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전문

최인훈 '광장' 전문

열공햐 2021. 1. 30.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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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최인훈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중립국으로 가는 석방 포로를 실은 인도 배 타고르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삼천 톤의 몸을 떨면서, 물건처럼 빼곡이 들어찬 동지나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려져 간다.

 

석방 포로 이명준(李明俊), 오른편의 곧장 갑판으로 통한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 배 뒤쪽 난간에 가서, 거기에 기대어 선다.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켜댔으나 바람에 이내 꺼지고 하여, 몇 번이나 그르친 끝에,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오른팔로 얼굴을 가리고 간신히 댕긴다. 그때다. 또 그 눈이다. 배가 떠나고부터 가끔 나타나는 허깨비다. 누군가 엿보고 있다가는, 명준이 휙 돌아보면, , 숨어 버린다. 헛것인 줄 알게 되고서도 줄곧 멈추지 않는 허깨비다. 이번에는 그 눈은, 뱃간으로 들어가는 문 안쪽에서 이쪽을 지켜보다가, 명준이 고개를 들자 쑥 숨어 버린다. 얼굴이 없는 눈이다. 그때마다 그래 온 것처럼, 이번에도 잊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무언가를 잊었다는 것을 깨달은 느낌이 든다. 무엇인가는 언제나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실은 아무것도 잊은 것은 없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이 느낌은 틀림없이 일어난다. 아주 언짢다. 굵은 밧줄을 한 팔에 걸치고 뱃사람이 지나가면서, 입에 물었던 파이프를 뽑아 명준의 가슴께를 두어 번 치는 시늉을 한 다음, 그 파이프로 선장실을 가리킨다. 명준은 끄덕여 보이면서 바다에 대고 담배를 휙 던지고, 선장실로 가는 사닥다리 쪽으로 걸어간다.

 

선장은 비스듬히 앉아서 차를 마시다가, 들어오는 명준에게 다른 한 잔의 차를 턱으로 가리킨다. 구레나룻이 탐스런 그 얼굴은, 아리안 핏줄에서 좋은 데만 갖춘 듯, 거무스름하게 칠한 깎아 놓은 토막을 떠올리게 한다. 앉으면서,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수용소에서 마시던 것보다 씁쓸한 맛이 나는 인도 차를, 별미라고 이렇게 가끔 불러서 내놓는다. 선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눈길을 옮겨, 왼쪽 창으로 내다본다. 마스트 꼭대기 말고는 여기가, 으뜸 잘 보이는 자리다. 바다는 그쪽에서 활짝 펴진, 눈부신, 빛의 부채다.

 

오른편 창으로 내다본다. 거기 또 다른 부채 하나가 있고, 아침부터, 이 배를 지키는 전투기처럼 멀어지고 가까워지고 때로는 마스트에 와 앉기도 하면서, 줄곧 따라오고 있는 갈매기 두 마리가, 그 위에 그려 놓은 그림처럼 왼쪽으로 비껴 날고 있다.

 

포로들을 데려가는 일을 맡아서 타고 오는 무라지라는 인도 관리는, 낮에는 하루 내 술이고, 밤이면 기관실 위에 붙은 키친에서 쿡을 우두러미로 벌어지는 카드 놀음으로 세월을 보냈고, 배 안에서 석방자들의 살림과 선장과의 오고 가기 따위는, 거의 명준이 도맡아서 보고 있다. 그의 영어는 그럭저럭 쓸 만했다. 처음 만나서 명준의 학력을 물을 때 ○○○ University라고 배운 데를 댔더니, 선장은 대뜸, r 자를 몹시 굴린 명준의 소리를 고치면서,

 

"아하, 유니버시티라고요?"

 

r 소리를 죽여 버린 밋밋한 소리를 해보였다. 영국에서 상선학교를 나왔다고 하면서, 이쪽이 알 턱이 없는, 영국 해군의 우두머리들을 누구누구 이름을 대가면서 같이 배웠노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말에는 뭇사람들의 구랜내나는 제 자랑하는 투는 없고 어린애 같이 맑은 데가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사귀면서 느껴 오는 일인데, 그들은 줄잡아 우리 사람보다 어린애다운 데가 있다. 그러면서 그럴 만한 데서는 또 어린애들 모양 고집통으로 떼를 쓰면서, 가볍게 몸짓을 바꾸지 못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의 몸 속 성깔의 뼈대를 문득 짐작하게 된다. 홀로 선장뿐 아니라 뱃사람들도 쳐서, 이 배의 그들 석방자들에 대한 눈치에는, 어느 나름의 은근히 알아준다는 대목이 있다. 그 대목인즉 그들 석방자들이 제 나라 어느 한쪽도 마다하고, 낯선 땅을 살 곳으로 골랐다는 데서 제 나라에서 쫓긴 수난자 같은 모습을 저희들대로 그려 낸 탓인 모양이다. 이런저런 일로 그런 눈치를 채게 될 때마다 턱없는 몫을, 눈을 지르감으며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부끄러움을 맛본다. 부끄러워하는 자기가 혀를 차고 나무라고 싶게 못마땅하다. 그 마음을 다 파헤치면 뜻밖에 섬뜩한 무엇이 튀어나올 것 같아 두루뭉실한 손길로 얼버무려 온다.

 

"어때요, 느낌이? 기대, 두려움?"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없어요."

 

명준은 고개를 젓는다. 선장은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훅 뿜어 내면서 가볍게 웃는다.

 

"허긴,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야, 지기 나라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고 생판 다른 나라로 가 살겠다는 그 일이 말이지. 무모나 가까운 핏줄이라든지, 아무도 없소?"

 

"있어요."

 

"누구? 어머니?"

 

"아니."

 

"아버지?"

 

명준은 끄덕이면서 왜 어머니부터 물어 보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한다.

 

"애인은?"

 

명준은 얼굴이 그렇게 알리도록 금시 해쓱해진다. 선장은 당황한 듯이 오른손 인지를 세우고 고개를 까닥해 보이면서,

 

"미안, 미안."

 

아픈 데를 건드린 실수를 비는 그런 품에 그들로서는 버릇인지 모르나 퍽 분별 있는 사람의 능란한 몸짓이 얼핏 스친다. 선장을 잠시나마 거북하게 해서 안됐다. 양쪽으로 트인 창으로 바람이 달려들어 와서, 바늘로 꽂아 놓은 해도의 가장자리를 바르르 떨게 한다. 갈매기들은 바로 옆을 날면서 창으로 테두리진 넓이를 내려가고 치솟으며, 맞모금을 긋고 배꼬리 쪽으로 획 사라지곤 한다. 햇빛이 한결 환해지면서 멍한 느낌이 팔다리를 타고 흘러간다. 먼 옛날 그의 초라한 삶에서 그래도 무겁다고 해야 할 몇 가지 일들이 다가올 때도 그렇더니…… 애인은? 그 말이 아직 이토록 깊고 힘센 울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애인이 있으면 이렇게 다른 다른 나라로 가겠다고 나설 리가 있습니까?"

 

명준은 미안했던 것을 메우기나 하듯, 짐짓 누그러면서 선장을 건너다본다.

 

선장은 잠깐 실눈이 되었다가, 문득, 잘라 말한다.

 

"아니지, 그럴 수도 있지."

 

그 몹시 가라앉은 말투에 섬뜩해지면서, 빈 찻잔을 들어 만지작거린다. 저쪽은 다짐하듯,

 

"아니지, 그럴 수도 있지."

 

"글쎄요."

 

아까와는 딴판으로, 그 일에 내놓고 티를 보이는 폼이 곧아서 좋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남기고도 항구를 떠나야 할 때가 있으니까."

 

선장은 제 일을 새기고 있는 모양이다. 그 뒤를 따라서 이 마흔줄 선장이 겪은 바닷바람처럼 저릿하고, 어쩌면 밤바다와 같이 어두운 사랑 이야기가 흘러나올 듯하다. 그때 뱃사람들이 들어와서 알렸다. 기관부에 무슨 탈이 있다는 말인 듯한데, 기계 이름을 섞어 가면서 빠르게 주워섬기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다. 선장은 일어서면서 명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이따 밤에, 좀 늦어서 오게."

 

싱긋 웃어 보이고는 뱃사람을 앞세우고 사다리를 내려간다. 그들이 나가고 잠깐 앉았다가 뱃간으로 돌아온다. 한방에 있기로 된 박은, 아래위로 갈라진 잠자리 아래쪽을 차지하고 누워 있다가, 기척을 듣고 이편으로 돌아눕는다. 함흥에서 교원 노릇을 했다는 그는, 배를 타고부터 틈만 있으면 잠을 잔다. 모가 진 얼굴에 졸린 듯한 가는 눈을 가진 젊은이다. 명준은 그를 만났을 때 지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지쳤다면 자기도 그렇지만, 박의 경우는 더 때묻고 고린내나는 삶의 고달픔일 것이라고 느낀다. 그런 느낌은 미상불 저쪽을 깔보는 것이었고, 명준은 그 독살스럽게 감겨 오던 공산당원들의 늘 하는 소리였던 소부르주아 근성일 거라고 혼자 쓴웃음을 짓는다. 그는 다시 저편으로 돌아누우면서,

 

"다음 들르는 데가 홍콩이라지?"

 

"."

 

명준은 자기 자리인 윗다락으로 기어오르면서 박의 머리맡을 내려다보았을 때, 베개에 반쯤 파묻힌 위스키 병을 본다. 이제까지 혼자 누워서 한 모금씩 빨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를 수 없을까?"

 

"안 될 거야. 일본에서두 안 됐으니까."

 

"우리가 무슨 억류잔가? 이건 바로 포로 다루듯이 아니야?"

 

술기가 있다. 그러니 어쩌란 말이냐, 명준은 속으로 뇌까리면서 울컥 화가 치민다. 여럿이 똑같이 느끼는 투정을 그 중 어느 한 사람이 혼자만 당하는 체하면 짜증스럽다. 대답을 않고 길게 발을 뻗는다. 팔다리가 오그르르 풀리는 짜릿함이 제법 즐겁다. 몸을 돌리면서 한 팔을 아래로 뻗친 다음 주먹으로 기둥을 두어 번 툭툭 치고, 주먹을 편다. 이내 뭉툭한 유리병 모가지가 와 닿는다. 술병을 받아 올려 딱지를 본다. 일제 양주다. 병은 삼분지 일쯤 비고도 아직 듬직한 무게가 남았다. 병마개를 뽑고 한 모금 빤다. 향긋하고 찌르르한 흐름이 혓바닥 위로 흘러든다. 연거푸 두어 모금 마신 다음, 도로 팔을 뻗쳐 임자한테 돌려준다. 아래쪽에서 느닷없이 박이 흐흐흐 웃는 소리가 들린다. 왜 그런지 명준은 소름이 쪽 끼친다. 벌떡 일어나면서,

 

"왜 그러나?"

 

대답이 없다.

 

"? 왜 그래?"

 

그제야 대답이 온다.

 

"흐흐흐, 여보게 자네 지금 다시 골라잡으라면 그래도 중립국으로 가겠나? 난 모르겠어."

 

명준은 일으켰던 몸을 소리 없이 눕힌다.

 

누워 있는 자리가, 그대로 슬며시 가라 앉아서, 배 밑창을 뚫고 바닷속으로 내려앉을 것 같은, 어두운 멀미가 그를 잡아끈다. 불일듯하는 목구멍을 식히려고 침대에서 내려 큰 컵으로 물을 따라 마시고 다시 자리로 기어오른다. 굳이 돋우지 않아도, 얻어 마신 술기운이 벌써 스며 오는지 스르르 눈꺼풀이 감긴다. 다시 골라잡는다? 다시 골라잡으래도 또 지금 이 자리를 짚겠느냐고? 암 그렇지…… .

 

깨어 보니 저녁 끼니 무렵이다. 끼니 때면 그들 석방자 모두는 으레 한곳에 모였고, 그런 다음에는 뒤쪽 손잡이 울타리에 몰려서 한참씩 때를 보내다가 어느새 뿔뿔이 흩어지곤 한다. 앞날을 같이하는 그 들이 되도록 떨어지지 말자고 자주 모이고, 모이면 흩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 정작 그렇지 않다. 하긴 처음 탔을 땐 그랬다. 뱃길에 나선 지는 사흘밖에 안 되지만, 기다린 사이까지 쳐서 이 배를 타기는 열흘이 넘었다. 기다리는 동안 무라지를 거쳐 옮겨지는 일의 앞뒤를 알고, 움직임을 같이하기 위하여 그들은 '무리'로 움직였다. 그것은 무리의 매정스런 걸음에서 밀려나지 말자는, '' 쪽의 타고난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라곤 할 수 없었다. 정작 모든 일이 끝나고, 이제 갈 데까지의 뱃길만 남았을 때는, 그들은 서로 어울리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무슨 갑자기 매정스러워졌다는 건 아니다. 갈 데까지 가는 동안 마물러 두어야 할 마음의 매듭을 혼자서 소리 없이 풀자면, 나누어진 뱃간으로, 더 바르게는 저마다 가슴속으로 몸을 사려야 했기 때문에이다. 명준의 방에서 벌어지는 모습은 모든 방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끼니 때 모일 적마다 서로 눈치를 살핀다. 남들 얼굴에서 그 숨은 일거리가 얼마나 축이 났는지를 캐어 보는 것이었으나, 한결같이 활짝 핀 얼굴이라곤 없다. 그러면 그들은 한편 마음놓고 한편으론 더욱 답답하다.

 

자기만 그런 것은 아니어서 마음이 놓였고, 풀려야 할 매듭이 풀리지 않아 답답하다.

 

바다는 잔잔하다. 바람은 낮보다 더 시원하고, 달은 벌써 하늘 한가운데 있다.

 

그들은 울타리를 잡고 한 줄로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무도 말이 없다. 처음엔 이렇지 않았다. 떠들고, 노래 부르고, 흥겨운 힘이 넘쳤었다. 명준은 언제 갈 데 닿기 전에 배에서 술추렴이라도 한 번 열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선장은 그러라고 하리라. 그러자 아까 선장이 밤에 오라던 생각이 난다. 선장실을 올려다본다. 환하게 불이 켜진 작은 망루처럼 보이는 그 방 위로 뻗친 마스트에, 휜 점을 본 듯싶어 눈을 두어 번 껌뻑이고 나서 다시 올려다본다. 분명치는 않았으나 갈매기들이리라. 불현듯 오늘 밤 선장이 여자 이야기를 꺼내면 어쩌나 싶었다. 남의 속 얘기를 듣고 그것을 갚자면 자기 속을 털어놓는 것말고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좀 늦어서 오라고 했지. 명준은 둘러본다. 벌써 다 흩어지고 거기 남은 사람은 저까지 쳐서 서넛뿐이다. 뱃간으로 갈까 하다 말고, 부엌으로 간다. 들여다본다. 덜미가 두 겹으로 겹친, 돼지처럼 살찐 주방장의 굵은 목이, 천천히 이쪽으로 틀더니 째리듯 한 번 명준을 쳐다보고, 돌아간다. 그 눈매는 버릇이다. 아마 눈이 나쁜 모양이다. 그 옆에, 무라지의 깡마른 얼굴이 있다. 알루미늄이 번들번들 윤나게 손질이 된 그 방에서,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등을 구부리고 머리를 조아린 한 무리의 사람들은, 어찌 보면 퍽으나 오손도손해 보인다. 처음 이곳을 기웃했을 때, 주방장은 한몫 끼라고 눈짓을 했으나 고개를 흔들자 시원스레 자기도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었다. 어린애가 조르다가 금방 잊어버리고 딴 장난을 하는 것처럼.

 

몹시 외곬인 친구다. 한참 서서 카드 놀이를 들여다본다. 주방장은 어깨를 낮추고 있다가, 자기 앞에 패가 돌아오면, 허우대에 어울리지 않는 잽싼 폼으로 손을 놀려 패를 던진다. 문간을 떠나 선장실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마스트를 올려다본다.

 

가까운 자리에서 보니 분명히 갈매기 두 마리는 거기 있었다. 희끔한 그림자 둘이 어렴풋이 떠 있다.

 

명준은 벌떡 일어나서 뚜벅뚜벅 계단을 짚어 올라간다. 뱃머리 쪽 하늘을 쳐다본다. 별이 쏟아지듯 한 밤이다. 아직 달이 있는데 별빛이 그토록 눈부시다. 선장은 해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컴퍼스를 던지고 의자에 가 앉는다.

 

"갈매기가 따라오는군는요."

 

전혀 벼르지 않았던 그런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뱃사람들은 저런 새를 죽은 뱃사람의 넋이라고들 하지. 뱃사람을 잊지 못하는 여자의 마음이라고도 하고. 흔히 저런 수가 있는데, 한 번은 영국에서 캘커타까지 따라온 적이 있어. 그 새가 없어졌을 땐 서운하더군. 대단한 정성 아닌가. 아마 메인 마스트에서 주무실걸."

 

선장이 창으로 목을 내밀고 삐끔히 위를 올려다본다.

 

", 아가씨들 저기 있군. 기왕이면 아가씨들이라 하는 편이 로맨틱하잖아? 시스터 갈, 하하하."

 

주방장이 커피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자기 보스와 친한 손님에게 어려워하는 티와 얼마쯤 시샘이 섞인 몸짓으로 서브하고 나서 뒤뚝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간다. 발소리가 사라졌을 때 명준은 입을 연다.

 

"켑틴, 주방장도 헤엄을 칩니까?"

 

선장은 배를 끌어안고 몹시 웃는다.

 

", 치고 말고. 그러나 물에 뜨는지는 장담 못 해."

 

그리곤 또 한바탕 웃는다. 명준은 허우대가 훤칠한 선장이 깔깔대는 모양을 바라보면서 어두운 마음이 조금 가신다.

 

웃음을 그친 선장은, 문득 가라앉은 목소리가 되더니, 이런 말을 꺼낸다.

 

"벌써 스무 해 전이군. 내가 캘커타에서 첫 뱃길에 올랐을 때, 편지 한 장을 받았어. 까닭없이 나를 버린 어떤 여자한테서 온 편지였지. 퍽 나무랄 줄 알지만 자기 일이 그랬노라고, 탈없는 뱃길을 빈다고. 처음 뱃길에, 게다가 뜻밖의 편지로 어수선해서 멀어져 가는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갈매기 한 마리가 우리 배를 자꾸 따라오는 걸 봤지. 아까 내가 한 얘기는 바로 그때 캡틴이 내게 한 거야. 난 그게 꼭 그녀 모습이라고 생각했어. 그 후에도 가끔 그런 일이 있었지. 허지만 다 옛날 얘기고, 지금은 뱃길마다 어김없이 아들 마누라에게 선물 사가는 것이 즐거움인 늙은일세."

 

선장은 찬장문을 열고, 총몸이 긴 사냥총을 끄집어내어 어깨에 대고, 허공을 한 번 겨냥해 보고 나서 명준에게 넘겨 준다.

 

"일본 사냥총이야. 벌써부터 조르는 걸 이번에야 갚는군."

 

커피를 마시고 한참 이야기하다가 선장실에서 물러나온다.

 

아름다운 별밤이다.

 

올려다보면, 별하늘에서 마스트가 솟아나서 기기에 선장실이 붙고 갑판이 달린 것 같다. 갑판 어두운 구석을 찾아 반듯이 드러눕는다.

 

새들이 바로 위에 보인다. 새들은 먼 밑바닥에서 이리로 날아오다가 문득 마스트에 걸린 흰 댕기처럼 보인다.

 

대학에서 종로로 나오는 길가에 늘어선 플라타너스 잎사귀는 거의 다 지고, 가지 끝에 드문드문 매달린 나뭇잎새가, 바람이 불면 망설이듯 하늘거리다가, 그제는 선선히 바람에 몸을 맡기고 팔랑개비처럼, 빙글빙글, 떨어져 온다.

 

늦은 가을이, 옷깃을 여미고, 조용히, 한숨을 쉬고 있다. 이명준은, 겨드랑이에 낀 책꾸러미 속에서 대학 신문을 끄집어내어 펼쳐 든다. 그런 글이 실리는, 맨 뒷장에 자기가 보낸 노래가 칸막이로 짜여서 실려 있다.

 

아카시아가 있는 그림

 

아카시아

 

우거진 언덕을

 

우리는 단둘이

 

늘 걸어가곤 했다.

 

푸른 싹이

 

향긋한 버러지처럼

 

움터 나오는 철에

 

벗은 오히려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멋있는 서막이

 

바로 눈앞에

 

다가 잇는 성싶어

 

아카시아 새싹 같은 말이야

 

?

 

아무도 나빠할 리 없는

 

꽃 피는 철이 되더니

 

벗은 또 멋지게 꽃잎을

 

코 끝에 대면서

 

말한 것이다.

 

아 참 삶은 멋있어

 

아카시아 꽃내음처럼

 

기막혀

 

이리하여

 

하늘이

 

저렇게 높아 가는

 

이 무렵

 

벗은 이윽히

 

가지에 눈을 주며 말하는 거다

 

삶은 섬뜩한 것이야

 

이 아카시아 가지처럼

 

단단해

 

그래도 나는

 

아주 아무렇지 않은 낯빛으로

 

천천히 한 대 피워 물면

 

그도 하릴없이

 

담배를 꺼내 물고

 

아카시아

 

우거진 언덕을

 

우리는 또 말없이

 

걸어가는 것이었다.

 

신문을 받고 자기 노래가 실린 것을 알고서도, 곧 읽어 보지는 않았다. 어쩐지 다른 사람들 보는 데서 제 글이 실린 신문을 펴들고 있기가 쑥스러워서.

 

그럴뿐더러 신문을 접어서 끼운 다음, 학교 문을 나설 때까지, 거기 신문이 있다는 일을 되도록 잊어버리려고 애쓴다. 학교 안에서 펴내는 소꿉장난 같은 신문에 노래 한 가락이 실렸대서, 대견해하는 것처럼 믿고 싶지 않았으며, , 장난 삼아 보냈더니, 이쯤 의젓하게 꾸미려던 것이다. 그런 탓으로, 이렇게 한쪽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그쪽 팔을 거북스럽게 구부려 신문 한 모서리를 잡은 몸매로 걸어보면서, 활자로 찍힌 자기 노래를, 지금 처음, 똑똑히 훑어본다. 가벼운 울렁거림을 속일 수는 없다.

