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전(萬歲前)
염상섭
1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던 전해 겨울이다.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휴전조약이 성립되어서 세상은 비로소 번해진 듯싶고, 세계개조의 소리가 동양 천지에도 떠들썩한 때이다. 일본은 참전국이라 하여도 이번 전쟁 덕에 단단히 한밑천 잡아서, 소위 나리킨(成金), 나리킨 하고 졸부가 된 터이라, 전쟁이 끝났다고 별로 어깻바람이 날 일도 없지마는, 그래도 또 한몫 보겠다고 발버둥질을 치는 판이다.
동경 W대학 문과에 재학 중인 나는 때마침 반쯤이나 보던 연종시험(年終試驗)을 중도에 내던지고 급작스레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해 가을부터 해산 후더침(아이를 낳은 뒤에 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생기는 여러 가지 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아내가 위독하다는 급전(急電)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동경에서 떠나오던 날은 마침 시험을 시작한 지 둘째 날이었다. 그날 나는 네 시간 동안이나 시험장에서 추운 데 휘달리다가 새로 한 시가 지나서 겨우 하숙으로 허덕지덕 나아오려니까, 시퍼렇게 언 찬밥덩이(생기기도 그렇게 생겼지마는, 밤낮 찬밥덩이만 갖다가 주는 하녀이기에 내가 지어 준 별명이다)가 두 손을 겨드랑이에다 찌르고 뛰어나오는 것하고, 동구 모퉁이에서 딱 마주쳤다.
“앗! 리상, 지금 오세요? 막 금방 댁에서 전보환(電報換)이 왔던데요. 한턱 내셔야 합넨다, 하하하.”
하고 지나쳐 간다.
그러지 않아도 사오 일 전에 김천(金泉)의 큰형님이 부친 편지가 생각나서, 어쩌면 오늘 내일쯤 전보나 오지 않을까? 하는, 근심인지 기대인지 자기도 알 수 없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오던 차에 그런 소리를 듣고 보니, 가슴이 뜨끔하면서도 잘 되었든 못 되었든 하여간 일이 탁방(결말)이 난 것 같아서 실없이 마음이 턱 가라앉는 듯도 싶었다.
‘흥, 찬밥뎅이를 만났으니 무에 되겠니? 그예 나오라는 게로구나!’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며, 그래도 총총걸음으로 들어갔다. 채 문지방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주인 여편네가 곁방에서 앉은 채 미닫이를 열고 생글 웃어 보이며,
“인제 오십니까? 춥지요? 댁에서 전보가 왔는데요…….”
하고 전보환 봉투와 함께 하얀 종잇조각을 내민다.
일전에 김천 형님이 서울 올라가서 편지를 부치시며, 집에서 시급하다는 통기가 왔기로 자기 집 동리의 명의(名醫)라는 자를 데리고 어제 올라왔는데, 아직은 그만하거니와 수일간 차도를 보아서 정 급한 경우면 전보를 놓겠노라고 한 세세한 사연을 볼 때에는, 전보는 쳐서 무얼 하누? 하던 나도 전보를 받고 보니 암만해도 죽으려나? 하는 생각이 나서 손에 든 책보를 내려놓을 새도 없이 당황히 펴보았다. 그러나 일전에 온 편지의 말대로 위독하다는 말은 없고, 다만 어서 나오라는 명령과 전보환을 보낸다는 통지뿐인 것을 보면, 언제라고 그리 걱정을 해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마는,
‘아직 죽지는 않은 게로군!’
하고 안심이 되면서도 도리어 좀 의아한 생각도 떠올랐다.
‘그리 시급히 턱을 까부는 것은 아니라도 죽기 전에 한번 대면이라도 시키려구 그러는 것인지? 죽었다고 하기가 안되어서 이러니저러니 잔사설 할 것 없이 그저 나오라고만 한 것인지……?’
나는 구두를 벗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는, 죽었으면 나 안 가기로 장사 지낼 사람이 없어서 시험 보는 사람더러 나오라는 것인가? 하고, 공연히 불뚝하는 심사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돈은 그 달 학비까지 얼러서 백 원이나 보내 왔다. 병인은 죽었든 살았든 하여간에, 돈 백 원은 반가웠다. 시험 때는 당하여 오고 미구에 과세(過歲)를 하려면 돈 쓸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우환이 있는 집에다 대고 철없이 돈 청구만 할 수도 없어 걱정인 판에 마침 생광스럽다. 사실 돈 아쉰 생각을 하면, 시험 본다는 핑계로 귀국은 그만두고 노자를 잘라 써버리고도 싶으나, 아버님 꾸지람이나 집안의 시비도 시비려니와, 실상 묵은 돈을 얻어 오려면 나가는 것이 상책이기도 한 것이다. 시험도 성이 가신 판에 두 번에 질러 보는 것이 유리하였다.
“아주 일어나실 가망이 없으신 게로군요? 얼마나 걱정이 되시구 그립겠습니까?”
내 내자가 앓는 것을 전부터 아는 주부는, 정중한 인사가 아니라 방 안에서 농인지 인사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해해 웃는다.
“걱정이나마나 요새 밥맛이 다 제쳐졌는데!”
나는 코대답을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책보퉁이를 내어던지고, 서랍에서 도장을 꺼내 넣고 다시 나왔다. 주부는 내가 문간으로 나오는 기척에 다시 내다보며 역시 농담 진담 반으로,
“아, 점심도 아니 잡숫구 왜 이리 급하슈? 돌아가시기두 전에 진지를 못 잡숫도록 그렇게 설으셔야 몸이 축가지 않나요?”
하며 점심을 먹고 나가라고 권한다. 천생 밥장수란 돈푼 생긴 것을 보면 까닭 없이 금시로 대접이 다른 것이 배냇병 같은 제 버릇이다.
“암, 실상은 그래야 할 거요. 좀 그래 봤으면 좋겠는데, 주머니 밑천이 든든해지면 계집애한테 문안 갈 생각부터 드니 걱정이지!”
“왜 안 그렇겠에요! 다다미 하구 계집은 새롤수록 좋다고, 벌써부터 장가가실 궁리부터 바쁘신 게로군?”
주부는 심심파적으로 이런 실없는 소리도 하고 새새 웃는다.
“세상 남자가 다 그렇대도 나만은 예외니까!”
나는 구두끈을 매고 일어서며 혼자 웃었다.
“하아, 서방님이 그러실 제야, 돌아가는 아씨 마음은 어떨라구!”
주부는 또다시 이렇게 감탄도 한다.
나는 거리로 나오면서, 주부의 지금 말이 딴은 옳은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자식이나 주줄이 달린 중년 상처꾼이면 모르겠지마는, 그렇지 않은 젊은 놈이면 계집이 죽어 간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제물 이혼이라고 은근히 잘 된 듯싶이 장가들 궁리부터나 하는 것이 십상팔구일지 모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부터도 어려서 정이 들지 않기 때문이지마는, 아무 통양(痛痒, 가려움과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직 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큰길로 빠져나와서 우편국으로 향하였다.
십 원짜리 지폐 열 장을 양복 주머니에 든든히 집어넣고, 우편국에서 나온 나는 우선 W대학 정문을 향하여 총총걸음을 걸었다.
교수실에는 마침 H주임교수가 서류가방을 만적거리면서 나오려고 머뭇거리며 있었다. 나는 H교수가 모자까지 쓰고 나오기를 기다려서 쫓아 나오면서 전보를 내보이고 급자기 귀국하여야 할 사정을 말하였다. H교수는,
“응, 응, 옳지! 그래서?”
하며 듣고 나서 고개를 한참 기울이고 섰더니,
“사정이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겠지. 그러나 추후 시험은 좀 귀찮을걸! 삼사 일간쯤 어떻게 연기할 수 없을까?”
“글쎄요…… 그러나 사정도 딱하고, 기위 이렇게 되고 보니 좀처럼 착심이 될 것 같지도 않고 해서 갔다가 곧 오려는데요…….”
“응! 그도 그래! 그러면 정식으로 수속을 하게 그려.”
H교수는 이같이 허가를 하여 준 후에 몇 가지 주의와 인사를 남겨 놓고, 교무실로 분별을 하여 주러 들어간다. 나도 뒤따라 섰다.
의외에 얼른 승낙을 하여 주기 때문에, 나는 할인권까지 얻어 가지고 나오기는 나왔으나 시험 치르기가 귀찮아서 하는 공연한 구실이라고 오해나 하지 아니할까 하는 자곡지심이 처음부터 앞을 서서, 좀 쭈뼛쭈뼛한 것이 암만하여도 불유쾌하였다. 전차 종점으로 나와서 K정으로 향하는 전차에 올라앉아서도, 아까 H선생더러 얼떨결에 한다는 소리가,
‘어머님 병환이……’라고 한 것을 다시 생각하여 보고, 혼자 더욱이 찌뿌드드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였었다.
‘왜 하필 왈 어머님의 병환이라 했누? 내 계집이 죽게 되어서 가겠다면 어디가 어때서 어머니를 팔았더람?’
이같이 뇌고 뇌었으나 공연한 신경질로 그러는 것이었었다.
그럭저럭 시간은 벌써 세시가 넘었었다. 어차피에 네시 차로는 떠날 꿈도 아니 꾸었었지마는, 인젠 열한시의 야행으로나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을 하고, 나는 K정에서 전차를 내리는 길로 쓰카다니야(塚谷屋)로 들어갔다.
반시간 남짓하게나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뒤적거리다가, 우선 급한 자켓 한 벌을 사가지고 그 자리에서 양복저고리 밑에 두둑이 입고 나서 몇 가지 여행제구를 사들고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그 외에는 또 별로 긴급히 갈 데는 없었다. 인제는 그 카페로 가서 점심이나 먹을까 하다가, 돈푼 가진 바람에 그랬던지 아직 그리 급하지도 않건마는 머리치장이 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근처의 이발소로 찾아 들어갔다.
“다 깎으세요? 아직 괜찮은데요. 면도나 하시지요?”
한 손에 가위를 든 이발장이는 왼손으로 머리 뒤를 살금살금 빗기면서 이렇게 묻는다.
“그럼 면도나 할까!”
나는 이같이 대답을 하고 나서 깎지 않아도 좋을 머리까지 깎으려는 지금의 자기가 별안간 야비하게 생각되는 것을 깨닫고, 앞에 붙은 체경 속을 멀거니 들여다보다가, 혼자 픽 웃어 버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자빠져서도 이처럼 여유 있고 늘어진 자기의 심리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싫든 좋든 하여간 근 육칠 년간이나, 소위 부부란 이름을 띠고 지내 왔는데…… 당장 숨을 몬다는 지급전보를 받고 나서도, 아무 생각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고 무사태평인 것은 마음이 악독해 그러하단 말인가. 속담의 상말로, 기가 하두 막혀서 맥힌 둥 만 둥해서 그런가……? 아니, 그러면 누구에게 반해서나 그런다 할까? 그럼 누구에게……?’
그러나 ‘그러면 누구에게……?’냐고 물을 제, 나는 감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만 뱃속 저 뒤에서는 정자! 정자! 하는 것 같았으나 죽을힘을 다 들여서 ‘정자’라고 대답하여 본 뒤에는, 또다시 질색을 하며 머리를 내둘렀다. 실상 말하면 정자가 아니라는 것도 정자라고 대답하려니만치 본심에서 나온 대답이었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지금 머리를 깎으려고 들어온 동기가 애초에 어디 있었더냐는 것은 분명히 의식도 하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과연 지금 나는 정자를, 내 아내에게 대하는 것처럼 냉연히 내버려둘 수는 없으나, 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니만치 또 다른 의미로 정자를 사랑할 수는 없다. 결국 나는 한 여자도 사랑하지 못할 위인이다.’
이 같은 생각을 할 제 나는 급작스레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생활의 목표가 스러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저러나 지금 이다지 시급히 떠나려는 것은 무슨 때문인가. 내가 가기로 죽을 사람이 살아날 리도 없고, 기위 죽었다 할 지경이면 내가 아니 간다고 감장할 사람이야 없을까? 육칠 년이나 같이 살아온 정으로? 참 정말 정이 들었다 할까? 입에 붙은 말이다. 그러면 의리로나 인사치레로? 그렇지 않으면 일가에게 대한 체면에 그럴 수가 없다거나, 남편 된 책임상 피할 수 없어서 나가 봐야 한다는 말인가. 흥! 그런 생각은 염두에도 없거니와 그런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어디 있는가?’
여기까지 와서는 더 생각을 이어 할 용기가 없었다. 만일에 어디까지든지 캐물을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의 명답을 얻었을지 모르나 그것은 잇몸이 근질근질하는 것 같아서 다시 건드리지도 않고 자기 마음을 살짝 덮어 두었다.
면도를 하고 세수를 하고 치장을 차린 뒤에, 어디로 가리라는 결심도 채 하지 못하고 이발소에서 뛰어나왔다.
‘바로 하숙으로 돌아갈까? 정자에게로 가보나?’
혼자 이렇게 또 망설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떼치지 못할 어떠한 그림자를 쫓으면서 길 밖에서 머뭇거리다가 잡지권이나 살까 하고 동경당을 들여다보았다. 공연히 이 책 저책을 한참 뒤적거리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잡지 한 권을 사들고 나와서도 우두커니 길거리를 내다보며 섰다가 아래로 향하고 발길을 떼어 놓았다. 어느덧 ×정 삼거리로 나와 발끝은 M헌(軒) 문전에 와서 뚝 섰다.
아직 손님이 듬성긋한 홀 속은 길거리보다도 음산하게 우중충하고, 한가운데 놓인 난로에도 불기가 스러져 가는 모양이었다.
“에그,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그려! 왜 그리 한 번도 안 오셨에요.”
밖에서 들어온 사람의 눈에는 그림자만 얼쑹덜쑹하는 컴컴스레한 주방문 곁에 서서 탁자를 훔치던 손을 쉬고, 하얀 둥근 상(相)만 이리로 돌리며 인사를 하는 것은 P자이었다.
나는 난로 앞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놓고 앉으면서,
“그럼 시험 안 보고 술 먹으러 다닐까? 그러나 오늘은 P자가 보구 싶어 책이 어디 눈에 들어가던가! 허허허.”
“왜 안 그러시겠어요, 흥! 하지만 시험 문제를 내건 칠판 위에는 시즈코상(靜子樣)의 얼굴이 왔다 갔다 했겠죠? 하하하.”
하고 P자는 걸레를 내던지고 이리로 오며 웃는다.
“응, 잘 알았어! 그리구 그 뒤에서는 P코상의 이런 눈이 반짝이구…….”
하며 나는 눈을 흘기는 흉내를 지어 보였다.
“그런 애매한 소린 마세요. 두 분이 보따리를 싸시거나, 정사를 하시거나 내게 무슨 상관이나 있게요? 시즈코상!”
P자는 반쯤 웃으면서도 호젓한 표정으로 정자를 목청을 돋워 길게 빼며 부른다.
아직까지도 조선 유학생이라면 돈 있는 집 자질이요, 인물 좋다고 동경바닥서 평판이 좋은데, 문과대학생이 이런 데에서는 장을 치는 ‘태평시대’다. 나는 동창생들에게 끌려 우연히 와본 뒤로 벌써 반년 가까이 드나드는 동안에 이만큼 친숙하여졌다. 이런 자유의 세계에서만도 얼마쯤 무차별이요 노골적 멸시를 안 받는 데에, 감정이 눅어지고 마음이 솔깃하여 내 발길은 자연 잦았던 것이다.
여우(女優) 머리를 어푸수수하게 쪽찌고, 새로 빨아 다린 에이프런을 뒤로 매며 살금살금 나오는 정자는 우선 시선을 P자에다가 보내며,
“이거 웬 야단야?”
이렇게 한마디 하고 나서, 그 신경질적인 똥그란 눈을 이리로 향하고 공손히 인사를 한다. 나는 고개만 끄덕 하고 잠자코 말았다.
“시즈코상! 이번에 ‘이상’이 성적이 좋지 못하시다면 그 죄는 시즈코상에 있습넨다.”
둘의 거동을 한참 건너다보던 P자는 이같이 한마디를 내던지듯이 하고 저리로 다시 가서 탁자를 정돈하고 섰다. 정자는 거기에는 대꾸도 아니 하고,
“참 요새 시험중예요?”
하며 나에게 묻는다. 얼마쯤 반가운 기색이나, 언제나 그러한 자기의 감정을 감추는 정자다.
“그럼, 시험 보다가 말구 보러 왔길래 정성이 놀랍다구 P자상이 놀리는 게 아닌가? 그러나 P자상을 찾아왔는지 시즈코상을 보러 왔는지, 술이 그리워서 왔는지, 그것은 내 염통이나 쪼개 보기 전에야 알 수 없는 일이지. P자! 일이 끝나건 올라와요.”
나는 P자에게 일러 놓고 정자를 따라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맘때쯤은 제일 한산한 개시머리지마는 이층은 아무도 없다.
난로 앞에 자리를 만들어 나를 앉혀 놓고, 정자는 저편에 가 서서 영채가 도는 똥그란 눈으로 무슨 기미를 찾아내려는 듯이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니까 생긋 웃는다.
이 계집의 정기가 모두 그 눈에 모였다고도 할 만하지마는 항상 모든 것을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혹간은 무심코 고개를 돌릴 만치 차디차고 매정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어느 때든지 생긋 웃는 그 입술에는 젊은 생명이 욕구하는 모든 것을 아무리 하여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소리를 내지 않고 웃는 호젓한 미소에서, 침정(沈靜)과 애수(哀愁)의 그림자를 어느 때든지 볼 수 있었다. 남성이란 남성을 못 믿고 저주하면서도 그래도 내버리고 단념할 수 없는 인간다운 애착이며 성적 요구에서 일어나는 답답한 심정을 그대로 상징한 것이 이 계집애의 그 시선과 미소이었다.
“왜 그리 풀이 죽으셨에요. 너무 공부를 하시느라고 얼이 빠지셨습니다 그려?”
정자는 남자가 잠자코 있으니까 좀 어색한 듯이 체경 있는 쪽으로 잠깐 고개를 돌리고 머리를 만적거리며 입을 벌렸다. 이 계집애의 나직나직한 목소리에도 좀더 크게 하였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날 만치 절제하고 압축된 탄력이 있었다. 이 계집은 자기의 목소리에서까지 자기를 억제하고 숨기려 하는가 싶었다.
“왜 누가 얼이 빠져? 어서 가서 술이나 갖다 주구려. 벌써 거진 네시나 되었을걸?”
나는 시계를 꺼내 보며 재촉을 하였다. 정자는 나가려다가 돌쳐서며,
“왜 어딜 가세요?”
하고 물으며 가까이 온다. 내가 앉았는 안락의자의 등덜미에 한 손을 걸쳐 놓으며 무릎이 맞닿도록 다가서며 생글 하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애무를 바라는 표정이다.
“가긴 어딜 가!”
“뭘, 인제 시험을 마쳐 놓고 어디든지 조용한 데루 여행을 하시는 게지! 어디 두고 보면 알겠지!”
하며 저쪽 체경 탁자로 가서 그 위에 놓은, 내가 들고 들어온 봉지를 두 손으로 만적거리며 건너다보고 서 있다. 그 속에는 내가 아까 쓰카다니야에서 사가지고 온 풍침과 여행용 물잔이며, 부친을 위한 여송연상자, 과자상자, 비단 여편네 목도리를 넣은 종잇갑…… 이것저것이 들어 있었다.
장난꾸러기처럼 먼산을 쳐다보며 한참 만적만적하던 정자는,
“웬 선사품이 이렇게 많은구? 댁에 가시나 보군요?”
하며 체경 속을 들여다보고 생글 웃으며,
“어디 좀 펴봐야! 뭘 이렇게 많이 무역을 해 가시나?”
하고 제멋대로 풀기를 시작한다. 나는 웃으며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풍침, 컵, 왜비누, 담뱃갑, 과자상자…… 탁자 위에다가 진열대처럼 벌여놓더니, 맨 밑에 있는 숄갑을 펴들고 생글생글 웃다가 난로 앞으로 와서 서며,
“이건 아가씨 것이군요?”
하며 내민다. 그때의 그의 눈과 그 입술에는 시기에 가까운 막연한 감정을 감추려고 애를 써 웃는 빛이 살짝 지나갔다.
“잘 알았소!”
하며 나는 홱 뺏으며 정자를 껴안듯이 부둥켜안다가 목도리를 다시 개킨다.
“잘못했습니다. 누가 줄 사람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까, 하하하.”
하고 정자는 좀 어색한 듯이 웃고 섰다. 그러나 기회가 마침 좋다고 생각한 나는 벌떡 일어나는 길로, 손에 든 자주 바탕에 흰 안을 받친 목도리를 눈깜짝 새에 둘둘 말아 가지고 정자의 앞으로 덤벼들며, 목을 껴안으면서 소매 속에 쑥 넣으면서 술취한 사람처럼 장난 비슷이…… 하였다. 불의에 난폭한 습격을 받은 정자는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생글 웃는 낯을 본 법하였다. 일 분쯤 지났을까, 정자는 나의 팔을 뿌리치고 얼굴이 발개서 내려가 버렸다. 뒷모양을 가만히 노려보고 섰던 나는 두세 걸음 쫓아 나가며,
“노하지 말아요. 그리구 어서 가져와!”
하고 곱게 일렀다.
나의 한 일은 점잔치는 못하였으나, 다른 손이 올라오기 전에 주고 싶고, P자에게 알리기 싫으니 그 외의 수단을 모르는 나는 그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멀거니 섰다가 여기저기 흐트려 놓은 물건을 빈 갑까지 싸서 놓고 자기 자리로 와서 앉았다.
위스키병을 들고 올라온 정자는 한 잔 따라 놓고 뾰로통하여 섰다가, 체경 앞으로 가서 머리를 고치고 다시 와서는 멈칫멈칫하며 바로 앉지를 않았다. 나의 눈에는 부끄러워하는 그 기색이 도리어 기뻤다. 더구나 노기가 있는 것은 인격적 자각의 반영(反映)이라고 생각할 때, 미안하기도 하고 위로하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왜 그래? 오늘 밤에 어딜 갈 텐데 섭섭하기에 변변치는 않은 것이나마 사가지고 온 것이야. 조금이라도 어떻게 생각지는 않겠지? 남의 눈에 띄는 것이 재미 없겠기에 그런 거야.”
그것도 객기로 산 것이지마는 참답게 주지 못한 것을 나는 후회하였다.
“천만에요! 되레 미안합니다. 그러나 댁에를 가세요? 지금 떠나실 테에요?”
정자는 될 수 있는 대로 냉연히 물었으나 흥분한 마음을 무리로 억제하는 양이 역력히 보이었다.
“글쎄, 집엘 좀 가야 할 일이 있는데 밤에 떠날지?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아서…….”
나는 어느 틈에 정숙한 말씨로 변하였다.
“무슨 볼일이 계시기에 시험을 보시다가 말구 가세요?”
하며 정자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쳐다본다. 그때에 마침 요리가 승강기로 올라오기 때문에 정자는 일어섰다. 나는 그 길에 P자를 부르라고 일렀다. 정자는,
“예에?”
하고 한참 나를 돌아다보고 섰다가 다시 돌쳐서서 P자를 소리쳐 부른 뒤에 요리 접시를 들어다 놓는다. P자도 뒤따라 들어왔다.
“재미있게 노시는데, 쓸데없이 폐올시다그려, 하하하.”
하며 P자는 내가 가리키는 교의에 털썩 앉으며 식탁에 놓였던 잡지를 들어서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P자의 푸근푸근한 얼굴은 언제 보아도 반가웠다.
명상적(暝想的)이요 신경질일 뿐 아니라 아직 순결한 맛이 남아 있는 정자에게 비하면, P자는 이러한 생애에 닳고 닳아서, 되지 않게 약은 체를 하면서도 상스럽고 천한 구석이 있지마는 그래도 나는 이러한 여자에게 흥미를 느꼈다.
“올라오라니까 왜 그리 우자(어리석은)스러운 거야? 꼭 모시러 가야만 하나?”
나는 잡지를 뺏어서 손을 내미는 정자에게 넘겨 주고 P자의 포동포동한 손을 잡아서 만적거리며 시비를 걸었다.
“우자하긴 누가 우자해요? 이런 문학가 양반네들만 노시는 데에는 감히 올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요.”
하며 P자는 손을 슬며시 빼고 정자를 살짝 건너다보고는 나를 다시 향하여 방긋 웃었다.
P자에게 대한 정자는, 어떠한 때든지 눈엣가시이었다. 비단 나뿐 아니라 어떠한 손님이든지 P자와 친숙한 사람도 내종에는 정자에게로 빼앗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자가 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을 뿐 아니라 문학서적과 소설을 탐독한다는 것이 P자로서는 경앙(景仰)하는 동시에 한손 접히는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어느 때든지 두 계집애를 다 데리고 이야기하지 않는 때가 없었다. P자나 정자가 다른 손님을 맡은 때에라도 밤이 늦도록 기다려서 만나 보고야 나왔다. 더욱이 P자가 없을 때에 그리하였다. 이것이 정자에게는 눈치를 채이면서도 의문인 모양이었다.
“참 그런데 언제 떠나세요?”
정자는 보던 책을 식탁 위에다가 놓으며 나를 쳐다보고 물었다.
“글쎄…….”
나는 어정쩡한 대답을 하며 정자의 기색을 유쾌한 듯이 건너다보고 앉았었다.
“왜 어딜 가세요?”
P자는 일어나서 정자가 앉은 교의 뒤로 가며 물었다.
“오늘 밤에 떠나세요?”
또다시 잼처 정자가 묻는다. 나는 지금 막 들어온 전등불을 쳐다보며 앉았다가,
“실상은 내 마누라가 앓는 모양인데, 턱을 까부니 어서 오라고 야단은 야단이지만 아직도 갈까말까다.”
“네, 그래요? 그럼 어서 가보셔야죠. 그 동안에 돌아가셨으면 어떡하나요!”
P자는 나를 책망하듯이,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본다.
“죽으면 죽었지, 어떡하긴 무얼 어떡해.”
나는 잠자코 앉았는 정자를 건너다보며 웃었다.
“사내는 다 저래! 저런 남편을 믿고 어떻게 사누?”
P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혼자 탄식을 하며, 정자의 교의 뒤에 매달려서 정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동의를 구한다.
“누가 믿구 살라는 것을 사나……?”
하고 나는 실없이 한마디 하다가 다시 정색으로 말을 이었다.
“부부간에 서로 믿는다는 것은 결국 사랑한다는 말이지만, 사랑한다는 것도 극단에 가서는 남이 나를 사랑하거나 말거나 저 혼자의 일이다. 저 사람이 받지 않더라도 자기가 사랑하고 싶으면, 자기가 만족할 데까지 사랑할 것이다. 외기러기 짝사랑이라고 흉을 본다기로 그거야 알 배 아니거든. 그와 반대로 사랑치 않는 것도 자유다. 사람에게는 사랑할 자유도 있거니와 사랑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부부간이라고 반드시 사랑하여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을까. 없는 사랑을 의무적으로 짜낼 수야 있나? 하하하…….”
나는 문학청년의 버릇으로 이런 논리를 캐고 깔깔 웃었다.
정자와 P자는 나의 입을 똑바로 노려보고 앉아서 들으며, 정자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가끔가끔 고개를 끄떡거리고 있었다. 나는 따라 놓았던 술 한 잔을 들어 마시고 나서 또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나 문제는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그 어름에다가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이다. 죽거나 살거나 눈 하나 깜짝거리지도 않으면서 하는 공부를 내던지고 보러 간다는 것이 위선이다. 더구나 여기 술 먹으러 오는 것을 무슨 큰 죄나 짓는 것같이 망설이는 것부터 큰 모순이다. 목숨 하나가 없어진다는 것과 내가 술 먹는다는 것과는 별개 문제다. 그러면서도 ‘내 처’가 죽어 가는데 술을 먹다니? 하는 오죽잖은 ‘양심’이 머리를 들지만, 그것이 진정한 양심이라기보다도 관념이란 가면이 목을 매서 끄는 것이다. 사람은 관념의 노예가 되는 수가 많다. 가식의 도덕적 관념에서 해방되는 거기에서 참된 생명을 찾는 것이다. 사랑치 않으면 눈도 떠보지 않을 것이요, 사랑하고 싶으면 이렇게 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란다!”
하며 나는 벌떡 일어나서, 정자의 어깨를 짚고 꾸부리고 섰는 P자를 껴안으며 키스를 하려는 흉내를 내었다. 무심코 섰던 P자는 질겁을 하며,
“에구머니, 사람을 죽이네!”
하고 깔깔대며 뛰어 달아나서 저만치 가서 앉는다. 그 사품에 나는, 웃으면서 일어나는 정자와 맞장구를 쳤다. 그대로 얼싸안았다.
술이 얼쩍하게 취하여 문간으로 나오는 나를 앞질러서 따라 나오며 정자는 거진 입이 닿도록 내 귀에다 대고,
“정말 밤차로 가세요?”
하며 소곤거린다.
“생각나는 대로 하지…… 그런데 왜?”
“글쎄요…….”
하고 나서 정자는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P자가 쫓아 나오는 것을 보고 한걸음 물러섰다.
“하여간 갈 길이니까 어서 가야지. 그럼, 한 달쯤 있다가 올 테니까 그때 또 만납시다.”
나는 이같이 한마디 남겨 놓고 길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아직 초저녁이지마는 첫추위인데다가, 낮부터 음산하였던 일기는 마치 눈이나 오려는 듯이 밤이 들어 갈수록 쌀쌀하여졌다. 사람 자취도 점점 성기어 가고 길바닥에 부딪는 나막신 소리는 한층더 요란히 들린다. 점두에 매달린 전등불빛까지 졸리운 듯 살얼음이 잡히어 가는 듯 보유스름하게 비치는 것이 더욱 쓸쓸하여 보였다.
나는 곧 차에 뛰어오르려다가, 사람이 붐비는 갑갑한 차 속으로 기어들어갈 생각을 하니, 얼근한 김에 차마 올라설 용기가 나지를 않아서 그대로 돌쳐서서 O교 방향으로 꼽들었다.
화끈화끈 다는 뺨을 살금살금 핥고 달아나는 저녁 바람에 정신이 반짝 날 듯하면서도, 마음은 어찌하여 그렇다고 꼭 집어 말할 수 없이, 조 비비듯 조바심이 나서 못 견딜 지경이다. 자기 자신에게 대한 반항인지, 자기 이외의 무엇에 대한 반항인지 그것조차 뚜렷이 알 수 없으면서, 덮어놓고 앞에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해내려는 듯한 터무니없는 울분이 가슴속에서 용심지같이 치밀어 올라왔다. 컴컴한 속에서 열병에나 띄운 놈 모양으로 포켓에 찔렀던 두 손을 꺼내 가지고 뿌리쳐 보기도 하고, 입었던 외투나 윗저고리를 벗어서 O교 다리 밑으로 보기 좋게 던져 버렸으면 하는 객기도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발은 기계적으로 움직이어 O교 정거장을 지나 S교를 향하고 돌쳐서서 여전히 컴컴한 천변가로 헤매며 내려갔다.
이러한 공상이 한참 계속된 뒤에는 별안간에 눈물이 비집어 나올 만치 지향할 수 없는 애처로운 생각이 물밀듯 하고 참을 수 없이 허전하고 외로운 생각에 긴 한숨을 뿜어 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는,
‘무슨 때문에 눈물이 필요하단 말이냐. 실상 완전한 자유는 고독에 있고 공허에 있지 않은가?’
나는 속으로 이같이 변명하여 보았다.
그것은 마치 종로에서 뺨맞은 놈이, 행랑 뒷골에서 눈을 흘기다가, 자기의 약한 것을 분개하여 보기도 하고 혼자 변명하기도 하여 보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겁겁증이 나서 몸부림을 하는 일종의 발작적 상태는 자기의 내면에 깊게 파고들어 앉은 ‘결박된 자기’를 해방하려는 욕구가 맹렬하면 맹렬할수록, 그 발작의 정도가 한층 더하였다. 말하자면 유형무형한 모든 기반, 모든 모순, 모든 계루에서 자기를 구원하여 내지 않으면 질식하겠다는 자각이 분명하면서도, 그것을 실행할 수 없는 자기의 약점에 대한 분만(憤懣,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가득함)과 연민과 변명이었다.
나는 참을 수 없어서 포병공창 앞으로 달아나는 전차에 뛰어올랐다. 이러한 때에 미인의 얼굴이라도 쳐다보면 캠퍼 주사만한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었으나 나의 이지(理智)는 그것조차 조소하였다.
그러나저러나, 노역과 기한에 오그라진 피부가 뒤틀린 얼굴밖에 내 눈에는 비치지 않았다. 그들은 시든 얼굴을 서로 쳐들고 물끄럼말끄럼 마주 건너다보기도 하고, 곁의 사람을 기웃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앉았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이사람 저사람 쳐다보다가,
‘여러분, 장히 점잖구 무섭소이다그려!’
이렇게 한마디 하고 일부러 허허허 하며 웃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 나 혼자 제풀에 빙긋 하여 버렸다.
이렇게 안 나오는 거드름을 빼고, 될 수 있는 대로 우자한 태도로 좌우를 돌려다보는 것은 비단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에게만 한한 무의식한 습관이 아니라 사람의 공통한 성질인 동시에 사람이란 동물이 얼마나 약한가를 유감없이 말하는 것이다. 약하기 때문에 조그만 승리와 조그만 자랑을 얻으려 애쓰고, 약하기 때문에 성세(聲勢)를 허장(虛張)하며, 약하기 때문에 자기의 주위에 경계망을 쳐놓고 다른 사람을 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상대자의 용모나 옷 입은 것, 행동거지, 말씨…… 이런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음미함으로써, 자기의 비열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본능적 요구가 있는 것도 물론이겠지마는, 저편을 엿보는 데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우선은 자기 방어상 저편의 강약과 빈부의 정도를 감정할 필요를 느끼고, 그 다음에는 의복과 말씨와 행동거지가 남에 빠지면 도회생활에 있어서는 큰 고통이요 수치이기 때문에 신경이 여기에 집중된다. 또한 그들에게는 피차에 구하는 것이 있으니 아첨하고 농락하려는 한편에 농락되지 않으려는 우월감(優越感)과 경계와 추세(趨勢, 어떤 세력이나 세력 있는 사람을 붙좇아서 따름)라는 등 잡념으로 말미암아 자연히 저편의 표정이나 비식(鼻息, 코로 쉬는 숨)을 엿보는 데 명민한 것을 서로 자랑한다. 또 여자는 여자대로 자기의 목숨인 사랑을 얻기에 목이 말라서 그 불순의 도가 한층 더하다. 이런 점으로 보면 제일 순진하고 아름다운 것은 전차 속에서나 거리에서 청춘남녀가 본능적으로 이성의 미(美)를 부산히 찾으면서도 담담히 지나치는 것일지 모른다. 이성(異性)을 꿈꾸는 순진한 청춘남녀에게는 불순한 욕심이 없다. 적어도 물질적 욕심이 없다. 아첨할 필요도 없고 우월감이나 농락하려는 야심도 없고 방어하고 반발하려는 적대심이란 손톱만큼도 없다. 다만 미를 동경하고 감상하며 이에 도취하고 감격한다. 더구나 그러한 생명의 연소가 영원히 흐르는 물결에 뿌려지는 월광의 은박(銀箔)같이 아무 더러운 집착 없이 순간순간에 반짝이며 스러져 버리는 것이 더욱이 향기롭고 깨끗하다. 그러나 위선 없이 살지 못하리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운명이다. 그리하여 인생의 움(芽, 싹)같은 그들도 미인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법이 없다. 도적질을 해서 본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고약한 버릇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순박하고 순진한 것은 소위 하층사회의 기습(氣習, 집단이나 개인에게서 특징적으로 보이는 습성이나 습관)일 것이다. 노동자에 이르러서는, 자랑할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는 대신에 적나라한 자기와, 이웃에 대한 동정과, 방위적 단결이 있을 따름이다. 생활의 실질이나 양식이나 제일 진실되고 본질적이다. 그들은 사람과 사람끼리 만날 때에 결코 노려보거나 음미하거나 탐색하지는 않는다. 가식도 필요 없고 자기네끼리 아유구용(阿諛苟容, 남에게 아첨하여 구차스럽게 굴다)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병은 무지일 따름이다. 무질서일 따름이다.
하고 보면 결국 사람은 제 소위 영리하고 교양이 있으면 있을수록(정도의 차는 있을지 모르나) 허위를 되풀이하여 가면서 비굴한 타협이 아니면 옆사람을 자기에게 동화시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기적 동물이다. 구구한 타협도, 남의 동화도 강요하려 들지 않는 전아(全我, 관념론에서 자아의 전체를 이르는 말)의 생활, 자유로운 생활을 꿈꾼다면 우선 세속적으로는 낙오자에 자적(自適, 아무런 속박을 받지 않고 마음껏 즐김)하겠다는 각오를 필요조건으로 한다…….
