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 비탈에 서다
황순원
제 1 부
이건 마치 두꺼운 유리 속을 뚫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것 같은 느낌이로군. 문득 동호는 생각했다. 산밑이 가까워지자 낮 기운 여름 햇볕이 빈틈없이 내리부어지고 있다. 1)시야는 어디까지나 투명했다. 그 속에 초가집 일여덟 채가 무거운 지붕을 감당하기 힘든 것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전혀 2)전화를 안 입게 보이는데 사람은 고사하고 생물이라곤 무엇 하나 살고 있지 않는 성싶게 주위가 너무 고요했다. 이 고요하고 거침새 없이 투명한 공간이 왜 이다지도 숨막히게 앞을 막아서는 것일까. 정말 이건 두껍디 두꺼운 유리 속을 뚫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느낌인데. 다시 한 번 동호는 생각했다. 부리를 앞으로 향한 총을 꽉 옆구리에 끼고 한 발자국씩 조심조심 걸음을 내어디딜 때마다 그 거창한 유리는 꼭 동호 자신이 순간순간 짓는 몸자세 만큼씩이나 겨우 자리를 내어 줄 뿐, 한결같이 몸에 밀착된 위치에서 앞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절로 동호는 숨이 가빠지고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2미터쯤 간격을 두고 역시 총대를 옆구리에 낀 채 앞을 주시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는 현태가 이리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3)농말이라도 한 마디 건네려는지 모른다. 그러나 동호는 모른 체했다. 잠시나마 한눈을 팔았다가는 지금 자기가 가까스로 헤치고 나가는 이 밀도 짙은 유리가 그대로 아주 굳어 버려 영 4)옴쭉달싹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
첫 집에 도달하기까지 불과 40미터 안팎의 거리건만 한껏 멀어만 보였다.
5)수색이 시작되자 관심과 주의가 그리 옮겨지면서 동호는 지금까지 받아오던 압박감에서 6)적이 풀려났다. 수색대 조장인 현태가 손짓으로 대원 세 명에게는 집 둘레를 7)경비하게 하고, 자기 자신은 병사 한 명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보통 때는 느리고 곧잘 익살을 부리던 현태가 일단 이렇게 전투 태세로 들어가면 동작이 8)일변하여 야무져지고 민첩해지는 것이다. 어느새 9)바람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는 문을 홱 열어 젖히면서,
“꼼짝 말어!”
나지막하나 속힘이 들어 있는 목소리다.
몇 해나 묵은 창호지인지 검누르게 얼룩이 지고, 군데군데 낡은 헝겊조각으로 땜질을 한 문짝이 열려진 곳에 드러난 컴컴한 방 안.
“손 들구 나와!”
밖에서 경비하던 세 사람까지 한 순간 숨을 죽인다. 그러나 컴컴한 방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
현태가 총구를 들이밀며 재빨리 방 안을 살핀다. 빈 집이다. 그렇건만 부엌과 뒷간까지 뒤진다. 그전 살던 사람들이 가난한 살림살이나마 급작스레 꾸려가지고 간 흔적만이 남아 있다.
다음 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현태는 번번이 바람벽에 등을 붙이고 문짝을 잡아 젖히면서, 꼼짝 말어! 손 들구 나와!를 빠짐없이 외치곤 했다. 그러는 동안 밖에서 경비를 보던 동호는 점점 긴장이 풀리면서 어쩐지 현태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떤 딴 세계의 일같이 생각됐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비현실적인 시간 속에 서 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병사 하나가 안마당에 떨어져 있는 감자알을 주워 얼른 호주머니에 넣는다. 그것이 더 가까운 현실 같았다.
그러나 이들 수색대의 신경을 긴장시킬 만한 일이 하나 생겼다. 무전기를 메고 경비를 보고 있던 윤구가 어떤 집 뒷간 옆 잿더미에서 낯설은 10)통발이 한 짝을 발견한 것이었다. 바닥이 닳아 구멍이 나고 11)운두가 해진 신발짝이었다.
첫눈에도 그것은 마을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집 저집 잿간에서 닭털이며 돼지털이며 개털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뼈만은 그 중 넓은 한 집 마당에 아무렇게나 내버려져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음식을 먹고 간 자리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아닌 외부 사람들이 단시간에 어지럽히고 간 어수선함이 아직 남아 있었다. 쉬파리가 들끓는 뼈다귀의 빛깔이 그다지 검게 변색하지 않은 걸로 미루어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대원 다섯 명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면을 한번 둘러보았다. 앞은 골짜기를 따라 옥수수와 고구마밭이 있는 12)길쭘한 13)벌을 사이에 두고 높고 낮은 14)구릉이 가로질렀고, 뒤는 좀전에 자기네가 넘어온 중허리 위쪽의 희뿌연 바위로 뒤덮인 산이 올려다보였다. 그러는 그들의 눈앞에는 변함없이 낮 기운 여름 햇살이 내리부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새삼스레 주위가 너무 고요하다는 걸 느꼈다. 이 괴괴한 어느 지점에서 혹시 누가 자기네를 줄곧 감시나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어떤 말 못 할 압박감이 엄습해 왔다. 동호는 다시금 엄청나게 두꺼운 유리 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는 느낌에 억눌려야만 했다. 이 유리가 저쪽 어느 한귀퉁이에서 부서져 들어오기 시작하면 걷잡을 새 없이 몽땅 조각이 나고 말 테지. 그리고 무수히 날이 선 유릿조각이 모조리 몸에 들어박힐 거라. 동호는 전신에 소름이 끼쳐 몸을 한번 떨었다.
어떤 새로운 움직임만이 이 벅찬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은 집을 마저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섯째 집에서 그들의 긴장을 한층 자극시키는 일이 생겼다. 현태가 역시 바람벽에 바짝 등을 붙이고 문짝을 홱 잡아 젖히면서, 꼼짝 말어! 했을 때, 방 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났던 것이다.