 

철학과 3학년이다. 철학과 3학년쯤 되면, 누리와 삶에 대한 그 어떤 그럴싸한 맺음말이 얻어지려니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곧이어 겨울방학이 될 3학년 가을, 아무런 맺음말도 가진 것이 없다. 맺음? 맺음말이란 건 무얼 말하는 것일까? 누리와 삶에 대한 맺음말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만 잡히면 삶 같은 건 아주 시시해지는 그런 무엇일까. 아니 반드시 그럴 것까지는 없고, 또 그러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떻게 살아야 보람을 가지고 살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날엣 날마다 눈으로 보고 느끼고 치르는 모든 따위의 일이라면 아무런 뜻도 거기서 찾지 못한다. 먹고 자고 일어나고 낯 씻고 학교에 와서 교수의 말을 시시하다면서 적어 두고, 또 집에 가고, 비가 오면 우산을 받고, 누가 가자고 끌면 영화 구경을 가고. 끄는 사람은 대개 영미였고. 영미의 그 화려한 사는 본때가 조금도 부러울 게 없다. 댄스 파티, 드라이브, 피크닉, 영화, 또 댄스 파티…… 그 되풀이가 그녀의 나날이다. 무슨 잠작이 있길래 그다지도 때를 헛쓰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아무 짐작도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리듬을 몸으로 옮기는 재미. 빠름에 취하는 재미. 어떤 데 먹이를 다른 곳에 옮겨 놓고 뱃속에 쑤셔 넣는 재미. 배우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팔을 얼마쯤 구부리면서 하품하는가를 보는 재미. 모조리 재미투성이다. 영미한테는 아마 삶이란 재미면 그만인 모양이다. 그러나 미군 지프 꽁무니에 올라앉아서 미국의 유치원 아이보다 못한 영어로 재롱을 부리는 게 사귐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것일까. 자동차 이름과 카메라 이야기와 미국에는 높은 집이 많다는 소리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람의 본보기며, 삶의 새로운 틀을 가져온 옮김꾼이란 일은 엉터리 같기만 하다. 영미의 오빠 태식은 음악을 배우는 학생이면서 카바레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다. 어쩌면 그렇게도 닮은 오뉘인지 물림일 거라고 명준은 늘 새삼스러워한다. 그 부모에 그 아이들.

 

다만 이들 오뉘에게 한 가지 좋은 데가 있다면, 부르주아의 집안 아이들이 흔히 갖는 덕-----너그러움이다. 그저 그렇게 지내려면 좋은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사무치는 이야기 같은 것은 아예 밥맛 없어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두 가지 얼굴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그들과 시시덕거릴 때의 얼굴과, 혼자서 자기로 돌아왔을 때의 얼굴과. 그렇다고 아주 붙임성 없이 구는 건 아니다. 모임의 고삐를 애써 잡아 보려고 하지 않는 것뿐이다. 늘 광짜리이기를 바라는 사람의 버릇으로, 영미는 그런 명준의 덤덤한 데를 되레 좋아한다. 영미가 가자는 데로 대개는 가준다. 그러면서 어디서나 서먹서먹 해진다. 실컷 맛본 끝에 오는 싫증이 아니다. 애당초부터 이게 아닐텐데, 이런 게 아니지 하는 겉돎이 앞선다. 삶이 시들해졌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지 때문에. 다만 탈인즉 자기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저도 모른다는 것이고, 자기 둘레의 삶이 제가 찾는 것이 아니라는 낌새만은 분명히 맡고 있다는 게 사실이다.

 

무언가 해야 할 텐데, 할 텐데 하면서, 게으르게 머리통 속에서만 뱅뱅 돌아간 것은 아니다. 삶을 잡스럽게 생각하고 간 사람들이 남겨 놓은 책을 모조리 찾아 읽는다.

 

숱한 나날을 한 가지 일만 깊숙이 파 내려간 사람들이, 그러면 어떤 노다지 줄기를 뚫어 놓았는지 길잡이를 삼자는 것이었는데, 삼고 보니 아주 야릇할 야자였다. 갸륵한 길잡이꾼들은 노다지 줄기나 새나, 그 허구한 나날 앉을 자리에서 뭉개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은, 그저 살기 위하여 있다, 이 말이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런 뜻없고 아리송한 말을 할 때는, 그 뒤에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할 진짜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으나, 그게 무언지는 알 수 없는 채 값진 때가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자꾸만, 아랑곳없이 흘러가는 것이 두렵다.

 

늘 묵직하게 되새겨지는 일 한 가지가 있긴 있다. 신이 내렸던 것이라 생각해 본다. 대학에 갓 들어간 해 여름, 교외로 몇몇이 어울려 소풍을 나간 적이 있다. 한여름 찌는 날씨. 구름 한점 보이지 않고 바람도 자고 누운. 뿔뿔이 흩어져서 여기저기 나무 그늘로 찾아들다가 어느 낮은 비탈에 올라섰을 때다. 아찔한 느낌에 불시에 온몸이 휩싸이면서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린다. 먼저 머리에 온 것은 그전에, 언젠가 바로 이 자리에 똑같은 때, 이런 몸짓대로, 지금 겪고 있는 느낌에 사로잡혀서, 멍하니 서 있던 적이 있다는 헛느낌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건 헛느낌인 것이 그 자리는 그때가 처음이다. 그러자 온 누리가 덜그럭 소리를 내면서 움직임을 멈춘다.

 

조용하다.

 

있는 것마다 있을 데 놓아져서, 더 움직이는 것은 쓸데없는 일 같다. 세상이 돌고 돌다가, 가장 바람직한 아귀에서 단단히 톱니가 물린, 그 참 같다. 여자 생각이 문득 난다. 아직 애인을 가지지 못한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참에는 여자와의 사랑이란 몹시도 귀찮아지고, 바라건대 어떤 여자가 자기에게 움직일 수 없는 사랑의 믿음을 준 다음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고 자기는 아무 짐도 없는 배부른 장단만을 가지고 싶다. 이런 생각들이 깜빡할 사이에 한꺼번에, 빛살처럼 번쩍였다. 하긴 이 신선놀음은 곧 깨어졌다. 그렇게 짧은 사이에 그토록 뒤얽힌 이야깃거리가 어쩌면 앞뒤를 밟지 않고 한꺼번에 일어날 수 있었던가, 오래도록 모를 일이었다. 이를테면, 그 여러 가지 생각들이, 깜빡할 사이라는 돌 떨어진 자리를 같이한 몇 겹의 물살처럼 두 겹 세 겹으로 같은 터전에 겹으로 떠오른 것이다. 만일 이런 깜빡 사이가 아주 끝까지 가면, 누리의 처음과 마지막, 디디고 선 발밑에서 누리의 끝까지가 한 장의 마음의 거울에 한꺼번에 어릴 수 있다고 그려 본다. 그런 그림은 몹시 즐거운 심심풀이였다. 학과 가운데서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들의 학설에 끌린다. 사실 그것들은 학설이랄 것도 없는 아이디어쯤 될 것이었지만, 그것을 그저 어리궂은 생각으로 돌리느냐, 더 깊이 참이야기의 짤막한 풀이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이쪽의 마음 깊이에 달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갈 데 없다.

 

느닷없고도 짤막하면서, 풀이되지 않은 것이 풀이된 것 같아 뵈는, 그 짤막한 글월들의 힘과 그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서 겪은 어질머리 사이에는 닮은 데가 있다.

 

깜빡할 사이에 오는 그런 복받은 짬은 하기는 어떤 마이너스의 마당 자리에서 일어나는 꿈일 것이리라. 비록 플러스의 자리래도 좋았다. 쉴새없이 움직이고, 쫓아가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비치는 단단함 속에 젖어 가면서 살 수 있는 삶. 명준이 찾는 삶이다. 아무 일에도 흥이 안난다. 마음을 쏟을 만한 일을 찾아낼 수가 없다. 가슴이 뿌듯하면서 머릿속이 환해질, 그런 일이 없을까? 도끼자루 안 썩는 신선 놀음 같은.

 

집에는 벌써 손님들이 들끓고 있다. 영미의 남녀 친구들이 방에서 들락날락하는 모양이, 넓은 뜰을 넘어 바라보인다. 조금 있으면, 늘 하는 대로, 영미가 그를 데리러 온다. 오늘, 고지식하게 영미와의 약속을 지키느라고, 정선생을 찾아가지 못한 게 뉘우쳐진다. 정선생은 전번에 거리에서 만났을 때, 보로 오라고 했다. 그 길로 따라가고 싶었으나, 그때엔 마침 그러지 못할 일이 있었고, 오늘까지 못 가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날 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몇천 년 옛날에 살았던 사람의 표본. 긴 말 접고 기막힌 일이다.

 

우스운 일이 있는지 왁자하니 떠드는 소리가 가을 저녁 선들바람을 타고 건너온다. 창을 닫는다. 넓은 뜰을 가운데 끼고 자로 세워진 일본집, 가파르게 기운 높은 지붕 중턱에 비죽이 내민, 창이 달린, 이층 4조 반짜리가 그의 방이다. 그는 이 방을 좋아했다. 창을 열면 밖이 모두 기와다. 갇히고 치우친 맛이 좋다. 이런 지음새가 원래 왜식은 아닐 테고, 그림에서 눈익은 서양식이겠지. 아무튼 밖에서 볼라치면 생김새가 재미있고 속에 들면 아늑한 맛이 있다. 뜰은 왜식 그대로다. 못이며, 돌로 된 꾸미개에서 인조 동산까지,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이 창으로 내다보면서 헛궁리질할 때가 가장 즐겁다.

 

늦은 봄 아지랑이 일렁이는 기왓장 겉에서 햇빛은 얼마나 뜻깊은 소용돌이를 쳤던가. 믿음직한 데생을 떠올리는 늙은 밤나무의 하늘로 뻗친 튼튼한 가지. 맑은 날씨 탓으로 쨍 소리 나게 뚜렷하게 그어진 금들이, 아늑한 그림의 기쁨을 주는 맞은편 언덕 살림집들. 오손도손 타이르는 듯하던 5월달 궂은 빗소리. 몰래 다가드는 삶의 목소리가 호젓이 느껴지는 첫여름밤. 삶을 이루고 있는 이런 따위 일들이 그에게 정말로 뜻있는 일이 된 것은 하기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것도 이 창가에서다. 나면서부터 보아 온 일이지만 사람이란 어느 때까지는, 세상 일의, 말하자면 가장 껍데기만을 허술히 보고 지내는 것이며, 자기와 둘레 사이에 아무 티격태격도 없는, 달걀 속 노른자위같이 사는 무렵이 그나마 좋은 때라 할까.

 

카네이션, 달리아, 글라디올러스, 칸나. 호사스런 한 패의 양반 아낙들. 지금 같아서는 놀람과 정을 느끼는 데는 이런 굉장한 패거리가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대수롭지 않음의 테두리에서 문득 걸어나오면서, 놀라운 섬뜩함으로 맞서 오는 것을 알고 잇다. 헛궁리에서 오는 어수선함은 그래도 뼈아픈 어떤 걸음을 내딛기까지는 다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달콤하고 새로 알게 된 곡절을 노리개 삼아 다루면서, 쉬운 일을 어렵게 짠, 말의 비단보자기를 씌워 보는 셈이다. 하지만 복도 많은 아가씨가 인형과 재롱 부리는 것보다는 조금이나마 덜 소꿉장난임을 몰라주면 자기가 너무 불쌍하다. 젊은 친구가 토끼꼬리만한 앎을 가졌대서 다된 사람일 수가 없다. 믿음 없는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려고, 힘껏 산다, 때의 한점 한점을 핏방울처럼 진하게 산다, 수없이 고꾸라져서 수없이 정강이를 벗기더라도 말숙한 정강이를 가지고 늙느니보다는 낫다,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어 보지만 어떻게 하면 힘껏 살 수 있는지 도무지 캄캄했고, 피처럼 진한 시간은 어디 숨어 있는지 꼬리도 찾을 수 없을 뿐, 정강이를 벗기자면 걸려서 널어갈 도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의 발부리에 걸리는 것이라곤 영미가 기르는 고양이밖에 없다.

 

보람 있는 일이라면 도깨비하고 흥정해도 좋다고 뽐내지만, 도깨비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모르고 하는 소리다. 교수의 강의를 짐짓 낮추어 본다. , 이 일을 풀지 않고는 모두 쓸데없다. 사치가 아니라 나한텐 사무치는 허전함이다. 이러면서 허전함과 맞서 본다. 어떤 책에서고 DialektikD자만 보아도 반한 여자의 이름 머리글자를 대하듯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은근히, 늙은 군인이 훈장 자랑하듯 보람을 느낀다. 삶의 강. 흐르는 물결에서 몸을 떼어 흐르는 강을 받치는 움직임 없는 강박닥에 서보려 한다. 때의 흐름 속에서, 마무리진 뜻을 읽어 내서, 허전함을 달래려 한다. 하지만 삶은 아랑곳없이 흐르고 있다. 미련스럽게 움켜 온 강바닥 모래들도, 돌아가는 굽이에서 벌써 알알이 흩어진다. 무언가 마지막 것을 얻기만 하면 다시 생각이란 이름의 화냥년을 잠자리에 들이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면서, 낯빛과 몸짓을 가꾸는 마음의 거울 속에서는 자꾸 연지가 빗나가고 곤지가 번진다. 끝없이 실수를 거듭하고 끝없는 뉘우침이 따른다.

 

실수가 없어지라는 것이 갸륵하나마 자기 됨됨이를 모르고 제멋에 겨운 데에 그치는 것이며, 더 혹독하게는 신에 대한 철없는 대듦이라면, 이리도 저리도 못 하는 고단한 마음은 또 한 번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누리와, 삶의 뜻을 더 깊이 읽을 힘이 없는 자기처럼, 남도 불쌍한 삶이거니 싶은 마음을 너그러움이라는 싸개로 그럭저럭 꾸려 가지고, 신이 바란다는 이웃사랑과 바꿔 쓰기로 한다는 언저리에서 주저앉곤 한다.

 

풍성한 고달픔이 구름처럼 쌓이는 이런 궁리질 끝에 고단한 풋잠을 즐길 때, 배개로 삼는 게 바로 지붕 중턱에 내민 이 창문의 쓸모였다.

 

발소리가 들려 온다. 치레뿐인 노크가 울리기 바쁘게 영미가 들어선다. 그녀의 모습은 명준을 약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휜 이브닝 드레스에, 어린 플라타너스 줄기처럼, 미끈하면서 보오얀 팔이 쪽 곧다.

 

"명준 오빠 내려가요, ?"

 

그녀는 말끝을 어리광 섞어 치킨다.

 

"가선 뭘 해."

 

"쑥이, 뭘 하긴? 춤추고 얘기하고 그러지. 오늘 이쁜 애들 많이 왔어요."

 

"글세 나야 뭐 가나마나……"

 

그녀는 여느 때처럼 명준의 팔을 끌어서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드레스 자락을 집어 올리면서 창가로 와서, 턱을 괸 채 한참 말이 없다.

 

"그럴 때는 무엇 같은데?"

 

그래도 아무 대꾸를 안 한다. 무슨 일이 있었나? 영미가 이렇게 나오면 난처하다. 그녀의 몫이 아닌 만큼, 어쩌다 그러면 구성지다고 명준은 생각한다.

 

"명준 오빠."

 

"."

 

"오빠는 이 담에 뭘 하실래요?"

 

"글세 말이야."

 

"아니 왜 저럴까."

 

"정말이야, 좀 좋은 일 있으면 가르쳐 줘, 하란 대로 할 테니깐."

 

"정말?"

 

"정말이래두."

 

"가만있자…… 뭐가 좋을 것 같아요?"

 

"누구더러 물어?"

 

그들은 소래 내어 웃는다. 그제야 그녀는 일어서면서 그의 손을 잡아끈다. 그는 말없이 따라 나선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녀는 자기 얼굴을 명준의 팔에 기댈 싸하고, 한 단씩 디딜 적마다 울림을 주며, 춤추듯 발을 옮긴다.

 

넓은 방에는 긴 의자를 벽에다 밀어붙이고, 푸른 전등빛 아래서 쌍쌍이 춤을 추고 있다. 블루스. 영미는, 앞으로 돌아오면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의 솜씨는 보잘것없었으나, 그녀가 워낙 잘 추는 탓인지, 꽤 부드럽데 돌아간다. 손바닥에 옮아오는 그녀의 따뜻한 몸기운이, 차츰 그를 달뜨게 한다. 애써서 틈을 만드느냐 않느냐가 다르지, 누구든 싫달 수는 없어. 명준은 부푸는 마음을 놓아 둔다. 영미 같은 처지에 있는 애로선 하기야 이런 식으로 때를 죽이는 길밖에 달리 길이 없기도 할 테지. 방 안에는 모두 열댓 명.

 

"딴 생각 말아요. 잘 추지도 못하면서."

 

"."

 

곡이 끝나자, 사람들은 서로 엇갈리면서, 영미도 그에게서 떨어져간다. 명준은 문가에 놓인 긴 의자에 가 앉으면서, 담배를 꺼낸다. 담배 맛이 씁쓸하기만 하다. 몸을 훨씬 눕히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 버릇을 가지라, 신에 가까워지리라. 어디선가 읽은 말이 생각난다. 신에 가까워진다? 가까워져서는 어쩌자는 겐구?

 

"명준 오빠, 여기 이쁜 아가씨 데리고 왔어요."

 

눈을 떠보니 영미가, 좀 마른 편이지만, 그 말대로 눈매가 시원한 여자와 팔을 끼고 서 있다. 친구의 말에 발가우리해진 품이 밉지 않다.

 

"미리 애기는 다 해놨으니깐."

 

그녀는 친구를 쑤셔 박듯 명준의 옆에다 앉혀 놓고, 저쪽으로 가버린다. 거북하게 굴지 말자는 생각이 얼른 들면서,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건다.

 

"영미하고 동창이신가요?"

 

", 고등학교가 동창이에요. 대학은 달라요."

 

"어느?"

 

"○○댑니다."

 

그는 무슨 과냐고 물으려다가 따지는 투가 된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문다. 그때 다시 음악이 일어난다.

 

"추십니까?"

 

그녀는 머리를 가우뚱하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곧 따라 일어선다. 영미보다 잘 춘다.

 

"댁은 어디십니까?"

 

"인천이에요."

 

"그럼 기숙사에? 아 이거 너무 실례 같은데"

 

"괜찮아요. 하숙하고 있어요."

 

"……"

 

"어느 동이냐고 묻지 않으세요?"

 

"하하하"

 

영미와 비슷하면서 어딘지 좀 다르다.

 

몇 시나 됐을까, 그 생각이 더 꼬리를 이을 사이 없이, 철철철 빗물 받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잠에서 깬 귀에 큰물처럼 부풀려져 밀려든다. 바그르 좌, 바그르, 세차게 퍼붓는 그 소리는 씩씩한 숨결에 넘친 소리다. 고개를 들어 머리맡에 있을 탁상시계를 더듬어 본다. 야광이 아닌 그 오래된 기계는 자리조차 가늠할 수 없다.

 

불을 켜면 되겠으나,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때를 굳이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어둠 속에 눈을 뜬 채 누워 있다. 한밤에 잠이 깨는 건 참 질색이야. 아주 안됐거든. 아주. 이를테면, 이를테면, 이음씨를 몇 번이나 되풀이한 끝에 무슨 생각을 하려던 것인지 그만 잊어버리고 만다. 아마 무슨 생각이 꼭 있었던 것은 아니다. 텅빈 머릿속을 메우기나 하려는 것처럼, 빗소리가 한결 모질게 들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는 귀를 거쳐 온몸으로 흘러간다. 돌돌돌 귓가에서 거품져 흘러들어, 머릿속으로, 목으로, 가슴으로, , 발끝까지 빠르게, 그러면서 가닥가닥까지 스며든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헉, 숨을 넘기면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머릿속이 휑하니 열리는 듯 허허해지면서, , 빗소리가 그친다. 오래 그런 몸 가눔으로 있은 줄 알지만, 실은 아주 짧은 사이다. 일어서서 불을 켤까말까 한동안 망설인다. 켜면 뭘해, 이런 밤엔 책도 읽을 수 없지. 아니 그렇다고 다시 잠들기는 다 틀렸어. 그러면 아무래도 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으나 그저 그래 보는 것뿐이다.

 

무슨 너절한 뜻없는 생각이라도 자꾸 빚어 내어, 머릿속에 있는 바퀴를 자주 돌리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허전한 마음에서. 끝내 켠다. 갑자기 밝아진 방은 오히려 어색하다.

 

4조 반짜리 다다미방은 혼자 쓰기에 좁지 않다.

 

윗목에 놓인 책장에 마주선다. 한 번 죽 훑어본다. 얼른 뽑아 보고 싶은 책이 없다. 4백 귄 남짓한 책들. 선집이나 총서, 사전류가 아니고 보면, 한 책씩 사서는 꼬박 마지막 장까지 읽고 꽂아 놓고 하여 채워진 책장은 한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월간 잡지가 한 권도 끼지 않았다는 게 자랑이다. 그때그때, 입맛이 당긴 책을 사서 보면, 자연 그 다음에 골라야 할 책이 알아지게 마련이다. 벽 한쪽을 절반쯤 차지하고 잇는 이 책장을 보고 있으면, 그 책들을 사던 앞뒷일이며, 그렇게 옮아간 그의 마음의 나그네길이, 임자인 그에게는 선히 떠오르는 것이고, 한권 한권은 그대로 고갯마루 말뚝이다.

 

책장을 대하면 흐뭇하고 든든한 것 같았다. 알몸뚱이를 감싸는 갑옷이나 혹은 살갗 같기도 하다. 한 권씩 늘어갈 적마다 몸 속에 깨끗한 세포가 한 방씩 늘어가는 듯한, 자기와 책 사이에 절친 살아 있는 어울림을 몸으로 느낀 무렵이 있다. 두툼한 책 마지막 장을 닫은 다음,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눈에는, 깊은 밤 괴괴한 풍경이, 무언가 느긋한 이김의 빛깔로 색칠이 되곤 했다.

 

언제부터가 그런 복받은 사이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후린 여자에게서 매정스레 떨어져 가는 오입쟁이의 작태를 떠올리면서 그는 쓸쓸하다. 지금 이렇게 마주 서도 얼른 손을 뻗쳐 빼내고 싶도록 힘센 끌심을 가진 책을 없다. 한때는 책장마다 빛무리가 쳐 보인 벅차던 책들이며 서도, 평생을 거친 계집질 끝에, 사랑한다고 다짐해 가며 살을 섞은 여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려 보면서, 막상 다시 한 번 안아 보고 싶은 상대가 하나도 없는 것을 알게 되는 오입쟁이의 끝장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그네길이라는 말을 사랑에 끌어 붙여 쓴 것은 누가 처음인지는 몰라도, 당자의 속셈은 어떻건 딴은 진흙처럼 걸쭉한 그럴듯함이 있을 성싶다. 영미의 오빠 태식만 해도 거짓말 섞어 날마다 애인을 바꾸는 모양이었다. 애인, 그런 사이를 애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음 쓰는 거며, 부잣집 외아들치고는 윗줄이랄 수 있는 태식에게 푹 정이 가지지 않는 데는 이런 일이 많이 힘을 미치는 모양이다. 그런 마음을 차분한, 마음의 슬라이드 위에 올려놓으면, 뜻밖에 시샘이라는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꼴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가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풀이가 끝난 것 같지는 않다. 여자를 꺼안고 뒹구는 건, 사람의 여러 가지 몸부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여자 말고 싸움을 택한다. 그래서 그는 알렉산더가 되고 칭기즈칸이 된다. 어떤 사람은 물질 사이에 걸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택한다. 그래서 그는 갈릴레이가 되고 뉴턴인 된다. 오입꾼답게 태식은 그걸 알고 있다. 어느 날, 거리에서 만난 태식과 나란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한쪽 겨드랑이에 색소폰이 든 케이스를 끼고 걸으면서, 카바레에서 일한다고 학교에서 말이 있다고 한다. 발길이 그리고 움직여서 그들은 중앙청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남산을 오르고 있다. 운동복에 머릿수건을 친 권투 선수가 두 팔을 엇바꿔 곧게 뻗쳤다 오므렸다 하면서, 링에서 하는 대로 빠르게 발을 스치듯 끌어가며 지나간다. 발 움직임에 숨결을 맞추는 씩씩 소리가 짐승의 숨소리처럼 거칠다. 열심히 팔다리를 놀리면서 멀어져 가는 그 모습은 어쩐지 대견스럽다. 명준은 아직도 그 모양을 멀거니 바라보는 태식에게 말한다.