나는 어느덧 이러한 난데없는 생각에 팔려, 역시 이사람 저사람 쳐다보고 앉았다가, 정자의 지금의 생활을 생각하여 보았다.
정자는 저의 집에서 뛰어나왔다 한다. 사정을 들어 보면 그도 그럴 것이다.
나는 그 애가 반역자라는 점은 찬성이다. 그러나 자기의 생활을 자율하여 나갈 길이 있을까 의문이다. 자기 생활의 중류(中流)에 뛰어들어갈 용기가 있을까? 자각도 있고 영리는 하지만…… 그러나 허영심이 앞을 서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전차는 종일 노역에 기진하여, 허덕허덕 다리를 끌면서 잠이 들어가는 집집의 적막을 깨뜨리려는 듯이, 빽빽 기를 쓰는 듯한 외마디 소리를 치며, 에도가와 가도의 컴컴한 길을 겨우 기어나와서 대낮같이 전등이 환한 차고 앞에 와서 한숨을 휘 쉬며 우뚝 선다. 졸음 졸듯이 고요하던 찻간 안은 급작스레 왁자하여지면서 우중우중 내린다.
나도 검은 양복바지에 푸른 저고리를 입고 벤또갑을 든 사오 인의 직공 뒤를 따라 내려왔다. 쌀쌀한 바람이 확 끼치었다.
“아, 요새도 밤일을 하슈? 오늘은 제법 춥지요?”
“예, 인제 참 겨울인데요.”
“이리 들어와 좀 녹여 가시구려.”
차고 문간에 섰던 차장과 이런 수작을 하며, 따뜻하여 보이는 차장 휴게실로 끌려 들어가는 직공들의 뒤를 부러운 듯이 건너다보며 나는 그 사잇골짜기로 들어섰다.
하숙으로 휘돌아 들어가는 길에 뒷집에 있는 ×군을 들여다볼까 하며 망설이다가, 결국 들어가 보았다. 알리면 정거장에를 나와 주고 하여 폐가 되겠기 때문에 망설인 것이다. ×군은 내가 이 밤으로 귀국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당자인 나보다도 놀라며 진정으로 가엾어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람 좋은 ×군을 도리어 웃으면서 하숙으로 함께 돌아왔다.
×군과 같이 짐을 수습하여 주인에게 맡긴 뒤에 인사받을 새도 없이 총총히 가방을 들고 우리 둘이서 동경역으로 향한 것은 그럭저럭 열시 가까워서였다. ×군이 재촉을 하는 대로 나는,
“늦으면 내일 떠났지, 하는 수 있나!”
하면서도 허둥허둥 동경역에 나와 보니까, 내 시계가 틀리었던지 그래도 십 분 가량이나 여유가 있었다.
가방을 뒤에 섰는 ×군에게 맡겨 놓고 차표를 사려고 출찰구 앞에 가서 섰으려니까, 곁에서 누가 살짝 건드리며,
“리상!”
하는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린다. 나는 깜짝 놀라서 돌아다보았다. 역시 정자다. 노르끄레한 곱다란 보자에다가 네모진 것을 싸서 들고, 옆에 선 ×군의 시선을 꺼리는 듯이 힐끔힐끔 흘겨보고 섰다.
“웬일이야? 이 춘 밤에.”
나는 의외인 데에 놀라며, 나무라듯 위무하는(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래다) 듯이 한마디 하였다.
“난 안 가시는 줄 알았지!”
“한참 기다렸어?”
“아뇨, 난 늦을까 봐 허둥지둥 나왔더니…….”
“미안하구려, 어서 들어가지. 그럼…….”
정자는 거기에는 대답도 아니 하고, 맞은편 출찰구로 입장권을 사러 총총걸음으로 걸어갔다…….
×군이 자리를 잡으려고 앞서 들어간 뒤에 정자와 맨 끝으로 둘이 나란히 서서 걸으며 입을 벌렸다.
“오래 되실 모양이에요?”
“뭘, 고작해야 이 주일쯤이지.”
“오래 되시건 편지라도 해주세요. 그 동안에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왜, 어딜 가겠기에?”
“글쎄 봐야 하겠지마는…… 밤낮 이 모양으로만 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정자는 말을 끊고 잠깐 고개를 기울이고 걷다가 가까이 와서 매달리듯이 몸을 살짝 실리며,
“이렇게 급하지만 않았더면 나도 같이 경도(京都)까지라도 가는 것을…….”
하며 나를 쳐다보고 호젓이 웃는다. 나는 잼처 무엇을 물으려다가 ×군이 황망히 손짓을 하며 부르는 바람에, 정자와는 총총히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서 ×군과 바꾸어 앉았다.
친구에게 전송을 받거나 물건을 받는 일은 별로 없었기도 하려니와 도리어 귀찮은 일이지만, 정자가 무엇인지 보자에 싼 채 창으로 디밀며 지금 펴볼 것 없다 하기에, 나는 그대로 받아서 선반에 얹을 새도 없이 차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반 간통쯤 떨어져서, 오도카니 섰던 정자의 똑바로 뜬 방울 같은 두 눈이 힐끗하더니 몰려 나가는 전송인 틈에 사라져 버렸다.
2
반찬 찬합같이 각다구니를 여기저기 함부로 벌여놓고 꼭꼭 끼여 앉았는 틈에서 겨우 잠이랍시고 눈을 붙였다가 깨니까, 아직 동이 트려면 한두 시간이나 있어야 할 모양. 찻간은 야기에 선선하면서도 입김과 담배연기에 흐렸다. 다시 눈을 감아 보았으나 좀처럼 잠이 들 것 같지도 않고, 외툿자락을 걸친 어깨가 으스스하여, 일어나 앉으며 담배를 피워 물고 나서 선반에 얹힌 정자가 준 보자를 끌어내렸다. 아까 받아 얹을 때에 잠깐 보니까 과자상자 위에 술병 같은 것이 두두룩이 얹혀 있는 것 같아서 긴하게 생각이 든 것이다. 네 귀를 살짝 접어서 싼 보자의 귀를 들치고 보니까 과연 갑에 넣은 위스키병이 얹히어 있다. 어한(추위에 언 몸을 녹임. 또는 추위를 막음)으로 한잔 할 작정으로 병을 쑥 빼려니까 갸름한 연보랏빛 양봉투가 끌리어 나왔다.
‘별안간에 편지는 무슨 편지인구…….’
그래서 나중에 펴보라고 한 것이라고 나는 혼자 속으로 생각하며 그래도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는 포켓에 집어넣고 술부터 따라서 한숨에 켰다.
영리한 계집애요 동정할 만한, 카페의 웨이트리스로는 아까운 계집애다라고 생각은 하였어도 그 이상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정열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값이면 정자를 찾아가서 술을 먹는 것이요, 만나면 귀여워해 줄 뿐이다. 원래가 이지적, 타산적(打算的)으로 생긴 나는, 일시 손을 대었다가 옴칠 수도 없고 내칠 수도 없게 되는 때에는 그 머릿살 아픈 것을 어떻게 조처를 하나? 하는 생각이 앞을 서는 동시에, 무슨 민족적 감정의 구덩이가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아니라도, 이왕 외국 계집애를 얻어 가지고 아깝게 스러져 가려는 청춘을 향락하려면 자기에게 맞는 타입을 구하겠다는 몽롱한 생각도 없지 않아서 그리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무슨 생기가 났다느니보다도 세찬 삼아서 사다 준 숄 한 개가 인연이 되어 편지까지 받게 되고 보니, 막연히 반갑다는 정도를 지나서 좀 실답게 자기 태도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는 책임감 비슷한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귀엽다고는 생각하였지마는 연애를 해보려는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요, 물론 목도리 한 개로 환심을 사려는 더러운 야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진정한 애욕이 타오르면 그런 것을 사주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젊은 여자와 어울려 노는 것은 좋으나 그 이상 깊게 끌려 들어갔다가 자기 생활에 파탄을 일으키고 공연한 고생을 사서 할까 보아 경계를 하는 자기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두어 잔 술을 마신 뒤에 비로소 편지를 꺼내서 피봉을 들여다보았다. 침착하고도 생기 있는 정돈된 필적은 그 애의 모습과 같이 재기가 발리어 보였다. 나는, 앞사람은 졸고 앉았지만 누가 보지나 않을까 하고 좌우를 돌려다보며 그래도 궁금증이 나서 쭉 뜯어보았다.
지금은 이런 편지를 올릴 기회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이 지경이기로 물질로 좌우되는 천착한 계집이라고 생각하실 것이 너무도 창피하고 원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할수록에…….
이렇게 허두를 내놓고 나의 실답지 않은 태도에 대한 불만과 공격이 있은 다음에, 자기의 지금 처지와 장래에 대한 희망 등을 요령만 간단히 쓴 뒤에, 형편 따라서는 세말쯤, 혹은 경도의 고모 집으로 갈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한번 쭉 보고 나서 혼자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소거나 나에게 대한 이 여자의 신뢰에 대하여 만족한 미소는 아니었다. 애를 써 설명하자면, 그 계집애의 조리가 정연한 이론과 이지적이요 명민한 그 애의 머리에 만족을 느꼈다 할까?
나는 곧 답장을 써볼까 하다가, 하나 둘씩 일어나 앉는 사람들의 시선이 귀찮아서 그만두어 버렸다.
……왜 우롱을 하세요? 무슨 까닭에 농락을 하세요? P자와 저를 놓고 희롱하시는 것은 유쾌하시겠지요. 그러나 너무 참혹하지 않습니까. 물론 당신 말씀과 같이, 사랑은 유희가 아니라는 것은 아시겠지요.
……누가 당신께서 손톱만큼이라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혹시는 모욕입니다. 당신의 태도가 그밖에는 어떻게 할 수 없으시면 우리는 이 이상 교제를 끊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요…….
이것이 정자의 제일 큰 불평이었다. 정자는 자기의 과거를 한만히 이야기하지는 않으나, 흔히 있는 계모시하의 불화와 부친의 몰이해에다가 실연이 한꺼번에 왔던 모양이다. 그러나 좀체 거기에 휘어 넘어가지 않고, 앙버티고(끝까지 대항하여 버티고) 현재의 경우에서 제 손으로 헤어나려고 허비적대는 그 심보가 취할 점이요 동정이 가는 것이다. 지금도 책을 보는 모양이지마는 문학에 대한 감상력이 호락호락히 볼 것이 아닌 데에 나는 귀엽고 경애를 느끼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어떻게 붙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공상이다.
‘계집애하고 키스를 하면서도 침맛을 아는 놈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부터 틀린 수작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아까 M헌 이층의 광경을 머리에 그려 보았다. 모욕이란 의식부터 머리에 떠올랐다는 말이나, 제 말마따나 이때껏 한 남자의 입밖에는 몰랐었다는 말이 정말이라면 정자는 그래도 아직은 행복하다. 침맛을 알아내지 않는 것만도 행복하다. 이런 생각을 할 제 사람의 행복은 사람다운 정조를 잃지 않는 데 있는가도 싶다.
‘그러나 자기는 이때껏 연애다운 연애를 하여 본 일도 없으면서 청춘의 자랑이요 왕일한 생명력인 정열이 말라 버린 것은 웬 까닭인가. 하여간 성격이 기형적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이것은 정열을 식히는 첫째 원인이지만 동시에 인간성의 타락이다. 하지만 자기를 살리기 위하여 어떠한 경우에는 정열을 억제하여야 할 필요도 있으니까, 반드시 성격이 뒤틀렸다거나 인간성이 타락하여 그렇다고만도 할 수 없지…….’
그러나 자기를 살린다는 것이 자기의 비열한 쾌락을 만족시킨다는 것이 아닌 이상, 사람을 우롱한다는 것은 죄악이다. 정열이 없으면 없을 뿐이지, 그렇다고 사람을 우롱하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우롱한다는 것은 몰염치한 이야기다. 사람을 우롱하는 것은 인생을 유희함이라는 의미로서 결국에 자기 자신을 우롱하고 유희함이다.
무슨 까닭에, 자기는 굳세고 높게 살리겠다면서 가련한, 저 갈 길을 찾겠다고 발버둥질치는 불쌍한 여성을 농락하려는가? 사실 말하자면 오늘까지 나의 정자에게 대한 태도는 실없었다. 저편이 나를 범연히(차근차근한 맛이 없이 데면데면하게) 생각지 않았다면 더욱이 불쾌하고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책망일 것이다. 그러나 정자 자신이 얼마나 실답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가는 누가 알 일인가? 사랑이니 무어니 머릿살 아픈 노릇이다마는 세상이 경멸하는 조선 청년에게 그런 호소를 하고 오는 것은 실연을 한 일본 남성에게 대한 반항이라는 것인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누웠다가 숨이 괴로워서 벌떡 일어나서 데크로 나왔다.
차 안의 전등은 아직 아니 나갔으나, 젖빛 같은 하늘이 허예져 가며, 인기척 없이 꼭꼭 닫은 촌가가 가끔가끔 눈앞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면, 동은 벌써 튼 모양이었다. 아침 바람이 너무도 세어서, 나는 무심코 외투깃을 올리며 머리를 식히고 섰다가, 그래도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들어와 자기 자리에 드러누웠다.
한 두어 시간이나 잤을지, 사람이 너무 붐비는 바람에 잠이 깨어서 눈을 뜨고 내다보니, 기차는 플랫폼에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가는 모양. 나는 일어나기가 싫기에 지금 바꾸어 들어와 앉은 앞자리의 사람더러 예가 어디냐고 물어 보니까, 명고옥(名古屋, 나고야)이라 한다.
“에? 인제야 나고야?”
나는 이같이 놀란 듯이 반문을 하고, 암만하여도 중도에서 하루 묵어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채 결심도 못 하고 또 잠이 들어 버렸다.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나서 보니, 기차는 아직도 기내지방(畿內地方) 어귀에서 헤매는 모양. 시간표를 들쳐 보니 경도에서 내리려면 아직도 세 시간, 신호(神戶)에서 묵어 간다면 다섯 시간 가량이나 있어야 할 터이다.
‘을라(乙羅)나 가서 볼까?’
내년 신학기에는 동경 음학(‘음악’의 방언(전라, 중국 길림성)) 학교로 전학을 하겠다고 규칙서를 얻어 보내라고 한 을라의 부탁을 이때껏 월여나 되도록 답장도 아니 한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그것은 나의 태만도 태만이거니와 만 일 년간이나 음신이 끊였었던 오늘날에 불쑥 편지를 하는 것도 이상하고, 또다시 서신을 왕복하는 것은 피차에 머릿살 아픈 일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만나면 어떤 얼굴로 볼꾸?’
창턱에 기대어 앉아서 방울방울 방울을 지어 올라가는 담배연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가장 정숙한 듯이, 가장 부끄러운 듯이 꾸미는 을라의 팔초한(얼굴이 좁고 아래턱이 뾰족한) 하얀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요샌 히스테리가 좀 낫나? 병화하고는 어떻게 되었누? 그러나 내게 또 불쑥 규칙서를 얻어 보내란 핑계로 편지를 한 것을 보면, 어떠면 별일은 없이 흐지부지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별안간에, 이왕 고단해서 내릴 바에는 신호에서 내려서 을라를 찾아보려는 객기가 와락 나서, 또다시 시간표를 뒤적거리며 누웠었다.
도지개를 틀면서 그럭저럭 또 네 시간 동안을 멀미를 내고, 겨우 감방에서 풀려 나오듯이 삼등 찻간에서 해방이 되어 신호역두에 내려선 것은, 은빛같이 비치는 저녁해가 육갑산(六甲山) 산등성이에 걸리었을 때이었다. 큰 가방은 역에다가 맡겨 두고, 오글오글 끓는 정거장에서 빠져나와 한숨을 돌리니 사람이 살 것 같았다.
동무의 반연(연줄)으로 중학교를 이 지방에서 마친 나는 을라를 만나는 것보다도 이 지방이 반갑기도 한 것이다. 전차에 올라탈까 하다가 저녁이나 먹고 나서 을라에게 찾아가리라 하고 원정통으로 향하였다. 작년 방학에 들렀을 때 놀던 생각을 하고, A카페의 아래층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옹기종기 앉았는 다른 손들을 피하여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두세 접시나 다 먹도록 작년에 보던, 두 팔을 옥여쥐고 아기족아기족 돌아다니던 그때의 그 계집애는 보이지 않았다. 차를 가지고 온 계집애더러 물어 보니까,
“왜요?”
하고 의미 있는 듯이 웃을 뿐이다.
“왜, 어딜 갔나? 그저 여기 있긴 있겠지?”
“흥! 언제 만나 보셨에요? 아세요?”
“글쎄 말이야!”
“벌써 극락 갔답니다!”
나는 다소 실망이라느니보다도 놀랐다. 작년 여름방학에, 올 적 갈 적 두 번이나 들른 것은 을라 때문도 있고, 고등상업에 있는 중학 동창과 노는 맛에 그랬지마는, 그 계집애가 끄는 힘이 더 많았던 것이다. 별일 있었던 것은 아니요, 그저 만나고 마시고 먹고 노닥거리는 재미로이었지마는 퍽 인상에 남았던 것이다.
“응? 무슨 병으로?”
“폭발탄 정사라는 파천황의 죽음을 하였답니다.”
하며 계집애는 깔깔 웃다가, 다른 손이 부르니까 뛰어 달아난다.
폭발탄 정사라는 말에 귀가 번쩍해서, 그 계집애가 다시 오기만 어느 때까지 기다려도 돌아본 체도 아니 하고 분주히 돌아다닌다. 기다리다 못하여 불러 가지고 셈을 하면서,
“어쩌다가 그랬어?”
하며 물어 보았으나, 내 얼굴만 말끄러미 쳐다보다가 알아보는 점이 있었던지 생글 웃으며,
“사람이 너무 좋아 그랬죠! 또 오세요. 이야기를 할게요.”
하고 바쁜 듯이 팔딱팔딱 신 소리를 내며 가버렸다.
‘사실, 그것은 알아 무얼 하나!’
나는 이렇게 혼자 웃으면서도 그 상냥하고 원만한 성격에 홀딱 반한 놈이, 사업에 실패나 하고 자살하려는 길에, 무리 정사를 하는 것은 일본에 얼마든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정자 생각이 났다. 그러나 정자는 현대여성이다. 그런 어리보기는 아니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나는 하여간 갈 데가 없으니 C음악학교로 향하였다. 실상은 완행이 하도 지리해서 내렸을 뿐이지 을라를 꼭 찾아보고 싶은 생각은 그다지 없었다.
시간은 아직 늦지 않았으나 밤은 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저녁 뒤의 연습인지 아래층 저 구석에서 은근하고도 화려하게 울리어 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기숙사 문간에 섰으려니까, 을라는 기별하러 들어간 여하인의 앞을 서서, 발을 벗은 채 통통거리며 이층에서 내려왔다.
“이게 웬일예요, 소식두 없이! 어서 올라오세요.”
인사할 말을 미리 생각하였던 사람처럼 이렇게 한마디 한 을라는 미소가 어린 그 옴폭한 눈으로 힐끗 나를 쳐다보고는 부끄럽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며 태연히 문설주에 기대어 섰다. 나는 빨간 끈이 달린 발 째진 짚신 위에 가벼이 얹어 놓은 하얀 조그만 발을 들여다보며, 구두끈을 풀고 올라서서 을라의 뒤를 따라 섰다.
“응접실은 추우니까 내 방으로 가시지요.”
을라는 이렇게 한마디 하고 아까 내려오던 층계를 지나서 끌고 들어가다가, 잠깐 섰으라고 하고 사감의 방인지 들어갔다. 방문을 열어 놓은 채 꿇어앉아서 무어라고 한참 재깔재깔하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나와서 이층으로 나를 데리고 올라갔다.
“사내를 함부루 끌어들여도 상관없나요?”
나는 자리를 한구석으로 뚤뚤 말아서 밀어 놓은 것을 돌려다보며 이렇게 말을 붙였다.
“걱정 마세요. 그렇지만, 혹시 이따가 사감이 들어오더라도 서울서 오는 오빠라구 하세요.”
“그런 꾸어다박은 오빠 노릇은 어려운데…….”
이런 실없는 소리를 정색으로 하며, 을라가 권하는 대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래, 지금 조선 나가시는 길예요? 방학 때두 되긴 했지만.”
을라는 방 안에 늘어놓인 것을 부산히 치운다.
“송장을 치러 나가는지? 또 한번 사모 쓸 일이 있어 좋아서 나가는 셈인지……?”
하고 나는 코웃음을 쳐보였다.
“왜? 아씨가 앓으시는군? 그 안됐군요.”
하고 을라는 놀라는 소리로 인사를 하고 나서, 그 윤광 있는 쌍꺼풀진 눈귀를 처뜨리며,
“그래 그런 급한 길에 여기를 왜 내리셨에요?”
하며 좀 나무라는 어조다.
“당신두 만날 겸, 후보자두 선을 볼 겸…… 허허허.”
만나면 어떠한 태도로 대하게 될지 작년 일을 생각하면 어금니에 무에 끼인 것같이 거북하고 근질근질한 것 같더니, 마주 앉고 보니 의외로 소탈하게 이런 실없는 소리도 나왔다.
“기가 막혀! 아씨가 운명도 하기 전에 선보러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예요? 그래 선을 보셨에요?”
“선을 보러 왔더니, 폭발탄 정사를 했다니 기가 막히지 않소!”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이 양반이 일년 동안에 이렇게두 변했을까!”
작년 여름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수줍던 내가 이런 실없는 소리를 탕탕 하는 것이 을라의 눈에는 이상히 보였을 것이다.
“나두 이번 방학에는 나갔다가 들어오려는데, 같이 가셨더면!”
“심심한데 그거 좋지! 그러나 이 밤으루 준비되시겠소?”
“이 밤으룬 좀 어려운데…….”
을라는 곧 따라 나서고 싶은 듯이 눈에 영채가 돌며 생긋 웃다가,
“정말 병환이 급하지 않거든 내일 하루만 더 묵어 주시구려?”
하고 아양스럽고 의논성스럽게 조른다.
“무어 할 일이 있어야지. 모처럼 만나려던 사람은 정사를 해버렸구! 나도 정사라도 하겠다는 사람이나 있으면 묵을지 모르겠지만, 허허허…….”
“참 변한다 변한다 하니 인화 씨같이 변하신 양반이 어디 계세요. 아아, 참…….”
을라는 급작스레 무엇에 충격을 받은 듯이 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을 직각한 나는, 얄밉기도 하고 일종의 모욕 같은 생각도 나서,
“왜 실연한 남자의 타락한 꼴을 보는 듯싶소?”
하고 나는 커닿게 웃다가,
“나보다는 을라 씨야말로 참 변했구려.”
하며 비꼬아 보았다.
“무엇 땜에? 어디가 어때요?”
“세상물이 들어가느라구! 혹은 예술가로 대성하느라구 그런지는 모르지마는.”
“세속물도 들겠지만, 그렇다면 예술가로 대성하는 것과는 정반대 아닌가요?”
“그러게 말씀이죠! 연애도 예술적으로 청고(淸高)하게는 안 되는 것인지?”
“매우 로맨틱하시군!”
하고 을라는 냉소를 하다가,
“어쨌든 참 정말 모레쯤 나하구 같이 가세요. 같이 못 가시더래두 내일 오후부터는 자유니까 이야기할 것도 있고, 구경도 시켜 드릴게…….”
외로운 객지에서 단조하고 이성이 그립던 그때의 을라에게는, 나의 불시의 방문이 의외일 뿐 아니라 마음으로 반가웠던 모양이다.
“글쎄 그래두 좋지만, 작년과도 달라서 여기에는 인제는 친구가 없으니…….”
나는 을라를 위하여 이틀씩 묵기는 싫었다.
“아, 참, 내일은 어차피 대판 공회당 음악회에도 갈까 하는데요. 거기에라도 가시지. 내일은 학생들이 죄다 제 집에 가버릴 텐데…….”
을라가 왜 이렇게 지성껏 붙들려는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언젠가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절간에 있을 제 일본 중놈하고라던지, 향기롭지 못한 소문이 퍼졌다는 말이 머리에 떠올라 와서 불쾌한 연상이 일어났다.
“그럼 내일 함께 떠나십시다그려…… 한데 요새 병화군 소식 들으슈?”
나는 을라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을 돌렸다.
“별루 소식 없에요. 내가 그 언니한테 편지를 하면 답장이 올 뿐이지. 사실은 이번에두 그 언니 답장을 기대리구 있는 판인데…….”
조금도 거리낌없는 이런 대답을 을라에게서 듣는 것은 좀 의외였다.
“왜? 학비라두 대어 오는 거요?”
저편이 노골적으로 수작을 붙이기에 나도 직통 대고 쏘아 보았다. 작년 여름에 만났을 때 그런 말눈치를 귓결에 들었기에 말이다.
“학비는 무슨 학비! 하두 꿀릴 때면 몇십 원씩 올 일년내 두세 번 꾸어다 쓴 일두 있구, 방학에 나갔다가 들어올 제 노잣냥 언니가 보태 주기에 받아 가지고 왔을 뿐이지! 인화 씨부터두 그런 데에 무슨 오해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 밖에야 오해받을 일이라군 손톱만큼도 없에요!”
이 말을 하는 을라는 분연한(성을 벌컥 내며 분해하는 기색) 어조이었다. 내가 오해하는 듯한 것이 불쾌하여 이 사품(어떤 동작이나 일이 진행되는 바람이나 겨를)에 변명을 하려는 말눈치거니와, 이번도 나갈 노자를 변통해 달라고 편지를 해놓고 기다리는 모양 같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혹은 그럴지 모르겠고, 내일이면 방학이라는데 하루를 더 기다려서 같이 가자고 애걸을 하는 것도 노자 때문인 듯싶다. 그렇다면 조금 절약을 해서 서울까지 데려다주고도 싶으나, 병화와의 교제가 그뿐이거나 말거나, 이제는 그런 친절까지 보여 주고 싶지는 않다고 돌려 생각하고 말았다.
을라가 신호로 온 것이, 내가 신호에서 중학을 졸업하고 동경으로 간 뒤이기 때문에 작년 여름방학에 들렀을 때 만난 것이 처음이지마는, 을라의 이야기는 전부터 병화댁에게 들었던 것이다. 을라가 병화댁과의 한반 아래인 동창생이요, 둘이 여학교에서부터 친한 사이인 관계로 병화 집을 제 집같이 드나들고, 학비가 부족한 때면 편지질을 해서 취해 쓰는지도 모르겠으나, 작년 여름방학에 신호에서 만나서 놀다가 함께 서울로 나가서는 의외로 설면하여졌던 것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퍽 재미있게 지냈었다. 실상은 내가 너무 솔직했던 때문인지도 모르지마는 차차 눈치가 다른 것을 보고는 나는 일체 교제를 끊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생각하면 내가 지나치게 신경과민한 지레짐작을 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오해이었거나 말거나, 지금 새삼스럽게 구의(舊誼)를 이어 보고자 여기 내린 것은 아니다. 다만 어째 내렸든지 간에 내린 바에는 을라를 안 만나고 간다는 것도 인사가 아니었다.
“어, 고단해서 어서 가서 누워야 하겠습니다.”
병화 이야기가 나오니까 피차에 흥이 빠지는 것 같아서 나는 일어서 버렸다.
“애써 내리셨다가 이렇게 섭섭하게 가셔서 어떻게 해요. 내일 아침에 못 떠나시거든 오정때까지 기다릴 테니 들러 주세요.”
을라는 문간까지 나오면서도, 나를 이대로 놓치는 것을 섭섭해하였다.
“무얼! 서울 가서 만나 뵙죠.”
구두를 신고 난 나는 정자나 카페 여자들에게 하던 버릇으로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을라는 얼굴이 살짝 발개지며 생긋 웃으며 주저주저하는 눈치더니 손을 내밀어 꼭 붙든다.
장난이 아니라 을라를 이성으로 생각한다느니보다도 보통 친구나 같은 뜻으로 악수를 청해 본 것이나, 그래도 컴컴한 거리로 나오도록 내 손바닥에는 여자의 따뜻한 살 김이 남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3
그날 밤은 역 앞의 조고만 여관에서 노독을 풀고, 이튿날 아침차로 떠나서 저녁에는 연락선을 타게 되었다.
하관(下關)에 도착하니, 방죽이 터져 나오듯 일시에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시꺼먼 사람떼에 섞이어서 나는 연락선 대합실 앞까지 왔다.
어디를 가나, 그 머릿살 아픈 형사떼의 승강이를 받기가 싫어서 배로 바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배에는 아직 들이지 않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대합실로 들어갔다. 벤또나 살까 하고 매점 앞에 가서 섰으려니까 어느 틈에 벌써 알아차렸는지 인버네스(소매 대신에 망토가 달린 남자용 외투)를 입은 낯 서툰 친구가 와서 모자를 벗으며 끄덕 하고 국적이 어디냐고 묻는다. 나는 암말 아니 하고 한참 쳐다보다가, 명함을 꺼내서 주고 훌쩍 가게로 돌아서 버렸다.
“본적은?”
내 명함을 받아 들고 내가 흥정을 다 하기까지 기다리고 있던 인버네스는 또 괴롭게 군다. 나는 그래도 역시 잠자코 그 명함을 도로 빼앗아서 주소를 써서 주고는, 사놓았던 물건을 들고 짐 놓는 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러나 궐자는 또 쫓아와서,
“나이는? 학교는? 무슨 일로? 어디까지…….”
하며 짓궂이 승강이를 부린다. 나는 실없이 화가 나서 그까짓 건 물어 무엇에 쓰려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꾹 참고 간단간단히 응대를 하여 주고 부리나케 짐을 들고 대합실 밖으로 나와 버렸다.
“미안합니다그려.”
하며 좀 비웃는 듯이 인사를 하는 궐자의 흘겨뜨는 눈은 부리부리하고 험상궂었으나, 내 뱃속에서도 제게 지지 않게 바지랑대 같은 것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참는 판이었다.
승객들은 북적거리며 배에 걸쳐 놓은 층층다리 앞에 일렬로 늘어섰다. 나도 틈을 비집고 그 속에 끼였다.
아스팔트 칠(漆, 물감, 도료)을 담았던 통에 썩은 생선을 담고 석탄산수를 뿌려서 절이는 듯한 고약한 악취에 구역질이 날 듯한 것을 참으며, 제각기 앞을 서려고 우당퉁탕대는 틈을 빠져서 겨우 삼등실로 들어갔다. 참외 원두막으로서는 너무도 몰풍경하고 더러운 침대 위에다가 짐을 얹어 놓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나는 우선 목욕탕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내가 제일착이려니 하였더니 벌써 사오 인의 욕객이 목욕탕 속에 들어앉아서 떠들어 댄다.
“오늘은 제법 까불릴걸!”
“뭘, 이게 해변가니까 그렇지, 그리 세찬 바람은 아니야.”
시골서 갓 잡아 올라오는 농군인 듯한 자가 온유하여 보이는 커다란 눈이 쉴새없이 디굴디굴하는 검고 우악한 상을 이사람 저사람에게로 돌리면서 말을 꺼내니까, 상인인지 회사원 같은 앞의 사람이 이렇게 대꾸를 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지금쯤 꽤 출걸?”
“그렇지만 온돌이 있으니까, 방 안에만 들어엎디었으면 십상이지.”
조선 사정에 익은 듯한 상인 비슷한 위인이 받는다.
“응, 참 온돌이란 게 있다지.”
촌뜨기가 이렇게 말을 하니까, 나하고 마주 앉았는 자가 암상(남을 시기하고 샘을 잘 내는 마음. 또는 그런 행동)스러운 눈으로 그자를 말끔히 쳐다보더니,
“당신 처음이슈?”
하며 말참례를 하기 시작한다. 남을 멸시하고 위압하려는 듯한 어투며 뾰족한 조동아리가 물어 보지 않아도 빚놀이쟁이의 거간이거나 그 따위 종류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 추위에 어째 나섰소? 어딜 가슈?”
“대구에 형님이 계신데 어머님이 편치 않으셔서 가는 길이죠.”
“마침 잘 되었소그려. 나도 대구까지 가는 길인데. 그래 백씨께서는 무얼 하슈?”
“헌병대에 계시죠.”
“네? 바로 대구분대에 계신가요? 네…… 그러면 실례입니다만, 백씨께서는 누구신지? 뭘로 계셔요?”
시골자의 형이 헌병대에 있다는 말에, 나하고 마주 앉은 자는 반색을 하면서 금시로 말씨가 달라진다. 나는 그자의 대추씨 같은 얼굴을 또 한번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우리 형님은 아직 군조(軍曹, 일제시대 하사관, 지금의 중사)예요. 니시무라(西村) 군조, 혹 형공도 아시는지? 그런데 형공은 조선에 오래 계신가요?”
“녜, 난 십여 년래로 그저 내 집같이 드나드니까요.”
하고 궐자(‘그’를 낮잡아 이르는 말)는 시골자를 한참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암, 대구 헌병대의 그 양반이야 알구말구요. 그 양반은 나를 모르실지 모르지만…….”
어째 그 말눈치가 안다는 것보다도 모른다는 말 같다.
“어쨌든 십 년이라면 한밑천 잡으셨겠구려.”
이번에는 상인 비슷한 자가 입을 벌렸다.
“웬걸요, 이젠 조선도 밝아져서 좀처럼 한밑천 잡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어때요?”
“요보 말씀요?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마는, 촌에 들어가면 대만(臺灣)의 생번(生蕃)*보다는 낫다면 나을까. 인제 가서 보슈…… 하하하.”
*생번(生蕃) : 1. 타이완의 고사족 가운데 대륙 문화에 동화되지 아니하고 야생적인 생활을 하는 번족을 일본인이 부르던 이름. 2. 교화되지 아니한 야만인.
‘대만의 생번’이란 말에, 그 욕탕 속에 들어앉았던 사람들은 나만 빼놓고는 모두 껄껄 웃었다. 그러나 나는 기가 막혀 입술을 악물고 쳐다보았으나, 더운 김이 서리어서 궐자들에게는 분명히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욕객은 차차 꾸역꾸역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말이지,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憂國志士)는 아니나 자기가 망국(亡國) 백성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기는 하다. 학교나 하숙에서 지내는 데는 일본 사람과 오히려 서로 통사정을 하느니만치 좀 낫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의 고통은 참을 수 없는 때가 많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망국 백성이 된 지 벌써 근 십 년 동안, 인제는 무관심하도록 주위가 관대하게 내버려두었었다. 도리어 소학교시대에는 일본 교사와 충돌을 하여 퇴학을 하고 조선 역사를 가르치는 사립학교로 전학을 한다는 둥, 솔직한 어린 마음에 애국심이 비교적 열렬하였지마는, 차차 지각이 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는 간혹 심사 틀리는 일을 당하거나 일년에 한 번씩 귀국하는 길에 하관에서나 부산․경성에서 조사를 당하고, 성이 가시게 할 때에는 귀찮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지마는, 그때뿐이요, 그리 적개심이나 반항심을 일으킬 기회가 적었었다. 적개심이나 반항심이란 것은 압박과 학대에 정비례하는 것이나, 기실 그것은 민족적으로 활로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칠 년이나 가까이 일본에 있는 동안에, 경찰관 이외에는 나에게 그다지 민족관념을 굳게 의식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래 정치 문제에 흥미가 없는 나는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썩여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하여도 가할 만큼 정신이 마비되었었다. 그러나 요새로 와서 나의 신경은 점점 흥분하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보면 적개심이라든지 반항심이라는 것은 보통 경우에 자동적, 이지적이라는 것보다는 피동적, 감정적으로 유발되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일본 사람은 지나치는 말 한마디나 그 태도로 말미암아 조선 사람의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를 구하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원동력이 될 뿐이다.
지금도 목욕탕 속에서 듣는 말마다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지마는, 그것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조선 사람이 듣고, 오랜 몽유병에서 깨어날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자아낼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래 촌에 들어가면 위험하진 않은가요?”
조선에 처음 간다는 시골자가 또다시 입을 벌렸다.
“뭘요, 어딜 가든지 조금도 염려 없쇠다. 생번이라 하여도 요보는 온순한데다가 가는 곳마다 순사요 헌병인데 손 하나 꼼짝할 수 있나요. 그걸 보면 데라우치(寺內)상이 참 손아귀 힘도 세지만 인물은 인물이야!”
매우 감격한 모양이다.
“그래 촌에 들어가서 할 게 뭐예요?”
“할 것이야 많지요. 어딜 가기로 굶어죽을 염려는 없지만, 요새 돈 몰 것이 똑 하나 있지요. 자본 없이 힘 안 들고…… 하하하.”
표독한 위인이 충동이는 수작이다.
“그런 벌이가 어디 있어요?”
촌뜨기 선생은 그 큰 눈을 더 둥그렇게 뜨고 큰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마주 쳐다보는 모양이다.
“왜요, 한번 해보시려우?”
그는 이렇게 한마디 충동이며, 무슨 의미나 있는 듯이 그 악독하여 보이는 얼굴에 교활한 웃음을 띠고 한참 마주 보다가,
“시골서 죽도록 땅이나 파먹다가 거꾸러지는 것보다는 편하고 재미있습넨다. 게다가 돈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고.”
