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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고전산문

'김수로왕 신화' 전문

by 열공햐 2021.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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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로왕 신화

  개벽한 이래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었고, 또한 군신의 호칭 따위도 없었다. 그저 아도간(我刀千)·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千)·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의 9간*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곧 추장으로서 이들이 당시 백성들을 통솔했던 것이다. 그 백성들은 모두 1백 호, 7만 5천 인이었으며 산야에 제각기 집단을 이루어 그저 우물을 파서 물 마시고 밭갈아 밥 먹을 정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구간(九干)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가야국(伽倻國) 초기(初期)의 아홉 추장(酋長). ≪삼국유사≫

 

 

  ​후한 광무제(光武帝) 18년-즉 신라 유리왕 즉위 19년(A.D.42) 3월 계욕일(鷄浴日)*이다. 그곳 북쪽의 구지(龜旨)*에서 뭔가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무리 2,3백 인이 그곳 구지봉에 모여들었다 사람의 말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를 내는 자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나고 있을 뿐이었다.

 

*계욕일 : 음력 3월 상사일(上巳日 :巳가 붙은 간지가 일진으로 든 날)에 액을 떨구어 버리는 의미로 목욕하고 물가에서 회음(會飮)하는 풍습이 있었다.

*구지(땅 이름 구, 거북 귀, 터질 균 / 뜻 지) : 이것은 산봉우리의 명칭이니 십붕(十朋:'역경'에 나오며 거북을 지칭함)이 엎드린 형상과 같아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소리는 이렇게 물었다.


"이곳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9간들은 응답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

소리는 또 물어 왔다.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가?"

그들은 응답했다.


"구지봉입니다. "

소리는 또 말했다.


"황천(皇天)께서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임하여 나라를 새롭게 열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위의 흙을 파면서 이렇게 노래하라."

부울경뉴스, 도정 권상호
구지봉, 허왕후가 가져온 돌


龜何龜何(구하구하) :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 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 구워서 먹으리.

 

작자 : 구간,  형식 : 4구체 한역 시가, 의식요, 집단 노동요. 불러내기-명령하기-가정하기-위협하기
연대 : 신라 유리왕 19년, 가락국 건국 때, 성격 : 주술적(呪術的), 서사적
별칭 : 영신군가, 영군가, 영신가, 가락국가, 표현 : 직설적 표현, 명령 어법
주제 : 수로왕 강림 기원, 생명 탄생의 염원, 출전 : <삼국유사> 권2, 가락국기
의의 : 현전 최고의 집단 무요, 주술성을 지닌 현전 최고의 노동요로 가락국 건국신화에 삽입된 주술적인 노래이다.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을 맞으면서 구간(九干)과 마을 사람들이 부른 '영신군가'이며, 원시 가요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고, 아류작으로 ‘해가’가 있다.
* 구지봉 :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산. 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태어난 곳. 높이는 200미터.


이 노래를 외치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아 너희들은 기뻐 날뛰게 될 것이다. "

9간들은 그 말대로 모두 기쁘게 노래부르고 춤추었다. 노래하고 춤춘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우러러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자색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고 있었다. 줄 끝을 찾아보았더니 붉은 보에 싸인 금합이 매달려 있었다.

그 금합을 열어 보았다. 해같이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김해. 조선펍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했다 그리고 그 알들을 향해 수없이 절을 했다. 조금 있다 도로 보에 싸가지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갔다. 탑상(榻上)에다 놓아 두고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도간은 하나라의 유창이 제후를 만나 맹세하였다는 곳으로 우완은 이 도산녀에게 장가들었다고 한다.

  꼭 하루를 지나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은 다시 모여들었다. 그리고 금합을 열어 보았다. 여섯 개의 황금알은 사내아이들로 화해 있었다. 용모들이 매우 준수했다. 상에 앉히고 무리들은 절을 드려 치하했다. 그리고 공경을 다해 모셨다.