 

"그 노릇도 수월치 않은 모양이야."

 

"고독해서 저러는 거야."

 

명준은 아찔하다. 권투 선수와 고독을 한 줄에 얽는 태식의 그 말이 그대로 안겨 온다.

 

() 같은 데서 비법을 주고받을 때, 스승이 뚱딴지 같은 물음을 불쑥 던지면, 뛰어난 제자가 마찬가지 헛소리 같은 사설로 받아넘겨서, 두 사람 사이에 홀아비 사정을 홀아비가 안 빙그레 웃음으로 마음이 마음을 알아, 깨알음의 주고 받음이 이루어지는, 옛 우리네 마음 놀이의 저 기합술 같은 수작의 생김새는 아마 이런 것이라 싶게, 태식의 한마디는 명준의 가슴에서 대뜸 울려 오던, 그런 일이 있다. 그후 그들은 툭하면, 고독해서 그러는 거야, 엉뚱한 데다 그 말을 쓰곤 했는데, 버스 꽁무니를 바싹 따라가는 자건거 선수이든, 로터리에서 교통 정리하는 순경의 경우든, 국산 기관포로 강냉이를 튀기는 아저씨의 경우든, 모조리 그럴싸한 데는 놀라고 만다.

 

한 번은 역시 둘이서 길가에 늘어앉은 사주쟁이들 옆을 지나다가 명준이,

 

"저 친구들은?"

 

"고독해서 그러는 거야."

 

"맞았어."

 

길가였는데도 그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태식은 책 읽기를 아주 싫어한다. 그대로의 그런 깨달음을 여자 치르기에서 짐작해 낸 게 틀림없다. 그녀들의 미끄러운 허리에서, 도톰한 젖은 입술에서, 할딱이는 젖가슴에서, ---- 여자들 몸에서 배운 길이 밤잠을 잃어 가면서 얻은 명준의 책 읽기와 마주치고 보면, 보기 좋게 그는 밑진 것일까? 한 책에서 채워졌다면 다음 책으로 옮기지 않아도 됐을 이치다. 한 여자에게서 채워진다면 다음 여자로 갈 일은 없을 테지. 그 점에도 다름이 없다. 그러나 책을 바꾼다는 일을 사람 갈아 치기와 같은 자리에 둘 수 있나.

 

신약 성서가 얼핏 눈에 띈다. 금칠을 한 등이 눈을 끈 것뿐이다. 그는 그것을 뽑아서 잡히는 대로 열어 본다.

 

가이샤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아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사도행전 101)

 

그 글줄은, 서먹서먹하고, 겉돈다. 거룩하다는 이 책을 아무렇게나 펼쳤을 때, 무엇인가 뜻깊은 대목이 나오지 못하고, 밑도끝도없이 불쑥 튀어나온 이달리아대의 백부장 고넬료는, 아무래도 우습다. 다시 한번 해보기로 한다. 이번에 뜻깊은 대목이 나오면 신을 믿으리라. 밤중에 깨어난 사람의 하릴없는 마음이, 아무렇게나 장난을 해본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고린도 후서 113)

 

어럽쇼, 이건 또 무슨 소린구? 바울 아저씨가 농담을 하시는군. 원 나이 지긋한 양반이 점잖지 못하게 제 자랑은. 그러면 신학박사들이 평생을 두고 풀이한 저 이름난 구절들은 이 책을 끝에서 끝까지 샅샅이 뒤진 다음, 제일 묵직한 걸루 골라 낸 것이 된다아? 안 되지, 안될 소리. 하느님의 말이면 어는 갈피, 어느 대목, 아니 어느 글자든 대번 이편을 때려눕힐 수 있어야지. 줄거리를 읽은 다음에야 그 무게를 가릴 수 있다면 사람의 말과 무엇이 다르담. 옳지, 이 책은 하느님에 씌워서 사람이 썼다는 책이라더라. 그렇다면 일은…… 어쨌든 좋아. 그는 책을 탁 덮어 제자리에 꽂았다.

 

그러나 또 할 일이 없다. 그러자 빗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도둑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가서, 유리문이 달린 복도에 내려선다. 촉수가 낮은 전등불 밑에, 발바리 종자 강아지 메리가 앉아 있다가 그를 보자, 앉은 채 꼬리를 친다.

 

이런 늦은 때 무렵에 상큼하니 낯을 쳐들고, 눈이 초롱초롱한 강아지 모습이 또 때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하긴 사람 같으면 이부자리가 있으니까, 자다 일어났다는 걸 알 수도 있겠지만, 강아지고 보면 그렇지도 못했고, 사람은 부스스한 옷매무시나 벙벙한 낯빛으로, 자다 깬 사람을 알 수 있는 법이지만, 잠옷이 없는 이 짐승은 그것도 아니고,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자다 깬 사람이 가지는 흐트러진 낌새는 찾을 수 없다. 짐승 곁에 쭈그리고 앉아서 머리를 두들겨 준다. 끙끙거리며 메리는 더 재게 꼬리를 치며 몸을 일으키려 든다. 허리를 눌러 개를 주저앉히고 개의 눈앞에 손바닥을 벌려 내민다. 메리는 얼른 한 발을 준다. 다른 손바닥을 내민다. 메리도 다른 발을 준다. 오른손, 왼발, 왼손, 오른발. 몇 번을 해도 메리는 끈기 좋게 바꿔 가며 발을 준다.

 

그는 멋쩍어진다. 바보. 메리의 머리를 한 번 툭 때리고 일어선다. 복도 유리문 밖으로 팔 하나 길이 만큼의, 희미한 불빛이 밝히는 너비는, 내리치는 빗발이 안개처럼 보얗다. 내려올 때처럼 살금살금 걸어서 방으로 돌아온다. 문득 신문 생각이 난다.

 

아카시아

 

우거진 언덕을

 

우리는 단둘이

 

늘 걸어가곤 했다.

 

활자로 탈바꿈된 그의 마음은, 머릿속에서 만났을 때보다, 도사린 품이 남스럽다. 아카시아 언덕을 우리는 단둘이 왜 늘 걸어가곤 했을까. 고독해서? 그는 흠칫 놀란다. 잠이 깨서 이제까지 어름어름 돌아간 일이 갑자기 우스워진다. 그러자, 저녁에 만난 영미의 친구 강윤애의, 턱 언저리가 몹시 고운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그 얼굴은 대어들 듯 웃고 있다. 나긋나긋하던 그녀의 허리 어림이 아직 손바닥에 있다. 영미를 거쳐 낯이 익은 애들은 더러 있어도, 그녀들 쪽에서 곧 쌀쌀해지곤 한다. 명준의 주변머리 없는 품이 그녀들에겐 건방져 보인 모양이었고, 영미는 그녀대로 명준을 함부로 내놓으면 안되기나 하는 것처럼 군다. 명준에게는 여자를 다룬다는 일이 끔찍이 거추장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대개 나이는 아래이게 마련이고, 두개골 속에 담겨진 알맹이래야 빤하다. 무슨 얘기를 한담. 사랑합니다. 영원히? 사랑이니 영원에 대하여 꽃집 진열장에 놓인 외국 종자 화분 보듯 가지고 싶다는 마음밖에는 마련이 없는 그녀들과 걸음이 맞을 수 있을까. 참말은 여자들에게 엉거주춤해지는 까닭은 성 때문이다. 성을 마다하는 건 아니었다. 지식을 다룬다면 어항 속 들여다보듯 빤한 그녀들의 속이, 성이라는 자리에서 보면 보석처럼 단단한 벽으로 바꿔지고 말아, 관찰이라는 빛은 그 벽에 부딪혀 구부러져서는 그만 간 데 없이 되고 만다.

 

여자도 남자하고 자고 싶어할까. 명준에겐 그게 제일 궁금하다. 문학은 이럴 때 믿을 것이 못 되었다. 남자 작가들이 그려 놓은 여주인공들의 욕정이란, 따지고 보면 남자의 마음을 여자 속에 비쳐 놓은 듯이 보였기 때문에, 남주인공이 나오고 여주인공이 나오지만, 남주인공이 여자의 속을 알지 못하는 바에는 그는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있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남자의 사랑은 대개 고지식한 법이다. 대중소설의 나쁜 놈을 제쳐놓는다면, 남자는 여자의 돈이나 자리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여자 당자에 반한다. 여자들은 다르다. 부자의 첩살이를 하는 여자를 흔히 무슨 참지 못할 일을 어쩔 수 없는 곡절로 참아 가는 심청이처럼 불쌍히 여기는 축이 있지만, 실상 본인들은 그렇지도 않은 것이 안속인지 모른다. 그녀들의 사랑에는 뜻밖에 티가 많은 듯하다. 여자란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짐승 같다. 남들이 사랑하니까 사랑한다는 식의 허영을 그녀들의 지나가는 조잘거림에서 깨닫는 수가 적지 않다. 그녀들에겐 사랑도 치장일까. 명준의 이런 여성관은 오랫동안 그녀들의 낯빛과 말이며 움직임, 다음에 소설의 여주인공들을 뜯어본 다음에 얻어진, 찢어지게 가난한 열매다.

 

만나 본 여자들이 누구나 한 번씩 즐겨 쳐드는 얘기 가운데, 수녀가 되고 싶다는 축이 꽤 많다. 그럴 때 그는 그녀들의 참하게 빗은 머리며, 아른아른 윤나는 손톱을 바라보면서, 씨가 다른 짐승을 맞는 느낌이다. 뭐 이런 짐승이 다 있어. 그런 까닭 없는 마땅찮음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으나, 그 느낌을 뒷받침할 힘은 여전히 없다.

 

남자의 몸은 잘 안다. 자기 몸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타는 불길이 얼마쯤 뜨거운지도 잘 알고 있다. 금방 살갗 밑에서 타는 불이니까. 그러나 그녀들의 몸과 불은 알 수 없다. 자연과학이란 건 꼬투리가 자기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법칙으로 고쳐 놓기가 어려운 모양이어서, 생리학 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이성의 욕정을 안다는 건 죽어 보지 않고 죽음을 알아보자는 일이나 매한가지였고,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면 그의 손은 그녀들에게 대해서 엉거주춤하니 두 호주머니에 찔린 채 빠질 줄 모르는, 창피한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내를 두고 말한다면 그의 욕망은 분명했으나, 여자라는 그 고운 집에는 어떤 모양의 방이 있는지 아무래도 알 수 없다. 내일 여섯시, 강윤애와 만나기로 되어 있다. 오후에 정선생을 찾아본 다음 그녀를 만나자. 그녀의 얼굴이 또 한 번 대어들 듯 웃는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눕는다. 어느새 비는 멎어 있다.

 

이튿날 남산길을 걸어서 정선생 댁을 찾아간다. 사람의 일생 가운데 어떤 때 어떤 사람의 영향을 몹시 받는 수가 있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봐서는 그럴 만한 것 같지도 않은 사람한테서 그러는 수가 많다. 정선생은 고고학자이며, 여행가다.

 

그는 마흔 살 넘기고도 결혼하지 않고, 할멈을 데리고 이 널찍한 한식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역사의 뒷골목 이야기를 다루는 대가이며, 그의 책 동양사 아라비안 나이트두 권은 지금도 꾸준히 잘 나가는 책들이다. 선생은 코 언저리가 약간 얽었으나 중키에 알맞게 살이 있고, 무엇보다 선생은 링컨에게 위함을 받을 사람이다. 마흔 살 넘어서는 사람 얼굴은 제 탓이라고 링컨이 말한 그런 뜻에서다. 좋은 얼굴이다.

 

선생은 집에 있었다. 남향한 서재에서 테이블 위를 뒤적이고 있다가, 명준이 들어서자 회전의자를 한바퀴 핑그르르 돌리더니 활짝 웃는다.

 

"어서 오게."

 

"전번에 보여 주신다고 하신 걸 보러 왔습니다."

 

"서두르지 말게. 내 집은 시간이 실각한 곳일세."

 

"무정부 상태에서 늘 용하게 사십니다."

 

"무정부가 아니지, 정부가 너무 많은 거지. 지구상에 일었다가 쓰러진 왕조들이, 모조리 여기서 연립정부를 만들고 있지."

 

"제가 늘 궁금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야 할 일인가?"

 

"아니지요, 알아맞혀 보시지요."

 

"기권하겠네."

 

"다른 게 아니고, 선생님이 왜 결혼을 하지 않으셨나 하는, 그 까닭 입니다."

 

"그것 말인가? 쉽지. 한 번 알아맞혀 보게."

 

"기권하겠습니다."

 

"하하하, 복수로군. 그럼 말하지. 여자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렇게 나오실 줄은 생각했습니다만, 암만해도 이상한 얘기 아닙니까?"

 

"이상한 얘기지."

 

"선생님 가슴에 있는, 그 영원한 여인상을, 좀 보여 주지 않으시렵니까?"

 

"이군, 나를 슬프게 하지 말게, 나는 아직 그렇게는 늙지 않았단 말일세."

 

정선생은 소파로 와서 명준의 곁에 앉았다.

 

"이군, 친구들이 소탈한 체하고 털어놓는 연애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게. 정말 소중한 얘기는 그렇게 아무한테나 쏟아 놓지 않는 법이야. 설사 하더라도 에누리를 두는 법이지. 자네와 나하구의 우정하군 다른 얘기야. 그런 고백을 한다는 건, 저쪽에 대한 모욕이지. 상대가 그보다 못한 애정생활의 내력밖에 못 가졌다면, 그는 은근히 자기 생애가 초라한 생각이 들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에는 지루할 것이 아닌가. 어느 쪽이든 똑똑한 일이 아니야."

 

명준은 정선생의 그 말이 한군데만 내세우고 한편으로 다른 데를 감춰 버린 데서 오는 속임수란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이 지니는 참도 알고 있다. 그걸 바로잡으려고 들면, 선생이 가진 멋도 함께 죽여 버리는 것이 된다. 그것은 멋이 아니다. 할멈이 커피를 가지고 들어온다. 선생보다 대여섯 살 위로 보이는 할멈은, 언제나 거의 말이 없다. 선생을 보살피는 그녀의 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옛날 종이 대감 대하듯 한다. 그는 몬테그리스토 백작과 그의 그리스 노예 에테를 떠올린다.

 

"미라는?"

 

"이리 오게"

 

정선생은 옆방으로 들어간다. 그 방은 선생의 침실이다. 침대가 놓인 쪽과 맞은편의 벽을 온통 가린 휘장을 걷자, 그 뒤에 또 한 대의 침대가 놓이고, 명준은 그 위에 누운 사람을 본다. 미라였다. 칠한 물질의 겉이 가는 실처럼 금이 갈라져 있고, 통틀어 모습이 몸의 어디건 지나치게 모가 진 느낌이다. 여자의 미라인 것은 팔목과 가슴, 허리의 모양으로 짐작이 가지만 부드러워야 할 턱, 어깨, 허리 언저리도 일부러 그렇게 다듬은 듯 반듯반듯 모가 졌다. 말하자면 진짜에 한 꺼풀 입힌 조각일 텐데, 사진에서 보는 그리스 조각과는 사뭇 다르다. 그리스 조각의 선은 따뜻이 굽이쳐 흐르는 곡선인데, 이쪽은 엷은 판대기를 수없이 쌓아서 높낮이를 만든 것 같은 솜씨다.

 

집 짓는 슬레이트를 가지고 사람 모습을 만들면 이렇게 되리라 싶다. "양인들이 이집트에 가서 무덤을 파해쳐 훔쳐 오던 시절에, 몰래 밖으로 내온 것일 거야. 어느 영국 부자가 가지고 있다가 일본 귀족에게로 넘어갔던 게, 이번에 나한테 온 거야. 아마추어가 봐선 잘 모를 테지만, 이건 여자고, 높은 신분이었던 걸 알 수 있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그 무렵 이 땅덩어리 위에서 제일 깬 고장을 다스리던 태양의 나라에 산, 양반 아낙이 내 방에 지금 누워 있는 거야. 시골에 있는 과수원 두 곳을 팔아서 사들였어. 원래 같으면 마땅히 이집트에 돌려줘야 할 일이지만, 이런 예는 한두 가지가 아니야. 서양 부자들 수집품 속에는 국보급에 드는 약한 나라들의 고대 유물이 상당히 있는 실정이지만 장사꾼들이나, 당사국간에 버젓한 비밀이 되고 있는 그런 물건들은 더 따지지 않기로 한, 이를테면 기정 사실이 돼 있지. 장차, 일본 사람들이 훔쳐 간 우리 유물을 찾는 게 큰일이야. 아무튼 잘 봐두게, 막 내놓는 것이 아니니깐 말일세."

 

햇빛에 바랜 낙타 똥냄새가, 어렴풋이 풍기는 장엄한 시간이, 몸속으로 소리쳐 흘러오는 듯한 떨림이 있다. 아랫배에서 치골에 이르는 언저리도 마찬가지 기하학적 우격다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두부모 자르듯 한 다룸새가 보는 이로부터 구체적 상상을 가로막는 구실을 하고 있는, 굳어서 말라 버린 이, 사람의 몸은, 병원의 유리관 속 알코올에 담긴 몸뚱어리가 풍기는 생생한 역겨움에서는 동떨어진 속으로 그를 이끌어 간다. 정선생은 조용히 휘장을 내린다. 그 옛날 이 아낙이 대리석 잠자리에서 낮잠을 즐길 때, 그녀가 거느린 종이 그러했을 것처럼 조심조심. 명준은 꿈에서 깬 듯 제정신이 들었다. 휘장 하나 너머에 방금 본 야릇한 물건이 누워 있다는 게 거짓말 같다. 그들은 응접실로 돌아오면서 서로 말이 없다.

 

"전 정말, 가끔가다 선생님 곁에서 이런 굿을 치르지 않으면 제 생활이란 훨씬 보잘것없는 걸 겁니다."

 

"지나친 말이네. 내가 자네보다 나은 건, 내가 더 부자라는 것뿐이야."

 

"사는 것처럼 사는 법이 좀 없을까요?"

 

"자넨 아직 패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나?"

 

"패라니요?"

 

", 미스를 할 적마다 패 하나씩 빼앗기는 놀이 잇잖아. 자넨 아직 한 판도 안 했단 말일세. 아니 내가 잘못 알았나?"

 

"아닙니다. 아직 한 번도 미스가 없지요."

 

"그러니 되지 않았나. 큰소린 치지만 내 손엔 남은 패가 사실은 한 장도 없어. 어쩌면 도대체 나한텐 패가 꼭 한 장뿐이었는지도 모르지."

 

"실수를 해보면 압니까?"

 

"그건 장담 못 하지. 다만 자넨 바보가 아니니깐, 될 거야."

 

"그러나 전 게임을 하면, 실수 없이 할 작정인데요."

 

"미신 중에 으뜸가는 미신이야.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저한테 주어진 패를 잔뜩 움켜쥐고 무덤에 들어서는 게 자랑은 아닐세. 저승에서 그 패를 주고 천국행 침대표하고 바꿔칠 수 있다면 또 모르지만. 허나 그건 놀부 같은 놈 아니야? 애정에 그렇게 인색한 게 덕인가? 가만있자, 내 경우를 가지고 반박하지는 말게. 내겐 워낙 패가 한 장밖엔 없었다고 하지 않나."

 

"알아요. 그러나 저는 반드시 연애여야만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아무것이든 좋아요. 갈빗대가 버그러지도록 뿌듯한 보람을 품고 살고 싶다는 거예요.."

 

"정치는 어때?"

 

"정치? 오늘날 한국의 정치란 미군 부대 식당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받아서, 그 중에서 깡통을 골라 내어 양철을 만들구, 목재를 가려 내서 소위 문화주택 마루를 깔구, 나머지 찌꺼기를 가지고 목축을 하자는 거나 뭐가 달라요? 그런 걸 가지고 산뜻한 지붕, 슈투라우스의 왈츠에 맞추어 구두 끝을 비비는 마루며, 덴마크가 무색한 목장을 가지자는 말인가요? 저 브로커의 무리들, 정치 시장에서 밀수입과 암거래에 갱들과 결탁한 어두운 보스들.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과 이어져 있어요. 정치는 인간의 광장 가운데서두 제일 거친 곳이 아닌가요? 외국 같은 덴 기독교가 뭐니 뭐니 해도 정치의 밑바닥을 흐르는 맑은 물 같은 몫을 하잖아요? 정치의 오물과 찌꺼기가 아무리 쏟아져도 다 삼키고 다 실어 가버리거든요. 도시로 치면 서양의 정치 사회는 하수도 시설이 잘 돼 있단 말이예요. 사람이 똥오줌을 만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정치에도 똥과 오줌은 할 수 없지요. 거기까지는 좋아요, 허지만 하수도와 청소차를 마련해야 하지 않아요?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구,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 집 변소에 차려 놓구, 페이브먼트를 파 날라다가는 저희 집 부엌 바닥을 깔구.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착한 길 가던 사람이 그걸 말릴라치면 멀리서 망을 보던 갱이 광장에서 빠지는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오면서 한칼에 그를 해치우는 거예요. 그러면 그는 도둑놈한테서 몫을 타는 것이지요. 그는 그 몫으로 정조를 사고, 돈이 떨어지면 또다시 칼을 품고 광장으로 나옵니다.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으니깐요. 그렇게 해서 빼앗기고 피 흘린 스산한 광장에 검은 해가 떴다가는 핏빛으로 물들어 빌딩 너머로 떨어져 갑니다. 추악한 밤의 광장. 탐욕과 배신과 살인의 광장. 이게 한국 정치의 광장이 아닙니까? 선량한 시민은 오히려 문에 자물쇠를 잠그고 창을 닫고 있어요.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서 시장으로 가는 때만 할 수 없이 그는 자기 방문을 엽니다. 한 줌 쌀과 한 포기 시래기를 사기 위해서. 시장, 그건 경제의 광장입니다. 경제의 광장에는 도둑 물건이 넘치고 있습니다. 모조리 도둑질한 물건. 안 놓겠다고 앙탈하는 말라빠진 손목을 도끼로 쳐 떼어 버리고, 빼앗아 온 감자 한 자루가 거기 있습니다. 피 묻은 배추가 거기 있습니다. 정액으로 더럽혀지고 찢긴, 강간당한 여자의 몸뚱이에서 벗겨 온 드레스가 거기 걸려 있습니다. 한푼 두푼 모아서 가계가 늘어 가는 그런 얘기는 벌써 통하지 않아요. 바늘 끝만한 양심을 지키면서 탐욕과 조절을 꾀하자는 자본주의의 교활한 윤리조차도 없습니다. 파는 사람이 사는 사람을 을러 댑니다. 한국 경제의 광장에는 사기의 안개 속에 협박의 꽃불이 터지고 허영의 애드벌룬이 떠돕니다. 문화의 광장 말입니꺼? 헛소리의 꽃이 만발합니다.