여전히 뱅글뱅글 웃으면서 이 순실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그대로 있는 듯한 촌뜨기를 꾄다.
“그런 선반에서 떨어지는 떡 같은 장사가 있으면 하다뿐이겠나요.”
촌뜨기는 차차 침이 괴어 오는 수작이다.
“그러나 밑천이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지요. 우선 얼마 안 되지만 보증금을 들여놓아야 하고, 양복이나 한 벌 장만하여야 할 터이니까. 그러나 당신이야 형님이 헌병대에 계시다니까 신분은 염려 없을 테니 보증금은 없어도 좋겠지.”
제딴은 누구를 큰 직업이나 얻어 주는 듯싶이, 더구나 보증금은 특별히 면제하여 주겠다는 듯이 오만한 태도로 어깨를 뒤틀며 호기만장이다. 일편 촌뜨기는 양복신사가 돼야 하는 직업이라는 데에 속으로 헤에 하는 기색이다. 그러나 정작 그 직업의 종류가 무엇인가는 좀처럼 가르쳐 주지 않는다. 실상 곁에서 엿듣고 앉았는 나 역시 궁금하지만, 이러한 소리를 듣는 시골 궐자는 더한층 호기의 눈을 번쩍이며 앉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을 토설치 않는 것은 나와 그 외의 두세 사람이 들을까 꺼리어서 그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그 시골뜨기가 좀더 몸이 달아 덤비며 자기의 부하가 되겠다는 다짐까지 받고서야 이야기하려는 수단 같기도 하다.
“그래 그런 훌륭한 직업이 무엇인데, 어디 있단 말요?”
이번에는 그 시골자의 동행인 듯한 사람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욕탕에서 시뻘겋게 단 몸뚱어리를 무거운 듯이 끌어내며 물었다. 그자도 물 속에서 불쑥 일어서서 수건을 등뒤로 넘겨서 가로잡고 문지르며 한번 목욕탕 속을 휘 돌아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의 이야기에는 무심히 이구석 저구석에서 멱을 감는 것을 살펴본 뒤에, 안심한 듯이 비로소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벌린다.
“실상은 누워 떡먹기지. 나두 이번에 가서 해오면 세 번째나 되오마는, 내지의 각 회사와 연락해 가지고 요보(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멸시하여 이르던 말)들을 붙들어 오는 것인데, 즉 조선 쿨리(苦力)* 말씀요. 농촌 노동자를 빼내 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대개 경상남북도나, 그렇지 않으면 함경, 강원, 그 다음에는 평안도에서 모집을 해오는 것인데, 그 중에도 경상남도가 제일 쉽습넨다, 하하하.”
*쿨리(coolie) :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하층의 중국인ㆍ인도인 노동자. 19세기에 아프리카ㆍ인도ㆍ아시아의 식민지에서 혹사당하였다.
그자는 여기 와서 말을 끊고 교활한 웃음을 웃어 버렸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불쌍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과 광산으로 몸이 팔리어 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術中)에 빠져서 속아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한번 그자의 상판때기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옳지! 그래서 이자의 형이 헌병 군조라는 것을 듣고 이용할 작정으로 반색을 한 게로군!’
나는 이런 생각도 하여 보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앉았었다.
궐자는 벙벙히 듣고 앉았는 그 두 사람의 얼굴을 이리저리 바라보고 빙긋 웃으며 또다시 말을 잇는다.
“왜 남선 지방에 응모자가 많고 북으로 갈수록 적은고 하니, 이 남쪽은 내지인이 제일 많이 들어가서 모든 세력을 잡았기 때문에, 북으로 쫓겨서 만주로 기어들어가거나 남으로 현해탄(玄海灘)을 건너서거나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길밖에 없는데, 누구나 그늘보다는 양지가 좋으니까, 요보들 생각에도 일년 열두 달 죽도록 농사를 지어야 주린 배를 채우기는 고사하고 보릿고개〔麥嶺〕에는 시래기죽으로 부증(몸이 붓는 증상. 심장병이나 콩팥병 또는 몸의 어느 한 부분의 혈액 순환 장애로 생긴다)이 나서 뒈질 지경인 바에야, 번화한 동경, 대판에 가서 흥청망청 살아 보겠다는 요량이거든. 그러니 촌의 젊은 애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계집애들까지 나두 나두 하고 나서거든. 뭐 모집이야 쉽지!”
“흥…… 그럴 거야!”
“아직 북선 지방은 우리 내지인이 덜 들어갔기 때문에 비교적 편안히 사니까 응모자가 적지만, 그것도 미구불원(앞으로 얼마 오래지 아니하고 가까움)에 쪽박을 차고 나설 거라, 허허허.”
이자는 자기 설명에 만족한 듯이 대단히 득의만면이다.
“그래 그렇게 모집을 해가면 얼마나 생기나요?”
촌뜨기는 구수하다는 듯이 침을 흘리며 듣는다.
“얼마가 뭐요. 여비가 있지, 일당이 또 있지, 게다가 한 사람 모집하는 데에 일 원서부터 이 원이니까―---그건 회사와 일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지만, 가령 방적회사의 여직공 같은 것은 임금도 싼데다가 모집원의 수수료도 헐하고, 광부 같은 것은 지금 시세로도 일 원 오십 전으로 이 원 오십 전까지라우. 가령 천 명만 맡아 가지고 와서 보구려. 이삼 삭 동안 여비나 일당에서 남는 것은 그까짓 건 다 그만두고라도 일천오륙백 원, 근 이천 원은 간데없는 것일 게니, 그런 벌이가 이판에 어디 있소? 하하하. 나도 맨 처음에―---그건 제주도에서 모집하여 갔지만―---그때에 오백 명 모아다 주고 실살(실제 이익)고로 남긴 것이 천 원이었고, 둘째 번에는 올 가을 팔백 명이나 북해도 족미(足尾)탄광에 보내고 이천 원 돈이 들어왔다우.”
노동자 모집원이라는 자는 입의 침(웃돈, 덤)이 없이 천 원, 이천 원을 신이 나서 뇌며 목욕탕 속에서 나왔다.
“예에, 예에, 그럴 거예요!”
하며, 일평생에 들어 보지도 못하던 천(千)자가 붙은 돈액수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귀를 기울이고 앉았던 시골자는, 때를 다 밀었는지 그 장대한 구릿빛 나는 유착(몹시 투박하고 큰)한 몸집을 벌떡 일으키어 다시 욕탕 속에 출렁 집어넣으면서 만족한 듯이 또다시 말을 붙이었다.
“그래 조선 농군들이 가서 그런 공사일을 잘들 하나요?”
“잘 하구 못 하는 것은 내가 아랑곳 있겠소마는, 하여간 요보는 말을 잘 듣고 쿨리만은 못해도 힘드는 일을 잘 하는데다가 삯전이 헐하니까 안성맞춤이지. 그야 처음 데려갈 때에는 품삯도 많고 일은 드러누워서 떡먹기라고 푹 삶아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갈 노자며 처자까지 데리고 가게 하고, 게다가 빚까지 갚아 주는데야 제아무런 놈이기로 아니 따라 나설 놈이 있겠소. 한번 따라 나서기만 하면야 전차(前借)가 있는데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지. 일이 고되거나 품이 헐하긴 고사하고 굶어 뒈진다기루 하는 수 있나, 하하하.”
벌써 부하가 되었다는 듯이 득의만면하여 모집방법의 비책까지 도도히 설명을 하여 주고 앉았다.
나는 좀더 들으려고 일부러 머뭇머뭇하며 앉았으려니까, 승객이 다 올라탔는지, 별안간에 욕객의 한 떼가 또 왁자하고 들이 밀려오기에 나는 그만 듣고 몸을 훔치기 시작하였다.
스물두셋쯤 된 책상도련님인 나로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이 어떠하니, 인간성이 어떠하니, 사회가 어떠하니 하여야 다만 심심파적으로 하는 탁상의 공론에 불과한 것은 물론이다. 아버지나 조상의 덕택으로 글자나 얻어 배웠거나 소설권이나 들춰 보았다고, 인생이니 자연이니 시니 소설이니 한대야 결국은 배가 불러서 투정질하는 수작이요, 실인생, 실사회의 이면의 이면, 진상의 진상과는 얼마만한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보면 내가 지금 하는 것, 이로부터 하려는 일이 결국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년 열두 달 죽도록 농사를 지어야 반년짝은 시래기로 목숨을 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까…… 하는 말을 들을 제,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심이 날 만치 나의 귀가 번쩍하리만치 조선의 현실을 몰랐다. 나도 열 살 전까지는 부모의 고향인 충청도 촌 속에서 자라났고, 그 후에도 일년에 한두 번씩은 촌락에 발을 들여놓아 보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소작인의 생활이 참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시를 짓는 것보다는 밭을 갈라고 한다. 그러나 밭을 가〔耕〕는 그것이 벌써 시가 아니냐. 사람은 흙에서 나와서 흙에 돌아간다. 흙의 향기로운 냄새에 취할 수 있는 자의 행복이여! 흙의 북돋아오르는 생기야말로 너 인간의 끊임없는 새 생명이니라.’
언젠가 이 따위의 산문시줄이나 쓰던, 자기의 공상과 값싼 로맨티시즘이 도리어 부끄러웠다. 흙의 냄새가 향기롭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그 향기에 취할 수 있는 자가 행복스럽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조반 후의 낮잠은 위약(胃弱)이라는 고등 유민의 유행병에나 걸릴까 보아서 대팻밥 모자에 연경이나 쓰고, 아침저녁으로 호미자루를 잡는 것이 행복스럽지 않고 시적(詩的)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저러나, 일년 열두 달, 소나 말보다도 죽을 고역을 다 하고도 시래기죽에 얼굴이 붓는 것도 시일까? 그들이 삼복의 끓는 햇볕에 손등을 데면서 호미자루를 놀릴 때, 그들은 행복을 느끼는가? 그들은 흙의 노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의 노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다만 땀과 피뿐이다. 그리고 주림뿐이다. 그들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뛰어나오기 전에, 벌써 확정된 단 하나의 사실은 그들의 모공이 막히고 혈청이 마르기까지, 흙에 그 땀과 피를 쏟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 방울의 땀과 백 방울의 피는 한 톨의 나락을 기른다. 그러나 그 한 톨의 나락은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는가? 그에게 지불되는 보수는 무엇인가―---주림만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그의 받을 품삯이다.
나는 몸을 다 훔치고 옷 입는 터전으로 나왔다.
나는 사람, 드는 사람, 한참 복작대는 틈에서 부리나케 양복바지를 꿰며 섰으려니까, 어떤 보지 못하던 친구가 문을 반쯤 열고 중절모자를 쓴 대가리를 불쑥 디밀며, 황당한 안색으로 방 안을 휘휘 둘러보더니,
“실례올시다만, 여기 이인화란 이가 계십니까?”
하고 묻는다.
“네에, 나요. 왜 그러우?”
나는 궐자의 앞으로 두어 발짝 나서며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궐자는 한참 찾아다니다가 겨우 만난 것이 반갑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서서 이리 좀 나오라고 명령하듯이 소리를 친다. 학생복에 망토를 두른 체격이며, 제딴은 유창하게 한답시는 일어의 어조가 묻지 않아도 조선 사람이 분명하다. 그래도 짓궂이 일어를 사용하고 도리어 자기의 본색이 탄로될까 보아 염려하는 듯한, 침착지 못한 행색이 나의 눈에는 더욱 수상쩍기도 하고 마음이 근질근질하기도 하였다. 나의 성명과 그 사람의 어조를 듣고, 우리가 조선 사람인 것을 짐작한 여러 일인의 시선은, 나에게서 그자에게, 그자에게서 나에게로 올지 갈지 하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두 사람은 일본 사람 앞에서 희극을 연작하는 앵무새 모양이었다.
“무슨 이야긴지 할 말 있건 예서 하구려.”
그래도 나는 기연가미연가하여 역시 일어로 대답하였다.
“하여간 이리 좀 나오슈.”
말씨가 벌써 그러한 종류의 위인인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 언사의 교만한 것이 첫째 귀에 거슬리어서 다소 불쾌한 어조로,
“그럼 문을 닫고 나가서 기다류.”
하며 소리를 지르고, 다시 내 자리로 와서 주섬주섬 옷을 마저 입기 시작하였다. 여러 사람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은 여전히 내 얼굴에 어리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아까 노동자를 모집할 의논을 하던 세 사람은,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는 것이 분명하였으나, 나는 도리어 그 시선을 피하였다. 불쾌한 생각이 목구멍 밑까지 치밀어오는 것 같을 뿐 아니라, 어쩐지 기운이 줄고 어깨가 처지는 것 같았다.
옷을 다 입고 문 밖으로 나오니까, 궐자는 맞은편에 기대어 웅숭그리고 서서 기다리는 모양이다.
“미안합니다만, 나하고 짐을 가지고 저리 좀 나갑시다.”
뒤를 쫓아오면서 애원하듯이 말을 붙이는 양이, 아까와는 태도가 일변하였다.
“댁이 누구길래, 어딜 가잔 말요?”
“녜에, 참 나는 서(署)에서 왔는데 잠깐 파출소로 가십시다.”
자기의 직무도 명언하지 아니하고 덮어놓고 가자고 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기가 일인 행세를 하는 것이 내심으로 부끄럽고, 또한 나에게 ‘노형이 조선 사람이 아니오?’ 하고, 탄로나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어서 앞이 굽는다는 듯이, 언사와 태도는 점점 풀이 죽고 공손하여졌다. 이것을 본 나는 도리어 불쌍하고 가엾은 생각이 나서, 층계를 느런히 서서 내려가다가, 궐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 의미 없이 빙글빙글 웃는 그 얼굴에는 어색하여 하는 빛이 역력히 보였다. 나는 잠자코 자기 자리로 가서 순탄한 말로,
“나는 나갈 새도 없고 짐이라곤 이것밖에 없으니, 혼자 가지고 가서 조사할 게 있건 조사하고 갖다 주슈.”
하고 가방 두 개를 들어 내어 주었다.
“안 돼요, 그건. 입회를 해줘야 이걸 열죠. 그러지 마시고 잠깐만 나가 주세요. 이건 내가 들고 갈 테니.”
선실 안의 수백의 눈은 모두 나에게로 모여들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리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화끈하여 더 섰을 수가 없었다.
“내가 도적질이나 한 혐의가 있단 말이오?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하라는 데야 또 어쩌란 말이오. 정 그럴 테면 이리로 들어와서 조사를 하라고 하구려. 배는 떠나게 되었는데 나가자는 사람도 염치가 있지.”
나는 분이 치밀어 올라와서 이렇게 볼멘 소리를 질렀다.
“그러지 마시고 오늘 이 배로 꼭 떠나시게 할 테니, 제발 잠깐만 나가 주세요. 자꾸 시간만 갑니다. 여기선 창피하실까 봐 그러는 것 아닙니까?”
“창피하다? 흥, 창피? 얼마나 창피하면 예서 더 창피할꾸. 그런 사패 볼 것 없이 마음대로 하슈!”
홧김에 이렇게 소리는 질렀으나, 그 애걸하는 양이 밉살스런 중에도 가엾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요, 어느 때까지 승강이만 하다가는 궐자 말마따나 이로울 것도 없고 시간만 바락바락 가겠기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웃저고리를 집어 입고서, 어떻게 될지 사람의 일을 몰라서 아까 사가지고 들어온 벤또그릇까지 가지고, 가방을 들고 앞서 나가는 형사의 뒤를 따라 섰다. 형사가 큰 성공이나 한 듯이 득의만면하여,
“진작 그러시지요. 별일은 없을 거예요.”
하며 웃는 그 얼굴에는 달래는 듯하기도 하고 빈정대는 듯한 빛이 보였다. 나는 무심중에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깨달았다.
갑판으로 나와서 승강구까지 불러다가 조사를 하게 하라 하여 보았으나, 그것도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나는 것을 참고 결국 잔교(棧橋, 부두에서 선박에 닿을 수 있도록 해 놓은 다리 모양의 구조물)로 내려섰다.
대합실 앞까지 오니까, 아까 내 명함을 빼앗아간 인버네스가 양복에 외투를 입은 또 한 사람과 무시무시하게 경계를 하고 섰다가, 우리를 보더니 아무 말 아니 하고 기선 화물을 집더미같이 쌓아 놓은 뒤로 앞서 들어갔다. 가방을 가진 자도 아무 말 아니 하고 따라 섰다. 나는 가슴이 선뜩하는 것을 참고, 아무 반항할 힘도 없이, 관에 들어가는 소처럼 뒤를 대어 섰다. 네 사람이 예정한 행동을 취하는 것처럼, 묵묵하고 침중한 가운데에 모든 행동을 경쾌하게 하는 것이, 마치 활동사진에서 보는 강도단이나 그것을 추격하는 탐정 같았다. 네 사람은 화물에 가리어 행인에게 보이지 않을 만한 곳에 와서 우뚝우뚝 섰다. 대합실의 유리창에서 흘러나오는 전광만은, 양복쟁이의 안경테에 소리 없이 반짝 비치었다.
“오늘 하루 예서 묵지 못하겠소.”
양복쟁이가 우선 입을 벌리며 가방을 빼앗아 든다. 좁은 골짜기에서 나직하게 내는 거세고도 굵은 목소리는 이 세상에서 들어 본 목소리 같지 않았다. 나는 얼빠진 놈 모양으로 아무 생각 없이 안경알이 하얗게 어룽어룽하는 그자의 두툼하고 둥근 상을 쳐다보며 섰었다. 그자도 나의 표정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입술을 악물고 위협하는 태도로 노려보다가 별안간에 은근한 어조로,
“하루 쉬어서 가시구려.”
하는 양이, 마치 정다운 진객(귀한 손님)을 만류하는 것 같았다. 무슨 죄가 있는 것은 아니나, 이같이 으슥한 골짜기에서 을러 보았다 달래 보았다 하는 것을 당하는 것은 나의 수명이 줄어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만일 내가 부호로서 이런 꼴을 당하였더면, 위불위없이(틀림이나 의심이 없이) 강도나 맞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답을 하려 하였으나, 참 정말 귓구멍이 막혀서 입을 벌릴 기운이 없었다.
“묵긴 어디서 묵으란 말이오? 유치장에나 가잔 말씀요? 이 배에 떠나게 한다는 약조를 하였기 때문에 나왔으니까 약조대로 합시다.”
이렇게 강경히 주장은 하면서도, 마음은 차차 두근거려지고 신경은 극도로 긴장하여졌다. 대체 나 같은 위인은 경찰서의 신세를 지기에는 너무도 평범하지만, 그래도 이 배만 놓치면 참 정말 유치장에서 욕을 볼 것은 뻔한 일, 하늘이 두 쪽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배를 놓쳐서는 큰일이라고 결심을 단단히 하고서도 웬일인지 가슴은 여전히 두근두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예서 잠깐 할까?”
양복쟁이가, 나와 인버네스를 반반씩 보며 저희끼리 의논을 한다. 나는 우선 마음을 놓았다.
“네, 그러지요.”
인버네스가 찬성을 하니까, 양복쟁이는 나에게로 향하여,
“이것 좀 열어 보아도 상관없겠소?”
하고 열쇠를 내라고 한다. 나는 급히 열쇠를 내어 주었다. 가방은 양복쟁이의 손에서 덜컥 열리었다.
어린아이 관(棺) 같은 긴 모양의 트렁크를 유리창 그림자가 환히 비치는 화물 쌓인 밑에다가 열어 놓고 들쑤시는 동안에, 그 옆에서 인버네스는 조그만 손가방을 조사하고 앉았다. 나는 이편에 느런히(죽 벌여서) 섰는 학생복 입은 자와 함께 두 사람의 네 손길만 내려다보고 섰었다. 큰 트렁크를 맡은 자는 잠깐 쑤석쑤석하여 보더니, 그 위에 얹어 놓은 양복이며 화복(물을 들인 천으로 만든 옷)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휙휙 집어서 내 옆에 선 형사에게 주섬주섬 던져 주고 나서, 그 밑에 깔리었던 서류뭉텅이와 서적 몇 권을 분주히 들척거리고 앉았다. 조그만 트렁크 속에서 소득이 없었던지 그대로 뚜껑을 닫아서 옆에 놓고 인버네스도 다시 큰 가방으로 달려들어서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양복쟁이의 분부대로 서적을 한 권씩 들어 보아 가며 일일이 책명을 수첩에 기입하며 앉았다. 가방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형사의 네 손은 일분 이분 시간이 갈수록 가속도로 움직인다. 나는 이놈들이 또 무슨 망령이나 부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의혹을 가지고 전광에 벌겋게 번쩍이는 양복쟁이의 곁뺨을 노려보고 섰었다.
여덟 눈과 네 손길은 앞에 뉘어 놓은 트렁크 한 개에 모든 정력을 집중하고, 일 분의 빈틈 없이 극도로 긴장하였으면서도 여덟 입술은 풀로 붙인 듯이, 아무도 입을 벌리려는 사람이 없었다. 절대 침묵이 한 간통쯤 되는 컴컴한 골짜기에 숨이 막힐 듯이 가득히 찼다. 비릿한 해기(海氣)를 품은 차디찬 저녁 바람이 귓가로 솔솔 지날 때마다 바삭바삭하는 종잇장 구기는 소리밖에 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 큰 배에 짐 싣는 인부의 소리도, 잔교 밑에 와서 부딪는 출렁출렁하는 파도 소리도, 아마 이 네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무겁고 찌뿌드드한 침묵 속에 흐릿한 불빛에 싸여서 서고 앉고 하여 꾸물꾸물하는 양이, 마치 바다에 빠진 시체를 건져 놓고 검시(檢屍)나 하는 것같이 처량하고 비장하며 엄숙히 보였다. 그러나 일 분, 이 분, 삼 분, 오 분, 십 분…… 시간이 갈수록 나의 머릿속은 귀와 반비례로 욱신욱신하여졌다. 그 세 사람들이 일부러 느럭느럭하는 것은 아니건마는 뺏어 가지고 내 손으로 하고 싶으리만치 초초하였다. 나는 참다못하여 시계를 꺼내 들고,
“이제 이 분밖에 안 남았소. 난 갈 테요.”
하고 재촉을 하였다. 그제야 양복쟁이는 눈에 불이 나게 놀리던 손을 쉬고 서류뭉텅이를 들어 뵈면서,
“이것만은 잠깐 내가 갖다가 보고, 댁으로 보내 드려도 관계없겠지요?”
하고 일어선다. 서두른 분수 보아서는 아무 소득이 없어 섭섭하고 열적으니, 서류뭉치나 뺏어 두자는 눈치 같다. 나는 두말없이 쾌락하였다. 사실 그 속에는 집에서 온 최근의 편지 몇 장과 소설 초고와 몇 가지 원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를 써서 기록한 서적이라야 원래 나에게는 사회주의라는 사자나 레닌이라는 레자는 물론이려니와, 독립이라는 독자도 없을 것은 나의 전공하는 학과만 보아도 알 것이었다. 아니, 설령 내가 볼셰비키에 관한 서적을 몇백 권 가졌거나 사회주의를 연구하거나, 그것은 학문의 연구라 물론 자유일 것이요, 비록 독립사상을 가진 나의 뇌 속을 X광선 같은 것으로나 심사법(心寫法)으로 알았다 할지라도, 행동이 없는 다음에야 조사하기로 소용이 무엇인가―---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한 것이지만 그 당장에는 하여간 무사히 방면되어 배에 오르게 된 것만 다행히 여겨 궐자들과 같이 허둥지둥 행구를 수습하여 가지고 나섰다.
짐을 가볍게 하여 준 트렁크를 두 손에 들고, 어서 올라오라는 선원의 꾸지람을 들어 가며 겨우 갑판 위에 올라서자, 기를 쓰는 듯한 경적과 말울음〔馬嘶〕소리 같은 기적 소리가 나며 신경이 자릿자릿한 징〔鉦〕소리가 교향적으로 호젓이 암흑에 싸인 부두 일판에 처량하고도 요란하게 울리었다. 배는 소리 없이 미끄러져 벌써 두어 간통이나 잔교에서 떨어졌다. 전송하러 온 여관 하인들이며 인부들의 그림자가 쓸쓸한 벌판에 성기성기 차차 조그맣게 눈에 띄고 선창 위에서 휘두르며 가는 등불이 쓸쓸한 바람에 불리어 길어졌다 짧아졌다 한다.
나는 선실로 들어갈 생각도 없이 으스름한 갑판 위에 찬바람을 쐬어 가며 웅숭그리고(춥거나 두려워 몸을 궁상맞게 몹시 웅그리고) 섰었다. 격심한 노역과 추위에 피곤하여 깊은 잠에 들어가는 항구는, 소리 없이 암흑 속에 누웠을 뿐이요, 전시의 안식을 지키는 야광주(어두운 데서 빛을 내는 구슬)는 벌써부터 졸린 듯이 점점 불빛이 적어 가고 수효가 줄어 가면서 깜박깜박 졸고 있다. 나는 인간계를 떠나서 방랑의 몸이 된 자와 같이 그 불빛의 낱낱이 어떠한 평화로운 가정의 대문을 지키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을 할 제, 선뜩선뜩하게 반짝이는 별보다도 점점 멀리 흐려 가는 불빛이 따뜻이 보였다. 나의 머릿속은 단지 혼돈하였을 뿐이요, 눈은 화끈화끈 단다.
외투 포켓에다가 두 손을 찌르고 어느 때까지 우두커니 섰는 내 눈에는 어느덧 뜨끈뜨끈한 눈물이 비어져 나와서, 상기가 된 좌우 뺨으로 흘러내렸다. 찬바람에 산뜩산뜩 스며들어 가는 것을 나는 씻으려고도 아니 하고 여전히 섰었다.
4
사람이란 자기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한 사람에게 대할 때처럼, 자기의 지위나 처지라는 것을 명료히 의식할 때가 없는 모양이다. 동위동격자끼리는 경우가 같기 때문에 서로 공명(共鳴)하는 점도 많고 서로 동정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누가 잘난 체를 하고 누가 굽힐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우열이 현격하면 공명이나 동정이라는 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지위나 처지에 대한 의식이 앞을 서서, 한편에서는 거드름을 빼면 한편에서는 고개가 수그러지고, 저편이 등을 두드리는 수작을 하면 이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일 지경 같으면 황송무지해서 긴한 체를 하여 보이기도 하고, 자존심이 굳센 자면 굴욕을 느끼어서 반감을 품을 것이요, 또 저편이 위압을 하려는 태도로 나오면 이편은 꿈질하여 납청장이( 되게 얻어맞거나 눌려서 납작해진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평안북도 정주의 납청 시장에서 만드는 국수는 잘 쳐서 질기다는 데서 유래)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항적 태도로 나오는 것이다. 사회조직이라든지 교육이라든지, 한층더 들어가서 사람의 심리가 근본적으로 잘 되어 그렇든지 못 되어 그렇든지 하여간 사람이란 그리하여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저편보다는 낫다, 한 손 접는다고 생각할 때에 느끼는 자랑과 기쁨이 자기를 행복게 하고 향상케 함보다는 저편보다 못하다, 감잡힌다고 생각할 제에 일어나는 굴욕과 분개가 주는 불행과 고통과 저상(沮喪, 기운을 잃음)이 곱이나 큰 것이다. 더구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에게 대하여는 보통사람보다도 열 곱, 스무 곱, 백 곱이나 큰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우열감이 단순한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를 벗어나서 집단적 배경이 있을 때에는 순전한 적대심으로 변하는 동시에, 좁고 깊게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앉아서 혹은 노골적으로 폭발되기도 하고 혹은 은근히 일종의 세력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도 다행한 일은 자존심이 많고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그 굴욕과 비분으로 말미암아 받는 바 불행과 고통과 저상이 도리어 반동적으로 새로운 광명의 길로 향하여 용약게 하는 활력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얼마나 강한지 의문이다. 약하기 때문에 잘난 체도 하여 보고, 약한 죄로 남을 미워도 하여 보고, 웃지 않을 때에 웃어도 보며, 울지 않아도 좋을 것을 울고야 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나 자신까지를 믿을 수가 없다.
되지 않게 감상적으로 생긴 나는 점점 바람이 세차 가는 갑판 위에서, 나오는 눈물을 억제하여 가며 가만히 섰다가, 목욕한 뒤의 몸이 발끝부터 차차 얼어 올라오는 것을 견디다 못하여 가방을 좌우쪽에 들고 다시 선실로 기어들어갔다. 아까 잡아 놓았던 자리는 물론 남에게 빼앗기고 들어가서 끼일 자리가 없었다. 나는 실없이 화가 나서 선원을 붙들어 가지고 겨우 한구석에 끼였으나, 어쩐지 좌우에 늘어 앉은 일본 사람이 경멸하는 눈으로 괴이쩍게 바라보는 것 같아서 불쾌하기 짝이 없다. 사가지고 다니던 벤또를 먹을까 하여 보았으나 신산(맛이 맵고 심. 세상살이가 힘들고 고생스러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하기도 하고 어쩐지 어깨가 처지는 것 같아서 외투를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다.
동경서 하관까지 올 동안을 일부러 일본 사람 행세를 하려는 것은 아니라도 또 애를 써서 조선 사람 행세를 할 필요도 없는 고로 그럭저럭 마음을 놓고 지낼 수가 있었지마는, 연락선에 들어오기만 하면 웬셈인지 공기가 험악하여지는 것 같고 어떠한 압력이 덜미를 잡는 것 같은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휴대품까지 수색을 당하고 나니 불쾌한 기분이 한층 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감고 드러누워서도 분한 생각이 목줄띠까지 치밀어 올라와서 무심코 입살을 악물어 보았다. 그러나 사면을 돌아다보아야 분풀이를 할 데라고는 없다. 설혹 처지가 같고 경우가 같은 동행자를 만난다 하더라도 하소연을 할 수는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여기는 배 속이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나를 한손 접고 내려다보는 나보다 훨씬 나은 양반들이 타신 배 속이기 때문이다.
날이 새었다. 밝기가 무섭게 하나둘씩 부스스부스스 일어나 쿵쾅거리며 오르락내리락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서 소세(머리를 빗고 낯을 씻음)를 하였다. 수백 명이나 되는 식구가 송사리 새끼 끼우듯이 끼여서 자고 난 판도방(절에서 불도를 닦는 승려가 모여서 공부하는 방. 절에서 가장 크고 넓은 방) 같은 속이 지저분하기도 하고 고약한 냄새에 머릿골이 아파서 나는 치장을 차리고 갑판으로 나갔다. 훨씬 해가 돋지는 못하여서 물은 꺼멓게 보일 뿐이요 훤한 하늘에는 뽀얀 구름이 처져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나, 아직도 컴컴스레하였다. 춥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쾌하다. 선실 속에서는 벌써 아침밥이 시작되었는지 연해 밥통을 날라 들여가고, 갑판에 나왔던 사람들도 허둥지둥 뒤쫓아 들어가는 모양이다.
이 삼등실에 모인 인종들은 어디서 잡아온 것들인지 내남직할 것 없이 매사에 경쟁이다. 들어가는 것도 경쟁, 나오는 것도 경쟁, 자는 것도 경쟁, 먹는 것에 이르러서는 한층 더한 것이 예사다. 조금만 웬만하면 이등을 탔겠지마는 씀씀이가 과한 나로는 어느 때든지 지갑이 얄팍얄팍하여서도 못 타게 되고, 그 돈으로 차 한 잔이라도 사먹겠다는 타산도 없지 않아서, 대개는 이 무료숙박소 같은 데에서 밤을 새는 것이다. 하여간 차림차림으로 보든지 하는 짓으로 보든지 말씨로 보든지 하층사회의 아귀당들이 채를 잡았고, 간혹 하층관리 부스러기가 끼여 있을 따름이다. 나는 그들을 볼 제 누구에게든지 극단으로 경원주의(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실제로는 꺼리어 멀리함)를 표하고 근접을 안 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보다는 몇 층 우월하다는 일본 사람이라는 의식으로만이 아니다. 단순한 노동자라거나 무산자(재산이 없는 사람, 무산 계급에 속한 사람)라고만 생각할 때에도 잇샅(잇새, 이와 이 사이)을 어우르기가 싫다. 덕의적(德義的) 이론으로나 서적으로는 무산계급이라는 것처럼 우리 친구가 되고 우리 편이 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에 그들과 마주 딱 대하면 어쩐지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혹은 그들에게 대한 혐오가 심하여지면 심하여질수록, 그 원인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논법으로, 더욱더욱 그들을 위하여 일을 하여야 하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지는 모르나, 감정상으로 그들과 융합할 길이 없다는 것은 아마 엄연한 사실일 것 같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어제 저녁도 궐하였기 때문에 시장한 증이 나서 선실로 기어들어갔다. 한차례 치르고 난 식탁 앞에 우글우글하는 사람떼가 꺼멓게 모여 서서 무엇인지 말다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 갖다 놓기 전에 와서 앉으면 어떻단 말이야?”
신경질로 생긴 바짝 마른 상에 독기를 품고 빽빽 소리를 지르는 것은, 윗수염이 까무잡잡하게 난 키가 조그만 사람이다. 그리 상스럽지 않은 얼굴로 보아서 어쩌면 외동다리 금테(판임관, 조선 후기에, 각 부의 대신이 임명하던 하위 관직. 이전 관리 등급의 참하관 칠품에서 구품직에 해당)쯤은 되어 보인다.
“글쎄 그래두 아니 되어요. 차례가 있으니까, 지금부터 앉았어도 안 드려요.”
검정 학생복을 입은 선원은 골을 올리려는 듯이 순탄한 어조로 번죽번죽 대꾸를 하고 섰다.
“우리로 말하면 이 배의 손님이지? 그래 손님을 그 따위로 대접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야……? 대관절 우리를 요보루 알고 하는 수작이란 말야?”
애꿎은 요보를 들추어 낸다.
“누가 대접을 어떻게 했단 말예요. 밥상은 차려 놓거든 와서 자시라는 게 무에 틀렸단 말씀유?”
“급하니까 얼른 가져오라는 게 어째서 잘못이란 말이야? 조선에서만 볼 일이지마는, 그래 자네들은 어쨌다구 호기를 부
리는 거야?”
까만 수염을 가진 자의 어기(말하는 기세)가 차차 줄어 가는 것을 보고 섰던 구경꾼 속에서는 불길을 돋우려는 듯이,
“뚜들겨 주어라. 되지 않게 관리 행세를 하려구, 건방지게!”
“되지 않은 놈이 하급 선원쯤 되어 가지고 관리 행세는, 마뜩지 않게! 흥!”
이런 소리가 여기저기서 떠들썩한다. 관리면 으레히 그렇게 하여도 관계없고 또 자기네들도 불복이 없겠다는 말눈치다.
“도시 조선의 철도가 관영(官營)이기 때문에 저런 것까지 제가 젠척을 하는 거야. 사영(私營) 같으면야 꿈쩍이나 할 텐가.”
누구인지 일리 있는 듯한 이런 소리를 분연히 하는 강개(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의기가 북받쳐 원통하고 슬픔)가도 있다. 여러 사람이 왁자히 떠드는 바람에 선원도 입을 답치고 슬슬 빠져 달아나가니 싸움은 실미지근히 흐지부지되고,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은 그대로 식탁에 부산히들 들어앉았다. 나는 그 싸우는 양이 다라워(좀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마음에 께름하여 다시 바깥으로 나가려다가 그래도 고픈 배를 참을 수가 없어서 누가 권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마지못해 먹는 것처럼 제출물에 쭈뼛쭈뼛하여 한구석에 끼여 앉아 먹기를 시작하였다.
‘먹는 데 더러우니 구구하니 아귀들이니 하여도 배가 고프면 하는 수 없는 거다.’
젓가락을 짓고 물을 마시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고 혼자 뱃속으로 웃었다.
선실 속에서는 쌈싸우듯 하여 가며 겨우 아침밥들을 먹고 와서는 이구석 저구석에서 짐들을 꾸리는 빛에, 악다구니를 하여 가며 간신히 얻어먹은 밥을 다시 꿱꿱 하며 도르는 빛에, 또 한참 야단이다. 나도 밥을 먹고 나니까 어쩐지 메슥메슥한 증이 나서 자기 자리로 가서 누웠었다.
육지가 차차 가까워 오는지 배가 그리 흔들리지도 않고 선객의 절반쯤은 벌써부터 갑판으로 나갔다. 나도 짐을 꾸려 가지고 나갔다. 의외에 퍽 가까워진 모양이다. 선원들은 오르락내리락 갈팡질팡하며 상륙할 준비에 분주하고, 경적은 쉴새없이 처량하고 우렁찬 소리를 아침 바람에 날린다. 삼등 승객들은 일, 이등과 격리를 시키려고 인줄같이 막아 맨 밑에 우글우글 모여 서서 제각기 앞장을 서려고 또 한참 법석이다. 그래야 일, 이등의 귀객들이 다 나간 뒤라야 풀릴 것을.