  사내아이들은 날마다 커갔다. 10여 일이 지나갔다. 신장이 9척으로 은나라의 성탕(成湯)과 같았고, 얼굴이 용 같아서 한나라의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여덟 가지 색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은 당의 요제(堯帝)와 같았다. 그리고 눈의 동자가 둘씩 있는 것은 우(虞)의 순제(舜帝)와 같았다.

  그 달 보름날에 왕위에 즉위했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라 했다. 혹은 수릉(首陵 : 붕어한 뒤의 시호임 )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倻國)이라고 불렀다. 곧 6가야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을 경계로 하고 남쪽에 위치하여 우리 나라의 꼬리 부분이 된 곳이 가야의 영토다. 왕은 임시 왕궁(假宮)을 짓게 하여 들어가 거처했다. 질박·검소하게 하려고 풀로 이은 지붕에 처마는 자르지 않고, 흙으로 된 계단은 석 자를 넘지 않게 했다.

 

가야산. 시니어타임스



  ​즉위 2년(A.D.43) 봄 정월에 수로왕은 '서울을 정해야겠다'고 하며 궁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으로 나갔다. 사방으로 산악들을 바라보고 나서 왕은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신답평 : 이는 고래의 한전(閑田)으로서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납'은 속자다.

*신답(新畓) : 개간하거나 사서 새로 생긴 논

 

"이곳은 여뀌 잎사귀처럼 협소하구나. 그러나 지세는 빼어나서 가히 나한이 머무를 만한 땅임직도 한데 하물며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일곱을 이루었던 칠성(七聖)*이 살았던 땅이 진실로 여기에 부합됨에랴. 토지를 개척하여 터전을 열어 놓고 보면 마침내 훌륭하게 되리라. "

 

*칠성(七聖) : 7가지 정지(正智)*로서 진리를 조견(照見)한 이들을 이름. 7가지 정지란 수신행(隨信行) , 수법행(隨法行), 신해(信解), 견지(見至), 혜해탈(慧解脫), 구해탈(俱解脫), 신증(身證)이다.

*정지(正智) : [불교 ] 진리를 보는 바른 지혜.

  그리고는 둘레 1천5백 보의 나성(羅城:외성)과, 그리고 궁궐과 여러 관서의 청사와 무기고 및 창고를 건축할 터를 정한 뒤 환궁했다. 널리 국내의 장성, 인부와 장인들을 징용하여 그 달(12년 봄 정월을 가리킴) 20일에 금양(金陽)에서 성을 쌓기 시작하여 3월 10일에 이르러 역사를 마쳤다. 궁궐이며 관서의 청사 건축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그 공사를 진행시켰는데, 그 해 10월에 시작하여 그 이듬해, 즉 왕 즉위 3년(4.D.44) 2월에 이르러 낙성을 보았다.

  길일을 택하여 새로 지은 궁에 나아갔다. 그리고 만반의 정사를 장리(掌理)하며 온갖 정무에 근면했다. 완하국(琓夏國)이란 나라의 함달왕(含達王)의 왕비가 임신하여 낳은 알에서 깨어 나온 탈해라는 자가 문득 바닷가를 따라 가락국으로 왔다. 그의 신장은 석 자, 머리통의 둘레는 한 자였다. 탈해는 거침없이 수로왕의 궁궐로 들어갔다. 그리고 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왔소이다. "

신라왕 석탈해(이필모)


수로왕은 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여 나라 안을 태평케 하고 하민들을 안락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기고서 왕위를 줄 수 없으며, 또 감히 우리 나라 우리 백성들을 함부로 너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이다. "

 

김수로(지성)



탈해는 제의했다.


"그렇다면 서로의 재간으로써 승부를 결정함이 어떻겠소?"

 

왕은 응낙했다.

 

"좋다."

 

삽시간에 탈해는 한 마리의 매가 되었다 그러자 수로왕은 독수리가 되었다. 탈해는 또 참새가 되었다. 왕은 그러자 새매가 되었다. 그 동안이 잠깐도 걸리지 않았다.

