달이는 연탄난로 위에 두 손을 내려뜨리고 비벼대면서 불을 쪼였다. 정씨가 털모자를 벗으면서 말했다.

 

  “국밥 둘만 말아 주쇼.”

 

  “네, 좀 늦어져두 별일 없겠죠?”

 

  뚱뚱한 여자가 국솥에서 얼굴을 들고 미리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양해를 구했다.

 

  “좌우간 맛있게만 말아 주쇼.”

 

  여자가 국자를 요란하게 놓고는 한숨을 내리쉬었다.

 

  “개쌍년 같으니!”

 

  정씨도 영달이처럼 난로를 통째로 껴안을 듯이 바싹 다가앉아서 여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색시가 도망을 쳤지 뭐예요. 그래서 불도 꺼졌고, 국거리도 없어서 인제 막 시작을 했답니다.”

 

  하고 나서 여자가 남자들에게 외쳤다.

 

  “아니 근데 당신들은 뭘 앉아서 콩이네 팥이네 하구 있는 거에요? 냉큼 가서 잡아오지 못하구선, 얼마 달아나지 못했을 테니 따라가서 머리채를 끌구 와요.”

 

  주인 남자가 주눅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필요 없네. 아무래도 월출서 기차를 탈 테니까 정거장 목만 지키면 된다구.”

 

  “그럼 자전거 타구 빨리 가서 기다려요.”

 

  “이거 원 날씨가 이렇게 추워서야.”

 

  “무슨 얘기예요, 그 백화라는 년이 돈 오만 원이란 말요.”

 

  마을 청년이 끼어들었다.

 

  “서울식당이 원래 백화 땜에 호가 났던 거 아닙니까. 그 애가 장사는 그만이었죠.”

 

  “군인들이 백화라면, 군화까지 팔아서라두 술을 마실 정도였으니까.”

 

  뚱뚱이 여자가 빈정거렸다.

 

  “웃기네 그래 봤자 지가 똥갈보라. 내 장사 수완 덕이지 뭐. 그년 요새 좀 아프다는 핑계루...... 이건 물을 긷나, 밥을 제대루 하나, 손님을 받나, 소용없어. 그년두 육 개월이면 찬샘 바닥서 진이 모조리 빠진 거예요. 빚이나 뽑아 내면 참한 신마이루 기리까이*할려던 참이었어. 아, 뭘해요? 빨리 가서 역을 지키라니까.”

*기리까이 : 1. 일본말의 어원인 자동차를 변속하다 청송방언 2. 화물 용어로써 배차된 차량을 서로 변경했을때 쓰이는 단어

 

  마누라의 호통에 주인 사내가 깜짝 놀란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알았대니까......”

 

  “얼른 갔다 와요. 내 대포 한턱 쓸게.”

 

  남자들 셋이 우르르 밀려 나갔다. 정씨가 중얼거렸다.

 

  “젠장, 그 백화 아가씨라두 있었으면 술이나 옆에서 쳐 달랠걸.”

 

  “큰일예요, 글쎄 저녁마다 장정들이 몰려오는데.......”

 

  “아가씨 서넛은 있어야지.”

 

  “색시 많이 두면 공연히 번거러워요. 이런 데서야 반반한 애 하나면 실속이 있죠, 모자라면 꿔다 앉히구...... 왜 좀 놀다 갈려우? 내 불러다 주께.”

 

  “왜 이러슈, 먼 길 가는 사람이 아침부터 주색 잡다간 저녁에 이 마을서 장사지내게.”

 

  “자 국밥이오.”

 

  배추가 아직 푹 삭질 않아서 뻣뻣했으나 그런대로 먹을 만하였다. 정씨가 국물을 허겁지겁 퍼넣고 있는 영달에게 말했다.

 

  “작년 겨울에 어디 있었소?”

 

  들고 있던 국그릇을 내려놓고 영달이는

 

  “언제요?”

 

  하고 나서 작년 겨울이라고 재차 말하자 껄껄 웃기 시작했다.

 

  “좋았지 정말, 대전 있었습니다. 옥자라는 애를 만났었죠. 그땐 공사장에서 별 볼 일두 없었구 노임두 실했어요.”

 

  “살림을 했군.”

 

  “의리있는 여자였어요. 애두 하나 가질 뻔했었는데, 지난봄에 내가 실직을 하게 되자, 돈 모으면 모여서 살자구 서울루 식모 자릴 구해서 떠나갔죠. 하지만 우리 같은 떠돌이가 언약 따위를 지킬 수 있나요. 밤에 혼자 자다가 일어나면 그 애 때문에 남은 밤을 꼬박 새우는 적두 있습니다.”

 

  정씨는 흐려진 영달이의 표정을 무심하게 쳐다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사람이란 곁에서 오랫동안 두고 보지 않으면 저절로 잊게 되는 법이오.”

 

  뒤란으로 나갔던 뚱뚱이 여자가 호들갑을 떨면서 돌아왔다.

 

  “아유 어쩌나...... 눈이 올 것 같애.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이 부는군. 이놈의 두상이 꼴에 도중에서 가다 말고 돌아올 게 분명하지.”

 

  정씨가 뚱뚱보 여자의 계속될 수다를 막았다.

 

  “월출까지는 몇 리요?”

 

  “한 육십 리 돼요.”

 

  “뻐스는 있나요?”

 

  “오후에 두 대쯤 있지요. 이년을 따악 잡아갖구 막차루 돌아올 텐데...... 참, 어디까지들 가슈?”

 

  영달이가 말했다.

 

  “바다가 보이는 데까지.”

 

  “바다? 멀리 가시는군. 요 큰길루 가실 거유?”

 

  정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의자에 궁둥이를 붙인 채로 앞으로 다가 앉았다.

 

  “부탁 하나 합시다. 가다가 스물 두엇쯤 되고 머리는 긴데다 외눈 쌍까풀인 계집년을 만나면 캐어 봐서 좀 잡아오슈, 내 현금으루 딱, 만 원 내리다.”

  정씨가 빙그레 웃었다. 영달이가 자신 있다는 듯이 기세 좋게 대답했다.

 

  “그럭허슈, 대신에 데려오면 꼭 만 원 내야 합니다.”

 

  “암 내다뿐이요. 예서 하룻밤 푹 묵었다 가시구려.”

 

  “좋았어.”

 

  그들은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오는 그들의 뒷덜미에다 대고 여자가 소리쳤다.

 

  “머리가 길구 외눈 쌍꺼풀이예요. 잊지 마슈.”

 

  해가 낮은 구름 속에 들어가 있어서 주위는 누런 색안경을 통해서 내다본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바람이 읍내의 신작로 한복판에서 회오리 기둥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처박고 신작로를 따라서 올라갔다. 영달이가 담배 한 갑을 샀다. 들판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 왔다.

 

  그들이 마을 외곽의 작은 다리를 건널 적에 성긴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허공에 차츰 흰색이 빡빡해졌다. 한 스무 채 남짓한 작은 마을을 지날 때쯤 해서는 큰 눈송이를 이룬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려왔다. 눈이 찰지어서 걷기에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눈보라도 포근한 듯이 느껴졌다. 그들의 모자나 머리카락과 눈썹에 내려앉은 눈 때문에 두 사람은 갑자기 노인으로 변해 버렸다. 도중에 그들은 옛 원님의 송덕비를 세운 비각 앞에서 잠깐 쉬어 가기로 했다. 그 앞에서 신작로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함석판에 뼁끼로 쓴 이정표가 있긴 했으나, 녹이 슬고 벗겨져 잘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들은 비각 처마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정씨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야 그놈의 눈송이 탐스럽기도 하다. 풍년 들겠어.”