 

또 그곳에서는 아편꽃 기르기가 한창입니다. 개처럼 욕정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 주는 개인 지도와 좀 대중적인 강습소와 이 두 가지 층이 있습니다. 정치의 광장에서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사람들이 뒷골목에 차려진 작은 지붕 달린 광장들, 바와 카바레에서는 공범자처럼 술을 권합니다. 부정하게 얻은 돈이 마구 뿌려지고, 문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비굴한 예술가의 낯짝에 지폐 뭉치가 뿌려집니다. 발레리나들은 스커트를 한 번씩 들어 줄 때마다 지폐 한 장씩 다투어 가며 주워 모아서는 핸드백에 소중히 간직합니다. 그 핸드백의 무게가 그녀들의 명성의 바로미터이지요. 할 수 없어요. 그녀들의 연습장은 당수협회에서 뺏어 버렸으니깐. 저 빛무리 눈부신 화랑들의 무술 말이에요.

 

시인들은 알아볼 수 있는 막끝까지 말을 두들겨 패서 사디즘 충동을 카타르시스합니다. 그들은 가난 하니까 진짜 대상, 여자를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평가들은, 아니 자네가 정말 카프카와 똑같은 겪음을 했단 말이야? 거짓말 말아, 저놈은 가짭니다. 이런 식으로 국산 카프카를 엉망진창이 되게끔 두들겨 팹니다. 비평가란, 자기만은 박래품이라는 망상에 걸린 불쌍한 미치광이의 별명이지요. 이런 광장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느낌이란 불신뿐입니다. 그들이 가장 아끼는 건 자기의 방, 밀실뿐입니다.

 

그는 밀실에만은 한 떨기 백합을 마련하기를 원합니다. 그의 마지막 숨을 구멍이기 때문이지요. 저희들에겐 좋은 아버지였어요. 국고금을 덜컥한 정치인을 아버지로 가진 인텔리 따님의 말이 풍기는 수수께끼는 여기 있는 겁니다. , 좋은 아버지. 인민의 나쁜 심부름꾼.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습니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 각기의 밀실은 신분에 맞춰서 그런 대로 푸짐합니다. 개미처럼 물어다 가꾸니깐요.

 

좋은 아버지, 불란서로 유학 보내 준 좋은 아버지. 깨끗한 교사를 목자르는 나쁜 장확관. 그게 같은 인물이라는 이런 역설. 아무도 광장에서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

 

정선생은 가만히 듣고 있다. 맞장구도 치지 않고, 대꾸도 없다. 두사람 다 그쪽이 편했다.

 

정선생은 은갑에서 담배를 꺼내 자기가 한 대 물고, 명준에게도 권한다. 라이터를 내미는 선생의 손이 떨리는 듯했다.

 

전 선생이 그때 선생에서 친구로 내러오는 것을 명준은 어렴풋이 깨닫는다. 자랑스러우면서 서운하다. 우상을 부순 다음에 오는 허전함.

 

"그 텅 빈 광장으로 시민을 모으는 나팔수는 될 수 없을까?"

 

"자신이 없어요, 폭군들이 너무 강하니깐."

 

"자네도 밀실 가꾸기에만 힘쓰겠다는……."

 

"그 속에서 충분히 준비가 끝나면."

 

"나와서."

 

"치고 받겠다는 거죠."

 

"그 얘기가 부도가 되면?"

 

"부도나는 편이 진실이겠죠."

 

또 말이 끊어진다. 말할수록 정선생의 자리는 내려가고, 그는 자꾸 건방져지는 게 선하다.

 

"베토벤이 어때?"

 

명준은 크게 끄덕인다. 정선생은 전축을 걸어 놓는다. 부수는 듯한 비바람 대신에, 나긋나긋하고 환한 가락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로맨스'. 몰리고 있던 분풀이를 마음껏 했다는 듯 일부러 딴 데를 보면서, 정선생은 장난꾸러기처럼 허리를 한 번 젖혀 보인다. 명준은 빙긋 웃는다.

 

번들거리는 빠름이 먼지를 날리며 튄다.

 

색안경 너머 바닷속같이 가라앉아 보이는 들과 뫼들이, 획 달려오는가 하면 금시 뒤로 빠진다.

 

경인 한길을 명준은 모터사이클에 몸을 싣고 달리고 있다.

 

빠르게 달리는 틀에 앉아 있는 몸에는, 한창 찌는 듯한, 칠월달 한낮 지난 공기도 선풍기 쐬는 속이다. 지난해 겨울, 영미와 같이 와보고 지금 두 번째, 윤애네를 찾아가는 길이다.

 

집에서는 내일쯤 어쩐 일인가 찾기 시작할 테지만 그 전에 전화를 하지.

 

'말도 않고 제 차를 타고 왔다고 태식이 화낼까. 아니 괜찮을거야. 그 일 너무 생각지 말어. 그보다 윤앨 어떡할래? 영미 말을 들으면 진짜로 익어 가는 모양이던데. 나 같으면 사랑해 주겠어. 고거 쓸 만하잖아? 하던 태식의 말이 생각난다.

 

남의 차를 집어타고 윤애한테로 달려온걸 샌님이 제법이라고 어깨를 추스를 거다. 제법이 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 그 일. 불시에 그녀가 보고 싶어지면서 문간에 놓인 모터사이클을 끌어내 힘껏 밟아 대고 있지만, 반드시 그녀가 보고 싶다는 것만은 아니다. 그저 미칠 듯이 달려 보았으면 베개로 목 죄듯한 이 눌림에서 좀 벗어나질까 해서다.

 

영미 아버지한테서 그 얘기를 듣고, 경찰에 두 번 다녀온 지금 그의 삶의 가락은 아주 무너지고 말았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그는 꼬리가 붙은 범죄자였다. 뒤따르는 검은 그림자. 그런 삶이 자기 일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가 그에게 앙갚음한 모양이다. 목숨이 지루하다 푸념하던 자에게 심술궂은 그 누군가가 네 이놈 맛 좀 보라고. 아니 그런 꿈 속의 무서움이 아니다. 등허리가 쭈뼛한 꿈 밖의 무서움이다. 정치의 광장에서 온 칼잡이가 그의 침실 앞을 서성거리게 된 것이다. 모터사이클이 좌우로 크게 흔들린다.

 

인천 거리를 북으로 빠진 변두리,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윤애네 문 앞에서 모터사이클을 세운 그는 두 발로 땅을 디디고 틀을 가누면서, 멀리 구름이 인 바다를 바라본다. 내가 여기 온 정말 심사는. 그는 기척을 느끼고 후딱 얼굴을 든다.

 

모시 치마저고리에 고무신을 끈 윤애가 서 있다. 윤애의 눈을 보자 그는 부지중 고개를 돌린다. 놀란 모양이다. 그녀는 얼른,

 

"어머나, 이렇게 갑자기…… 더운데 이러구 계실 게 아니구, 이리루 집어넣으세요."

 

그녀는 앞장을 서서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딴 집처럼 세워진 뒤채가 그녀 방이다.

 

마루에 놓인 등의자에 마주 않아서도, 명준은 얼음에 담근 수박에 부지런히 손을 내밀 뿐 말을 꺼내지 못한다. 윤애는 무심히 부채질을 해주고 있다. 늘 그렇게 해온 사이처럼. 명준은 덫에 걸린 느낌이 든다. 그러자 갑자기 거짓말처럼 홍이 돌아온다.

 

"놀라셨습니까?"

 

"사실은 그래요. 문간에 오토바이 멎는 소리가 나기에 내다봤더니……"

 

그녀는 놀랐다는 걸 말을 가지고는 잘 나타내지 못하겠다는 듯 부채를 한바퀴 핑그르르 돌리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한다. 명준은 수박 씨를 손바닥에 뱉으면서 웃어 보인다.

 

"정말 저희 집으로 오신 거예요?"

 

명준은 접시에 손을 털어 내면서 낯빛을 고친다.

 

"아닙니다."

 

그녀의 입술이 하애진다.

 

"윤애 씨 집으로 온 게 아니구, 윤애 씨한테 온 겁니다."

 

그녀의 얼굴이 이번에는 빨개진다. 명준은 자기가 지금 허드렛말을 함부로 쏟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체 못할 우울한 심사를 없애 보느라고 마구 들뜬 말을 쏟아 놓은 거라고. 내친 걸음에서 한껏 밑천을 뽑자는 심보 같기만 하다. 북받치는 안으로부터의 느낌이 없이 그런 말이 수월히 나간다는 일을 달리 풀이할 길이 있을까? 아니면 어느새 입발림이 버릇이 된 것일까. 윤애는 부치던 손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부챗살을 더듬고 앉아 있다. 명준은 여기가 윤애의 집이라는 걸 생각한다. 손님이니 그녀의 편에서 얘기를 서둘러 주는 게 옳다고 믿어 본다. 좀 허황한 꼴이 된 급작스런 걸음에 어울릴 만큼 그들 사이가 익지 못한 데서 오는 거북한 응어리가 가로놓여 있다. 지난 가을 이후, 서로 눈치를 보고 그럴듯한 발뺌을 늘 마련하면서, 어느 쪽도 알몸을 먼저 드러내기를 꺼려한 그들의 사귐은, 이 여름까지 한 해 가까운 세월에도 이렇다 할 자국이 없다. 한 해라지만 만난 횟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헤어질 때 어느 편에서도 다음 마련을 먼저 내놓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다가 한 달도 지나고, 두 달도 지나다 어찌어찌 만나지고 하면, 그들은 어줍은 위신을 다치지 않고 또 한 번 만날 수 있은 것만을 은근히 기뻐한다.

 

그럴 즈음 그 일이 일어난다.

 

새잎이 짙어 가는 5월 어느 날 저녁. 명준은 사랑방으로 영미 아버지한테 불려간다.

 

은행 지점장인 영미 아버지는 집안 사람 누구한테나 그렇지만, 더구나 명준에게는 한 주일에 한두 번 볼까말까,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밤늦어서 대문간에서 클랙슨 소리가 나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따르고, 안채에서 들릴락말락 기척이 있고, 그뿐, 이튿날 아침에 식당으로 내려갔을 땐 나간 다음이다. 은행가라는 일이 그토록 밤늦게 어디서 보내다가, 아침이면 꼭 제때에 나가는 걸 보면,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미상불 신기롭기까지 하다. 영미 아버지가 하는 얘기는 전혀 뜻밖의 이야기다.

 

"오늘 은행으로 형사가 찾아왔더군. 늘 있는 일이라 별로 특별한 생각 없이 만나 봤더니, 은행 일로 온 게 아니구, 자네 일을 좀 물을 것이 있다잖는가. 그 사람 말이, 자네 부친이 요사이 평양 방송의 대남 방송 시간에 나온다는 거야. 알아보니 자네 주소가 드러나서, 바로 본인을 불러서 알아보려고 했지만, 집에 있는 사람이고 하니 한마디 알리러 왔다면서, 자네 부친과의 관계며, 자네 품행 따위를 몇 마디 묻다가 돌아갔어. 근일중, 혹시 불려 가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리 알게. 뭐 별일이야 있겠나만 그렇더라도 자넬 생각한다면 이름쯤은 바꾸고 지냄직도 한 일이건만……"

 

나무라듯 말끝을 흐린다.

 

명준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고 앉은 것만 같다. 일부러 그랬건 저절로 그리 됐건 여태껏 그의 삶에서 떨어져 있던 일이 그처럼 불쑥 튀어나올 때, 얼른 지을 낯빛조차도 마련이 없다. 8·15 그해 북으로 간 아버지는 먼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북으로 간 지 얼마 안 돼서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친구였던 영미 아버지 밑에서 지내 온 몇 해 사이에, 어머니 생각은 가끔 나도, 아버지는 살아서 지척에 있었건만 정히 보고 싶지도, 생각나지도 않았다.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였는데 살붙이가 그리운 생각이 난 적도 없다. 그의 외로움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일이 전혀 없다. 아마 까닭은 그의 나이였으리라.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쉬운 나이가 아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쉽지 않아지는 나이다. 부모가 없는 탓으로 먹고 살기가 무언지 일찍 눈이 떠지는 일도 없이 영미 부친 살림 안에서 필요한 지급을 받고 있었고, 그런 일을 송구스럽게 여기도록 영미 형제는 옹졸한 애들도 아니다. 아마 아버지 돈이지 저희 돈이 아닌 때문이었을 것이다. 돈이 없으니 명준은 돈을 모른다. 그만한 돈쯤 주는 것을 신세라고까지 여기고 있지도 않다.

 

굳이 아버지가 도와 주기도 했다는 친구니까, 기댈 데 없이 된 친구의 아들을 학교 보내 주는 것쯤 그럴 만하다는 안팎을 따진 끝에, 그 위에 도사리고 앉은 품이라느니 보다, 돈이라는 돋보기를 가지고 제 삶을 뜯어보질 않았다는 말이다. 돈의 길이 삶의 길인데,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거니 돈을 잊고 살아온다. 제 삶을 꾸려 주는 돈 말이다. 밥을 먹고, 잠자리를 받고, 학비를 타고, 책을 사고 하는 데 쓰이는 돈이라는 물건을 한 번도 '자기'라는 것의 살갗 안에 있는 것으로 느껴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젊고 가난한 철부지 책벌레다.

 

자기라는 낱말 속에는 밥이며, 신발, 양말, , 이불, 잠자리, 납부금, 담배, 우산…… 그런 물건이 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물건에서 그것들 모두를 빼버리고 남는 게 자기였다. 모든 것을 드러낸 다음까지, 덩그렇게 남는 의심할 수 없는 마지막 것, 관념 철학자의 달걀. 이명준에게 뜻있고 실속 있는 자기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가 그의 ''의 내용일 수 없었다. 어머니가 그의 한식구일 수는 없었다. 나의 방에는 명준 혼자만 있다. 나는 광장이 아니다. 그건 방이었다. 수인의 독방처럼, 복수가 들어가지 못하는 단 한 사람을 위한 방. 어머니가 살아 있대도 그녀와 한방에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며, 그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광장은 지금 와서는 사라졌다. 어머니는 죽었으므로.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더불어 쓰는 광장이 아직은 없기 때문에.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광장으로 가는 길은 막혀 있다. 아버지가 모습을 나타내는 광장은 다른 동네에 자리잡은 광장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기관총이 걸려 있다. 애당초 그리로 갈 염을 내지 말아야 했고, 가고 싶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광장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는 어떻게 맞이했으면 좋을지 어리둥절한 어떤 풍문과 같다.

 

이틀 후. 명준은 S서 사찰계 취조실에서 형사와 마주앉아 있다. 형사는 두 팔꿉을 책상에 걸치고 그를 쏘아본다.

 

"어느 학교에 다녀?"

 

"○○댑니다."

 

"뭘 전공하나?"

 

"철학입니다."

 

"철학?"

 

형사는 입을 비죽거린다. 명준은 얼굴이 확 단다. 그의 말이 비위를 건드렸지만, 고개를 돌린다. 형사의 등 뒤 쪽에 열린 커다란 창문 밖에서 물이 흐르듯 싱싱한 포풀러나무의 환한 새잎에 눈길을 옮긴다. 5. 좋은 철이다. 좋은 철에 자기는 뭣 하러 이 음침한 방에 앉아서, 보통 같으면 담뱃불 댕기는 것도 싫을 버릇없는 사나이한테서 이죽거림을 받는 것일까. 아버지 덕에? 아버지. 고맙습니다. 같이 있을 때도 늘 집에 보이지 않고, 몇 달씩 집을 비웠다간 불쑥 나타나곤 했던 아버지다. 신경. 하얼빈. 연길. 소년 시절을 보낸 중국의 도시들. 해방이 되자 뭣 하러 부랴부랴 서울로 나왔을까? 안 그랬던들 어머니도 돌아가시지 않았을지 몰라.

 

"그래 철학과면 마르크스 철학도 잘 알갔군?"

 

"?"

 

생각에서 깨어나면서 얼결에 그렇게 되묻자 형사는 주먹으로 책상을 탕 치면서,

 

"이 썅놈의 새끼, 귓구멍에 말뚝을 박안? 마르크스 철학도 잘 알겠구나 이런 말야!"

 

투가 확 달라지는 것이었다. 명준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왜 대답이 없어!"

 

그래도 가만있는다.

 

"왜 대답이 없냐 말야. , 이 새끼가 누구 농담하는 줄 아나?"

 

그제야 입을 연다.

 

"잘 모릅니다."

 

"잘 몰라? 네 애비녀석이 지랄을 부리는 마르크스 철학을 너는 잘 모른다?"

 

"철학과라도 전공이 있습니다. 철학 공불 한 대서 마르크스 철학을 공부하는 건 아닙니다."

 

"안단 말야. 그렇더라도 너는 네 애비가 그렇게 열렬한 빨갱이니깐 어렸을 때부터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게 아냐?"

 

"부친은 집에선 그런 말 한 적이 없습니다."

 

마음의 길이 삶의 길이지만 그들 부자는 그럴 틈도 없이 보낸 지난 날이다.

 

"좋아. 소식 자주 듣나?"

 

"?"

 

", 이 새끼, 가는귀가 먹언. 말귀를 못 알아 들어?"

 

명준은 또 입을 다물었다. 지글지글 끓는 물건이 울컥울컥 메스껍게 가슴에 치받쳤다.

 

"무슨 소식 말입니까?"

 

"네 애비 소식 말이야."

 

"어떻게 들을 수 있겠어요."

 

"아따, 새끼, 능청맞긴. 내래 알간 네래 알디."

 

"그렇게 자꾸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 곤란해? 이 새끼가 아작 정신을 못 차리는군."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테이블을 끼고 명준의 앞으로 불쑥 다가선다. 명준은 왈칵 겁이 나면서,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막는 시늉을 한다.

 

"손목때기 티우디 못하간? 인나!"

 

명준은 겁에 질려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선다. 곧바로 얼굴에 주먹이 날아온다.

 

명준은 아쿠 외마디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나자빠지다가, 의자에 걸려 모로 뒹군다. 끈적끈적한 코밑에 손을 댄다. 마구 코피가 흐른다. 한 손으로 땅을 짚고 한 손을 코에 댄 꼴이 흡사 개 같다 싶어, 엉뚱하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쿡 웃는다. 그러자 여태까지 무서움이 씻은 듯 가신다.

 

"? 이 새끼 봐, 웃어? 오냐, 네 새끼레 그런 줄 알았다. 이 빨갱이 새끼야!"

 

이번에는 발길이 들어왔다. 간신히 피한 발길이 어깨에 부서지게 울린다.

 

명준의 알 수 없는 품으로 밸이 틀린 나으리는 발을 바꾸어 가면서 매질을 거듭한다. 어깨, 허리, 엉덩이에 가해지는 육체의 모욕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다. , 이거구나, 혁명가들도 이런 식으로 당하는 모양이지, 그런 다짐조차 어렴풋이 떠오른다. 몸의 길은, 으뜸 잘 보이는 삶의 길이다. 아버지도?

 

처음, 아버지를 몸으로 느낀다.

 

"엄살부리지 말고 인나라우. 너 따위 빨갱이새끼 한 마리쯤 귀신도 모르게 죽여 버릴 수 있어. 너 어디 맛 좀 보라우."

 

명준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서 또 주먹으로 갈긴다. 또 한 번 명준은 나뒹군다.

 

"인나, 인나서 거기 앉아."

 

명준은 일어나서 의자에 앉는다.

 

"어때 정신이 좀 들언?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란 말야. 곤란해? 새끼."

 

명준은 형사를 건너다본다. 형사는 휴지를 꺼내서 손에 묻은 피를 닦고 있다. 명준은 코밑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손바닥을 펼쳐 본다. 응어리진 피가 진흙처럼 질척하다. . 자기 피. 가슴속에서 그 핏빛과 똑같은 빛깔의 한 불길이 확 피어오른다. 그 불길을 바라본다.

 

불길은 그의 나의 문에 매달려서 붙고 있다. 그 불을 끌 생각이 나질 않는다. 문을 무너뜨리고 자리를 삼키고, 침대, 책상, 커튼, 시렁에 놓인 토르소를 불태우고야 말 그 불길을.

 

"수사에 협력만 하면 너한텐 죄가 없어. 아버지가 지은 죄를 네가 대신 씻어야 그런 대로 나라에 대한 의무를 지키는 거구, 더 큰 의미에선 아들 된 도리가 서디 않간?"

 

불쌍한 악당놈아, 지껄일 대로 지껄여라.

 

"안 그래?"

 

또 역정난 소리다.

 

", 그렇습니다."

 

화닥닥 놀란 듯한 자기 말투가 슬프다.

 

"담배 피네?"

 

"."

 

"한 대 피워."

 

그는 명준에게 담뱃갑을 내민다.

 

"지금은 피우고 싶지 않습니다."

 

더 권하지도 않고 형사는, 저만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인 다음, 후 내뿜는다. 일을 한바탕 치른 다음 흐뭇이 한숨 돌린다는 몸짓이다. 속에서 탈 대로 타고 난 무서움의 잿더미에 미움의 찬비가 소리 없이 내리면서, 남은 재를 고스란히 적시며, 명준의 온몸에 스며간다. 부드득 이 가는 미움보다 더 차분하지만 사무치는 미움이다.

 

경찰서를 나선다. 서의 뒤편에 잇닿은 동산에 올라간다. 나무 그늘 밑에 쭈그리고 앉는다. 초여름 한참 길어 가는 햇살은 아직도 창창하다. 셔츠 앞자락이 온통 피투성이고 보면 거리를 걸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 몰골을 한 채로 돌아가라고 그를 내보낸 형사의 처사가, 얻어맞았을 때보다도 더 분했다. 한 사람 시민이 앞자락에 핏물을 들인 채 경찰서 문을 나서는 걸 그들은 꺼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모습대로 걸어가서 온 천하가 다 봐도 아무 상관 없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몸을 떤다. 빨갱이새끼 한 마리쯤 귀신도 모르게 해치울 수 있어. 어둠에서 어둠으로 거적에 말린 채 파묻혀 가는 자기 주검이 보인다. 나는 법률의 밖에 있는 건가. 돈과, 마음과, 몸을 지켜 준다는 법률의 밖에 있는 어떤 길.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발끝에, 저희들 몸집보다 훨씬 큰 벌레를 여러 마리 개미가 굴리고 있다. 그는 발을 움직여 개미를 비벼 죽인다. 풀과 흙에 묻혀서 자국도 없어질 때까지 발을 놀린다. 마지막에는 손바닥만한 땅바닥이 범벅이 되어 드러나고, 벌레와 개미는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그 별레처럼, 그 누군가 커다란 발길이 그, 이명준을 비비고 뭉개어 티도 없이 지워 버린다면? 아니 아까 그 형사는 정말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법률이 있다. 시민의 목숨이 그렇게 어둠 속에서 다뤄질 수는 없지. 불쑥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아까 그 형사를 폭행으로 고소를 하자. 그러나 그는 곧 머리를 젓는다. 전에 한 번 본 일을 떠올린다. 찻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한사람이 승무원석에 앉아 있고, 그 앞에 또 다른 사람은 마루에 꿇어앉아 있다. 올라앉은 사나이는, 검은 안경을 끼고 있다. 자리가 떨어져서 무슨 말인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검은 안경은 무엇인가 한마디 하고는 꿇어앉은 자의 뺨을 후려갈긴다. 또 뭐라 하고는 발길을 들어 무릎을 걷어차고, 무릎으로 턱을 올려치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쪽으로 쏠렸던 차 속의 눈길은 곧 제자리로 돌아들 가는 것이었다. 보아서는 안 될 일을 본 것처럼. 제가 당하지 않는 것만 천만다행이라는 듯 외면하는, 사람스럽지 못한 그 속에서 명준 자신도 죽은 듯 숨을 죽인다. 지금 생각하면 그 검은 안경을 낀 형사의 본때는 든든히 믿고 있는 어떤 힘을 가리키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뭇사람이 보는 앞에서 혐의자(인지 뭔지 모르지만)를 마루에 꿇어앉히고 때린다는 짓을 할 리가 없다. 돈과 마음과 몸을 지켜 준다는 '법률'의 밖에 있는 어떤 삶. 그는 번듯 드러눕는다. 푸른 하늘이다. 좋은 철이다. 뭉실한 솜구름이 여기저기 떠돌아가는 하늘은 좋다. 문득 우스개 한마디가 떠오른다.

