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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전문 104

서정인 '강(江)' 전문

강(江) 서정인 "눈이 내리는 군요." 버스 안. 창쪽으로 앉은 사나이는 얼굴빛이 창백하다. 실팍한 검정외투 속에 고개를 웅크리고 있다. 긴 머리칼은 귀 뒤로 고개 위에 덩굴 줄기처럼 달라붙었는데 가마 부근에서는 몇 낱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섰다. "예. 진눈깨빈데요." 그의 머리칼 위에 얹힌 큼직큼직한 비듬들을 바라보고 있던 옆엣 사람이 역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목소리가 굵다. 그는 멋내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얀 목도리가 밤색 잠바 속으로 그의 목을 감싸 넣어 주고 있다. 귀앞머리 끝에는 면도 자국이 신선하다. 그는 눈발 빗발 섞여 내리는 창밖에 차츰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다. 버스는 이미 떠날 시간이 지났는데도 태연하기만 하다. "뭐? 아, 진눈깨비! 참 그렇군." 그들 등 뒤에서 털실로 ..

문학/소설전문 2021.01.19

김학철 '종횡만리' 전문 일부

종횡만리 김학철 1. 장사보위전(1938) 적군의 발광적인 공격을 일단 물리치고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처참한 수라장으로 벼해 버린 야산 밑에서, 조선의용군의 분대장 양수봉이 전장의 뒷거둠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포탄에 중동이 뭉청 끊겨져나간 나도밤나무 등걸에다 목덜미만 거북살스레 기댄 채 몸져누워 있는, 중상을 입은 듯 싶은 일본 병사 하나를 발견하였다. 양수봉은 워낙 천품이 너그러운지라 그 부상한 적병을 아군의 붕대소로 데려가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곧 행동으로 넘어갔다. 부상한 적병은 가까이에 인기척을 느낀 모양으로 힘없이 감았던 눈을 거슴츠레 떴다. 네 눈이 마주쳤다. 양수봉이 저도 모르게 무춤 발을 멈추는 것을 보자 그 일본 병사는 성한 손으로 피에 젖은 군복의 호주머니를 더듬었다. 그 동작을 양..

문학/소설전문 2021.01.14

강소천 '꿈을 찍는 사진관' 전문

꿈을 찍는 사진관 강소천 따사한 봄볕은 나를 자꾸 밖으로 꾀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어젯밤만 해도 내일은 일요일이니 어디 나가지 말고, 방에 꾹 들어박혀 책이라도 읽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정작 조반을 먹고 나니, 오늘은 유달리 날씨가 따뜻했습니다. 나는 스케치북과 그림 물감을 가지고 뒷산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굉장히 그림을 잘 그리거나 그림에 취미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빈손으로 가기는 싫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들고 앉아 그 따사한 봄볕에 책을 읽는 것은 한층 더 싱거울 것 같았습니다. 봄을 그리려고 산에 오른 이 서투른 화가는, 좀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는 것보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리하여 내 눈이 맞은편 산허리에 갔을 때, 거기에는 활짝..

문학/소설전문 2021.01.14

황석영 '아우를 위하여' 전문

아우를 위하여 황석영 뭔가 네게 유익하고 힘이 될 말을 써 보내고 싶다. 네가 입대해 떠나간 이제 와서 우울한 고향 실정이나 우리의 지난 잘잘못을 들어 여기에 열거해 놓자는 건 아니야. 아무 얘기도 못해 주고 묵묵히 너를 전송했던 형의 답답한 마음을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우리가 지금쯤은 의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어떤 문제를 확실히 해두고, 또한 장래를 굳게 믿기 위하여 내 연애 이야기를 빌리기로 한다. 너는 십구 년 전에 내가 누구를 사랑한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아마 놀랄 거다. 따져봐. 내 열한 살 때가 아니냐. 에이, 이건 오히려 형의 달착지근한 구라를 읽게 됐군, 하며 던져 버리지 말구 읽어주렴. 너 영등포의 먼지 나는 공장 뒷길들이 생각나니. 생각날 거야, 너두 그 학교를 다녔으니까..