 

  “눈 오는 모양을 보니, 근심 걱정이 싹 없어지는데.......”

 

  “첨엔 기분두 괜찮았지만, 이렇게 오다가는 길 가기가 그리 쉽지 않겠는걸.”

 

  “까짓 가는 데까지 가구 내일 또 갑시다. 저기 누가 오는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깊숙이 내려쓴 노인이 조심스럽게 걸어오고 있었다. 노인의 모자챙과 접힌 부분 위에 눈이 빙수처럼 쌓여 있었다. 정씨가 일어나 꾸벅하면서

 

  “영감님 길 좀 묻겠습니다요.”

 

  “물으슈.”

 

  “월출 가는 길이 아랩니까, 저 윗길입니까?”

 

  “윗길이긴 하지만....... 재가 있어 놔서 아무래두 수월친 않을 거야, 아마 교통도 두절된 모양인데.”

 

  “아랫길은요?”

 

  “거긴 월출 쪽은 아니지만 고을 셋을 지나면 감천이라구 나오지.”

 

  영달이가 물었다.

 

  “감천에 철도가 닿습니까?”

 

  “닿다마다.”

 

  “그럼 감천으루 가야겠구만.”

 

  정씨가 인사를 하자 노인은 눈이 가득 쌓인 모자를 위로 들어 보였다. 노인은 윗길 쪽으로 가다가 마을을 향해 꺾어졌다. 영달이는 비각 처마 끝에 회색으로 퇴색한 채 매어져 있는 새끼줄을 끊어 냈다. 그가 반으로 끊은 새끼줄을 정씨에게도 권했다.

 

  “감발 치구 갑시다.”

 

  “견뎌 날까.”

 

  새끼줄로 감발을 친 두 사람은 걸음에 한결 자신이 갔다. 그들은 아랫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차츰 좁아졌으나, 소달구지 한 대쯤 지날 만한 길은 그런대로 계속되었다. 길 옆은 개천과 자갈밭이었고 눈이 한 꺼풀 덮여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길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줄기차게 따라왔다.

  마을 하나를 지났다. 그들은 눈 위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개들 사이로 지나갔다. 마을의 가게 유리창마다 성에가 두껍게 덮여 있었고 창 너머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두 번째 마을을 지날 때엔 눈발이 차츰 걷혀 갔다. 그들은 구멍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깠다. 속이 화끈거렸다.

 

  털썩, 눈 떨어지는 소리만이 가끔씩 들리는 송림 사이를 지나는데, 뒤에 처져서 걷던 영달이가 주첨 서면서 말했다.

 

  “저것 좀 보슈.”

 

  “뭘 말요?”

 

  “저쪽 소나무 아래.”

 

  쭈그려 앉은 여자의 등이 보였다. 붉은 코우트 자락을 위로 쳐들고 쭈그린 꼴이 아마도 소변이 급해서 외진 곳을 찾은 모양이다. 여자가 허연 궁둥이를 쳐들고 속곳을 올리다가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오머머!”

 

  여자가 재빨리 코우트 자락을 내리고 보퉁이를 집어 들면서 투덜거렸다.

 

  “개새끼들 뭘 보구 지랄야.”

 

  영달이가 낄낄 웃었고, 정씨가 낮게 소곤거렸다.

 

  “외눈 쌍꺼풀인데 그래.”

 

  “어쩐지 예감이 이상하더라니.....”

 

여자는 어딘가 불안했는지 그들에게로 다가오기를 꺼려하며 주춤주춤했다. 영달이가 말했다.

 

  “잘 만났는데 백화 아가씨, 참샘에서 뺑소니치는 길이구만.”

 

  “무슨 상관야, 내 발루 내가 가는데.”

 

  “주인 아줌마가 댁을 만나면 잡아다 달라던데.”

 

  여자가 태연하게 그들에게로 걸어 나왔다.

 

  “잡아가 보시지.”

 

  백화의 얼굴은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먼 길을 걷느라고 발갛게 달아 있었다. 정씨가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행선지가 어디요? 이 친구 말은 농담이구.”

 

  여자는 소변보다가 남자들 눈에 뜨인 일보다는 영달이의 거친 말솜씨에 몹시 토라져 있었다. 백화가 걸음을 빨리하며 내쏘았다.

  “제따위들이 뭐라구 잡아가구 말구야. 뜨내기 주제에.”

 

  “그래 우리두 너 같은 뜨내기 신세다. 찬샘에 잡아다 주고 여비라두 뜯어 써야겠어.”

 

  영달이가 여자의 뒤를 바싹 쫓아가며 농담이 아님을 재차 강조했다. 여자가 휙 돌아서더니,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르게 영달이의 앞가슴을 밀어냈다. 영달이는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눈 위에 궁둥방아를 찧고 나가떨어졌다. 백화가 한 팔은 보퉁이를 끼고, 다른 쪽은 허리에 척 얹고 서서 영달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왜 이래? 나 백화는 이래봬도 인천 노랑집에다, 대구 자갈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라구. 조용히 시골 읍에서 수양하던 참인데...... 야아, 내 배 위로 남자들 사단 병력이 지나갔어. 국으로 가만있다가 조용한 데 가서 한 코 달라면 몰라두 치사하게 뚱보 돈 먹자구 나한테 공갈 때리면 너 죽구 나 죽는 거야.”

 

  영달이는 입을 벌린 채 일어설 줄을 모르고 백화의 일장 연설을 듣고 있었다. 정씨는 웃음을 참느라고 자꾸만 송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달이가 멋쩍게 궁둥이를 털면서 일어났다.

 

  “우리두 의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치사하다면, 그런 짓 안 해.”

 

  세 사람은 나란히 눈 쌓인 길을 걸었다. 백화가 말했다.

 

  “그럼 반말 놓지 말라구요.”

 

  영달이는 입맛을 쩍쩍 다셨고, 정씨가 물었다.

 

  “어디까지 가오?”

 

  “집에요.”

 

  “집이 어딘데......”

 

  “저 남쪽이예요. 떠난 지 한 삼 년 됐어요.”

 

  영달이가 말했다.

 

  “얘네들은 긴 밤 자다가두 툭하면 내일 당장에라두 집에 갈 것처럼 말해요.”

 

  백화는 아까와 같은 적의는 나타내지 않았다. 백화는 귀 옆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자꾸 쓰다듬어 올리면서 피곤한 표정으로 영달이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래요. 밤마다 내일 아침엔 고향으로 출발하리라 작정하죠. 그런데 마음뿐이지, 몇 년이 흘러요. 막상 작정하고 나서 집을 향해 가보는 적두 있어요. 나두 꼭 두 번 고향 근처까지 가 봤던 적이 있어요. 한 번은 동네 어른을 먼발치서 봤어요, 나 이름이 백화지만 가명이예요. 본명은......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아.”

 

  정씨가 말했다.