텀블벅, 매일경제

탈해는 본신으로 되돌아왔다. 수로왕 역시 본신으로 돌아왔다. 탈해는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제가 술법을 다루는 마당에 독수리에 대해 매가, 새매에 대해 참새가 되었음에도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인의 그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의 소치로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제가 왕을 상대로 하여 왕위를 다투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


  그리고는 곧 인사를 드리고 나갔다. 탈해는 그 부근 교외의 나루로 나가 중국의 선박들이 항해해 오던 해로를 취하여 가려고 했다. 왕은 탈해가 체류하고 있다가 난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우려하여 급히 수군 5백 척을 내어 탈해를 쫓았다. 탈해는 달아나 신라의 땅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수군은 모두 되돌아왔다.

 

 




(이 기록에 실린 것은 신라의 것과 많이 다르다)

 


후한 광무제 24년 -즉 수로왕 즉위 7년(4.D.48) 7월 27일이다. 9간들이 배알 차 와서 왕에게 진언했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들에게 있는 처녀 가운데서 가장 예쁜 자를 뽑아 들여 배필로 삼도록 하십시오. "

왕은 답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천명이오. 나를 짝하여 왕후가 있게 됨도 또한 하늘의 명일 것이오. 그대들은 염려 마오."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경편(輕便, 가볍고 편안)한 배와 그리고 준마를 끌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다시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에 나아가 있게 했다.

 

*망산도는 가락국 서울 남방의 섬이요, 승점은 가락국 기내(機內)의 나라이다
  

  문득 가락국 앞 서남쪽 해상에서 붉은 빛깔의 돛을 걸고 붉은 빛깔의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가 있었다. 성산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천간 등은 먼저 횃불을 올렸다.

 

  배는 마구 내달아와 앞을 다투어 상륙하려 했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은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듣고서 흔흔히 기뻐했다. 그리고 9간들을 보내어 좋은 배를 내어 영접해오게 했다. 9간들이 즉시 대궐로 모셔 들이려 하자 

 

왕후는 입을 열었다. 

 

"나와 그대들은 평소 알아온 터수가 아닌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겠소?"

허황옥(서지혜)


  유천간 등은 돌아가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왕후의 말을 옳게 여겨 해당 관원들을 데리고 대궐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으로 가서 만전(幔殿 : 장막으로 친 임금의 임시 거처)을 치고 기다렸다. 왕후는 바깥쪽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매어 두고 육지에 올라 우뚝 솟은 산 언덕에서 쉬고 있었다. 거기서 왕후는 입고 있던 비단 치마를 벗어 산신령에게 예물로 드렸다. 그리고 왕후를 시종해 온 신하 두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라 했고, 그들의 아내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 있었다. 노예들까지 아울러 모두 20여 명이 되었다. 왕후가 가져온 화려한 비단이며 의상이며 금은 주옥이며 패물, 노리개들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는 점차 행재소(行在所 : 왕이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로 접근해 왔다. 왕은 나가 맞았다.

 그리고 함께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왕후를 시종해 온 신보, 조광 이하 모든 사람들은 뜰 아래에 나아가 뵙고는 곧 물러나왔다. 왕은 해당 관원에게 명령을 내려 왕후를 시종해 온 두 신하들 부처를 인도하여 각각 다른 방에 들게 하고 그 이하 노예들은 한방에 각각 5, 6명씩 들게 하고는 맛좋은 음료를 주고 좋은 침구로 재우게 했다. 그리고 가져온 의복이며 천들이며 보화들은 많은 군졸들을 둘러 세워 지키게 했다.