배는 부산 선창에 와서 닿았다.
“영치기 영차, 영치기 영차…….”
닻줄을 낚는 인부들 틈에서 누렇게 더러운 흰 바지저고리를 입은 조선 노동자가 눈에 띌 제, 나는 그래도 반가운 것 같기도 하고 인제는 제 집에 돌아왔다는 안심으로 마음이 턱 놓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배에서 끌어내린 층층다리가 선창 위에 걸리니까, 앞장을 서서 올라오는 것은 흰 테를 두른 벙거지를 쓰고 외투를 입은 순사보와 육혈포 줄을 어깨에 늘인 일본 순사하고, 누런 복장에 역시 육혈포의 검은 줄을 늘인 헌병들이다. 그리고 올라오는 길로 배에서 내려서는 어귀에 좌우로 지키고 서고, 그 다음에는 이쪽저쪽으로 승객이 지나쳐 나가는 길의 중간에도 지키고 섰다. 이렇게 경관과 헌병이 소정한 자리에 서니까, 그제서야 일, 이등 승객이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하였다. 교통차단을 당한 우리들 삼등객은 배 속에 갇힌 포로 모양으로 매우 부러운 듯이 모든 광경을 바라만 보고 섰었다.
“삼 원이로군! 삼 원만 더 냈더면 한번 호강해 보는 걸!”
이런 소리가 복작대는 속에서 들린다. 삼 원만 더 내면 이등을 타는 것이다. 이번에는 우리들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한중턱에서 천천히 걸어나갔다. 무슨 죄나 진 듯이 층계에서 한 발을 내려 디딜 때에는 뒤에서 외투자락을 잡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열 발자국을 못 떼어 놓아서 층계의 맨 끝에는 골독히(한 가지 일에 온정신을 쏟아 딴생각이 없게) 위만 쳐다보고 섰는 네 눈이 있다. 그것은 육혈포도 차례에 못 간 순사보와 헌병보조원의 눈이다. 그 사람들은 물론 조선 사람이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태연히 그들에게는 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확실한 발자취로 최후의 층계를 내려섰다. 될 수 있으면 일본 사람으로 보아 달라고 속으로 빌면서. 유학생으로, 조선 사람으로 알면 붙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그 태연한 태도라는 것은 도수장에 들어가는 소의 발자취와 같은 태연이었다.
“여보, 여보!”
물론 일본말로다.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였다. 으레 한번은 시달리려니 하는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에 헛소리를 들은 듯싶었다. 나는 모르는 체하고 두서너 발자국 떼어 놓았다. 하니까 이번에는 좌우편에 쭉 늘어섰던 사람 틈에서, 일복(日服)에 인버네스를 입은 친구가 우그려 쓴 방한모 밑에서 이상하게 번쩍이는 눈을 무섭게 뜨고 앞을 탁 막는다. 나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쭈르륵 흘렀다.
“저리 잠깐 갑시다.”
인버네스는 위협하듯이 한마디 하고 파출소가 있는 방향으로 나를 끈다. 나는 잠자코 따라 섰다. 멋도 모르는 지게꾼은 발에 채이도록 성화가 나서 ‘나리, 나리’ 하며 쫓아온다. 그 소리에는 추위에 떠는 듯도 하고, 돈 한푼 달라고 애걸하는 것같이 스러져 가는 애조가 섞여 있었다. 나는 고개만 흔들면서 가다가 파출소로 끌려 들어갔다.
파출소에 들어선 나는 하관에서 조사를 당할 때와는 다른 일종의 막연한 공포와 불안에 말이 어눌하여졌다. 더구나 일본서 그런 종류의 사람들에게 대하듯이 퉁명을 부릴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와서 제풀에 자기를 위압하는 자기의 비겁을 속으로 웃으면서도, 어쩐지 말씨도 자연 곱살스러워지고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지는 것을 깨달았다.
형사의 심문은 판에 박은 듯이 의외에 간단하였다. 나중에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기에, 나는 하관에서 빼앗길 것은 다 빼앗겼으니까 볼 만한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미심쩍거든 열어 보라고 열쇠를 꺼내서 주려고 하였다. 아무리 형사라도 사람이란 우스운 것이다. 열쇠까지 내어 주니까 웃으면서 그만두라고 하며, 생색이나 내는 듯이 어서 나가라고 쾌쾌히 내쫓는다. 아마 하관서 온 형사에게 벌써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양 같았다. 나는 겨우 마음이 놓여서 한숨을 휘 쉬고 나와서, 우선 짐을 지게꾼에게 들려 가지고, 정거장으로 가서 급히 맡겨 놓고 혼자 나섰다.
5
현대적 생활을 영위할 수단 방도도 없고 생산화식(生産貨殖, 물건을 만들고 재산을 늘리는 일)에 어둡거든,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철학에나 철저하다든지, 이도 저도 아닌 비승비속(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라는 뜻으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함)으로 엉거주춤하고 살아온 가난뱅이의 이 민족이, 그 알뜰한 살림이나마 다 내놓고 협포(폭이 좁은 배)로 물러앉고 나니 열 손가락을 늘이고 앉아서 팔아라, 먹자! 하고 있는 대로 깝살리는(찾아온 사람을 따돌려 보내다. 재물이나 기회 따위를 흐지부지 다 없애다.) 것이 능사라, 그러나 팔고 깝살리는 것도 한이 있지 화수분(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으로 무작정하고 나올 듯싶은가! 그렇거나 말거나 이 따위 백성을 휘둘러 내고 휩쓸어 내기야 누워서 떡먹기다. 그래도 속임수에 빠진 노름꾼은 깝살릴 대로 깝살리고 두 손 털고 나서면서도 몸은 달건마는, 이 백성은 다 털리고 나서도 몸이 달긴커녕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저 굶어죽으라는 세상야.”
하는 한마디에 지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이 구차한 놈이 책상물림으로 세상물정은 모르고, 게다가 유혹은 많은데 안고수비(眼高手卑, 눈은 높으나 솜씨는 서투르다는 뜻으로, 이상만 높고 실천이 따르지 못함)하니 씀씀이는 남에 지지 않것다,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는 셈으로 없는 놈이 대돈변을 내서라도 돈푼 만져 보면 조상대부터 걸려 보지 못하던 것이나 얻은 듯이 전후 불각(깨닫거나 생각하지 못함)하고 쓸 데 안 쓸 데 함부로 써버려야지, 한 푼이라도 까불리지를 못하고 몸에 지녀 두면 병이 되는 것이 구차한 놈의 버릇이다. 구차하기 때문에 이러한 얌전한 버릇이 생긴 것인지 이 따위로 버릇이 얌전하여 구차한 것인지는 별문제로 치고라도, 어떻든 자기도 모르는 중에 흐지부지 까불리고 나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구차한 놈의 갸륵한 팔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팔자가 좋고 그른 것은 제이 문제로 하고, 하여간 조선 사람의 팔자를 아무리 비싸게 따져 본대야 이보다 더 나을 것도 없고 더 신기할 것도 없다. 우선 부산이란 데로만 보아도, 부산이라 하면 조선의 항구로는 첫손 꼽을 데요 조선의 중요한 첫 문호라는 것은 소학교에 한 달만 다녀도 알 것이다. 그러니만치 부산만 와봐도 조선을 알 만하다. 조선을 축사(縮寫, 원형보다 작게 줄이어 베껴 쓰거나 그림. 사진을 줄여서 다시 찍음)한 것, 조선을 상징한 것이 부산이다. 외국의 유람객이 조선을 보고자거든 우선 부산에만 끌고 가서 구경을 시켜 주면 그만일 것이다. 나는 이번에 비로소 부산의 거리를 들어가 보고 새삼스럽게 놀랐고 조선의 현실을 본 듯싶었다.
나는 배 속에서 아침을 먹었건마는, 출출한 듯하기도 하고, 차 시간까지는 서너 시간 남았고, 늘 지나다니는 데건마는 이때껏 시가에 들어가서 구경하여 본 일이 없기에, 조선 거리로 들어가 보기로 하고 나섰다.
부두를 뒤에 두고 서편으로 꼽들어서 전찻길을 끼고 큰길을 암만 가야 좌우편에 이층집이 쭉 늘어섰을 뿐이요, 조선 사람의 집이라고는 하나도 눈에 띄는 것이 없다. 얼마도 채 못 가서 전찻길은 북으로 꼽들이게 되고 맞은편에는 극장인지 활동사진인지 울그데불그데한 그림 조각이며 깃발이 보일 뿐이다. 삼거리에 서서 한참 사면팔방을 돌아다보다 못하여 지나가는 지게꾼더러 조선 사람의 동리를 물어 보았다. 지게꾼은 한참 망설이며 생각을 하더니 남쪽으로 뚫린 해변으로 나가는 길을 가리키면서 그리 들어가면 몇 집 있다 한다. 나는 가리키는 대로 발길을 돌렸다. 비릿하기도 하고 고릿하기도 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해산물 창고가 드문드문 늘어선 샛골짜기를 빠져서 이리저리 휘더듬어 들어가니까, 바닷가로 빠지는 지저분하고 좁다란 골목이 나타났다. 함부로 세운 허술한 일본식 이층집이 좌우로 오륙 채씩 늘어섰는 것이 조선 사람의 집 같지는 않으나 이문 저문에서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조선 사람이다. 이집 저집 기웃기웃하며 빠져나가려니까, 어떤 이층에는 장고를 세워 놓은 것이 유리창으로 비치어 보인다. 그러나 문간에는 대개 여인숙이라는 패를 붙였다. 잠깐 보기에도 이런 항구에 흔히 있는 그러한 너저분한 영업을 하는 데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침결이 돼서 그런지 계집이라고는 씨알머리도 눈에 아니 띈다.
쓸쓸한 거리를 이리저리 돌다가 그 여인숙이란 데를 한 집 들어가 보고 싶은 호기심이 불쑥 났으나, 찻시간이 무서워서 발길을 돌쳤다. 다시 큰길로 빠져나와서 정거장으로 향하다가, 그래도 상밥(반찬과 함께 상에 차려서 한 상씩 따로 파는 밥) 파는 데라도 있으려니 하고 이골목 저골목 닥치는 대로 들어가 보았다. 서울 음식같이 간도 맞지 않을 것이요 먹음직할 것도 없겠지마는, 무엇보다도 김치가 먹고 싶고 숟가락질이 하여 보고 싶어서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사람 집 같은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를 않는다. 간혹 납작한 조선 가옥이 눈에 띄기에 가까이 가서 보면 화방을 헐고 일본식 창틀을 박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얼마 되지도 않는 좁다란 시가이지마는 큰 길이고 좁은 길이고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의 수효로 보면 확실히 조선 사람이 반수 이상인 것이다.
‘대체 이 사람들이 밤이 되면 어디로 기어들어가누?’
하는 생각을 할 제, 큰 의문이 생기는 동시에 그 불쌍한 흰옷 입은 백성의 운명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몇백천 년 동안 그들의 조상이 근기 있는 노력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져 놓은 이 땅을 다른 사람의 손에 내던지고 시외로 쫓겨 나가거나 촌으로 기어들어갈 제, 자기 혼자만 떠나가는 것 같고, 자기 혼자만 촌으로 기어가는 것 같았을 것이다. 땅마지기나 있던 것을 까불려 버리고, 집 한 채 지녔던 것이나마 문서가 이사람 저사람의 손으로 넘어 다니다가 변리에 변리를 쳐서 내놓고 나가게 될 때라도 사람이 살려면 이런 꼴도 보고 저런 꼴도 보는 것이지 하며, 이것도 내 팔자소관이라는 값싼 낙천주의나 단념으로 대대로 지켜 내려오던 제 고향의 제 집, 제 땅을 버리고 문 밖으로 나가고 산으로 기어들 뿐이요, 이것이 어떠한 세력에 밀리기 때문이거나 혹은 자기가 착실치 못하거나 자제력과 인내력이 없어서 깝살리고 만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 가구면 천 가구에서 한 집쯤 줄었어야, 다만 ‘아무개네는 이번에 아무 데로 이사를 간다네’ 하고 그야말로 동릿집 이야기삼아 저녁밥 후의 인사 대신으로 주고받을 뿐이요, 어떠한 사정이 어떻게 되어서 한 가구가 주는지 그 내막이야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천 가구에서 한 가구쯤 줄어진대야 남은 구백구십구 가구에게는 별로 영향이 없을 것이요, 또 한 가구가 줄었는지 늘었는지조차 전연 모르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한 집 줄고 두 집 줄며, 열 집이 바뀌고 백 집이 바뀌어 쓰러져 가는 집은 헐리고 어느 틈에 새 집이 서고, 단층집은 이층으로 변하며, 온돌이 다다미가 되고 석유불이 전등불이 된 것이었다.
“아무개 집이 이번에 도로로 들어간다데.”
하며 곰방담뱃대에 엽초를 다져 넣고 뻑뻑 빨아 가며 소견삼아 숙덕거리다가, 자고 나면 벌써 곡괭이질 부삽질에 며칠 동안 어수선하다가 전차가 놓이고, 자동차가 진흙덩어리를 튀기며 뿡뿡거리고 달아나가고, 딸꾹 나막신 소리가 날마다 늘어 가고, 우편국이 들어와 앉고, 군아(郡衙, 고을의 수령이 사무를 보던 관아)가 헐리고 헌병주재소가 들어와 앉는다. 주막이니 술집이니 하는 것이 파리채를 날리는 동안에 어느덧 한구석에 유곽이 생기어 사미센(三味線)* 소리가 찌링찌링 난다. 매독이니 임질이니 하는 새 손님을 맞아들인 촌서방님네들이, 병원이 없어 불편하다고 짜증을 내면 너무 늦어 미안하였습니다는 듯이 체면 차릴 줄 아는 사기사가 대령을 한다. 세상이 편리하게 되었다.
*샤미센 ([일본어]shamisen[三味線]) : 일본의 대표적인 현악기. 고양이 가죽이나 개가죽을 붙인 공명 상자에 기다란 손가락판을 달고 비단실을 꼰 세 줄의 현을 그 위에 친 것으로, 무릎 위에 비스듬히 얹고 발목(撥木)으로 줄을 튕겨 연주한다.
“우리 고을엔 전등도 달게 되고 전차도 개통되었네. 구경 오게. 얌전한 요릿집도 두서넛 생겼네. 자네 왜갈보(일본 매춘부) 구경했나? 한번 보여 줌세.”
몇천 년 몇백 년 동안 가문에 없고 족보에 없던 일이 생기었다. 있는 대로 까불릴 시절이 돌아왔다. 편리해 좋아, 놀기가 좋아서 편해하며 한섬지기 파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우리겐 인젠 이층집도 꽤 늘고 양옥도 몇 채 생겼다네. 아닌게아니라 여름엔 다다미가 편리해. 위생에도 매우 좋은 거야.”
하고 두섬지기 깝살릴 수밖에 없게 된다. 누구의 이층이요 누구를 위한 위생이냐.
양복쟁이가 문전 야료(까닭 없이 트집을 잡고 함부로 떠들어 댐. 서로 시비의 실마리를 끌어 일으킴.)를 하고, 요리장수가 고소를 한다고 위협을 하고, 전등값에 졸리고, 신문대금이 두달 석달 밀리고, 담배가 있어야 친구 방문을 하지. 원 찻삯이 있어야 출입을 하지 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동안에 집문서는 식산은행의 금고로 돌아 들어가서 새 임자를 만난다. 그리하여 또 백 가구 줄어지고 또 이백 가구 줄었다.
“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 암만해두 촌살림이 좋아! 땅이라두 파먹는 게 안전해.”
하며 쫓겨 나가고 새로 들어오며 시가가 나날이 번화하여 가는 동안에 천 가구의 최후의 한 가구까지 쓸려 나가고야 말지만, 천째 집이 쫓겨 나갈 때에는 벌써 첫째로 나간 사람은 오동잎사귀의 무늬를 박은 목배(木杯, 나무 잔)를 고리짝에 넣어 가지고 압록강을 건너가 앉아서 먼 길의 노독을 배갈(수수를 원료로 하여 빚은, 알코올 농도 60% 내외의 중국 특산 소주. 무색투명하며 향기가 있고 씁쓰레하다) 한 잔에 풀고 얼쩍하여 화푸념만 하고 있는 것이다.
까불리는 백성, 그들은 부지깽이 하나 남기지 않고 들어 내고 집어 낼 때에 자기가 이 거리에서 쫓겨 나갈 줄이야 몰랐으렷다. 구차한 놈이 주머니를 털 적에 내일부터 밥을 굶을지 거리에 나앉을지 저도 모르게 최후의 일 원까지를 말리듯이. 그러나 이 시가의 주인인 주민이 하나씩 둘씩 시름시름 쫓겨 나갈 제, 오늘날 씨알머리도 남지 않고 아주 딴판의 새 주인이 독점을 하리라는 것은 한 사람도 꿈에도 정신을 차리고 생각지는 못하였으렷다. 역시 구차한 놈의 주머니가 털리듯이 부지불식간에 그럭저럭 흐지부지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여 볼 제, 잗단 세간 나부랭이를 꾸려 가지고 북으로 북으로 기어나가는 ‘패자의 떼’의 쓸쓸한 뒷모양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나는, 그리 늦을 것은 없으나 쓸쓸한 찬바람이 도는 큰길을 헤매기가 싫어서 단념하고 돌아서는 길에, 어떤 일본 국숫집 문간에서 젊은 계집이 아침 소제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별안간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우뚝 섰다. 이때까지 혼자 분개하고 혼자 저주하던 생각은 감쪽같이 스러지고, 눈에 보이는 것은 걷어 올린 옷자락 밑에 늘어진 빨간 고시마기(무지기, 일본식 속치마)하고 그 아래로 하얗게 나타난 추울 듯한 토실토실한 종아리다.
“어서 오세요.”
모가지에만 분때가 허옇게 더께가 앉은 감숭한 상을 쳐들며 언제 본 사람이라고 나를 반갑게 맞는다. 뒤를 이어서,
“어서 오십쇼, 들어옵쇼.”
하고 줄레줄레 나와서 맞아들이는 계집애가 서넛은 되었다.
이러한 조그마한 집에 젊은 계집이 네다섯씩이나 있는 것은 물어 보지 않아도 알조다. 나는 걸려드나 보다 하는 불안이 있으면서도 더러운 호기심을 가지고 구경삼아 이층으로 올라가서, 인도하는 대로 너저분한 다다미방에 들어앉았다. 우선 간단한 음식을 시키고 앉았으려니까, 다른 계집애가 부삽에 화롯불을 담아 가지고 바꾸어 들어왔다. 화로에 불을 쏟아 놓고 화젓가락으로 재를 그러모으며 앉았던 계집애는 젓가락을 든 손을 잠깐 쉬며,
“어디까지 가세요.”
하고 나를 쳐다본다. 넓은 양미간이 얼크러져서 음침하기도 하고 이맛전이 유난히 넓기 때문에 여무져 보이지는 않으나, 그래도 해끄무레한 이쁘장스런 상판이다.
“서울까지…… 너는 어디서 왔니?”
“서울까지예요? 참 서울 구경을 좀 했으면…… 여기보다 좋겠죠?”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아니 하고 이런 소리를 한다.
“그리 좋을 것은 없어도 여기보다는 좀 낫지.”
우리의 수작은 음식이 나오는 바람에 허리가 잘리고 말았다. 나는 몸이 녹으라고 술을 몇 잔이나 폭배를 하고 나서, 계집애들에게도 권하였더니 별로 사양들도 아니 하고 돌려 가며 잔을 주고받았다. 이번에는 다른 계집애가 갈아 들어오는 술병을 들고 들어왔다. 이 계집애도 판을 차리고 화로 앞에 앉는다. 이쁘든 밉든 세 계집애를 앞에다가 놓고 앉아서 술을 먹는 것은 그리 싫을 것은 없지만, 너무 염치가 없이 무례하고 뻔뻔하게 구는 데에는 밉살맞고 불유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 한 잔이라도 얻어 걸린다는 것보다는 주인에게 한 병이라도 더 팔게 하여 주는 것이 저의 공로요, 주인의 따뜻한 웃는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니 그도 그럴 것이나, 내가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한층 더 마음을 놓고 더욱이 체면도 아니 차리고 저희 마음대로 휘두르며, 서넛씩 몰켜 들어와서 바가지를 씌우려고 판을 차리는 것이 못마땅하였다. 그래도 그 중에 화롯불을 가져온 계집애만은 저희들 축에서 좀 쫄려 지내는지 한풀이 죽어서 떠드는 꼴만 웃으며 가만히 바라보고 앉았다.
“담바구야, 담바구야, 동래(東萊)나 우루산〔蔚山〕의 담바구야…….”
“잘 하는구먼. 그러나 너희들은 몇 해나 되었니? 여기 온 지가.”
한 년이 담바고타령의 입내를 우습게 내며 콧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며 물었다. 이것이 조선에 와 있는 일본 사람에게는 남녀를 물론하고 누구더러든지 물어 보는 나의 첫인사다. 그것은 얼마나 조선 사람에게 대하여 오만한 체를 하며 건방지게 구는가 그 정도를 알아보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불량하게 생긴 노가다패(우리 조선 사람은 일본 노동자를 특히 이렇게 부른다)라도, 처음에는 온순할 뿐 아니라 도리어 이국 풍정에 어두우니만치 처음에는 공포를 품는 것이 보통이지만, 반년 있어 다르고, 일년 있어 달라진다. 오 년, 십 년 내지 이십 년이나 있어서 조선의 이무기가 된 자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제군이 생각할 것은 어찌하여 일 년, 이 년, 오 년, 십 년…… 해가 갈수록 그들의 경모(輕侮, 남을 하찮게 보아 업신여기거나 모욕함)하는 눈이 나날이 날카로워 가고, 따라서 십 배, 백 배나 오만무례하도록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도 그 중의 중요한 원인들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 사람은 외국인에게 대해서 아무것도 보여 준 것은 없으나, 다만 날만 새면 자릿속에서부터 담배를 피워 문다는 것, 아침부터 술집이 번창한다는 것, 부모를 쳐들어서 내가 네 애비니 네가 내 손자니 하며 농지거리로 세월을 보낸다는 것, 겨우 입을 떼어 놓은 어린애가 엇먹는(사리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으로 비꼬는) 말부터 배운다는 것, 주먹 없는 입씨름에 밤을 새고 이튿날에는 대낮에야 일어난다는 것…… 그 대신에 과학지식이라고는 소댕 뚜껑이 무거워야 밥이 잘 무른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것을, 외국 사람에게 실물로 교육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기 때문에 그들이 조선에 오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를 경멸할 수 있는 사실을 골고루 보고 많이 안다는 의미밖에 아니 되는 것이다.
“담바구야 담바구야…… 노이구곤 오데기루네…….”
입을 이상하게 뾰족이 내밀었다 오므렸다 하고, 젓가락으로 화롯전을 두들겨 가며 장단을 맞춰서 콧노래를 하다가 뚝 그치더니,
“얘가 제일 잘 해요. 우리는 온 지가 삼사 년밖에 아니 되었지만…….”
하며 벙벙히 앉았는 화롯불 가져온 아이를 가리킨다.
“응! 그래? 너는 얼마나 있었길래?”
말담도 별로 없이 조용히 앉았는 것이 어디로 보아도 건너온 지 얼마 안 되는 숫보기로만 생각하였던 것이, 조선 소리를 잘 한다니 조선애가 아닌가도 싶다.
“예서 아주 자라났답니다. 제 어머니가 조선 사람인데요.”
하며 담바고타령을 하던 계집애가 이때까지 하고 싶던 이야기를 겨우 하게 되었다는 듯이 입이 재게 즉시 대답하고 나서,
“그렇지!”
하며 당자에게 얼굴을 들이댄다. 그 소리가 너무도 커닿기 때문에 조소하는 것같이 들리었다. 일인 애비와 조선인 에미를 가졌다는 계집애는 히스테리컬하게 얼굴이 주홍빛이 되고 눈초리가 샐룩하여졌다. 어쩐지 조선 사람 어머니를 가진 것이 앞이 굽는다는 모양이다.
“정말 그래? 그럼 어머니는 어디 있기에?”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대구에 있에요.”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가 간신히 쳐들면서 대답을 한다.
“그래 어째 여기 와서 있니? 소식은 듣니?”
왜 여기까지 와서 있느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수작이지만 나는 정색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 계집애는 생글생글하며 나를 쳐다보더니,
“글쎄 그러지 않아두 누가 대구 가시는 이나 있으면 좀 부탁을 해서 알아보고 싶어두 그것도 안 되구…… 천생 언문으로 편지를 쓸 줄 알아야죠.”
하며 이번에는 자기 신세를 조소하듯이 마음놓고 커닿게 웃는다.
“그럼 아버지하군 지금 헤져서 사는 모양이구나?”
“그야 벌써 헤졌죠. 내가 열 살 적인가, 아홉 살 적에 장기(長崎)로 갔답니다.”
“그래 그 후에는 소식은 있니?”
“한참 동안은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하지만 이 설이나 쇠고 나건 찾아가 볼 테에요.”
하며 흑흑 느끼듯이 또 한번 어색하게 웃는다. 그 웃음은 어느 때든지 자기의 기이한 운명을 스스로 조소하면서도 하는 수 없다는 단념에서 나오는, 말하자면 큰일을 저지르고 하도 깃구멍이 막혀서 나오는 웃음 같았다.
“아무리 조선 사람이라두 길러 낸 어머니가 정다울 테지? 너의 아버지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다마는, 지금 찾아간대야 그리 반가워는 아니 할걸?”
조선 사람 어머니에게 길리어 자라면서도 조선말보다는 일본말을 하고, 조선옷보다는 일본옷을 입고, 딸자식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조선 사람인 어머니보다는 일본 사람인 아버지를 찾아가겠다는 것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정리를 지나서 어떠한 이해관계나 일종의 추세라는 타산이 앞을 서기 때문에 이별한 지가 벌써 칠팔 년이나 된다는 애비를 정처도 없이 찾아간다는 것이라고 생각할 제, 이 계집애의 팔자가 가엾은 것보다도 그 에미가 한층더 가엾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도 불쌍하지만, 아버지두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찾아가면 설마 내쫓기야 할까요?”
하며 아범을 찾아가면 어떻게 맞아 줄까 하는 그 광경이나 그려 보듯이 멀거니 앉았다.
“그래두 어머니가 조선 사람이니까 싫구, 조선이니까 떠나겠다구 하는 게지, 조선이 일본만큼 좋았더면 조선 사람 뱃속에서 나왔다기루서니 불명예 될 것도 없고 아버지를 찾어가려는 생각도 안 났을 테지?”
나는 물어 보지 않아도 좋을 것까지 짓궂이 물었다. 계집애는 잠자코 웃을 뿐이었다. 나는 찻시간을 생각하고 인제야 들어온 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얘, 이 양반께 대구에 데려다달라구 하렴! 너야말로 후레딸년이다. 어머니를 내버리고 뛰어나오는 망할년이 어디 있단 말이냐.”
담바고타령 하던 계집애가 놀리듯 꾸짖듯 찧고 까분다.
“참 그러는 게 좋겠지. 여기 있어야 무슨 신기한 꼴이나 볼 줄 아니? 나 같으면 그런 어머니만 있으면 벌써 쫓아갔겠다!”
이번에는 곁에 앉았던, 커다란 입귀가 처지고 콧등이 얼크러진 계집애가 역시 놀리는 수작으로 말을 받는다. 저희들끼리도 업신여기면서 한편으로는 얼굴이 반반한 것을 시기를 하는 모양이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그럼 너는 왜 이런 데까지 와서 난봉을 피우니?”
하며 실없는 말처럼 역성을 들어 주었다.
“그야 부모도 없구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그렇죠.”
하며 좀 분개한 듯이 한마디 하고 나서,
“그런 소린 고만하구 술이나 좀더 먹자. 또 가져올까요.”
하고 그만두라는 것도 듣지 않고 뛰어내려갔다.
“그러나 너 아버지를 찾어간대야 얼굴이 저렇게 이쁘니까, 그걸 미끼로 팔아먹으려고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아니? 그것보다는 여기서 돈푼 있는 조선 사람이나 하나 얻어 가지고 제 맘대로 사는 게 좋지 않으냐. 너 같은 계집애를 데려가지 못해하는 사람이 조선 사람 중에도 그득하리라.”
나는 타이르듯이 이런 소리를 하고, 계집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글쎄요, 하지만 조선 사람은 난 싫여요. 돈 아니라 금을 주어도 싫여요.”
계집애는 진담으로 이런 소리를 한다.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자기의 운명에 검은 그림자를 던져 준 무슨 주문이나 듣는 것같이 이에서 신물이 나는 모양이다. 이때에 나는 동경의 정자를 생각하면서,
“그럼 나도 빠질 차례로구나?”
하며 웃었다. 계집도 웃으며 잠자코 내 얼굴을 익숙히 쳐다본다. 입귀가 처진 밉살맞은 계집이 술병을 들고 올라왔다. 나는 먹고도 싶지 않은 술잔을 받으면서,
“이거 보게, 이 미인을 데려갈까 하고 잔뜩 장을 대고 연해 비위를 맞춰 드렸더니, 나중에 한다는 소리가 조선 사람은 죽어도 싫다는 데야 눈물이 쨀끔하는 수밖에, 하하하. 너는 그러지 않겠지?”
“객지에서 매우 궁하신 모양이군요. 글쎄…… 실컷 한턱 내신다면, 히히히.”
이 계집애는 나의 한 말을 이상스럽게 지레짐작을 하고 딴청을 한다.
“넌 의외에 값이 싼 모양이로구나?”
하며 나는 인력거를 부르라 명하고 일어서 버렸다. 계집아이들이 짓궂이 붙들고 승강이를 하는 것을 간신히 뿌리치고 나섰다.
‘이러기 때문에 시골자들이 빠지는 것이다!’
나는 일종의 불쾌를 느끼면서 인력거 위에서 이런 생각을 하여 보았다.
기차는 하마터면 놓칠 뻔하였다. 짐을 맡기고 간 것까지 잔뜩 눈독을 들여 둔 ‘그쪽 사람들’은 은근히 찾아 보았던지, 내가 허둥지둥 인력거를 몰아 오는 것을 아까 만났던 인버네스짜리가 대합실 문 앞에서 힐끗 보고 빙긋 웃는다.
나는 본체만체하고 맡겼던 짐을 찾아 가지고 허둥허둥 폼에 들어와 찻간으로 뛰어올라왔다. 형사도 차창 밖으로 가까이 와서 고개를 끄덕 하며 무어라고 중얼중얼하기에 나는 창을 열어 주었다.
“바루 서울로 가시죠?”
하며 왜 그러는지 커닿게 소리를 지른다. 나는 웃으면서, 내 처가 죽게 되어서 시험을 보다가 말고 가니까 물론 바로 간다고(나중에 생각하고 혼자 웃었지만) 하지 않아도 좋을 말까지 기다랗게 늘어놓았다.
형사는 또 무엇이라고 중얼중얼하는 모양이었으나, 바람이 휙 불고 기차는 움직이기 때문에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웬셈인지 나하고 수작을 하면서도 연해 왼편을 바라보는 게 수상스러웠다. 그러나 차가 움직이자 양복쟁이 하나가 저쪽 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나 역시 무심코 보았을 뿐이었다.
6
기차가 김천역에 도착하니까, 지금쯤은 으레 서울집에 있으려니 하였던 형님이 금테모자에다 망토를 두르고 마중을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혹시 아는 사람이나 있을까 하고 유리창 바깥을 내다보며 앉았던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창을 올리고 인사를 하려니까, 형님은 웃으며 창 밑으로 가까이 오더니 어떻든 내리라고 재촉을 한다. 어찌할까 하고 잠깐 망설이다가 형님이 그 동안에 내려와서 있는 것을 보든지 웃는 낯을 보든지 병인이 그리 급하지는 않은 모양이기에, 나는 허둥지둥 짐을 수습하여 가방을 창 밖으로 내주고 내려왔다. 뒤미처서 양복쟁이 하나도 창황히(놀라거나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미처 어찌할 사이 없이 매우 급작스럽게) 따라 내리었다.
형님은 짐을 들려 가지고 가려고 심부름꾼 아이까지 데리고 나왔었다. 출구 앞에 섰던 아이놈에게 가방을 내주고 우리들이 나가려니까, 그 밑에 바짝 다가섰던 헌병보조원이 내 뒤로 내린 양복쟁이와 수군수군하다가 형님을 보고,
“계씨가 오셨어요? 오늘 저녁에 떠나시나요?”
하며 묻는다. 형님은 웃는 낯으로,
“네, 대개 밤차로 올러갑니다.”
하고 거진 기계적으로 오른손이 모자의 챙에 올라가 붙었다. 부자연하고 서투른 그 모양이 나에게는 우습게 보이면서도 가엾었다. 어떻든 형님 덕에 나는 별로 승강이를 아니 당하고 무사히 빠져나왔다.
형님은 망토 밑으로 들여다보이는 도금을 물린 검정 환도 끝이 다리에 터덜거리며 부딪는 것을 왼손으로 꼭 붙들고 땅이 꺼질 듯이 살금살금 걸어 나오다가, 천천히 그 동안 경과를 이야기하여 들려 준다.
“네게 돈 부치던 날 아침은 아주 시각을 다투는 것 같았으나 낮부터 조금씩 돌리기 시작하여 그저께 내가 내려올 때에는 위험한 고비는 넘어선 모양이지만, 지금도 마음이야 놓겠니. 워낙이 두석 달을 끌었으니까. 그러나 곧 떠나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나는 어제쯤 올 줄 알고 이틀이나 정거장에 나왔지!”
하고 형님은 차근차근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전보 받던 날 밤에 떠났죠마는 오다가 신호에서 하룻밤을 묵었지요.”
나는 꾸며 댈까 하다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을 하였다.
“무슨 급한 볼일이 있기에 돈을 들여 가며 노중에서 묵었단 말이냐?”
벌써부터 형님의 말소리는 차차 거칠어 갔다.
“별로 볼일은 없지만, 몸도 아프고 완행이 되어서 여간 지리하여야지요.”
“웬만하면 그대로 내친 길에 올 게지. 너는 그저 그게 병통야.”
하며 형님은 잠깐 눈살을 찌푸리는 듯하였다.
이 형님이라는 사람은 한학으로 다져 만든 촌생원님이나 신학문에도 그리 어둡지는 않을 뿐 아니라, 우리집에는 없으면 안 될 사람이다. 부친이 합방 전후에 거진 정치열, 명예광에 달떠서 경향으로 동분서주하며 넉넉지 않은 가산을 흐지부지 축을 내어 놓은 분수로 보아서는 지금쯤 내가 유학을 하기는 고사하고 밥을 굶은 지가 벌써 오랜 일이었겠지마는, 얼마 아니 남은 것을 이 형님이 붙들고 앉아서 바자위게(너그러운 맛 없이) 꾸려 나가기 때문에 이만치라도 부지를 하게 된 것이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보통학교 훈도쯤으로 이천여 원 돈이나 모은 것을 보면 규모가 얼마나 짜인 사람인가를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존경하면서도 성미가 맞을 수는 없었다. 생각하면 우리 삼부자같이 극단으로 다른 길을 제각기 걸어 나가는 사람들은 없다. 세상에는 정치밖에 없다는 부친의 피를 받았으면서 보수적, 전형적 형님과 무이상(無理想)한 감상적, 유탕적 기분이 농후한 내가 태어났다는 것이 세상도 고르지 못한 아이러니다.
“그래 학교의 시험은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형님은 한참 있다가 또 물었다.
“보다가 두고 왔지요.”
나는 또 무슨 소리가 나올까 보아서 우물쭈물할까 하다가 역시 이실직고를 하고 말았다.
“그럴 줄 알았더면 전보를 다시 놓을 걸 그랬군!”
하며 시험을 중도에 폐하고 온 것을 매우 애석해하는 모양이나, 나는 전보를 다시 아니 놓아 준 것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잠자코 따라 걸었다.
“그래 추후 시험이라도 봐야 하겠구나? 언제도 추후 시험인가 본다고 일찍이 나와서 돈만 들이고 성적도 좋지 못한 적이 있었지 않었니? 어떻든 문학이니 뭐니 하구 공연히 그까짓 건 하구 난대야 지금 세상에 얻다가 써먹는단 말이냐?”
이런 소리는 일년에 한 번이나 두어 번 귀국할 때마다 꼭 두 번씩은 듣는다. 형님한테 한 번, 아버님한테 한 번이다. 그러나 어떠한 때에는 아버님에게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을 때가 있다. 처음에는 열심으로 반대도 하여 보았다. 교육이라는 것은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요 기계를 제조하는 것이 아니니까, 학문을 당장에 월급푼에 써먹자고 하는 것도 아니요, ‘똥테’(나는 어느 때든지 금테를 똥테라고 불렀다) 바람에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도 하여 드리고, 개성은 소중한 것이니까 제각기 개성에 따라서 교육을 하여야 한다는 문제를 들추어 가지고 늘 변명을 하여 왔다. 그러나 결국은 단념하는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세계와 자기의 세계에는 통로가 전연히 두절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마치 무덤 속과 무덤 밖이 판연히 다른 딴세상임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부자나 형제로서 할 말 이외에는, 그리고 학비 이야기 이외에는 아무 말도 입을 벌리지 않기로 결심을 하였다. 모친이나 자기 처나 누이동생에게 하듯이만 하면 집안에 큰소리가 없을 줄 알았다. 되지 않은 이론이니 설명이니 사상발표니 하기 때문에 감정이 상하고 충돌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까 자기의 주위가 어쩐지 적막하여진 것 같고, 가정이란 것은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재워 주는 여관 같았다. 여관 중에도 제일 마음에 맞지 않는 여관 같았다.
