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射手)
전광용
내가 언제 이런 곳에 왔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분명 경희임에 틀림없다. 겨드랑이에서 체온계를 빼려는 손을 꼭 잡았다. 손가락이 차다. 경희의 손은 이렇게 냉랭한 적이 없었다. 따뜻하던 지난날의 감촉이 포근히 되살아온다. 눈을 떴다. 그러나 아직도 머리는 안개가 서린 듯 보야니 흐리멍덩하다.
“정신이 드나 봐….”
경희의 음성이 아니다. 이렇게 싸늘하지는 않았다. 간호원이다. 새하얀 옷이 소복 같은 거리감을 가져온다. 꿈인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따져 보아도 꿈은 아닌 성싶다. 내 숨소리가 확실히 거세게 들려온다. 틀림없이 심장이 뛰고 있다.
총소리가― 그것도 다섯 방의 총소리가 거의 같은 순간에 울리던 그 총소리가― 아직도 고막에 달라붙어 있다. B가 맞은 건지 내가 맞은 건지 분간이 안 간 대로 그 시간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B가 거꾸러진 건지 내가 거꾸러진 건지 그것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승부는 났다. 그러나 내가 이겼는지 B가 이겼는지 알 길이 없다. 귀를 만져 본다. 찢어졌던 귓바퀴를 꿰맨 상혼(傷痕)이 사마귀처럼 두툴하다. 그 때는 내가 졌다. 아니 계속해서 내가 지고만 있었다. 지금도 어쩌면 내가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곰이라는 별명을 가진 뚱뚱한 선생이었다. 좀 심술궂은 성품이다. 그것이 수업시간에도 곧잘 나타났다. 아이들의 귀를 잡아끌거나 뺨을 꼬집어 당기는 것쯤은 시간마다 있는 일이었다. 추석 다음날이었나 보다. 그날은 나도 B도 숙제를 안 해 갔기에 꾸중을 듣고 난 뒤였다. 설명 한 마디에 ‘엠’ 소리를 거의 하나씩 섞는 그의 버릇은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곰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공책에다 ‘엠’ 소리 날 때마다 연필로 점을 하나씩 찍어갔다. 일흔 아홉․여든․여든 하나… 하학 종이 거의 울릴 것만 같다. 나는 늘 하는 버릇대로 백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조바심으로 표를 하고 있었고, 나와 한 책상에 앉아 있는 B는 거기에만 정신이 쏠려서 한눈을 팔고 있었다. 아마도 곰의 시선은 우리 둘 책상만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흔 아홉… 하학 종이 울렸다. 아쉬움을 삼키면서 머리를 들었다. 그 때다. “엠!”, “백!” 하고 내가 혼자 뇌까리는 순간 B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고함소리에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곰을 보면서 닥쳐올 벌을 각오했다. 내 공책에서 눈을 뗀 곰은 둘 다 일으켜 세웠다.
“서로 뺨을 때려!”
몇 번 외쳐야 아무 반응도 없다. 이 험악한 공기 속에서도 나는 흘낏 유리창 밑줄에 앉아 있는 경희 쪽으로 눈길을 훔쳤다. 경희는 내가 당하기나 하는 것처럼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지키고 있다. 다른 애들의 눈초리도 그러했겠지만 그때의 내 눈에는 경희의 표정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때리래두!”
곰의 손바닥이 내 뺨에 찰싹 붙었다 떨어졌다. 눈알에서는 불이 튀는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곰의 손은 다시 B의 뺨으로 옮겨갔고. B의 손을 들어서 내 뺨을 때리게 하였다. 나와 B는 하는 수 없이 흉내만을 내는 정도로 서로의 뺨을 쳤다. B의 눈동자는 아무런 악의 없이 나를 건너다보고 있다. 적당히 해치워 버리자는 암시의 빛과 같은 것이라고 느꼈다.
“더 세게 때리래두! 자, 이렇게! 자, 이렇게!”
다시 곰의 손이 B의 뺨을 후려갈겼다. 다음에 와 닿은 B의 손바닥은 전보다 훨씬 거세게 내 뺨을 때렸다. 나도 별다른 생각 없이 앞서보다는 좀 세게 B를 때렸다. 이번에는 B의 손바닥에서 오는 탄력이 먼젓번보다 더 거세었다. 내 손도 또 그랬다.