 

  “서울 식당 사람들이 월출역으루 지키러 가던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요 머. 벌써 그럴 줄 알구 감천 가는 길루 왔지요. 촌놈들이니까 그렇지, 빠른 사람들은 서너 군데 길목을 딱 막아 놓아요. 나 그 사람들께 손해 끼친 거 하나두 없어요. 빚이래야 그치들이 빨아먹은 나머지구요. 아유, 인젠 술하구 밤이라면 지긋지긋해요. 밑이 쭉 빠져 버렸어. 어디 가서 여승이나 됐으면...... 냉수에 목욕재계 백 일이면 나두 백화가 아니라구요, 씨팔.”

 

  걸을수록 백화는 말이 많아졌고, 걸음은 자꾸 처졌다. 백화는 여러 도시에서 한창 날리던 시절이 얘기를 늘어놓았다. 여자가 결론지은 얘기는 결국 화류계의 사랑이란 돈 놓고 돈 먹기 외에는 모두 사기라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자기 보퉁이를 꾹꾹 찌르면서 말했다.

 

  “아저씨네는 뭘 갖구 다녀요? 망치나 톱이겠지 머. 요 속에는 헌 속치마 몇 벌, 빤스, 화장품, 그런 게 들었지요. 속치마 꼴을 보면 내 신세하구 똑같아요. 하두 빨아서 빛이 바래구 재봉실이 나들나들하게 닳아 끊어졌어요.”

 

  백화는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었지만 열여덟에 가출해서, 쓰리게 당한 일이 많기 때문에 삼십이 훨씬 넘은 여자처럼 조로*해 있었다. 한 마디로 관록이 붙은 갈보*였다. 백화는 소매가 해진 헌 코우트에다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를 입었고, 물에 불은 오징어처럼 되어 버린 낡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비탈길을 걸을 때, 영달이와 정씨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양쪽에서 잡아 주어야 했다. 영달이가 투덜거렸다.

*조로2 (早老) : 나이에 비하여 빨리 늙음. *갈보 :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고무신이라두 하나 사 신어야겠어. 댁에 때문에 우리가 형편없이 지체되잖나.”

 

  “정 그러시면 두 분이서 먼저 가면 될 거 아녜요. 내가 고무신 살 돈이 어딨어?”

 

  “우리두 의리가 있다구 그랬잖어. 산 속에다 여자를 떼놓구 갈 수야 없지. 그런데...... 한 푼두 없단 말야?”

 

  백화가 깔깔대며 웃었다.

 

  “여자 밑천이라면 거기만 있으면 됐지, 무슨 돈이 필요해요?”

 

  “저러니 언제 한번 온전한 살림 살겠나 말야!”

 

  “이거 봐요. 댁에 같은 훤칠한 내 신랑감들은 제 입에 풀칠두 못해서 떠돌아다니는데, 내가 어떻게 살림을 살겠냐구.”

  영달이는 백화의 입담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감천 가는 도중에 있는 마지막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어귀의 얼어붙은 개천 위로 물오리들이 종종걸음을 치거나 주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마을의 골목길은 조용했고, 굴뚝에서 매캐한 청솔 연기 냄새가 돌담을 휩싸고 있었는데 나직한 창호지의 들창 안에서는 사람들의 따뜻한 말소리들이 불투명하게 들려 왔다. 영달이가 정씨에게 제의했다.

 

  “허기가 져서 떨려요. 감천엔 어차피 밤에 떨어질 텐데, 여기서 뭣 좀 얻어먹구 갑시다.”

 

  “여긴 바닥이 작아 주막이나 가게두 없는 거 같군.”

 

  “어디 아무 집이나 찾아가서 사정을 해보죠.”

 

  백화도 두 손을 코우트 주머니에 찌르고 간신히 발을 떼면서 말했다.

 

  “온몸이 얼었어요. 밥은 고사하고, 뜨뜻한 아랫목에서 발이나 녹이구 갔으면.”

 

  정씨가 두 사람을 재촉했다.

 

  “얼른 지나가지. 여기서 지체하면 하룻밤 자게 될 테니, 감천엘 가면 하숙두 있구, 우리를 태울 기차두 있단 말요.”

 

  그들은 이 적막한 산골 마을을 지나갔다. 눈 덮인 들판 위로 물오리 떼가 내려앉았다가는 날아오르곤 했다. 길가에 퇴락한 초가 한 간이 보였다. 지붕의 한쪽은 허물어져 입을 벌렸고 토담도 반쯤 무너졌다. 누군가가 살다가 먼 곳으로 떠나간 폐가임이 분명했다. 영달이가 폐가 안을 기웃해 보며 말했다.

 

  “저기서 신발이라두 말리구 갑시다.”

 

  백화가 먼저 그 집의 눈 쌓인 마당으로 절뚝이며 들어섰다. 안방과 건넌방의 구들장은 모두 주저앉았으나 봉당은 매끈하고 딴딴한 흙바닥이 그런대로 쉬어 가기에 알맞았다. 정씨도 그들을 따라 처마 밑에 가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영달이는 흙벽 틈에 삐죽이 솟은 나무 막대나 문짝, 선반 등속의 땔 만한 것들을 끌어모아다가 봉당 가운데 쌓았다. 불을 지피자 오랫동안 말라 있던 나무라 노란 불꽃으로 타올랐다. 불길과 연기가 차츰 커졌다. 정씨마저도 불가로 다가앉아 젖은 신과 바짓가랑이를 불길 위에 갖다 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불이 생기니까 세 사람 모두가 먼 곳에서 지금 막 집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고, 잠이 왔다. 영달이가 긴 나무를 무릎으로 꺾어 불 위에 얹고, 눈물을 흘려 가며 입김을 불어 대는 모양을 백화는 이윽히 바라보고 있었다.

  “댁에...... 괜찮은 사내야. 나는 아주 치사한 건달인 줄 알았어.”

 

  “이거 왜 이래. 괜히 나이롱 비행기 태우지 말어.”

 

  “아녜요. 불 때는 꼴이 제법 그럴듯해서 그래요.”

 

  정씨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영달에게 말했다.

 

  “저런 무딘 사람 같으니, 이 아가씨가 자네한테 반했다...... 그 말이야.”

 

  “괜히 그러지 마슈. 나두 과거에 연애해 봤소. 계집년이란 사내가 쐬빠지게 해 줘두 쪼끔 벌릴까 말까 한단 말입니다. 이튿날 해만 뜨면 말짱 헛것이지.”

 

  “오머머. 어디 가서 하루살이 연애만 해본 모양이네. 여보세요, 화류계 연애가 아무리 돈에 운다지만 한 번 붙으면 순정이 무서운 거예요. 내가 처음 이 길 들어서서 독하게 사랑해본 적두 있었어요.”

 

  지붕 위의 눈이 녹아서 투덕투덕 마당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나무 막대기를 불 속에 넣고 휘저으면서 갑자기 새촘한 얼굴이 되었다. 불길에 비친 백화의 얼굴은 제법 고왔다.

  “그런데...... 몇 명이었는지 알아요? 여덟 명이었어요.”

 

  “진짜 화류계 연애로구만.”