지금도 일년 만에 만나는 첫대바기에 형님에게 또 새판으로 그러한 소리를 들으니까 불쾌하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작년 여름에 나왔을 때에 학교 문제로 삼부자가 한참 논쟁을 하다가 ‘집구석이라고 돌아오면 이렇게들 사람을 귀찮게 굴 테면 여관으로라도 나간다’ 하고 이틀 사흘씩 친구의 집으로 공연히 떠돌아다니던 생각을 하여 보면서 잠자코 말았다. 어쩐지 마음이 쓸쓸하여지고 섭섭한 생각이 든다.
우리는 한참 동안 잠자코 걷다가, 형님 집으로 들어가는 동구까지 와서 전에 보지 못하던 일본 사람의 상점이 길가로 하나 생기고 골목 안으로 들어서서도 두 집 문에 일본 사람의 문패가 붙은 것을 보고,
“그 동안에 꽤 변하였군요!”
하며 형님을 쳐다보니까, 형님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듯이 태연무심히 고개만 끄덕끄덕하였다.
나는 앞장을 선 형님을 따라 들어가며 작년보다도 한층더 퇴락한 대문을 쳐다보고,
“거진 쓰러지게 되었는데 문간이나 좀 고치시지?”
하며 혼자말처럼 한마디 하였다.
“얼마나 살라구! 여기두 좀 있으면 일본 사람 거리가 될 테니까 이대로 붙들고 있다가 내년쯤 상당한 값에 팔아 버리랸다. 이래봬도 지금 시세루 여기가 제일 비싸단다.”
형님은 칠팔 년 전에 살 때와 비교하여서 거진 두세 곱이나 시세가 올랐다고 매우 좋아하는 모양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 부산에서 본 광경을 생각하며,
“그야 다른 물가는 따라서 오르지 않었나요. 전쟁 이후에 어떤 것은 삼배 사배나 올랐는데요.”
하고 대꾸를 하며 안으로 쫓아 들어갔다.
형수와, 작은아버지 오신다고 깡총깡총 뛰는 일곱 살짜리 딸년이 안방에서 나와서 맞았다. 작년에 보던 것과는 다른 상스럽지 않은 노파도 하나 있었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귀찮은 맞절을 형수와 하고 나서 조카딸의 절도 받았다. 동경에서 가져온 과자를 절값으로 내놓으니 계집애년은 겅중겅중 뛴다. 인사가 끝난 뒤에 형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 눈치로 벙벙히 앉았다가,
“건넌방에서두 나와 보라지!”
하며 형수를 쳐다본다. 형수는 아무 말 아니 하고 섰더니,
“얘! 너 가서, 건넌방 어머니 오라구 해라.”
하며 딸을 시키었다. 나는 어리둥절하며,
“건넌방 어머니가 누구예요?”
하며 형수를 쳐다보았으나 머리에는 즉각적으로 어느 생각이 떠올랐다. 형수는 애를 써서 헛웃음을 입가에 띄며 잠자코 말았다.
“네게는 이야기를 한다면서도 우환두 있구 해서 자연 이때껏 알리지를 못하였다만, 작은형수가 하나 생겼단다.”
하며 형님이 웃는다. 단 형제가 사는 집안에 작은형수라는 말도 우습지만, 나는 대개 짐작하면서도,
“작은형수라니요?”
하고 되물으니까, 윗목에 섰던 형수가,
“그 동안에 난 죽었답니다.”
하며 풀없는 웃음을 일부러 보인다. 형수는 그 동안에 완연히 늙은 것 같았다. 눈가가 유난히 퍼래지고 이마와 눈귀에 주름이 현연히 보이었다. 형수의 말을 받아서 형님이 무어라고 입을 벌리려 할 제, 건넌방 형수가 들어오는 바람에 답쳐 버렸다. 분홍 저고리에 왜반물치마를 입고 분을 하얗게 바른 시골 새악시가, 아까 눈에 띄던 늙은 부인이 열어 주는 방문으로 살짝 들어왔다. 고작해야 열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조촐한 색시다. 이맛전이 넓고 코가 펑퍼짐한 듯하고, 이 집에서 상성이 난 아들깨나 날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보아서 그러한지 뻣뻣한 치마가 앞으로 떠들썩한 것이 벌써 무에 든 것 같고, 얼굴에는 윤광이 돌아 보인다. 큰형수와 느런히 세워 놓고 보면 고식(姑息, 시어머니와 며느리)이라 하는 것이 알맞을 것 같다. 나는 형님의 소원대로 상우례를 하였다. 두 사람의 맞절이 끝나니까 형수는 앞장을 서서 휙 나가 버렸다. 새 형수도 뒤미처 나갔다. 큰형수는 마루에 앉아서 짐을 지고 들어온 아이더러 무엇을 사오라고 분별을 하고, 새 형수와 마누라는 뜰로 내려가서 나를 위하여 점심을 차리는 모양이다. 머리도 안 빗은 조그만 늙은 아씨가 마루 끝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창에 붙은 유리 밖으로 마주 내어다보일 제, 시들어 가는 강국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라 왔다. 어쩐지 가엾어 보이었다.
‘그래도 세 식구가 구순하게 사는 것이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벙벙히 앉았으려니까, 형님은 무슨 말을 꺼낼 듯 꺼낼 듯하다가,
“넌 지금 일년 만에 나오지?”
하며 딴소리를 붙인다.
“올 여름방학에는 안 나왔지요.”
“응, 그래…… 너도 혹 짐작할지 모르겠다만, 청주 읍내에서 살던 최참봉이라면 알겠니?”
하며 형님은 목소리를 한층더 낮추었다.
“알지요.”
“그 집이 지금 말이 아니 되었지. 웬만큼 가졌던 것은 노름을 해서 없앴겠니마는, 최씨가 작고하기 전에 벌써 다 까불려 버렸지. 지금 데려온 저것이 그이의 둘째딸이란다. 어렸을 젠 너두 보았을걸?”
“네에!”
하며 나는 무심코 웃었다. 최참봉이라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우리집하고 격장에서 살던, 청주 일군은 고사하고 충청도 원판에서도 몇째 안 가는 재산가이었다. 술 잘 먹기로도 유명하고 외입깨나 하였지마는 보짱(마음속에 품은 꿋꿋한 생각이나 요량) 크기로도 유명하였다. 작은형수라는 사람은 내가 소학교에 들어갈 때에 지금 마루에서 뛰어다니는 형님의 딸년만하였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여 보니까, 부엌에서 음식을 차리고 있는 노부인이 낯이 익은 법하기도 하고 일편 반갑기도 하여서 혼자 웃으며,
“그럼 저 마님이 최참봉의 부인이 아녜요?”
하고 물어 보았다. 형님은 반색을 하면서,
“응, 참 너는 그 집에 늘 드나들며 놀지 않았니?”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쩐지 가슴이 선뜩하면서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최참봉 마누라라는 이는 딸 형제밖에는 낳아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내가 어려서 놀러 가면, ‘내 아들 왔니!’ 하기도 하고, ‘내 사위 왔구나!’ 하기도 하며 퍽 귀여워하였었다.
“금순아, 금순아! 넌 어디루 시집가련? 저 경만이(내 아명) 집으로 가지?”
하면, 지금의 저 형수는 똥그란 눈으로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어떤 때에는 ‘응!’ 하기도 하고, 나는 시집 안 간다고 짜증을 내어 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지금 학교에 다니는 내 누이동생과는 한 살이 위든가 하기 때문에 나보다는 두 살이 아래일 것이다. 나는 우리 남매하고 돌아다니던 십사오 년 전의 어렴풋한 기억을 머릿속에 그려 보면서 제풀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깨달았다. 어렸을 적 일이니까 당자도 잊어버렸을 것이요, 누이도 모르겠지마는, 저 마누라는 나를 알아볼 것이요, 실없는 소리라도 사위니 아들이니 하는 말을 하였던 것을 생각하여 본다면 마주 대면하기가 피차에 어떠할까 하고 지금부터 내가 도리어 얼굴이 간지러운 것 같다. 아무튼지 이상한 연분이다. 물론 그때만 해도 반상(班常)의 별을 몹시 차리던 시절이니까 두 집의 부모끼리는 왕래가 별로 없었고, 더구나 저편에서는 나를 데리고 실없는 소리를 하였을 뿐이지 감히 내 딸을 누구의 몫으로 데려가시오라고는 못 하였었다. 하지만, 지금 형님의 장모요 그때의 금순 어머니는 혹시 정말 나를 사위로 삼았으면 하는 공상이 있었던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기어코 우리집으로 들여보내고야 만 그 어머니의 심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형님은 잠깐 동을 떼어서 다시 입을 벌렸다.
“그래 우리집이 서울로 이사한 뒤에는 최참봉이 실패하고 울화에 떠서 연전에 죽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참혹하게 된 줄은 몰랐었더니, 올 여름에 산소〔墓地〕일절로 해서 청주에 들어갔다가 최씨의 큰사위를 만나니까, 장모하고 처제가 자기 집에 들어와서 사는데, 저 역시 실패를 하고 지금은 자동차깨나 부리지마는, 그것도 근자에는 세월이 없어 지탱을 해갈 수가 없는 터이요, 혼기가 넘은 처제를 처치할 가망조차 없다면서, 어떻게 한밑천을 대어 주었으면 좋을 듯이 말을 비추기에, 집에 올라가서 무슨 말 끝에 우연히 그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최참봉 큰사위라면 그때 우리 살 때에 혼인한 김현묵이 말씀이죠?”
나는 어려서 보던 조그만 초립둥이(초립을 쓴 사내아이. 흔히 결혼한 사내아이를 이른다.)를 머리에 그려 보며 듣다가 형님 말의 새치기로 물었다.
“옳지 그래! 그때는 열두어 살밖에 안 되었지만, 지금은 퍽 건강해지기두 하고 위인이 착실해서 조치원에서는 상당한 신용이 있지. 그래 아버지께서두 얼마간 밑천을 대어 주는 것도 좋겠지마는, 그보다도 그 처제애를 데려오는 것이 어떠냐고 하시기에 들을 때뿐이요 흐지부지하였었지. 그런데, 그 후에 아버지께서 내려오셨던 길에 김현묵이를 만나 보시고, 우리 집안이 절손이 될 지경이니 우리집으로 데려오고 싶은즉, 저편 의향을 들어 보라고 별안간 일을 버르집어 놓으시니까, 현묵이야 어떻든 인연을 맺어 놓기로만 위주니라 물론 찬성이요, 그 집안에서들도 유처취처(아내가 있는 사람이 또 아내를 얻음)라는 것을 매우 꺼리는 모양이나 우리 집안 내력도 알고, 그보다도 자기네 형편이 매우 급하니까 결국은 승낙을 한 모양이지.”
형님은 장황히 변명삼아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큰아주머니만 불평이 없으시다면 잘 되었습니다그려. 어머니께서도 좋게 생각하시겠죠?”
나는 구태여 잘잘못을 말할 일도 아니기에 좋도록 대꾸를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원래 큰형수를 미흡하게 여기시니까 말씀할 것도 없지만, 어머니께서는 처음에는 반대를 하시다가, 역시 손주새끼를 보겠다고 첩을 얻어 들이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시고, 당자도 인제는 자식이라고는 나볼 가망도 없구 하니까 아무려나 하라기에,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두었지.”
나는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그러나 아들자식이란 그렇게도 낳고 싶은 것인지 나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후(無後)한 것이 조상에 대한 죄라거나 부모에게 불효가 된다는 말부터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낳은 자식은 죽일 수 없으니까 남과 같이 길러 놓기는 하여야 하겠지마는, 그렇게 성화를 하면서 부친까지 나서서 서두르고 애를 쓸 것이 무엇인지? 사람이란 의외의 호사객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이 먹으면 생각이 달라질지는 모르지마는, 아들자식을 낳아서 공을 들여 길러 논다기로 그것이 어떻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요행 장수하여서 자기보다 앞서지 않을 지경이면 삿갓가마나 타고 상여 뒤에 따르리라는 것만은 분명히 예기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 다음 일이야 누가 알 일인가. 위인이 착실할 지경이면 부모가 남겨 주고 간 땅뙈기나 파서 먹다가 뒤따라 땅 속으로 굴러 들어가 버릴 것이요, 그렇지도 못하면 그나마 다 까불리고 제 몸뚱어리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에 매달린 처자의 운명까지 잡쳐 놓을지도 모른다. 기껏 잘났대야 저 혼자 속을 썩이다가 발자취도 없이 스러질 것이며, 자칫하면 제 목숨까지가 성이 가시다고 낳아 준 부모를 원망할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종족을 연장하려는 것이 생물의 본능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족의 보전이나 연장이라는 의식으로 사람은 결혼을 원하는 것인가. 그보다도 한층 더한 충동이 더 굳세게 사람의 마음속에서 움직이지는 않는 것일까. 자식이 주줄이 있어도 첩 얻지 않던가? 그는 고사하고 절손이 무섭고 자기가 돌아간 뒤에 술 한잔이라도 부어 놓을 맏손주를 생전에 보겠다고 애를 부득부득 쓰는 부친이 가엾고, 의외로 완고인 데에 놀랐다. 사람의 관념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새삼스럽게 생각되는 것이었다.
“서울집에 있는 것이나 데려다가 기르셨더면 좋았죠. 에미두 죽게 되구, 저는 있는 게 도리어 귀찮을 지경인데.”
하며 형님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자기 소생을 형님에게 떼어맡겼으면 짐이 덜리어서 시원스럽겠다는 말이나, 듣는 사람에게는 양자라도 할 수 있는데 왜 유처취처까지 해서 남 못 할 일을 하였느냐고 나무라는 것같이 들린 모양이다.
“글쎄 그두 그렇지마는 너두 앞일을 생각하면 그럴 수야 있니. 그뿐 아니라 저편 처지가 말못되었으니까, 사람 하나 구하는 셈치고 어떻든 데려온 것이지.”
하고 형님은 변명을 하였다. 나는 그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 하나 구한다는 말이 귀에 거슬리기에, 밖에서 듣지 않도록 일본말로 반대의 의사를 늘어놓았다.
“그건 형님 잘못 생각이세요. 설혹 결혼을 하여서 한 사람이 구하여졌다 하더라도 형님은 그것을 자기의 공으로 아실 것도 못 되거니와, 처음부터 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결혼을 하셨다는 것은 형님이 자기를 과대평가하신 것이죠. 또 사실상 그러한 것은 둘째, 셋째로 나오는 문제이겠지요. 누구든지 저 사람을 행복스럽게 할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좋은 일 같지마는 다른 한편으로 보면 불완전한 ‘사람’로서는 너무 지나친 자긍이겠지요.”
형님이 잠자코 앉았는 것을 보고 나는 또다시 입을 벌렸다.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의 행복을 비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요, 그 사람의 생활을 지배하고 운명의 진로까지를 간섭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구(救)한다는 것은 이기적 충동을 떠나서 자기를 다소간 희생하게 될 것인데, 형님은 아들 낳겠다는 욕심으로 한 결혼이 아닙니까? 하하하.”
나는 아니 하여도 좋을 말을 오금을 박듯이 입바른 소리를 하고 말았다. 형님은 잠자코 듣고 앉았다가,
“구한다는 사실이 이 세상에 없다 하면 너부터 굶어죽을라? 그는 고사하고 여기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가면 너두 쫓아가서 붙들겠구나?”
하며 형님은 웃으면서도 덜 좋은 기색이었다.
“그건 구제가 아니라 의무지요.”
나는 구하지 않으면 너부터 굶어죽으리라는 말에 불끈해서 한마디 한 뒤에 다시 뒤를 이었다.
“의무라 하면 당연히 할 일, 또는 하지 않아서는 안 될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자식을 나서 교육을 시키든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붙들어 낸다는 것을 자선적 행위라고야 할 수 없겠지요. 그는 그만두고 지금 자살하려는 사람을 붙들어 냈다 하기로 그 행위가 자선도 아니요,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도 아니죠. 다시 말하면 목숨이라든지 산다는 데에, 공통한 처지에서 자기는 사는 것을 긍정하기 때문에 생(生)을 부정하는 자를 자기의 의견에 동화시키려고 하는 행위가 즉 자살을 방지하는 노력이외다그려. 하고 보면 결국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고 하는 일이 아닌가요? 하여간 소위 구제니 자선이니 하는 것을 향기 있고 아름다운 말이나 행위로 알지만, 실상은 사회가 병들었다는 반증밖에 아니 되고, 그 어느 구석에든지 이기적 충동이 있다고 보이는데요…….”
무에나 반항적 태도로 자기 의견을 한마디 꺼내 놓고야 마는 이맘때의 나로는 형님이 어떻게 듣거나 말거나 한바탕 주워섬기고 말았다. 형님은 내 이론이 되고 안 된 것을 별양 탄하고도 싶지 않고, 그저 못마땅하나 먼 데서 온 아우를 불쾌케 아니 하려는 듯이 웃으면서,
“너같이 극단으로 나가면 이 세상에 살아갈 수 있겠니? 그래도 상호부조의 정신두 있어야 하고 인생의 이상이니 목적이라는 것은 없어 안 될 거요…….”
하고 온화한 낯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까 문학은 배운대야 써먹을 데가 없다고 눈살을 찌푸리던 때보다는 달라졌다.
“인생의 이상이란 것은 나는 생각해 본 일도 없습니다마는, 구태여 말하자면 자기를 위하여 산다 할까요. 하지만 결코 천박한 이기주의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대답을 하니까 형님은 나를 잠깐 쳐다보는 양이,
‘너야말로 이기주의자로구나?’ 하고 핀잔을 주고 싶은 것을 참아 버리는 모양이다.
부산히 차려 들여온 점심을 형제가 겸상을 하여 먹은 뒤에 나는 아랫목에 잠깐 누웠었다. 어쩐둥 잠이 들어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나서 눈을 떠보니까, 흐린 날이 저물어 들어가는지 방 안이 한층 더 우중충하여졌다. 아까 식후에 학교에 다시 갔다가 온다던 형님은 벌써 돌아와서 건넌방에 들어가 앉았는 모양이다. 내가 일어나서 양치질을 하는 소리를 듣고 형님은 안방으로 건너와서,
“눈이 올지 모르는데 술이나 한잔 먹고 떠나랸?”
하며 밖에다 대고 술상을 차리라고 일렀다. 형님이 나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여간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학교에서 오다가 자기는 먹을 줄도 모르는 일본 청주를 사들고 온 것이라 한다. 나는 이것이 혼인상 대신인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여 보며 속으로 웃었다. 형님도 대작을 하기 위하여 억지로 몇 잔 한다.
“그런데 이번에 올러가거든 좀 집에 붙어앉아서 약 쓰는 것두 다잡아 살펴보구, 모든 것을 네가 거두어 줄 도리를 차려라.”
형님은 두 잔째 마시고 나서 이런 소리를 들려 주었다. 나는 잠자코 말았다. 사실 내가 약 쓰는 묘리를 알 까닭이 없는 일이다. 형님은 또 화두를 돌렸다.
“나두 며칠 있다가 형편 되는 대루 곧 올러가겠지만, 아버님께 산소사건은 아직도 사오 일은 더 있어야 낙착이 날 듯하다고 여쭈어라. 역시 공동묘지의 규정대로 하는 수밖에 없을 모양이야.”
나의 귀에는 좀 이상하게 들리었다. 내 처가 죽을 것은 기정의 사실이라 치더라도 죽기도 전에 들어갈 구멍부터 염려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들을 낳지 못하여서 성화가 난 것보다도 구성없는 짓이요 일없는 사람의 헛공사라고 생각 않을 수 없다.
“죽으면 묻을 데가 없을까 봐서 그러세요. 공동묘지는 고사하고 화장을 하든 수장을 하든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요? 아버지께서는 공연히 그런 걱정을 하시지만, 이 살기 어렵고 바쁜 세상에 그런 걱정까지 하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지요.”
나는 이렇게 핀잔을 주듯이 역시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공연히가 무에 공연히란 말이냐?”
형님은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꾸짖고 나서 말을 이었다.
“너두 지각이 났으면 생각을 해보렴. 총독부에서 공동묘지 제도를 설정한 것은 잘 되었든 못 되었든 하는 수 없이 쫓어간다 하더라도,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의 선산이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게다가 앞길이 멀지 않으신 늙은 부모가 계신데, 불행한 일이 있는 날에는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래 아버님 어머님을 공동묘지에다가 모신단 말이 될 말이냐? 자식 된 도리는 그만두고라도 남이 부끄러워서 어떡한단 말이냐. 계수(남자 형제 사이에서 동생의 아내)만 하더라도 만일에 불행한 경우를 당하면 어떻든 작은산소 아래다가 써야지 여기저기 뿔뿔이 흐트러져 있으면 그게 무슨 꼬락서니란 말이냐?”
형님은 매우 화가 난 모양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리 다급히 들리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 어떡하신단 말씀예요?”
다만 산판이나 묘위전(墓位田)이 남의 손에 들어갔다는 데에는 나도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든지 간에 충북 도장관과는 아버님께서도 안면이 계시고 나도 아주 모르는 터는 아니니까, 아버님 대만이라도 작은산소에 모시도록 지금부터 허가를 맡아 두고 계수도 사람의 일을 모르니까 이번에 아주 자리를 잡아 놓아 두자는 말이야. 그런데 그보다도 더 시급한 것은 큰산소하고 가운데 산소의 제절 앞의 산판을 물러 가지고 식목이라도 다시 하자는 것인데, 뭐 아주 말이 아니야, 분상이 벌거벗은 셈이요…….”
분상이 벌거벗었다는 말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 문제가 이때껏 낙착이 안 났어요?”
하며 나는 또 한 잔 들었다.
“낙착이 다 무어냐. 뼛골은 뼛골대로 빠지고 일은 점점 안 돼가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지금 붙들어다가 징역을 시킨달 수도 없고…….”
하며 형님은 눈살을 찌푸린다.
산소 문제라는 것은 셋쨋집 종형이 문서를 위조해서 팔아먹은 것이다. 우리집이 종가는 아니나 실권은 여기서 잡고 있는, 말하자면 우리 문중 소유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몇 평이나 되는지 노름에 몰려서 두 군데의 분상만 남겨 놓고 상당히 굵은 송림째 얼러서 불과 백여 원에 팔아먹은 모양이나, 워낙 헐가로 산 것이기 때문에 당자가 좀처럼 물러 주지 않는 터이라 한다. 제절(자손들이 늘어서서 절할 수 있도록 산소 앞에 마련된 평평하고 널찍한 부분) 앞에 거름을 하고 논을 풀든 밭을 갈든 그는 고사하고 이해관계로라도 물러야 할 것은 물론이다.
“어떻든 무를 수는 있겠죠?”
공동묘지에 성화가 나서 하는 것은 코웃음치는 나도 조상의 산소를 팔아먹은 데에는 분개하고 있는 터이다.
“글쎄, 셋째아버지께서만 증인으로 스셨으면 아무 말 없이 본전에 찾겠지마는, 번연히 자기가 관계를 하시고 내용까지 자세히 아시면서 모른다고만 하시니까 무사히 될 일두 이렇게 말썽만 되지 않겠니?”
“그럼 셋째아버지도 공모를 하셨던가요?”
“그러게 망령이 나셨단 말이지. 그나 그뿐이라던! 자식을 잘못 둬서 그랬기루서니 어찌하란 말이냐고 되레 야단만 치시니 기막히지 않니?”
“그럼 당자를 붙들어 내면 될 게 아녜요?”
“당자야 벌써 어디룬지 들구 튀었다 하더라만, 아마 요새는 들어와 있나 보더라. 일전에두 갔더니 셋째아버지가 앞장을 서서 우는 소리를 하시며 자식 하나 없는 셈 칠 테니 그놈을 붙들어다가 징역을 시키든 목을 돌려 놓든 마음대로 하고, 인제는 그 문제로 우리집에는 와야 쓸데가 없다고 하시는 것을 보면, 어디 갔다는 말은 공연한 소리요, 모두 부동이 되어서 귀찮게만 굴자는 수작 같애서 실없이 화가 나지만…….”
셋째삼촌이라는 이는 집의 아버지와 이복인데다가, 분재한 것을 몇 부자가 다 까불려 버린 뒤로는 한층더 말썽이 많아졌다. 언젠지 나더러도,
“네 형두 딱하지, 그예 징역을 시키고 나면 무에 시원할 게 있니? 돈푼 더 주고 무르면 고만 아니냐? 고까짓 것쯤 더 쓰기로 얼마나 더 잘살겠니?”
하며 갉죽갉죽 꼬집는 소리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머릿속까지 지끈지끈한 나는,
“내야 뭘 압니까. 그런 이야기는 형더러 하시죠.”
하며 피해 버렸었다. 원체 나는 적서(嫡庶)의 차별 관념이란 꿈에도 없건마는 머릿살 아픈 일이다.
“아무쪼록 구순하게(화목하게) 하시구려.”
하고 나는 말을 끊어 버렸다. 그러나 형님으로서 생각하면 단 형제뿐인데 내가 집안일에 탐탁히 의논 한마디라도 거들지 않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다.
실쭉한 저녁을 조금 뜨고 나서, 캄캄히 어둔 뒤에 다시 짐을 지워 가지고 형님과 같이 정거장으로 나왔다. 드문드문 전등불이 반짝이는 큰길가에는 인적도 벌써 드물어 가고, 모진 바람이 쌀쌀히 부는 대로 가다가다 눈발이 차근차근하게 얼굴에 끼치었다.
“오늘 밤에는 꽤 쌓이겠다!”
형님은 이런 소리를 하며 앞서간다. 정거장 안에 들어서니까, 순사보 한 사람이 형님하고 인사를 하며 나를 아래위로 한번 훑어보았으나, 별로 조사를 하자고는 아니 한다. 지워 가지고 온 짐을 받아 가지고 형님과 아는 일본 사람 사무원이 들어오라고 권하는 대로 우리는 사무실로 들어가서 난로 앞에 불을 쬐고 섰었다. 이삼 사무원이 우리를 돌아다보며 앉은 채 묵례를 한다. 우리들더러 들어오라고 한 사무원은,
“매우 춥지요? 동기방학에 나오시는군요.”
하며 나의 옆에 와서 말을 붙이며 불을 쬔다. 이러한 경우에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보다 친절한 때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순사나 헌병이라도 조선인보다는 일본인 편이 나은 때가 많다. 일본 순사는 눈을 부르대고 그만둘 일도, 조선 순사는 짓궂이 뺨을 갈기고 으르렁대고서야 마는 것이 보통이다. 계모시하에서 자라난 자식과 같은 몹쓸 심보다.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만나면 피차에 동정심이 날 때도 있지마는, 자기 자신의 처지에 스스로 불만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심하면 심할수록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더 밉고 보기 싫어서 그런가 보다. 혹시는 제 분풀이를 여기다가 하는 것일 것이다. 조선 사람에게 대한 조선인 관헌의 태도가 그러한 심리에서 나오는 것인지? 혹은 일본 사람은 뒤로 물러서고 시키니까 그러는지? 하여간 조선인 순사나 헌병 보조원이 더 미우면서도 불쌍도 하다.
사무원은 내가 일본서 왔다는 데에 흥미를 가지고 이야기를 자꾸 건다. 한참 주거니받거니 하며 섰으려니까, 외투에 모자우비까지 푹 뒤집어쓴 젊은 조선 사람 역부가 똥그란 유리등을 들고 창황히 들어오며 일본말로,
“불이 암만해도 안 켜져요.”
하고 울상이다. 역부의 외투에 쌓였던 하얀 눈이 훈훈한 방 안 온기에 금시로 녹아서 조그만 이슬이 반짝거리며 뚝뚝 듣는다.
“빠가! 안 켜지면 어떡한단 말이야. 시간은 다 되었는데.”
이때까지 웃는 낯으로 나하고 이야기를 하고 섰던 사무원이 눈을 부르대며 소리를 지르고 나서 저쪽 구석으로 향하더니,
“이서방, 오소오소, 같이 가서 켜고 와요!”
하며 조선말로 이서방에게 명한다. 나는 사무원의 살기가 등등한 뚱뚱한 얼굴을 바라보고 외면을 하였다. 두 역부는 다른 등에 또 불을 켜들고 허둥허둥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을 보고 사무원은 픽 웃으며,
“허는 수 없어!”
하며 무책임한 이 꼴을 좀 보라는 듯이 혀를 차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따라서 웃어 보였으나, 머리로는 눈보라가 치는 속에서 신호등으로 기어올라가서 허둥거리는 두 역부의 검은 그림자를 그려 보며 익숙지 않은 일에 가엾은 생각도 난다. 조금 있으려니까 땡땡 하는 소리가 몇 번 난 뒤에 역부들이 들어왔다. 불은 켜지고 차는 조금 있다가 들어왔다. 눈이 푹푹 내리는 속을 나는 형님과 헤어져서 차에 올랐다.
석유불을 드문드문 켠 써늘한 기차 속은 몹시 우중충하고 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외투를 벗어서 눈을 털었으나 몸은 구중중하고, 컴컴한 석유불을 볼수록 조선은 이런 덴가 싶어 새삼스레 을씨년스럽다. 하여간 난로 앞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보니 찻간에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끄레발(단정하지 못하고 어수선한 옷차림)에 갈모(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 쓰던 고깔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 비에 젖지 않도록 기름종이로 만듦)를 우그려 쓴 촌사람 오륙 인하고 양복쟁이 서너 사람이 난로 가까이 앉고, 저편으로 떨어져서 대구에서 탔는 듯싶은 기생 같은 젊은 여자가 양색 왜증인지 보라인지 검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이리로 향하여 앉은 것이 그중에 반가워 보였다. 나는 심심파적으로 잡지를 꺼내 들었으나 불이 컴컴하여 몇 장 보다가 덮어 버렸다.
저편으로 중앙에 기생에게 등을 두고 앉은 사십 남짓한 신사를 바라보다가 나는 무심코 우리집에 다니는 김의관 생각이 났다. 기생하고 동행인지 혼자 가는지는 모르나 수달피 댄 훌륭한 외투를 입고 금테안경을 쓰고 버티고 앉았는 것이 돈푼 있어 보이기도 하나, 안경 너머로 이사람 저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작은 눈은 교활하여 보였다.
기차가 추풍령에 와서 닿으니까, 일본 사람의 사냥꾼 한 떼가 개를 두 마리나 데리고 우중우중 들어와서 기다란 총을 여기저기다가 세우고 탄환 박힌 혁대를 끌러 논 뒤에 난로 앞으로 모여든다. 객차에 산 짐승은 아니 태우는 법인데 이 행차는 특대우인 모양이다. 하여간 개가 싫어서 나는 자리를 피하여 저편으로 가서 앉았다. 촌사람들도 비실비실 피하여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아, 영감! 이거 웬일이쇼?”
누구인지 이렇게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바람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방한모를 우그려 쓴 얼금얼금한 사냥꾼 하나가 손가락 사이에는 반쯤 타다가 남은 여송연에 불을 붙이며 난로를 등을 지고 섰는 자의 말소리다. 헌 양복에 각반을 치고 일본 버선에 조선 짚신을 신은 꼴이 손에 든 여송연과는 어울리지 않으나, 동행하는 일본 사람이 난로 앞에 설 자리를 사양하는 것을 보면 일행 중에서는 지위가 높은 모양이다.
“그러나, 영감은 웬일이슈?”
수달피털을 붙인 외투를 입고 앉았던 금테안경이 앉은 채 인사를 하며 묻는다. 이 자도 그만큼 버틸 힘이 있기에 이러한 ‘똥테’ 두 동달이쯤은 되는 영감을 앉아서 인사하는 것일 거라.
“군청에서들 산에 가자기에 나섰더니 인제야 눈이 오시는구려.”
하며 얼금뱅이가 웃었다.
“이 바쁜 세상에 사냥은 너무 호강이신걸, 허허허. 공무 태만으로 감봉이나 되면 어쩌려우?”
김의관 같은 안경잡이가 한층 내려다보는 수작을 한다.
“영감같이 돈이나 벌려면은 세상도 바쁘지만 시골 구석에 엎뎠으니까 만사태평이외다. 한데 지금 어딜 다녀오슈?”
“대구에를 갔다 오는데, 이때까지 장관에게 붙들려서…….”
“에? 그래 그건 어떡하셨소?”
“그거라니?”
안경잡이는 딴청을 붙이는 말눈치다.
“아, 저 토지사건 말씀요.”
얼금뱅이는 주기가 도는 뻘건 얼굴이 한층더 붉어지는 듯하며 여전히 난로를 등지고 서서 묻는다.
“그러지 않아도 그 일절로 내려온 것인데, 계약은 성립이 되었지만 내 일이 낭패가 돼서…… 연이틀을 붙들고 놓아 주어야지. 매일 기생에 아주 멀미를 대었소. 술 잘 먹고 놀기 좋아하고 참 노당익장(老當益壯, 늙었지만 의욕이나 기력은 점점 좋아짐)야…….”
경북 도장관이라면 일본 사람이거니와, 도장관을 칭송을 하는 것인지 긴하게 보인 자랑이 더 긴해서 떠드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에! 에!”
하며 얼금뱅이는 감탄하는 듯 부러운 듯하게 대꾸를 하다가,
“그래 지금 인천으로 가시는 길인가요?”
하며 또 묻는다. 금테안경은 또 한번 눈살을 잠깐 찌푸리는 듯하더니 다시 얼굴빛을 고치며,
“내야 원래 관계 있소. 저 사람이 죄다 하니까. 한데, 영감하고 이야기하던 것은 아주 틀리는 모양이오? 어떻게 과히 무엇 하지도 않겠고, 영감 체면도 상하지 않게 할 터이니 잘 해보시구려.”
하며 한층 소리를 낮춰서 다정한 듯이 웃어 보인다.
“글쎄 나중에 기별하지요마는 어떻든 반승낙은 받았으니까 그쯤만 알아 두시구려.”
얼금뱅이는 이렇게 대답을 하고 좌우를 한번 휙 돌아보았다. 이야기는 뚝 끊기고 얼금뱅이는 그 옆에 빈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의 수작은 어쩐지 암호를 써가며 하는 수수께끼 같으나 누가 듣든지 반짐작은 할 것이다. 첫눈에 벌써 김의관 같은 위인이라고 대중을 댄 것이 틀림없었던 것이 한편으로 유쾌도 하지마는 불하운동(拂下運動, 국가 또는 공공 단체의 재산을 개인에게 팔아넘기는 일)을 다니는 놈을 도장관이 한박 먹였다는 것은 이 자의 허풍이기도 하겠지마는 사실이면 까닭수가 있는 것이리라.
김의관이라면, 나는 진고개 헌병사령부에 쫓아가 보던 생각을 어느 때든지 잊지 않고 있다. 우리집이 아직 시골에 있을 때에 나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와서 김의관의 집에서 중학교에 통학을 하였었다. 첩의 집에만 들어박혔던 김의관이 그때는 돈에 꿀려서 본집에 와서 있었던지, 나 있는 방과 마주 보이는 건넌방에 있었다. 그게 그해 팔월 스무날께쯤 되었었는지 빗방울이 뚝뚝 듣는 초가을날 오후이었다. 학교에서 막 돌아와서 문간에 들어서려니까 김의관 마누라가 울상을 하고 뛰어나와서 책보를 받으면서,
“경식이 아버지가 지금 뉘게 붙들려 가셨는데 이리 나간 모양이니 좀 쫓아가 봐주게.”
하며 그렇게 못마땅해하던 영감이건마는 허겁지겁이었다. 나도 깜짝 놀라서 가리키는 편으로 골목을 빠져서 달음박질을 하여 가노라니까, 양복쟁이 두 사람에게 옹위가 되어 가는 모시두루마기를 입은 김의관의 뒷모양이 눈에 띄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나 사오 간통이나 떨어져서 살금살금 쫓아갔었다.
김의관이 붙들려 가는 것을 쫓아가 본 일이 이번째 두 번이다. 몇 달 전에 내가 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아니 되어서다. 그때가 아마 첩과 헤어지자고 싸우고 본집으로 기어든 지 며칠 안 되던 때인 듯싶다. 어느 날 순검이 와서 위생비든가 청결비든가를 내라고 독촉을 하니까,
“없는 것을 어떻게 내란 말요? 이 몸이라두 가져갈 테거든 가져가구려.”
