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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전문 104

양귀자 '한계령' 전문

한계령 양귀자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탁하고 갈라져 있었다. 얼핏 듣기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 나는 곧 기억의 갈피를 젖히고 음성의 주인공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게 전화를 건 적이 있는 그런 굵은 목소리의 여자는 두 사람쯤이었다. 한 명은 사보 편집자였고 또 한 명은 출판인이었다. 두 사람 다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활동적이고 거침이 없는 여걸이 아니겠냐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터였다. 두 사람 중의 하나라면 사보 편집자이기가 십상이라고 속단한 채 나는 전화 저편의 여자가 순서대로 예의를 지켜가며 나를 찾는 것에 건성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가스레인지를 켜놓고 무언가를 끓이고 있던 중이어서 내 마음은 급하기 짝이 없었다. 급한 내 마..

문학/소설전문 2021.01.30

전광용 '사수' 전문

사수(射手) 전광용 내가 언제 이런 곳에 왔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분명 경희임에 틀림없다. 겨드랑이에서 체온계를 빼려는 손을 꼭 잡았다. 손가락이 차다. 경희의 손은 이렇게 냉랭한 적이 없었다. 따뜻하던 지난날의 감촉이 포근히 되살아온다. 눈을 떴다. 그러나 아직도 머리는 안개가 서린 듯 보야니 흐리멍덩하다. “정신이 드나 봐….” 경희의 음성이 아니다. 이렇게 싸늘하지는 않았다. 간호원이다. 새하얀 옷이 소복 같은 거리감을 가져온다. 꿈인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따져 보아도 꿈은 아닌 성싶다. 내 숨소리가 확실히 거세게 들려온다. 틀림없이 심장이 뛰고 있다. 총소리가― 그것도 다섯 방의 총소리가 거의 같은 순간에 울리던 그 총소리가― 아직도 고막에 달라붙어 있다. B가 맞은 건지 내가 맞은 건지 ..

문학/소설전문 2021.01.30

강경애 '인간 문제' 전문

인간 문제 강경애 이 산등에 올라서면 용연 동네는 저렇게 뻔히 들여다볼 수가 있다. 저기 우뚝 솟은 저 양기와집이 바로 이 앞벌 농장 주인인 정덕호 집이며, 그 다음 이편으로 썩 나와서 양철집이 면역소며, 그 다음으로 같은 양철집이 주재소며, 그 주위를 싸고 컴컴히 돌아앉은 것이 모두 농가들이다. 그리고 그 아래 저 푸른 못이 원소(怨沼)라는 못인데, 이 못은 이 동네의 생명선이다. 이 못이 있길래 저 동네가 생겼으며, 저 앞벌이 개간된 것이다. 그리고 이 동네 개 짐승까지라도 이 물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못은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무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동네 농민들은 이러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 전설을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으며, 따라서 그들이 믿는 신조로 한..

문학/소설전문 2021.01.30

최인훈 '광장' 전문

광장 최인훈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중립국으로 가는 석방 포로를 실은 인도 배 타고르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삼천 톤의 몸을 떨면서, 물건처럼 빼곡이 들어찬 동지나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려져 간다. 석방 포로 이명준(李明俊)은, 오른편의 곧장 갑판으로 통한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 배 뒤쪽 난간에 가서, 거기에 기대어 선다.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켜댔으나 바람에 이내 꺼지고 하여, 몇 번이나 그르친 끝에,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오른팔로 얼굴을 가리고 간신히 댕긴다. 그때다. 또 그 눈이다. 배가 떠나고부터 가끔 나타나는 허깨비다. 누군가 엿보고 있다가는, 명준이 휙 돌아보면, 쑥, 숨어 버린다. 헛것인 줄 알게 되고서도 줄곧 멈..

문학/소설전문 2021.01.30

이태준 '돌다리' 전문 및 해석

돌다리이 태 준   정거장에서 샘말 십 리 길을 내려오노라면 반이 될락말락한 데서부터 샘말 동네보다는 그 건너편 산기슭에 놓인 공동묘지가 먼저 눈에 뜨인다.창섭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까지 바라보았다.봄에 올 때 보면, 진달래가 불붙듯 피어 올라가는 야산이다. 지금은 단풍철도 지나고 누르테테한 가닥나무들만 묘지를 둘러, 듣지 않아도 적막한 버스럭 소리만 울릴 것 같았다. 어느 것이라고 집어 낼 수는 없어도, 창옥의 무덤이 어디쯤이라고는 짐작이 된다. 창섭은 마음으로 '창옥아' 불러 보며 묵례를 보냈다.다만 오뉘뿐으로 나이가 훨씬 떨어진 누이였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자기가 마침 방학으로 와 있던 여름이었다. 창옥은 저녁 먹다 말고 갑자기 복통으로 뒹굴었다. 읍으로 뛰어들어가 의사를 청해 왔다. 의사는 ..