눈에 확 빛을 띤 현태가 고갯짓으로 이쪽에 신호를 하고 나서 단호한 목소리로,
“손 들구 이리 나와!”
밖에서 경비하던 사람들도 일제히 문이 젖혀진 컴컴한 구멍으로 총부리를 돌려 대고 좌우에서 죄어 들어갔다.
“얼른 못 나와?”
그러고도 잠시 후에야 파랗게 질린 여인의 얼굴이 어두운 문가에 나타났다가 흠칫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이게, 빨랑 못 나와?”
현태의 음성이 더 모질어졌다.
그러고도 다시 잠시 후에야 여인의 질린 얼굴에 입술을 15)호들호들 떨면서 맨발째 16)토방으로 내려섰다. 서른이 좀 넘어 보였다.
“방 안에 있는 사람 모두 나와!”
여인이 뽀족한 턱을 가늘게 떨면서 두어 번 머리를 가로저었다.
재빨리 현태가 방 안을 살폈다. 어두운 방 안 아랫목에 두어 살 됨직한 계집애가 때묻은 17)포대기를 덮고 잠이 들었는지 꼼짝 않고 누워 있을 뿐이었다.
“여기 왔던 군인이 18)뙤놈들야? 인민군 새끼들야?”
“조선 사람들예요…….”
“언제 왔다 언제 갔지?”
“어제 밤중에 왔다…… 오늘 새벽 어둬서 갔어요.”
“얼루?”
여인이 가늘게 떨리는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몇 놈이나 되지?”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쉰 명…… 백 명…….”
이런 산골 여인의 수에 대한 관념이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젊은 19)남정네들은 그 사람들이 데리구 가구…… 다른 사람들은 여기 있다간 죽는다는 바람에 죄다 피하고…….”
“왜 같이 안 갔소?”
현태의 음성이 약간 부드러워졌으나 시선만은 그냥 날카롭게 여인의 눈 속을 쏘아 보고 있었다.
여인이 몇 번이고 눈을 깜박여 현태의 시선을 피하면서 떨리는 고개를 방 안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어린애가 말라 비틀어진 팔을 포대기 밖에 내놓은 채 여전히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그 입과 코와 눈언저리에 파리가 까맣게 붙어 있었다.
“저런 걸 업구 나갔다간…… 길에서 죽일 것 같애서…….”
여인의 말소리는 목 안으로 기어 들었다.
남은 두 빈 집을 마저 수색하고 나서 동네 한가운데 있는 우물물을 제각기 20)수통에 넣어 가지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대낮에 다섯 명이나 산마루에서 어른거리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산허리께 나무숲을 지나 팔부 21)능선쯤 되는 바위 그늘에다 자리를 잡았다.
우선 중대 본부에 보고를 해야 했다. 휴전 회담이 시작된 지 이 년째나 끌어 오는 이즈음 각 전선에서는 23)산발적인 탐색적이 계속될 뿐, 이렇다 할 대규모의 전투는 없던 차에 이렇듯 적이 한 부락민을 모두 피난시켰다는 것은 설사 그것이 이른바 24)허실 전술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근의 색다른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현태가 윤구더러 중대 본부를 부르게 했다. 윤구가 무전기의 수화기를 들고 스위치를 누르고는,
“두꺼비…… 두꺼비…… 두꺼비…….”
말 마디에 일정한 간격을 두어 25)패스워드로 중대 본부를 불렀다.
눌렀던 스위치를 놓자 곧 대답이 왔다.
“올챙이…… 올챙이…….”
윤구가 현태에게로 눈을 주었다. 중대 본부가 나왔으니 보고할 말을 하라는 것이다.
“동북방 육 키로 지점.”
그것을 윤구가 패스워드로 바꾸어,
“오징어 명태 여섯 마리.”
“초가집 여덟 채가 있음.”
“짚세기 네 켤레.”
그리고 오늘 새벽 26)미명에 인민군 이삼 소대가 이곳을 지나 서쪽 방면으로 이동한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나서,
“현재 부락민은 하나 남지 않고 모두 피난 중임.”
그러자 27)군소리가 새어들지 않게끔 수화기와 입 사이에 손을 오그려 대고 있던 윤구가 눈을 들어 현태를 바라보았다. 여인 하나가 남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현태는 윤구의 시선을 28)묵살해 버리듯 조용히 되뇌었다.
“현재 부락민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피난 중임.”
윤구는 그대로 옮겼다.
“짚세깃날 홀랑 훨훨.”
중대 본부에서 지시가 왔다. 여기 머물러 밤이 되기까지 29)적정을 살피라는 것이다.
현태는 병사들을 시켜 좌우 산굽이를 지키게 한 후 담배를 꺼내어 붙어 물었다. 그리고 몇 모금 빨고 나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옆에 앉았는 동호를 향해,
“이봐 시인, 아까 그런 때 기분을 뭐라고 표현했음 좋지?”
했다.
배낭에서 건빵을 집어 내고 있던 동호는 이 친구가 또 무슨 얘길 지껄이려나 싶으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이 시인, 이런 땐 담배부터 한 대 피우는 법야. 이렇게 호젓한 산속 맑은 공기 속에서 피우는 담뱃맛은 또 별미거든. 유난히 머릿속이 째릿한게.”
동호가 시인이라는 별명을 듣게 된 것은 언젠가 높은 절벽 위를 지나다녔다. 밑을 내려다보며 여러 사람이, 30)오금이 저리다든가 눈앞이 아찔하다든가 하는 속에서 동호만이, 어 춥다, 고 한마디 한 것이 그만 시인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건빵을 씹고 있는 동호에게 현태는 다시,
“근데 말야, 시인, 아까 참 기분 더럽든데, 아니, 빈 동넬 향해 내려가는데 왜 그렇게 앞이 콱콱 막히는 것 같은지 모르겠어. 옆을 봤드니 너무 심각한 얼굴루 무엇엔지 잔뜩 저항을 하는 자세드군. 정말 기분 안 좋든데.”
