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전문

장용학 '요한시집' 전문

열공햐 2021. 2. 26.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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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시집

장용학

 

한 옛날 깊고 깊은 산속에 굴이 하나 있었습니다. 토끼 한 마리 살고 있는 그것은 일곱 가지 색으로 꾸며진 꽃 같은 집이었습니다. 토끼는 그 벽이 대리석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나갈 구멍이라고 없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게 땅 속 깊이에 쿡 막혀 든 그 속으로 바위들이 어떻게 그리 묘하게 엇갈렸는지 용히 한 줄로 틈이 뚫어져 거기로 흘러든 가느다란 햇살이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것처럼 방안에다 찬란한 스펙트럼의 여울을 쳐 놓았던 것입니다. 도무지 불행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일곱 가지 고운 무지개 색밖에 거기에는 없었으니까요.

그러던 그가 그 일곱 가지 고운 빛이 실은 천장 가까이에 있는 창문 같은 데로 흘러든 것이라는 것을 겨우 깨닫기는 자기도 모르게 어딘지 몸이 간지러워지는 것 같으면서 그저 까닭 모르게 무엇이 그립고 아쉬워만 지는 시절에 들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이 깊은 땅 속에서도 사춘기는 찾아온 것이었고, 밖으로 향했던 그의 마음이 내면으로 돌이켜진 것입니다. 그는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고운 빛을 흘러들게 하는 저 바깥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

이를테면 그것은 하나의 개안(開眼)이라고 할까. 혁명이었습니다. 이때까지 그렇게 탐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던 그 돌집이 그로부터 갑자기 보잘것없는 것으로 비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는 올빼미가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바깥 세계로 나갈 구멍은 역시 없었습니다. 두드려도 보고 울면서 몸으로 떠밀어도 보았으나 끄떡도 하지 않는 돌 바위였습니다. 차디찬 감옥의 벽이었습니다. 갇혀 있는 자기의 위치를 깨달아야 했을 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곳에서 살게 되었던가?

모릅니다. 그런 까다로운 문제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아도 일곱 가지 색으로 엉클어지는 기억 저쪽에 무엇이 무한한 무슨 느낌을 주는 무슨 세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금 눈망울에 그리고 있는 바깥 세계를 두고 그렇게 느껴지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면서부터 이곳에 산 것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야 바깥 세계가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바깥 세계에서 들어온 것만 사실이다. 저 빛이 저렇게 흘러드는 것처럼…….


이렇게 그날도 한숨 섞인 새김질을 되풀이하던 그의 귀가 무슨 결에, 쭈뼛 놀란 것처럼 곧추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생일날의 일입니다. 생일날도 반가운 것이 없어 멍하니 이제는 나갈 구멍 찾는 생각도 말고 그저 창을 쳐다보고 있던 그였습니다. 그렇게 축 늘어졌던 그의 기다란 귀는 한 번 놀라 쭉 곧추서선 도로 내려올 줄 몰라했습니다.

떨리는 가슴을 누르면서 조심스럽게 그는 일어섭니다. 발소리를 훔치면서 창 아래로 다가섰습니다. 발돋움을 하면서 그리로 손을 가져가 봅니다.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쑥 내밀어 봅니다. 그래도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방 안이 떠나갈 듯한 고동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상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손을 다시 그 창으로 가져가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만 소리도 못 지르고 소스라쳤습니다. 방 안이 새까매졌던 것입니다. 기급을 먹고 옆으로 물러서면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몇 날 몇 밤 그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생일날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창으로 나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상 천외의 착안(着眼)을 끝내 해낸 것이니까

거기로 흘러드는 빛이 없이는 이 무지개 색의 집도 저 바깥 세계가 있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암벽(岩壁) 보다 더 철석같아서 오히려 무(無)처럼 보이는 그 창 구멍으로 기어나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마침내 해냈다는 것은 저 지상에 살고 있는 토끼들이 공기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 발견이라기보다 발명을 해낸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에 못지않게 위험한 사상이었습니다. 손만 가져갔어도 세계는 새까맣게 꺼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열은 물러갔습니다. 그는 그 창으로 기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가다가 넓어진 데도 있었지만 벌레처럼 뱃가죽으로 기면서 비비고 나가야 했습니다. 살은 터지고 흰 토끼는 빨갛게 피투성이였습니다. 그 모양을 멀리서 보면 마치 숨통을 꾸룩꾸룩 기어오르는 객혈(喀血) 같았을 것입니다.

뒤로 덮어 드는 암흑에 쫓기는 셈이었습니다. 몇 번 도로 돌아가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라는 것은 이제는 되돌아가는 길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보다 더 멀어지고, 그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수록 앞길 또한 멀어만 지는 것같이 느껴질 때입니다. 그는 지금 한 걸음이라도 앞선 거북은 아킬레스의 날랜 다리를 가지고도 끝끝내 앞지를 수 없다는 궤변(詭辯)의 세계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빠져드는 길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렇게 기었는지 자기도 모릅니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었습니다. 귀가 간지러워진 것입니다.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새 우는 소리였습니다. 소리라는 것을 처음 들어 본 것입니다. 밀려 오르는 환희와 함께 낡은 껍질이 벗겨져 나가는 몸 떨림을 느꼈습니다. 피곤과 절망에서 온 둔화(鈍化)는 뒤로 물러서고 새 피가 혈관을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은 그렇게 뛰는데 그의 발은 앞으로 움직여지지 않아 합니다. 바깥 세계는 이때까지 생각한 것처럼 그저 좋기만 한 곳 같지도 않게 생각되는 것이었습니다. 뒷날, 그때 도로 돌아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러나 그때 누가 있어 도로 돌아가거라 했다면, 그는 본능적으로 자유 아니면 죽음을! 하고 감상적(感傷的) 포즈를 해 보였을 것입니다. 마지막 코스를 기어 나갔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관문에 다다랐습니다.

이제 저 바위틈으로 얼굴을 내밀면 그 일곱 가지 색 속에 소리의 리듬이 춤추는 흥겨운 바깥 세계는 그에게 그 현란한 파노라마를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전율하는 생명의 고동에 온 몸을 맡기면서 그는 가다듬었던 목을 바위틈 사이로 쑥 내밀며 최초의 일별을 바깥 세계로 던졌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쿡! 십 년을 두고 벼르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홍두깨가 눈알을 찌르는 것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정신을 돌린 그 토끼의 눈망울에는 이미 아무것도 비쳐 드는 것이 없었습니다. 소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일곱 가지 색으로 살아온 그의 눈은 자연의 태양 광선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토끼는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향에 돌아가는 길이 되는 그 구멍을 그러다가 영영 잃어버린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고향에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거죽에 나타내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그가 죽은 그 자리에 버섯이 하나 났는데 그의 후예(後裔)들은 무슨 까닭으로인지 그것을 자유의 버섯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 버섯 앞에 가서 제사를 올렸습니다. 토끼뿐 아니라 나중에는 다람쥐라든지 노루, 여우 심지어는 곰, 호랑이 같은 것들도 덩달아 그 앞에 가서 절을 했다고 합니다. 효험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고 그러니 제사를 드리나마나였지만, 하여간 그 버섯 앞에 가서 절을 한 번 꾸벅하면 그것만으로 마음이 후련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버섯이 없어지면 아주 이 세상이 꺼져 버리기만 할 것 같았습니다.

1

해는 지붕 위에 있었다.

서산에 기울어 버린 햇발이었지만 이렇게 지붕 위로 보니 내려앉으려던 황혼은 뒤로 밀려가고 하늘이 도로 밝아 오르는 것 같다. 곳에 따라 시간이 이렇게도 느껴지고 저렇게도 느껴진다. 어느 시간이 정말 시간인가?

시계(時計)가 가리키는 시간과 위치(位置)가 빚어내는 시간. 이 두 개의 시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빈 터에서 놀 때 자유(自由)를 느낀다. 우리에게 두 개의 시간을 품게 한 이러한 빈 터가 결국은 나를 두 개의 나로 쪼개 버린 실마리였는지도 모른다.

공간 속을 시간이 흐르는 것인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 공간이 분비(分泌)되어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지붕 위에 앉게 된 해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時間)은 공간(空間)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이 관계 위에 현재(現在)의 질서(秩序)는 자리 잡은 것 같다.

이 공간에 갇혀 있는 시간이 가령 그 벽을 뚫고 저 쪽으로 뛰어나가게 되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시선(視線)이 그리로 가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물체에서 반사된 광파(光波)가 망막에 비쳐 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진대, 마치 음속(音速) 보다 빠른 비행기를 타면 아까 사라진 소리를 쫓아서 다시 들을 수도 있는 것처럼 빛보다 더 빠른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르면서 지상(地上)을 돌아다보면 우리는 거기에 과거(過去)를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비행기는 자꾸 날아오른다. 지상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이 보인다. 과거 쪽으로 흘러가는 사건의 흐름이 보인다.

거기서는 밥이 쌀이 된다. 입에서 나온 밥이 숟가락에서 그릇으로 내려앉고, 그릇에서 솥으로, 그 솥이 끓어올랐다가 아주 식어진 다음 뚜껑을 열어 보면 물속에 가라앉은 쌀이다. 뚝배기에 옮겨서 헤엄치고 나오면 겨가 붙어서 가게에 있는 쌀처럼 된다. 싸전에서 정미소로 가서 껍질을 붙이고 밭으로 간다. 여럿이 모여서 벼이삭에 달린다. 이렇게 해서 몇 달이 지나면 그들은 땅속 한 알의 씨가 된다…….