문학/소설전문 2021.01.30

박완서 '우황청심환' 전문

우황청심환 박완서 가까스로 잠이 좀 오려는데 또 그놈의 소리가 났다. 주우지 니집뿐, 주우지니집뿐…… "몇 시라는 소리유?" 노파는 물었다. 남궁씨는 되는 대로 대답했다. 기계로 합성 한 음향이면서도 일본말 특유의 교성이 알려주는 시간은 어차피 지금 이 지점의 시간과는 무관할 터였다. 노파의 시계가 친절을 다해 가르쳐 주는 시간이 노파가 떠나 온 여행지의 시간인지도 그는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비행기 속이었다. 노파는 태엽을 누르면 현재의 시간을 말로 알려 주는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백내장 수술 후 시력이 밤낮이나 가릴 정도로 떨어지고 나서 아들이 일본에서 사다 준거라고 했다. 시간을 알려 주는 소리도 물론 일본말이었다. 못봄을 못알아들음으로 바꿔 가지고 으스대는 노파가 남궁씨는 지겨웠다. 말하..

문학/소설전문 2021.01.30

손창섭 '비 오는 날' 전문

비 오는 날 손창섭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東旭)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1)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東玉)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에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이 오뉘2)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접어 있는 인생들이었다. 1)영화 필름이나 슬라이드 따위를 비추는 흰 막. 스크린. 은막 2) '오누이'의 준말. 오라비와 누이. ..

문학/소설전문 2021.01.19

이태준 '복덕방' 전문

복덕방 이태준 철석, 앞집 판장 밑에서 물 내버리는 소리가 났다. 주먹구구에 골독했던 안초시에게는 놀랄 만한 폭음이었던지, 다리 부러진 돋보기 너머로, 똑 모이를 쪼으려는 닭의 눈을 해가지고 수챗구멍을 내다본다. 뿌연 뜨물에 휩쓸려 나오는 것이 여러 가지다. 호박 꼭지, 계란 껍질, 거피해 버린 녹두 껍질. “녹두 빈자떡을 부치는 게로군, 흥…….” 한 오륙 년째 안초시는 말끝마다 ‘젠―장……’이 아니면 ‘흥!’ 하는 코웃음을 잘 붙이었다. “추석이 벌써 낼 모레지! 젠―장…….” 안초시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었다. 기름내가 코에 풍기는 듯 대뜸 입 안에 침이 흥건해지고 전에 괜찮게 지낼 때, 충치니 풍치니 하던 것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래윗니가 송곳 끝같이 날카로워짐을 느끼었다. 안초시는 그 날카..

문학/소설전문 2021.01.19

박태원 '천변풍경' 전문 일부

천변풍경 박태원 이발소의 귀여운 소년 재봉이는, 저보다 나이도 어리고, 이를테면 시골뜨기인 창수와 같은 아이가, 종로 구락부에서 놀고 지내며 달에 십 원씩이나 월급을 받는 것에도 이제는 이미 그다지 유혹을 느끼지는 않고, 젊은 이발사 김 서방과 밤낮 쌈을 하면서도 좀처럼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다. 칼라 머리는 아직 만지지를 못하지만, 막깍는 것은 기계 놀리는 솜씨도 익숙하였고, 면도질은 또 아주 선수여서, 이제 얼마 안 가서 이발사 시험에 어렵지 않게 합격되리라는 것은 이 집 주인의 의 말이다. 어느 날, 그는 개천가에서 동네 아이들이 난데없이 “아하하하.” 웃고 떠드는 소리에 놀라, 부리나케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개천 속을 들여다보는 아이들 둥 뒤에 가 포목전 주인이 맨머리 바람에 임바네쓰를 두르고, ..

문학/소설전문 2021.01.19

이광수 '무정' 전문

이광수 무정 1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시 사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려쪼이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장로의 딸 선형(善馨)이가 명년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교사로 고빙하여 오늘 오후 세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라. 이형식은 아직 독신이라, 남의 여자와 가까이 교제하여 본 적이 없고 이렇게 순결한 청년이 흔히 그러한 모양으로 젊은 여자를 대하면 자연 수줍은 생각이 나서 얼굴이 확확 달며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남자로 생겨나서 이러함이 못생겼다면 못생겼다고도 하려니와, 여자를 보면 아무러한 핑계를 얻어서라도 가까이 가려 하고, 말 한마디라도 하여 보려 하는 잘난 사람들보다는 나으리라. 형식은 여러 가지 ..

문학/소설전문 2021.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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