“더, 더!”
하는 곰의 응원 같은 구령에 B의 손바닥과 내 뺨 사이에 울리는 소리가 더 커지자, 내 손도 거기에 맞대꾸를 했고, 결국에는 슬그머니 밸이 꼴려왔다. 곰에 대한 반감이 어느 사이엔지 B에게로 옮겨서, B에 대한 적의를 느끼면서 후려갈겼다.
“이 자식이, 정말이야?”
하며 B는 있는 힘을 다하여 나를 때렸다. B의 눈동자에는 확실히 노기 같은 것이 서리었다. 나도 팔에 온 힘을 주어 B를 후려쳤다.
“너, 다했니?”
하고 뺨에서 코배기로 비낀 B의 손바닥이 지나가자마자 잉얼대던 뺨의 아픔을 넘어 코허리가 저리면서 전신이 아찔했다. 시뻘건 코피가 교실 널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다시 B를 치려는 순간 ‘그만.’ 하는 곰의 명령소리가 B를 한 걸음 물러서게 하였고, 내 손은 허공으로 빗나갔다. 아무 근거도 없는 승부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다. 끝장면만으로 따진다면 B가 이긴 것임에 틀림없다.
선반 위에 나란히 서 있는 약병들이 눈에 들어온다. 흰 병․자주 병․파랑․초록…… 머리가 흔들린다. 테이블 위 주사기의 알콜 탈지면에 싸인 바늘이 오히려 가슴에 따끔한 자극을 준다. 그렇다. 그날 그 공기 총알의 심장에 짜릿하던 자극 같은 것이다.
B와 나는 중학도 같은 학교였었다. 그것도 한 학급에 편성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들은 학교 안에서는 물론 집에 돌아와서도 자는 시간외에는 거의 한군데서 뒹굴었다. 아니 B가 우리 집에서. 내가 B의 집에서 자는 일도 빈번히 있었다. 성적도 그와 나는 늘 백중이었다. 초저녁까지는 나와 함께 놀기만 하던 B가. 내가 돌아온 후부터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 방법을 취했다. B와 나는 서로 표면에는 공부를 안 하는 체하면서 몰래 경쟁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B가 자고 가게 되거나. 내가 B의 집에서 자는 경우에는 둘의 공부가 합동 작전이 되지 않으면 둘 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는 날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경희의 존재는 우리들에게 퍽 미묘한 것이었다. 나도 B도 경희를 좋아했다. 나는 내가 경희를 더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B는 B대로 자기의 사랑이 더 열렬한 것으로 생각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경희 자신은 B보다는 나와 만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눈치였다. B는 몇 번씩이나 편지를 해도 답장이 없었지만 나에게 대하여는 그때그때 답장이 왔었다.
B와 나는 다른 이야기는 다 털어놓아도 경희에 관한 문제에 한해서는 어느 쪽에서든지 말을 끄집어내는 것을 꺼렸다.
졸업반으로 진급되던 해 봄이다. 그때의 성적은 B가 나를 넘어 뛰었다.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약간의 울화 같은 것이 치밀어서 이번에는 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틀림없이 만회하리라는 결심이 복받쳐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왔던 B는 내 책갈피에 끼어 있는 경희의 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이쯤 하여, 경희와의 문제도. 나와 B와의 우정에 여자로 말미암아 금이 가기 전에 내편에서 솔직히 토로하였다. 나는 은근히 B의 선선한 양보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의외의 방향으로 벌어졌다. B편에서 나에게 자기의 그러한 의사를 표하려고 적절한 기회만을 노렸다는 것이다.
그 먼저 일요일 나는 B와 경희, 경희 친구하여 넷이서 교외로 나갔다. 공기총으로 참새잡이를 시작하여 내가 까치 두 마리와 참새 두 마리를 잡고, B는 참새 세 마리를 잡았다. 돌아오는 길에 개울가 과수원에 달려 있는 사과를 겨누어 정확률을 시합한 결과 내가 이기게 되었다. 그날 저녁 중국집에서 패배한 B가 짜장면을 내면서도 안타까움이 가시지 못하여, 다음 주일에 다시 시합을 하자는 제 이차의 대전을 제기하였다. 나도 쾌히 승낙했다.