이렇게 보면 거기에도 하나의 생성(生成)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世界)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역사(歷史)가 생겨진다.

어느 생성(生成)이 여물어 가는 열매인가?

쌀이 밥이 되는 변화(變化)와 또 밥이 쌀이 되는 변화(變化)와…….

어느 세계(世界)가 생산(生産)의 땅인가? 밤이 낮이 되는 박명(薄明)과 낮이 밤이 되는 박명(薄明)과…….

어느 역사(歷史)가 창조(創造)의 길이고, 어느 역사(歷史)가 멸망(滅亡)인가?

어떻게 되는 것이 창조(創造)이고 어떻게 되는 것이 멸망(滅亡)인가?

어느 쪽으로 흐르는 시간이 과거(過去)이고 어느 쪽으로 흐르는 시간이 미래(未來)인가……?

망상에 사로잡혔던 내 몸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킨다. 쳐다보니 동체가 두 개인 수송기가 초여름의 저녁 하늘을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엉겁결에 그늘을 찾으려고 했던 나는 그러나 경련이 그다지 심하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다. 가슴이 좀 울렁울렁해졌었을 뿐이었다. 폭격에 놀랐던 가슴도 그동안 거의 그 건강을 회복한 것 같다.

하꼬방 앞으로 가까이 갔다. 섬에서 돌아오면서부터 며칠 걸려 겨우 찾아낸 집이었지만 나는 아까부터 주인을 찾는 것이 무서워졌었다. 귀찮았다. 발을 들어 조금 떼밀어도 말없이 쓰러질 것 같은 이 따위 집에도 주인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불평(不平)이다. 그러나 이런 집일수록 주인이 있어야 하기도 했다. 주인마저 없다면 벌써 언제 무너져 내렸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저 성곽 같은 큰 집에도 주인은 한 사람이라는 것은 좀 이해하기 곤란하다. 우리는 무슨 숨바꼭질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올라오는 길에, 한 노인이 문간에 앉아 쌀, 보리, 콩 같은 것이 뒤섞인 것을 한 알 한알 골라내고 있었다. 그 황혼 오 분 전의 작업을 캔버스에 옮겨 놓는다면 그 제명(題名)은 백발(白髮)이 원색(原色)을 골라내다라고 하면 좋겠다. 지금 르네상스의 후예(後裔)들이 자기들이 칠하고 칠한 근대화(近代畵) 도료(塗料)를 긁어 벗기는 데에 여념이 없다. 원색(原色)을 골라서 내는 연금술(鍊金術)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리상의 발견 시대(時代)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지 않은가.

저 아래 거리에서 내일 아침 신문을 팔지 못해 하는 어린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이 낭비(浪費)의 20세기(世紀)를 까마귀는 저 마른 나뭇가지 위에서 저렇게 황혼을 울고 있나 보다.

까악, 까악……

나는 하꼬방을 두고 여남은 걸음 그리로 올라갔다. 돌을 주워 들었다. 까악, 까마귀는 그다지 대단해하지 않아 하면서도, 푸드덕 하늘로 날아오른다. 손에 들었단 돌을 버리려고 하다 말고 까마귀가 앉아 있었던 가지를 향하여 힘껏 던졌다. 그래서 까마귀가 산 너머로 날아가 버린 그 고목 아래에 가서 내가 앉아 보았다.

수평선은 늘 그 저쪽이 그리워지는 무(無)를 반주하고 있었다.

그 저쪽에 뭐가 있다는 말인가. 여기와 같은 언덕이 질펀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을 뿐이 아니겠는가. 거기서는 또 누가 이리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 아닌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 무슨 시늉인가……

그런 숨바꼭질하기에는 해가 다 저물었다. 수평선을 들어서 옆으로 치우고 탁 트이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담을 쌓아서 막아 버려야 한다. 결국 따지고 보면 질펀한 것만이 태연해질 수 있는 오늘 저녁이 아닌가. 내일 아침이 올지 말지 하더라도 끝난 오늘은 끝난 오늘로서 아주 결단을 내버려야 한다. 우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진리를 찾는다고 하여 애매한 제스처를 부려서는 안 된다. 차라리 그 진리를 버려야 한다. 그런 제스처 때문에 이 공기가 얼마나 흐려졌는지 그것을 정확하게 계량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 시시해질 것이다.

나는 여기 이 나무 아래를 그리워해야 할 것이다. 아까 저 산기슭에서 이리를 쳐다보았을 때 하꼬방 뒤가 되는 이 한 손을 외롭게 하늘로 쳐들고 서있는 고목이 얼마나 눈물겹게 느껴졌던 것인가. 그런데 지금은 벌써 수평선 저쪽을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매소부가 아니다. 필요하다면 산기슭에 도로 내려가서 다시 여기를 눈물겨워 쳐다보아도 좋다. 부슬비 내리는 밤 부엉새가 우는 소리를 듣는 것 같은 감회에 다시 사로잡히는 것이 나의 의리(義理) 여서도 좋다.

지금도 부엉새는 울고 있을 것이다. 고향 K성(城), 동북 모퉁이가 되는 망루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산기슭에 외따른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그리크지 않은 성이라 들놀이, 고기잡이, 전쟁놀이 이런 것으로 어린 시절 십여 년을 뛰어놀던 모퉁이마다 이런 추억, 저런 추억, 추억은 꼬리를 물고 성벽에서 성벽으로 이어져, 눈을 감으면 고향 산천이 한눈 안에 떠올랐건만 봄이면 뻐꾹새도 그리도 울어 대는 그 초가집 일대는 한 번 떠오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아까 저 산기슭에서 이리를 쳐다보았을 때 망각의 안개를 헤치고 되살아 올랐던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는 하나의 귀향(歸鄕)이었다.

동호야…….

나는 내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그 근처에 대답해 주는 소리는 있지 않았다, 석양이 어린 경사를 적막이 흘러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이 불안스러워졌다. 이 자리를 떠나고만 싶다. 곁눈으로 내 옆에 누워 있는 그림자를 더듬어 보았다, 무뚝뚝한 것이 내 그림자 같지 않았다. 다른 누가 여기에 앉아 있어 그의 그림자가 거기에 그렇게 비쳐 있는 것만 같다

동호!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내 소리 같지 않았고,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 소리는 비감이 어린 비명이었다. 그래서 얼결에 기겁을 먹고 누구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내 입술은 불쑥 떠오른 침입자(侵入者) 때문에 그만 켕겼다.

할아버지의 산소가 거기 있었던가……?

갑자기 믿기 어려웠으나, 저 하꼬방에서 바로 이만큼 떨어진 곳이었다. 할아버지의 산소가 그 초가집에서 바로 이만큼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소나무의 두툴두툴한 그늘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그동안 나는 어디에 가 있었던가? 그 동안 할아버지의 산소는 어디에 있는 것으로 해 두고 있었던가? 그 산소 뒤에 피어 있는 진달래를 꺾다가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었던 일은 기억에 남아 있었으면서도 그 산소가 거기 있다는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잊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까 그렇게 놀랐을까…….

머릿속이 얼떨떨해진다. 이러한 행방불명 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이러한 [행방 불명] 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것을 모두 한데 모아 놓으면 욱실욱실할 것이다. 그것은 여기에 앉아 있는 동호보다 더 큰 무더기가 될 것이다!

나는 나의 일부분을 살고 있는 셈이 된다. 나는 나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동호는 나인가? 나는 나인가? 아까 동호를 불렀는데도 내가 끝내 대답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후우, 긴 한숨을 내쉬려던 나는 또 난데없이 휩쓸려 드는 생각에 그만 숨이 꺾였다. 그 초가집이 우리집……?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사과나무는 서문 밖에 어엿이 서 있었다. 돗자리를 펴놓은 그 그늘 아래에 한쪽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늘 배만 쓰다듬던 할아버지가 일생을 마친 우리 집은 그 굴뚝이 서문 밖에 서있는 그 사과나무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일지라도 그 사과나무를 이제 와서 산기슭인 그 초가집 굴뚝 옆에 옮겨다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하느님도 옮겨다 놓을 수 없다. 옮겨다 놓지 않는다. 그것은 나도 믿는다.

그러나 언제 무슨 결에 거기에 가 턱 서있는 것으로 되어 버리면 어쩌겠는가……. 그땐 누구를 붙잡고 울면 좋다는 것인가?

아, 그때는 내 눈썹이 내 볼따귀에 가서 붙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눈썹이 내 볼따귀에, 내 발가락이 내 무르팍에 가서 더덕 붙어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과나무는 그 초가집 굴뚝 옆에 가서 턱 서 있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이 세계가 그렇게는 곪지 않았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내 손은 나도 모르게 돌멩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몸이 추워진다. 볼을 만져 보는 것이 두렵다. 무르팍을 만져 보는 것이 무섭다.

설마라구?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번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만이다. 이런 것을 사실이라고 한다. 진실은 사실을 가지고 고칠 수 있지만, 사실은 천 재의 진실을 가지고도 하나 고치지 못하는 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였다. 세계는 그렇게 바윗돌 같으면서 달걀처럼 취약하다.