 

좋은 철

 

궁리질 공부꾼은

 

보람을 위함도 아니면서

 

코피를 흘렸는데

 

내 나라 하늘은

 

곱기가 지랄이다.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분하고 서럽다. 보람을 위함도 아니면서. 아버지 때문에? 어쩐지 아버지를 위해서 얻어맞아도 좋을 것 같다. 몸이 그렇게 말한다. 멀리 있던 아버지가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몸이 거기서부터 비롯한 한 마리 씨벌레의 생산자라는 자격을 빼놓고서도, 아버지는 그에게 튼튼히 이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그의 옆방에 살고 있었다. 옆방에 사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명준의 방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그에게 대신 행패를 부린 것이었다. 멀리 있는 아버지가 내게 코피를 흘리게 하다니. 이건 무얼 말하는 것일까. 높은 데서 솔개가 빙빙돈다. 어디선가 한가한 새 울음. 명준은 격해야 할 자기가 이렇게 마음이 가라앉아만 가는 게 이상하다. 싸늘한 웃음이 안개 끼듯 피어나 마음속 높은 천장에서부터 아래로 아래로 내리밀면서 으스스 떨게 한다. 어느새 해도 넘어가고, 눈앞에 보이는 S서 건물 창마다 불빛이 흘러나온다. 이젠 뒷골목을 빠져 가면 그런대로 자기 몰골을 드러내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지만, 얼른 자리를 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 본다. 눈 언저리와 입 언저리가 부었다. 혓바닥으로 윗입술을 핥는다. 아까 그 형사는 아직 저 건물 속에 있을까. 그는 처음 만나는 나를 왜 그렇게 미워했을까.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영미 아버지를 봐서라도 자기를 그렇게까지 다루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터에, 거침없이 손찌검을 하다니. 어찌 된 일일까. 여태까지 잘못 생각해 온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잘못 생각. 마음이 그렇게 말한다. 나의 방문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튼튼하리라고 믿었던 나의 문이 노크도 없이 무례하게 젖혀지고, 흙발로 들이닥친 불한당이 그를 함부로 때렸다. 내 방인데. 그자는 어찌 그리 방자할 수 있었을까. 그 점에 헛갈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명준의 편에서든 형사의 편에서든. '법률'이 그렇게 말한다.

 

일주일 후, 명준은 두 번째 S서 형사실에 앉아 있다. 이번에는 여러 사람이 자리에 있는 시간이다. 명준을 맡은 형사 옆에 앉은, 얼굴이 바둑판같이 각이 진 친구가 명준을 흘끗 쳐다보더니 묻는다.

 

"뭐야?"

 

"이형도 씨 자제 분이야."

 

"이형도?"

 

"이형도가 누구야?"

 

다음다음 자리에 앉았던 친구도 서류에서 눈길을 떼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끼여든다.

 

"박헌영이 밑에서 남로당을 하다가 이북으로 뺑소니친 새끼야."

 

저편 자리에서 소리가 난다.

 

"응 알아. 요사이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인가에서 대남 방송에 나오는 놈 말이지?

 

"그래."

 

"이 새끼가 그 새끼 새끼란 말이지."

 

와 웃음이 터진다. 명준은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내려다본다. 아버지 이름이 놀림을 받는 자리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태어나는 것을 알았다. 얻어맞고 터지더라도 먼젓번처럼 취조관하고 단둘인 편이 오히려 나을 성싶다. 여럿의 노리개가 되는 건 더 괴로웠다.

 

"그래 이 자식은 뭘 하는 놈이야?"

 

"철학자라네."

 

"철학? 새끼 꼭 아편쟁이 같은 게 그럴싸하군."

 

"이런 새끼들 속이란 더 알쏭달송한 거야. 내 사찰계 근무 경험으로, 극렬한 빨갱이들 가운데는 이 새끼 같은 것들이 꽤 많아. 보기는 버러지도 무서워 할 것 같지. 이런 일이 있었어……"

 

그자는 명준을 젖혀 놓고 동료 쪽으로 돌아앉아서 겪은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명준은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또 한 번 놀란다. 그는 자기 전성 시대라면서, 일제 때 특고 형사 시절에 좌익을 다루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특고가 마치 한국 경찰의 전신이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 말투에는 일제 시대에, 그 학교의 전신이던 학교에 다닌 선배가, 그 소위 후배들을 앞에 놓고 옛날, 운동으로 날리던 얘기에 신명이 났을 때의 도도함이 있다. 그의 옛날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까, 명준은 자기가 마치 일본 경찰의 특고 형사실에 왕 있는 듯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형사의 얘기는 그토록 지난날과 지금을 뒤섞고 있다. 빨갱이 잡는 걸 가지고 볼 때 지금이나 일본시절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완연하다. 일제는 반공이다, 우리도 반공이다. 그러므로 둘은 같다라는 삼단논법. 그는 옛날은 좋았다고 한다. 옛날엔 세도가 당당했다고 한다. 명준은 차츰 몰라진다. 옛날이 좋았다? 이조 시대란 말인가? 고려? 신라? 삼한? 혹은 에덴 시대? 아니 이자가 그런 고전적인 회고 취미를 가졌을 리 없다. 그건 일본 시대를 말하는 소리다. 20분이나 잘 되게 그를 버려뒸다가 그제야 돌아앉는다.

 

"잘 생각해 봤나?"

 

"?"

 

"이 새끼 첫마디에 알아듣는 적이 없어. 대학에서 철학까지 공부하는 새끼레 왜 그리 눈치가 없어?"

 

"……"

 

"순순히 불 생각이 들었느냔 말이야."

 

명준은 잠깐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똑바로 얼굴을 쳐들면서 입을 열었다.

 

"전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저에게 오해를 하시는 모양인데…… , 끝까지 들어 주세요…… 잘못 아시는 모양인데 제 부친은 집에 들어서는 통 그런 얘기를 안 하는 분이었고, 월북하셨을 때도 처음 몇 달 동안은 어머니나 저나 그런 줄을 몰랐어요. 전에도 집을 비우시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러려니 하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았어요. 그 후로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저는 지금 살고 있는 변성제 씨 댁에 와서 지금까지 지냈고 아버지 소식은 알래야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변선생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형사는 그의 말을 내내 들어주고 있지는 않는다. 성냥개비를 가지고 귀를 후비기도 하고, 새끼손가락 끝으로 콧구멍을 후비기도 하면서, 딴전을 부리다가 변성제란 이름이 나왔을 때 불쑥 한마디 던진다.

 

"변선생? 변선생은 거기까지는 다짐할 수 없다는 거야."

 

명준은 가슴이 콱 막힌다. 어렴풋이 나마 그 이름이 미칠 수 있는 힘을 짐작하고서 한, 명준의 그 말만은 놓치지 않고 대뜸 쏘아붙이는 형사의 투는, 흘려듣는 듯하면서 대목은 결코 놓치지 않고 있다는 다짐이다. 능글맞은 늑대 한 마리를 보는 듯하다. 변선생이 뭐라 한 걸 가지고 넘겨짚는 수작인지 그것도 알 수 없다. 가만히 있을 순 없을 것 같아서, 그대로 잇는다.

 

"물론 한집에 사는 식구라도 일거일동을 모조리 알 수야 없겠지만, 저의 생활이란 간단합니다. 제가 제일 접촉이 많은 곳이래야 결국 학교일 테고, 그밖에 교우관계도 조사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지은 죄없이 추궁 받는 건 정말 괴롭습니다."

 

'일거일동'이니 '접촉'이니 '교우관계'니 하는 이 동네 말이 제 입에서 술술 나온다.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야?"

 

명준은 잠깐 생각했다.

 

"별로 없습니다."

 

"? 한 사람이다두 대란 말야."

 

"글쎄요, 특별히 친하단 사람은 …… 변태식이 그중……"

 

"변태식이?"

 

"뭣 하는 사람이야?"

 

"변선생 자제 분입니다."

 

"아따, 요 새끼 노는 꼴 봐라."

 

옆자리에서 거들 듯 흥 소리가 난다.

 

"변선생을 끌고 들어가는 게 안전하단 말이지? 그따위 잔꾀 부리지 말어. 하긴 내 경험으로두 너처럼 상판때기가 샌님처럼 생긴 게 곧잘 사람을 속이는 법이야. 내가 아직 경험이 없을 땐 그 수에 잘 넘어갔지.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 너 같은 놈을 한두 명 겪은 줄 알어? 뱃속까지 환하다, 이 쌔끼야."

 

그러면 어쩌자는 말일까. 그의 목을 죄는 손은 왠걸 끈질기다. 무서움이 한 걸음 한 걸음 뚜렷한 모습을 띤다.

 

그 후 한 번 더 불러들이고는 아직 아무 기별도 없다. 명준은 나날을 걱정이라는 먼지 티끌이 자욱히 서린 공기를 숨쉬면서 살았다. 그러면서 줄곧 속에서 부르짖는 한 가지 소리가 있다. 이명준, 자 보람있는 삶이 끝내 자네 것이 된 거야. 갈빗대가 버그러지도록 벅찬 불안에 살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하루의 시간이 어두운 무서움으로 짙게 칠해진, 알차게 익은 시간이란 말일세. 자네가 그렇게 조르던 바람이 아닌가. 이제 심심하단 말은 말게. 놀려 주는 소리다. 그는 소리를 죽이느라고 술을 마신다. 마시면 마실수록 머릿속은 더욱 또렷해 간다. 누르듯 무거운 공기에 견디다 못해서 불현듯 머리에 떠오른 윤애의 모습을 좇아서 이곳까지 오고 말았다.

 

윤애가 손수 저녁상을 들고, 두 줄로 키높이 자란 칸나 울타리를 돌아온다.

 

명준 한 사람 몫이다.

 

전번에, 서에서 형사한테 얻어맞은 후로 자꾸 자기가 못난 생각만 든다. 그래서 만은 아니겠지만, 불쑥 찾아온 자기를 뛰어다니면서 보살펴 주는 마음씨가 몹시 고맙다.

 

허황스럽던 몸가짐이 탁 꺾이고, 며칠 사이로 퍽으나 약해진 느낌이다. 몸이 저절로 무언가를 배운 모양이다. 여태껏 기대어 오던 게 무엇이든지 간에, 나는 믿을 수 없는 걸 믿어 온 게 아닌가. 적어도 나의 방 자물쇠는 장난감이었던 모양이다. 윤애에게 상의해 본다.

 

"저는 지금 돌아갈까 합니다."

 

윤애는 그를 빤히 쳐다본다.

 

"무슨 말씀을 하세요, 늦었는데."

 

"헤드라이트가 있으니 괜찮아요. 밤에는 왕래가 없으니 속력도 낼 수 있어요."

 

"어머나, 참 이상하시네."

 

이상할 수밖에 없는 속을 털어놓지 못하는 일이 괴롭다.

 

"글쎄요."

 

"글쎄가 뭐예요. 이 밤에. 오토바이 선수가 되실 작정이세요?"

 

그녀는 까르르 웃다가,

 

"정 그러시다면 내일 떠나세요. 저희 형편은 며칠이라도 괜찮지만."

 

"며칠이라도?"

 

"선생님 한 분 오셔서 밥 굶진 않아요."

 

"그럼 여름내 여기서 신셀 질까요."

 

"그럭허세요."

 

손뼉이라도 칠 듯이 대뜸 박색을 한다.

 

"집의 형편은…… 하하 식객이 늘어서 어떻다는 이야기가 아니구, 부모님들이라든지 괜찮겠느냐 말씀입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뭘 말입니까?"

 

"저희 집은 식구가 단출해요. 작년에도 와보시구서. 전 외딸이랍니다."

 

"남자 형제는?"

 

"없어요."

 

"네에."

 

"호호, 네에라니 마땅찮으세요?"

 

명준은 마음껏 웃었다. 며칠 만에 처음 즐겁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요?"

 

"제가 한 번 돌아가겠습니다. 알리기나 해놓아야지요."

 

"그게 좋겠군요. 그럼 내일 가셨다가……"

 

", 모레나, 늦어도 글피는 돌아와서, 다시 한동안 신세지겠습니다."

 

"신세 신세 하지 마세요. 주인인 제가 좋아서 모시는 건데, 억지로 오시거나 하는 것처럼, 뭘 그러세요? 그보다도, 인제 그 웃저고릴 벗으세요."

 

정하고 나니 후련하다. 여름 동안 아무 작정도 없이 있었는데, 인천에서 보내게 되는구나. 딴은 일부러 바라도 어려울 일이다. 설마 윤애네에서 한여름을 보내게 되리라고는 꿈도 안 꾼 일이라, 마음이 술렁거림을 누르지 못한다. 영미가 놀릴 테지. 어쨌든 한동안 서울을 떠나 살게 된 일이 기쁘다. 조용한 시골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노라면, 마음도 가라앉을 테고, 좋은 마련도 떠오르리라 믿고 싶다. 고단할 테니 빨리 쉬라고 하면서, 윤애가 안채로 들어간 다음에도, 이런저런 생각에 엎치락뒤치락하였으나, 어느덧 쉼없이 밀려드는 잠의 물결 속에서 몇 번 꼴깍꼴깍 허덕이다가, 끝내 깊은 밑바닥으로 푹, 가라앉아 버린다.

 

예감이란 말이 있다. 옛날 사람들이 그렇게 나타냈고,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잇다. 어떤 사람이든 생애에 적어도 한두 번씩 이런 느낌을 겪게 되는 법이고, 지금 명준이 바로 그렇다. 자기가 애쓰지 않는데도, 어떤 일이 다가옴을 살갗으로 느끼는 걸 예감이라고 부른다. 알맞은 말이 없는 탓으로 지금도 그대로 쓰지만, 그 짜임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밝혀지지 않고는 앞으로도 그럴 거다. 하지만 명준의 경우에는 그 예감의 안 속이 반드시 짐작 목 할 것만은 아니다. 나라나 세상 앞일이 아니고, 제 일이고 보면 뭐니 뭐니 해도 자기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자기 삶이 어떤 나무에서 익을 대로 익은 끝에, 곱다랗게 자리잡고 있던 가지에서 뚝 떨어지기 앞선 얼마 동안, 새로운 움직임을 마련하는 숨결이, 아무래도 본인에게 새어나게 마련이다. 두터운 벽을 가진 방 안에서 주고받는 말소리가 듣는 사람에게 안타까움을 주는게 사실이라면, 문득 귀찮아져서 엿듣기를 그만두는 마음도 있울 수 있다. 명준은 자기 밖에서, 또 안에서 아끼던 물건이 흠칫흠칫 허물어져 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밤중에 잠에서 깼을 때, 집 재목이 쩡 말라 가는 소리처럼, 단단한 벽에 금이 가는 낌새를 눈치채고 있다. 그렇게 쉽사리 허물어지리라고는 정말 생각지 않던 일이었으나, 별 수 없는 일이다. 고요한 무너짐. 그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쓸 손도 없었으려니와 귀찮기도 해서, 그저 심란하면서 꼼짝하기 싫은 몸을 일으킬 염을 내지 않았다. 실은 무서워서, 그토록 질려 버린 것이다.

 

윤애한테 말하지도 않고, 혼자서 곧잘 거리를 걸어 본다. 부두를 낀 거리를, 맥고모자를 눌러쓰고 기웃거리는 시간에, 그는 즐겁다. 윤애도 없고, 때리던 형사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비린내 나는 어시장에서, 얼음에 잠긴 물고기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그저 때를 보내는 게 좋다. 얼음에 차갑게 잠겨서, 눈을 번히 뜬 채, 지붕에 박힌 빛받이 창문으로 내리비치는 햇살 아래, 은색 비늘의 깨끗한 조기를 보고 있으면, 미술이라는 일이 짜장 가난하게만 느껴지는 사무치는 울림이 있었다. 물건 살 사람 같지는 않은지, 모른 체해 주는 그곳 사람들이 좋다. 너무 남한테 마음을 쓰면서 살아왔어. 모든 사람에게 이쁘게 보이려구. 흔히들 여자란, 남편이나 애인이 아닌 남자 한테도 꼬리를 치는, 타고난 갈보라지만, 시시한 소리다. 여자보다 더 쩨쩨한 남자도 얼마든지 있다. 나 같은 놈이 바로 그렇다. 남자는 씩씩해야 된다? 여자는 상냥스러워야 한다? 시시한 소리다. 아득한 옛날 수풀에서, 돌도끼로 짐승의 이마빡을 치던 때 얘기다. 씩씩하려야 씩씩할 거리가 없다. 어찌 보면 문화란 말은 턱없는 믿음의 범벅이다. 남자는 씩씩하다고들 한다. 이미 씩씩하다는 이야기는, 스포츠에서나 보이는 몸놀림의 깨끗함이라는 값밖에는 매길 수 없는 시대에, 아직도 이런 믿음이 남아 있다. 남자들은 씩씩한 체하려고들 한다. 애인들 앞에서, 굳센 수컷의 맛을 보여 주려고 애쓴다. 왜냐하면 그녀들이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바람이 얼마나 모진 일인지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소뿔 끝에서 피를 뿌리는 스페인 사람들이 한다는 그 백정놀이에서처럼, 그들은 쓰러진다. 오늘날 세상처럼 사람이 '영웅의 삶'을 살 수 없는 때도 없다. 사람이 달라진 게 아니고, 조건이 달라진 것이다. 조건을 쑥 뽑은 다음에 그 어떤 알맹이가 남는다는 건, 곧 아름다운 미신이다. 나한테도 영웅의 삶을 살고, 영웅의 죽음을 죽을 수 있는 씨앗이 파묻혀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이 검은 해가 비치는 어두운 광장에서는 피어날 수 없는 씨앗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 광장으로 시민들을 불러 내는 나팔수가 바로……

 

비린내 나는 살갗 검은 여자들이, 꼬챙이로 고기를 꿰어 광주리에 옮기면서, 목쉰 소리로 셈을 외친다. 한나이요, 두흘이요, 서어히요, 가락을 붙인 셈 소리는 성의 구별을 잊게 한다. 저 여자들도 삶의 뜻을 가끔 생각할까? 아마 결코 않는다. 철학은 한가에서 온다고, 무엇에서 비롯했건 교육받은 숱한 사람들에게, 생각한다는 버릇이 붙어버렸다는 일은 물리지 못한다. 아가미처럼 이루어진, '생각'이라는 가닥을 떼어 버리면, 그들은 죽는다. 아가미를 떼지 않고 매듭을 푸는 길만이, 사실에 맞는 처방이다.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광장만이 있고 밀실이 없었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에,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던 날부터, 괴로움이 비롯했다. 그 속에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을 끝내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 이 집에 왔을 적에 윤애의 눈에 켜졌던 불은, 그 후로 이내 볼 수 없다. 그녀는 세 번에 한 번씩은, 명준을 따라, 정한 데 없는 걸음을 따라 나선다. 기름이 떠돌고, 나뭇조각이며 빈 병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선창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말해 주면, 그녀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명준의 그런 겪음에 저도 끌리는지 어쩐지, 겉으로는 어느 편으로도 보이는, 심란하기까지 한 낯빛이다. 그럴 때 명준은 문득, 무서워진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고 말할 때, 그건 얼마나 큰 잘못인가. 사람이 알 수 있는 건 자기뿐. 속았다 하고 떼었다 할 때, 꾸어주지도 않은 돈을 갚으라고 조르는 억지가 아닐까. '사랑'이란 말속에, 사람은 그랬으면 하는 바람의 모든 걸 집어넣는다. 그런, 잘못과 헛된 바람과 헛믿음으로 가득 찬 말이 바로 사랑이다. 어마어마한 그물을 얽어 낸 철학자가, 늘그막에 가서 속을 털어놓는 책을 쓰는데, 그 맺음말에서 '사랑'을 가져온다. 말의 둔갑으로 재주놀이하는, 끝없는 오뚝이놀음. 철학이란 그렇게 가난한 옷이었다. 윤애의 덤덤한 낯빛은, 관념철학자의 달걀 이명준에게, 화려한 원피스로 차리고, 손이 닿을 거기에 다소곳이 선 '물 자체'였다.

 

부드러운 살결이 벽처럼 둘러싼 이 물건을 차지해 보자는 북받침이, 불쑥 일어난다. 그러자, 언젠가 여름날 벌판에서 겪은 신선놀음의 가락이 전깃발처럼 흘러온다.

 

"더러운 물건이 갑자기 아름다워 보일 때, 저는 제일 반갑습니다. 눈이 열린다 할까요?"

 

"더러운 물건이어야만 하나요?"

 

"아름다운 물건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대로는 더럽게 밖엔 보이지 않던 물건이 그대로 아름다움 속에 돋아나 보이는 건, 마음이 더 높은 곳으로 옮아갔다는 겁니다."

 

"그렇겠지요."

 

오호, 그렇겠지요라구. 이 텅 빈 말. 귀밑머리가 구름처럼 나부끼는 그녀의 옆얼굴을 쳐다보며, 명준은 알 수 없는 미움이 치받쳤다.

 

"바다와 산, 어느 편을 좋아하세요?"

 

"둘 다 좋아요. 산은 산대로 맛이 있구…… 그렇잖아요?"

 

주여, 이 깡통을 용서하옵소서. 일곱을 일흔 번하여 용서하옵소서.

 

명준은, 방금 연기를 뿜으며 그들 앞을 떠나가는, 작은 통통배에 눈을 돌린다. 이런 말을 가지고는, 그녀의 마음이 울리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리 전파를 보내도, 한 편의 수신기가 헐었거나, 주파수가 안 맞으면, 그 전파는 흩어진다. 가르치는 사랑으로?

 

"바다에 서면 그대로 어디든지 가고 싶어요."

 

유행가를 부르는구나. 홈이 다 닳아빠진 레코드에서 흘러오는, 이 강산 낙화유수를. 하자만 이토록 예쁜 아가씨가, 국문학을 배우는 문학도가. 귀여운 생각이 든다. 내 이야기도 유행가지. 본인에게는 아무리 벅찬 넋두리라도, 남의 귀에는 유행가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바에야 무슨 말이면 다르겠는가. 이만한 분별은 있다.

 

"가면 괴로움이 없는 땅이 나타날까요?"

 

"몰라요. 나타나든 안 나타나든 갔으면 좋겠어요."

 

"그런 느낌은 알 만합니다. 꿈이지요."