한번 전투 태세로 들어가기만 하면 언제나 침착하고 대담한 행동을 취하는 현태마저 아까의 그 고요하고 투명한 공간에서 어떤 색다른 압박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인가. 동호는 현태에게 아까 자기가 느낀 대로, 그것은 한없이 두꺼운 유리 속을 뚫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때는 시야 속에 적이 보이는 편이 신경의 부담이 덜할 것 같더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지로 아까 눈앞에 적이 대기해 있다가 정작 사격전이라도 벌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차마 현태 앞에서 전투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만큼 실전에서 동호는 자신의 터무니없이 허덕이는 꼴을 몇 번인가 현태에게 보였던 것이다.
언젠가 추파령 전방에서 적의 31)포격을 받았을 때였다. 평지라 몸 붙일 곳이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엎드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렇게 엎드린 동호는 곁에 같이 엎드린 현태의 옆구리 밑으로 저도 모르게 자꾸 고개를 묻으려 했다. 현태가 벌떡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니 허리를 납작 꾸부린 현태가 금방 포탄이 떨어져 패어 나간 자리로 달려가는 것이다. 동호는 자기도 그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탄산포의 원리’에 의해 포탄이란 아무리 같은 조준에 맞춰 쏘더라도 똑같은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하나 둘 그리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그 속에 윤구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동호는 오금이 말을 듣지 않아 그리 달려갈 수가 없었다. 현태가 철모 밑으로 눈만을 내놓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모양이 뿌연 먼지 연기 속에 보였다. 그래도 동호는 뼈마디 무너난 사람처럼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현태가 일등 32)중사요 동호 자기는 이등 중사라는 전투 경력의 차이에서 오는 것만도 아닌 성싶었다. 같은 이등 중사라도 윤구는 얼마나 날렵하냐. 종내 현태 편에서 달려와 동호의 겨드랑 밑을 끼고 구덩이로 끌고 갔다. 폭음에 귀가 먹먹한 채 정신없이 끌려가는 동호의 머릿속에는 엉뚱한 의식만이 선명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지? 현태 네 녀석은 대담 무쌍한 용사가 되구, 난 더할 나위 없이 비겁한 졸자가 되구. 전례 없는 장시간의 포격으로 적잖은 인명의 손해를 입었다. 처음 동호가 엎드렸던 자리에 있던 병사들도 포탄에 맞았다는 걸 알았다. 포격이 끝나자 현태는 구리빛 얼굴에 흙먼지를 온통 뒤집어쓴 채 흰 이빨을 드러내어 웃음을 띠우면서 동호에게 농말을 건네었다. 임마, 말라빠진 녀석이 웬 똥집은 그렇게 무거워? 가끔 뽑아 낼 걸 뽑아 내야 가벼워지는 법야, 그래야 몸두 말을 잘 듣고. 어쩌다 제 이선으로 교체되었을 때 현태가 윤구는 33)위안부를 찾아가곤 했지만 동호는 한 번도 그 34)축에 끼지 않았다. 그러한 동호를 빗대놓고 하는 농말이었다. 위안소라는 데를 다녀와선 곧잘 현태는 동호에게 이런 말을 지껄여 대곤 했다. 어이 시인, 그 아니꼬운 눈초리루 사람을 바라보지 마, 무슨 드러운 물건이나 바라보는 것 같은 그 메스꺼운 눈초리루 말야, 되레 지금 난 누구보다두 순수한 상태에 있다는 걸 알아야 해, 누굴 사랑한다든가 미워한다든가 하는 그런 35)구지레한 인간 거래를 깨끗이 벗어난 이 홀가분한 기분, 당장은 어떤 미인이 곁에 있대두 무관심할 수 있는 이 평화로운 안식을 너는 모를 거야. 술이 취하여 이렇게 주절대다가는 아무데나 쓰러져 버리는 것이다. 동호는 처음부터 아무런 대꾸도 않고 현태가 잠들기만 기다리곤 했다. 그러나 이날 적의 포격이 끝난 뒤에 현태가 건네는 말에는 동호도 한마디 대꾸를 했다. 오늘은 네가 그 구지레한 인간 거래를 벗어난 상태가 아니어서 다행야, 그렇지 않았드면 날 이 구덩이까지 끌구 올 생각두 하지 않았을 게 아냐? 현태가 그 말에 응수를 했다. 그래 그게 다 쓸데없는 짓이지, 내 생명과 바꿀지두 모르는 이런 부질없는 36)만용은 말야. 동호가 다시 받았다. 그 덕택에 대담 무쌍한 용사라는 칭호를 받게 했지 뭐야. 현태가 흰 이빨을 드러내어 씽긋 웃었다. 됐어, 좀전까지 발발 떨면서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던 자식이 주둥인 살았거든, 사실 내가 널 이곳으루 끌구 온 건 우정이나 전우애가 아니구 네 말대루 영웅심의 발작인지두 모르지, 말하자면 37)객기라는 거 말야.
언젠가 또 금성강 지구 전투에서였다. 적과 이쪽이 38)혼전을 이루고 있을 때 이쪽 비행기의 39)오폭을 받은 일이 있었다. 급작스런 일에 미처 피할 데를 몰라 허둥대는 동호를 현태가 이끌고 큰 나무 밑으로 갔다. 거기서 현태는 동호를 앞에 안듯이 하고 비행기가 오는 방향을 정면으로 겨냥하여 나무 뒤에 몸을 붙이는 것이었다. 앞쪽에서 다가오는 비행기 폭음과 함께 기계적인 짧은 간격을 두고 총알이 콩 튀듯 땅을 파며 주름잡아 와서는 좌우로 지나쳐 버리기도 하고 나무줄기에 40)퍽퍽 박히기도 했다. 그 진동이 그대로 동호의 가슴에 총탄이 와 박히는 느낌이었다.