나는 거의 올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저는 아무리 꽉 쥐어도 달걀은 그렇게 보여도 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누가 하였는가. 깨어지면 어쩔 터인가? 그때는 눈썹이 볼따귀에 발가락이 귀밑에 가서 더덕 붙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시인한다는 말인가…….

있는 모든 힘을 손가락 끝에 집중시켰다.

이래도 안 깨어지나……이래도……이래도…….

이마에 땀이 배었다. 손을 놓았다. 달걀은 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깨어지지 않은 것은 내가 깨어지는 것을 사실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깨어지는 날에는 내가 서 있는 이 세계가 깨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야합(野合)한 것이다. 두려워하는 내 마음을 누가 벌써 내통해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통 위에, 달걀은 그저 쥐기만으로는 깨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있는 모든 힘을 내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못 내게 되어있다. 공기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말 속에 살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만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것은 ?말? 뿐이었다. 인간은 그 입에 지나지 않았다. 입으로서의 운동(運動), 이것이 인간 행위의 전체였다.

지금은 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있어서도 깨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가지고? 지금의 현재를 가지고?…… 그러나 다음 순간은 현재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의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따라다녔을 뿐이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나의 앞장을 내가 서서 나의 길을 걸어 본 적이 있었던가? 없다! 한 번도 없었다. 늘 전봇대를 따라다녔고, 늘 기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한 번도 기차에 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기다렸고 그래도 따라다녔다. 왜? 길에는 전봇대가 있었고, 정거장에는 대합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비참하고 시시하다. 어째서 살아 있는 것이 그래도 낫고, 죽는 것이 그래도 나쁜가?

생각하면 한이 없다. 그저 모든 것을 보류해 두면서 따라다니고 기다리고 하는 수밖에 없다. 생(生)이란 모든 것을 보류(保留)하기로 한 약속 밑에 이어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러다가 죽으면 모든 것을 보류해 준 채로 죽는 것이 된다.

아직도 손에 쥐어져 있는 돌멩이를 거기에 버리고 하꼬방으로 내려갔다. 이제 보니 지붕까지 레이션 상자가 아닌 것이 없다. 집으로 변장한 레이션 상자 속에 누혜의 어머니는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내 눈망울에는 레이션 상자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던 전쟁터의 광경이 떠오른다.

그것은 2년 전 어느 일요일이다.

발광한 이리 떼처럼 인민군은 일요일을 잘 지키는 미제의 진지로 돌입하였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레이션 상자 속에는 먹다 남은 칠면조의 찌꺼기가 들어 있는 것도 있었다. 정치 보위국 장교는 그 것을 일요일의 선물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뭐든지 어떤 한 가지를 모든 것에 결부시켜 종내는 그것을 말살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일요일의 「일요일의 공세」「승리의 일요일」「일요일의 후퇴」……「일요일의 휴가」 「인민」도 그랬고「自由」도 그랬고 마르코시즘도 그렇게 해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우리 의용군 고아 들은 한 손에 닭다리를, 한 손에 수류탄을 움켜쥐고 50년 전의 자본주의를 향하여 만세 공격을 되풀이하였다.

삼백 년 묵었으리라 싶은 돌배나무가 육중하게 서 있는 야트막한 능선을 막 뛰어내리려 한 순간이었다. 퍽! 벌써 시꺼먼 화염이 휭, 돌배나무를 뒤덮는 것과 함께 꽝, 천지가 육시를 당했다. 개미 수염만 한 내 숨은 그 폭음에 눈썹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들이쉰 대로 메워졌다. 오장이 훑어져 나가는 것 같은 내 몸은 언제 저 폭격기가 시치미를 떼고 날고 있는 하늘에 있었다. 열매가 익기 시작한 돌배나무가 송두리째 땅에서 뜯겨 하늘로 포물선(抛物線)을 그리는 것을 망막에 느끼면서 나는 우거진 그 잎사귀 속으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얼마 후, 나는 여기저기 살이 찢어져 피를 줄줄 흘리면서 닭다리를 손에 꼭 쥔 채로 일요일의 포로가 된 내 동호를 거기에서 발견했다.

가슴에 걸린 <P·W>라는 꼬리표 꼬리표를 턱 아래에 보았을 때 동호의 눈에서는 서러운 눈물이 수없이 그 꼬리표를 적시고 있었다.

거기에 서 있는 것은 어린애였다. 턱받이를 한 어린애였다. 그가 거기에 서 있었다. 이방(異邦)의 어린애가 거기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 나와 저 나를 같은 나로 느낄 확고한 근거는 없었다. 나는 나를 나라고 서슴지 않고 부를 수가 없었다. 발도 손도 기쁨도 슬픔도 나의 것 같지 않았다. 나의 몸에 붙어 있으니까 마지못해 나의 것으로 해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의 집에서 나는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옷을 입었으면서도 나는 내가 아니었다. 누가 내 대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결코 정신이 이상해졌던 것은 아니다. 강한 자극을 받으면, 더구나 부르릉 하는 비행기 소리 같은 것을 들었을 때에는 간이 뒤집혀서 아무 데에나 자빠져서 거품을 물었고, 때로는 몽둥이를 쳐들고 자동차에 달려든 적이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때의 그런 상태가 정상적인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보통 이상의 자극을 받았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것은 그만큼 그 신경이 마비된 탓이고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치어 죽이는 수도 있는 자동차를 쳐부수는 것이 왜 이상한 짓이어야 하는가.

남이 당하는 고통도 내 신경을 에어내는 것이었다. 나무에서 벌레가 떨어지는 것을 보아도 내가 그렇게 떨어지는 것만 같아서 한참은 그 자리에 엎드려서 그 아픔을 참아야 했다. 가끔 내가 소리를 내어 웃는다든지, 소리 없이 운다든지 한 것도 다 정당한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누혜를 만난 것은 섬에 옮겨져서였다. 우리는 잠자리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비웃지 않는 유일한 벗이었다. 섬에 와서부터 내 신경은 도로 마비되어 조용해지기도 했다. 그 대신 모든 것이 미지근하게만 느껴진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거기에 비하여 누혜는 모든 현재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천막 내의 잔일은 도맡아 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부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모두를 부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그가 때로 자기도 모르게 짓는 침통한 표정에 나는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가 죽은 뒤로는 나는 바위 그늘에 가만히 앉아서 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온다 온다 하던 배는 좀처럼 와 주지 않았다.

봄이 가고 여름의 파도가 해안선을 물어뜯어도 배는 오지 않았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시 가고 푸른 입김이 젖어들던 땅에 녹음이 짙어가는 무렵 드디어 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파도를 헤치고 몸이 본토(本土)의 품으로 안겨들어도, 반가워지는 것이 없었다. 섬에 무엇을 두고 온 것만 같았다.

돌아보니 섬은 포수의 자루처럼 수평선에 던져져 있었다.

한 줌의 평화도 없이 비바람에 훑이고 씻긴 용암의 잔해(殘骸). 한류(寒流)와 난류(暖流)가 부딪쳐서 뒹구는 현대사(現代史)의 맷돌이었다. 그 바위처럼 누르는 돌 틈에 끼여, 찢어지고 으스러져 흘러 떨어지는 인간의 분말, 인류사의 오산이 피에 묻혀 맴도는 카오스! 아아 그 바위틈에도 봄이 오면 푸른 싹이 움트던가?

해안선을 우는 갈매기의 구슬픈 소리……무슨 요람(搖籃)이 저 섬이었던가?

무엇이 가까이 오는 발자국 소리. 안개를 헤치고 새로운 그림자가 가까이 비쳐져야 하는 저 섬! 와도 좋을 때다! 오늘은 지금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피와 땀이 아닌 무엇을 흘릴 그것은 저 푸른 하늘 같은 살결을 가졌을 것이다. 하늘은 저렇게 가깝다. 그렇게 멀어 보이는 것은 그렇게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렇게 가까운 존재(存在)이다!

그러나 내 손은 좀체로 머리 위에 든 우산을 놓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어쩌랴…….

돌아서니 본토의 중압(重壓)은 내 이마 위로 덮어 들고 있었다. 자유는 무거움이었다. 설렘이었다. 그것은 다른 섬에의 길이요, 또 다른 포로수용소에의 문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도 문이기는 하다. 두 번 세 번 소리를 해도 대답이 없다. 밀어서 좋을지 당겨서 좋을지 망설이다가 보기에는 안으로 밀게 된 것 같았으나 보통 하는 버릇으로 당겨보았다. 삐이, 역시 밀게 된 문짝이었으나 당겨도 괜찮았다. 그렇다고 그럴 수도 없다.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데 검은 덩어리가 툭 튀어나왔다.

획, 벌써 아랫집 지붕 꼭대기에서 이리를 돌아보고 있다. 해는 지고, 지상에는 또 고양이의 세계가 있었다. 세계의 일원으로서의 나의 존재를 또 느껴야 했다. 여기저기에 거미줄이 쳐져 있다.

문을 밀었다. 펑 하고 열린다

『누―누』

모래 속에서 비벼 나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나를 누혜로 보고, 이렇게 살아온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모양이다. 담요 밖으로 기어 나와 비비적거리고 있는, 그것은 사람이기는 하였다. 살아 있는 것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과거형(過去形)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에 죽은 사실이 없으니까 지금도 살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표가 찍혀있는데 지나지 않았다. 아까 고양이는 재빠르게 이 노파에게서 현재를 물어내어 가지고 뺑소니를 쳤는지도 모른다.