 

  “들어봐요. 사실은 그 여덟 사람이 모두 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백화는 주점 <갈매기집>에서의 나날을 생각했다. 그 여자는 날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철조망의 네 귀퉁이에 높다란 망루가 서 있는 군대 감옥을 올려다보았던 것이다. 언덕 위에 흰 뼁끼로 칠한 반달형 퀀셋 막사와 바라크([프랑스어]baraque, 군인들이 주둔할 수 있도록 만든 건물 또는 가건물)가 늘어서 있었고 주위에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어, 그 안에 철창이 있고 죄지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질 않았다. 하루에 한 번씩, 긴 구령 소리에 맞춰서 붉은 줄을 친 군복에 박박 깎인 머리의 군 죄수들이 바깥으로 몰려나왔다. 죄수들이 일렬로 서서 세면과 용변을 보는 모습이 보였었다. 그들은 간혹 대여섯 명씩 무장 헌병의 감시를 받으며 작업을 하러 내려오는 때도 있었다. 등에 커다란 광주리를 메고 고개를 숙인 채로 그들은 줄을 지어 걸어왔다.

 

  “처음에 부산에서 잘못 소개를 받아 술집으로 팔렸었지요. 거기에 갔을 땐 벌써 될 대루 되라는 식이어서 겁나는 것두 없었구요. 나이는 어렸지만 인생살이가 고달프다는 것두 깨달았단 말예요.”

  어느 날 그들은 마을의 제방 공사를 돕기 위해서 삼십여 명이 내려왔다.

 

  출감이 멀지 않은 사람들이라 성깔도 부리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도 그리 경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밖으로 작업을 나오면 기를 쓰고 찾는 것은 물론 담배였다. 백화는 담배 두 갑을 사서 그들 중의 얼굴이 해사한 죄수에게 쥐어 주었다. 작업하는 열흘간 백화는 그들의 담배를 댔다. 날마다 그 어려 뵈는 죄수의 손에 몰래 쥐어 주고는 했다. 다음부터 백화는 음식을 장만해서 감옥 면회실로 그를 만나러 갔다. 옥바라지 두 달 만에 그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백화를 만나러 왔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병사는 전속지로 떠나갔다.

 

  “그런 식으로 여덟 사람을 옥바라지했어요. 한 달, 두 달 하다 보면 그이는 앞사람들처럼 하룻밤을 지내구 떠나가군 했어요.”

 

  백화는 그런 일 때문에 갈매기집에 있던 시절, 옷 한가지도 못해 입었다. 백화는 지나간 삭막한 삼 년 중에서 그때만큼 즐겁고 마음이 평화로웠던 시절은 없었다. 그 여자는 새로운 병사를 먼 전속지로 떠나 보내는 아침마다 차부로 나가서 먼지 속에 버스가 가리울 때까지 서 있곤 했었다. 백화는 그 뒤부터 부대 근처를 전전하며 여러 고장을 흘러 다녔다.

 

  아직 초저녁이 분명한데 날씨가 나빠서인지 곧 어두워질 것 같았다. 눈은 더욱 새하얗게 돋보였고, 사위는 고요한데 나무 타는 소리만이 들려 왔다.

 

  “감옥뿐 아니라, 세상이란 게 따지면 고해 아닌가......”

 

  정씨는 벗어서 불가에다 쬐고 있던 잠바를 입으면서 중얼거렸다.

 

  “어둡기 전에 어서 가야지.”

 

  그들은 일어났다. 아직도 불길 좋게 타고 있는 모닥불 위에 눈을 한 움큼씩 덮었다. 산천이 차츰 희미하게 어두워졌다. 새들이 이리 저리로 깃을 찾아 숲에 모여들고 있었다. 영달이가 백화에게 물었다.

 

  “그래 이젠 어떡할 셈요, 집에 가면......”

 

  백화가 대답을 않고 웃기만 했다. 정씨가 말했다.

 

  “시집가야지 뭐.”

 

  “시집은 안 가요. 이제 와서 무슨 시집이예요. 조용히 틀어박혀 집의 농사나 거들지요. 동생들이 많아요.”

 

  사방이 어두워지자 그들도 얘기를 그쳤다. 어디에나 눈이 덮여 있어서 길을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뒤에 처졌던 백화가 눈 덮인 길의 고랑에 빠져 버렸다. 발이라도 삐었는지 백화는 꼼짝 못하고 주저앉아 신음을 했다. 영달이가 달려들어 싫다고 뿌리치는 백화를 업었다. 백화는 영달이의 등에 업히면서 말했다.

  “무겁죠?”

 

  영달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백화가 어린애처럼 가벼웠다. 등이 불편하지도 않았고 어쩐지 가뿐한 느낌이었다. 아마 쇠약해진 탓이리라 생각하니 영달이는 어쩐지 대전에서의 옥자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화끈했다. 백화가 말했다.

 

  “어깨가 참 넓으네요. 한 세 사람쯤 업겠어.”

 

  “댁이 근수가 모자라니 그렇다구.”

 

  그들은 일곱 시쯤에 감천 읍내에 도착했다. 마침 장이 섰었는지 파장된 뒤인데도 읍내 중앙은 흥청대고 있었다. 전 부치는 냄새, 고기 굽는 냄새, 곰국 냄새가 풍겨왔다. 영달이는 이제 백화를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여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씨가 백화에게 물었다.

 

  “어느 방향이오?”

 

  “전라선이예요.”

 

  “나는 호남선 쪽인데. 여비는 있소?”

 

  “군용차를 사정해서 타구 가면 돼요.”

 

  그들은 장터 모퉁이에서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팥시루떡을 사 먹었다. 백화가 자기 몫에서 절반을 떼어 영달에게 내밀었다.

 

  “더 드세요. 날 업구 왔으니 기운이 배나 들었을 텐데.”

 

  역으로 가면서 백화가 말했다.

 

  “어차피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우리 고향에 함께 가요. 내 일자리를 주선해 드릴께.”

 

  “내야 삼포루 가는 길이지만, 그렇게 하지?”

 

  정씨도 영달이에게 권유했다. 영달이는 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신발 끝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대합실에서 정씨가 영달이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속삭였다.

  “여비 있소?”

 

  “빠듯이 됩니다. 비상금이 한 천 원쯤 있으니까.”

 

  “어디루 가려우?”

 

  “일자리 있는 데면 어디든지......”

 

  스피커에서 안내하는 소리가 웅얼대고 있었다. 정씨는 대합실 나무 의자에 피곤하게 기대어 앉은 백화 쪽을 힐끗 보고 나서 말했다.

 

  “같이 가시지. 내 보기엔 좋은 여자 같군.”

 

  “그런 거 같아요.”

 

  “또 알우? 인연이 닿아서 말뚝 박구 살게 될지. 이런 때 아주 뜨내기 신셀 청산해야지.”

 

  영달이는 시무룩해져서 역사 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백화는 뭔가 쑤군대고 있는 두 사내를 불안한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영달이가 말했다.

  “어디 능력이 있어야죠.”

 

  “삼포엘 같이 가실라우?”

 

  “어쨌든.......”

 

  영달이가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백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저 여잘 보냅시다.”

 

  영달이는 표를 사고 삼립빵 두 개와 찐 달걀을 샀다. 백화에게 그는 말했다.

 

  “우린 뒤차를 탈 텐데...... 잘 가슈.”

 

  영달이가 내민 것들을 받아 쥔 백화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 여자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무도...... 안 가나요.”

  “우린 삼포루 갑니다. 거긴 내 고향이오.”

 

  영달이 대신 정씨가 말했다. 사람들이 개찰구로 나가고 있었다. 백화가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다.

 

  “정말, 잊어버리지...... 않을게요.”

 

  백화는 개찰구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백화는 눈이 젖은 채 웃고 있었다.

 

  “내 이름 백화가 아니예요. 본명은요......이점례예요.”

  여자는 개찰구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에 기차가 떠났다.