 

  비로소 왕과 왕후는 함께 침소에 들었다. 왕후는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阿踰타: 인도의 한 나라)나라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올해 5월 중의 어느 날 저의 부왕과 왕후는 저를 보고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꿈에 함께 옥황상제를 뵈었단다.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어 왕위에 나아가게 한 사람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신성스러운 분이다. 이제 새로 나라에 임하여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짓도록 하라 하시고는 도로 하늘로 올라가셨단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사뭇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바로 부모를 하직하고 그곳으로 가거라.'라고 말씀 하셨어요. 이리하여 저는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蒸棗)*를 찾아 하늘을 옮아 아득히 반도(蟠桃)*를 좇아 이렇게 외람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나이다. "

 

허황옥 루트, 레저경영

*증조는 곧 찐 대추로서 선인들의 약의 일종. 반도는 선계인들이 먹는 복숭아. 증조를 찾아, 반도를 좇아 왔다는 것은 선계로 신선을 찾아 왔다는 의미로 곧 왕을 찾아 왔다는 말이다. 왕은 종종 신선에 비유되었다.

  왕은 응대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들일 청을 했으나 함부로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왔으니 이 몸은 행복하오." 

  왕과 왕후는 드디어 어울려 들었다.

  이틀 밤 하루 낮이 지났다. 이제는 왕후가 타고 왔던 배를 본국인 아유타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배에 딸린 사람은 모두 15명, 각각 쌀 열 석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본궁으로 수레를 돌렸다. 왕은 왕후와 함께 타고, 왕후를 시종해 온 신하들도 수레를 나란히 하고, 그리고 가져온 그 이국의 패물들도 모두 싣고서 서서히 대궐로 들어왔다. 그 때 시간은 막 정오가 되려 했다.

왕후의 배. 영남매일


  왕후는 중궁(中宮)을 거처로 정했다. 시종해 온 신하들 부처와 남녀 사속들에게는 널찍한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종자들은 20여 칸짜리 빈관(賓官) 한 채에다 사람 수를 배정, 구별지어 들이고는 날마다 풍부한 음식을 주었다. 싣고 온 진기한 물건들은 안 창고에다 간수해 두고 왕후의 네 철 계절에 따라 필요한 양을 충당하도록 했다.

 


  어느 날, 왕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9간들은 다 백관의 장들이나 그 직위며 명칭이 무지 촌스러워 결코 벼슬자리에 있는 귀인의 칭호라곤 할 수 없다. 혹 어쩌다 문명된 외국인이 전해 들으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되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

  드디어 아도를 아궁(我躬)으로, 여도는 여해(汝諧)로, 피도는 피장(彼藏)으로, 오도는 오상(五常)으로 고치고, 유수와 유천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냥 두고 아랫 사만 고쳐 각·각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했다. 신천은 신도(神道)로 고치고 오천은 오능(五能)으로 고치고, 신귀는 음은 본래대로 두고 그 훈만 고쳐서 신귀(臣貴)라고 했다. 그리고 신라의 직제를 취해다 각간(角干)·앗간(阿叱干)·급간(級于)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 관료는 주나라의 규례와 한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배정했다. 이것이 곧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며 관서를 설치하고 직책을 배정하는 방도일 것이다.

허왕후와 김수로(인디고 브리지)


  이리하여 나라와 집안은 질서가 갖춰지게 되고,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므로 그 가르침은 엄숙히 작위를 짓지 않아도 저절로 위엄이 서고 그 정사는 엄격을 내세우지 않아도 잘 다스려져 갔다. 더욱이 왕이 왕후와 함께 있음을 비유하면 마치 하늘에게 땅이, 해에게 달이, 양(陽)에게 음(陰)이 있음과 같음에랴. 그리하여 그 공은 도산(塗山)의 딸*들이 하우(夏禹)를 도운 것과 같았고, 당요(唐堯)의 딸들이 우순(虞舜)을 일으킴과 같았다. 몇 년을 잇따라 곰을 얻은 몽조(夢兆)*가 있더니 왕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도산(塗山)의 딸 : 순의 아내가 된 요제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

*곰을 얻은 몽조(夢兆) : 곰 꿈을 꾸면 아들을 낳는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

  후한 영제 22년(A.D.189) 3월 1일에 왕후는 붕어했다. 향년이 157세, 나라사람들의 비탄은 대단했다. 구지봉 동북쪽에 있는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왕후 생전에 백성들을 사랑하던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왕후가 처음 가락국으로 와서 상륙했던 그 나루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부르기로 하고, 왕후가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에게 예물로 바쳤던 그 산언덕은 능현(綾峴), 붉은 빛깔의 깃발이 들어오던 그 바닷가는 기출변(旗出邊)이라 부르기로 했다.