하고 소리소리 질러 가며 순검에게 발악을 하다가 그예 순검이 가자고 끌어내니까 문지방에 발을 버티고 아니 나가려고 한층더 발악을 하며,
“이놈, 이놈, 사람 죽이네. 어구, 사람 죽이네…….”
하고 순검에게 멱살을 붙들린 김의관은 순검보다도 더 야단을 치다가 그예 붙들려 가고야 말 제, 나는 가는 곳을 알려고 뒤쫓아 나섰었다. 그때에 나는 김의관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었다. 나는 시골 구석에서 순검이라면 환도 차고 사람 치고 잡아가는 이 세상의 제일 무서운 사람으로 알고 자라났다. 그런데 김의관은 그 제일 무서운 사람더러 이놈 저놈 하며 할 말을 다 하고 하인 부리듯이,
“이놈! 거기 섰거라. 누가 잘못했나 해보자!”
하며 안으로 들어와서 문지방에서 벗겨진 정강이에다가 밀타승( ‘일산화 납’을 달리 이르는 말. 색상의 농도에 따라 금밀타(金密陀), 은밀타(銀密陀) 따위가 있다. 이질이나 종기를 다스리는 살충 약으로 쓴다.)을 기름에 개어 바른다, 옷을 갈아입는다, 별별 거레를 다 하고 나서 의기양양하게 순검보다 앞장을 서서 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어린 마음에 유쾌도 할 뿐 아니라 제일 무서운 사람이 제일 못나 보이고, 제일 우습던 김의관이 제일 잘나 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쫓아가서 교번소에 들어가더니 거기 앉았던 일본 순검더러 무어라 무어라 몇 마디 하고 웃으며 나오는 김의관을 볼 제, 나는 이 늙은이가 이렇게도 권리가 좋은가 하고 혼자 놀랐었다.
그러나 이번에 붙들려 가는 것을 보니, 아무 말도 없이 올가미를 씌운 개새끼처럼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두 양복쟁이에게 끌리어가더니, 병정이 좌우에서 파수를 보고 섰는 커다란 퍼런 문으로 들어가서 자취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가던 길을 휘더듬어 급히 돌아와서 집안 식구더러 이러저러한 데더라고 가르쳐 주었었다.
그날 저녁부터 경식이와 행랑 아범은 하루 세 끼 밥을 나르기에 골몰하였었다. 그러더니 한 보름쯤 지나니까 한일합병이 반포되고 뒤미처서 김의관은 해쓱한 얼굴로 별안간 풀려 나왔다. 그때의 김의관은 조금도 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 줄은 나도 짐작하였었다. 그런데 반 달쯤 갇혔다가 나온 김의관은 금시 발복이 되었는지 늙은이가 양복을 몇 벌씩 새로 장만을 하고, 헤지었던 첩을 다시 불러다가 큰마누라하고 한집에 살게 하며, 매일 나가서는 술이 취하여 들어오기도 하고, 나이가 아깝게 새 양복을 찢어 가지고 들어오는 때도 있었다. 그러한 지 한 달쯤 되더니, 시골에다가 집과 땅을 장만하였으니 내려가자 하고 처첩을 다 데리고 낙향을 하여 버렸다. 그때서야 제일 무서운 사람에게도 발악을 쓰던 김의관이, 두어 달 전에, 올가미 쓴 개새끼처럼 유순히 끌려가던 까닭을 더 분명히 알게 되었었다.
김의관은 내가 일본에 가기 전에는 자기 시골에서 학교를 세워 가지고 교장 노릇도 하고 장거리에 나와서는 정미소를 한다는 소문도 들었으나, 그 후에 나와서 들으니까 그것도 인천 가서 미두(米豆)에 다 까불리고 지금은 남의 집의 협포에 들어서 다른 첩과 산다고 한다. 지금 이 좋은 외투에 몸을 싸고 금테안경을 쓴 신사도 인천을 가느니 토지의 계약을 하였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이전에 붙들려 가보기도 하고 낙향도 하고 정미소도 하여 보다가 인천 미두에 다니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다가 호상차지(초상 치르는 데에 관한 온갖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살피는 사람)나 하러 다니고……?’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하여 보고 혼자 속으로 웃으며 금테안경을 또 한번 돌려다보았다.
기차가 영동역에 도착하니까 사냥꾼의 일행은 내리고 승객의 한 떼가 몰려 올라왔다.
“눈이 이렇게 몹시 왔다가는 내일 어디 장이 서겠나? 오늘두 얼매 손인지 알 수가 없는데…….”
“공연히 우는 소리 말게, 누가 뺏어 가나? 허허허.”
하며 장꾼 같은 일행이 들어와서 자리들을 잡느라고 어수선하게 쿵쾅거리며 주거니받거니 제각기 떠들어 댄다.
정거장에 도착할 때마다 드나드는 순사와 헌병보조원이 차례차례로 한 번씩 휘돌아 나가자 기차는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내 앞에는 역시 갓에 갈모를 쓰고 우산에 수건을 매어 든 삼십 전후의 촌사람이 들어와서 앉았다. 곰방담뱃대에 엽초를 부스러뜨려서 힘껏 담고 나더니 두루마기 속에 손을 넣어서 이 주머니 저 주머니를 한참 뒤적거리다가, 내 옆에 성냥이 놓인 것을 보고,
“이것 잠깐만…….”
하며 내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본다. 갓쟁이로는 구격이 맞지 않게 손끝과 머리를 끄덕하며 빠르게 나의 눈치를 보는 것이, 분명히 내가 일본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미심쩍고 겁이 나는 눈치다. 나는 웃으며 성냥통을 집어 주었다.
담배를 붙이고 난 장꾼은 또 한번 고개를 끄덕하며 나에게 성냥갑을 도로 주고 나서, 인제는 안심하였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으며 나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우리 인사하십시다.”
하며 번잡스럽게 말을 붙인다.
나는 몹시 덜렁대는 위인이라고 생각하고 웃으며 하자는 대로 하였다.
인사를 한 뒤에 매캐하고 독한 연기를 훅훅 뿜으며,
“어디로 오시나요?”
하고 묻는다. 내가 사방모를 쓴 것을 보고 일본에서 오나 싶어 이야기가 하고 싶은 눈치다.
“김천서요.”
나는 마주 앉은 자의, 광대뼈가 내밀고 두꺼운 입술을 커다랗게 벌린 시커먼 얼굴을 쳐다보며 대답을 하였다.
“고향이 거기신가요?”
“네에.”
“말소리가 다르신데요?”
부전부전한(남의 사정은 돌보지 아니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만 서두르는 데가 있는) 친구라고 생각하며 나는 웃어만 버렸다.
“어떤 학교에 다니시나요? 일본서 오시지 않으시는가요?”
무료한 듯이 잠자코 앉았다가 또다시 묻는다.
“어떻게 아슈?”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
“아, 일본 갔다 오시는 분은 모두 그런 양복을 입으십디다그려.”
하며 궐자는 외투 위로 내다보이는 학생복 깃에 달린 금글자를 바라보고 웃었다. 일본 유학생이 더구나 합병 이후로는 신시대, 신지식의 선구인 듯이 쳐다보이는 때라, 이 촌청년도 부러운 눈으로 나를 자꾸 쳐다보며 이것저것 묻고 싶으나 무얼 물을지 몰라서 망설이는 모양 같다.
“당신은 무엇을 하슈?”
나는 대답 대신에 딴소리를 하였다.
“네에, 갓〔笠〕장사를 다니는 장돌뱅이입니다.”
그는 자비(自卑)하듯이 웃지도 않으며 자기 입으로 장돌뱅이라 한다.
“갓이오? 그래 요새두 갓이 잘 팔리나요?”
“그저 그렇지요. 촌에서들은 그래두 여전히 갓을 쓰니까요.”
나는 좀 의외로 생각하였다. 두 사람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러나 당신부터 왜 머리는 안 깎으우? 세상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귀찮고 돈도 더 들지 않소?”
“웬걸요, 촌에서 머리를 깎으려면 더 폐롭고 실상 돈도 더 들죠. 게다가 머리를 깎으면 형장네들 모양으로 ‘내지어(內地語)’도 할 줄 알고 시체학문(時體學問)도 있어야지 않겠나요. 머리만 깎고 내지 사람을 만나도 말대답 하나 똑똑히 못 하면 관청에 가서든지 순사를 만나서든지 더 성이 가신 때가 많지요. 이렇게 망건을 쓰고 있으면 요보라고 해서 좀 잘못하는 게 있어도 웬만한 것은 용서를 해주니까 그것만 해도 깎을 필요가 없지 않아요.”
하며 껄껄 웃어 버린다.
“그두 그럴듯하지마는 같은 조선 사람끼리라도 머리만 깎고 양복을 입고 개화장(開化杖, 개화기에, ‘단장’을 이르던 말)을 휘두르고 하면 대접이 다른 것같이, 역시 머리라도 깎는 것이 저 사람들에게 천대를 덜 받지 않소. 언제까지든지 함부로 훌뿌리는 대로 꿉적꿉적하고 요보란 소리만 들으려우?”
나는 궐자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동정은 하면서도, 무어라고 하나 들어 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훌뿌리거나 요보라고 하거나 천대는 받을 때뿐이지마는, 머리나 깎고 모자를 쓰고 개화장이나 짚고 다녀 보슈. 가는 데마다 시달리고 조금만 하면 뺨따귀나 얻어맞고 유치장 구경을 한 달에 한두 번쯤은 할 테니! 당신네들은 내지어나 능통하시지요? 하지만 우리 같은 놈이야 맞으면 맞았지 별수 있나요!”
천대를 받아도 얻어맞는 것보다는 낫다! 그도 그럴 것이다. 미친 체하고 떡목판에 엎드러진다는 셈으로 미친 체하고 어리광 비슷한 수작을 하거나, 스라소니 행세를 하거나 하여, 어떻든지 저편의 호감을 사고 저편을 웃기기만 하면 목전에 닥쳐오는 핍박은 면할 것이다. 속으로는 요놈 하면서라도 얼굴에만 웃는 빛을 띠면 당장의 급한 욕은 면할 것이다. 공포(恐怖), 경계(警戒), 미봉(彌縫), 가식(假飾), 굴복(屈服), 도회(韜晦, 재능이나 학식 따위를 숨겨 감춤), 비굴(卑屈)…… 이러한 모든 것에 숨어 사는 것이 조선 사람의 가장 유리한 생활방도요, 현명한 처세술이다. 실상 생각하면 우리의 이러한 생활철학은 오늘에 터득한 것이 아니요, 오랫동안 봉건적 성장과 관료전제 밑에서 더께가 앉고 굳어빠진 껍질이지마는, 그 껍질 속으로 점점더 파고들어가는 것이 지금의 우리 생활이다.
“어떻든지 그저 내지인과 동등한 대우만 해주면 나중엔 어찌 되든지 살아갈 수 있겠죠.”
청년은 무엇에 쫓겨 가는 사람처럼 차 안을 휘휘 돌려다보고 나서 목소리를 한층 낮추어서 다시 말을 잇는다.
“가령 공동묘지만 하더라도 내지에도 그런 법률이 있다 하면 싫든 좋든 우리도 따라가는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또 우리의 유풍이 있지 않습니까? 대관절 내지에도 그런 법이 있나요?”
의외에 이 장돌뱅이도 공동묘지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아까 형님한테 한참 설법을 듣고 오는 길에 또 이러한 질문을 받고 보니, 언제 규정이 된 것이요 어떻게 시행하라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그까짓 것은 아무렇거나 상관이 없는 일이지마는, 아마 요사이 경향에서 모여 앉으면 꽤들 문젯거리, 화젯거리가 되는 모양이다. 나는 한번 껄껄 웃어 주고 싶었으나 그리할 수는 없었다.
“일본에도 공동묘지야 있다우.”
나 역시 누가 듣지나 않는가 하고 아까부터 수상쩍게 보이던 저편 뒤로 컴컴한 구석에 금테를 한 동 두른 모자를 쓴 채 외투를 뒤집어쓰고 누웠는 일본 사람과, 김천서 나하고 같이 오른 양복쟁이 편을 돌려다보았다. 나의 말이 조금이라도 총독정치를 비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 무슨 오해가 생길지 그것이 나에게는 염려되는 것이었다.
“정말 내지에도 공동묘지가 있에요? 하지만 행세하는 사람야 좀 다르겠죠?”
“그야 좀 다르겠지마는, 어떻든지 일본에서는 주로 화장을 지내기 때문에 타고 남은…… 아마 목구멍뼈라든가를 갖다가 묻고 목패든지 비석을 세운다우. 그러지 않어도 살아 있는 사람도 터전이 좁아서 땅조각이 금조각 같은데, 죽는 사람마다 넓은 터전을 차지하다가는 이 세상에는 무덤만 남고 말지 않겠소, 허허허.”
나는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도 묘지를 간략하게 하여 지면을 축소하고 남는 땅은 누구의 손으로 들어가고 마누 하는 생각을 하여 보았다.
“그리구서니 자기의 부모나 처자를 죽었다구 금세루 살라야 버릴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대대로 내려오는 제 집 산소까지를.”
이 사람은 나의 말이 옳다는 모양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도 그래도 반대를 한다.
“화장을 지낸다기루 상관이 뭐겠소. 예전에 애급이라는 나라에서는 왕후 장상의 시체는 방부제를 쓰고 나무관에 넣은 시체를 다시 석관까지에 튼튼히 넣어서 피라미드라는 큰 굴 속에 묻어 두었지만, 지금 와서는 미이라밖에는 되지 않고 만 것을 보면 죽은 송장에게 능라주의(綾羅紬衣, 비단옷과 명주옷)를 입히고 백 평, 천 평 되는 땅에다가 아무리 굳게 파묻기로 그것이 무엇이란 말이오. 동상을 세우면 무얼 하고 송덕비를 세우면 무엇에 쓴다는 말이오.”
내 앞에 앉았는 장꾼은 무슨 소리인지 귀에 자세히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녜에, 그런 것이 있에요?”
하고 멀거니 앉았다.
“하여간 부모를 생사장제(生事葬祭, 부모가 살아 계실 땐 예를 다해 섬기고, 돌아가시면 살아 섬길 때처럼 장사 지내야 한다는 뜻)에 예(禮)로써 받들어야 할 거야 더 말할 것 없지마는, 예로 하라는 것은 결국에 공경하는 마음이나 정성을 말하는 것 아니겠소? 그러니 공동묘지 법이란 난 아직 내용도 모르지마는, 그것은 별문제로 치고라도, 그 근본정신은 생각지 않고 부모나 선조의 산소 치레를 해서 외화(外華)나 자랑하고 음덕(蔭德)이나 바란다는 것도 우스운 수작이란 것을 알아야 할 거 아니겠소. 지금 우리는 공동묘지 때문에 못살게 되었소? 염통 밑에 쉬스는 줄은 모른다구, 깝살릴 것 다 깝살리고(찾아온 사람을 따돌려 보내다. 재물이나 기회 따위를 흐지부지 다 없애다.)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도 죽은 뒤에 파묻힐 곳부터 염려를 하고 앉았을 때인지? 너무도 얼빠진 늦둥이 수작이 아니오? 허허허.”
나는 형님에게 하고 싶던 말을 장돌뱅이로 돌아다니는 이 자를 붙들고 한참 푸념을 하였다. 이야기를 하고 나니까 어쩐지 열적었다. 그러나 내가 한참 떠드는 바람에 여러 사람의 시선은 이리로 모인 모양이다. 저편에 앉았는 기생아씨도 몸을 틀고 돌려다보며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이야기를 열심으로 듣는 모양이다.
“나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래 형장께서도 양친이 계시겠지요? 어떻게 하실 텐가요?”
갓장수는 내 말은 어찌 되었든지 불평이 있으니만치 시비조로 덤빈다.
“되어 가는 대로 합시다.”
하며 나는 웃고 입을 답쳤다.
“그래두 누구나 부모나 조상을 위하는 것은 똑같겠죠?”
나는 더 말해야 쓸데가 없다고 생각하며 아무 말 아니 하려다가, 그래도 오해를 사면 안 되겠기에 또 대꾸를 하여 주었다.
“글쎄 공동묘지가 좋으니 부모를 그리 모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그보다도 더 절급한 문제가 하도 많다는 말 아니오? 그 절급한 문제는 내버려두고―---산 사람 문제는 내버려두고 왜 죽은 뒤의 문제부터 기가 나서 법석이냔 말요. 아버지, 어머니가 굶어 돌아가도 공동묘지에만 장사를 안 지내면 되겠소? 당신은 몇 대조까지나 선영(先塋)을 찾는지 모르겠지마는, 가령 십 대조 이상의 묘지를 못 찾는다면 그것은 공동묘지기 때문이란 말요…….”
하고 나는 화를 버럭 내다가 목소리를 낮추면서,
“그러니까 공동묘지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 문제, 앞으로의 문제, 자식의 문제를 생각하여 놓고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오.”
하고 나는 농쳐 버렸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하며 갓장수는 픽 웃어 버린다. 나는 잠자코 말았으나 어쩐지 불유쾌하였다. 갓장수 따위를 데리고 그러한 논란을 한 것이 점잖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남이 들으면 웃을 것 같아서 혼자 부끄러웠다.
두 사람이 잠자코 앉았으려니까 차는 심천(深川) 정거장엔지 도착한 모양이다. 새로운 승객도 별로 없이 조용한 속에 순사가 두리번두리번하고 뚜벅 소리를 내며 들어와서 저편 찻간으로 지나간 뒤에 조금 있으려니까, 누런 양복바지를 옹구바지로 입고 작달막한 키에 구두 끝까지 철철 내려오는 기다란 환도를 끌면서 조선 사람의 헌병보조원이 또 들어왔다. 여러 사람의 눈은 또 긴장해지며 일시에 구랄 만한 누렁저고리를 입은 조그마한 사람에게로 모이었다. 이 사람은 조그만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저편서부터 차츰차츰 한 사람씩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리로 온다. 누구를 찾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공연히 가슴이 선뜩하였으나, 이 찻간에는 나를 미행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니까 안심이 되었다. 찻간 속은 괴괴하고 현병보조원의 유착한 구둣소리만 뚜벅뚜벅 난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가슴은 컴컴한 남포의 심짓불이 떨리듯이 떨리었다. 한 사람, 두 사람 낱낱이 얼굴을 들여다보고 지나친 뒤의 사람은, 자기는 아니로구나, 살았구나! 하는 가벼운 안심이 가슴에 내려앉는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는 모양이 얼굴에 완연히 나타났다. 헌병보조원의 발자취는 점점 내 앞으로 가까워 왔다. 나는 등을 지고 돌아앉았고, 내 앞의 갓장수는 담뱃대를 든 채 헌병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앉았다. 헌병보조원은 내 곁에 와서 우뚝 선다. 나는 가슴이 뜨끔하여 무심코 쳐다보았다. 그러나 헌병보조원은 나를 본체만체하고 내 앞에 앉았는 갓장수를 한참 내려다보고 섰더니 손에 들었던 종잇조각을 펴본다. 내 가슴에서는 목이 메게 꿀떡 삼키었던 토란만한 것이 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찻간은 고작 헌병보조원―---어린 조선 청년 하나의 한마디로 괴괴하여졌다.
“당신, 이름이 뭐요?”
헌병보조원은 갓장수더러 물었다.
“나요? 김××예요.”
하며 허둥지둥 일어선다.
“당신이 영동(永同)서 갓을 부쳤소?”
“녜, 녜.”
“그럼 잠깐 내립시다.”
찻간 속은 쥐죽은 듯한 공포에서 겨우 벗어났다. 여기저기서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난다.
나의 앞에 앉아서 이때까지 노닥거리던 말동무는 헌병보조원의 앞을 서서 허둥지둥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문 밖으로 나간 뒤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 앞에는 수건으로 질끈 동인 헌 우산 한 개가 의자의 구석에 기대어 섰다. 나는 유리창을 올리고 캄캄한 밖을 내다보며 소리를 쳤으나 벌써 간 곳이 없었다. 난로에 석탄을 넣으러 들어온 역부에게 그 우산을 내주면서 물어 보니, 주는 우산은 받으면서도 이편 말은 못 알아들은 듯이,
“나니(무엇이야)? 나니?”
하며 여전히 못 알아들은 체하고 일본말로 묻는 데에는 어이가 없었다. 발길로 지르고 싶었다.
자정이나 넘은 뒤에 차는 대전에 와서 닿았다. 김의관 같은 금테안경 채비의 하이칼라 신사는 커다란 가죽가방에 담요를 비끄러매어서 옆에 놓았던 것을 앞에 앉았던 사람에게 들려 가지고 내려갔다. 그러나 기생은 내리지 않는다.
얼마나 정거하느냐고 소제하는 역부더러 물어 보니까, 삼십 분 동안이라고 멱따는 소리를 꽥 지르고 달아난다. 나는 하도 심심하기에 모자를 집어 쓰고 차에서 내려서 플랫폼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갔다. 그 동안에 눈이 서너 치나 쌓인 모양이다. 지금은 뜸하나 뼈에 저린 밤바람이 모가지를 자라목처럼 오그라뜨리었다. 맨 끝에 달린 찻간 앞까지 오니까 불을 환하게 켠 차장실 속에 얼굴이 해끄무레한 두 청년이 검정 방한모에 소매통이 좁은 옥색 두루마기를 입고, 누런 양복을 입은 헌병과 마주 서서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환히 보이었다. 얼굴 모습이 같은 것을 보면 두 청년은 형제 같고, 헌병 가슴에 권총을 단 줄이 늘어진 것을 보면 보조원이 아니요 이것이 분명하다. 나는 창 밑으로 가까이 가보니까 세 사람은 여전히 웃으며 무어라고 속살거린다. 그러나 그 청년들의 어설프게 웃는 낯빛과 입술이 경련적으로 위로 뒤틀린 것은 공포 그것 같았다.
‘스파이는 아니군!’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나는 발길을 돌이켜 목책으로 막은 입구 앞으로 가서 내 손으로 열고 나갔다. 아무도 막지 않고 좌우편으로 눈발이 쳐들어 오는 휑뎅그레한 속으로 한가운데에 난로랍시고 놓고 그 가에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섰다.
‘대합실도 없이 이런 벌판에 세워 둘 지경이면 어서 찻간으로 들여보낼 일이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난로 옆을 흘끗 보려니까 결박을 지은 범인이 댓 사람이나 오르르 떨며 나무의자에 걸터앉고, 그 옆에는 순사가 셋이서 지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무심코 외면을 하였다. 그 중에는 머리를 파발을 하고 땟덩이가 된 치마저고리의 매무시까지 흘러내린 젊은 여편네도 역시 포승을 지어서 앉아 있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나를 부러워하는 듯한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인다. 자세히 보니 등뒤에는 쌕쌕 자는 아이가 매달렸다. 여자의 이런 꼴을 처음 보는 나는 가슴이 선뜩하며 멀거니 얼이 빠져 섰었다. 나는 흉악한 꿈을 꾸며 가위에 눌린 것 같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쳤다.
정거장 문 밖으로 나서서 눈을 바삭바삭 밟으며 큰길 거리로 나가니까 칠 년 전에 일본으로 달아날 제, 오정때 대전에 내려서 점심을 사먹던 그 집이 어디인지 방면도 알 수 없이 시가가 변하였다. 길 맞은편으로 쭉 늘어선 것은 빈지(한 짝씩 끼웠다 떼었다 할 수 있게 만든 문. 흔히 가게에서 문 대신 쓴다.)를 들였으나 모두가 신축한 일본 사람 상점이다. 우동을 파는 구루마가 쩔렁쩔렁 흔드는 요령 소리만이 괴괴한 거리에 처량하다. 열네다섯쯤에 말도 모르고 단신 일본으로 공부 간다는 데에 호기심이 있었던지 친절히 대접을 해주던, 그때의 그 주막집 주인 내외가 그립다.
다시 돌쳐 들어오며 보니, 찻간에서 무슨 대수색을 하는지 승객들은 아직도 아니 들여보내고, 결박을 지은 여자는 업은 아이가 깨어서 보채니까 일어서서 서성거린다.
‘젖이나 먹이라고 좀 풀어 줄 일이지.’
하는 생각을 하니 곁에 시퍼렇게 얼어서 앉은 수사가 불쌍하다가도 밉살맞다. 목책 안으로 들어오며 건너다보니까 차장실 속에 있던 두 청년과 헌병도 여전히 이야기를 하고 섰다. 나는 까닭 없이 처량한 생각이 가슴에 복받쳐 오르면서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공기에 몸이 떨린다.
젊은 사람들의 얼굴까지 시든 배춧잎 같고 주눅이 들어서 멀거니 앉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빌붙는 듯한 천한 웃음이나 ‘헤에’ 하고 싱겁게 웃는 그 표정을 보면 가엾기도 하고, 분이 치밀어 올라와서 소리라도 버럭 질렀으면 시원할 것 같다.
‘이게 산다는 꼴인가? 모두 뒈져 버려라!’
찻간 안으로 들어오며 나는 혼자 속으로 외쳤다.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나는 모자를 벗어서 앉았던 자리 위에 던지고 난로 앞으로 가서 몸을 녹이며 섰었다. 난로는 꽤 달았다. 뱀의 혀 같은 빨간 불길이 난로 문 틈으로 날름날름 내다보인다. 찻간 안의 공기는 담배연기와 석탄재의 먼지로 흐릿하면서도 쌀쌀하다. 우중충한 남폿불은 웅크리고 자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키는 것 같으나 묵직하고도 고요한 압력으로 지그시 내리누르는 것 같다. 나는 한번 휘 돌려다보며,
‘공동묘지다! 공동묘지 속에서 살면서 죽어서 공동묘지에 갈까 봐 애가 말라하는 갸륵한 백성들이다!’
하고 혼자 코웃음을 쳤다.
‘공동묘지 속에서 사니까 죽어서나 시원스런 데 가서 파묻히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하여간에 구더기가 득시글득시글하는 무덤 속이다. 모두가 구더기다. 너도 구더기, 나도 구더기다. 그 속에서도 진화론적 모든 조건은 한 초 동안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겠지! 생존경쟁이 있고 자연도태가 있고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고 으르렁댈 것이다. 그러나 조만간 구더기의 낱낱이 해체가 되어서 원소가 되고 흙이 되어서 내 입으로 들어가고 네 코로 들어갔다가, 네나 내나 거꾸러지면 미구에 또 구더기가 되어서 원소가 되거나 흙이 될 것이다. 에잇! 뒈져라! 움도 싹도 없이 스러져 버려라! 망할 대로 망해 버려라! 사태가 나든지 망해 버리든지 양단간에 끝장이 나고 보면 그 중에서 혹은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나은 놈이 생길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차가 떠나기 전에 자기 자리로 와서 드러누웠다. 어느덧 난로 옆으로 등 너머에 와서 누운 기생의 머리에서 가끔가끔 끼쳐 오는 머릿내와 향긋한 기름내, 분내를 코로 은은히 맡아 가며 눈을 감고 누웠었다.
‘이것도 구더기 썩는 냄새이기는 일반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여 보면서도 코를 막으려고는 아니 하였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잠이 소르르 왔다.
몇 번이나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편치 못한 잠을 잔 둥 만 둥하고 눈을 떠보니까 긴긴밤도 흐지부지 훤히 밝았다. 으스스하기에 난로 앞으로 가서 불을 쪼이며 옆사람더러 물어 보니 시흥(始興)에서 떠났다 한다.
인제는 서울도 다 왔구나!고 생각하니, 그래도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영등포를 지나서 한강 철교를 건널 때에는 대리석으로 은구를 놓은 듯한, 사람 그림자라고는 없는 빙판을 바라보고 무심코 기지개를 켜며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용산역에까지 오니까 뒤의 기생이 일어나서 매무시를 만적거리고 곧 내릴 사람같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차가 떠나려고 호각을 부는 소리를 듣고서 그대로 앉아 버렸다. 서울이 처음 길이라 마음이 불안해서 무엇을 물어 보려고 그리하는지 수상하다. 내가 자기 자리로 와서 선반에서 짐을 내려놓고 내릴 채비를 차리는 동안에도 일거일동을 눈으로 좇으면서 무슨 말을 붙일 듯 붙일 듯하다가 입을 벌리지 못하고 마는 모양이다. 서울에 내려서 찾아갈 길을 묻자든지 무슨 까닭이 있는 것 같아서 이편에서 먼저 입을 벌리고 싶었으나, 대학 제복 제모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모른 척해 버렸다.
기차는 남대문에 도착하였다. 집에서 나온 큰집 종형님과 짐을 나누어 들고 나와서 인력거를 타다가 보니, 그 기생은 길 잃은 아이처럼 길체로 비켜 서서 우두커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걱정 아니 하여도 저 찾아갈 데로 찾아가겠지마는, 어떤 사정인지 이 추운 아침에 가엾어 보였다.
7
온밤 새도록 쏟아진 눈은 한 자 길이는 쌓였을 거라. 인력거꾼은 낑낑 매며 끄나 바퀴가 마음대로 돌지를 않는다. 북악산에서 내리지르는 바람은 타고 앉았는 사람의 발끝 코끝을 쏙쏙 쑤시게 하고, 안경을 쓴 눈이 어른어른하도록 눈물을 핑 돌게 한다. 남문 안 ‘신창’으로 나가는 술집 더부살이 같은 것이 굴뚝에서 기어나온 사람처럼 오동(검붉은 빛이 나는 구리. 오금(烏金)과 같은 광택이 있어 장식품으로 많이 쓴다)이 된 두루마기 위로 치룽(싸리로 가로로 퍼지게 둥긋이 결어 만든 그릇. 채롱과 비슷하나 뚜껑이 없다)을 짊어지고 팔짱을 끼고 충충충 걸어가는 것이 가다가다 눈에 띌 뿐이요, 아직 거리에는 사람 자취도 별로 없다. 불이 나가지 않은 문전의 외등(外燈)은 졸린 듯이 뽀얗게 김이 어리어 보인다. 인력거꾼은 여전히 허연 입김을 헉헉 뿜으며 다져진 눈 위로 꺼불꺼불하며 달아난다.
나는 일년 반 만에 보는 시가를 반가운 듯이 이리저리 돌려다보고 앉았다가, 어느덧 머릿속에 아내의 가죽만 남은 하얗게 센 얼굴이 떠올랐다.
‘이래도 남편이라고 기다리고 있을 테지?’
나는 이런 생각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가엾은 생각이라고는 아니 난다. 도리어 별안간 아까 정거장에서 섭섭한 듯이 바라보고 섰던 대구 기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갸름하고 감숭한 얼굴, 무슨 불안을 호소하려는 듯한 그 눈.
‘지금쯤 어디를 헤매누? 말을 좀 붙여 보았더라면 좋았을걸!’
나는 추운 생각도 잊어버리고 멀거니 이런 생각을 하고 앉았다가, 우리집에 들어가는 동리를 지나쳤다. 인력거꾼의 꾸지람을 들어 가며 두어 간통이나 되짚어 내려와서 내렸다.
집안 식구들은 벌써 일어나서 세수까지 하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공부두 중하지만 그렇게도 좀 아니 나온단 말이냐.”
하며 어머님은 벌써부터 우는 목소리다.
“그래두 눈을 감기 전에 만나라도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하고 또 우신다. 과부가 된 뒤로 본가살이를 하는 큰누이도 훌쩍훌쩍하고 섰다. 작은누이도 덩달아서 눈을 부빈다. 뜰에서 멀거니 바라보고 섰던 큰집 사촌형수도 까닭 없이 돌아서며 행주치마로 콧물을 씻는 눈치다. 그래도 아버지만은 벌써 안방에 들어와 앉으셔서 잠자코 절을 받으셨다.
“아, 무엇 때문에 이렇게들 우셔요?”
나는 모친 앞에서도 여러 아낙네에게 핀잔을 주었다. 해마다 오면 어머니의 울고 맞아 주는 것이 귀찮다. 그러한 때에는 내 처도 으레히 제 방으로 피해 들어가서 홀짝거리었다. 반갑다고 우는 것이겠지마는, 아내에게 있어서는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눈물이 핑 돌 때가 없지 않지만, 남이 우는 것을 보면 도리어 웃어 주고도 싶고 무어라고 위로할 수도 없었다.
“좀 어떤 셈예요?”
인사가 끝난 뒤에 어머니에게 물으니까,
“그저 그렇지. 어서 들어가 보렴.”
하며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와서 건넌방으로 앞장을 서서 들어갔다.
“아가 아가! 서방님 왔다. 얘, 얘, 일본서 서방님 왔어.”
혼수상태에 있던 병인은 눈을 슬며시 뜨고 시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다보고 나서 곁에 앉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까맣게 탄 입술을 벌리고 생그레 웃는 듯하더니, 깔딱 질린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여지며 외면을 한다. 두꺼운 이불을 덮은 가슴이 벌렁거리며 괴로운 듯이 흑흑 느낀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인제 낫는다.”
어머니는 이렇게 달래면서도 역시 훌쩍거리며 나가 버리신다. 병풍으로 꼭꼭 막고 오줌똥을 받아 내는 오랜 병인의 방이라 퀴퀴한 냄새에 약내가 섞여서, 밤차에 피로한 사람의 비위를 여간 거스르는 게 아니지마는, 그래도 금시로 나가 버릴 수가 없어서 그 옆에 앉았었다.
“울지 말아요, 병에 해로우니.”
나는 겨우 한마디 하고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좋을지 몰라서 벙벙히 앉았었다.
“중기(重基), 중기 보셨소?”
병인은 눈물을 씻으며 겨우 스러져 가는 목소리로 한마디를 하고 나를 쳐다본다. 곁에 앉았던 계집애년이 집어 주는 수건을 받는 손을 볼 제, 나는 비로소 가엾은 생각이 났다. 가죽이 착 달라붙고 뼈가 앙상한 손이 바르르 떨리었다.
‘저 손이, 이 몸에 닿던 포동포동하고 제일 귀여워 보이던 그 손이던가?’
하는 생각을 하여 보니 어쩐지 마음이 아프고 실쭉하여졌다.
“……난, 나는 죽는 사람이에요. 하, 하지만 저 중기만은…….”
하며 또 기운 없이 입을 벌리다가 목이 메고 말았다. 그저 그 소리지마는 시원하게 울고 싶어도 기운이 진하여서 눈물만 쏟아지는 모양이다.
“그런 소리 말아요, 죽기는 왜 죽어. 마음을 턱 놓고 있으면 나아요.”
“인제는 더 살구 싶지두 않어요, 어떻든 저것만은 잘 맡으세요.”
또다시 흑흑 느끼다가,
“저것을 생각하니까, 하, 하루라두 더 살려는 것이지.”
하며 엉엉 목을 놓고 우나, 가다가다 목이 메어서 모기 소리만큼 졸아들어 갔다.
나는 무어라고 대꾸를 하여야 좋을지 망단하였다. 죽어 가면서도 자식 생각을 하는 것이 불쌍하기도 하고, 부질없는 일 같기도 하다. 오래 앉았으면 점점더 울 것 같고, 또 사실 더 앉았기도 싫기에 나는 울지 말라고 달래면서 안방으로 건너와서, 아랫목에 깔아 놓았던 조선옷과 갈아입었다. 정거장에 나왔던 사촌형이 들어와서,
“사랑에서 부르시네.”
하며 이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이 형님은 종가(宗家)의 장남으로 태어난 덕에 일평생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우리집에서 사십 년을 지내 왔다. 그러나 이 형님에게 자식이 없는 것이 집안의 또 큰 걱정거리란다.
사랑에 나가서 깜짝 놀란 것은 김의관이 아버님 옆에 앉았는 것이다.
‘언제부터 또 와서 있누?’
하며 어제 차 속에서 보던 금테안경을 생각하고 들어가서 인사를 하니까,
“잘 있었나? 내환이 위중해서 얼마나 걱정이 되나?”
하며 한층더 점잔을 빼고, 양복은 입었으나 장죽을 물고 앉았다. 아랫목에 도사리고 앉으셨던 아버님은,
“거기 앉어라.”
하며 그 동안 병세의 경과를 소상히 이야기하며 무슨 탕(湯)을 몇 첩이나 썼더니 어떻게 변하고, 무슨 음(飮)을 몇 첩을 써보니까 얼마나 효험이 있었고, 무엇이 어떻게 걸리어서 얼마나 더치었다는 이야기를 기다랗게 들려 주셨으나 나에게는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듣고 앉았다가,
“그 유종(乳腫, 젖이 곪아 생기는 종기)은 총독부 병원에 가서 얼른 파종(종기를 터뜨림)을 시켰더면 좋았을걸요?”
하며 한마디 하니까,
“요새 양의가 무어 안다던? 형두 그 따위 소리를 하기에 죽여도 내 손으로 죽인다고 하였다만…….”
하며 역정을 내셨다. 나는 잠자코 말았다.
안에 들어와서 급히 차려 주는 조반을 먹다가,
“김의관은 왜 또 와 있에요?”
하고 어머니께 물어 보았다.
“집을 뺏기구 첩허구 헤어진 뒤에 벌써부터 와 있단다.”
“그럼 큰집은 어떡하구요?”