 

  그들은 나무 의자에 기대어 한 시간쯤 잤다. 깨어 보니 대합실 바깥에 다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기차는 연착이었다. 밤차를 타려는 시골 사람들이 의자마다 가득 차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담배를 나눠 피웠다. 먼 길을 걷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더니 더욱 피로해졌던 것이다. 영달이가 혼잣말로

 

  “쳇, 며칠이나 견디나.......”

 

  “뭐라구?”

 

  “아뇨, 백화란 여자 말요. 저런 애들...... 한 사날두 시골 생활 못 배겨나요.”

 

  “사람 나름이지만 하긴 그럴 거요. 요즘 세상에 일이 년 안으루 인정이 휙 변해 가는 판인데......”

 

  정씨 옆에 앉았던 노인이 두 사람의 행색과 무릎 위의 배낭을 눈여겨 살피더니 말을 걸어왔다.

  “어디 일들 가슈?”

 

  “아뇨, 고향에 갑니다.”

 

  “고향이 어딘데.......”

 

  “삼포라구 아십니까?”

 

  “어 알지, 우리 아들놈이 거기서 도자를 끄는데......”

 

  “삼포에서요? 거 어디 공사 벌릴 데나 됩니까. 고작해야 고기잡이나 하구 감자나 매는데요.”

 

  “어허! 몇 년 만에 가는 거요?”

 

  “십 년.”

 

  노인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 놓구, 추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뭣땜에요?”

 

  “낸들 아나, 뭐 관광 호텔을 여러 채 짓는담서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데.”

 

  “동네는 그대루 있을까요?”

 

  “그대루가 뭐요. 맨 천지에 공사판 사람들에다 장까지 들어섰는걸.”

 

  “그럼 나룻배두 없어졌겠네요.”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 정씨에게는 풍문마저 낯설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영달이가 말했다.

 

  “잘 됐군. 우리 거기서 공사판 일이나 잡읍시다.”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어느 결에 정씨는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기차는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

 

(1973)

 

 

핵심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사실주의 소설, 여로형 소설
  • 성격 : 사실적, 현실 비판적
  • 배경 : 1970년대 겨울, 공사장에서 철도역까지 눈 덮인 길
  •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 주제 :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고향을 상실하고 소외된 뜨내기 하층민들의 애환과 연대의식
  • 구성
    - 발단 : 정처 없이 길을 나선 영달이 삼포로 가는 정씨를 만나 동행이 된다.
    - 전개 : 삼포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월출로 향해 가던 중 백화를 만난다.
    - 절정 : 백화가 영달에게 호감을 느껴 자기 고향으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하지만 영달은 응하지 않는다.
    - 결말 : 고향인 삼포에서 공사판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지 않는다.
  • 특징: 
    ① 대화와 행동 묘사를 주로 사용하여 사실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나타냄
    ② 길을 모티프로 삼고 있는 여로 소설의 구조를 통해 주제를 형상화
    ③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작품의 결말을 처리함
  • 등장인물
    - 정 씨(氏)' : 출옥 후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고향인 삼포(森浦)를 찾아가는 생각이 깊고 인정이 있는 인물
    - 노영달 : 공사판을 찾아 돌아다니는 뜨내기 노동자로 말과 행동은 거칠지만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인물
    - 백화 : 술집에서 도망친 작부. 18세에 가출하여 군부대 주변의 술집을 4년여간 전전하며 군인들에게 몸을 팔았던 인물

    

줄거리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는 '영달'은 넉 달 동안 머물러 있던 공사판의 공사가 중단되자 밥값을 떼어먹고 도망쳐 나온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정씨를 만나 동행이 된다. '정씨'는 교도소에서 목공·용접 등의 기술을 배우고 출옥하여 영달이처럼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던 노동자인데, 그는 영달이와는 달리 정착을 위해 고향인 삼포(森浦)로 향하는 길이다.

 

  그들은 찬샘이라는 마을에서 '백화'라는 색시가 도망을 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술집 주인으로부터 그녀를 잡아오면 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그들은 감천으로 행선지를 바꾸어 가던 중에 도망친 백화를 만난다. 백화는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지만 열여덟에 가출해서 수많은 술집을 전전해서인지 삼십이 훨씬 넘은 여자처럼 늙어 보이는 작부였다. 그들은 그녀의 신세가 측은하게 느껴져 동행이 된다.

 

  그들은 눈이 쌓인 산골길을 함께 가다가 길가의 폐가에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인다. 백화는 영달에게 호감을 느껴 그것을 표현하지만 영달은 무뚝뚝하게 응대한다. 그들은 다시 길을 나선다. 눈길을 걷다가 백화가 발을 다쳐 걷지 못하게 되자 영달이 백화를 업는다. 일곱 시쯤에 감천 읍내에 도착한다.


  역에 도착하자 백화는 영달에게 자기 고향으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하지만 영달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자신의 비상금을 모두 털어 백화에게 차표와 요깃거리를 사준다.


  백화가 떠난 후 영달과 정氏는 삼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중 삼포에도 공사판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달이는 일자리가 생겨 반가웠지만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지 않는다. 마음의 정처(定處)를 잃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황석영(黃晳榮, 1943.1.4. ~ )

  대한민국의 소설가로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해방 후부터 오늘날까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을 형상화하는 데 주력해 왔으며, 최근에는 한국의 전통적 서사 양식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등의 단편과‘손님’, ‘바리데기’, ‘심청’등의 장편이 있다. 1962년 《입석부근(立石附近)》으로 사상계의 신인문학상에 입선하며 등단하였고, 1970년 《탑(塔)》이 조선일보에 당선되며 문단에서 활동하였다. 

 

  1943년 1월 4일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1945년 광복 후에 평양 외가로 왔다. 본명은 황수영이다. 1947년 월남하여 영등포에 정착, 1950년 영등포국민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 전쟁으로 피란지를 전전했다. 1956년 경복중학교, 1959년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교 재학 중 청소년 잡지인 《학원(學園)》의 학원문학상에 단편소설 《팔자령》이 당선되었다.

  1960년 경복고등학교 재학 중, 4·19 혁명 때 함께 했던 안종길이 경찰의 총탄에 사망하여, 그는 친구들과 함께 안종길의 유고 시집을 발간했다. 1961년 전국고교문예 현상공모에 《출옥일》이 당선되었고, 1962년 봄 고등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남도 지방을 방랑하다 같은 해 10월 집으로 돌아왔고 11월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석부근》이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검정고시를 거쳐 1964년 숭실대학교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영등포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제2한강교 건설노동자와 남도로 내려갔다. 이 시기에 일용 노동 등 여러가지 일을 하다가 칠북의 장춘사(長春寺)에서 입산했다. 동래 범어사를 거쳐 금강원에서 행자 노릇을 하다가 어머니가 찾아와 집으로 돌아갔다. 1966년 대학에서 제적된 뒤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청룡부대 제2진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훗날 그가 쓴 장편소설인 《무기의 그늘》에는 당시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다. 참전 이후 1969년 5월 군에서 제대했다.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환영의 돛》과, 베트남전의 경험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탑》이 당선됐다. 이때부터 황수영 대신 황석영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여성적인 이름과 '황수영 시절의 사연들이 싫어' 바꾸었다고 한다.