이 날 나와 B간의 경희를 싸고도는 미묘한 감정에도 약간의 농조는 섞였지만 아무 쪽에서도 시원한 양보는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은 이미 머릿속이 경희로 가득 찼었고, 어느 정도 경희의 마음속도 다짐한 후이기에, 이제 여기서 경희를 빼앗긴다는 것은 내 일생에 대한 중대한 문제로 생각되었고, B는 B대로 경희가 보통 다정하게 대하면서도 진심은 토로하여 주지 않는 것에 더한층 이성으로서의 매력 같은 것을 느껴왔던 것이다.
“할 수 없지. 또 시합이다….”
B는 내 손목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우리들은 공기총을 들고 거리를 벗어났다. 이 총으로 상대편을 나무 옆에 세워 놓고 귀의 높이 되는 나무통 복판을 정확하게 맞추는 쪽이 경희를 양보 받기로 하자는, B의 정말 상상외의 제안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B의 너무나 의기양양한데 비하여 그 이상의 비굴은 보이고 싶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응낙했다. 이번에는 누가 먼저 쏘느냐는 순번이었다. 그것은 경희의 양보 문제를 제기한 것이 나이니까. 나부터 먼저 쏘라는 B의 일방적인 통고 비슷한 제의였다. 당사자 경희가 알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그때의 나로서는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나는 총을 들어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나무 옆에 서 있는 B의 귀를 평행으로 나무통 복판에 가늠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총을 내리고 서서히 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총알은 조금 위로 올라갔으나 나무 한복판에 맞았다. 일순 B와 나와 시선은 마주쳤다.
다음은 B의 차례였다. B는 나를 나무 옆에 꽉 붙여 세워 놓고는 정한 위치로 갔다. 총을 들어 개머리판을 오른편 어깨에 대고, 바른 뺨을 그 위에 비스듬히 얹고, 한 눈을 쪼그라지게 감으며 조심스레 조준을 맞추는 것이었다. 나는 B의 너무도 심각하게 정성들이는 표정이 우스워서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방아쇠는 당겨졌다. 나는 "악!"비명을 치면서 뺑뺑 돌다가 푹 주저앉았다. 총알은 내 오른쪽 귀뿌리를 찢고 달아났던 것이다. 피가 뺨으로 스쳐 흘렀다. 만지고 난 손가락 사이가 찐득거렸다.
이런 일뿐이 아니다. 나와 B의 사고방식이나 행동 속에는 너무나 우연한 일치 같은 것이 많았다. 내가 문득 머리에 떠올라 시작한 일이면, 벌써 B도 나와 때를 거의 같이하여 서로의 상의나 연락도 없으면서 그런 생각을 토로하거나, 그 일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자칫하면 본능적인 경쟁 의식이나 또는 자기만으로서의 우월감 같은 것을 유발하여 둘의 우정에 거미줄 같은 금을 그어 놓는 것이었다. 그러한 예들은 B와 나 사이의 동심에서부터의 긴 교우 관계에 있어 너무 나도 많았다.
간호원이 머리의 찬 물수건을 갈아 붙이고 있다. 이마의 차가움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흐릿하던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타래못처럼 호비고 막다 들어온다. 그러나 눈꺼풀은 아직도 무거워서 팽팽하게 떠지지 않는다.
드리쿼터 속에 실려서 사형 집행장으로 가는 다른 네 명의 사수(射手)들은 어저께 공일날 외출했던 이야기에 흥을 돋우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전라도에서 새로 왔다는 열 일곱 살난 풋나기의 육체미에 녹아 떨어진 이야기를, 손짓을 섞어 침을 입술에 튀겨가며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이야기들이 신통한 반응을 주지 않는다. 지금 내 머릿속은 B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만약 경희의 행방을 모르는 대로 B와 다시 만났던들 그렇게 내 머릿속이 뒤엉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새로 전속되어 오던 날 부대장에게 신고를 하고 나오던 길로 복도에서 B를 만났다. 서로 생사를 모르다가 기적같이 처음 맞닿은 이 순간, 나는 함성을 울리며 B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나 B의 표정 속에는 사선을 넘어온 인간의 담박한 반가움보다는 멋적고 어쩔 줄 모르는 머뭇거림이 나에게 열적게 감득되었다. 실로 몇 해 만인가! 허탈한 감격밖에 없을 이 순간에 B는 무엇인가 복잡한 생각에 휩싸이는 눈초리를 감추려는 당황함이 엿보이게 하고 있다.