여기저기서 고통에 못 이겨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거기 그냥 나무 뒤에 서 있을 수 없는 무서운 심정에서 동호가 몸을 비틀면 현태가 뒤에서 꽉 붙들고 꼼짝 못 하게 했다. 이렇게 한 차례 41)기총 소사를 하고 지나간 비행기들이 다시 햇빛에 은빛 날개를 반사시키며 선회하여 오는 방향을 대중하여 다시금 정면이 되게끔 자리를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현태는 여유 있게 동호에게 주의까지 주는 것이다. 나무를 안으면 위험하니 팔을 내리라고, 동호는 문득 무엇에 억눌린 부자유스러움을 느꼈다. 어려서 골목 안에서 노느라면 동네 힘센 애가 뒤로 와 눈을 가리고 아무리 몸을 뒤틀어도 놓아 주지 않던 때의 그 답답하고 갑갑하던 느낌. 그러나 이날 동호는 자기를 제어하고 있는 현태에게서 어떤 부자연스러움을 느끼면서도 또한 거기에 거역 못 할 진득한 우정 같은 것을 맛보고 있었다.
“저, …… 사람 피부에 얼마나 화상을 입으면 죽지?”
동호가 입 안에 달라 붙은 건빵을 수통의 물로 축여 넘기고 나서 불쑥 누구에게라 없이 이런 말을 했다.
반 토막을 낸 담배 끝에다 종잇조각으로 42)물부리를 만들어 침을 바르고 있던 윤구가,
“삼분지 일 이상이면 죽을걸.”
“유릿조각은 얼마나 백히면 죽을까?”
“글세.”
윤구는 현태의 담뱃불을 빌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서,
“유린 참 무서운 거야. 살에 백히기만 하면 자꾸 속으로 파구 들어가거든. 어렸을 때 잘못해서 43)파리통을 밟았는데, 그 아픈 건 칼에 찔린 유가 아니야. 그런데 말이지. 백힌 유릿조각을 빼버렸는데두 그냥 따끔거리구 콕콕 쑤시지 않겠어? 그날 밤 한잠두 못 자구 이튿날 병원엘 갔드니 좁쌀알만한게 둘 남아 있었어. 글쎄 그게 상당히 깊이 들어가 있잖어. 밤새두룩 따끔거리구 아팠든 것두 그게 오물오물 살 속을 파구 들어가느라구 그랬지 뭐야.”
동호는 아까 산밑에서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두껍디 두꺼운 유리가 한꺼번에 부서지면서 그 무수히 날이 선 조각들이 온통 몸에 와 박히는 듯했던 느낌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데 현태가 일어서며,
“야, 또 무슨 유리에 관한 시라도 구상 중이냐? 시두 좋지만 우선 자리를 옮기구 봐.”
햇빛이 설핏해졌으나 칠월 초순께의 해를 이마에 마주 받기란 여간 뜨거운 게 아니었다. 그늘진 바위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 이만하면 한참 동안은 네 맘대루 시상을 즐길 수 있을 거다. 근데 그 44)뚱딴지 같은 유리 얘긴 집어치구 좀더 근사한 얘길 해봐.”
동호는 현태가 자기더러 근사한 얘길 해 보라는 뜻을 안다. 다름아닌 동호 자기의 애인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아직껏 동호는 이들 친구한테 자기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밝힌 적이 없었다. 그저 현태나 윤구가 동호에게 와닿는 편지를 보고 그렇다는 걸 눈치채고 있을 따름이었다. 편지를 받았을 때 동호는 그 자리에서 겉봉을 뜯어 읽는 법이 없었다. 일단 호주머니 속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가 나중에 외딴 곳으로 가 혼자 조용히 읽는 것이다. 이런 동호를 현태가 한번 곯려 주려고 한 일이 있었다. 한 보름 전, 전선이 45)소강 상태로 들어간 어느 날 점심때였다. 현태가 동호의 배낭을 끌어다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동호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덤벼들어 배낭을 빼앗으려 했다. 이러리라는 것쯤 예상했던 현태는 미리 짜뒀던 대로 배낭을 윤구한테 집어 던지고는 동호를 붙들었다. 그렇게 하여 윤구를 시켜 동호의 연인한테서 온 편지를 큰 소리로 낭독케 할 참이었다. 그러나 현태가 동호의 허리를 끌어안으려다 말고 후딱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어느새 동호가 현태의 46)손잔등에다 피가 어리는 이빨 자국을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야말로 47)비호같이 윤구에게로 날아갔는가 하는데 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윤구가 뒤로 나가넘어졌다. 한쪽 48)관자놀이께를 머리에 받힌 것이다. 동호가 어느 정도 항거하리라고는 예측했었지만 이처럼 강렬히 나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배낭을 부둥켜안고 씨근거리는 동호의 눈이 술취한 사람처럼 벌겋게 충혈이 돼 있었다. 현태가 웃음으로 그 자리를 수습했다. 자식, 전투시엔 그 배낭을 먼저 앞세워 놔야겠군, 용감해지게.
물론 지금이라 해서 동호가 자기 연인 이야기를 49)피력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면서도 현태는 말을 걸어 보는 것이다. 그런 말이라고 하여 심심풀이를 하려고.
“대체 네가 그렇게 끔찍이 애끼는 50)깔치가 어떤 애야? 좀 얘기하믄 어디 닳아 없어지나? 하여튼 난 네 그놈의 순정이란 게 위태스러 못 보겠어.”
동호는 현태의 말을 못 들은 체 저만큼 아래에 있는 소나무숲에 눈을 주고 있었다. 드문드문 서 있는 큰 소나무 사이에 51)다복솔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그 솔잎 끄트머리가 붉은 빛깔을 띠고 있는 것이다. 송충이라도 끓은 것인가.