가락국수로왕비(駕洛國首露王妃) 보주태후허씨릉(普州太后許氏陵) 비문(碑文)과 김해김씨 세보에 나오는 보주태후 허황옥

 

허황옥은 실존인물, 허구로 몰아가는 학계는 반성해야 - 한韓문화타임즈

허황옥 (?~188) 금관가야 시조인 수로왕의 비.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한다. 김해김씨(金海金氏)ㆍ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모.《삼국유사》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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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후를 따라온 신하 천부경(泉府卿)인 신보와 종정감(宗正監)인 조광은 가락국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딸 둘씩을 낳았다. 1, 2년을 더 지나 그들 부부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나머지 노예들은 온 지 7, 8 년이 지나도록 자녀들을 낳지 못하였고, 오직 고향을 그리는 슬픔을 안고 지내다 모두 죽어 갔다. 그들이 살던 집은 텅 빈 채 아무도 없었다.

  수로왕은 왕후가 간 뒤로 매양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여 비탄을 금하지 못하더니 왕후 간 지 10년이 지난, 후한 헌제(獻帝) 10년(A,D.199) 3월 23일 붕어했다. 향년은 158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부모를 여읜 듯, 왕후가 붕어했을 때보다 더욱 비통해 했다. 대궐의 동북방 평지에 높이가 한 길, 둘레가 3백 보 되는 빈궁을 축조하여 장사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 하였다. (하략)

수로왕릉(한국관광공사), 삼국유사(일연,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가락국기(駕洛國記)

 

  

핵심 정리

  • 형식 : 건국신화
  • 성격 : 상징적, 신화적, 신성성
  • 주제 : 수로의 강림과 가락국 건국의 유래
  • 의의 : 최고(最古)의 집단무요인 구지가를 삽입가요로 가지고 있다.
  • ‘거북’과 ‘머리’의 의미: 기원의 대상, 구지봉의 신령(神靈), 신성한 동물, 숭배 대상인 토템 동물(단군 신화의 곰이나 호랑이와 같은 존재), 제의의 희생 동물, 남근 숭배의 상징물(Phallic symbol), 거북 몸은 여신이며 거북 머리는 남근 상징-> 양성 구유(兩性具有, androgyny)의 상징, 구지봉의 산신(여신), 거북의 머리는 군주.
  • 기원의 대상에게 명령과 위협의 언사를 사용한 이유: 토테미즘의 세계에서는 토템 자체를 식용으로 삼는 것을 금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특별한 제의 중에는 토템을 살해하고 먹음으로써 신령스러운 대상과 집단이 일체감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점복 의식(占卜意識)의 상징적 표현-> 새로운 우두머리의 출현을 예언하는 행위. 다른 곳에서 들어온 토착 세력인 수호신을 위협하여 자신의 존재를 우월하게 드러내려는 의도-> 복종 강요-> 불가피한 상황. 불로써 정치하겠다는 뜻.

 

 

줄거리

  천지개벽 후에 이 땅에는 아직 나라로 부르는 칭호가 없고 역시 임금이나 신하라고 부르는 칭호도 없었다. 다만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류수간, 류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의 아홉 간이 있었고 이들이 추장이 되어 백성을 통솔하였다. 호수는 무릇 1백 호에 7만 5천 명이었다. 저마다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먹었다.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날 이곳 북구지에서 무엇이 수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었으므로 2~3백 명 되는 무리가 모였다. 사람 목소리 같은 소리가 나는데 형체는 감추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거기 누가 있느냐?” 하였다. 아홉 간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있습니다.” 하니 그 목소리가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이 어데인고?” 하여 “구지외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말하기를 “하느님이 나를 명령한 까닭은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러기 위하여 여기 내려온 것이다.

