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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설전문 104

홍길동전 전문(경판 24장본)

홍길동전(경판 24장본) 조선조 세종 때에 한 재상이 있었으니, 성은 홍씨요 이름은 아무였다. 대대 명문거족의 후예로서 어린 나이에 급제해 벼슬이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물망이 조야에 으뜸인데다 충효까지 갖추어 그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다. 일찍 두 아들을 두었는데, 하나는 이름이 인형으로서 본처 유씨가 낳은 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이 길동으로서 시비 춘섬이 낳은 아들이었다. 그 앞서, 공이 길동을 낳기 전에 한 꿈을 꾸었다. 갑자기 우레와 벽력이 진동하며 청룡이 수염을 거꾸로 하고 공을 향하여 달려들기에, 놀라 깨니 한바탕 꿈이었다. 마음 속으로 크게 기뻐하여 생각하기를, ‘내 이제 용꿈을 꾸었으니 반드시 귀한 자식을 낳으리라.’ 하고, 즉시 내당으로 들어가니, 부인 유씨가 일어나 맞이하였다. 공..

문학/소설전문 2021.02.26

박완서 '자전거 도둑' 전문

자전거 도둑 박완서 수남이는 청계천 세운 상가 뒷길의 전기용품 도매상의 꼬마 점원이다. 수남이란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도 꼬마로 통한다. 열여섯 살이라지만 볼은 아직 어린아이처럼 토실하니 붉고, 눈 속이 깨끗하다. 숙성한 건 목소리뿐이다. 제법 굵고 부드러운 저음이다. 그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면 점잖고 떨떠름한 늙은이 목소리로 들린다. 이 가게에는 변두리 전기 상회나 전공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잦다. 수남이가 받으면, "주인 영감님이십니까?" 하고 깍듯이 존대를 해 온다. "아, 아닙니다. 꼬맙니다." 수남이는 제가 무슨 큰 실수나 저지른 것처럼 황공해하며 볼까지 붉어진다. "짜아식, 새벽부터 재수 없게 누굴 놀려. 너 이따 두고 보자." 이런 호령이라도 들려 오면 수남이는 우선 고개를 움츠려 알밤을 피..

문학/소설전문 2021.02.26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전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문열 벌써 삼십 년이 다 돼 가지만, 그해 봄에서 가을까지의 외롭고 힘들었던 싸움을 돌이켜 보면 언제나 그때처럼 막막하고 암담해진다. 어쩌면 그런 싸움이야말로 우리 살이[生]가 흔히 빠지게 되는 어떤 상태이고, 그래서 실은 아직도 내가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받게 되는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자유당 정권이 아직은 그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던 그해 삼 월 중순, 나는 그때껏 자랑스레 다니던 서울의 명문 국민학교를 떠나 한 작은 읍(邑)의 별로 볼 것 없는 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공무원이었다가 바람을 맞아 거기까지 날려간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가 이사를 가게 된 까닭이었는, 그때 나는 열두 살에 갓 올라간 5학년이었다. 그 전학 첫날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들어서게 ..

문학/소설전문 2021.02.26

전상국 '동행' 전문

동행(同行) 전상국 발목까지 빠져드는 눈길을 두 사내가 1)터벌터벌 걷고 있었다. 우중충 흐린 하늘은 곧 눈발이라도 세울 듯, 이제 한창 밝을 정월 보름달이 2)시세를 잃고 있는 밤이었다. 앞서서 걷고 있는 사내는 작은 키에 3)다부져 보이는 체구였지만 그 걸음걸이가 어딘지 모르게 허전허전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이 사내로부터 두서너 걸음 뒤져 걷고 있는 사내는 4)멀쓱한 키에 언뜻 보아 맺힌 데 없다는 인상을 주면서도 앞선 쪽에 비해 그 걸음걸이는 한결 정확했다. 큰 키에 사내가 5)중절모를 눌러 쓰고 밤색 6)오버에 푹 싸이다시피 방한(防寒)에 빈틈이 없어 보이는가 하면 키 작은 사내는 희끔한 와이셔츠 위에 다만 양복 하나를 걸쳤을 뿐, 그 차림새가 퍽도 7)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그 양복이라는 것도..

문학/소설전문 2021.01.30

임철우 '동행' 전문

동행 임철우 네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정문을 지나 백여 미터쯤 들어가면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바로 거기 길이 나눠지는 지점에 서 있는 전화박스 곁에서 우리는 만나게 되어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온 걸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세 시 오 분 전. 나는 조금 초조해하고 있었다. 집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와 그 자리에 서게 될 때까지 초조함은 줄곧 집요하게 목덜미를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그건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어젯밤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아니 그보다도 더 먼저, 그러니까 네가 일 년 반만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일주일 전의 그 충격적인 밤으로부터 나의 초조함은 이미 시작되었으리라. 너는 마치도 주술적인 힘을 지닌 북소리처럼 어둠 저편으로부터 갑..