“네가 사랑하는 그 애가 어느 정도 네 물건이 돼 있느냐 하는 게 걱정스럽단 말야. 순정만으루 깔칠 제 것으루 만들었다구 생각하던 시댄 이미 지나갔어. 무엇이구 직접 여자의 피부에서 얻은 기억을 지니지 못한 한, 제 것이라구 생각하는 것 오산야. 그래 넌 그 애의 피부에서 어떤 기억을 남기구 있니?”
“그렇게 할 일없음 낮잠이나 자. 쓸데없는 소리 작작허구.”
“임마, 난 정말 널 위해서 그런다. 대체 그 애에게서 어느 부분의 잊지 못할 기억을 갖구 있느냐를 한번 말해 보란 말야. 입술인가, 손바닥인가, 그렇지 않음 거긴가? 침은 왜 뱉어? 내 말이 드럽다는 거지? 그렇지만 말야, 점잖은 개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드라, 되레 너 같은 녀석이 그 애 잔등에다 지문을 찍어 놨는지 누가 알어. 이 친구처럼 말야.”
종이로 만든 물부리가 다 타도록 담배를 빨고 있던 윤구가,
“어, 이거 왜 생사람을 끌구 들어가.”
그는 아무 실속도 없는 여자 이야기에 끌려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니가 그럼 내숭스런 데가 없단 말야? 무슨 일에나 52)꼬장꼬장한 편이지만 깔치 고를 때두 빈틈이 없거든. 언제나 나이 좀 든 걸 골라잡군 했잖어? 그래야 사랑을 받거든. 단수가 높아.”
세 시간씩 사이를 두고 좌우쪽 산굽이로 가 있는 초병 교대를 했다.
동호가 자기 차례를 마치고 현태 있는 데로 왔을 때는 서쪽으로 기운 햇살이 엷어질 대로 엷어져 저녁 바람이 산산하게 군복 자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지난 삼월 삼십일날에 눈에 강산처럼 내려쌓여 한때 작전이 중단 상태에 빠졌던 일까지 있는 이 중동부의 산악 지대인 만큼 여름철에도 대낮에 그렇게 따갑게 내리쬐던 햇볕만 엷어지면 냉기가 도는 것이다.
현태도 이제는 바람막이해 주는 바위 뒤에 양팔을 낀 채 덤덤히 앉아 있었다.
동호는 그 곁에 앉아 좀전에 초병으로 한쪽 산굽이에 가 있을 때 조용히 머리에 떠올렸던 숙이의 모습을 다시 더듬어 보았다. 이 년 전 입대하기 전날 밤, 함박눈이 내리는 해운대 어느 호텔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한 일. 그때 입언저리가 얼얼하도록 입술을 맞비벼댔건만 그것보다도 이튿날 아침 밤새껏 내리던 눈이 멎어 창으로 비쳐드는 맑은 햇살 속에 그네의 쌍꺼풀진 눈 한쪽이 세 꺼풀이 져 있는 것을 보고 둘이 애들처럼 웃었던 기억. 숙이를 생각할 때마다 밤새도록 부빈 입술의 촉감이나, 뺨 목덜미 그리고 가슴의 한 부분을 어루만진 촉감보다도 그네의 짝짝이 진 눈을 보고 둘이서 티없이 웃은 그 분위기가 더 자기네만의 오롯한 비밀처럼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입대 후 숙이의 첫 번 편지에도 그 눈에 대한 것이 씌어져 있었다. 눈이 원상으로 돌아가기까지 이틀 동안을 문 밖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고 집안 사람과도 얼굴 대하기를 피했다는 것이다. 어쩐지 짝짝이 진 눈을 집안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도 자기네만의 비밀을 엿보이는 것 같아 싫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고 동호가 돌아와 다시 짝짝이 눈을 만들어 줄 날을 고대한다고 했다.
숙이의 짝짝이 진 눈. 그것을 생각하면 언제나 동호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다.
“이 친구 뭣이 좋아 혼자 싱글거리구 있어?…… 어, 으스스한데.”
윤구가 동호에게 한 마디 던지고는 일어나 팔을 앞으로 뻗쳤다 옆으로 뻗쳤다 하며 몸운동을 시작한다.
산속에 저녁이 왔다. 귤빛 놀이 서산 머리에 사라지기도 전에 잿빛 그늘이 낮은 골짜기를 매우면서 차차 그 농도를 가해 가지고 산 위로 올라왔다. 그 속도가 느린 듯하면서도 빨랐다.
보랏빛 하늘에 어느새 별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좌우 산굽이에 가 있던 초병들이 돌아왔다.
이제는 돌아가자는 현태의 말만 기다렸다.
“불을 때는군.”
한 병사가 마을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검게 드러난 소나무 그림자 저편에 그보다는 엷은 빛깔의 뽀오얀 기체가 나부끼면서 오르고 있었다. 굴뚝 연기였다.
“김이 뭇뭇 나는 밥 생각이 나는데.”
다른 병사 하나가 또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먼젓 병사가,
“지금 강냉이 죽이나 끓이고 있는지 모르지. 아까 낮에 보지 않았어? 감자알 하나 남기지 않구 싹 쓸어갖구 간 걸.”
“하여튼 뜨거운 물이라두 한 모금 마셨음 좋겠다.”
먼젓 병사가 생각난 듯이,
“참, 아까 그 여자가 53)첩보원은 아니겠지.”
현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윤구더러,
“본부에 연락해, 돌아간다구.”
그리고는 총을 메고 터벅터벅 산밑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동호는 현태가 지금 산 밑으로 내려가는 목적을 알 것 같았다. 여인을 없애버리러 가는 것이다. 실은 여인이 적의 첩보원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중 이쪽의 행동이 적에게 알려질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중대 본부까지 데리고 가야하는 것이다. 그것이 귀찮으니까 숫제 없애 버리려는 것이리라. 그래서 아까 낮에 중대 본부에 보고할 때도 부락민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보고했구나.
동호는 현태가 사라진 그늘을 내려다보면서 이제 총소리가 들려 오려니 했다.