 

  너희는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의 흙 한 줌씩을 쥐고 노래를 불러 ‘거북아 거북아/머리를 내밀어라/만약 아니 내놓으면/불에 구워 먹겠다.’ 하면서 춤을 추면 이것이 대왕을 마중하여 즐겨 뛰노는 것으로 될 것이다.” 하였다. 아홉 간이 그 말대로 모두 즐겨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얼마 안 되어 쳐다보니 보랏빛 노끈이 하늘로부터 드리워 땅에 닿아 있었고 노끈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로 싼 금합이 있었다. 합을 열어 보니, 둥글기가 해 같은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놀랍고도 기뻐서 함께 수없이 절을 하다가 조금 뒤에 다시 알을 싸 가지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 위에 두고는 각각 흩어졌다.

 

  그 후 열두 시간이 지난 다음 날, 날이 샐 무렵에 무리가 다시 모여 합을 열었더니 알 여섯 개가 사내아이로 화하였는데 얼굴들이 매우 틀스러웠다.(겉모양이 듬직하고 위엄이 있다) 이들이 이내 평상 위에 앉으니 무리가 축하하며 절을 하고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였다. 그들은 나날이 장성하여 10여 일의 밤낮을 지났다. 키가 9척이매 은나라 천을이라 할 수 있었고, 얼굴이 용 같으매 한나라 고조라 할 수 있었고, 눈썹이 여덟 가지 빛깔이매 당나라 요임금과 같았고, 눈동자가 겹으로 되었으매 우나라 순임금과 같았다. 여섯 개의 알 중에 가장 먼저 사람으로 변한 이가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오르니,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 혹은 ‘수릉’이라 하고 나라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고 일컬었으니, 즉 여섯 가야의 하나이다. 남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해와 감상

  삼국유사 권2 기이, '가락국기'에 전하는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시조신화이며 건국신화. 건국자인 수로왕의 탄생과 혼사, 그리고 즉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이 점에서 김수로왕신화는 단군신화나 혁거세신화 혹은 동명왕신화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건국신화인 점에서 <단군신화>, <동명왕신화>, <박혁거세신화> 등과 같지만,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일대기의 순차적 구조로 보면 그 계통에 차이가 난다. <동명왕신화>와 <석탈해신화>는 부계의 부정(否定)으로 말미암은 탄생의 시련 그리고 건국주로 등극하기 위한 시련과 투쟁이 구조화되어 있다. 반면 <박혁거세신화>와 <김수로왕신화>는 부계와 모계를 동시에 부정하지만, 탄생의 시련을 겪지 않고 건국주로 등극하는 데 투쟁이 없는 구조이다. 전자를 ‘사생아 유형의 신화’라 하고 후자를 ‘업둥이형 신화’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보면 <김수로왕신화>는 건국신화이자 시조신화이면서 업둥이형의 집단 무의식이 투영된 신화라 할 수 있다.

 

  수로의 탄생과 등극 이야기는 수로의 신성성과 왕위의 당위성을 제공한다. 이주집단인 수로집단이 초기에 이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였고, 이어 수로집단이 선주집단과 동화되었다는 점을 상정하면 전승집단은 변이를 허용하지 않았으리라 추정한다. 다만 현재 구비전승 중에는 김수로왕의 후손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징표에 관한 <김수로왕설화>가 있다. 이는 후손들이 그들의 시조인 김수로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집단 의식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하늘에서 내려와 하늘의 뜻대로 지상을 다스리는 첫 군왕이 곧 김수로왕이고, 그러한 왕을 받들고 있는 거룩한 왕국이 곧 금관가야라는 이념이 다른 건국 시조신화와 마찬가지로 강하게 투영되어 있으나 몇 가지 점에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여러 씨족이 연합되어 이룩된 통합적인 왕국의 창건에 관한 신화라는 점에서 각별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즉, 개벽한 뒤로 국호도 없이 다만 아도간(我刀干)·여도간 (汝刀干) 등 아홉 사람의 추장(구간)이 백성들을 통솔하고 있는 땅에 김수로왕은 하늘의 신으로서 강림하였다. 주인공이 이 같이 씨족연합사회의 통합된 군장으로서 하강했다는 점에서는 혁거세신화와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둘째, 신화 내용이 직접 신에게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3월 계욕일에 즈음하여 구지봉에 2백∼3백 인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인 구간(九干)은 직접 하늘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에 응답하였고, 그 결과 신의 내림을 받았다. 그 목소리는 “황천(皇天)이 나로 하여금 이곳을 다스려 새로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기에, 내 여기에 내리고자 하노라.”고 하면서 구간들에게 춤추고 노래하며 그를 맞이하기를 요구했고, 하늘의 신이 시키는 대로 실행하여 신을 맞이한 부분이 김수로왕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신이 직접 인간에게 한 말을 신탁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무속신앙에서는 그것을 ‘공수’라고 부른다.