  1970년부터 《돌아온 사람》, 《객지》, 《삼포 가는 길》 등의 사실주의 중·단편을 속속 발표했다. 이때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중퇴하였으나, 2000년 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는다. 1974년 7월부터는 한국일보에 대하소설 《장길산》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연재는 1984년 7월까지 계속됐다.


  70년대의 <객지>와 <삼포 가는 길>, 80년대의 <무기의그늘> <장길산>을 남긴 문제의 작가다. <객지>가 보여주는 문학적 중요성은 그것이 부랑 노동자가 지니는 사회적 관계의 핵심을 포착했다는 점에 있다. <삼포 가는 길> 역시 <객지>가 제기한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에서 삼포라는 고유 명사는 이내 산업화에 의해 해체되고 있던 고향이라는 보통 명사로 확장되며, 다시 70년대 한국사회 일반으로 읽혀질 수 있다. 

 

  1989년 3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초청으로 방북하여 방북 기간 동안 평양에서 김일성과 만났다.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예술원 초청작가로서 1991년 11월까지 독일의 베를린에 체류했다. 이때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신동아》와 《창작과 비평》에 게재했다.

 

  한편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대상 중 한사람이 되어 노태우 정부로부터 감시당했는데, 1990년 10월 4일 오후6시40분쯤 외국어대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 윤석양은 탈영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당시 보안사에서 갖고나온 동향파악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 이들 내용이 입력된 컴퓨터디스킷을 공개했다.


  91년 9월경에 베를린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서 부인, 아들과 함께 정착하여 생활해왔는데 여권 만료 시한인 1992년 2월이 임박해 독일 내의 합법적인 체류에 문제가 생기면서 1991년 11월 14일 독일을 떠나 거처를 미국 뉴욕으로 옮겼다. 1993년 귀국 이후 방북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법원에 의해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가 1998년 사면 석방되었다. 검찰이 무기징역을 구형하자 북한은 관영 중앙통신을 통해 『그의 방북과 해외활동은 순수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함께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의 의무감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결코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황석영이 북한에 매수되어 밀입북하여 북으로부터 25만 달러의 공작비를 받았다는 당국의 발표에 대해서 『작가로서 동족이 살고 있는 공화국 북반부를 다녀갔을 뿐이고 우리는 그를 동포 작가로서 대해주었을 따름』이라며 이를 『터무니없이 날조된 수사결과』라며 "황석영을 즉각 석방하라"고 하였다.

 

  황석영의 부인은 1994년 5월 19일부터 22일에 매일 오후 8시 뉴욕의 댄스 시어터 워크숍(DTW)의 베시 쉔베르크극장에서 1973년 전위무용가 홍신자에 이어 한국인으로 두번째로 인간문화재인 이매방, 이동안, 김숙자 선생 등으로부터 사사한 승무와 살풀이, 태평무를 독무로 선보이는 <굿춤> 데뷔공연을 한 바가 있는 안무가 김명수이다.


  황석영은 민중 역사소설로 불리는 《장길산》을 통해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에 주목했으며, 《한씨연대기》와 《삼포 가는 길》등을 통해 산업화 시대의 시대정신과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대변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길산》, 《삼포 가는 길》, 《손님》, 《오래된 정원》, 《심청》등이 있다.

  황석영 석방대책위원회(공동의장 신경림 등 4명)은 1993년 9월 25일 황석영문학제 개최에 맞춰 황석영의 방북과 그 이후 국외에서의 활동, 귀국, 그리고 투옥으로 이어지는 행보를 통해 남북분단의 모순을 증언하여 제1부 <사람이 살고 있었네>: 북에서 만난 문인과 노동자, 농민, 학생들을 비롯해 북한사회 곳곳에 대한 생각들이 담겨 있는 방북기 2부 <통일을 위해 문학의 길을 걷다보면 어디나 조국이었네>: 방북과 관련한 인터뷰를 모음 3부 <분단시대 통일작가 황석영>: 방북이전인 80년대 발표한 단편 <골짜기>와 <열애> 수록 4부 北의 초청장과 합의서, 영화계약서, 귀국성명서, 모두 진술서 등 방북관련 자료를 엮은 「황석영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시와사회사刊)를 발간했다.

  2009년 5월 13일에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중앙아시아 순방에 참가했다. 그는 자신이 이명박 정부를 "중도실용 정부"로 평가한다고 말했으며,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그는 용산 참사와 관련, "현 정부의 실책이라고 본다."고 말했지만, "해외에 나가 살면서 광주사태가 우리만 있는 줄 알았다."며 "70년대 영국 대처정부 당시 시위 군중에 발포해서 30~40명의 광부가 죽었다."고 지적한 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가 가는 것이다."라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논란에 휩싸였다. 이런 행보에 대해 보수 논객인 박효종 서울대학교 교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념이나 가치관의 변화를 겪을 수 있다. 황석영 씨의 발언을 놓고 변절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반면에 진보 성향의 손호철 서강대학교 교수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MB 정부를 중도라고 규정하는 건 매우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황석영은 2009년 6월 7일, 한겨레 신문을 통해 이명박 정부 지지를 한 달도 안돼 철회했다. 이에 대해 황석영은 "이명박 정부의 내용이라는 게 내가 살아왔던 것과 다르지만 남북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는 역할을 하려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방북, 망명을 거쳐 1998년 감옥을 나온 뒤 《바리데기》,《개밥바라기 별》,《강남몽》,《낯익은 세상》으로 이어지는 작품들이 자신의 후반기 문학이라 말하며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 변모ㆍ변신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2년 '등단 50주년'을 맞이하는 소감에 대해서는 "현재에서 가까운 기억들은 지워버리고 자기가 남겨야 할 기억을 간추리고 재정리하듯 만년문학은 근원과 출발로 돌아가 여러 관계를 정리하고 큰 선에서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2년 등단 50주년을 맞아 낸 소설《여울물 소리》출간 인터뷰에서 황석영은 올해 칠순이나 앞으로 10년은 더 우리 사회에 필요한 발언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개헌을 통한 권력 분산, 경제민주화, 북방정책 등 세가지 목표를 이루고 싶다며 특히 이명박 정부에 기대했던 '북방정책'을 숙원사업으로 꼽았다. 몽골부터 카자흐스탄까지 북방 국가들과의 경제협력과 문화교류를 이룸으로써 한반도 평화의 기틀을 닦는다는 게 그가 주장하는 '북방정책'의 골자다. 이를 위해 2009년 이명박과 중앙아시아 순방에 동행했다가 많은 비판에 시달렸던 그는 그간 장편을 발표하면서 정치와 거리를 두며 원로작가로 돌아가는 듯했으나 2012년 대선을 계기로 야권후보를 지지하며 야권 대선 후보인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과정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1970년대 초반 이후의 사회적 상황에 대해 예리하면서도 객관적인 시선과 강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점이 특징이다. 유신정권의 개발 우선 정책과 산업화·근대화의 파행적 전개 등이 황석영의 투철한 시대의식과 맞부딪침으로써 그의 소설을 더욱 문제적인 작품으로 이끌고 간 것이다. 특히, 《객지》, 《삼포 가는 길》은 도시화와 산업화 우선의 개발정책이 야기한 이농현상과 농촌의 붕괴현상 등 당시 사회적 모순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작품이다.