윤구가 곁으로 다가서며,
“뭘 그렇게 심각하게 내려다보구 있어? 딴 생각 말구 이젠 돌아갈 걱정이나 해.”
총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한참 만에 현태가 무엇으로 손을 문질러 닦으며 올라왔다. 어떻게 된 일일까.
“자, 떠나 보지.”
그리고 현태가 동호를 향해,
“뭘 등신처럼 그렇게 바라보구 있어?”
마을 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동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동호의 색다른 시선을 느낀 현태는,
“왜 또 그런 눈으루 사람을 보는 거야? 꼭 무슨 드러운 물건이나 보는 것 같은 그 아니꼬운 눈초리루?”
“어제 그 여잘 어떡했어?”
“자식, 그걸 가지구 그러는 거야? 그렇게 알구 싶다면 얘기하지. 내가 내려가니까 그 여잔 되레 낮처럼은 놀라지 않드라. 그리구 별루 항거하는 빛두 없구. 그런데 말야, 일어나 나오려는데 손을 와 잡지 않겠어? 그 손이 뭣을 말하는지 알았지. 무서우니 같이 있어 달라는 거야. 허지만 될 일야? 해치워 버렸지. 어제 일은 그뿐야.”
〈중 략〉
추파령에 와 닿은 동호의 목덜미와 얼굴에서는 김이 물물 올랐다.
“어떻게 된 일야? 얼굴이 하얗게 식어가지구.”
동호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아까 낮에 빌렸던 돈 이천 54)환을 꺼내 주었다.
“도중에 돌아왔음 내 양말은 못 사왔겠군?”
현태와 함께 준비를 하고 있던 윤구가 한 마디 했다.
동호는 아무 대꾸도 없이 되는 대로 누워 잠들이 들어 있는 병사들의 허리를 넘어 한구석에 있는 자기 배낭을 찾아 그 속에서 종이와 봉투를 집어 냈다. 그리고는 거기 아무렇게나 비집고 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동호의 하는 꼴만 눈으로 좇고 있던 현태가,
“자식, 갑자기 시가 쓰구 싶어진 모양이지. 아무리 급해두 임마, 그 어둔 데서 뭐가 보여?”
흙ㅇ르 빚어 말려서 벽을 두루고 남쪽으로 단 하나의 출입문이 나 있는 이 너덧 간 푼수나 되는 방 안에 깡통 등잔불 하나가 까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등잔 둘레를 내놓고는 방구석에 어두운 그늘이 차 있었다.
현태가 이번에는 방한모를 쓰면서,
“자, 시간이 됐으니 나가 봐야지. 동호 넌 어떡허겠어? 좀 쉬지.”
종이를 앞에 놓고 어둑한 방 안 그늘 속에 묵묵히 앉았던 동호가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어가지고 호주머니에 틀어박으면서 일어섰다.
바깥 공기는 그대로 얼음이었다. 숨을 들이쉴 적마다 코털이 꼿꼿 얼었다. 더구나 몸에 밴 땀이 채마르지 않은 동호는 자꾸만 등골이 오싹거렸다. 그는 문득 장갑을 잊고 나온 생각이 났으나 도로 들어가 갖고 나오지는 않았다.
최전방 지역에서도 최전선 초소를 거쳐 완충 지대 어귀에 이르자 동호가 호주머니에서 술병을 꺼냈다.
“그거 웬거야?”
동호는 잠자코 마개를 뽑아 몇 모금 마시고는 현태에게 병을 건네었다.
“소토고미까지 가긴 갔었군?”
현태도 병 주둥이에다 입을 대고 몇 모금 마시고 나서,
“어째 도중에서 돌아온 푼수치군 시간이 오래 걸렸다구 생각했드니. 그래 가서두 못 만났어?”
“음.”
“어디 다른 데루 갔든가?”
동호가 잠자코 현태의 손에서 술병을 가져다 몇 모금 또 마셨다.
“그런 뎃 여자란 원래 한군데 오래 붙어 있질 않는 법이지. 하여간 잘됐어. 이젠 네 맘두 안정될 거구.”
동호가 다시 병을 입으루 가져갔다.
“임마, 너무 취함 안돼. 괘니 취해 가지구 앉아 졸았다간 영원히 간다는 걸 몰라?”
“이봐 현태, 저 사고뭉치 김 하사 있었지? 그 친구가 윤구더러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한창 따가는 판에 파장이 된 노름판 기분이라구.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애.”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우린 피해잘까 가해잘까?”
현태가 유심히 동호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지금 마신 술 때문만은 아닌 듯 동호의 코에서 뿜어지는 허연 김이 좀 잦은 것 같았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
“내가 보기엔 말야, 이번 동란에 나왔던 젊은이들은 죄다 피해자밖에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건 말야. 모든 젊은이란 말이 너무 거창하면 우리 주변의 친구만 두구 봐두 그렇잖어? 우선 그 사고뭉치 김 하사가 그렇구, 또 그 선우 상사가 그렇구, 그리구…….”
먼젓 차례의 55)동초 둘이 좌우 쪽에서 이리로 다가왔다. 교대 시간이 넘었나 보다.
동호와 현태는 동초들이 온 쪽을 하야 각기 헤어졌다.
하늘에는 얼음을 부스러뜨려 뿌린 듯한 차가운 별들이 박혀 있었다. 그 눈 덮인 땅이 별빛에 희뿌옇게 드러나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차츰 그 빛을 잃어가다가 나중에는 어둠과 뒤섞여지고 마는 것이었다.