비비적거리다가 기진하여 꼼짝을 못 하고 할할거리는 양 어깨를 들어서 자리에 드러눕혔다. 짚단처럼 가벼웠다. 말도 못 하는 중풍에 걸렸던 것이다. 가운데서 저편 반신은 완전히 움직임을 쉬고 있는 것이 무슨 적막(寂寞) 속에 못 박혀 있는 것 같다. 본전(本錢)은 동결(凍結)되고 이자만으로 살고 있는 격이었다.

젓가락을 쥘 기능도 상실한 것같이 내 무릎에 그대로 놓여 있는 손. 아들이 아님을 알아내었는지 이제는 감정을 나타낼 힘도 없는지 아무 표정도 없다. 눈곱에서 겨우 빠져나온 눈물이 60일 가문 땅을 적시는 물줄기처럼, 구겨진 주름살 틈을 이럭저럭 기어서 귓바퀴로 흘러든다. 어쨌든 그 얼굴은 60년 만에 처음 든 흉년임에는 틀림없었다. 죽은 누혜를 생각하여서라도 부드러운 말이나 눈물 섞인 소리를 해야 이 자리가 어울리겠는데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손을 어디에다 놓았으면 좋을지 몰라하던 내 눈이 토색 담요에 멎었다. 그리고 보니 어두워진 방 안이었지만 노파의 손에 묻어 있는 얼룩점도 피가 말라 붙은 것임이 분명했다.

몸을 다쳤는가? 피를 토했는가? 그러나 지금 그것을 알아내어도 부질없다. 그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도중에 있는 것이다.

다른 데로 돌린 내 시선이 머리맡에 굴려 있는 프라이팬 같은 미국 식기에 멎었다. 그것을 보니 시장기가 느껴진다. 그제야 이 노파는 60일 동안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잡숫고 싶은 것이 없습니까? 

그 소리에 노파의 눈에는 정기가 떠오르고 목젖이 꿀떡 굶주림을 삼킨다. 내 무릎에 얹혀 있던 손이 스르르 흘러 떨어진다. 나는 식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이 중풍병자는 아사(餓死)에 직면하고 잇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도 하나의 섬. 막바지였다. 울연히 밀려 오르는 비감을 안고 일어섰다. 우선 먹을 것을 구해와야 했다.

그만 모르고 문을 밀었다. 도로 당기려는데 아까 고양이가 슬쩍 들어선다. 그대로 나가려는데, 쮜!하는 비명이 났다. 고양이는 쥐를 물고 들어온 것이었다.

산 놈을 입에 물고 발치 쪽으로 해서 노파를 한 바퀴 돌아 머리맡으로 간다. 머뭇하다가 미군 식기 속에다 내려놓고 앞발로 누른다. 다짐을 주는 것처럼 지그시 그렇게 눌러 놓고 뒤로 물러나 앉아서 얼굴을 끼웃한다.

노파의 손이 그리로 간다. 죽은 것처럼 하고 있던 생쥐는 그 손그림자를 피하여 비틀비틀 일어서더니 그대로 쪼르르 발치로 도망치는 것이다. 비위가 거슬려진 고양이는 어깨를 욱이더니 마구 그 뒤로 덮쳐 든다. 벌써 앞발은 도주자를 억누르고 있었다. 한참 그렇게 노려보다가 입에 물어, 획 턱을 쳐올린다. 쥐는 보기 좋게 천장으로 날아오른다. 떨어지는 것을 이쪽에서도 뛰어오르면서 받아 물어서 거기에다 내동댕이친다. 쥐란 놈은 어떻게든지 도망쳐서 살아나겠다고 비틀거린다. 고양이는 그것을 저만치까지 그대로 놔둔다. 그랬다가 움츠린 몸을, 툭 날린다.

옆에 사람이 있는 것도 잊은 듯이 흰 이빨을 드러내며 주둥이와 앞발로 떼밀고 낚아채고 요리조리 가지고 놀다가는 물어서 획 공중으로 구경 보낸다.

어지간히 신이나 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그 짓이다. 쥐는 시늉이 아니라 이제는 아주 자빠지고 만다. 그러면 고양이는 부드러운 코 끝으로 쪼으면서 달아날 것을 강요한다. 그러면 쥐는 마지못해 다시 한번 비틀거려 본다. 소용이 없다. 고양이는 기운이 뻗쳐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고양이가 보여 주는 잔인성에 지쳤다.

돌아서려다가 머뭇했다. 공중으로 떠올랐던 쥐가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 노파의 가슴이 되는 곳에 떨어진 것이다. 아주 죽었는지 쥐에게는 움직임이 없다.

나는 숨을 죽였다. 노파의 손이 그리고 가는 것이었다. 거미처럼 조심스럽게 슬그머니 가서, 꾹 잡아 쥔다.

알지 못할 예감에 나의 몸 안에서 피가 그늘로 모여든다. 고양이를 보니 그 자리에 앞발을 세우고 장한 듯이 앉아서 노파가 하는 일을 구경하고 있다.

다음 순간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노파의 그 손으로 달려들었다.

노파는 어디에 그런 힘이 있었던지 그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쥐를 움켜쥔 노파의 손과 싸우면서도 나는 그의 공모자(共謀者)가 그 등어리에 노기를 세워 가지고 내 뒤에서 나를 노리고 있는 것을 느껴야 했다.

아까 그 노파의 눈, 손, 입, 그것은 쥐를 먹으려고 하는 눈이고, 손이고, 입수의 꼬물거림이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쥐를 뺏어 고양이의 면상에다 팽개치면서 나는 노파의 가슴으로 엎어 들었다.

어머니!

그러나 그를 어머니라고 부른 것은 실수가 아니면 제스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인간의 체면을 이렇게까지 더럽힌 노파의 목을, 꾹 눌러서 나는 그 숨을 끊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 노파는 고양이가 잡아온 쥐를 먹고 목숨을 이어온 것이다! 담요의 얼룩점은 쥐의 피임이 분명하다. 산기슭에서 셰퍼드까지 쇠고기를 먹고 있는데 이 못난 병신이!

침을 뱉고 싶은 생각이 목젖을 건드린다. 언제 이런 구역과 분노를 느낀 적이 있다. 섬에서이다. 변소에 들어가서 뒤를 보려다가, 무엇이 손짓하고 있는 것 같아서 밑을 내려다보고 그만 소리도 못 지르고 거품을 물었다. 그것은, 정말 손이었다. 누런 배설물 속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사람의 손, 쭉 뻗은 손가락은 내 발목을 잡아 쥐지 못해 하는 그것은 그 전날 죽은 누혜의 손목이었던 것이다.

어머니! 난 누혜입니다! 

쥐를 빼앗기고는 마지막 밧줄마저 놓친 것처럼 김이 빠져간 노파의 가슴에 매어달려 분한 눈물을 막 비볐다.

쮜이!

내 뒤에서는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내 앞에는 노파가 죽음의 판때기에 못 박혀 있다. 나는 두 개의 죽음 사이에 끼여 있다. 그 바늘 끝 같은 절벽 끝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겠다고 나는 노파의 손목에 매달려 어린애처럼 어머니를 불렀다. 그 소리에 나는 내가 그의 아들이 된 것 같았고, 동호는 누혜인 것만 같기도 했다. 저기에 1 + 1 = 2의 세계가 있는 것 처럼 여기에 1 + 1 = 3의 세계가 있어도 좋다.

어머니 우리 문안에 들어가 살아아! 

내 마음 어디에 이렇게 맺히고 맺힌 설움이 그렇게 차 있었던가. 엉키고 뭉킨 그 설움의 덩어리에 비하면 내 몸은 콩알만 한 것. 바람 앞 먼지와 같은 것. 싸늘해지는 손을 느꼈다.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 손을 물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내 손가락은 노파의 손에 꽉 잡혀 있었다. 끝내 나는 잡힌 것이다. 변소의 손이 나를 잡은 것이다!

등골이 시려진다. 노파의 식은 피가 손가락으로 해서 내 혈관으로 흘러드는 것다. 노파의 얼굴에 떠오르는 생기를 보아라. 냉기는 내 팔을 얼어 붙이고 있지 않는가. 위로 위로…….

사실은 내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왜 내 육체가 이렇게 자꾸 차가워지는가? 구리 같아지는 내 손의 차가움……팔과 어깨를 지나 가슴으로……혈거 지대(穴居地帶)로, 나는 자꾸 청동 시대로 끌려드는 향수를 느낀다. ……아이스케이크를 사 먹다가 동무에게 어깨를 붙잡힌 나의 가련한 모습. 그런데 그 동무의 얼굴에는 왜 여드름이 그렇게도 많았던가. 온통 얼굴이 여드름 투성이었다. 그래서 남으로 남으로 수류탄을 차고 이동하던 밤길. 개구리가 살아있었다. 개구리는 왜 저렇게 우노?……돌격이다! 꽝! 돌배나무가 포물선을 그린다. 나는 그리로 끌려가서 포로가 되었다. 이 무의미(無意味)! 이것이 갈매기 우는 남쪽 바다의 섬인가! 변소의 손. 눈구멍에서 뽑혀 드리운 누혜의 눈알. 여기저기서 공기가 찢어지고 눈알들이 내다보고 있는 벌판에 서서 그대로 외쳐야 하는 자유만세!