 

", 사람은 꿈에 속아서 사는 것 같아요."

 

"왜 속아서라구 합니까?"

 

"그저 속는 거지요. 결혼두 무서워요. 집에서는 가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글쎄요, 저두 무섭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사람이 생기면서부터 있어 온 일인데, 비켜 갈 수 있겠어요? 저는 가끔, 나이 많은 사람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해요. 제 손으로 목숨 끊지 않고 저 나이까지 살아냈다는 건 어쨌든 장하다구."

 

"장한 게 아니구 할 수 없이 산 것이겠지요."

 

명준은 마음에서 가시가 뽑히고, 너그러운 마음이 되어 간다. 어쩌면 이리도 마음이 차분치 못할까. 미움과 사랑이 함부로 뒤바뀌는 짜증스러움이, 자기의 불안한 자리를 말하는 줄을 알긴 한다. 그러고 보면, 광장에서 보낸 어두운 그림자는, 이 항구의 붐빔 속으로까지 그를 따라와 있는 것이 된다. 그런들 윤애에게 화풀이할 까닭이 없었으나, 뉘우치면서도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윤애에게 부드러우려고 애쓴다. 모처럼 폐를 끼치면서 심술까지 부릴 법이 없다고 뉘우친다.

 

여느 날처럼 그날도 두시쯤, 한창 햇살이 이글거릴 무렵에 집을 나선다.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에 돌아다본다. 윤애였다. 명준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기다려 준다.

 

"왜 그리 혼자만 다니세요? 이건 저한테 놀러오신 게 아니구, 저희 집으로 오신 거군요."

 

노란빛 파라솔 밑에서, 그녀는 웃는다. 명준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녀와 가지런히 걸음을 맞춘다.

 

"오늘은 선창 말고 다른 데로 가요."

 

그는 머리만 끄덕인다. 선창을 끼고 올라가서 오래 걸었다. 명준은, 이럴 때 남자가 두 사람 사이를 이끌어야 되려니, 생각한다. 자기가 손만 내밀면 그녀는 들을 것 같다. 퇴짜맞을 때를 떠올리고 머뭇거린다. 기껏 신사 대접을 받다가, 도적놈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배짱이 있어야 했다. 도적놈.

 

거침없이 살던 사람들의, 조마조마한 울렁거림을 옮겨 볼 자리를, 그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은 좁아서, 눈을 가린 마차 말처럼, 숨막히고 지루한 산길을, 한 가지 무심한 햇살에 짜증을 부리면서 몰아 가는 나날이었다. 요즈음 그 숱한 정치 모임의 어느 하나도 모르고 지내온 생활이었다. 까닭은 두 가지다. 벌어지고 있는 일의 뜻을 잘 알 수 없었다. 너무 큰 일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내친 말을 하고 있다. 하느님의 문서를 보고 온 사람들처럼. 철학이란 물건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면, 정말 알고 있는 것보다 목소리를 더 높여서는 안되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높은 가락만 들리는 판에서는 싸울 뜻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까닭의 두 번째는, 좀더 가까운 슬기였다. 아버지 아들인 그는 조심해야 했다. 지금 한 여자를 굽혀 보자는 생각은, 죄악에 넘친 음모처럼 그를 꾄다. 새로운 지평선에 올라선 사람의, 새로워진 힘이 밀려온다. 그들이 다다른 속은, 왼편에 마을이 보이는 언덕진 땅 생김이 분지를 이룬, 움푹한 자리다. 오른편으로 멀리 바라보여야 할 선창과 거리는, 막아 선 늙은 느티나무의 한 무리 때문에 보이지 않았고, 앞으로만 트인 눈길 앞에, 선창의 붐빔을 금방 보고 온 눈에는 기이할 만큼 빈 바닷가에, 모래만 허허하게, 기운 한낮의 햇살을 되비치고 있다. 느긋하면서 두근거리는 힘이 흥건히 속에서 괴어 오르고, 명준은 누구에겐가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들은 그 분지에서, 조용함을 즐기듯 한참 서서 바다를 내다보고 있다가,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는다. 바다에는, 배 그림자도 없다. 탐스럽게 푸짐한 뭉게구름만, 우쭐우쭐 솟아 있다. 희고 부드러운 덩어리에는, 햇빛 때문에, 유리처럼 반짝이는 모서리가 있다. 머리나 어깨 언저리가 그렇고, 아랫도리는 그늘이 져, 환한 윗몸을 돋우어 준다. 그 모양은, 여자의 벗은 몸을 떠올린다. 금방 물에서 나온 깨끗한 살갗의 빛깔과 부피를 닮았다. 어디서 봤던가 기억을 더듬는다. 영미였다. 그녀가 목욕을 하고는, 곧잘 그의 방 의자에서 농담을 하다가 돌아가곤 할 때, 보기가 민망하도록 곱던 살빛이다. 쓴웃음을 짓는다. 기껏해야 떠올리는 본이라고는 영미뿐. 초라해진다. 영미는 나한테 무엇이 되는가.

 

친구의 누이, 아버지 친구의 딸, 나의 친구, 주인집 딸? 그는 흠칫한다. 주인집? 왜 갑자기 이런 부름이 나왔을까? 여태까지 그 집을 주인집이라 여긴 적이 없다. 하지만 주인집이 아니고 무언가. 그는 다시 구름을 바라본다. 반짝이는 작은 물체가, 흰 바탕 앞에서 날고 있다. 구름조각이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갈매기다.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흡떠, 물 밑에 있는 먹이를 노리고 있는 모습이련만, 떼어놓고 보기에는, 날개를 기울이며 때로 내려꽂히고, 때로 번듯 뒤채이며, 스르르 미끄러지는, 노곤한 그림 한 폭이다.

 

명준은 그녀를 돌아다본다.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모래를 비비적거리고 있다. 푸른 줄이 간 원피스가 눈에 시다. 나무 그늘인데도, 바닷가 햇살은, 환하다.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녀는 흠칫하는 듯했으나, 가만있는다. 오래 그러고 있는다. 다음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오래 끌수록 점점 거북하고 불안해진다. 그녀는 손을 옴지락 거리면서, 빼내려는 듯이 했다. 그녀의 움직임이 명준을 갑자기 떠밀었다. 잡았던 손에 힘을 주어 가지 쪽으로 당기면서, 다른 팔로 그녀는 두 팔로 그의 가슴을 받치고, 머리를 저어 그의 입술을 비킨다. 명준은, 그녀의 허리를 안았던 손에 힘을 주고, 한 팔로 그녀의 몸을 죄면서 입술을 더듬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낮추어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끈질기게 마다한다. 그녀의 턱과 뒷머리를 거칠게 붙잡아, 틈을 주지 않고 입술을 누른다. 기다리기나 한 듯이, , 그녀의 입술이 열리고, 부드러운 그녀의 혓바닥을 자기의 그것으로 느낀다.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지면서, 머리를 붙든 명준의 두 팔에 무게가 걸려 왔다. 그는 가슴으로 그녀의 무게를 받아 주면서, 그대로 입을 빨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으나, 그의 것을 맞이하는 그녀의 미끄러운 살점은 빠르게 움직인다.

 

그는 입술을 떼고 그녀의 뺨에, 이마에, 입술을 댄다. 다음에는 목을 애무한다. 원피스가 패어진 틈으로 가슴을 더듬는다. 그녀는 또 한 번 꿈틀한다. 그는 그녀를 힘있게 한 번 가슴에 품었다가, 놓아 줬다. 자리를 옮겨 앉으면서, 흩어진 머리를 만지는 그녀는, 아주 가까워진 사람 같다. 사람이 몸을 가졌다는 게 새삼스레 신기하다. 사랑의 고백도 없이 이루어진 일인데, 어떤 대목을 빼먹었다는 뉘우침은 없다. 대목이라고 하면, 그녀를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반년이란 시간은 되고도 남을 세월이다. 손을 반쯤 내밀었다간 도로 움츠리고 한, 병신스런 반년. 맑고 가득 찬 기쁨이 있다. 명준은 윤애의 손을 잡아다가 두 손 바닥으로 다둑거린다. 손톱 모양이 고운 기름한 손가락이, 그의 손을 얽어 온다. 아까 입을 맞추었을 때처럼, 그 움직임은 그녀의 마음을 옮기고 있다.

 

은근한 힘으로 명준의 손가락에 응해 오는 미끄러운 닿음새를 즐기면서, 처음에 그녀가 보여 준, 마다하는 흉내를 눈감아 줄 마음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녀는 부신 듯 얼른 고개를 숙여 버린다. 사랑스럽다.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씩 꺾어서 소리를 내본다. 다섯 손가락을 다마치고, 다른 손을 끌어다 또 그렇게 한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그의 장난을 보고 있다. 명준은, 처음 짐작과는 달리,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마주앉았을 때 시간을 메우는 흉내를 쉽사리 해내고 있는 일에 놀란다. 아무 어려운 것이 없다. 그녀의 열 손가락 마디가 모조리 끝나자, 이번에는 그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가서 하나하나 애무했다. 손톱이 깨끗이 손질이 된 손가락을 이빨 끝으로 딱 물어 끊고 싶다. 바다에서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갈매기가 날고 있다.

 

그날 밤 윤애가 일찍 감치 자리를 뜨고 나간 뒤에, 명준은 팔베개를 하고 누워, 그녀가 앉았던 방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흐뭇한 기쁨을 즐긴다. 잠자리 날개 모양 풀이 꼿꼿한 모시적삼을 입은 그녀의, 깔끔한 자태가, 자기 품에서 숨을 할딱이던 바로 그 몸이라는 일은 그에게 자랑스러움을 준다. 그렇게 튼튼하게만 보이던 돌담의 한 모서리가, 멋쩍을 만큼 쉽사리 허물어진 일은 거짓말 같다. 연애가 희한한 '기술'로만 비치던 명준에게는, 뻔히 자기 손으로 만져 본 승리조차도, 그러므로 허깨비나 아니었던가 싶게 믿어지지 않는다. 입술을 갖다 대자 대뜸 그녀의 입술이 열리던 생각을 하고, 그는 빙그레해진다. 그녀가 베테랑인가? 아니 숨차서 허덕이는 참에 그렇게 된 것이겠지. 내내 두 팔을 드리운 채로 였지. 내 허리에 매달리거나, 목에 걸어 오지도 않았다. 불안한 생각이 든다. 그녀는 그저 갑작스레 당하고만 것일까. 아니, 그녀의 혀는 토막난 뱀처럼, 욕정에 젖어서, 꿈틀거리지 않았나. 부드럽게 젖은 그 살점은, 분명히,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값진 전리품은, 사람인 성싶었다. 그의 만족은 그처럼 크다. 그녀의 마음을 그 동안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몸의 한 군데를 내받은 지금에야 마음놓고 믿을 수 있었다. 마음은 몸을 따른다. 몸이 없었던들, 무얼 가지고, 사람은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보고자 하는 소원이 우상을 만들었다면,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몸이란, 허무의 마당에 비친 외로움의 그림자일 거다. 그렇게 보면 햇빛에 반짝이는 구름과, 바다와 뫼, 하늘, 항구에 들락날락하는 배들이며, 기차와 궤도, 나라와 빌딩, 모조리, 그 어떤 우람한 외로움 이 던지는 그림자가 아닐까. 커다란 외로움이 던지는. 이 누리는 그 큰 외로움의 몸일 거야. 그 몸이 늙어서, 더는 그 큰 외로움의 바람을 짊어지지 못할 때, 그는 뱄던 외로움의 씨를 낳지. 그래서 삶이 태어난 거야. 삶이란, 잊어버린다는 일을 배우지 못한 외로움의 아들. 속였기 때문에 또 다른 속임의 대상을 찾지 않을 수 없는 오입쟁이의 계집들, 그게 삶이야. 이거다 싶게 마음에 드는 계집을 만났을 때만, 오입쟁이는 고단한 옷차창을 그치고 파자마로 갈아입을 것이며, 으뜸가는 아이를 낳았을 때만, 외로움은 씨 뿌리기를 그칠 것이며, 공간은 몸 푸는 괴로움을 벗을 거야. 삶이란, 끝가는 데를 모르는 욕정 탓에 괴로운, 애 잘 낳는 여자의 아랫배 같은 것.

 

형사의 발길질에 멍이 들고도, 관념철학자의 달걀답게, 이런 어수선한, 곤 달걀 속 같은 꿈 넋두리 속을 오락가락하다가 잠이 든다.

 

이따금 들리는 뱃고동 소리가, 언제가 들은 적이 있는 산새 울음 소리 같다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뱃고동. 산새 울음. 소주잔을 들어서 쭉 들이켠다. 목에서 창자로 찌르르한 게 흘러간다. 이 목로술집은 인천에 와서부터 단골이다.

 

얼마 붐비지 않는 게 좋았고, 내다보이는 창 밖이 좋다.

 

마룻장 밑에서는 바다가 철썩거린다. 다 탄 담배를 창 밖으로 던진다.

 

"더 드릴깝쇼?"

 

주전자를 한 손에 들고 주인이 등뒤에 서 있다. 주전자를 잡은 손마디가 유난히 굵다. 명준은 별 뜻도 없이 주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천천히 머리를 든다.

 

"아니오."

 

웬일인지 주인은, 서성거리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눈치다. 명준은 웃었다. 머리를 끄덕이면서 자기 옆자리를 가리킨다. 앉으라고. 그러자 주인은, 주전자를 상에 올려놓고, 두 손바닥을 비비듯 하면서, 은근한 말투가 되는 것이다.

 

"배가 있어요."

 

먼저, 그의 낯빛이었다. 야릇한 얼굴이다. 그 말을 할 때, 그는, 문간을 흘끗 쳐다보았다.

 

"……"

 

"괜찮아요, 처음 오셨을 때부터 전 알았습죠."

 

"배라니."

 

"헤헤헤, 괜히 이러십니다. 처음엔 다 그러시지요."

 

주인은 컵을 집어다가, 제 손으로 한잔 따라 마시고는, 명준의 귀에다 대고 무슨 말을 했다. 그 말에, 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진다. 마음이 푹, 놓인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기나 했던 것처럼 태연하다. 그 태연한 빛을 보자, 주인은 그것 보라는 듯이, 이번에는 그쪽에서 시무룩해지는 것이다. 명준은 담배를 뽑아 입에 물고, 불 댕기는 것을 잊은 듯,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본다. 가랑비는 짙은 안개 같다. 안개 속에서, 이따금, 짧은 뱃고동이 울려 온다. 안개 속에 윤애의 흰 가슴이 있다. 그가 만지게 맡겨 주던, 촉촉이 땀 밴 가슴이, 가랑비를 맞으며 둥둥 떠 있다. 그 분지에서 자지러지게 어우러지다가, 그녀는 불쑥,

 

"저것, 갈매기……"

 

이런 소릴 했다. 그녀의 당돌한 말이 허전하던 일. 그 바다새가 보기 싫었다. 그녀보다도 더 미웠다. 총이 있었더라면, 그는, 너울거리는 흰 그것을 겨누었을 것이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흰 가슴 위에서 갈매기가 날고 있다. 비에 젖어.

 

주인이 명준에게 한 귀엣말은 이런 것이었다.

 

"이북 가는 배 말씀입죠."

 

"미스터 리"

 

선장이 옆구리에 와 서 있다. 마도로스 파이프가 번쩍 하면서, 잠시 밝혀 낸 불빛 속에, 선장의 단정한 얼굴이 웃고 있다. 명준은 누운 채로 말했다.

 

"캡틴은 미남잡니다."

 

"? 으하하하…… 생큐 생큐. 우리 마누라가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자 일어나게. 내 방에서 한잔 하세. 모셔 둔 스카치를 터뜨려야지."

 

"상을 주시는 거군요?"

 

"? 좋아서 그러는 걸세."

 

"그럼 어떤 상을 받느냐는 제가 골라잡을 수 있겠군요."

 

"스카치로선 안 된단 말이군. 이거 단단히 미남자 값을 치르는데?"

 

명준은 손을 들어 밤하늘을 가리키고, 그 손을 옮겨 자기 얼굴을 가리킨 다음, 말했다.

 

"내 별빛을 막지 말아 주시오."

 

선장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차렷을 하고, 모자 차양에 손을 울린다.

 

"존경하는 디오게네스 각하, 실례했습니다."

 

구두 뒤꿈치를 탁 올리며 뒤로 돌아 한 번 멈추었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서 모퉁이를 돌아간다. 디오게네스는 고개를 돌려 반듯이 별하늘을 올려다본다.

 

, , ……이다.

 

바다 위에서 보는 별하늘은 자지러질 듯하다. 종교가 없는 그는, 별하늘에서 사람의 길을 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와 윤애는, 그 바닷가 분지에서, 초롱초롱 별이 보이기 시작할 때까지 앉아 있곤 했었다. 그 무렵 그는 왜 그토록 안절부절못했을까. 처음 안 여자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알려고, 그리도 서둘렸던지.

 

"그런 애기를 더 하세요."

 

"그런 게 뭐 재밌어?"

 

"어머나, 자기는 뭘 공부하시는데?"

 

"? 그러니까 바보였지. 지금은 일없어."

 

"그럼 뭐가 일 있어요?"

 

"윤애야."

 

정말이다. 윤애면 다였다. 스무 살 고개에 처음 안 여자는, 모든 것을 물리치고도 남았다. 몸의 길은 취하는 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더 잘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태식이보다는 몇 갑절이나 잘 사랑 하겠다고 뻐겼다. 마음은 그랬건만 어떤 열매가 맺혔는지. 적어도 윤애에게 있어서, 그와의 사귐은 무얼 가져다주었을까. 그녀 자신이 사람으로서 여물고 깊어지기 위해서, 어느 만큼이나 도움이 되었을까.

 

"전 그런 딱딱한 애기 듣는 게 좋아요."

 

"깍쟁이."

 

그녀의 말을, 어린 티가 덜 가신 빈말이라고 쉽게 밀어 버리고, 그녀의 목을 끌어당기곤 했다. 나는 잘못 안 게 아닐까. 그것은 윤애가 참된 목소리였는지도 모른다. 꾸밈이 아니라, 그 또래 소녀의 숨김 없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나중 일까지 쳐보면 아마 그랬던 모양이다. 명준이 진저리가 난 잿빛 부엉이가, 그녀한테는 금누렁 앵무새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때 그녀의 몸은 스스로를 깨닫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나는 비싸게 군다고 탓했지만, 그녀로서는 억울한 누명이었던 게 아닌가. 어떤 사람이든 다른 사람에게 만지우고 잡히는 걸 싫어하지만, 애인한테만은 다르다고 보아야 했다. 그런데 윤애는 곧잘 그를 밀어 내는 것이었다. 그럴 때 그는 창피스러웠다. 그녀가 고분고분하면 좋아라 하고, 마다하면 비로소, 그녀도,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 아니고, '사람' 하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람'과 부딪친 것을 창피를 당했다고 여겼다니, 남 위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었을까. 살을 섞는 데서 그녀가 어느 만큼한 즐거움을 가지는지, 그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명준은 그 일을 실존 연습이라 농삼아 불렀으나 그가 보건대 그녀의 답안은 썩 뛰어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또는 그의 출제 방법이 나빴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없으면 몸은 빈집인 모양이지. 지금에 와서는 두 사람의 잘못을 가리려야 가릴 수 없다. 다만, 어떤 두 남녀가 서로의 몸을 알았달 뿐 아니라, 서로가 좋아서 그렇게 했다면, 모든 허물은 덮어지고도 남는 것이 아니냐고 달래 보는 길밖에 없다.

 

더구나 이미 더 이어질 길이 막혀 버린 지난 일이고 보면, 피고가 유리한 쪽으로 풀이하는 것이 어느 편을 위해서나 좋을 일이다. 그녀와 만나고 헤어지면 으레 사로잡히게 되던, 죄지었다는 느낌. 어찌 보면 그것은 커다란 오만이 아니었을까. 어떤 사람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는 생각은, 이긴 사람의 느낌이다. 과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얼마 만큼이나 해칠 수 있을까. 남의 앞길을 끝판으로 망쳐 놓았다는 생각이 죄악감이라면, 그는 하느님의 자리를 도둑질하는 것이 된다. 사람은 사람의 팔자를 망치지 못한다. 다만 자기의 앞길을 망칠 뿐이다. 어떤 뜻에서건 나와의 사귐은, 윤애에게 한 가지 겪음이었을 거다. 그 겪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녀를 얕보는 일이다.

 

사랑하려고 했는데, 저쪽을 더럽히고 할퀴고 말지 않았을까, 하고 돌이켜보아야 하는 일은 괴로운 노릇이다. 남한 시절의 그에게는 철학이 모든 것이었다.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는 청년에게, 철학이란 모든 것을 갚고도 남을 꿈을 보여 주는 단 하나의 것이었으리라. 또는 양반과 중놀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살아온 고장에서, 꿈을 이룰 엄두조차 내지 못할 사회에서, 철학이란, 양심의 마지막 숨을 곳이었으리라. 아니면 그 신분이 임금이건 종이건 사람이 산다는 일에 놀라움을 느끼고, 그 뜻을 케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마음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느 것이든 좋고, 철학이란 그 모든 것을 다 뜻한다. 어쨌든 그는 철학의 탑 속에서 사람을 풍경처럼 바라보았다. 그때 윤애가 나타난다.

 

그녀는, 뜻밖에도 다가와서, 그의 창문을 두드린다. 그는 창틀을 뛰어넘어서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녀는, 금박이 입혀진 두툼한 책이, 즐비하게 꽂힌 책장이 놓인 방 안에, 오히려 끌리는 듯했지만, 그녀의 손을 이끌어 푸른 들판으로 이끈다. 저 방 안에 들어가 보았자 아무 재미도 없어, 정말이야, 내가 장담해. 그런 생각에서, 그 아름다운 얼굴에 생각으로 인한 흉한 주름을 잡히게 하고 싶지 않다는 아낌에서였다. 그 아낌이 모욕이었다?

 

천천히 일어나 앉는다. 갑자기 선뜻해지면서 몸서리친다. 일어서서 한 번 기지개를 켜고 한참이나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똥이 길게 흐른다.

 

하룻밤에 별똥을 세 개 보면 좋다지. 또 한 번 별이 흐르기를 기다린다. 있다.

 

아까하고는 훨신 떨어진 쪽으로 쓱, 흐른다. 한 개만 더. 그 한 개는 아무리 기다려도 채워지지 않는다. 담배를 꺼내서 피워 문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도록 별똥은 더 흐르지 않는다. 웃으면서 돌아선다. 몇 발자국 떼어 놓다가 우뚝 멈춘다. 갑판을 내려다본 채 중얼거린다. 어쨌든 나는 사랑했어. 다시 발걸음을 떼 놓아, 이번엔 멈추는 일 없이 곧장 뱃간으로 돌아온다.

 

박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윗다락으로 올라가서 담요를 끌어당기는데, 박이 돌아온다.

 

"어디 갔었나?"

 

박은 이상스럽게 우물쭈물 한다.

 

", ……"

 

어물대면서, 자기 자리로 기어든다. 뭐가 있었구나 싶어서 몹시 언짢다. 한참만에 부스럭거리면서 박은 말한다.