 

  김수로왕신화는 공수와 공수의 내용대로 사람이 실천한 행동을 중핵(사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이 신화의 신화다움은 신 자신에 의해 결정되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신이 직접 이야기한 신 자신에 관한 얘기가 곧 이 신화의 핵이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서 옮긴 것뿐이다. 신화의 공수다움은 우리 신화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속성이나, 그것을 문헌에서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는 유일한 경우는 바로 김수로왕신화이다. 그런 뜻에서 이 신화는 한국신화가 지닌 기본적인 성격을 성문화(成文化, 글이나 문서로 나타내)해서 전해주고 있는 셈이다.

  셋째, 이 신화는 ‘신맞이 신화’라는 것이다. 신내림을 받드는 신맞이 신화라는 성격은 혁거세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공수다움과 신맞이라는 두 요소가 어울림으로써 한국신화의 기본적인 유형을 얻게 된다. 공수를 받들어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이 신내림을 받은 얘기라는 한국신화의 기본 골격이 갖추어진 것이다. 신맞이 신화는 당연히 신맞이굿과 겹쳐져 있다.

  실제로 김수로왕신화는 신이 하늘에서 소리하면서부터 지상에 출현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이란 사람들이 공수를 받들어 노래하고 춤춘 부분이자 육체로 연행된 신화란 점에서, 이 신화는 굿과 짝지어져 있다. 신화가 말로써 하는 풀이라면, 그 풀이가 사실은 말에 담겨 표현되기 이전에 행동에 담겨 표현되어 있었다. 김수로왕신화가 지닌 구술적인 서사진행은 먼저 육체에 의거해 있었다. 이 사실은 우리 신화의 기원에 관한 좋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른바 제의학파적(祭儀學派的, 신화의 기원을 제의의 구술적 상관물로 보는 학파)인 신화기원론이 적용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이 신화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김수로왕신화가 곧 굿이었다는 명제는 오늘날에까지 남겨져 있는 굿을 신화와 연관지어서 바라볼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실제로 이 신화의 줄거리, 특히 신맞이 부분은 오늘날의 별신굿의 신맞이 절차를 연상시켜 주기에 알맞다. 그런 뜻에서 고구려의 수신제(隧神祭)의 기록과 함께 김수로왕신화는 한국 민속종교를 통시적으로 부감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서 강조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에 남겨진 별신굿과 도당굿은 〈가락국기〉의 신맞이 부분과 수신제를 재현하고 있다. 별신굿은 상고대 신화가 오늘에 남겨진 모습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별신굿의 원류로서 부각되는 김수로왕신화는 한국인의 신명 내지 신바람의 원형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신명이 신이 지펴서 나타나는 앙분상태와 도취상태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당 개인의 종교적 체험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별신굿이나 도당굿에서 집단적으로 겪는 종교적 체험이기도 하다.

  별신굿에서 신내림은 원칙적으로 무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별신굿이 진행되면서 무당이 겪은 신지핌의 상태는 마을 안에 번져간다. 접신 상태의 집단적 감염현상이 일어나고, 거기에 춤과 노래와 더불어 흥이 더해지면 별신굿판의 신명은 아주 결정적인 것이 된다. 김수로왕신화는 춤과 노래로 받든 신내림 부분을 통해 가장 오래된 신바람의 현장을 오늘에 전해 주고 있다.