나는 뒤로 떼밀렸다. 노파가 발악을 시작한 것이다. 꽁꽁 묶였던 새끼줄은 끊어졌다. 이런 힘이 있었던들 아예 죽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논리적일 것이다. 소리소리 지르고 발버둥 치고, 그 팔에 떼밀려 나는 뒤로 넘어질 뻔도 했다.

해가 넘어간 고갯길을 굴러내리는 늙은 나귀, 언제 무슨 결에 자기의 수레바퀴에 치어 넘어질지 모른다.

부풀어 올랐던 그 가슴이 푸욱 꺼진다. 멀겋게 헛뜬 눈, 공허(空虛)를 문 것처럼 다물지 못하는 입, 옆으로 젖혀진 입술로 걸쭉한 침이 가늘게 흘러내리다가 끝에 가서 똑똑 떨어진다. 한 고치 한 고치 생명이 입김 밖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할딱할딱……점점 격해지는 숨소리. 자기의 그 리듬을 짓밟아 버리지 못해 한다. 목젖에서 죽음이 자기의 새벽이 밝는다는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보는 사람이 숨이 겨웁고 눈알이 부어오른다. 두렵다. 저 숨소리가 꺼질 때 그 소용돌이에 내 목숨까지 한데 묻혀서 그만 흘러가버릴 것만 같다.

내 가슴을 그슬려 버린 죽음의 고동은 귓속에까지 비쳐 든다. 귀안에서 죽음이 운다. 막 우는 진동에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버린다. 환영(幻影)이 비쳐든다.

머릿속에서 환영이 맴돈다. 운다. 방안이 운다. 하늘이 운다. 하늘 아래 벌판이 운다. 벌판이 온통 울음소리로 덮인다. 꿀꿀 돼지 우는 소리…….

꿀꿀 꿀꿀. 돼지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꺼먼 돼지, 흰 돼지, 빨간 돼지, 푸른 돼지, 꿀꿀 꿀꿀, 있을 수 있는 온갖 돼지들이 우는 소리가 밀려든다. 봉우리에서 골짜기에서 들을 지나 내를 넘어 돼지들이 우는 소리가 밀려든다.

도살장을 부수고 쏟아져 나온 돼지의 대군이 하늘 아래를 까맣게 덮었다.

꿀꿀 꿀꿀, 거리로 덮어 든다. 뒤진다. 썩은 것을 훑는다. 기둥뿌리를 훑어낸다. 건물이 쓰러진다. 썩은 것을 훑으니 서 있는 모든 것이 다 넘어진다. 백만 인구를 자랑하던 공민 사회는 삽시간에 허허벌판이 되었다. 까맣던 문명이 허연 배를 드러내고 여기저기 뒹군다. 서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죽었다. 도시는 죽었다.

무의미를 의미로 돌려보내고 돼지의 대집단은 썰물처럼 지평선을 넘어 다음 퇴폐를 향하여 꿀꿀 꿀꿀, 울고 간다.

페스트가 지나간 이 터전을 향하여 소리 없는 행진이 나타났다. 나무의 행렬. 나무들이 진주(進駐) 해 온다. 대추나무, 회나무, 잣나무, 느릅나무, 이깔나무, 소나무, 보리수, 계수나무……사곡에서 해방된 모든 나무들이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캐피털 레터의 순서를 벗어던지고 자기가 원하는 곳에 가서 툭툭 선다. 서서는 그늘을 짓는다. 고요하다. 아주 고요하다. 낙원(樂園)이다. 낙원이 고요하다. 언젠가 이런 슬픔이 있었다. 백정이 감찰(鑑札)을 잃어버린 메리의 면상을 갈고리로 쳐서 질질 끌고 간 것이 슬퍼서였겠다. 아홉 살 때였을 것이다. 실컷 울고 난 오후, 지상에는 매미 우는 소리 이외 아무 움직이는 것도 없던 대낮의 아카시아 나무 그늘이 이러하였겠다. 고요하다. 고향은 깊다. 더 깊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는 고요한 대로 언제까지 있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벌써 소란해지고 있었다. 낙원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푸드덕푸드덕, 하늘로 날아오르는 부엉새의 떼무리…… 눈먼 새의 뒤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따르는 법이다.

나뭇가지를 타고 침입해 들어오는 원인. 아직 쭉 펴지 못하는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은 또 그 돌도끼이고 손에는 횃불이다. 그가 배운 재주는 그것밖에 없다는 말인가?

저 망측스런 것들이 이제 좀 있으면 비너스를 찾고 그 앞에 제단을 세운다. 주문을 몇 번 뇌까리면 땅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자아가 눈을 뜬다. 그 눈가에 공장이 서고, 그 연기 속에서 이층 건물이 탄생한다. 그 공화국은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에게 자유를 보장하는 감찰을 나누어 준다.

바깥 세계에는 눈이 시름없이 내리고 있는데, 이런 역사는 그만 하고 그쳤으면 좋겠다.

눈이 온다. 밖에서는 펑 펑, 함박꽃 같은 눈이 온다. 온 하늘이 내려앉는 것처럼 눈이 내린다. 눈이 온다. 눈은 와서 내린다. 와서다. 온 누리가 눈 속이 된다. 눈이 이불이 되었다. 그래도 눈은 와서 쌓인다. 지붕까지 쌓였다. 봉우리까지 쌓였다. 하늘까지 쌓인다. 세계는 눈이 되었다. 공기가 걷히고 바람이 죽었다. 눈속이 세상이다. 생물 교본을 고쳐야 한다. 눈을 마시고 사는 새살림이 시작된 것이다. 좀 있으면 건망증(健忘症)인 그들은 공기를 마시고 살았다는 것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공기를 마시고 살기 전에는 무엇을 마시고 살았던가?…….

……눈 속으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갓을 푹 숙여 쓴 그 젊은 도승은 눈이 먼 것이다. 손으로 앞을 더듬으면서 가까이 온다. 지팡이도 없이 눈알을 어디에다 두고, 험한 산 넓은 들을 넘어, 그는 천리 길을 그렇게 손을 저으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저만치에 와 서서 그 먼눈으로 눈물을 흘린다.

이 거지 행색을 한 도승이 바로 저 도살장을 부숴버리고, 사전을 뜯어버린 그가 아닐까?

누혜!

노파가 소리를 비벼냈다. 나는 소스라치면서 환상에서 깼다. 노파의 목젖에서 달각하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방 안은 어둠이 차지했는데 내 앞에는 식어가는 노파의 원한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렇게 해서 누혜의 어머니는 죽었다.

도승이 서 있던 자리에는 고양이의 두 눈이 파란 요기를 뿜고 있었다. 몸이 확 달아올랐다. 누혜의 눈이 이제 거기에 그렇게 켜 있는 것만 같았다, 

2

누에는 철조망에 목을 매고 죽었다.

포로수용소에서도 모두들 누혜를 누에라고 불렀다. 그래서 포로라는 이름이 아직 낯이 설어서, 모두가 한 가지로 허탈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실없는 친구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그를 이렇게 놀려 주기도 했다.

뽕 뽕 뽕잎이 떨어진다. 뽕 뽕 뽕잎이 떨어진다.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누에는 죽어서 비단을 남긴다 하하……"

그는 비단을 남기고 싶어한 것이 아니었다. 봉황새가 되어 용이 되어 푸른 하늘 저쪽으로 날아가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의용군이 아니고 이북에서부터 쳐내려 온 괴뢰군이었다. 그런데 수용소가 어수선해졌을 때에도 적기가(赤旗歌)는 부르려 하지 않고 틈만 있으면 누워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기를 좋아했다.

감시병들의 눈으로 볼 때, 수용소는 그저 까마귀의 떼들이 욱실거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저류(低流)에는 방향을 잃은 충동이 밤이고 낮이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몇 세기 동안 자기의 전쟁을 가져 보지 못한 이 겨레였다. 근대적 의식 이라고는 샤벨과 지까다비밖에 모르던 이 땅이 민주 보루니 두 개의 세계니 만국 평화 아필 운동이니 하는 따위의 리얼리즘이 네이판탄의 세례와 함께 쏟아져 들어왔을 때, 농부의 옷을 채 벗지 못했던 그 시골내기들은 살이 찢어지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언제 도회인(都會人)으로 출세한 것 같기도 하고, 꼭두각시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최면술에 걸린 것 같았다. 그저 멋도 모르고 나팔 소리에 죽어라 하고 뛰었다. 한참 뛰다가 우뚝 발을 멈추고 보니 주위는 쑥밭이었다, 내 집, 내 학교, 내 공장이 성냥갑을 철퇴로 두드려 부순 것 같은 폐허였다. 개화당(開化黨)이래 조금씩 쌓아 올린 축적(蓄積)이 죄다 무너져 버렸었다. 알몸만 남았다. 세계의 거지가 되었다.

그러면 그들은 마치 좀도둑이 감옥 소 살이를 하는 사이에 소도둑이 되어 가는 투로 포로 생활을 하는 사이에 뼈마디가 굵어져서 [제네바 협정(協定)]이니 [인도적(人道的) 대우(待遇)] 니 하고 도사릴 줄 알았다.