현태는 유리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동호가 술병을 메쳐 깨뜨려 버린 모양이다. 자식, 오늘 기분 상한 일이 있었나 보군. 꽤두 56)숙맥이지. 그러나 흰 파카를 입은 동호의 그림자는 이미 눈빛과 하나이 되어 어둠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현태는 다시 앞을 살피며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그는 왜 그런지 여기가 금연 지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동호가 시체로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쯤 뒤에 다음 차례 초병 교대가 있었을 때였다. 밤이라 검은 피가 흰 눈 위에 꽉 얼어붙어 있었다. 왼쪽 손목의 동맥을 끊은 것이었다. 오른손 옆에 술병 깨진 유릿조각 하나가 눈에 얼마큼 파묻혀 있었다. 그 얼굴이 눈처럼 희었다.
시체를 맞들어 내무반 앞에 올려다 57)화톳불을 피우고 밤샘을 했다. 동호의 몸에서는 돈 천여 환과 봉투 하나가 나왔다. 아까 내무반을 나오면서 호주머니에 틀어박아 넣었던 봉투였다. 겉봉에 장숙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병 하나가 호기심에 편지 알맹이를 뽑아 보려 했다. 그것을 현태가 빼앗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제일차로 58)학도병 제대가 있은 것은 산골짜기에 59)눈석임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사월 초순께였다.
먼저 윤구에게 제대증이 나왔다. 일률적으로 입대 연월 순에 따라 제대가 되는 것이 아니고, 각 계급 별로 먼저 입대한 사람부터 제대가 됐다.
윤구가 부대를 떠나는 날, 상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온 그는 현태에게,
“그럼 가는 대루 곧 편지하지.”
하고 가무잡잡한 얼굴에 희색을 띠우면서 작별의 말을 했다.
“그 가정 교사 했던 집으로 간대지? 잘됐어. 복많은 친군 달러.”
윤구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집에서 자랐던 것인데 그 숙부네마저 6․25 때 폭격에 몰살을 당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처지였다. 그랬던 것이 전쟁 전 가정 교사로 있었던 집에 연락을 했더니 마침 전에 가르친 애의 동생을 또 좀 와 봐달라는 기별이 얼마 전에 왔던 것이다.
윤구가 들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고 끈을 죄면서,
“동호 그 친구가 살았음 나보다 먼저 제대가 되는 걸.”
담배에 라이터를 켜다 말고 현태가,
“그 친구 애인한테 보내는 유설 내가 갖고 있는데 주소가 적혀 있어야지.”
윤구가 입가에 쓴웃음을 떠올리며,
“자식, 혼이 나갔던 모양이지, 주소를 다 잊어먹게.”
“하기야 그 친구의 경우 유서 같은 게 문제될 건 없지. ……그럼 서울서 만나세.”
“에잇, 인제서야 이놈의 생활두 끝났군.”
현태가 담배에 라이터를 켜 대면서 천천히 말했다.
“이젠 우리두 우리의 생활을 가져야지.”
(제 1 부 끝)
「사상계」(1960)
황순원 (黃順元, 1915~2000)
평남 대동군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 1946년 월남하였고, 1967년 이후 경희대 교수로 재직했다.
1931년에 「동광」에 시 ‘나의 꿈’ 등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37년부터 소설을 쓴 그는, 초기에는 신변적 소재가 주류를 이루면서 토속적 정서와 시적 서정성이 강한 단편을 주로 발표하였다. 후기에는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을 통해 인간의 삶을 철학적․종교적․사회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조명하였다. 전체적으로 그의 작품 세계는 서정적이고 섬세하며 간결한 문장과 치밀한 구성으로 인간의 본질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1955년 아세아 자유 문학상, 1960년 예술원상, 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 본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별’(1941), ‘별과 같이 살다’(1950), ‘소나기’(1953), ‘카인의 후예(後裔)’(1954), ‘일월(日月)’(1962)과 작품집 〈탈〉(1976) 등이 있다.
핵심 정리
▷갈래 : 장편 소설, 전쟁 소설, 전후 소설
▷경향 : 리얼리즘, 실존주의
▷배경 : 시간적 - 6․25 전쟁 말기부터 몇 년간
공간적 - 최전방, 서울, 인천 등지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소재 : 6․25 전쟁 상황과 전후의 젊은이들의 방황하는 삶
▷주제 :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겪은 젊은이들의 전후의 정신적 방황과 갈등
구성
▷발단 : 동호, 현태, 윤구는 최전방을 수색함
▷전개 : 숙을 생각하면서도 옥주와 만나던 동호는 괴로워하다가 끝내 자살함
▷위기 : 전쟁 후, 현태, 윤구, 숙의 삶
▷절정 : 현태의 아이를 갖는 숙
▷결말 : 감옥으로 가는 현태와 그의 아이를 낳겠다고 말하는 숙
등장 인물
▷동호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주의자.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하에
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으며 괴로워하다 끝내 자살함
▷현태 넘치는 생명력의 소유자로 동호를 자살로 이끄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함
▷윤구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전후의 황폐한 현실을 끈질기게 헤쳐 나감
▷숙 동호의 애인으로서 동호가 자살한 이유를 추적하려다가 강제로 겁탈당하여 현태의
아이를 갖게됨.
줄 거 리
수색을 나간 동호는 두꺼운 유리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갑갑함을 느낀다. 수색대 조장인 현태는 평상시에는 여유만만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전투태세에 들어가면 야무지고 민첩해진다. 현태와 윤구는 곧잘 위안소를 찾아가나, 동호는 애인 숙이를 위해 순정을 지키고자 그 축에 끼지 않는다.
휴전 협정이 되자 현태와 윤구는 술집을 드나드나 동호는 숙이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윤구가 포로로 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오고, 김 하사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는 일이 일어난다.
이 부대에는 술만 먹으면 6․25 때 학살당한 부모님을 생각하며 끊임없이 혼잣말을 지껄이는 선우 이등 중사와 이런 술주정을 말리는 안 이등 중사도 있다. 어느 날 현태와 윤구는 동호를 이끌고 술집에 가 억지로 서울서 온 색시의 방에 밀어넣고, 동호는 강간을 당했다는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다음 외출 때, 동호는 서울 색시의 술집에 다시 가자고 하고 옥주와 또다시 하룻밤을 보내나 숙이에 대한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동호는 숙이의 편지를 불태워버리고 더욱 괴로워하다가 옥주를 찾아가나, 옥주가 청년단 단장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죽인다.