  그가 1980년대에 발표한 장편소설 《장길산》은 지배층 중심의 사관이 두드러지는 기존의 역사소설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를 뛰어 넘어서 홍명희의 《임꺽정》 이후에 단절된 민중적 영웅상을 소설 속에서 다시 부활시킨 작품이다. 민중의 한을 역사변혁의 힘으로 승화시킨 그의 소설은 근본적으로는 '역사의식'의 바로세우기에서부터 출발하며 남성적인 투박한 '힘'이 두드러지는 강한 문체로서 소설 전체의 이야기를 박진감 있게 전개시키고 있다.

  《객지》, 《삼포 가는 길》의 결말 부분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소설은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미래와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성격의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마치 풀뿌리의 끈질긴 생명력처럼 고통과 시련을 견디고 미래를 향한 강한 투쟁 의욕과 생명력을 발산하는 '인물'의 부각은 그의 소설의 뛰어난 매력이자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이다. 현실참여파로 정치사상적으로 사회민주(사민주의)적 진보주의자로 분류된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74년), 민중문화운동연합(84년), 민족문학작가회의(87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88년)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1989년 평양 방문.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 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 체류. 1993년 4월 귀국, 방북 사건으로 7년형 받고 1998년 사면.

  황석영이 북한에 갔다 와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하자,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문학적 천재가 썩는 것을 아까워 했다. 상당수 문인들은 `살아 있는 국보를 내놓으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시위를 했으며, `그를 가둬두는 일은 생동하는 모국어를 가두는 일`이라고도 했다.

  70~80년대 황석영이 이뤘던 문학적 성과는 빛나는 것이었다. 신춘문예에 소설과 희곡이 동시 당선되는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등단했던 황석영은 1974년 첫 창작집 『객지』를 펴내면서 단숨에 70년대 리얼리즘의 대표작가로 떠올랐다. 이 소설집에 포함된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은 지금도 리얼리즘 미학의 정점에 이른 걸작품들로 인정 받는다.

  같은 해 신진작가로서는 파격적으로 「한국일보」에 <장길산> 연재를 시작했다. 장장 10년간 연재가 이어지면서 해방 이후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 받았던 이 작품은, 조선시대의 의적 두목을 주인공 삼아 70~80년대의 억압적 분위기에 작지만 시원스런 문학적 숨통을 틔워주었다.

  <객지>와 <장길산>에서 보여준, 서민 대중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그의 삶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유신 시절 공장 견습공으로, 노가다꾼으로, 문화운동가로, 6·25 이후 최초의 농민운동가로 뛰어다니며 민중의 삶을 배우던 그는, 1980년 5월을 광주에서 겪고, 80년대 내내 진보적 문화운동에 앞장섰다.

  급기야 1989년에는 통일운동 차원에서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수 차례 면담했으며,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제목의 방북기를 발표하여 그 편집자가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 역시 독일과 미국을 유랑하다 1993년 귀국과 함께 체포·수감 되었다.

  하고 싶은 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거침없이 실천하며 살아온 황석영의 `싹수`는 명문고교를 중퇴하고 머리를 깎겠다고 산사를 찾아들어갔을 때부터 분명했다. 해병대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에 뛰어든 것도 그렇고, 그 베트남 전장에서 방금 터진 포탄 구덩이 속으로 몸을 처박으면서 `이번에 살아남기만 한다면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온몸을 바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는 것도 황석영 다운 일이었다.

  황석영은 입심과 노래솜씨, 친화력으로도 `국보급`이라 한다. 교도소에서 그의 별칭이 교도소 `소장`보다도 높은 `총장`이었던 것도, 특유의 친화력과 입심으로 재소자들은 물론 교도관들까지 사로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낙이 청산유수라 창작의 고통도 별로 겪지 않는 타고난 필력이 아닐까 상상 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비록 `외다리 타법`으로나마 컴퓨터로 글을 쓰기 시작한 후 파지를 양산할 일도 없어졌지만, 한 장의 원고지를 채우기 위해 100장의 파지를 양산하는 각고의 시간과 결벽에 가까운 완벽성의 추구는 황석영의 또 다른 면모다.

  이제 황석영은 다시금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객지>와 같은 `메마르고 딱딱한 리얼리즘`으론 더 이상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동아시아적 형식에 현실주의적 내용을 담고, 마르케스와 아스투리아스 등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참조항 삼아 새로운 문학적 변신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황석영의 작품들은 해외에서도 관심을 끌어, 중국에서 <장길산>(1985), 일본에서 <객지>(1986), <무기의 그늘>(1989), 대만에서 <황석영 소설선집>(1988)이 각각 번역·간행되었다. <알라딘 홈페이지 작가파일 참조>

 


  
이해와 감상

  1973년 <신동아>에 발표되었다가 1974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펴낸 소설집 <객지>에 수록된 작품이다.  ‘삼포 가는 길’은 1970년대 본격화된 산업화의 영향으로 급변하던 시대에, 뿌리 뽑힌 서민들의 삶의 애환, 소외된 인간들의 정체성 상실과 인간적 유대감을 실감 나게 담아낸 작품이다. 광복 이후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노동자들의 마음 속에는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깃들어 있다.

 

  ‘삼포’는 가공의 지명으로 이 소설의 세 인물들에게 현실을 벗어나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삼포 역시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림으로써 이들은 마음의 고향, 정신적 안식처로서의 고향을 상실하는 아픔을 계속 겪을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시대적 전형성을 획득한 세 주인공의 삶을 통해 급격한 산업화가 가져온 아픔을 형상화하고 있다.

  부랑(浮浪) 노무자인 '영달'과 '정씨'는 눈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귀향한다. 도중에 술집 작부 '백화'를 만나 떠돌이로 살아가는 처지를 밝히며 삶의 밑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확인하게 되고, 세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행하게 된다. 특히,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그토록 그리던 '정씨'의 고향 삼포(森浦)가 개발 사업으로 인해 송두리째 사라진 사실은 부랑 노무자의 비애를 더욱 밀도 있게 그려낸다.

  1970년대 산업화의 과정에서 농민은 뿌리를 잃고 도시의 밑바닥 생활을 하며 일용 노동자로 떠돈다. 이러한 상황의 황폐함과 궁핍함이 '영달'과 '정씨' 같은 부랑 노무자, '백화' 같은 작부의 모습으로 형상화되면서 시대적 전형성을 획득하고 있다. 

  '정씨'에게는 이제 그 옛날의 아름다운 삼포(森浦)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육지로 연결된 삼포는, 그가 떠나고자 했던 도시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산업화 된 공간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삼포는 그에게 있어 오랜 부랑 생활을 끝내고 안주할 수 있는 곳, 곧 정신의 안주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삼포(森浦)의 상실은 곧 정신적 고향의 상실을 의미하며, 그 순간 그는 '영달'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부랑자가 되고 만다.

  이런 의미에서 [삼포(森浦) 가는 길]은 1970년대 산업화가 초래한 고향 상실의 아픔을 형상화해 내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폐가’의 상징적 의미

  눈 덮인 길을 걷다가 옷이 젖고 피로해진 영달과 정 씨, 백화, 이들 세 사람은 길가의 퇴락한 초가집에 들어가 모닥불을 피우고 다리를 쉬게 된다. 절뚝이며 걷는 백화를 위해 정 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가로 들어선 영달은 땔감을 모아 불을 피우고, 탐탁지 않아하던 정 씨도 그 분위기에 동화된다. 정성껏 불을 피우는 영달을 보며 백화는 그의 배려에 차츰 마음이 끌리고, 자신의 과거 사랑 이야기를 털어놓고 속마음을 이야기하며 서로에 대한 마음을 연다. 이렇게 폐가는 마음을 터놓고 진실을 주고받으며 화합하게 되는 공간이며 먼 곳에서 집에 도착한 따스함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폐가’는 어디까지나 온전한 집이 아닌 부서지고 훼손된 집, 그것도 봉당만 남은 집이라는 점에서 일시적인 정착의 공간일 뿐 완전한 정착의 공간이 되지 못한다. 