내 살이 뜯겨 나가고 내 피가 흘러내린 이 전쟁은 과연 내 전쟁이었던가?

한편에서 세계의 고아가 된 포로병의 가슴속을 이렇게 거래하던 회의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다가 마침내 생에 대한 애착에 부딪쳤다. 한 개의 나사못으로밖에 취급을 받지 못했던 자기의 삶에 대한 애착이었다. 살아야 하겠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남을 죽이기 시작했다. 싸움은 다시 일어났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살 것 같았다. 남해의 고도에는 붉은 기와 푸른 기가 다시 바닷바람에 맞서서 휘날리게 되었다. 살기 위하여 그들은 두 깃발 밑에 갈려 서서 피투성이의 몸부림을 쳤다. 철조망 안에서의 이 두 번째 전쟁은 완전히 자기의 전쟁이었다. 순전히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자기의 전쟁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생존의 권리를 포기하는 거와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은 싸움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사람을 죽이는 법은 없는 싸움이었다. 아무리 악하고 미워서 견딜 수 없는 적이라 해도 죽음 이상의 벌을 주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아무리 독하고 악한 사람이라 해도 죽음 이상의 벌을 받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이름이다! 이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마지막 신앙이다! 죽음에는 생의 전 중량이 걸려 있다. 그의 죄는 그 생보다 더 클 수 없는 것이고, 죽음이란 끝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간지러움도 아픔도, 피도, 땀도, 선도, 악도, 지상의 모든 약동이 끝나는 것이 죽음이다. 마지막 위로요, 안식이요, 마지막 용서이다.

그런데 거기서는 시체에서 팔다리를 뜯어내고 눈을 뽑고, 귀, 코를 도려냈다. 아니면 바위를 쳐서 으깨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서 변소에 갔다 처넣었다. 사상의 이름으로, 계급의 이름으로, 인민이란 이름으로! 그들은 생이 장난감인 줄 안다. 인간을 배추벌레인 줄 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도리가 없었다. [인간 밖] 에서 일어나는 한 에피소드로 돌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기 가운데서 누혜는 여전히 하늘을 먹고살고 있었다. 언제부터 나는 그의 옆에 오므리고 앉는 버릇을 길렀다. 나는 반편 취급이니까 그렇게 하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점점 험악해 가는 그들의 서슬이 그의 그런 생활 태도를 언제까지 그대로 둬 둘 리가 없었다. 하루는 감나무 아래로 불리어 나갔다.

동무! 우리는 동무를 인민의 적이며 전쟁 도발자의 집단인 미제의 앞잡이로 몰고 싶지 않단 말이오. 어떻소 동무 ……동무! 왜 말이 없소?

그들의 어세는 불러낼 때의 기세와는 달리 사정하는 투가 되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그는 이번 전쟁에서 나타난 용감성으로 최고 훈장을 받은 인민의 영웅이기도 하였다.

동무! 그래 민족 반역자로 봐두 좋단 말이오! 

…………………… 

그들의 얼굴에 살기가 올랐다.

대답해라! 너는 반동분자다! 

…………………… 

여전히 대답이 없다. 대답은 두 가지 중에 하나여야 한다. 그런데 그는 그 두 가지가 다 자기의 대답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타락한! 반역자! 인민의 적! 이런 고함소리가 쏟아지면서 몽둥이가 연달아 그의 어깨로 날아들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소 같은 줄 몰랐다. 말뚝처럼 서 있다. 몽둥이가 머리에 떨어졌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쓰러진다. 거기에 있는 발길이 모두 한두 번씩 걷어찬다.

그들이 물러간 뒤에 가보니 그의 눈은 하늘에 떠 있었다. 눈물이 가늘게 흐르고 있다.

우러러보니 여름날의 구름이 본토로 희게 떠가고 있다.

나도 그의 옆에 누워 푸른 하늘로 눈을 떴다. 지상의 검은 그림자는 티 한 점 비치지 않은 거울같이 평화로운 하늘……

저기다 곡식을 심어 봤으면 좋겠네…… 

그를 위로하느라고 이렇게 말해 봤다.

산두 없구 저렇게 너른데 그래두 풍년이 안들까? 평화 시대가 안 올까……

곡식이 나면 인간들은 거기에두 말뚝을 박는다. 

……. 

자네는 오래 사는 것이 좋아

왜 죽는단 말이오? 

아니, 내게는 늙은 어머니가 있소.

…….

모든 줄은 다 끊어 버릴 수 있는데 탯줄만은 정말 질겨. 그것만 끊어 버릴 수 있다면……. 

비단은 남길 수 있단 말이구먼?

봉황새가 되어, 용이 되어 저 하늘 저쪽에 가 보겠다.

…….

며칠 후,

누혜가 자살했다!

미명의 하늘을 찢어낸 그 소리는, 그가 봉황새가 되어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는 것을 고하는 종소리인 것만 같았다.

끝이 안으로 굽어진 철조망 말뚝에 목을 매고 축 늘어진 누에.

그런 전날 밤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렇게는 충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전날 밤, 그는 잠자코 있는 나를 껴안고 들었던 것이다.

네 살결은 참 따뜻해…….

성적인 입김이 내 귀밑을 간질였다. 소름이 끼쳤다.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때까지 우리 사이에 교환된 대화는, 좋게 말하면 낭만주의요, 나쁘게 말하면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묵계가 서 있는 것인 줄로만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일획도 어길 수 없는 리얼리즘이었다는 것에 대한 사후 승인을 나에게 강요하는 것이었었다.

엊저녁 꿈에 말이지, 아주 예쁜 여자가 나를 껴안지 않았겠나, 이렇게 말이야…….

…….

나는 구렁이에게 안긴 처녀처럼 꼼짝을 못 했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두 결국은 죽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어. 그런 것을 그제야 깨달았으니 깨달아야 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

그 여자 누군 줄 알어?……네 살결은 참 부드러워……,

그것은 남색에 못지않은 포옹이었다. 우리 천막에서는 그러한 행위가 공공연한 비밀로 행해지고 있었다.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아직 모르는 일이니까…….

그는 숨을 죽였다. 그런 흥분 속에서도 다음 말을 잇는 것을 몹시 어색해하는 것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살로메…… 알지? 요한의 모가지를 탐낸 그 여자 말이야. 그 계집이었어!

하고, 내 몸을 툭 떼밀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할할거리는 것이었다.

나의 열매는 익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열매를 감당할 만큼 익지 못했다……영원히 익지는 못할 것이다! 내게는 날개가 없다…….

내 육체는 강간을 당한 것처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흐무러지는 것이었다. 그 반역자의 시체에는 즉시 복수가 가해졌다. 그가 그렇게까지 잔인한 복수를 받아야 할 까닭은, 그가 인민의 영웅이었다는 것과 그가 죽기 전에는 감히 그에게 더는 손을 대지 못했다는 것 이외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더러 장난도 아니겠는데 그의 눈알을 손바닥에 들고 해가 동쪽 바다에서 솟아오를 때까지 서 있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엄살을 부릴 수도 있었지만 누혜의 눈이 아닌가.

멀리 철조망 밖에서는 감시병이 휘파람을 불며 향수를 노래하고 있는데 나는 누혜의 눈알을 들고 해가 돋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눈알과 휘파람은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인가. 무슨 오산을 본 것만 같았다. 우리는 무슨 오산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저 휘파람은 그리워해야 할 것은 태평양 건너 켄터키의 나의 옛집이 아니라 이 눈알이 있어야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가 어째서 죽음의 장소로 철조망을 택했는가 하는 것을 그의 유서를 읽어 볼 때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때까지도 내 눈에 보인 것은 내가 눈알을 손바닥에 들고 서 있어야 했던 안 세계와 감시병이 향수를 노래하고 있었던 밖 세계, 이 두 개의 세계뿐이었다. 세계를 둘로 갈라놓은, 따라서 두 개의 세계를 이어 놓고도 있는 철조망은, 눈망울에 비쳐는 들었건만 보이지 못했다. 그 철조망에 어느 날 새벽, 한 시체가 걸리게 되었으니 그것은 하나의 돌파구가 거기에 트여짐이다.

그에게는 그가 포로로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이남으로 나왔다는 어머니가 있었지만 그 유서는 그 어머니에게 한 것도 아니었다. 유서라기보다 수기(手記)였다.

3

유서(遺書).

나는 한 살 때에 났다.

나자마자 한 살이고, 이름이 지어진 것은 닷새 후였으니 이 며칠 동안이 나의 오직 하나인 고향인지도 모른다. 세계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가령 이 며칠 사이에 죽었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되었을 것이다.

이름이 지어지자 곧 호적에 올랐다. 이로써 나는 두꺼운 호적부의 한 칸에 갇힌 몸이 된 대신, 사망계라는 법적 수속을 밟지 않고는 소멸될 수 없다는 엄연한 존재가 된 것이다.

네 살 적에 젖을 버리고 쌀을 먹기 비롯했다. 이것은 연대 책임을 지게 되는 계약(契約)이 되는 것인 줄은 몰랐고, 또한 말을 외기 시작하였으니 [유화 작용]을 본격화한 셈이다.