“큰집은 있기야 있지만, 언제는 안 돌아다니나 보던. 더구나 셋방으로 돌아다니는 터에! 매일 술타령이요, 사람이 죽을 지경이다.”
하며 어머니는 눈살을 찌푸리셨다.
“그, 왜 붙여요?”
김의관에 대한 숭배심을 잃은 나는 그 반동으로 보기가 싫었다.
“왜 붙이는 게 뭐냐?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 김의관만한 사람이 없다고, 누가 무어라고만 하면 야단이시구, 꼭 겸상해서 잡숫다시피 하시는데.”
김의관은 합방통에 무슨 대신(大臣)으로 합방에 매우 유공한 서자작(徐子爵, 오등작(五等爵)의 넷째 작위(爵位),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일긴(一緊, 가장 긴요함. 또는 가장 긴요한 사람이나 물건)으로서 그 서씨의 집을 얻어 들었는데, 서씨가 올 여름에 죽은 뒤에는 집까지 뺏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으로 서자작이 하던 사업―---이라야 별다른 게 아니라 귀족들의 초상집 호상차지(초상 치르는 데에 관한 온갖 일을 책임지고 맡아 보살피는 사람)하는 것이지만, 이것만은 대를 물려받아서 한다는 소문이다.
“그건 고사하고, 여보, 김의관이 유치장에 들어갔다가 그저께야 나왔다우. 모닝코트를 입구, 하하하.”
시험이 며칠 아니 남았다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무엇인지를 꼼지락꼼지락하고 앉았던 누이동생이 돌려다보며 말참견을 한다.
“응? 허허, 그거 걸작이다! 헌데 무슨 일루?”
나는 김의관이 예전에 두 번이나 붙들려 가는 것을 따라가 본 일이 있느니만큼 유치장이란 말에 커닿게 웃었다.
“누가 아우. 밤중에 요릿집에서 부랑자 취체에 붙들려 들어갔다가 이 주일 만에 나왔다우, 하하하…….”
“허허허…….”
나는 합병통에 헌병사령부에 가던 일을 생각해 보고,
“이번에는 누가 쫓아갔던?”
하며 또 한번 웃었다.
“아, 참 너두 밤출입 하지 마라. 요새는 부랑자 취체도 퍽 심한 모양인데…….”
어머니는 곁에서 주의를 시킨다.
“왜 내가 부랑잔가요? 그런데 김의관이 유치장에서 나와서 무어라구 해?”
하며 누이더러 물어 보았다.
“아버지께서는 누가 먹어 내기 때문에 들어갔다구 하시지만, 큰집 오빠가 그러는데, 요릿집에서 취체를 당하니까, 물론 독립운동자를 잡으려는 것인데, 김의관이 호기 좋게 정무총감(政務總監)에게 전화를 걸 테라구 법석을 하기 때문에 형사들은 더 아니꽈서, 웬 되지 않은 놈이 이 기승이냐고 곯려 주었나 보다던데요.”
“넌 뭘 안다구 어른들 이야기를 그렇게 하니!”
어머니는 누이를 잠깐 꾸짖고 나시더니, 아랫방에서 중기가 깨었다고 안고 나오는 것을 받아 가지고 들어오신다.
“자아, 너 아범 봐라. 너 아범 왔다. 좀 봐라! 왜 인제 오셨소?”
어머니는 겨우 핏덩어리를 면한 조그만 고깃덩어리를 얼러 가며 나에게로 데미셨다. 처네에 싸인 바짝 마른 아이는 추워서 그러는지 두 팔을 오그라뜨리고 바르르 떨면서, 핏기 없는 앙상한 얼굴을 이리로 향하고 말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으아 하며 가냘픈 목소리로 운다.
“그, 왜, 그 모양이에요?”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 어떠냐? 모습이 너 닮아 이쁘지 않으냐? 인제 석 달쯤 된 게 그렇지. 그러나 나면서 어디 에미 젖이라군 변변히 먹어 봤니. 유모를 한 달쯤 댔다가 나가 버린 뒤로는 똑 우유로만 길렀는데.”
울음을 시작한 어린아이는 좀처럼 그치지를 안고 점점더 발악을 한다. 파랗게 질리어서 두 발을 뻗드딩거리고 배를 발딱발딱 쳐들어 가며 방 안을 발깍 뒤집어놓는다.
“에그, 이게 웬 야단이야?”
하며 누이는 보던 책을 덮어 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마루로 홱 나가 버렸다. 나도 상을 밀어 놓고 총총히 일어났다. 사랑으로 나가서 건넌방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며 누웠으려니까, 낯 서투른 청년이 하나 찾아왔다. 동경의 소할(所轄)경찰서에서 지금 종로서로 인계를 하여 왔는데 다시 떠날 때까지 자기가 미행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얼마 아니 계실 테지요? 늘 쫓아다니지는 않겠습니다. 가끔가끔 올 테니 그 대신에 문 밖이나 시골을 가시거든 요 앞 교번소로 통기를 좀 해주슈.”
하며 매우 생색이나 내는 듯이 중언부언하고 가버렸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
8
삼사 일은 집구석에서 그럭저럭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 그리 분주하신지 매일 아침만 자시면 김의관하고 나가셨다가 어슬어슬해서야 약주가 취하여 들어오시기도 하고 친구를 한 떼씩 몰아 가지고 들어오시기도 하였다. 큰집 형님한테 들으니, 요사이 동우회의 연종 총회가 있어서 그렇다 한다.
“그런데 관계를 마시래도 한사코 왜 다니신단 말요? 모두 반미친놈들이 모여서 협잡질들이나 하고 남한테 시빗거리만 장만하면서…… 공연히 김의관이 들쑤셔 내서 엄벙뗑하고 돈푼이라두 갉아먹으려고 그러는 것을 그걸 왜 짐작을 못 허셔?”
“내가 아나? 평의원이라는 직함 바람에 다니시는 게지, 허허허. 그런데 중추원 부찬의라두 하나 생길 줄 아시는지도 모르지.”
큰집 형님은 이런 소리를 하며 웃었다.
“중추원 부찬의는 벌써 철겨운(제철에 뒤져 맞지 아니한) 지가 언젠데? 설령 그게 된다기루 그건 왜 하지 못해 애를 쓰신답디까? 참 딱한 일이야.”
“그래두 김의관은 무엇이든지 하나 운동해 드리마던데, 하하하.”
“미친 소리! 저두 못 하는 것을 누구를 시키구 말구. 흥, 또 유치장에나 들어가구 싶은 게로군?”
“그래두 김의관 말은 자기가 총독이나 정무총감하고 제일 긴하다는데, 하하하.”
“서가의 집을 뺏겼으니까, 아버지께 알랑알랑하고 집이나 한 채 얻어 들려는 거지.”
“허허허, 그런 집 있으면 나부터 줍시사 하겠네.”
사실 이 큰댁 형님을 집 한 채 주어 세간을 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동우회라는 것은 일선인(日鮮人)의 동화(同化)를 표방하고 귀족 떨거지들을 중심으로 하여 파고다공원패보다는 조금 나은 협잡배들이 모여서 바둑, 장기로 세월을 보내고 저녁때면 술추렴이나 다니는 회이다. 회의 유일한 사업은 기생연주회의 후원이나 소위 지명지사(知名之士)가 죽으면 호상차지나 하는 것이다.
“나는 요새 좀 바뻐서 약 쓰는 것도 자세히 볼 수 없고 하니, 낮에는 들어앉아서 잘 살펴보아라.”
내가 도착하던 날 아침에 아버지께서 이렇게 이르시기도 하였고, 또 나간대야 급히 찾아가 볼 데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들어엎드려서 큰집 형님하고 저녁때면 술잔 먹고 사랑구석에서 버둥거리고 있었지마는, 알고 보니 다니신다는 데라야 고작 동우회뿐이다. 병인은 하루 한 번이고 두어 번 들여다보아야 더 나은 것 같지도 않고 더친 것 같지도 않고, 의사가 와서 맥인가 본 뒤에 방문을 내면 큰집 형님이 쫓아가서 약봉지를 받아다가 끓여 디밀면 먹는지 마는지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만은 여전히 혼자 애를 쓰시나, 인제는 병구완에 지치시고 집안 사람들의 마음도 심상하여져서 일과로 약시중만 하면 그만인 모양이다. 나부터 병구완을 해본 일이 없으니 어떻게 되어 가는지 대중을 모르겠다.
“그 망한놈의 횐지 무언지 좀 그만두고 어떻게 다잡아서 약이나 잘 쓸 도리를 하셨으면 아니 좋을까.”
하며 어머니께서 부친을 원망을 하시는 소리도 들었다.
“오늘두 또 나가우? 어젯밤부터는 좀 이상한 모양이던데.”
며느리를 들여다보고 나오시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어머니께서 책망하듯이 물으시니까,
“오늘은 좀 늦을지도 모를걸! 그리 다를 것은 없군.”
하시고 나가시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더하다는 날도 그 모양이요 낫다는 날도 제턱이다. 또 며칠 음산한 날이 계속하였다.
‘어서 끝장이나 났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날 때에는, 정자의 생각이 반드시 뒤미처 머리에 떠올라 왔다.
‘지금쯤 무얼 하고 있누? 경도로나 가지 않았나?’
하고 엽서를 띄운 것은, 서울 온 지 일주일이나 지난 뒤이었다.
정자에게 엽서를 부치던 날 저녁때에, 을라는 그 동안 나왔나? 하고 인사 겸 병화(炳華)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병화는 동경 유학시대에는 나의 감독자 행세를 하였을 뿐 아니라 비교적 정답게 지냈지만, 을라의 문제가 있은 후로는 그럭저럭 나하고 데면데면하여지기도 하고, 만나면 어쩐지 이렇다할 표면적 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피차에 겸연쩍게 되었다. 더구나 이 사람 역시 지금 집에 있는 큰집 형님의 이복동생이기 때문에 형제간 자별(특별)하지도 못하려니와 우리집에는 한 달에 한 번쯤 들를 뿐이다.
나는 동대문 밑에서 전차를 내려서 아직도 눈에 녹은 땅이 질척거리는 길을 휘더듬어 들어가며, 눈에 익은 거리가 오래간만에 반가운 듯이 여기저기를 휘 돌아보았다. 작년 여름에는 여기를 날마다 대어 섰었다. 그때 을라는 천안(天安) 자기 집에는 가끔 다니러만 가고 서울 와서 이 집에 묵고 있었다. 나는 하루가 멀다고 이 집에 와서는, 밤이고 낮이고 을라와 형수를 데리고 문안을 헤매기도 하고, 달밤에 병화 내외와 을라를 따라서 탑골 승방까지 가본 것도 그때였다. 밤이 늦었다고 붙들면 마지못하는 척하고 묵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때는 나도 참 단순하였어!’
나는 발자국 난 데를 따라서 마른 곳을 골라 디디며 속으로 그때 재미있게 놀던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김장을 다 뽑아 낸 밭에는 눈이 길길이 쌓이고 길가로 막아 놓은 산울(산 울타리)은 말라빠진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고 얽어맨 새끼도 꺼멓게 썩어 문드러졌다.
‘그때에는 여기에 퍼런 호박덩굴, 외덩굴이 쫙 깔리고 누런 꽃이 건들거리었것다.’
벽돌담을 쌓은 어떤 귀족의 별장인가 하는 것을 지나서 좁은 길을 한 마장(오 리나 십 리가 못 되는 거리)쯤 걸어가려니까, 오른편은 낭떠러지가 된다.
‘응, 저기가 자던 날 아침이면 나와서 세수도 하고, 달밤에 나와서 을라와 수건을 잠가 놓고 물튀기를 하던 데로군.’
하며 바위 밑을 내려다보니까, 물이 말랐는지 얼음눈이 허옇게 뒤집어씌워 있다. 병화 집에는 마침 주인도 돌아와 들어 있었다.
“언제 나왔나? 나왔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번 간다면서 자연 바뻐서…….”
하며 양복을 입은 병화는 방에서 튀어나왔다. 지금 막 들어온 모양이다.
“아씨는 좀 어떠세요?”
하며 형수도 반가운 듯이 어린아이를 안고 나와서 인사를 한다.
“명이 길면 살겠지요. 하나를 낳아 놓으니까 신진대사로 하나는 가야지요.”
하고 나는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에그, 흉한 소리두 하십니다.”
“아, 참, 좀 차도가 있으신 모양인가? 처음부터 양의를 대어 가지고 수술을 한 뒤에 한약을 들이댄다든지 하였더면 좋았을걸. 언젠가 그런 말씀을 하였더니 아버지께서는 펄쩍 뛰시는 모양이시기에 시키지 않은 참견은 하기가 싫어서 그만두었지만.”
“나 역시 하시는 대루 내버려두지. 지금 어쩌니어쩌니 한들 쓸데두 없구, 제 계집이니까 어쩐다구 하실까 봐서 되어 가는 대루 내버려두지. 하지만 며칠 못 갈 듯싶어.”
“그래서 어쩝니까?”
형수가 웃으면서 눈살을 찌푸린다. 한참 병인의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생각난 듯이,
“아, 그런데 을라 오지 않었에요?”
하고 형수를 쳐다보았다.
“아뇨, 왜, 나왔대요?”
하고 형수는 나의 얼굴을 살피듯이 쳐다본다. 병화는 못 들은 체하고 일어나서 양복을 벗기 시작한다.
“아뇨, 글쎄, 나왔는가 하구요.”
“아뇨.”
하며 형수는 생글생글 웃다가 끼고 앉은 어린애를 들여다보고 말았다. 나는 어쩐지 온 것을 속일 것은 무언구? 하며 불쾌하였다.
“오는 길에 신호에 들렀더니, 부득부득 같이 가자는 것을 떼어 버리고 왔는데, 이삼 일 후에는 떠나겠다 했으니까 벌써 왔을 텐데요.”
하며 숨길 것이 무어냐는 듯이 불쾌한 내색을 보였다.
“네에, 하지만 바쁘신 길인데 거기는 어째 들르셨에요?”
하고 형수는 책망하듯이 묻는다.
“심심하기에 들렀다가 형님께 소식이라두 전해 드리려구요.”
하며 나는 슬쩍 웃어 버렸다. 형수도 기가 막힌 듯이 웃어 버린다.
“미친 소리로군. 내가 을라 소식 알겠다던가?”
병화는 옷을 갈아입고 자기 자리로 와서 앉으며,
“그 무어 없지? 무얼 좀 사오라구 하지.”
하며 아내와 대접할 의논을 한다.
“아, 난 곧 갈 테에요…… 그런데 작년 생각 하십니까?”
하며 나는 짓궂이 종형수에게 을라의 이야기를 꺼냈다. 형수는 얼굴이 발개지며 픽 웃고 말았다. 나도 상기가 되는 것 같았다.
“자네두 퍽 변하였네그려?”
병화는 을라가 하던 말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전 같으면 을라하고 아무 까닭은 없어도 누가 을라란 을자만 물어 보아도 얼굴이 발개지던 사람이 되짚어서 을라의 이야기를 태연히 하고 앉았는 것이 병화에게는 다소 불쾌하기도 하고 이상쩍은 모양이다.
종형수는 일년 전에 무슨 실수가 생길까 보아 두 틈바구니에 끼여서 혼자 마음만 졸이고 있던 일을 머리에 그려 보는지 한참 말없이 앉았다가,
“그래, 공부는 잘 해요?”
하고 묻는다.
“그저 여전하더군요. 무어 노자 오기를 기다리고 있나 보던데 보내 주셨나요?”
하며 모자를 들고 일어서려니까,
“조금만 앉었어. 좋은 술이 한 병 생겼으니 한잔 하구 가란 말이야. 어디 나가서 할까?”
“술이 웬 거요? 아, 참 올 가을에 한 동 올랐답디다그려? 그러지 않아도 한턱 해야 하지 않소?”
하고 내가 웃으니까, 병화는 매우 유쾌한 듯이 따라 웃다가,
“어쨌든 앉어요. 누가 양주를 한 병 선사를 하였는데…….”
하며 묻지도 않은 말을 끌어낸다. 아닌게아니라 한 동 올라간 덕에 그런지 집안 세간도 그전보다는 는 모양이다. 윗목에 양복장도 들여 놓고 조끼에는 금시계줄도 늘이었다. 아버지가 보내 주시던 넉넉지 않은 학비를 가지고, 한 칸 방에 들어엎드려서 구운 감자를 사다 놓고 혼자 몰래 먹던 옛날을 생각하면 여간한 출세가 아니다. 나는 더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늦으면 귀찮기에 병인 핑계를 하고 나와 버렸다.
해가 거진 다 떨어진 뒤에 집에 들어와 보니, 사랑에는 벌써 영감님들이 채를 잡고 앉아서 술상이 벌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면 좀 늦게 들어올걸―--- 하며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저녁밥 때에 술 치다꺼리가 겹쳐서 우환 있는 집 같지도 않게 엉정벙정(쓸데없는 것들을 너절하게 벌이어 놓은 모양. 쓸데없는 말을 너절하게 지껄이며 허풍을 치는 모양)하고 야단이다.
“사랑에 누가 왔니?”
나는 마루로 올라오며 약두구리( 탕약을 달이는 데 쓰는, 자루가 달린 놋그릇. 늘 골골 앓아서 약만 먹고 사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를 올려 놓은 화로에 부채질을 하고 앉았는 누이더러 물으니까,
“누가 아우? ‘차지’가 또 왔단다우.”
하며 깔깔 웃는다.
“뭐, 그게 무슨 소리냐?”
“자네 차지도 모르나? 일본 가서 그것도 모르다니, 헷공부했네그려, 허허허.”
술이 얼근하게 취해서 축대 위에 섰던 큰집 형이 놀리듯이 웃으며 쳐다보았다. 여편네들도 깔깔 웃었다.
“차지라니 누구 집 택호(宅號)요? 내 차지(次知) 네 차지 말요?”
“그건 조선 차지지. 버금차(差)자하고 지탱지(支)자의 차지(差支)를 몰라?”
하며 또 웃는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그래 일본 차지가 어떡했어?”
하고 덩달아 웃었다.
“일본말로 붙여 보시구려.”
이번에는 누이가 웃는다.
“사시쓰카에(差支)*란 말이지?”
*さしつかえ[差(し)支え] : 지장, 지장되는 일
“잘 알았네!”
하고 또들 웃는다.
지금 사랑에 온 손님이 김의관의 ‘봉’인데, 처음에 찾아왔을 때에 방으로 들어오라니까 들어가도 관계없느냐는 말을 가장 일본말이나 할 줄 안다는 듯이,
“차지(지장) 없습니까?”
고 한 것을 큰집 형이 옆에서 듣고 앉았다가 나중에 김의관더러 물어보니까, 그것이 일본말로 이러저러한 뜻이라고 설명을 하여 준 것을 듣고, 안에 들어와서 흉을 보기 때문에 어느덧 ‘차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이라 한다. 집안에서들은 코빼기도 못 보고 이름도 모르면서 ‘차지 차지’ 하고 부르는 모양이다.
“미친 영감쟁이로군! 무얼 하는 사람인데 그래?”
나는 다 듣고 나서 큰집 형더러 물어 보았다.
“지금 세상에 오십이 넘어서 하긴 무얼 한단 말인가? 김의관한테 빨리러 다니는 위인이지. 그는 그렇다 하고 한 잔 안 하겠나?”
하며 큰집 형은 자기가 한잔 내듯이 아내더러 술상을 보라고 분부를 한다.
“또 먹어요? 형님이나 자슈.”
“자네야 언제 먹었나? 나는 한잔 했지만.”
나는 먹고도 싶지만 조선에 돌아오면 술이 금시로 느는 것이 걱정이었다. 조선 와서 보아야 술이나 먹고 흐지부지하는 것밖에는 사실 할 일이 없다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 같기도 하지마는, 생각하면 조선 사람이란 무엇에 써먹을 인종인지 모르겠다. 아침에도 한 잔, 낮에도 한 잔, 저녁에도 한 잔, 있는 놈은 있어 한 잔, 없는 놈은 없어 한 잔이다. 그들이 이렇게 악착한 현실 앞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노력이요, 그리하자면 술잔밖에 다른 방도와 수단이 없다. 그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목표도 없이 질질 끌려가는 것이다. 무덤으로 끌려간다고나 할까? 그러나 공동묘지로는 끌려가지 않겠다고 요새는 발버둥질을 치는 모양이다. 하여간 지금의 조선 사람에게서 술잔을 뺏는다면 아마 그것은 그들에게 자살의 길을 교사(敎唆, 부추기는)하는 것일 것이다.
부어라! 마셔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이것만이 그들의 인생관인지 모르겠다.
“그럼 한잔 하십시다.”
하며 나도 끌리고 말았다. 큰집 형을 안방으로 청하여 저녁상을 마주 받고 앉으니까, 어머니께서 다가앉으시면서,
“아까 김의관의 친구가 천(薦)이라면서 용한 시골 의원이 있다고 해서 들어와 보았는데, 또 약을 갈아 대면 어떻게 될는지?”
하며 못 믿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셨다.
“김의관의 친구가 누구예요?”
“차지 말일세.”
잔이 나기를 기다리고 앉았던 큰집 형님이 대신 대답을 하였다.
“차지라는 소리나 하고 다니는 위인이면, 그까짓 게 무얼 안다구?”
하며 내가 눈살을 찌푸리니까,
“글쎄 말일세. 김의관이나 차지가 진권(進勸, 소개하여 추천)한 것이 된 게 있을 리가 있나?”
“어떻든 나는 모르니까 아버님께 잘 여쭈어 보구 하십쇼그려.”
“난 모른다면 누가 안단 말이냐? 아버지는 밤낮 저 모양으로 돌아다니시거나 술로 세월을 보내시고.”
어머니는 나는 모르겠다는 말이 매우 귀에 거슬리고 화증이 나시는 모양이다.
“글쎄 내야 무얼 알아야죠. 그래 지금 그 의원이란 자를 대접하는 것이에요?”
“그건 그런 게 아니란다네. 김의관이 일전에 유치장에 들어갔었다지 않았나?”
하며 큰집 형이 대답을 한다.
“글쎄 그랬다는군요.”
“그런데 잡혀가던 날이 바로 차지가 한턱을 내던 날인데, 그러한 횡액에 걸려서 미안하게 되었다고, 나오던 이튿날 차지가 또 한턱을 내었다나. 그래서 오늘은 김의관이 베르고 베르다가 어디 가서 돈을 만들었는지 일금 오 원야라를 내놓고 지금 한턱 쓰는 모양이라네. 그런데 의원이란 자는 말하자면 곁두리지.”
“차진가 무언가 하는 자는 무엇 하는 자길래 두 번씩이나 턱을 내어 가며 그렇게 김의관을 떠받치더람?”
“그게 다 김의관의 후림새지. 자세한 것은 몰라두 저희끼리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군수나 하나 얻어 하든지, 하다못해 능참봉(陵參奉)이라도 하나 얻어걸릴까 하구 연해 돈을 쓰며 따라다니나 보데. 그런 놈이 내게두 하나 얻어걸렸으면 실컷 빨아먹구 훅 불어세겠구먼…… 하하하.”
큰집 형은 이 따위 소리를 하고 취흥에 겨워 웃었다. 옆에 앉으셨던 어머님은,
“그것두 입담이 좋다든지 재주가 있어야지 아무나 되는 줄 아는군.”
하며 웃으셨다.
“응! 그래서 일본말 하는 체를 하고 차지를 휘두르며 다니는군마는 김의관 주제에…… 군수, 참봉은 땅에 떨어졌던가!”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한마디 하고 술잔을 내주며,
“그래 그 틈에 아버지께서두 끼셨나요?”
하며 물으니까,
“아닐세, 천만에. 김의관이 그런 일야 변변히 이야기나 한다던가. 먹을 자국야 혼자 끼구 돌지. 또 그러나 지금 세상에 협잡꾼 아니구 술 한 잔이나 입에 들어간다던가? 김의관만 나무라면 뭘 하겠나?”
하고 큰집 형은 매우 김의관의 생화(먹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벌이나 직업)가 부럽기도 한 모양이다.
술이 취하여 가니까 독한 것이 비위에 당기어서 어머니께서 그만 먹고 어서 밥을 뜨라시는 것도 안 듣고 나는 차 속에서 먹다가 남겨 가지고 온 위스키를 가져오라고 해서 따랐다.
“얘는 병구완하러 오지 않구 술만 먹으러 왔나. 죽어 가는 병인은 뻗어뜨려 놓고 안팎에서 술타령들만 하구, 응!”
하며 어머니께서는 한숨을 쉬시고 밥상을 받으셨다. 생각하면 그도 그렇지마는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참, 아까 병화형한테 갔더니 양주가 생겼다구 붙드는걸.”
나는 양주를 보니까 생각이 나서 이런 말을 꺼냈다.
“응! 잘들 있던가? 그놈 주임대우(奏任待遇)인지 뭔지 했다면서 돈 한푼 써보란 말도 없구.”
얼쩡하여진 큰집 형은 또 아우의 시비를 꺼내려는 모양이기에 나는,
“맽겼습디까. 주면 주나 보다 안 주면 안 주나 보다 할 뿐이지, 시비는 왜 하슈. 저도 살아가야지.”
하며 말을 막아 버렸다.
“그래 아우에게 얻어먹어야 하겠나? 삼촌이나 사촌에게 비럭질을 해야 하겠나?”
“형편 되어 가는 대로 하는 거 아니겠소.”
“계집은 둘씩이나 데리구, 그래 명색이 형이라면서 모른 체해야 옳단 말인가?”
하며 소리를 빽빽 지른다.
“계집이 둘이라니요?”
“아, 그 을라라던가 하는 미친년의 학비를 대어 주나 보던데! 그저껜가 잠깐 들렀더니 벌써 불러내 왔나 보더군.”
“녜, 와 있에요?”
나는 놀랄 것도 없으나 아까 병화댁이 웃기만 하고 말을 시원히 안 하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 불쾌하다. 그러나 그 집 형수가 나와 을라가 교제하는 것을 은근히 막으려는 것은 작년부터의 일이다. 한때는 오해도 없지 않았지마는 일전 을라의 말을 들으면, 그 집 형수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데는 여러 가지로 생각되는 점이 없지도 않다. 지금 이 형님의 말을 들으면 병화와 벌써 전부터 그렇지 않은 사이 같기도 하지마는, 을라의 말 같아서는 병화댁은 친한 동무지마는 이씨 집에 들어오게 하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의미로 막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작년만 해도 아내가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으레 그랬을 것이다. 또 이번은 내가 신호에 들러서 만나고 왔다니까 한층 더 경계를 하느라고 만나지도 못하게 하려는 눈치인 듯도 싶다. 혹은 아내가 죽게 되었으니까 딴생각을 먹고 신호까지 찾아갔는가 하는 의심이 있어 그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저러나 나의 을라에 대한 향의는 작년에 멋모르고 덤비던 첫 서슬과는 지금은 딴판이다. 문제도 아니 되는 것이다.
“그래 정말 학비를 대나요? 박봉 받아 가지고 웬 돈이 자랄라구요?”
을라에게 전부터 학비를 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을 나도 짐작하는 터이기에 채쳐 물었다.
“글쎄 자세한 내용야 누가 아나마는, 안에서들 그런 이야기들을 하기에 말일세!”
나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안에서들 공연히 그러는 것이지,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점만은 을라의 말이 진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이튿날이던가, 병화댁이 병 위문 오는 길에 을라를 데리고 왔었다.
“어제 저기 오셨더라지요. 오늘 아침차에 들어와서 동무 집에 짐을 두고 놀러 갔다가 잠깐 뵈러 왔습니다.”
하고 묻기도 전에 발뺌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구태여 변명을 듣자는 것도 아니요, 무슨 흥미를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병화댁이나 을라나 제각각 그 무엇을 변명하려고 하는 눈치는 나도 잘 알아차렸다.
9
민주를 대면서도 하루바삐 납시사고 축원을 하고 축원을 하면서도 민주를 대던 병인은 그예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김의관이나 차지가 댄 의원의 약이 맞지를 않아서 그랬던지 죽을 때가 된 뒤에 횡액에 걸려드느라고 그 의원이 불쑥 뛰어들었던지는 모르지마는, 그 약을 쓴 지 이틀 만에 죽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어머니께서 가엾어하시고 섧게 우셨다. 사람의 정이란 서로 들면 저런 것인가? 하여 보았다. 어머니 말씀마따나 시집이라고 왔어야 나하고 살아 본 동안이 날짜로 따져도 몇 달이 못 될 것이다. 내가 열셋, 당자가 열다섯에 비둘기장 같은 신랑방을 꾸몄으니까, 십 년 동안이나 시집살이를 한 셈이나 내가 열다섯 살에 일본으로 달아난 뒤로는 더구나 부부라고 말뿐이다. 섣달 그믐날에 시집온 새색시가 정월 초하룻날에 앉아서 시집온 지 이태나 되었다는 셈밖에 아니 된다.
“그러나 하는 수 없지 않아요. 그것도 제 팔자니까.”
어머니께서 불쌍하다고는 우시고 우시고 할 때마다, 나는 냉정히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죽던 날 밤중이었다. 사랑 건넌방에서 널치가 되어서 한잠이 깊이 들어 가는 판에 ‘여보게 여보게’ 하며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까, 큰집 형이 얼굴이 해쓱하고 두 눈이 똥그래져서 아무 말 않고,
“일어나게, 어서 일어나 안에 좀 들어가 보게.”
하며 앞에 섰었다. 나는 ‘인젠 그른 게로구나!’ 하며 옷을 걸치고 따라나섰다. 저편 방에서 주무시던 아버님도 창황히 나오셨다. 안으로 들어가서 건넌방을 들여다보니 온 집안 식구가 조그만 방에 그득히 들어섰다. 어머니는 염주를 돌려 가며 나무아미타불을 중얼중얼 외시며 자리를 비켜 주시고 병인의 얼굴 앞으로 가라고 손짓을 하셨다. 아무도 입을 벌리는 사람은 없이 무슨 장숙(莊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로부터 시작되려는 보지 못하던 일을 구경이나 하듯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우중우중 늘어섰다. 나는 하라는 대로 병인 앞으로 가서 앉으면서 그저 숨을 쉬나? 하고 손을 코에다가 대어 보니까 따뜻한 김이 살짝 힘없이 끼치었다.
“언제부터 그래?”
하며 아버님도 잠깐 문을 열고 들여다보시는 기척이었다. 병인의 목은 점점 재어지게 발랑거린다. 감았던 눈을 실만큼 떠서 옆에 앉은 내게로 향하더니, 별안간 반짝 뜨며 한참 노려보다가 다시 감는다. 나는 머리끝이 쭈뼛하고 가슴이 선뜩하였다. 나를 원망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며 정이 떨어졌다. 누운 사람은 당장 숨이 콕 막히는 것 같더니 방긋이 벌린 입가에 이번에는 생긋 하는 웃음빛이 보이는 것을 보고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나는 어머님이 이르시는 대로 지금 데워서 들여온 숭늉 같은 미음을 한술 떠서 열린 둥 만 둥한 입술에 흘려 넣었다. 병인은 또 한번 눈을 힘없이 뜨더니 곧 다시 감는다. 또 한 술 떠서 넣었다. 병인은 한 숟가락 반의 미음이 흘러들어가던 입을 반쯤이나 벌리더니, 가죽만 남은 턱을 쳐들면서 입에 문 것을 삼키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어 번이나 연거푸 안간힘을 쓴다. 목에서는 담이나 걸린 듯이 가랑가랑하는 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났다.
여러 사람들은 눈을 한층더 크게 뜨며 고개를 앞으로 내미는 듯하고 들여다보았다. 어머님은 여전히 염불을 부르시면서 베개 위로 넘어가려는 머리를 쳐들어 놓으셨다. 베개를 만지시던 어머님의 손이 떨어지자 깔딱 하는 소리가 겨우 들릴 만치 숨소리도 없는 환한 방에 구석구석이 잔잔하게 파동을 치며 문틈으로 흘러나갔다. 이것이 모든 것이었다. 이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나는 이상할 뿐이었다. 대관절 이것이 죽음이라는 것인가 하며 눈을 꼭 감은 하얀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앉았었다. 가엾은지 슬픈지 아무 생각도 머리에 떠오르지는 않았으나, 나를 쳐다보던 그 눈! 방긋한 화평스러운 그 입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일편에, 내 손으로 미음을 떠넣어 준 것만이 무슨 큰일이나 한 것같이 유쾌하였다. 어머님은 윗입술을 쓰다듬어서 입을 닫게 하여 주시고 가만히 들여다보시더니, 염주를 들고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사랑으로 나왔다. 책상머리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 물고 앉았으려니까 큰집 형님이 데리고 온 양의(洋醫)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마침 아는 의사이기에 들어와서 녹여 가라고 하였더니,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부정이나 타는 듯이 뺑소니를 쳐 가버린다. 사망진단서니 뭐니 성이 가신 일이나 맡을까 보아서 그런지, 의사도 주검이란 싫어서 그런지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튿날 어둔 뒤에 김천 형님 내외가 딸까지 데리고 올라온 뒤에는 나도 모든 것을 쓸어 맡기고 사랑에 나와서 담배만 피우며 가만히 누웠었다. 미음 한 술 떠넣어 주려 나왔던가 생각하면 공연히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시체를 청주까지 끌고 내려간다는 데에는 절대로 반대하였다. 오일장이니 어쩌니 떠벌리는 것도 극력 반대를 하여 삼 일 만에 공동묘지에 파묻게 하였다. 처가 편에서 온 사람들은 실쭉해하기도 하고 내가 죽은 것을 시원히나 아는 줄 알고 야속해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내 고집대로 하였다.
그러나 초상중에 또 한 가지 나의 고통은 눈물이 아니 나오는 울음을 울라는 것이었다. 이것도 처가붙이끼리라든지 집안식구들까지 뒷공론을 하는 모양이나, 파묻고 들어올 때까지 나는 눈물 한 방울을 흘릴 수가 없었다.
“팔자가 사납거던 계집으로 태어날 거야. 어쩌면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누?”
하며 과부댁 누이가 마루에서 나더러 들어 보라는 듯이 한마디 하니까, 김천 형수가,
“남편네란 다 그렇지. 두구 보시구려. 달이 가시기도 전에 여학생을 끌어들이실 거니.”
하며 소곤거리는 것을 나는 안방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들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너도 내년 봄이면 졸업이지? 인젠 어떻게 할 셈이냐? 곧 나와서 무어라두 붙들 모양이냐? 더 연구를 하련?”
장사 지낸 지 이틀 만에 사랑에서 아침을 같이 먹다가, 조용한 틈을 타서 형님은 불쑥 이런 소리를 꺼냈다.
“글쎄, 되어 가는 대로 하죠. 하지만 무어든지 내 일은 내게 맡겨 두시는 게 좋겠죠.”
나는 이렇게 우선 한마디 해놓고 나의 계획을 대강 말하였다. 그리하여 자식은 요행히 잘 자라면 김천 형님이 데려가거나, 만일 김천 형님이 아들을 낳게 되면 큰집 형님이 데려가는 대신에, 내 앞으로 오는 것이 다소간 있을 것이니, 그 반분은 양육비와 교육비로 제공하되 장성할 때까지 김천 형님이 보관하기로 김천 형님과만 내약을 하여 두었다. 간단한 일이지마는 이렇게 수편하게 끝이 나니까, 한시름 잊은 것 같고 새삼스럽게 자유로운 천지에 뛰어나온 것 같았다.
그 동안 청명한 겨울날이 계속하더니 오늘은 또 무에 좀 오려는지, 암상스런 계집이 눈살을 잔뜩 찌푸린 것처럼 잿빛 구름이 축 처지고 하얗게 얼어붙은 땅이 오후가 되어도 대그락거리었다.(작고 단단한 물건들이 서로 맞닿는 소리가 잇따라 나다. 또는 그런 소리를 잇따라 내다.) 사랑은 무거운 침묵과 깊은 잠에 잠긴 것같이 무서운 증이 날 만큼 잠잠하다. 김의관은 자기가 칭원(원통함을 들어서 말함)이나 들을까 보아서 제풀에 미안하여 그러는지, 그저께 발인 때 잠깐 눈에 띈 뒤로는 보이지를 않는다.
우중충한 사랑방에 온종일 혼자 가만히 드러누웠으려니까 무슨 무거운 돌멩이나 납덩어리로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상처를 하였다 해서 별안간 섭섭하거나 설운 생각이 나서 그런 것도 아니요, 아이들이 없어서 조용한 집안이 초상 뒤에 한층더 쓸쓸하여진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혹시는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상은 떠들썩하며 무슨 새로운 희망에 타오르는 것 같건마는, 조선만은 잠잠히 쥐죽은 듯이 들어엎디어서 그저 파먹기나 하며 버둥버둥 자빠져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무거운 뚜껑이 꽉 덮여 있는 것 같아서 답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또다시 생각하면 아내가 죽어 가는 꼴을 마주 앉아 보았으니만치 어느 때까지 그것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고 지난 일이 곰곰 생각이 나서, 가엾은 추회(追懷)가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올라서 기분이 무거운 것도 사실이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죽거나 말거나 될 대로 되라고 냉담하였지마는, 파묻고 들어와 보니 역시 한구석이 허전한 것 같고 지난 일이 뉘우쳐지는 것도 있는 것이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가엾은 생각이, 동정하는 마음이 유연히 마음속에 괴어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에잇, 하여튼 한시바삐 빠져 달아나자!’