김수로왕신화는 결국 건국 시조신화라는 골격 속에서 다른 신화들에서 볼 수 없거나, 볼 수 있다고 해도 단편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한국 종교사적인 의미를 가장 풍족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신화의 독특한 개성이라고 생각된다.

  가락국의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했던 역사적 연구와 <구지가(龜旨歌)>의 해석을 중심으로 한 문학적 연구 그리고 고대 제의와 관련지어 설명하려고 했던 민속학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문학적으로는 무엇보다 신화의 전체 맥락, 텍스트의 표층과 심층, 건국신화 유형 전체를 살펴 <김수로왕신화>의 문학적 가치를 밝히고자 하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김수로왕신화>가 왕들의 즉위 의례에 관한 구전 상관물이라는 사실과 <구지가>가 불제(祓除) 의식의 축귀요(逐鬼謠)라는 점을 밝힌 연구, 신화의 서술 원리의 특수성에 대한 연구, 건국신화의 제의적 서사구조의 맥락에서 <김수로왕신화>의 제의적 구조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김수로왕신화>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은 의미의 층위를 더욱 다양화하고 있고, 특히 최근에는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방안에 관한 연구들이 이루어져 신화의 현재적 의의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하는 건국 및 시조신화로서 <김수로왕신화>는 수로왕의 탄생과 혼사 그리고 즉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이들 신화적 내용은 첫째, <박혁거세신화>에서도 발견되듯이 여러 씨족이 연합하여 이룩된 통합 왕국의 창건에 관한 신화라는 점에서 특이성을 띤다. 둘째는 신화의 내용이 직접 신에게서 주어졌다는 점은 다른 건국신화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셋째는 수로가 등극하기까지는 시련과 시험이 없고 등극 후에 시련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다른 건국신화와 구별된다. 넷째는 결연담을 통한 집단 내부로의 동화가 등극 후에 나타난다는 점은 <주몽신화>, <석탈해신화>와 구별된다. 다섯째는 수로의 트릭이 선주집단과의 이질성과 차별성을 강조하여 탁월성을 드러내 왕위 등극의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동질성과 융합을 위해 트릭을 쓰는 <석탈해신화>와 구별된다. <김수로왕신화>의 이러한 특징은 지속적인 제의화, 민속화, 전설화를 가능케 하는 원천이 된다.

  문화의 원천이 되는 신화의 대중화 혹은 실용화라는 시대 요청에 응할 때 이 신화는 그 의의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집단 구성원 전체가 새로운 문명과 체제를 맞아 커다란 가치관의 혼란을 겪던 시점의 이야기로, 새롭고 더욱 강력한 의식성을 갖추어 나가는 정신적 변환 과정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에 교육과 치유에서 이야기 만들기의 보편 공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이 신화가 왕의 즉위 의례 혹은 신맞이굿의 구술상관물이라는 성격을 띤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발성과 창의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심리극으로 활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김수로왕신화>가 춤과 노래로 표현되는 샤머니즘, 영웅 탄생의 구조를 보이는 영웅서사, 김수로왕과 허황옥이라는 영특한 두 남녀의 로맨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콘텐츠화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韓國의 神話(金烈圭, 一潮閣, 1976), 韓國神話와 巫俗硏究(金烈圭, 一潮閣, 1977), 首露王考(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9). 가락국기 서사원리의 구성원리에 관한 일고찰(김영일, 가라문화5, 경남대학교 가라문화연구소, 1987), 김수로왕신화의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방안 연구(방지영,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수로신화의 서술 원리의 특수성과 그 현실적 의미(이강옥, 가라문화5, 경남대 가라문화연구소, 1987), 수로왕신화의 연구(김화경, 진단학보67, 진단학회, 1989), 수로왕 탄생신화의 심리학적 해석(박현순, 한국심리학회지24, 한국심리학회, 2005),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전연구사간. 국어국문학자료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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