아홉 살이 되며 소학교에 들어갔다. 이렇게 공민사회의 한 분자가 되는 과정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착착 밟아간 것이다. 학교는 죄의 집이다. 벌에서 죄를 배웠다. 1분 지각했는데 30분 동안이나 땅에 손을 짚고 오또세이처럼 엎드리고 있으면 학교는 그만큼 잘 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엎드리고 있는 내 앞을 나보다 10초가량 앞서 뛰어갔던 아이가 싱글벙글 줄 속에 끼여, 하나 둘 하나 둘 발을 맞추며 교실로 들어갔다. 그때 나는 60초 지각은 지각이지만 50초 지각은 지각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는데 한번 부자가 되기 시작하더니 자꾸자꾸 부자가 되어 간 까닭도 그때 알았다.

유리창을 깨뜨린 벌로 물이 가득 찬 바께쓰를 들고 복도에 서 있던 내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동무들은 다들 돌아가고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러 가는데, 저 복도 끝 직원실로 담임선생의 안경이 가끔 이리로 내다보곤 사라질 뿐, 나 또 얼마나 이렇게 더 서있어야 하는가 텅 빈 운동장을 강아지가 잠자리를 쫓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놀고 있다. 나는 팔이 저주스러웠다. 이런 팔이 어깨에 달려 있지 않았던들 이런 것을 손에 들고 서 있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팔이 빠지는 것 같은 것 이 내 팔 같지 않았다. 그만 놓았다. 물바다에 들어앉아서 나는 엉엉 울었다. 새로운 벌에 대한 공포와 아무도 나를 위해 변호해 줄 사람이 없으리라는 고독(孤獨)…….

그러는 사이에 중학생이 되었다. 소매 끝에와 모자에는 흰 줄이 둘렸다. 그 줄 저쪽으로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대신 그쪽에서는 아무 짓을 다 해도 좋다는 것이다. 나는 이중으로 매인 몸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조회 때, 천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가슴에 달려 있는 단추가 모두 다섯 개씩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현기증을 느꼈다. 무서운 사실이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주위는 모두 그런 무서운 사실 투성이었다. 어느 집에나 다 창문이 있고, 모든 연필은 다 기름한 모양을 했다. 모든 눈은 다 눈썹 아래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상급생을 보면 신이 나서 모자에 손은 갖다 붙였다. 그러면 저쪽에서 보통이라는 듯이 간단간단히 끄덕거렸다. 그것이 대견스러워서 나는 더 신이 나서 팔이 아프도록 경계를 했다. 중학교에서 나는 모범생이었다. 열일곱 살이 되는 어느 여름날 오후, 돌담에 비친 내 그림자를 뱀이 획 스치고 달아났다. 나는 곡괭이를 찾아들고 그 담을 부수어 버렸다. 모범생이라는 벽에 가리워져 빛을 보지 못했던 나는 한길에 나섰던 것이다.

드디어 나는 책상 앞이 되는 벽에는 [자율]이라는 모토가 붙었다. 그것이 더 깊은 타율의 바다에 빠져드는 길목이 된다는 것을 몰랐고, 좀 지나서 대학생이 되어 버렸다.

멍하니 이층 창가에 앉아 고향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내 눈망울에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눈앞에는 움직이는 것이 없는데 눈망울은 무엇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다가 나는 몸서리를 쳤다. 저 언덕 위에 서 있는 묘심사의 소나무들이 이리도 움직여 오고 있는 것이었다. 기겁을 먹고 나는 벽 그늘로 숨었다. 혁명은 드디어 일어났다. 나는 어느 편에 가담해야 할 것인가.

소나무 만세! 를 부르면서 뛰어갈 것인가. 그러면 저녁에 구니꼬와 타잔 영화를 구경 가려던 예정(豫定)은 글러지고 만다. 나는 [혁명] 과 [외국 여자] 사이에 끼여 심히 그 입장이 곤란해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율배반 속에서 어물어물하다가 하여간 자라목을 내밀어 혁명의 진행을 살펴보았다. 붕지 외었었다. 혁명은 중지되었던 것이다. 묘심사의 소나무들은 묘심사로 돌아가서 옛 모습대로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면서 아까 소나무가 움직였다고 본 것을 착각이라고 해 두었다. 안 일어날 것은 안 일어나는 것이 좋았다. 편했다. 진화론(進化論)의 강의를 듣고 대학을 졸업했다. 우연히 강자(强者)라는 것을 아직 몰랐고, 따라서 존재가 되악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다만 두 개의 세포(細胞)로 분열된 나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거울 속에 느꼈을 뿐이다.

나는 산 속인 내 난 땅에 돌아왔다. 새벽이면 은은히 들려오는 산사(山寺)의 종소리는 나를 무위(無爲)로 끌어들였다. 노루와 놀았고, 토끼를 쫓아다녔다. 아무런 생산(生産)도 없는 시인(詩人)이 되었다. 그래서 시(詩)를 짓기를 좋아했다.

종(鍾)이라면 좋겠다

먼동이 트는 종(鍾)이라면 좋겠다

살을 에어 피를 덜고

앙상한 이 뼈가 나는 종(鍾)이라면 좋겠다

파란 가을 하늘

황금(黃金) 지는 낙엽(落葉) 소리

한 잎

또 한 잎……

겁(怯)에서 업(業)으로

영전이 새겨내는 여기 이 적막(寂寞)

무의에 맺힌 이슬은

생명(生命)이 흘러내린 리듬인가……

그는 지는 계절

나는 종(鍾)이라면 좋겠다.

의욕(意慾)도 부처도 나는 다 싫어.

먼동이 트는 나는 그저 종(鍾)이라면 좋겠다.

제2차 대전이 끝났다.

나는 인민의 벗이 됨으로써 재생하려고 했다. 당에 들어갔다. 당에 들어가 보니 인민은 거기에 없고 인민의 적을 죽임으로써 인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만들어 내는 것과 죽이는 것. 이어지지 않는 이 간극(間隙). 그것은 생의 괴리이기도 하였다. 생은 의식(意識)했을 때 꺼져 버렸다. 우리는 그 재를 삶이라고 한다. 우리는 다른 데를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다른 데를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선 의식에만 선이 있다는 양식. 이 심연. 그것은 십 초간의 간극(間隙)이었고, 자유에의 길을 마고 있는 벽이었다.

그 벽을 뚫어 보기 위하여 나는 내 육체를 전쟁에 던졌다.

포로가 되었다. 외로웠다. 저 복도에서처럼 나는 외로웠다. 직원실로 내다보는 안경도 거기에는 없었다.

그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나는 생활의 새 양식을 찾아냈다.

노예. 새로운 자유인을 나는 노예에 보았다. 차라리 노예인 것이 자유스러웠다. 부자유(不自由)를 자유의사로 받아들이는 이 제3 노예가 현대의 영웅이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그 인식은 내 호흡과 꼭 맞았다. 오래간만에 생각해 보니 나의 이름이 지어진 이래 처음으로 나는 나의 숨을 쉬었고, 나의 육체는 그 자유의 숨결 속에서 기지개를 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의 기만이었다. 흥분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역사는 흥분과 냉각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지동설(地動說)에 흥분하고 바스티유의 파옥(破獄)에 흥분하고, [적자생존] 에 흥분하고, [붉은 광장] 에 흥분하고……늘 그때마다 환멸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그 노예(奴隸)도 자유인이 아니라 자유의 노예였다. 자유가 있는 한 인간은 노예여야 했다! 자유도 하나의 숫자, 구속이었고 강제였다.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었다. 뒤의 것이었다!

신, 영원(永遠)……, 자유에서 빚어져 생긴 이러한 뒤에서 온 설명을 가지고 앞으로 올 생을 잰다는 것은 하나의 도살이요, 모독이다. 상은 설명이 아니라 권리였다! 미신(迷信)이 아니라 의욕(意慾)이었다! 생을 살리는 오직 하나의 길은 자유가 죽는 데에 있다. 자유가 죽는 데에 있다.

자유, 그것은 진실로 그 뒤에 올 그 무슨 진자를 위하여 길을 외치는 예언자, 그 신발끈을 매어 주고, 칼에 맞아 길가에 쓰러질 요한에 지나지 않았다.

거친 벌판에서 나는 다시 외로웠다. 이미 달은 서산에 졌는데 동녘 하늘에서 해가 솟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는 내 그림자를 따라갈 생각이 없다. 여기에 그대로 서 있을 수도 없다.

여기는 땅의 끝, 땅이 시작되는 곳. 온 시간 과 올 시간이 이어진 매듭. 발톱으로 설 만한 자리도 없다. 여기는 경계였다.

그러나 얼마나 넓은 세계이냐. 이 옥토(沃土), 생산의 안뜰, 시간과 공간이 여기서 흘러나가는 혼돈…….

이 세계에는 이율배반이 없다. 무수의 율이 마치 궁륭의 성좌처럼 서로 범함이 없이, 고요한 시의 밤을 밝히고 있다. 왕자도 없고 노비도 여기에는 없다. 우려가 없다. 그러니 타협이 없다. 풍습이 없으니 퇴폐가 없다. 만물은 스스로가 자기의 원인이고, 스스로가 자기의 자이다. 태양이 반드시 동쪽에서만 솟아야 한 이유가 여기에는 없다. 늘 새롭고 늘 아침이고 늘 봄이다. 아아 젊은 대륙…….