나와 경희는 형식적인 절차는 밟지 않았다 할지라도 약혼한 바나 다름없었고, 주위의 사람들도 또한 그렇게 보아왔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B는 그러한 나와 경희와의 관계를 억지로 부인하려는 자세였지만, 객관적인 조건은 그렇게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나와 경희와의 사이를 가장 정밀하게 측정하고 있는 것이 B의 위치였던 것이다.
사변 전 우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생사에 관한 안부가. 자연히 나와 B의 대화의 주요한 말거리였고, 내가 가장 알고 싶었던 경희의 이야기도 따라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B가 잘 모른다고 대답하는 그 어감 속에는 그의 표정까지를 보지 않아도 꺼림칙하고 불투명한 구석이 적지 않게 섞여 있음이 느껴져 왔다. B를 아까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의 이상한 육감은. 지금 더 굳어져 가는 어떤 방향의 시사를 받는 것이 분명하다. 그도 바쁜 시간이어서 그날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사태가 정작 내 앞에 벌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휴가 중의 외출에서 돌아올 때 공교롭게도 B의 가족 동반의 기회에 마주친 일이다. 여기에서 오래도록 감추어졌던 모든 자물쇠는 열렸다. B의 옆에는 벌써 어머니가 된 경희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경희는 충격적인 고함소리 한 마디를 치고는 이상하게도 기계라도 정지하는 것처럼 다시 태연해지는 것이었다. 아마도 B에게서 나의 생존을 알고, 이미 결정지어진 과거에 대하여 어쩔 수 없는 체념으로 마음을 다져 먹었지만, 이 불의의 경우에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보니 격동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과거의 경희를 가장 잘 아는 나 혼자만의 추측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경희의 심정을 내 쪽으로 접근시켜 더욱 높게 추리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또한 경희를 배신적인 것으로 험하여 탓할 수도 없는, 말하자면 전란이라는 환경이 주어진 어쩔 수 없는 경우로 극히 평범하고도 관대한 단정을 나는 나 자신에게 내리는 것이다. 그만큼 이 짧은 시간의 착잡한 표정 속의 침묵은 나에게 비길 수 없는 중압감을 덮어씌웠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침묵 뒤에 경희의 표정이 B와 나를 번갈아 곁눈질하는 속에서도 나의 단정은 어느 정도 정확하다는 것을 시인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경희의 입으로 터져나오는 말이 나를 더 놀라게 하였다. 나더러 애기가 몇이냐는 것이다. 결혼은 했느냐는 여부도 없이 선 자리에서 한 단계를 뛰어 넘는 것이다. 비범하게 좋았던 경희의 두뇌에서 튀어나올 법한 기지(機智)임에 틀림없다. 그것도 이 무거운 질식 상태의 분위기를 완화하려는 여자의 얇은 재치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모두 나에 대한 절실했던 애정의 환원이나 회상에서가 아니라. 지금의 자기 남편인 B에 대한 아내로서의 내조적인 협조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날에 그렇게도 못 잊어 했던 나에 대한 흘러간 추억 속의 동정 같은 값싼 것으로만 나는 여겨지는 것이었다. 나는 어느 말부터 끄집어내야 할지 이야기의 실마리를 잃고 맹추같이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둘이서 얼싸안고 실컷 울어도 시원치 않을 이 자리에서….
이 얼마를 두고 머릿속에 감아 붙던 B에 대한 적의(敵意)가 차츰 경희에게로 옮겨져 가는 것 같은 미묘한 감정을 의식했다. 그러면서도 나의 경희에 대한 미련 같은 아쉬움은 완전히 가셔지지 않았다. 그것이 다시 B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동되었다가 또다시 경희에게로 옮겨졌다가 하는 유동이 얼마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가는 결국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박탈되어 간 것같이 경희에게 변호가 가게 되고. 나중에는 B에 대한 배신감만이 완전히 고정적인 자리를 차지해 가게 되어 버렸다.