문학/소설전문 2021.01.30

황순원 '나무들 비탈에 서다' 전문 일부(줄거리)

나무들 비탈에 서다 황순원 제 1 부 이건 마치 두꺼운 유리 속을 뚫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것 같은 느낌이로군. 문득 동호는 생각했다. 산밑이 가까워지자 낮 기운 여름 햇볕이 빈틈없이 내리부어지고 있다. 1)시야는 어디까지나 투명했다. 그 속에 초가집 일여덟 채가 무거운 지붕을 감당하기 힘든 것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전혀 2)전화를 안 입게 보이는데 사람은 고사하고 생물이라곤 무엇 하나 살고 있지 않는 성싶게 주위가 너무 고요했다. 이 고요하고 거침새 없이 투명한 공간이 왜 이다지도 숨막히게 앞을 막아서는 것일까. 정말 이건 두껍디 두꺼운 유리 속을 뚫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느낌인데. 다시 한 번 동호는 생각했다. 부리를 앞으로 향한 총을 꽉 옆구리에 끼고 한 발자국씩 조심조심 걸음을 내..

문학/소설전문 2021.01.30

'까치전' 전문

까치전 우족 3천 중에서 집이 이 같이 사치하기는 고금에 처음이라, 이러하므로 낙성연을 배설하고 고구친척(故舊親戚)을 다 청하여 즐길새 배반(盃盤)이 낭자(狼藉)하여 낙성주(落成酒) 취하게 먹고 온갖 비금(飛禽)들이 교음(嬌音)을 자아내니 오음육율(五音六律)에 관현곡(管絃曲)을 드리는 듯하니 만좌제객이 취흥이 몽롱하여 즐길새 춤 잘 추는 학두루미 백설 같은 옷을 입고 짧은 목을 길게 빼어 고개를 기울기울, 까마귀를 볼작시면 아청(鴉靑)같은 옷을 입고 두 날개를 너펄너펄, 유막의 꾀꼬리는 황금 갑옷 떨쳐입고 노래를 화창하며, 강남서 나온 제비는 글을 읊으되, 지지위지(支持謂知,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요, 부지위부지(不知謂不知,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가 시위지야(是謂知也, 이것이 아는 것이다)이라..

문학/소설전문 2021.01.30

김동인 '태형' 전문

태형 김동인 "기쇼오(起床)!" 잠은 깊이 들었지만 조급하게 설렁거리는 마음에 이 소리가 조그맣게 들린다. 나는 한 순간 화다닥 놀래어 깨었다가 또다시 잠이 들었다. "여보,기쇼야,일어나오." 곁의 사람이 나를 흔든다. 나는 돌아누웠다. 이리하여 한 초 두 초, 꿀보다도 단 잠을 즐길 적에 그 사람은 나를 또 흔들었다. "잠 깨구 일어나소." "누굴 찾소?" 이렇게 나는 물었다. 머리는 또다시 나락의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러디 말고 일어나요. 지금 오방 댕껭(點檢)합넨다." "여보, 십 분 동안만 더 자게 해주." "그거야 내가 알갔소? 간수한테 들키면 혼나갔게 말이지." "에이! 누가 남을 잠도 못 자게 해. 난 잠들은 지 두 시간도 못 됐구레. 제발 조금만 더..." 이 말이 맺기 전에 나의..

문학/소설전문 2021.01.30

이태준 '해방 전후' 전문

해방 전후 이태준 한 작가의 수기 호출장(呼出狀)이란 것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시달서(示達書)라 이름을 바꾸었다고는 하나, 무슨 이름의 쪽지이든, 그 긴치 않은 심부름이란 듯이 파출소 순사가 거만하게 던지고 간, 본서(本署)에의 출두 명령은 한결같이 불쾌한 것이었다. 현(玄) 자신보다도 먼저 얼굴빛이 달라지는 아내에게는 으레 심상한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정도 이상 불안스러워 오라는 것이 내일 아침이지만 이 길로 가 진작 때우고 싶은 것이, 그래서 이날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밥맛이 없고, 설치는 밤잠에 꿈자리조차 뒤숭숭한 것이 소심한 편인 현으로는 ‘호출장’ 때나 ‘시달서’ 때나 마찬가지곤 했다. 현은 무슨 사상가도, 주의자도, 무슨 전과자(前科者)도 아니었다. 시골 청년들이 어떤 사건으로 잡히어서..

문학/소설전문 2021.01.30

현진건 '할머니의 죽음' 전문

할머니의 죽음 현진건 ‘조모주 병환 위독’ 3월 그믐날 나는 이런 전보를 받았다. 이는 xx에 있는 생가(生家)에서 놓은 것이니 물론 생가 할머니의 병환이 위독하단 말이다. 병환이 위독은 하다 해도 기실 모나게 무슨 병이 있는 게 아니다. 벌써 여든 둘이나 넘은 그 할머니는 작년 봄부터 시름시름 기운이 쇠진해서 가끔 가물가물하기 때문에 그 동안 자손들로 하여금 한두 번 아니게 바쁜 걸음을 치게 하였다. 그 할머니의 오 년 맏인 양조모(養祖母)는 갑자기 울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이승에서는 다시 못 보겠다. 동서라도 의로 말하면 친형제나 다름이 없었다--육십 년을 하루같이 어디 뜻 한 번 거실러 보았을까---.” 연해연방 이런 넋두리를 섞어 가며 양조모는 울었다. 운다 하여도 눈 가장자리가 붉어지고 ..

문학/소설전문 2021.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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