문학/소설전문 2021.01.14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전문 일부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한다'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양귀자 두 명의 일꾼은 아침 여덟 시가 지나서 들이닥쳤다. 일의 시작은 때려 부스는 것부터였다. 두 사람이 덤벼들어서 함부로 두들겨 깨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는 그 요란한 소리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망치질 한 번에 여기저기로 튕겨나가는 타일 조각과 콘크리트 파편 때문에라도 더 이상은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목욕탕과 잇대어 있는 주방도 어수선하기론 마찬가지였다. 목욕탕에서 옮겨 온 세간살이가 옹색한 부엌을 더욱 비좁게 만들고 있었다. 그 속에서 아내는 인부들 점심상에 내놓을 푸성귀를 다듬고 있었다. 은혜는 여태껏 텔레비전에 매달려 있는 채였다. 취학 전의 어린애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인데 그로서는 토옹 볼 기회가 없었으므로 아이가 화면에서 나오는 대로 따라 노래를 부..

문학/소설전문 2021.01.14

현진건 '운수 좋은 날' 전문

운수 좋은 날 현진건(玄鎮健)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 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하여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를 동광 학교(東光学校)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첫번에 삼십 전, 둘째 번에 오십 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 한 김 첨지는 십 전짜리 백통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문학/소설전문 2021.01.14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난쏘공)' 전문 일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조세희 1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옮았다. 그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영호,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 식구의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말할 수 있다. 나와 (모든 것-이라는 표현에는 -다섯 식구의 목숨)이 포함되기 있다. 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건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터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잘 참..

문학/소설전문 2021.01.14

최서해(최학송) '홍염(紅焰)' 전문

홍염(紅焰*) 최서해(최학송) *붉을 홍, 불꽃 염 1 겨울은 이 가난한---백두산 서북편 서간도 한귀퉁이에 있는 이 가난한 촌락 빼허[白河]에도 찾아들었다. 겨울이 찾아들면 조그만 강을 앞에 끼고 큰 산을 등진 빼허는 쓸쓸히 눈 속에 묻히어서 차디찬 좁은 하늘을 치어다보게 된다. 눈보라는 북국의 특색이다. 빼허의 겨울에도 그러한 특색이 있다. 이것이 빼허의 생령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오늘도 눈보라가 친다. 북극의 얼음 세계나 거쳐오는 듯한 차디찬 바람이 우하고 몰려오는 때면 산봉우리와 엉성한 가지 끝에 쌓였던 눈들이 한꺼번에 휘날려서 이 좁은 산골은 뿌연 눈안개 속에 들게 된다. 어떤 때는 강골 바람에 빙판에 덮였던 눈이 산봉우리로 불리게 된다. 이렇게 교대적으로 산봉우리의 눈이 들로 내리고 빙판의..

문학/소설전문 2021.01.14

박지원 '허생전' 전문

허생전 박지원 허생은 묵적골(墨積洞)에 살았다. 곧장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우물 위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은행나무를 향하여 사립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글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 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과거(科擧)를 보지 않으니, 글은 읽어 무엇 합니까?"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독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그럼 장인바치 일이라도 못 하시나요?" "장인바치 일은 본래 배우지 않았는 걸 어떻게 하겠소?" "그럼 장사는 못 하시나요?" "장사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글을..

문학/소설전문 2021.01.14

염상섭 '표본실의 청개구리' 전문

표본실의 청개구리 염상섭 (1) 무거운 기분의 침체와 한없이 늘어진 생의 권태는 나가지 않는 나의 발길을 남포까지 끌어 왔다. 귀성한 후 칠팔 개삭간의 불규칙한 생활은 나의 전신을 해면같이 짓두들겨 놓았을 뿐 아니라 나의 혼백가지 두식하였다. 나의 몸의 어디를 두드리든지 알코올과 니코틴의 독취를 내뿜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피로하였다. 더구나 육칠월 성하를 지내고 겹옷 입을 때가 되어서는 절기가 급변하여 갈수록 몸을 추스리기가 겨워서 동네 산보에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친구와 이야기하면 두세 마디째부터는 목침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무섭게 앙분한 신경만은 잠자리에도 눈을 뜨고 있었다. 두 홰, 세 홰 울 때까지 엎치락뒤치락거리다가 동이 번히 트는 것을 보고 겨우 눈을 붙이는 것이 일 주일 간이나 넘은 뒤에..

문학/소설전문 202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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