나는 부친과 형님이 들어오시면 오늘 저녁차로라도 떠나 버릴 작정으로 건넌방으로 건너가서 가방 속을 정리하고 앉았으려니까, 어느 틈에 왔던지 안에서 병화댁과 을라가 인사를 나왔다.
“얼마나 섭섭하시구 언짢으십니까?”
을라는 위문이라느니보다도 젊은 남편의 상처란 그저 그런 거라는 듯이 생긋 웃으며 다시 장가갈 치하를 하는 듯한 어조다.
“죽은 사람이야 가엾지만, 생자필멸이니 하는 수 없지요.”
나는 금방 비로소 죽은 아내가 가엾다는 생각을 하고 난 끝이라 도리어 정중히 이렇게 대거리를 하며, 사랑에 올라올 리는 없지마는 인사로 올라오라고 하였다.
“그래두 섭섭하시겠죠?”
을라는 이런 소리를 하며 말똥히 나의 기색을 살피려는 눈치다. ‘그래두 섭섭’이란, 인사답지 않은 인사지마는, 나는 웃고 말았다.
“언제 떠나십니까? 이번엔 꼭 같이 가세요.”
인사를 온 것이 아니라 동행하자고 맞추러 온 것 같은 수작이다.
나는 실없이 웃어 보였다.
“아, 그렇게 서두르실 게 뭐예요?”
을라가 놀라는 소리를 하려니까 한걸음 뒤처져 안에서 나온 병화가 다가오며,
“뭐, 오늘 떠나?”
하고 알은체를 하다가, 오늘 떠나든 말든 자기 집으로 가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발론을 한다.
“아무려면 오늘 떠나시게 되겠에요? 아무것도 없지만 잠깐 가시죠.”
병화댁도 옆에서 권한다. 자기네끼리 오늘 나를 찾아 인사도 하고 위로삼아 저녁 대접을 하려고 의논이 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한가로운 기분이 나지를 않았다. 또 그것이 병화 내외로서는 을라에 대한 자기네끼리의 입장을 명백히 하려는 기회를 만들려는 뜻인지도 모르겠고, 을라는 을라대로 딴생각이 있는지 모르나, 나는 그런 것이 도리어 성가신 생각이 났다. 하여간 이 사람들의 이러한 눈치로만도 나는 작년 이래로 지나치게 오해였던 것이 풀린 것은 기쁘고 마음이 거뜬하여진 것 같았다.
마루 끝에서 실랑이를 하다가 이 사람들을 돌려보낸 뒤에 나는 짐을 다시 싸기 시작하였다. 서류를 정리하다가 가방 속에서 나온 정자의 편지를 다시 한번 펴보았다. 이것은 초상중에 온 것을 대강 보고 집어넣어 두었던 것이다.
……과장(誇張) 없는 말씀으로, 저는 이제야 겨우 악몽에서 깨어나서 흐리터분하고 어리둥절하던 제정신이 반짝 든 듯싶습니다. 오랜 방황에서 이제야 제 길을 찾아든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신앙을 붙든 것도 아니요, 생활의 도표(道標)를 별안간 잡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언젠가 말씀처럼 고민은 역시 제 길, 저 살 길을 열어 주고야 말았는가 합니다. 반년 동안 레스토랑의 경험은 컴컴하고 끈적끈적한 생활이었습니다마는 그래도 저는 그 생활 속에서 새 길을 찾았는가 싶습니다. 인간 수양, 세간 수양이 조금은 되었는가 합니다. 만일 내가 지금 지향(志向)하는 길로 나갈 수 있다면 M헌에서의 반년 동안 얻은 문견이 무슨 보토(애써서 수행한 결과로 얻은 불토. 보신불인 아미타불이 사는 정토를 이른다.)가 될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나 그보다도 그 동안에 당신을 만나 뵈었다는 것은 저의 일생에 잊지 못할 새로운 기록이었겠지요.
정자의 편지는 저번 내가 부친 엽서의 답장이나, 매우 희망과 감격에 찬 기분으로 씌었다. 동경역에서 헤어질 때 경도로 갈 듯하다더니 역시 설〔正初〕전으로 M헌을 하직하고, 경도 고모 집으로 갈 작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모 집에를 가면 소원대로 이번 신학년부터는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여자부에 입학할 예정이라 한다. 아마 저의 본집과도 양해가 되어 학비도 나오게 되고, 제 자국에 다시 들어설 눈치인지 모르겠다. 저의 집이 경도, 대판에서 뱃길〔船路〕로 대여섯 시간이면 건너서는 사국(四國) 고송(高松)이라는 데에서 해물상을 한다는 말은 들었지마는, 경도에 가서 동지사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할 터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나는 동경서 떠나 올 제 목도리를 사다가 함부로 허리춤에 찔러 주고 온 것을 생각하고, 혼자 속으로 찔끔하는 생각이 들며 혼자 얼굴이 뜨뜻해 왔다. 물론 보통 카페 걸로 여긴 것은 아니지마는 좀 너무 함부로 한 것 같아야 열적은(좀 겸연쩍고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저의 집이 얼마나 잘살거나 그것야 알 바 아니지마는 대학까지 가려는 생각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인생은 오뇌(뉘우쳐 한탄하고 번뇌함)로 쌓아 올라가는 것인가 봅니다. 아니 번민, 오뇌로 쌓아 올라가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인가 합니다. 왜 이 말씀을 하는고 하니, 당신이 너무나 인생 문제와 사회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불만불평보다는 더 큰 것을 위하여 애쓰시는 것이 가엾어 그럽니다.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 번민하시고 오뇌하시기 때문에―---또 저는 거기에 경의를 느끼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그런 속된 말로가 아니라 괴로움을 알아야 사람은 거듭나는가 합니다. 일본의 남자들은 너무나 괴로움을 모릅니다. 역시 대륙적이라 할지? 괴로움을 꾹 참고 딱 버티고 섰는 거기에 깊이 있는 생활이 있는가 싶습니다.
이런 말도 씌어 있다. 다감하고 예민한 계집애가 연애에 실패하고 집안에서는 쫓겨나고 하니까 보통 여자와는 다르겠지마는,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 나라 남성―---일본 남성에게 반기를 들고 내게로 오겠다는 사연인가도 싶다.
끝에는 동경으로 가는 길에 부디 경도로 전보를 미리 치고 자기에게 들러 달라고 고모 집 번지수까지 씌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면 전과는 달라서 퍽 여러 가지 이야기할 것도 많을 것 같지마는 한편으로는 어색도 하고 겁도 나는 것이었다.
‘이번에 만나면 어떤 얼굴로 만날꾸?’
혼자 상상을 하여 보고는 큰 기대도 있고 큰 흥미도 있으리라고 궁리가 많았다. 갑갑하고 화가 나는 김에, 어서 가서 정자나 만나면 이 무거운 기분이 조금은 나을 것도 같다.
가방을 꾸려 놓고 어머님께 오늘 밤차로 떠나겠다고 여쭈러 안으로 들어가니까, 출입하였던 큰형님이 뒤미처 들어왔다.
“얘가 오늘 저녁으루 떠나겠다는구나! 내 이런 주책없는 애가 있니?”
모친으로서 생각하면은 딸자식이 죽은 것과는 다르다 하여도 둘째며느리를 열다섯부터 앞에서 키운 정이 있으니, 집이 한구석 텅 빈 것 같은데 아들마저 초상을 치르자마자 훌쩍 가버리겠다니 어이가 없는 것이다.
“별안간 이것은 무슨 소리냐? 가자면 나부터 가야지. 네가 왜 먼저 서두르느냐? 나는 아이들을 놀려 놓고 온 터 아니냐?”
하고 큰형님은 역정을 낸다. 나는 이 말에 찔끔하였다. 사실 경우가 틀렸다.
“너는 너무 기분주의야. 어쨌든 나는 내일 떠나야 하겠지만, 방학 동안은 좀 들어앉었으렴. 어머니께서 섭섭해 안 하시니.”
나는 떠나는 것을 무기 연기하기로 하였다.
사람이 죽어 나간 건넌방에는 안에서들 들어가 자기를 싫어하는 모양이기에 내가 자기로 하였거니와, 형님이 떠난 뒤로는 더구나 혼자 드러누워서 이생각 저생각에 전전반측(輾轉反側)하며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곰곰 생각하면 날이 갈수록 죽은 사람에게 역시 미안한 생각이 간절하였다. 더 산대야 하나 날 자식을 두셋 더 낳았을 것밖에 별수야 없겠지마는 좀더 따뜻이 해주었더면 하는 후회도 난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런 뉘우침도 결국에는 자기가 당장 고적하고 아쉬우니까 그런가 보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애인이라도 있다면 이생각 저생각 없이 뛰어 달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어린것을 기를 걱정은 없다 하여도 조만간―---삼사 삭 후에 졸업하고 나오면 역시 혼자는 어려우니 장가는 들어야 할 것이나 누구를 고를까?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기로 누가 선뜻 와줄까? 이런 걱정도 머리에 떠오른다.
‘을라……?’
나는 코웃음을 쳤다. 정자? 더구나 안 될 말이다.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말 말고라도 인제 겨우 부모의 노염도 풀려 가는 눈치인데, 또다시 나 같은 사람과 문제가 새판으로 생긴다면 피차에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다. 그것은 고사하고 정자 같은 사람은 우리집에 들어와서 살 수 없는 일이요, 장래를 생각하거나 민족적 감정으로나 문제도 아니 된다. 이것저것 실제 문제를 생각하면 그래도 아내가 더 살아 주었더면 내 몸 하나는 편하였던걸 하는 생각도 든다. 죽으면 죽으라지 또 계집이 없을까 하는 방자한 생각이 뉘우쳐지기도 하였다.
그는 하여간에 정자의 열심으로 써 보내 준 편지에 어느 때까지 모른 척하고 내버려두기도 안되어서 이튿날 이런 답장을 써 부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이 해결되어 가고 학교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하오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과거 반년간의 쓰라린 체험이 오늘의 신생(新生)을 위한 커다란 준비시기이셨던 것을 생각하면, 그 동안 나의 행동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한편으로는 내 생애에 있어서도, 다만 젊은 한때의 유흥기분만에 그치지 아니하였던 것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뒷날에 달콤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할 뿐이라면 이렇게 섭섭한 일도 없고, 당신은 또 자기를 모욕하였다고 노하실지도 모르나, 언제까지 그런 기쁨과 행복에 잠겨 있도록 이 몸을 안온하고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나도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될 책임을 느끼고, 또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야 할 의무를 깨달아야 할 때가 닥쳐오는가 싶습니다. 지금 내 주위는 마치 공동묘지 같습니다. 생활력을 잃은 백의(白衣)의 백성과, 백주에 횡행하는 이매망량(魑魅魍魎, 온갖 도깨비. 산천, 목석의 정령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같은 존재가 뒤덮은 이 무덤 속에 들어앉은 나로서 어찌 ‘꽃의 서울’에 호흡하고 춤추기를 바라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하나나 내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용기와 희망을 돋우어 주는 것은 없으니, 이러다가는 이 약한 나에게 찾아올 것은 질식밖에 없을 것이외다. 그러나 그것은 장미꽃송이 속에 파묻히어 향기에 도취한 행복한 질식이 아니라, 대기(大氣)에서 절연된 무덤 속에서 화석(化石)되어 가는 구더기의 몸부림치는 질식입니다. 우선 이 질식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소학교 선생님이 사벨(환도, 예전에, 군복에 갖추어 차던 군도(軍刀))을 차고 교단에 오르는 나라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나는 그런 나라의 백성이외다. 고민하고 오뇌하는 사람을 존경하시고 편을 들어 주신다는 그 말씀은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내성(內省)하는 고민이요 오뇌가 아니라, 발길과 채찍 밑에 부대끼면서도 숨이 죽어 엎디어 있는 거세(去勢)된 존재에게도 존경과 동정을 느끼시나요? 하도 못생겼으면 가엾다가도 화가 나고 미운증이 나는 법입넨다. 혹은 연민의 정이 있을지 모르나, 연민은 아무것도 구하는 길은 못 됩니다…… 이제 구주(歐洲, 동쪽은 우랄산맥ㆍ아랄해ㆍ카스피해ㆍ흑해 따위를 경계로 하여 아시아 대륙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아프리카 대륙과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대륙. 육대주의 하나이다.)의 천지는 그 참혹한 살육의 피비린내가 걷히고 휴전조약이 성립되었다 하지 않습니까. 부질없는 총칼을 거두고 제법 인류의 신생(新生)을 생각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소학교 교원의 허리에서 그 장난감칼을 떼어 놓을 날은 언제일지? 숨이 막힙니다.
우리 문학의 도(徒, 무리)는 자유롭고 진실된 생활을 찾아가고, 이것을 세우는 것이 그 본령인가 합니다. 우리의 교유(서로 사귀어 놀거나 왕래함), 우리의 우정이 이것으로 맺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입니다. 이 나라 백성의, 그리고 당신의 동포의, 진실된 생활을 찾아 나가는 자각과 발분(마음과 힘을 다하여 떨쳐 일어남)을 위하여 싸우는 신념 없이는 우리의 우정도 헛소리입니다.
나는 형님이 떠날 제 초상에 쓰고 남은 것이라고, 동경 갈 노자와 함께 책값이며 용돈으로 내놓고 간 삼백 원 속에서 백 원을 이 편지와 함께 부쳐 주었다. 혹시는 다른 의미나 있는 줄로 오해할 것이 성가시기도 하나, 동경에서 떠날 제 선사받은 것도 있으려니와, 정자의 새출발을 축하하는 의미라고 한마디 쓰고, 다소 부조가 될까 하여 보낸 것이다. 실상은 동경 가는 길에 들르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시 하였기 때문에, 아주 이것으로 마감을 하여 버리고, 나도 이 기회에 가뜬한 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한 열흘 더 있다가 졸업 논문도 있고 아무래도 학교 일이 걱정이 되어서 떠나고 말았다. 정거장에는 큰집 형님, 병화 내외, 을라 들이 나왔다. 을라는 입도 벌리지 않고 오도카니 섰고, 병화 내외도 플랫폼의 보꾹에 매달린 시계만 쳐다보며 선하품을 하고 섰었다. 그러나 병화의 얼굴에는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모든 오해를 풀고, 인제는 안심하였다는 듯이 화평한 기색이 도는 것 같았다.
차가 떠나려 할 제 큰집 형님은 승강대에 섰는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며,
“내년 봄에 나오면 어떻게 속현(續絃, 거문고와 비파의 끊어진 줄을 다시 잇는다는 뜻으로, 아내를 여읜 뒤에 다시 새 아내를 맞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할 도리를 차려야 하지 않겠나?”
하고 난데없는 소리를 하기에, 나는,
“겨우 무덤 속에서 빠져나가는데요? 따뜻한 봄이나 만나서 별장이나 하나 장만하고 거드럭거릴 때가 되거든요……!”
하며 웃어 버렸다.
('만세전', 수선사, 1948)
핵심정리
- 갈래 : 중편 소설, 사실주의 소설, 여로형 소설
- 배경 : 3.1 운동 전, 1918년 겨울(시간). 동경과 서울, 오가는 열차 안(공간)
- 성격 : 사실적. 현실 비판적, 자조적
- 문체 : 만연체
- 구성 : 전체 9장으로 여행의 일정을 따라 전개되는 기행 형식의 순차적 구성, 여로형 원점 회귀 구조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제재 : 일제시대 암울했던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
- 주제 : 일제 강점 하에서 억압받는 우리 민족의 비참한 생활상. 지식인의 눈으로 바라본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현실과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현실과 소시민적인 지식인의 현실 인식
- 구성
- 발단 : 동경 유학생인 ‘나’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 준비를 함.
- 전개 : ‘나’는 일본의 여러 술집을 전전하면서 답답한 심정을 드러냄.
- 위기 : ‘나’는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 안에서 조선인을 멸시하는 일본인에 분개함.
- 절정 : 부산, 김천을 거쳐 서울 집에 도착하나, 답답한 분위기로 가득함
- 결말 : 아내가 죽자 ‘나’는 무덤 같은 현실에서 도망치듯 다시 일본으로 돌아감.
인물
- 나 : 이인화. 동경 W대학 문과 재학생으로서 자조적(自嘲的) 자기 분석에 철저한 인물. 죽어 가는 아내 때문에 귀국하지만 그 죽음 앞에 눈물조차 흘리지 않으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겨우 무덤 속을 빠져 나간다.'라고 토로하는 문학 지망생이자, 깊은 허무주의 성격의 소유자이자 소극적 비판자, 현실 관찰자, 자조적 자기 분석자로 조선으로의 여행은 현실의 부조리함에 대해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 주인공은 염상섭이 현실을 대하는 한계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현실을 조소하고 환멸을 하지만 그러한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노력이나 행동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환멸은 주인공의 도피로 이어지고, 이는 당대 지식인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염상섭 소설의 전망 부재라는 한계점을 노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김천 형님 : 소학교 훈도(교사), 보수적이고 전형적인 인물
- 아내 : 보수적이며 순종적인 여인으로 남편 이인화의 무관심 속에 유종(乳腫)으로 죽는 시대의 희생양
- 아버지, 형 : 고루한 사고 방식을 가진 구시대의 보수적 인물
- 정자 : 카페의 여급. '나'의 애인으로서 아내와 대비되는 이지적이고, 진취적인 여인.
- 김의관 : 사기꾼, 일본인 앞잡이로 변신하여 구차하게 살아가고 있는 인물
- 병화 : 이인화와 가깝게 지내는 인물로 큰집 형님의 이복 동생
- 을라 : 유학생, 음악 전공자
출전 : 신생활(1922년)
- 특징 :
①만연체와 복문(두 개 이상의 절(節)로 된 문장)을 사용하여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한국의 현실을 사실적이며 객관적으로 제시함.
② 여로형 원점 회귀 구조
③ 사실주의적 경향, 자조, 혐오의 어조
④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 주된 양상
⑤ 당시 지식인들의 나약하고 무기력한 의식 구조를 보여줌.
⑥ 카메라 시점으로 이동하며 관찰하는 듯한 전개를 취함.
- 줄거리
조선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 겨울, 동경 W대학 문과에 재학 중인 ‘나’(이인화)는 서울에 있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기말시험도 포기한 채 귀국한다. 동경을 떠나면서 재킷이며 선물도 사고, 이발도 하고, 바에 들러 여급들과 수작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한다. 동경역에서는 여급 정자와 이별을 하고 고베에서는 을라(乙羅)라는 여자 친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 귀국하기 위해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면서부터 검색을 당하고 감시를 받게 되는 수모를 겪으면서 대사회적인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배 안에서 일본인이 조선인을 멸시하는 것을 보면서 분개하게 되고, 민족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조선에 도착해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과정과 고향에서 지내는 중에 ‘나’는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 및 습관에 갇혀 생활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보고 답답해한다. 스물 두셋의 책상도련님인 나 이인화(李寅華)는 탁상공론이 아닌 실인생·실사회의 이면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형사의 심문에 시달리며 부산에 내려서도 차시간까지 조선거리 구경을 나섰던 나는 식민지 도시의 일제에 의한 경제적 침탈과 조선인의 몰락과 이주를 목격한다. 이러한 상황은 김천의 보통학교 훈도인 형님과 주변 인물들의 몰락을 통하여, 서울까지 가는 기차와 대전역에서 만난 군상들의 찌든 모습 속에서, 서울에서는 정치열과 명예욕에 들뜬 아버지와 이를 부추기는 김의관, 종손으로 무위도식하는 종형 등을 통하여 차례로 발견된다. 가족제도로 대표되는 봉건적 윤리 의식, 권력에 대한 열망과 굴종으로 나타나는 관료전제적 사고가 식민지 사회의 비리와 어울려 빚는 비극을 ‘무덤’으로 인식하면서 자전적인 성찰의 양상을 드러내게 된다.
부산에 도착해서 김천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여정에서 ‘나’는 우리 민족이 암담한 현실에 빠지게 된 것이 단순히 일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봉건적인 무지함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식민지 지배에 굴종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우리 민족 개개인에게도 심각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울의 집에 와 보니, 현대 의학으로는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유종(乳腫)을 앓고 있는 아내를 방치한 채, 아버지는 술타령이나 하면서 재래식 의술에 맡겨 결국 아내를 죽게 만든다. 집안에는 출가했다가 과부가 되어 돌아온 누이, 종손(宗孫)인 종형, 그 밖의 과객들이 득실거려 도무지 안정을 얻을 수 없다.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을 고쳐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불만과 원만하지 못했던 부부 관계 등으로 '나'의 마음은 음울하다.
드디어 아내는 죽고 냉연한 자신에게 가책하며 초상을 치른다.아들 중기는 형님에게 맡기고 다시 유학 길에 오르려 하지만, 집안 식구들의 만류로 발이 묶였고, 재혼(再婚)을 하라는 형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상중(喪中)에 일본에 있는 정자의 간절한 편지를 받는다. 새 길을 찾아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에게 새 출발을 축하한다는 편지와 함께 돈 백 원을 보낸다. ‘나’는 자신부터 자각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면서 구더기가 들끓는 공동 묘지 같은, 답답한 조선을 떠나 진실된 삶을 찾기로 결심한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사랑보다 연민이 앞섰던 가련한 아내의 죽음 또한 구태의연한 인습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탈출하듯 다시 동경으로 떠난다.
동경에서 출발하여 부산과 김천 등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고, 다시 동경으로 떠나는 원점 회귀형의 여로 구조를 통해 주인공이 사회 현실을 인식하면서 내면적 의식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동경 → 서울 → 동경의 여로와 주인공의 의식을 대비하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만세전'의 의미
'만세전’은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전’을 의미하는데, 3․1 운동 직전인 1918년의 동경과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의 눈에 비친 당대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나'는 당대의 식민지 상황을 무덤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의 암담한 현실을 냉정하게 비판한다. '나'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치하에서 순종하면서 '구더기'같이 살아간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다음 해에 일어난 우리 민족의 잠재력의 표출인 삼일운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현실적 한계성을 비판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의 제목이 '만세 전' 다시 말해서 '삼일운동 직전'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전체적인 색깔로 보자면 흐릿한 회색으로 볼 수 있다. 원래 제목은 '묘지'였다. 이는 3․ 1 운동 직전의 식민지 조선 현실에 대한 은유로, 작가는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비참한 민족의 현실을 고발하려 한 것이다.)
- '만세전'의 의의
주인공의 존재와 의식은 식민지 조국과 그 조국 가운데서도 가장 수탈되는 계층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갖게 한다. 그러나 '만세전' 에서 놀라운 점은 주인공 스스로가 규정하고 있는 의식의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육안과 심안이 식민지 조국의 음화(陰畵)를 남김없이 포착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하나의 사소한 정경을 통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제시되어 있고 비근한(흔히 주위에서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알기 쉽고 실생활에 가까운) 디테일의 제시가 전형적인 상황과 관련을 맺고 있다.
주인공의 다소간 유탕(遊蕩)적이고 개인적인 안목은 연락선 승선차 하관에 이르면서부터 자기가 발을 디디고 선 현실에 대한 자각적, 비판적인 안목으로 변한다. 자아 중심적인 안목은 사회 속의 나를 자각하고 그것이 사회에 의해서 규제되어 있음을 의식하는 안목으로 바뀐다. 속에 잠자고 있던 민족의 연대의식을 다시 느끼는 것이다.
사회를 구조적으로 파악해서 입체감 있게 제시한다는 점에 있어 미흡감은 금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이 나라 리얼리즘의 정상적 수확의 하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전형적인 국면과 인물을 비근한 장면에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정의 뒷골목을 일회적인 현장성만으로 그리고 있는 채만식, 박태원 등의 이른바 세태소설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출처 : 유종호, '만세전' 과 '일대의 유업' 의 거리)
- 구조
이 작품은 주인공이 동경에서 서울로 왔다가 동경으로 되돌아가는 여로가 중심이 되어 있다. ‘동경 → 동경서 신호(神戶) → 하관(下關)에서 배를 탐 → 연락선으로 부산 도착 → 부산에서 술집을 기웃거림 → 부산에서 출발, 김천을 거쳐 서울 도착 → 서울집의 분위기 → 서울에서 배회 → 아내의 죽음, 동경으로 출발’ 이라는 원점회귀(原點回歸)의 구조로 되어 있다.
- 묘지의 의미
당시 현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만으로는 그러한 현실에 대한 주인공의 충격과 고뇌를 극화시키기에 불충분하다. 어느 소설이든 중심이 되는 상징적 소재를 갖고 있는데, 여기서는 ‘묘지’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묘지’란 삶의 생기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노예적 인물들과 억압적 분위기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처참한 의식 세계를 모두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의 삶은 바로 죽음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묘지’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가로지르고 있다.
주인공은 동경에서 유학하다가 귀국해서 식민지의 암울한 현상들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총칼로 위협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뚜렷한 죄도 없이 결박당하고, 취조 당하며, 주눅들고, 비굴한 웃음을 웃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비인간적 상황이 뼈저리게 다가온 것은 그가 유학하고 있던 동경의 상황과 대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소학교에서 선생들이 강단에까지 칼을 차고 올라가는 당시의 억압적인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있으며, 그러한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가는 정황을 ‘공동 묘지’ 라고 표현하며 그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다.
- 염상섭 작품의 특징
① 자연주의적 인생관과 사실주의적 창작 태도가 일관됨
② 빠른 사건의 진행보다는 현실의 느린 전개
③ 무거운 문어체의 문체
④ 즐겨 다루는 대상은 생존의 위협을 받진않으나 어느 정도 교육을 받고 가난에 시달리는 중간 계층
이해와 감상
일본 유학생인 주인공 ‘이인화’의 귀국 여정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현실을 제시하고 비판하려는 사실적인 구성축이다. 여기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구더기가 들끓는 무덤’으로 상징된다. 다른 한 축은 그러한 현실을 발견해 나가는 ‘이인화’ 자신의 각성 과정이라는 계몽적인 구성축이다. 여행 이전에 그는 자기 존재에 대해 뚜렷한 자각 없이 추상적인 고민 속에서 자존심을 찾던 인물이지만, 여정에서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 점차 사회적인 인식이 확대되면서 좀더 진정한 자아 각성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준다.
곧 이인화는 자신도 ‘구더기’ 같은 그들과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자신만이라도 봉건적 무지함이나 욕망을 벗어나 진실하고 각성된 삶을 살 것을 결심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구성축을 보면 이 작품이 우리 소설사에서 개인의 존재와 사회적 현실을 통합하여 보여 주는 사실주의적 근대 소설의 첫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원제는 ‘묘지(墓地)’로, 1922년 7월부터 9월까지 ≪신생활 新生活≫에 연재되다가 잡지의 폐간과 함께 3회 연재로 중단되었다. 1924년 4월 6일부터 ≪시대일보 時代日報≫가 창간되면서 제목을 ‘만세전’으로 바꾸어 개재하였다. 같은 해 6월 1일까지 59회로 완결되자 이 해 8월 고려공사(高麗公司)에서 저자 이름을 양규룡(梁奎龍)으로 하여 개작을 거쳐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1948년 2월에 다시 개작되어 수선사(首善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원제인 ‘묘지’가 위축된 당대의 삶을 은유하듯이 3·1운동 이전의 사회 현실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동경(東京)-고베(神戶)-시모노세키(下關)-부산-김천-대전-서울로 이어지는 기행적 구조를 배경으로 시대정신을 투영한 식민지 사회의 관찰을 노정에 따라 진행시킴으로써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만세전〉은 식민지 시대 빼어난 문학작품의 하나로 작가로서 염상섭의 위치를 굳혀준 작품이며, 한국 현대소설사상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의 걸작 〈삼대 三代〉(1931)의 준비 과정에 속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사이에 안의 형편과 실상을 목격하고 깨달아간다는 설정을 통하여 식민사회의 병폐를 식민지 지배국의 상황과 대비시켜 극명하게 드러내었다. 이러한 이원적 대립은 여정의 단계에 맞추어 점층적으로 전개됨으로써 여러 국면이 ‘무덤’으로 은유되는 한 상황으로 쉽게 용해될 수 있었다.
반면 묘지로부터의 탈출이 지향하는 해방의 공간이 일본이라거나, 진상을 목격하면서도 이면과 원인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추구하는 자유가 개인적인 것에 한정된다는 등의 한계가 지적되기도 하였다. 주인공은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도 곧장 귀국하지 않았고, 귀국 중에 민족의 현실에 분노를 느끼고 울분을 느끼기도 하지만, 아내가 죽자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동경으로 떠나고 만다. 또, 주인공은 무덤 속을 빠져나간다고 하면서, 당시 조선의 상황을 공동 묘지로 파악하고 현실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이러한 주인공의 의식은 다분히 허무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허무주의는 일본의 수도인 동경을 탈출구로 삼은 한계는 있으나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공동묘지나 아내의 죽음 등의 문제가 1920년대 한국문학사의 맥락에서는 한국 낭만주의의 연장선 위에서 설명된다고 할 때 그러한 인식을 사회 진단적 의미로 확대시킨 데에서도 그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廉想涉硏究(金鍾均, 高麗大學校出版部, 1974), 한국현대소설사(이재선, 弘盛社, 1979), 廉想涉文學硏究(권영민 編, 民音社, 198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 한계전 외 4인 공저 문학 교과서)
염상섭(廉想涉, 1897∼1963)
염상섭(廉想涉, 1897년 8월 30일 ~ 1963년 3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중령이다.(사진 : 크렌체) 한성부 출생으로 본관은 파주(坡州)이며 아호(雅號)는 제월(霽月), 횡보(橫步)이다.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 염인식(廉仁湜)의 손자이며, 가평 군수 염규환(廉圭桓)의 8남매 중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주(慶州) 김씨, 부인은 의성(義城) 김씨 문중 출신이던 김영옥(金英玉)이다.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1907년 관립사범부속보통학교(官立師範附屬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반일 학생으로 지목되어 중퇴하였다.
1912년 보성소·중학교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우여곡절 끝에 경도(京都) 부립제2중학을 졸업하고 1918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예과에 입학하였다. 한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인 그는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 유학 시절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됐다. 재학 중 대판(大阪)에서 자신이 쓴 〈조선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시위를 주동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금고형을 받고 학교는 중퇴한 채 ≪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정치부기자가 되어 1920년 귀국하였다.
귀국한 후 1920년 《폐허》동인에 가담해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한때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지만, 이후 줄곧 신문·잡지 편집인으로 생활하면서 소설·평론에 전념하였다. 문예전문지 ≪폐허 廢墟≫의 동인 활동을 계기로 습작기를 청산하고 출세작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를 발표하면서 한국 근대문학의 기수가 되었다. 1921년 발표한 단편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 는 한국의 첫 자연주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동인, 현진건과 함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을 이 땅에 뿌리내린 작가로서 큰 공적을 남겼다.
이어 중편소설 〈만세전〉(1922)을 집필, 연재함으로써 그의 뛰어난 현실 인식이 확인되었으며,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저항적 반일감정을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다가 다시 일본에 건너갔으나 별 성과 없이 귀국하여 1929년 결혼을 하고 생활의 안정을 찾아 장편에 전념하였다.
1936년에 매일신보의 정치부장, 만선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946년에는 경향신문의 창간 편집국장을 지내는 등 신문기자로도 많이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해군 소령으로 임관되어 해군본부 정훈감실에서 편집과장으로 근무했으며, 1954년 서라벌 예술대학 학장으로 취임했다.
대표적인 장편소설로는 〈삼대〉, <만세전>, <두 파산> 등이 있으며, 단편으로는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있다. 만세전은 천재교육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무화과 無花果〉·〈백구 白鳩〉 등과 〈사랑과 죄〉·〈이심 二心〉·〈모란꽃 필 때〉 등 우수한 장편을 쓰기도 하였다.
단편 역시 초기에는 암울, 침통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었으나 사회 전반을 다루는 경향으로 나가면서부터는 보다 치밀한 관찰과 객관적 기술을 보임으로써 명실공히 리얼리즘적 경향을 뚜렷이 보이게 되었다.
〈제야 除夜〉·〈해바라기〉·〈금반지〉·〈고독〉·〈조그만 일〉·〈두 출발〉·〈남충서 南忠緖〉 등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1932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1932)를 읽은 염상섭은 그것이 늦장가를 간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해 동인과 설전을 벌였다. 당대 문단을 주도했던 두 사람은 이 일로 무려 15년 동안이나 관계를 끊고 살았다. 일각에서는 염상섭의 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고, 김동인은 그 무렵에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했던 것이다.
일제 말기 10여 년(1936∼1945)은 만주·신경에 살면서 ≪만선일보≫ 편집국장·회사 홍보담당관 노릇을 하면서 절필하였고,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다시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6·25중에는 해군 소령으로 입대하여 반공 전선에 나가 휴전이 되는 해까지 정훈일을 보았다.
제대 후 한때 서라벌예술대학장으로 있기도 하였지만, 창작에 정진하여 병중에도 많은 작품을 집필하였다. 〈삼팔선〉·〈임종〉·〈두파산〉·〈굴레〉 등 단편과 〈효풍〉·〈난류〉·〈취우〉·〈새울림〉·〈미망인〉 등의 장편은 우수작으로 평가된다.
1963년 3월 14일 성북동 자택에서 향년 67세로 직장암으로 작고할 때까지 완성된 본격 장편 20여 편, 단편 150편, 평론 100여 편 이외에 기타 수필 등 잡문 200여 편의 글을 남기었다. 그 삶과 문학의 특징은 민족적이었고 전통적이었으며 야인적이었다. 식민지사회를 투철히 인식하면서 당대 사회의 진실을 묘사하였다.
또 전통적인 사실적 문체인 내간체를 계승, 발전시켜 자신의 문학의 골격으로 삼았고 서구 근대 물질문명을 점진적으로 수용하면서 보수적인 자세를 보였다.
윤리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두어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 점 등은 높이 평가된다. 더욱이, 리얼리즘 문학을 확립하고 식민지적 현실을 부정하고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 점은 돋보인다.
≪참고문헌≫ 廉想涉硏究(金鍾均, 高麗大學校出版部, 197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이 작품은 염상섭의 1920년대 중반 이후의 작품 경향인 리얼리즘 소설의 구축에 교량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주인공이 인식한 현실은 포악한 무단 정치, 가혹한 수탈, 무자각(無自覺) 상태의 조선 민중, 구태 의연한 가족 제도, 겉멋이 든 신여성, 의리 없는 친일 군상 등이 뒤섞여 우글대는 이른바 ‘구더기가 끓는 묘지’로 묘사되고 있다.
소설은 여타 장르와 달리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리얼리즘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 소설의 목표이다. ‘만세전’ 또한 사실주의적인 기법을 통해 리얼리즘 소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앞 부분에서 신지식인인 주인공과 농촌 청년은 여러 측면에서 대비되어 형상화되고 있다. 작자는 유학생 청년과 농촌 청년을 대비시킴으로써 식민지 현실의 양면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유학생이나 새로운 근대적 학문을 배운 사람들은 비록 일본인들에게 대우를 받지만 떳떳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여전히 근대화되지 못한 농촌 사람들을 무시하며 계층적인 우위감을 확보하고자 한다. 옛 전통을 유지해나가는 사람들은 무시당하면서도 아예 그러한 부류로 인정받는 편리함 속에서 소외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대개 그들은 개화적인 삶에 참여할 경제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식민지 현실의 노예적 참상과 새로운 계층화 현상이다. 사회 하층민들의 노예화는 그들을 자포자기하도록 만들었으며, 상대적으로 그들보다 우위에 있는 지식인, 학생들은 그렇게 만드는 식민지 세력에 대해 분노하거나 저항하고, 또는 좌절하는 양면성(兩面性)을 띠게 된다. 지식인 중 일부는 오히려 그러한 분위기에 편승해서 하층민에 비해 우월감을 앞세우고 일제에 아부하며 야합하기도 하였다.
주인공은 정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 문학의 도는 자유롭고 진실된 생활을 찾아가고, 이것을 세우는 것이 그 본령인가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편지에서 주인공이 ‘우리 문학의 도' 라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문학자라고 할 수 있으며, 문학자로서 주인공은 문학을 통해 진실에 대한 자각과 의기를 북돋우려 함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소학교 선생님이 '사벨(환도)' 을 차고 교단에 오르는 나라' 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주인공은 나라의 백성, 동포의 '진실된 생활을 찾아 나가는 자각(自覺)과 발분(發憤)을 위하여 싸우는 신념(信念)'을 갖고자 한다. 이와 같은 주인공의 생각에 비추어 볼 때 문학은 생활의 진실을 기록하여 현실에 대한 인식을 하게 만들며, '발분(發憤)', 즉 마음을 굳게 먹고 힘을 내어 싸울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지학사,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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