 

 

'삼포 가는 길’에서의 ‘만남’의 의미

  ‘삼포 가는 길’의 만남은 갈등과 마찰을 통해 보다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주체적 만남의 양상을 내보이는 것이다. 영달과 정 씨의 만남, 그리고 백화와 영달, 정 씨 간의 만남의 양상이 그것인데, 이 중 보다 무게 있고 밀도 있는 만남의 관계는 영달과 백화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우선 백화와 영달은 같은 도망자의 처지라는 점에서 성격적 공통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도 영달은 백화를 주막집에 잡아다가 넘김으로써 여비라도 벌겠다는 유혹을 받는다. 결국 백화의 강한 거부로 말미암아 영달은 뜻을이루지 못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서로 친숙해진 그들은 둘 사이의 폭넓은 정신적 공감대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 백화는 집을 향한 귀향의 길 위에 서 있다고 하지만, 그 길의 반대편에서 투사되는 그녀의 (과거) 모습은 온갖 풍상의 편력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여성적 편력으로 가능한 백화의 최악의 밑바닥 체험, 즉 작부 체험이 구성적 절정 부분에서 진술됨으로써 이 작품이 주는 최고의 감동적 울림을 독자들은 못 보게 되거니와, 이 부분에서 제시되는 생의 고달픔에 대한 인식과 그 고달픈 생을 이기는 힘으로서의 사랑과 희생(용기)의 고귀함에 대한 힘찬 묘사는 황석영 문학의 사상적 중심 인자가 무엇인지를 뚜렷이 보여 준다는 점에서 눈여겨 둘 만하다.

- 한형구, ‘편력의 길 혹은 밑바닥 체험의 사상 - 삼포 가는 길재조명’, “문학과 비평”(1988. 여름)

 

 

노영달, 정 씨, 백화가 대표하는 사회 계층

  ‘삼포 가는 길’에 등장하는 세 사람의 인물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영달은 노동 현장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떠돌이 착암 기공이다. 그는 한때 옥자라는 술집 여자를 만나 동거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먹고살기가 힘들어 헤어질 정도로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막노동자이다. 한편 정 씨는 공사판을 옮겨 다니는 막노동자라는 점에서는 영달과 일치하지만, 돌아갈 고향을 가졌다는 점에서 영달과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그 역시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 고향 삼포가 관광지 개발로 인하여 도시로 변해 버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정신적 안식처인 고향을 잃고 만다. 마지막으로 백화는 군인 부대가 있는 시골 마을의 술집을 전전하는 작부이다. 그녀는 몇 번이나 술집을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황폐화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발길을 돌리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를 정리해 보면, 세 사람은 환상 속에서나마 그리워하던 고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정 씨의 경우에서 보듯, 그들이 고향을 잃어버리게 된 까닭은 산업화 내지 도시화로 인하여 고향이 해체되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유랑하고 있다는 점도 세 사람의 공통점이다.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고향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며 아무런 재산도 가지지 못한 그들로서는 생계유지를 위해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는 일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로 볼 때, 결국 그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농어촌으로부터 쫓겨나와 정처 없이 떠도는 소외 계층을 대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 김윤식, “김윤식 교수의 소설 특강 6”(한국문학사, 1997)

 

 

길을 따라 진행되는 주인공 들의 의식의 변화 과정

  이 작품에서 영달과 정 씨, 백화는 모두 소외 계층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영달과 정 씨, 그리고 백화의 만남에서 각각 그들은 서로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으며 거친 말과 행동을 한다. 그러던 그들은 일시적인 동행이 되어 길을 걸으면서 점점 서로에게 융화되어 가고, 그들의 대화와 서로에 대한 행동을 통해 그들 개인의 고유한 순수성과 인정이 드러나기 시작한
다. 처음에 상당한 거리감을 느꼈던 인물들이 함께 걷는 길이 이어지면서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져 주는 관계가 되어 가는 것이다.

 

 

산업화 사회와 우리 소설

  우리 사회는 1960년대 초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현실의 타개와 민생고의 해결을 기치로 내건 군사 독재 체제의 집권 이후, 급속한 산업화로 치닫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전 국토는 노동 현장화되었고, 수많은 부랑 근로자가 생겨났다. 산업화가 본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이를 대신하여 공장 근로자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도시 빈민으로 대변되는 소외 계층의 문제가 사회의 중심적 과제로 부상하였다. 황석영의‘삼포 가는 길’은 부랑 근로자의 문제, 윤흥길의‘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공장 근로자의 문제, 조세희의‘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공’은 소외된 도시 빈민의 문제를 다루어, 인간의 삶의 조건, 인간성의 상실과 회복, 건강한 삶의 양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추구를 보여 주었다.

 

 

‘삼포(森浦)’의 상징적 의미

  ‘삼포(森浦)’는‘바닷가의 숲이 울창한 마을’이란 뜻으로, 경치가 아름답고 인정이 넘치는 고향, 근대화 이전의 훼손되지 않은 농어촌 공동체를 의미한다. 즉, 작가가 작품 속에서 설정한 가상 공간으로 영원한 마음의 고향을 뜻하는 심리적 지명인 것이다. 이러한 삼포는 떠돌이 삶을 살아가는 정 씨에게는 오랜 방랑 생활의 종착역으로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자 정신적인 안식처이다. 그런데 이러한 삼포마저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개발의 몸살을 앓고 결국 정 씨가 떠나고자 했던 도시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곳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를 통해 작가는 산업화가 초래한 정신적 고향 상실의 단면을 형상화하고, 이로 인해 뿌리를 잃고 영원한 떠돌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 “현대 소설 필수 아이템2”(디딤돌, 2004)

 

 

‘삼포 가는 길’에서의 ‘길’과 ‘고향’의 의미

  이 작품의 한 주인공이 찾아가는 고향 삼포는 이제 그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대단위 간척 사업과 공단 조성 공사로 인하여 삼포는 도시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공간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삼포 가는 길’은 1970년대의 산업화가 초래한 정신적 고향 상실의 가장 상징적인 단면을 형상화해 내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삼포로 가는 길은 춥고 지루하고 고된 길이지만, 세 사람의 등장인물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인습의 굴레 안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우의와 의리와 같은 인간적 덕목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간 고향은 이미 뿌리 박고 살 수 있는 안온한 곳이 아니라 어수선하고 낯선 고장이 되어 버렸고, 그들 앞에는 또다시 고달픈 뜨내기의 길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겨울의 황량한 시골 들판 길은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소외된 인물들의 모습과 그대로 대응한다. 그들은 삶의 한복판으로부터 밀려난 주변인이며 군더더기와 같은 존재이지만, 일상인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질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삶의 땅바닥에 깔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발산하는 허허로움과 자유로움이며 일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어떤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황석영은 이 작품에서 바로 이 같은 인간의 모습을 찾아냄으로써 차원 높은 인간 긍정의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권영민, “한국 현대 문학사”(민음사, 2002)

 

 

'삼포 가는 길'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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