 

"내일 홍콩에 닿지 않아? 그래서 어떻게 상륙하는 길이 없을까, 그런 애기가 나와서, 동지들끼리 이야기를 나눠 본 걸세, 자넬 찾았는데 보이지 않아서……"

 

또 그 애긴가. 벌컥 모로 돌아놉는다. 아래쪽에서도 이내 더 말이 없다.

 

타고르호가 홍콩에 들어서기는, 저녁 여덟 시가 가까운 무렵인데, 남쪽 나라의 긴 하루 해는 들어찬 크고 작은 배들의 뚜렷한 테두리를 드러낼 만큼 넉넉히 남아 있다.

 

석방자들은 갑판 한구석에 몰려 서서, 홍콩 거리를 바라본다. 구경 거리로 친다면, 항구를 메운 갖가지 크기와 모양을 한 배들과, 그 위에서 움직이는 뱃사람들의 움직임이 더 똑똑히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런 것에 눈길을 돌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눈은 배들을 넘어 거리로 향하고 있었다.

 

불야성(不夜城)

 

언덕진 땅 생김 때문에, 더욱 그 말이 들어맞을 홍콩의 밤 경치다. 아직도 해가 남았는데 한결같이 불을 밝힌 모양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어둠과 빛이 망설이면서 손길을 허위 더듬고 있는 야릇한 낌새다. 그 낌새는 석방자 모두를 위해서 해로운 어떤 것이었다. 결코 힘을 북돋는 따위가 못 된다. 보름. 닻 올리기를 기다리며 지낸 보름만에, 지루하도록 보아 온 항구를 떠난 이래 처음 보는 거리다. 그들의 마음을 한결같이 지금 사로잡고 있는 사무치는 생각이 있다. 뭍에 오르고 싶다는 것. 단 한 시간이라도 좋다. 하다못해 30분이라도 좋았다. 보름 동안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란 다른 아무 할 일이 없으면 하찮은 일에 미치도록 매달리는 모양이다. 그저 잠시라도 좋다. 저 불빛이 환한 거리를 걸어 봤으면. 여러 사람이 한 가지 생각을 똑같이 지니고 있을 때, 그들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가 생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따지지 않는, 그 광장에서, 움직임은 낱이 아니라, 더미로 이루어진다. 이명준도 그 광장에 있다. 그러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살기마저 띤 이 소용돌이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오르고 싶은 마음에는 그도 다를 것이 없다. 만일 석방자들이 끝내 일을 밀고 나가기로 든다면, 그 일은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기에 두려웠다. 떠나서 닿기까지 석방자는 배를 떠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석방자들이 그 사정을 뻔히 알면서 지금 철없는 바람이 가슴을 태우고 있다는 일과,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 같아 화가 난다.

 

"이 동지"

 

명준은 거의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부르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끝내 올 것이 왔구나, 그런 생각이 퍼뜩 스친다. 명준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은, 한 방 건너 26호실에 있는 셋 중의 한 사람 김이다. 명준은 이 사나이가 싫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추근추근하고 부랑자처럼 치떠보는 눈매가 싫다. 명준은 말없이 김을 마주보면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어느새 그들을 가운데 두고 석방자들이 빙 둘러서 있다. 명준은 낯이 확 단다.

 

"이 동지, 이거 어떻게 좀 해봅시다."

 

"뭘 말이오?"

 

번연히 알면서 그런 대구를 했다.

 

"상륙 말이오."

 

"그건 이미 안 되기루 돼 있지 않소?"

 

"누가 그걸 모르나? 안 되는 걸 되게 말 들자는 것이지."

 

명준은 잠자코 있다. 둘러선 사람들 가운데서 나무라듯, 쳇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난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상륙 못하는 게 자기 탓이기나 한 것 같은, 미안한 생각이 든다. 명준은 손을 들어 이마를 짚는다. 관자놀이가 툭툭 친다.

 

사람들 가운데서 소리가 났다.

 

"여기 서서 이럴 게 아니라, 방으로 가지."

 

그 소리를 따라 뱃간으로 옮긴다. 31명이 들어서니 방 안은 빼곡하다. 안쪽으로 명준과 김이 벽에 기대서고, 바로 앞 두어 줄은 마루에 앉고, 나머지는 문 가까이까지 밀려서 둘러선다. 앉은 사람과 선 사람들의 눈알들이, 명준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빌붙는 눈초리가 아니라, 도리어 짜증스럽게 무엇인가를 윽박지르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에 앞서서 숨이 막힌다.

 

김이 입을 연다.

 

"어쨌든, 모두 상륙하고 싶다는 의견이니, 이 동지 한 번 힘써 보시우."

 

"내가 힘을 쓰고 안 쓰는 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애당초, 도중 상륙은 못 하기로 된 건데, 무라지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오?"

 

"글세 그러니까 이동지가 힘써 주셔야겠단 말이오. 상륙 안 시킨다는 건 한마디로, 사고를 낼까 싶어설 텐데, , 사고라니 어떤 사고가 있겠소? 가장 큰 일이 도망친다는 걸 텐데. 우리가 어디로 도망치겠소? 홍콩이면 중공하고 코를 맞댄 곳인데, 아 그래 우리가 여기서 도망칠 수 있단 말이오? 이 점을 잘 설득시켜서 일을 꾸려 봅시다."

 

명준은 돌러본다. 말을 해서 알아들을 얼굴들이 아니다. 그는 언젠가 한 번 이런 얼굴들이 자기를 쏘아보고 있던 것을 떠올린다. 그렇지. 로동신문사 편집실에 있던 무렵. '콜호스 기사' 때문에 자아비판을 한 날 저녁, 그를 지켜보던 편집장을 비롯 세 사람의 동료들이 꼭 이런 눈이었었지. 그때 그는 슬픈 '눈치'를 깨달으면서 무릎을 꿇었다. 지금 이들도 나한테 무릎꿇기를 들이대고 있다. 아마 그들 스스로도, 상륙시켜 달라는 소리가 영 말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러면서 나에게 그 일을 내민다. 그는 입을 연다.

 

"동지들, 같은 말이 됩니다만, 문제는 교섭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도시 교섭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이 배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우리를 상륙시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가령 무라지가 호의를 가진다 하더라도, 그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상륙하고 싶어하는 심정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작은 일을 가지고 실수를 하지 말자는 겁니다. 앞으로 우리가 더 큰 괴로움을 당했을 때, 그들의 호의가 꼭 필요할 때가 올 겁니다. 여러분, 이 사정을 알아들어 주십시오."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다. 명준은 죽 훑어본다. 어떤 눈은, 그의 눈길과 마주치자 잠시 아래로 숙여지는 것이었으나 그의 눈길이 지나면 대뜸 비웃듯 치켜진다.

 

명준은 점점 불안해진다. 탓이 자기한테 있다는 우스꽝스러운 마음이 피둥피둥 커지면서, 그것은 그의 관자놀이에서 따끔따끔한 아픔으로 나타났다. 왜 내 탓이냔 말이야. 왜 내 탓이냔 말이야.

 

그는 같이 말을 느릿느릿 자꾸만 새김질한다. 내가 돌고 있는 건가. 이 사람들. 이 친구들이 내 동진가. 하긴 같은 배를 탔다는 것뿐, 처음부터 우리에겐 뚜렷한, 함께 설 광장이 없었던 게 아니냐. 저마다 저대로의 까닭으로 이 배를 탔다. 원수도 한집안에서 사는 수가 있다는데 한배를 탔다고 그들을 무작정 내 동지로 생각해야 하는가.

 

끝내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 뚜우, 타고르호의 뱃고동이 은은히 뱃간의 벽을 울린다. 더 참을 수 없다.

 

"좋습니다. 되든 안 되든 한 번 애기해 보지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해치며, 문 쪽으로 걸음을 떼어 놓는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잠시 말이 없었다가 이내 한입 두입 투정이 터져 나온다.

 

"대체 이 동지는 우리 자리에 서서 보는 게 아니고, 감독자처럼 군단 말이야."

 

그렇게 허두를 뗀 건 김이다. 그 말에 대뜸 여럿이 어울린다.

 

"누가 아니래. 저를 누가 지휘자로 골랐나? 통역관이지."

 

"말하자면 일이 그렇더라도 한 번 부딪쳐 보는 게 우리 심정을 헤아리는 처사지, 처음부터 아니라고 잡아뗄 게 뭐냔 말이야."

 

"정치보위부원이었다지."

 

"이 사람, 그런 소린 할 얘기가 아니야. 전신이 뭐였든지 무슨 상관이야."

 

한바탕 와글거린 후 처음보다 더 무겁게 말문이 닫힌다. 다시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전등에서 비치는 불빛이, 연기가 자욱한 방 안을 어슴푸레 밝힌다. 발전기의 힘이 고르지 못한 탓으로, 불빛은 시간에 따라 밝기가 한결같지 못하다. 김은 옆에 앉은 사람과 아까부터 열심히 속닥거리고 있다. 이따금 눈이 번뜩 빛날 때, 모습이 험상궂게 일그러진다. 그는 일부러 소리를 돋우어 방안에 있는 사람에게 다 들리도록 불쑥 말한다.

 

"여자 맛 못 본 게 벌써 몇 년인가 말일세. 홍콩을 그저 지나다니, 아유."

 

뒤끝은, 사뭇 비비트는 몸짓을 섞은, 외마디다. 가라앉은 웃음이 자리를 흘러간다.

 

막 방 안으로 들어서려던 명준은, 김의 마지막 말과, 여러 사람의 훈김이 물컥한 웃음 소리를 듣는다. 그는 우뚝 서서 잠시 망설인다. 메슥메슥한 덩어리가 가슴에서 푸들거린다. 그 사람들을 탓하는 마음에서만은 아니다. 그저 메스껍다. 이 느낌 같아서는, 자기, 이명준이란 물건을 울컥 토해 버리고 싶다. 발소리를 죽이며, 다시 갑판으로 나선다. 마침 상륙하는 뱃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어깨를 친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보트에 옮아 탄 그들이 손을 흔들며 배 옆구리를 떠나는 것을 보고 되돌아선다.

 

방 안에 들어서자, 사람들 얼굴에서 흐늘거리던 웃음의 빛이 싹 걷히면서, 살기 띤 눈들이 그를 맞는다. 문간에서 더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서면서, 되도록 차분하려고 애쓴다.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대로…… 도저히…… "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문다. 아무도 되받지 않는다. 퍽 오래, 그런 대로,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기척을 깨닫고 머리를 들었을 때, 저편에 서 있던 김이 바로 앞에 와 있다.

 

"정 안 된다는 거요?"

 

눈으로, 그렇다고 한다.

 

"하긴 이 동지야 처음부터 반대니까, 애기했던들 얼마나 했겠소?"

 

명준은, 고개를 번쩍 들면서, 상대방을 노려본다.

 

"무슨 소릴 그렇게 하시오!"

 

"무슨 소리가 아니라, 사실이 안 그렇소?"

 

느글느글 이죽거린다.

 

"만일 이동지가 정말 우리 심정을 안다면, 한 번만 더 수고해 주시우. 내 그 동안에 생각했는데, 한꺼번에 말고, 두 패로 갈라서, 열 다섯 명씩 상륙시켜 달라고 합시다. 만일 선발대에서 무슨 일이 나면, 나머지는 상륙이 보류되는 건 물론이고, 뱃사람들도 상륙할 테니, 우리 한 사람에 뱃사람 한 사람씩 따르기로 하면 어떻소?"

 

"뱃사람들은 이미 상륙했어."

 

앉았던 축이 우르르 일어선다. 김은 입을 비죽거리더니,

 

", 그럴 줄 알았어. 이 동지 한 사람쯤이야 선장하구 통하는 사이니까, 쓱싹 되는 수도 있겠지. 박형, 감시나 잘 하슈. 같은 방에 있는 덕을 볼는지 누가 알겠소."

 

명준의 옆에 선 박을 쳐다본다.

 

명준은 김의 팔을 잡으면서 악을 썼다.

 

"한번 더 말해 봐!"

 

김은, 팔을 잡힌 채 뒤로 돌아다보면서,

 

", 이 양반 보시우. 사람을 칠 모양이군."

 

하더니, 다시 명준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감투가 좋다는 게, 그리 두고 하는 말이 아니오? 우리 몫까지 재미 보슈.

 

말이 끝나기 전에, 명준의 주먹이 김의 아랫배를 힘껏 쥐어박았다.

 

빈정거리면서, 그런 벼락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던 김은, 어쿠 하면서 허리를 꺾는다. 숙이는 얼굴을 후려갈긴다. 그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이번에는 뒤로 쓰러질 듯 두어 걸음 비칠대다가, 겨우 몸을 추스른다. 입술이 터져서 이빨에 피가 번진다.

 

"이 자식 봐. , 이게……"

 

김은 더 말하지 않고 대뜸, 발길로 무찔러 온다. 명준은 간신히 비키면서, 헛나가는 저쪽을 힘껏 갈겼다. 이번에도 얼굴을 맞혔다. 김은 이제 아주 독이 올라 있다. 처음 모양 얕잡는 투를 버리고, 허리를 낮추어 두 주먹을 가누면서 다가왔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넉넉한 자리를 만들어 주기나 하려는 것처럼, 바싹 벽에 붙어 선다. 부 번째 들어오는 김의 발길을 피하면서, 또 한 번 내지른 팔목을 그만 저쪽에 잡히고 말았다. 두 몸뚱이가 마룻바닥을 굴렀다. 명준은 김의 목을 잡고 있다. 확 젖히면 목줄기가 빠질 것처럼 손톱이 박히게 단단히 거머쥔 목을, 내처 죄어 갔다. 캑캑거리면서 김은 명준의 손을 뿌리치느라고 허우적거린다.

 

조금만 더 죄면 끝장이 날 것 같았다. 그때 명준의 시야에 퍼뜩 들어온 것이 있다. 그 인물이 보고 있다. 저쪽, 둘러선 사람들의 머리 너머, 브리지 쪽으로 난 문간에, 휙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순간 그의 팔에서 맥이 풀리며, 자기의 몸이 돌면서 배 위에 다른 몸의 무게를 느낀다. 김은 명준의 배를 타고 앉아서, 두손으로 목을 죄어 온다. 명준은, 차츰 흐릿해지는 눈길을 간신히 굴려 둘레를 돌아본다. 둘러선 사람들의 다리가 수풀처럼 숱하다. 그 나무들 꼭대기마다 부엉이들이 앉아서 그를 지켜보고 있다. 눈앞은 점점 흐려 온다. 안개 낀 수풀. 그 속에 빛나는 부엉이의 눈알들. 치사한 부엉이들아, 나는 너희들을 경멸한다. 경멸한다. 경멸한다.

 

눈이 떠진다. 천장이, 누르득 내려온다. 김과 싸운 일이 꿈속처럼 떠오른다.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핀다. 아무도 없다. 방문은 횅하니 열려 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잇닿은 방에서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다만, 온 배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소리가 하나로 녹아, 아득한 웅성임처럼 들렸다. 아마 방문을 여닫는 소리, 다락을 오르내리는 발소리, 밧줄이 갑판에 끌리는 소리, 짧은 구령, 키친에서 그릇을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런 것들이 한데 얽힌 소릴 테지만, 정작 한데 얼려서 웅웅대는 그 소리는,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소리는 아니었다. 이름 없는 울림이었다. 이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래 듣고 있자니, 그 울림은 자꾸 부풀어 갔다. 구르는 눈덩이처럼, 가까운 소리를 제 몸에 붙이면서 커간다. 그 커다란 덩어리에 자기 자신을 얹으려 해보았다. 그러나 야릇한 일이었다. 여느 것은 다 거둬 모으면서, 홀로 이명준이란 알맹이만은 자꾸 튕겨 버리는 것이었다. 기를 쓰면서 매달렸다.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자기 혼자라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여태까지는 늘 누군가와 함께였다. 어떤 때는 여자와, 어떤 때는 꿈과, 또는 타고르호와 같이 있었다. 살아 있음을 다짐해 볼 수 있는 누구든지, 아니면 어떤 것이 늘 있었다. 끈질기다느니 차라리 치사할 만큼 거듭 안아 보고 쓸어 본, 사람의 따뜻한 몸이기도 했다. 또 마지막으로 이 배였다. 동지들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호주머니를 들추어 담뱃갑을 찾아서 한 개비를 뽑았다. 담배는 가운데가 뚝 꺾여 있었다. 또 한 대를 꺼냈다.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씨름하는 바람에 부러진 모양이었다. 부러진 담배를 물고 성냥을 그어 댔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가 잠시 그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재떨이에 꽁초를 던지고 드러누웠다. 앞뒤를 다시 더듬어 보았다. 상륙하겠다는 생각. 안다. 지루한 포로 살이 끝에 처음 바깥에 나선 것이었다. 방에 들어서려던 참에 들려 오던 김의 말.

 

"여자 맛을 못 본게 몇 년인가."

 

정말이다.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갈보들이 드나든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어떤 사람들이 차지하는 건지 명준은 본 적이 없다. 스산한 수용소살이에서 명준은 섹스를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지은 노래를 그는 아직도 수첩 갈피에 가지고 있다. 아무 일이라도 손에 갑아 보려는 사람처럼 수첩을 펴서 읽어 본다.

 

슬리핑 백

 

남녘의 가시울타리

 

카키빛 슬리핑 백 속에

 

나는 시들어 빠진 한 송이 바나나

 

어느 날인들

 

단물이 흐르는 꽃내음 속에

 

십자별을 바라봤으랴마는

 

가난이 원수지

 

이다지 목숨의 치사스러움은

 

가난한 자는 저주가 있나니

 

꿈을 버리지 못하는 악덕

 

죽이고 뺏느라 더러워진

 

손바닥을

 

겨드랑 밑에 감추면서

 

남녘의 가시울타리

 

카키빛 슬리핑 백 속에서

 

보람 없이 시든 한 송이 바나나

 

토막난 도마뱀처럼 푸들거린다.

 

보람 없이 시든 한 송이 바나나가 도마뱀으로 바뀐 것도, 섹스 때문은 아니었다. 포로 살이를 하면서 명준은, 섹스의 벗은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살이 아니었다. 빛이 아니었다. 모양이 아니었다. 따뜻함이 아니었다. 매끄러움과 뿌듯함도 아니었다. 가파른 몸부림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붙잡으려고 하면 새고 빠져나가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아니면 짐작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었다. 수용소에서 가장 즐기는 얘깃거리도 섹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데가 아니면 못 들을 끔찍한 얘기도 많았다. 서부전선에서 싸운 어떤 포로의 이야기. 여름이었다 한다. 그 병사는 산허리를 타고 넘다가, 풀숲에 넘어진 주검을 보았다. 여자였다. 전투원 비전투원 할 것없이 싸움터에서 주검을 본 것이야 얘기도 안 되지만, 얘기는 그 주검의 모양이었다. 그녀의 사타구니에 생나뭇가지가 꽂혔다고 한다. 그 얘기를 한 병사는 미군이 한 짓이 분명하다고 했다. 얼마 전에 거기를 미군 부대가 지난 후였으니 틀림없다고 했다. 어느 편 누구의 짓인지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참말이기는 그 짓을 한 어떤 손이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덜 더함은 있을 망정, 더럽혀지지 않은 손은 없을 터였다. 어머니와 누나와 애인의 맑은 눈길을 의젓이 견딜 수 있을 만큼 깨끗한 손이 있거든, 어디 좀 보자. 그리고 그 어머니 누나 애인 들의 눈길은, 싸움터에서 돌아온 자기 아들과 동생과 애인의 두 손을 옛날 같이만 보게 아직도 깨끗할는지. 슬프고 더러운 상상. 아무리 더럽고 슬퍼도 그것은 정말일 게다. 명준은 그 병사의 얘기를 들으면서 돌이켜보았었다. 자기는 무엇이던가. 고문자. 강간자. 그러나 난 자발적인 미수자라? 닥쳐라. 너는 그쪽이 나은 걸 짐작하구 한 짓이 아니냐. 아니다. 결코 아니다. 앞뒤를 잴 겨를이 없었다. 나의 악한 북받침이 정말이었던 것처럼, 그녀를 놓아 준 것도 정말이었다. 그렇다면 어느 여름날 산허리 수풀 속에서, 사타구니에 나뭇가지를 자라나게 해야 했던 여자는, 어디서 갚음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모든 일을 셈에 넣더라도 섹스에 대한 그의 짐작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람과 짐승이 섞이는 광장. 그러나 거기서도 사람은 짐승일 수는 없다. 그 여름 수풀의 풍류객은, 다시는 그의 베티를 또는 순희를 그전처럼 깨끗한 손으로 보듬을 수는 없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힐 거다. 그렇다면 그는 짐승이 아니다. 그것이 그의 죄를 덜지도 더하지도 않지만, 거제도 바닷가를 때리는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곳에 수용소는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목까지 들이밀고 편히 눈을 뜬 슬리핑 백 속에 되살아오는 우상도 역시 이브의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드나든다는 갈보들 애기는 다른 세상 일 같았다. 사람 모양을 한 살을 안았대서 어떻게 될 외로움이 아니다. 스스로 몸을 얽어 오던 그리운 사람들의 사무치는 마음이 그리웠다. 마음이 몸이었다. 그는 꿈속의 윤애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윤애, 난 사랑했어. 방법이야 아무리 서툴렀을망정. 난 사랑했기 때문에 윤앨 버리고 도망한 거야. 나는 너를 능욕하려 했을망정, 어느 병사처럼 길가의 여자에게 꽃꽂이 익힘을 한 적은 없어.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덮치는 자식들만이 짐승이야. 그들은 아무 핑계도 댈 수 없으니까.

 

김의 마지막 말을 귓가에 담았을 때 명준을 메스껍게 한 것은 그 짐승이다. 서른 마리의 짐승이 풍기는 울컥한 냄새다. 그래서 그는 주먹을 휘둘렀다. 김의 목을 죄었다.

 

그제야 명준은 저쪽을 녹초를 만들려던 참에 나타난 그 헛것 생각이 났다. 왜 그 환각이 그런 다급한 참에 보였을까. 뻔히 환각인 줄 알면서도 막을 길이 없다. 그 환각은 밖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 움직이고, 그것이 나타날 때는 이명준의 속에는 그 환각을 틀림없는 진짜로 믿는 또 하나의 마음이 맞받아 움직인다. 그러면서 그것이 환각인줄을 뻔히 안다는 것을 그 마음도 알고 있다. 이런 묘한 움직임이, 그 헛것이 보일 때마다 마음속에서 헛갈린다.

 

쑤시는 듯한 두통을 느끼며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벌떡 일어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흠칫 놀랐다. 그것은 그를 뒤따르고 있는 그 알 수 없는 그림자의 목소리라는 환각이 드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구? 마주 서야 할 일을 이 참까지 이리저리 비켜 오다가, 더 물러설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느낌이다. 그 느낌은 아주 가까웠다. 그런 탓으로 풀이할 틈이 없다. 두통도 그 증세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여전히 숨은 채, 이번에는 목소리만 들려 온 것이다.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 같기도 한다. 그제야 비로소 전기가 나간 캄캄한 속에 있는 것을 깨닫는다. 발끝으로 더듬어 문 쪽으로 걸어간다. 복도가 끝나고, 갑판으로 나가는 문 앞에 이르니, 무장한 뱃사람이 지키고 서있다.

 

"누구냐."