호려가던 머리가 또렷해진다. 그러나 그것이 끝끝내 지속되지는 않는다. 반딧불 마냥 깜박거린다. 단속적으로 나타나는 장면만은 선명하다.
흰눈이 쌓인 산록(山麓)의 바람 소리가 시리다. 그것은 바로 사형 집행장에서의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권총 사격에 몇 점, 가아빈에 몇 점, 엠원 소총에는 몇 점하는 명사수의 하나로 나의 소속 부대에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이 사형집행의 사수로 지명될 줄은 몰랐다. 또 그렇게 달갑지도 않은 일이다. 더욱이 일단 지명된 이상에는 피해 낼 도리가 없다. 아무도 이런 일을 선두에 서서 하겠다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도 전기 장치로 된 집행장에서 단추 하나를 누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계가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여 주는 경우라면 몰라도, 이런 경우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전에 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들의 고역을 상상해 본 일이 있다. 그럴 때마다 소름이 끼쳐 그런 일을 어떤 불우한 사람들이 직업으로 삼고 맡아 할 것인가 하고 동정했던 것이다. 사실 그 경우 죽는 사람 죽이는 사람 사이에는 개인적으로 생명을 여탈(與奪)할 하등의 이해 관계가 없는 것이 거의 전부의 경우이기에….
지금 나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B가 오늘 집행되는 수형(受刑)의 당사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순간― 그것은 참말 계량할 수 없는 눈 깜짝할 찰나였지만― 복수의 만족감 같은 희심의 미소를 지을 뻔했던 것이다. B의 얼굴에 겹쳐 경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들이 다 어릴 때부터의 벗이던 순진하고 아름다운 정에 얽매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언젠가 가족 동반에서 만나 당황하는 표정들이 점점 혐오를 느끼게 하던 그런 모습들인 것이다.
나는 눈을 떴다.
십 미터의 거리. 전방에는 B가 서 있다. 목사의 기도는 끝났다. 유언(遺言)이 없느냐고 물었다. B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앞에서 졌다고 항복한 일이 없는 B다.
그렇게 서로 대결이 되는 경우는 늘 내가 양보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었다. 오늘도 이 숨 가쁜 마지막 고비에서. B의 목숨을 앞에 놓고 B와 나는 여기 우리 둘이 한 번도 같이 와 본 적이 없는 눈 덮인 산골짜기에서 이렇게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알아보는 B의 눈은 조금도 경악의 표정은 없다. 일체의 체념이 나까지도 안중에 없게 하는가 보다. 그러면 나는 벌써 이 마지막 순간에도 이미 B에게 지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이 자리에 사수로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B는 무슨 말이든 한 마디 남겼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경희에게만은 무슨 마지막 당부의 한 마디를 전하여 주고파 했을 것이 아닌가.