언제면 왜인의 섬에 표류한 걸리버의 미몽에서 깨어날 것인가.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파괴해야 할 것은 바스티유의 감옥이 아니라, 이 섬을 둘러싼 해안선이다.

나는 다시 기다릴 수 없다. 즉시 나는 나를 보아야 한다. 마지막 승리를 가지고 내 눈으로 나는 나를 보아야 할 것을 요구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시선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 시선(視線)이 얽혀서 비친 환등(幻燈)의 그림자를 떠낸 윤곽(輪廓)에 지나지 않았던 나는 비로소 나를 볼 수 있고, 나를 탈출할 수 있고, 안갯속으로 나타는 세계(世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살(自殺)은 하나의 시도요, 나의 마지막 기대이다. 거기에서도 나를 보지 못한다면 나의 죽음은 소용없는 것이 될 것이고, 그런 소용없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생이라면 나는 차라리 한시바삐 그 전신을 꾀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서력(西曆) 1951년 9월 X일

 

[유서] 가 저기서 파란 두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화석(化石)한 주문(呪文)처럼 언제까지 나를 노리고 있다. 이마에 식은땀이 배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나는 그의 눈밖에 보지 못하는데, 고양이는 내 눈썹까지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죄지은 것이 무엇인가? 살아 있다는 것 이외 내가 죄지은 것이 무엇인가…… 그 눈은 말하기를, 움직이는 것은 하여간 다 죄라고 한다.

저놈의 눈을 어떻게 꺼버릴 수 없을 것인가. 그 눈빛에 내 몸은 숭숭 구멍이 뚫리는 것 같다. 나는 졸려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섬에서 가져온 피로가 여기서 지금 탁 풀려나가는 긴장, 거기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아옹, 하고 이 긴장이 찢어지고 단절된 때 [해안선] 은 끊어지고 저 언덕 위 마른 나뭇가지에는 새빨간 꽃이 방긋. 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은 무수이다. 그 무수의 가능성이 하나의 우연에 의하여 말살된 자리가 존재이다. 따라서 존재는 죄지은 존재이다. 생(生) 속에서는 죄 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범죄이다. 그 총목록이 세계이다. 세계는 범죄의 소산이고, 인생은 그 범죄자(犯罪者)였다.

산다는 것은 죄짓는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앉아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여기에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을 때 밀어 버리고 내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그들에게 밀려나갈지 모른다. 순간순간, 무수의 가능성이 자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다음 순간에 일어날 가능성(可能性) 앞에 떨고 있는 전율(戰慄)인 것이다. 이 전율을 잠자코 있는 세계에는 자유라고 한다. 그대로 잠자고 있을 것인가? 깨어날 것인가……. ?

어둠 속에서 고양이는 아직도 나를 노리고 있다. 나는 그의 주인을 죽인 것이다. 노파는 내가 죽인 것이다. 저 눈이 저기서 저렇게 나란히 빛나고 있는 한 나는 살인자(殺人者)인 것이다.

이자 택일을 강요하고 있던 그 두 눈의 거리가 좁혀졌다. 나는 숨길을 찾았다. 그는 외면한 것이다. 다음 순간을 노리던 내 손이 툭 그리로 날았다. 손은 허공을 잡았고, 두 눈은 내 겨드랑이 밑으로 해서, 획 벌써 문틈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 뒤를 쫓아 밖으로 뛰어나갔다. 저만치에서 이리를 돌아보던 고양이는 다시 언덕 위를 향하여 달아난다.

쫓아 올라갔으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웅.

쳐다보니, 아까 저녁때 까마귀가 황혼을 울던 나뭇가지에 두 눈알이 켜져 있었다.

돌을 찾아 던져도 그 눈빛은 꺼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날개가 없는 것이다. 나는 우리 조상이라고 하는 원숭이의 재주를 먼 옛날에 상실해 버린 것이다. 저주와 복수를 자아내던 두 눈빛이 사라지면서 그 근처가 허물어진다. 달이 둥글게 꿈틀거리면서 구름 사이를 비비고 나왔었다.

나뭇가지에 오므리고 앉은 고양이의 윤곽이 까만 동화처럼 달 속에 걸려들었다.

아웅.

멀고 먼 해안선을 얼어붙은 것 같은 싸늘한 울음소리 속에 한때 보이지 않아 졌던 파란 요귀는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것이었다.

내일 아침 해가 떠올라야 저 눈이 꺼지는 것이다. 나는 졸려서 그대로 그 눈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밤은 고요히 깊어 가는데 누혜의 비단옷을 빌어 입은 나의 그림자는 언제까지 그렇게 그 고목 가지 아래서 설레고만 있는 것이었다.

과연 내일 아침에 해는 동산에 떠오를 것인가…….

 

 

 

인물 소개

누혜

투철한 공산주의 이념의 소유자지만 포로 수용소 내에서 벌어지는 대립에 환멸을 느낌. 동료들에 의해 폭행당한 후 철조망에 목을 매 자살하는 비극적인 인물

 

동호

의용군 출신의 포로로 이 작품 전체의 서술자

 

노파

누혜의 어머니. 고양이가 물어다 준 쥐를 잡아먹고 목숨을 부지하는 기이한 인물

 

 

핵심 정리

갈래 : 단편 소설, 우화 소설

배경 : 시간 - 1951 6·25 전쟁 당시  

공간 : 거제도 포로 수용소

시점 : 작가 관찰자 시점, 일인칭 주인공 시점

주제 : 전쟁의 비인간성 고발

   

   

작품 내용

동굴 속의 토끼 우화 •토끼가 자유를 찾아 동굴 속에서 나오지만 그 대가로 눈이 멂.
•토끼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릴까 봐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음.
•토끼가 죽은 후 토끼가 죽은 자리에 버섯이 자라났는데, 그의 후예들이 그것을 ‘자유의 버섯’이라고 일컬음.
누혜의 포로 수용소 생활
•누혜는 포로 수용소에서 비인간적 대우를 받음.
•최고 훈장을 받을 정도로 인민의 영웅이었지만 누혜는 진정한 자유와 인간다움을 찾기 위해 자살함.
누혜의 집 방문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동호가 누혜의 어머니를 찾아감.
•누혜의 어머니는 고양이가 잡아 온 쥐를 먹고 살 정도로 비참한 환경에 놓여 있음.
•동호는 비참한 생활을 하는 누혜의 어머니를 살해함.
누혜의 유서 •유서를 통해 누혜의 자살 동기가 밝혀짐.

    

 

장용학(張龍鶴, 1921~1999)

 

1921년 4월 25일 함경북도 부령군 하무산면 부령리 357번지(現 함경북도 부령군 부령읍)에서 아버지 장지원(張志遠, 1884 ~ ?)과 어머니 박숙자(朴淑子, 1887 ~ ?)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장용봉과 누나 한 명이 있었다. 1940년 경성(鏡城)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일본 와세다대학 상과에 입학했으나 1944년 1월 20일 학병으로 일본 제국 육군에 강제 징집되면서 대학을 중퇴했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귀국했고, 1946년 6월 청진여자중학교 교사에 부임했다. 그러나 1947년 9월 이북의 공산화를 피해 월남했다. 1948년 9월 첫 작품 「육수(肉囚)」를 탈고했고, 1949년 11월 한양공업고등학교 교사에 부임했다. 1949년 11월 19일 《신세계》에 「희화(戱畵)」를 부분 연재하면서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1950 「지동설」 <문예>에 발표. 6·25 전쟁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부산시로 피난했고, 그해 11월 무학여자고등학교[4] 교사에 부임했다. 1955년 10월에는 경기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60년대 초 잠시 덕성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1962년 언론계에 투신해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등에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99년 8월 31일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청구성심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선우휘, 오상원, 손창섭과 함께 전후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관념소설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상, 박상륭과 함께 가장 어려운 작가로 평가받기도 한다.



장편소설

원형의 전설 (1962). 태양의 아들 (1965~1966). 청동기 (1967~1968). 유역 (1981~1982)

 

단편소설

육수 (1955). 요한 시집 (1955). 비인탄생 (1956). 역성서설 (1958). 현대의 야 (1960). 하여가행 (1987). 천도시야비야 (2001, 유고)

 

작품 해설

 

관념적 전쟁 소설의 대표작

이 작품은 전쟁을 다룬 소설 중 가장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작품이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장 폴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아 쓴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6·25 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포로 간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포로가 된 주인공이 철조망에 목을 매어 자살하기까지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사건에 대한 묘사보다는 인물의 내면 의식에 대한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작품 속에 낯선 한자 표현과 관념적인 표현이 많아서 발표 당시 이 작품은 상당한 주목을 끌었다. 특히 주인공의 어머니가 보이는 기괴한 행동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그로테스크한 묘사의 충격

이 소설은 토끼의 우화와 상··하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토끼의 우화에서 시작해서, 동호가 본 누혜의 비극적 삶, 그리고 누혜의 유서, 마지막으로 동호의 의식 순으로 구성되어 전후 사회의 가장 큰 문제였던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거부당한 채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거나 그것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거나 살해당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을 인간답지 못한 상태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전쟁은 인류사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주인공 누혜는 수용소 내의 폭력과 살인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전쟁의 비인간성은 한층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고양이가 물어다 주는 쥐를 먹으며 연명하는 누혜의 어머니와 대조해 볼 때 누혜의 자살은 한층 성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왜냐 하면 누혜의 자살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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