현태는 동호에게 이번 동란에 나왔던 젊은이들은 모두 피해자라고 하며 위로한다. 그리고 두 시간 후 자살한 동호의 시체와 그의 호주머니에 있던 숙의 이름이 적힌 편지봉투가 발견된다.
시간이 흘러 윤구와 현태는 제대를 한다. 의지할 곳이 없었던 윤구는 가정교사를 해서 대학을 졸업하게 되고, 현태의 도움으로 양계장을 시작한다. 현태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무질서하고 무계획적인 생활을 계속하며 기생 계향과 가깝게 지낸다. 윤구는 가정교사로 있던 집의 딸, 미란을 사랑하지만 미란은 현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날 미란이 임신을 하고 찾아왔을 때, 윤구는 낙태를 권유하고 함께 병원에 간다.
죽은 동호의 애인 숙이는 어느 날 현태를 찾아와 동호가 자살한 이유를 묻지만 현태는 모른다고 하고 돌려보낸다. 미란은 수술이 잘못되어 아흐레 만에 죽고, 윤구는 냉정하게 자신이 살아갈 방도를 강구한다. 숙은 다시 윤구를 찾아가 동호가 자살한 이유를 물어 보지만 대답을 얻지 못하고 결국 현태에게서 모든 얘기를 듣게 된다. 모든 걸 잊고 약혼하려 하던 숙은 현태에게서 동호가 사람을 죽인 일과 술집 여자와의 관계를 듣고 충격을 받는다.
현태와 숙은 인천에 가서 동호의 편지를 뜯어보나 백지만 발견하게 되고, 그날 밤 현태는 숙을 범한다. 2주 후에 나타난 숙은 현태에게 당신과 동호는 모두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석기는 입영을 기피하려고 손가락을 자른 청년과 싸우다 청년의 단도에 찔려 한쪽 팔을 못쓰게 된다. 현태는 우연히 알게 된 이등 중사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선우 이등 중사가 정신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 본다.
현태는 죽고 싶다며 자살하는 계향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이 일로 무기 징역을 선고받는다. 한편 숙은 윤구를 만나 현태를 비롯한 젊은 사람들 그리고 자신마저도 모두가 이번 동란의 피해자라고 말한다. 그러고 애인의 친구인 현태의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고 말한다.
작품의 이해와 감상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1960년 1월부터 그해 7월까지 「사상계」에 연재된 황순원의 장편 소설로, 총 2부 1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겪은 젊은이들의 전후의 정신적 방황과 갈등을 통하여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룬 이 작품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전후 문학사의 한 지표로 간주된다.
즉 6․25의 참상과 의미를 묻고자 한 본격 장편이 부재했던 상황에서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킨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최인훈의 ‘광장’, 홍성원의 ‘남과 북’ 등이 나와 ‘나무들 비탈에 서다’가 감당하지 못한 주제와 소재의 무게를 전달해 주었지만, 그 이전까지 이 작품이 보여 준 전쟁 소설로서의 성과는 뚜렷한 것이었다.
게다가 전쟁 속의 인간이 겪는 공포, 고독, 삶에의 본능, 이 전쟁을 통해 한국인이 입은 정신적․육체적 상처, 전후 한국 사회의 황폐성 등을 상당한 수준의 리얼리즘적 성취를 통해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6․25를 주로 실존적 시각에서 파악하여 그 전쟁을 민족적 비극의 차원에서 묻지 못한 점은 시대의 한계이자 이 작품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전쟁이라는 상황이 빚는 죄악과 그로인한 죄의식이 빚는 인간의 파멸 과정이 동호와 현태라는 대립적 인간상을 통하여 그려져 있다. 황순원의 초기 단편들에 많이 등장했던 유년기 인물들이 미숙성 상태에서 사회적 및 정신적 성년으로 옮아가는 통과 제의가 이 작품에서는 전쟁이라는 시련으로 나타나는데, 동호의 죽음이나 현태의 좌절은 전쟁이라는 상황이 인간으로서는 결코 통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장벽임을 의미한다.
전쟁이라는 외적 상황만이 아니라 동호의 순수나 이상과 현태의 현실이라는 내적 인간성도 인간이 회복하여야 할 자아 동일성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똑같이 죄악이라는 기독교적 원죄 의식이 이 작품을 꿰뚫고 있다.
황순원은 이 작품을 통해 6․25 전쟁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겨 놓았는가를 그려내고자 했다. 주요 인물인 동호는 전장에 있는 자신이 두꺼운 유리 속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노출된 공간을 걷고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 반면에 현태에게서는 동호와 대비되는, 세상을 억세게 살아가는 남성적 소영웅심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웅심도 끝내는 허탈과 무기력으로 빠져 자학에 이르게 된다.
여자의 연지가 묻은 부분을 끊어 내고서야 담배를 피우는 동호는, 욕정보다 여자의 청을 거절 못해 동정을 잃는 순수한 사람이다. 동호는 이 순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이 깨졌을 때 그는 흰 눈 위에서 전쟁의 깊은 상처를 간직한 채 자살한다.
비탈에 선 나무처럼 시련과 위기에 처한 젊은이들의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는데, 주인공 동호, 현태, 윤구, 숙이 등이 처한 시련과 위기는 6․25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들은 20대의 생기 발랄한 청년기에 전쟁의 극한 상황과 만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1950년대 이 땅의 젊은이들의 삶에 치명적 타격을 가한 6․25는 전장의 상황으로 묘사되기보다는 주인공들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어떤 고통을 당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짐으로써 부각된다.
참혹한 전쟁에 피해를 입은 사람은 어느 특정한 인물 하나만이 아니다. 현태, 동호, 윤구, 숙이, 옥주, 그리고 동란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그 피해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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