다섯 명의 사수는 일렬로 같은 간격을 두고 나란히 횡대로 늘어섰다. B의 손은 묶인 대로이다. 그의 눈은 검은 천으로 가리어졌다. 왼쪽 가슴 심장 위에 붙인 빨간 헝겊의 표지가 햇빛에 반사되어 더 또렷하다. 헛기침 소리 이외에는 아무의 입에서도 말이 없다. 다만 몸들의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B가 이적적인 모반(謀叛)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신문 보도를 본 얼마 후 나는 B의 집으로 경희를 찾아갔다. 이 근래의 B의 의식 상태에는 약간의 이상적인 징조가 나타나 발작적인 행동이 집안에서도 거듭되었다는 사실은 이 날 들은 이야기이다. B는 나의 절친한 친구의 한 사람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그 생각은 버리지 않는다. 그와의 개인적인 대결이 치열할수록 나는 그를 잊어 본 적이 없다. 내 삼십 년의 지내 온 세월에 있어서 B는 내 마음속에 새겨진 가장 오랜 친구였고, 접촉된 시간도 가장 긴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와 그는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사귀어 왔다. 다만 경희의 경우를 비롯한 몇 구비의 치열한 대결은 B와 나의 의식적인 적대행위가 아니라, 환경적인 조건이 주어진 불가피한 운명 같은 것이 더 컸다고 나는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아끼던. 아니 현재도 아끼고 있는 유일한 친구이고, 그와의 어쩔 수 없는 대결이 거세면 거셀수록 그에 대한 관심이 더 강력하게 작용했던 만큼 그의 혐의를 받는 죄상에 대한 내막은 이 이상 더 소상하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나를 만난 경희는 시종 울기만 하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떨어졌다가 만난 육친의 애정 같은 것이어서 그 자리에서는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도 없는 것만 같았다. 경희는 남편인 B의 구출 문제보다도 나에게 대한 자신의 변명 같은 호소로 일관하였다. 사변통에 나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고, 수복 후에 우연히 만난 것이 나와 자기와의 과거를 가장 잘 아는 B였기에. 나의 생사에 대한 수소문을 서두르는 사이에 나의 소식은 묘연했고, B와의 결혼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지금이라도 경희가 B를 버리고 나의 품으로 뛰어오겠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애정의 여신(餘燼)이나 아량이 없는 바도 아니었지마는, 몇 번이고 죽음에 직면했던 나로서, 경희의 행방에 대한 관심이 얼마동안 적극적이 되지 못하였던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이 이제야 더욱 거세게 싹터 나로 하여금 아무의 힐난(詰難)도 못하게 만들었고, 오히려 경희에 대한 미안한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해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B의 구명 운동이 우리 둘의 긴급한 일로 당면될 뿐이었다.
안전 장치를 푸는 쇠붙이 소리가 산골짜기의 정적 속에 음산하다.
나는 무심중 귓바퀴의 상처에 손이 갔다. 호도껍질처럼 까칠한 감촉이 손끝에 어린다. 지나간 조각조각의 단상들이 질서 없이 한 덩어리로 뭉쳐져 엄습해 온다. B와, 경희와, 곰과, 공기총과, 걷잡을 수 없는 착잡한 감정이다.
“겨누어. 총!”
구령에 맞추어 사수는 일제히 개머리판을 어깨에 대고 B의 심장에 붙인 붉은 딱지에 총을 겨누었다.
순간 나는 내 정신으로 돌아왔다. 최종에는 내가 이긴 것이라는 승리감 같은 것이 가늠쇠 구멍으로 내어다 보이는 B의 심장 위에 어린다. 그러나 나는 곧 나의 차디찬 의식을 부정해 본다. 어떻게 기적 같은 것이라도. 정말 기적 같은 것이 있어 이 종언의 위기에 선 B를 들고 달아날 수는 없는 것인가고…. 방아쇠의 차디찬 감촉이 인지(人指)의 안배에 싸늘하게 연결된다. 내가 쏘지 않아도 다른 네 사수의 탄환은 분명 저 B의 가슴의 빨간 딱지 표지를 뚫고 심장을 관통할 것이다.
“쏘아!”
구령이 끝나기가 바쁘게 일제히 ‘빵!’ 소리가 났다. 나는 아직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여기 B와의 최후 순간의 대결에서 나는 또 지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나마 그와의 대결의 대열에서 제외되어서는 안될 것 같다.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총신이 위로 퉁겨 올라가는 반동을 느꼈을 뿐이다. 화약 냄새가 코를 쿡 찌른다. 그 때는 이미 B는 다른 네 방의 탄환을 맞고 쓰러진 뒤였다. 그는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나에게 이겼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총소리와 함께 나 자신도 그 자리에 비틀비틀 고꾸라졌다. 극도의 빈혈이었다.
“이제 의식이 완전히 회복돼 가는가 봐요.”
눈을 떴다.
옆에 경희가 서 있다. 찬 수건으로 내 콧등의 땀을 닦아 내고 있다. B와 나란히! 아니. B는 없다. 경희도 아니다. 무표정하게 싸늘한 아까의 간호원이다. 내가 이겼는지. B가 이겼는지. 내가 이겼어도 비굴하게 이긴 것만 같은 혼몽한 속에서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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