 

물음에 답하는 대신 그는 내처 걸음을 옮겨 뱃사람 앞에서 멈춘다.

 

", 미스터 리"

 

낯익은 뱃사람이다.

 

"웬일이오?"

 

", 미스터 리는, 뼏은 다음이니까 모르겠군. 친구들이 선장실로 몰려가서 소동을 일으켰단 말이오. 상륙시키라구. 우리는 포로가 아니다, 라구. 덕분에 늙은 놈이 이 모양으로 창피한 꼴 아니오?"

 

그는 어깨를 추스리며, 세운 총대로 갑판을 쿵 찧었다. 그래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구나. 그는 앞뒤를 알았다.

 

"그래 지금 다들 어디 있소?"

 

"식당에 임시 감금입죠. 선장은 폭동행위라고 노발대발이오."

 

"선장은?"

 

"거기 있죠."

 

명준은 갑판으로 나서려던 걸음을 도로 복도 안으로 돌렸다. 석방자들이 쓰는 식당은 복도 끝에 있었다. 명준은 걸어가면서 뒤에 대고 한마디 했다.

 

"아무튼 미안하오."

 

"뭘입쇼, 계속 근무하겠음."

 

받들어 총을 하는 것이리라. 철컥 쿵 하고 총을 들었다 놓는 소리가 난다.

 

선장은 굽히지 않았다. 마카오로 닻을 올릴 때까지 식당 밖 나들이를 못 한다는 명령을 끝내 되물리지 않는다. 무라지도 시거만 연방 씹을 뿐 말이 없다. 석방자들은 선장과 무라지, 그리고 명준을 노려보면서 한쪽에 몰려 있다. 내일 오후에 떠난다니까, 약 스무 시간. 할 수 없는 일이다. 배에서는 누구에게든 그래야 되겠다고 보면, 선장은 경찰권을 쓸 수 있다. 게다가 더 무어라고 빌붙고 싶은 마음도 안 난다. 보람 없는 일을 해서 뭣 하랴도 싶고, 무엇보다 고단했다. 그래서 제대로 하면 의당 남았어야 할 일이었으나, 선장과 무라지가 식당을 나설 때 따라 나왔다.

 

그러는 편이 어울렸다. 선장은 아무 말 않는다. 들어서 앞뒤를 알고 있겠지. 갑판에 나서서 선장실에 이를 때까지, 세 사람 사이에 말은 없었다. 선장의 넓은 어깨를 뒤에서 바라보며 그는 두 사람을 따라간다. 명준은 선장실에 들어서다 말고,

 

"캡틴,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러면서 돌아서려고 했다. 자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던 선장은, 돌아보면서 끄덕인다. 명준은 층계를 밟았다. 거의 갑판에 내려설 즈읍 해서다.

 

"미스터 리."

 

무라지가 한 손에 시거를 빼들고 따라온다.

 

명준은 남은 계단을 마저 밟고 내려, 갑판을 디디고 돌아선다. 계단을 내려오는 무라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무자지는 멈춰 서면서 고개를 저었다.

 

"미스터 리, 상륙하고 싶은가?"

 

명준은 잠시 어리둥절한다. 곧 말뜻을 안다.

 

그는 무라지의 손을 꼭 쥐었다 놓으면서 웃는다.

 

"미안합니다만, 정말 전 상륙하고 싶지 않습니다. 캘커타에서 한잔 사십시오, 그땐."

 

돌아서서 뒷갑판으로 걸어간다. 난간에 기대어 홍콩을 건너다본다. 이젠 아주 밤이다. , , , …… 눈길이 닿는 데까지 찬란한 불빛이다. 하늘의 별빛보다 더 곱다. 사람 동네의 불빛은 더 간드러진다. 석방자들이 한때 앞뒤를 잊어버린 것도 그럴 만하다. 상륙하고 싶으냐구? 아니. 정말인가, 이명준? 정말이다. 동료들의 의리,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아니 생각하고 있다는 말은 틀린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누군가의 기척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 아까 어둠 속에서 그 인물은 말까지 했었다. 명준이 타고르호를 탔을 때, 그 인물도 같이 탔음이 분명했다. 그 인물이 누군지 알고 싶다.

 

쓸데없는 환각에서 도망치듯 다시 시가지 쪽으로 눈을 돌린다. 큰 터를 꽉 메운, 수없이 많은 불빛으로 이글거리는 항구 도시의 밤 경치는, 어쨌든 그만한 힘을 보는 듯하다. 이와 닮은 광경을 떠올린다. 여기서 훨씬 북으로 간 곳. 이 항구가 달린 땅덩어리의 북쪽 변두리. 월북한 후에 찾아가게 된 만주의 어느 벌판에서 겪은 저녁 노을.

 

창에 불이 붙었다.

 

만주 특유의 저녁 노을은 갑자기 온 누리가 우람한 불바다에 잠겼는가 싶게 숨막혔다. 명준은 내일 아침 사로 보낼 글을 쓰고 앉았다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면서 만년필을 놓고, 창으로 다가섰다. 하늘 땅이 불바다였다. 서쪽에 몰려 있는 구름은 크낙한 금누렁 유리 덩어리였다. 조선인 콜호스 사무실에 이르는 길가에 늘어선 포플러는, 거꾸로 꽂아 놓은, 훨훨 타는 빗자루였다. 그것들은 정말 훨훨 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금방 불티가 사방으로 튈 듯이 보였다. 길바닥에서 번쩍이는 것은 돌멩이일 거다. 눈이 닿는 데까지 허허하게 펼쳐진 옥수수 밭도 불바다였다. 공기마저 타고 있었다. 불의 잔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불 곁에 선 때처럼 붉은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붉은 울렁임 속에 모두 취하고 있는 듯했다.

 

타지 않기는 명준의 심장뿐이었다. 그 심장은 두근거림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남녘에 있던 시절, 어느 들판 창창한 햇볕 아래서 당한 그 신내림도, 벌써 그의 몫이기를 그친 지 오래다. 그의 심장은 시들어 빠진 배추 잎사귀처럼 금방 바서질 듯 메마르고, 푸름을 잃어버린 잿 빛 누더기였다. 심장이 들어앉아야 할 자리에, 그는, 잿빛 누더기를 담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 누더기는 회색 말고는 어떤 빛도 내지 않았다. 한 해. 두근거리며 보낸 끝에 한숨을 쉬며 주저앉은 한 해.

 

그날 인천 부두에서, 이북으로 다니는 밀수선을 터 주던 선술집 주인을, 그는 수태 고지 (受胎告知)의 천사로 알았다. 이북으로 간다. 그 생각은 난데없는 빛이었다. 윤애는 윤애더러 같이 가잘 수는 없었다. 윤애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욕정한 자리에서 그 일을 깨끗이 잊어버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분지, 아직도 낮 동안에 받아들인 열기가 후끈한 모래밭에서 그녀는 4월달 들판의 뱀처럼 꿈틀거리며 명준의 팔을 깨물었다. 그녀의 가는 팔은 끈질기게 그의 목에서 물릴 줄 몰랐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면, 명준과 그녀의 머리는 모래에 버무려져서, 수세미같이 되게 마련이었다. 호주머니를 뒤집으면 부스스 모래가 떨어졌다. 구두를 벗어 거꾸로 흔들면, 거기서도 모래가 흘렀다. 그런가 하면 이튿날, 그녀는 죽어라고 버티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의 입술을 물리쳤을 때처럼, 그녀는 한사코 명준의 가슴을 밀어 냈다. 두 허벅다리를 물리쳤을 때처럼, 그녀는 한사코 명준의 가슴을 밀어 냈다. 두 허벅다리를 굳세게 꼬고, 그 위를 두 팔로 감싸안은 그녀에게서 명준은 흠칫 물러서면서, 윤애라는 사람 대신에 뜻이 통하지 않는 억센 한 마리 짐승을 보는 것이었다. 그녀의 일그러진 입술과, 그의 팔에 박혀 오는 손톱의 아픔을 떠올리며, 사람 하나를 차지했다는 믿음 속에 취한 하룻밤을 지낸 다음, 그 마찬가지 자리에서 그녀가 보여 주는 뚜렷한 버팀은, 그를 구렁 속으로 거꾸로 처넣었다. 그 전날 밤, 그는 내기를 하기로 했다. 내일 그녀가 밀어 내지 않으면 북에 같이 가자고 빌어 보리라고. 이튿날, 그녀는 또 그의 밖에 있었다. 50킬로 남짓한 그녀 자신의 뼈와 살로 이루어진, 한 마리 이름 모를 짐승이었다. 그것은 여자란 이름의 사람이 아니었다.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짐승이었다.

 

"윤애, 윤앤 그럼 사랑하지 않는 거야? 다 거짓말이야? 사람이, 다른 한 마리의 사람을 사랑하는 데 무슨 체면이 필요해? 그게 저 많은 사람들이 걸려서 넘어진 돌부리였어. 그 어리석고 치사한 자존심 때문에 행복을 죽여 버린 거야. 이러지 말아 줘. 난 윤애가 불탈 때만 행복할 수 있어. 윤애 가슴에 있는 그 벽을 허물어 버려, 그 터부의 벽을. 그 벽을 뛰어넘는 남녀만이 참다운 인간의 뜰을 거닐 수 있어.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야. 여자는 파산했을 때를 예비해서 잔돈푼을 몰래 저금하는 거야. 그따위 부스러기 돈이 미래를 보장할 것 같애? 버려, 버리고 알몸으로 날 믿어 줘. 윤애가 날 믿으면 나는 변신할 수 있어. 무슨 일이든 하겠어. 날 구해 줘."

 

"제가 뭔데요?"

 

제가 뭔데요? 분명히 그녀와 나란히 서 있다고 생각한 광장에서 어느덧 그는 외톨박이였다. 발 끝에 닿은 그림자는 더욱 초라했다. 그녀의 저항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이면 그녀의 허벅다리는 그의 허리를 죄며 떨었으니깐. 그의 말이 미치지 못하는 어두운 골짜기에 그녀는 뿌리를 가진 듯했다. 한 번 명준의 밝은 말의 햇빛 밑에서 빛나는 웃음을 지었는가 하면 벌써 손댈 수 없는 그녀의 밀실로 도망치고 마는 것이었다. 명준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터부의 벽이었을까. 그런 일반적인 성질이라면 또 좋았다.

 

"싫어요!"

 

그녀는 내뱉듯 이러는 것이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그녀는 제가 누군지 모른다. 그녀는 제 이름을 모르는 짐승이다. 그러면서 명준이 편에서 가르쳐 줄라치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이름은 그게 아니라는 거다. 무슨 힘으로써도 꺾을 수 없는 단단한 미신. 몇만 년 내려 쌓여 온 그녀의 세포 속, 터부의 비곗살. 그걸 들어 내면 그녀는 지금의 윤애가 아닐 테고, 그대로 지니고 보면,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원시 수풀에서 퍼붓던 소나기 속에서 아담의 가슴으로 기어들던 스스럼없는 몸짓에서부터 샹들리에 아래 거짓말투성이 재담에 이르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그녀들 자신의 몸에 깔린 거짓의 비곗살. 가을 벌레처럼 짧은 한 철밖에 못 사는 개인이, 속의 그 육중한 땅 두께를 파헤치고, 삶이 알아보기 쉽던 때 사람의 화석을 찾아내기는, 제 몫만 해도 벅찬 일이었다. 사람은 저마다, 혼자, 이 일을 해내야 한다. 그 화석을 보면 그녀는 믿을까? 아니다. 그건 자기 선조가 아니었다고 우길 테지. 그럴 즈음 선술집 주인의 귀띔이 있었다. 잡은 고기를 넣어 두는 자리였던 모양으로, 비린내가 메스꺼운 갑판 및 어두운 뱃간에서, 그는 때묻지 않은 새로운 광장으로 가는 것이라고 들떴다. 그런 서슬에도 잠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광장에는 맑은 분수가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다. 꽃밭에는 싱싱한 꽃이 꿀벌들 잉잉거리는 속에서 웃고 있었다. 페이브먼트는 깨끗하고 단단했다. 여기저기 동상이 서 있었다.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름다운 처녀가 분수를 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등 뒤로 다가섰다. 돌아보는 얼굴을 보니 그녀는 그의 애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잊은 걸 깨닫고 당황해할 때 그녀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이름 같은 게 대순가요?"

 

참 이름이 무슨 쓸데람. 확실한 건, 그녀가 내 애인이라는 것뿐. 그녀는 물었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그는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얼른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왔으면 되잖아요?"

 

"그야 그렇죠. 마음 상하셨어요? 이런 말 물어서?"

 

그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이 만주의 저녁 노을처럼 핏빛으로 타면서, 나라의 팔자를 고치는 들뜸 속에 살고 있는 공화국이 아니었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코뮤니스트들이 들뜨거나 격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일이었다. 그가 처음 이 고장 됨됨이를 똑똑히 느끼기는, 넘어와서 바로 북조선 굵직한 도시를, 당이 시켜서 강연 걸음을 했을 때였다. 학교, 공장, 시민회관, 그 자리를 채운 맥빠진 얼굴들. 그저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 울림도 없었다. 혁명의 공화국에 사는 열기 띤 시민의 얼굴이 아니었다. 가락 높은 말을 쓰고 있는 자신이 점점 쑥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강연 원고만 해도 그랬다. 몇 번이나 당 선저부의 뜻을 받아 고쳤다. 마지막으로 결재가 났을 때, 그 원고는, 코뮤니스트들의 늘 하는 되풀이를 이어 붙인 죽은 글이었다. 명준이 말하고 싶어한 줄거리는, 고스란히 김이 빠져 버리고, 굳이 명준의 입을 빌려야 할 아무 까닭도 없는 말로 둔갑해 있었다.

 

"이명준 동무는 남조선에 있을 때 무얼 보고 들었소? 이 원고에는, 태백산맥에서 이승만 괴뢰 정권과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우리 영용한 빨치산 이야기도 없고, 지주 놈들에게 수탈당하는 농민의 참상도 전연 없군. , 보시오. 놈들이 내는 신문에도 이렇게 뚜렷하지 않소."

 

당 선전부장은 책상 위에 접어 놓았던 한 장의 신문을 명준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서울에서 나오는 한국신문 이즈음 치였다. 3면 상단에, 지리산 작전에 전과 다대, 크게 뽑고, 생포 20, 무기 탄약 다수 노획, 늘 보던 기사였다. 그러면서도 흘려 보던 기사였다. 명준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명준은 자기가 여태까지 얼마나 좁은 테두리에서 안간힘 했던가를 알았다.

 

로동신문본사 편집부 근무를 명령받았을 때 새로운 삶을 다짐했다. 일이 끝나고도 사의 도서실에서 늦게까지 공부했다. 볼셰비키 당사(黨史)를 일주일 걸려 읽어 냈다. 당원들이 '당사'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는, 떠받드는 울림을 그 말에 주도록 저도 모르게 애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모임에서나 당사가 외워졌다.

 

"일찍이 위대한 레닌 동무는 제×차 당대회에서 말하기를……"

 

눈앞에 일어나는 일의 본을 또박또박 '당사' 속에서 찾아내고, 그에 대한 처방 역시 그 속에서 찾아내는 것. 목사가 성경책을 펴들며 '그러면 하느님 말씀 들읍시다. 사도행전……' 그런 식이었다. 그것이 코뮤니스트들이 부르는 교양이었다. 언제나, 어떤 일에 어울리는 '당사'의 대목을, 대뜸, 바르게, 입에 올릴 수 있는 힘. 그것을, 코뮤니스트들은 교양이라 불렀다. 명준이 써오던 말들의 뜻이, 모조리 고쳐져야 했다. 새 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하지만 정작 그것이 탈인 건 아니었다. 다다이스트나 오토마티스트의 무리가 새로운 말을 만들려고 꾸미던 일이 그럴 만한 노력이었다면, 새로운 바탕에서 사람을 이끌자는 사람들이, 그에 어울리는 새 말을 만든대서, 굳이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탈인즉 만들어진 말의 됨됨이다. 다다이스트들이 그르친 것처럼, 코뮤니스트들도 그르친 것이었다면, 코뮤니스트들은 속속들이 무릿말을 만들려고 했다. 그들의 말에는 색깔의 바뀜도 없고 냄새도 없었다.

 

어느 모임에서나, 판에 박은 말과 앞뒤가 있을 뿐이었다. 신명이 아니고 신명난 흉내였다. 혁명이 아니고 혁명의 흉내였다. 홍이 아니고 홍이 난 흉내였다.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월북한 지 반년이 지난 이듬해 봄, 명준은 호랑이 굴에 스스로 걸어 들어온 저를 저주하면서, 이제 나는 무얼 해야 하나? 무쇠 티끌이 섞인 것보다 더 숨막히는 공기 속에서,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하숙집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새 장가를 들고 있었다.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중앙 선전 책임자인 그의 부친은, 모란봉 극장에 가까운 적산집에, 새 아내와 살고 있었다. 평안도 사투리가 그대로 구수한 '조선의 딸'이었다. 예 그대로인 조선 여자의 본보기, 그저 여자였다. 머릿수건을 쓰고 아버지가 벗어 놓은 양말을 헹구고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명준은 끔한 꼴을 본 듯 얼굴을 돌렸다. 꽃나무가 가꾸어진 뜰 안. 30촉 전등 아래 신문지로 덮어 놓은 밥상을 지키고 앉은 명준이 나이 또래의 의붓어머니. 그것은 지옥이었다. 명준이 그 속에서 도망해 나온, 평범이란 이름의 진구렁. 그 풍경은 맥빠진 월급쟁이 집안의 저녁 한때일망정, 반일 투사이며, 이름 있는 코뮤니스트였던 아버지의 터전일 수는 없었다. 부친의 재혼을 마다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처럼, 믿음을 위해서 젊음을 어두운 골목과 낯선 땅 벌판에서 보낸, 어느 여류 코뮤니스트와 맺어졌다면, 그런 의붓어머니에게 어리광까지도 피웠을 거다.

 

그러나 이 여자. 그를 도련님 받들 듯하는 이 조선의 딸. 도대체 어디에 혁명이 있단 말인가. 일류 코뮤니스트의 집에서, 중류 부르주아의 그것 같은 차분함이 도사리고 있는 바에야, 혁명의 싱싱한 서슬이 어디 있단 말일까. 부친은 아들을 비키듯 했다. 난봉꾼 아들을 피하는 마음 약한 아버지. 구역질이 나는 부르주아 집안의 나날이었다. 밖에 나가서 아버지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나이가, 자기 아내와 철든 아이들에게 보이는 너그러움. 그러면 아버지는 무슨 죄를 밖에서 지었다는 건가. 혁명을 판다는 죄, 그걸 스스로 모를 리 없는 아버지가 계면쩍어하는 몸가짐일 것이다. 신문사 일도 손에 잡혀 가고, 자기가 그 속에 살고 있는 공기의 이룸 새도 바닥이 드러나게쯤 된 이른 봄 어느 날 월북한 이래로 그들 부자는 처음 부딪쳤다. 명준은 터지는 마음을 그대로 쏟았다.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소비에트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나랍니까? 제가 남조선을 탈출한 건, 이런 사회로 오려던 게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버지가 못 견디게 그리웠던 것도 아닙니다. 무지한 형사의 고문이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제 나이에 아버지 없어서 못 살 건 아니잖아요? 또 제가 아무리 미워도 아버지가 여기서 활약하신다고 그들이 저를 죽이기야 했겠습니까? 저는 살고 싶었습니다. 보람 있게 청춘을 불태우고 싶었습니다. 정말 삶다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남녘에 있을 땐,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가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광장은 아무 데도 없었어요. 아니, 있긴 해도 그건 너무나 더럽고 처참한 광장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거기서 탈출하신 건 옳았습니다. 거기까지는 옳았습니다. 제가 월북해서 본 건 대체 뭡니까? 이 무거운 공기. 어디서 이 공기가 이토록 무겁게 짓눌려 나옵니까? 인민이라구요?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정권을 세운 기쁨으로 넘치는 웃음을 얼굴에 지닌 그런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바스티유를 부수던 날의 프랑스 인민처럼 셔츠를 찢어서 공화국 만세를 부르던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프랑스 혁명 해설 기사를 썼다가, 편집장에게 욕을 먹고, 직장 세포에서 자아비판을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라구, 인민의 혁명이 아니라구요. 저도 압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 었습니다. 그때 프랑스 인민들의 가슴에서 끓던 피, 그 붉은 심장의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시라구요? , 아닙니다. 아버지, 아닙니다. 그 붉은 심장의 설레임,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와 자본주의자들을 가르는 단 하나의 것입니다. 퍼센티지가 문제인 게 아닙니다. 생산지수가 문제인 게 아닙니다. 인민 경제 계획의 초과 달성이 문젠 게 아닙니다. 우리 가슴속에서 불타야 할 자랑스러운 정열, 그것만이 문젭니다. 이남에는 그런 정열이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비루한 욕망과, 탈을 쓴 권세욕과, 그리고 섹스뿐이었습니다. 서양에 가서 소위 민주주의를 배웠다는 놈들이 돌아와서는, 자기 몇 대조가 무슨 판서 무슨 참판을 지냈다는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인민의 등에 올라앉아 외국에서 맞춘 아른거리는 구둣발로 그들의 배를 걷어차고 있었습니다. 도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일본 놈들 밑에서 벼슬을 지내고 아버지 같은 애국자를 잡아 죽이던 놈들이 무슨 국장, 무슨 처장, 무슨 청장 자리에 앉아서 인민들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남조선 사회는 백귀야행(百鬼夜行)하는 도시 알 수 없는 난장판이었습니다. 청년들은, 섹스와 재즈와 그림 속의 미국 여배우의 젖가슴에서 허덕이지 않으면, 재빨리 외국인을 친지로 삼아서 외국으로 내빼고 있었습니다.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그 험한 사회의 혼탁에서 잠시 몸을 빼고, 아름다운 아내와 쪼들리지 않을 만큼 한 살림을 꾸릴 수 있는 간판과 기술을 얻기 위해서, 외국으로 간 것입니다.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실팍한 뼈대를 이루는, 약사 빠른 수재들 말입니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우리 같은 것은, 철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19세기 구라파의 찬란한 옛날 얘기책을 뒤적이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러고 있는 사람이 남조선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심장의 소유자들입니다. 젊은 사람 치고, 이상주의적인 사회 개량의 정열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남조선이라는 이상한, 참으로 이상한 풍토 속에서는 움직일 자리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뿐입니다. 저는 그런 풍토 속에서 성격적인 약점이 점점 커지더군요. 저는 새로운 풍토로 탈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월북했습니다. 어리광을 피우려는 저의 손길을, 위대한 인민공화국은 매정스레 뿌리치더군요. 편집장은 저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명준 동무는, 혼자서 공화국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당이 명령하는 대로 하면 그것이 곧 공화국을 위한 거요. 개인주의적인 정신을 버리시오'라구요. 아하, 당은 저더러는 생활하지 말라는 겁니다. 일이면 일마다 저는 느꼈습니다. 제가 주인공이 아니고 ''이 주인공이란 걸. ''만이 흥분하고 도취합니다. 우리는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한숨지을 테니, 너희들은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일찍이 위대한 레닌 동무는 말하기를 ……' '일찍이 위대한 스탈린 동무는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위대한 동무들에 의하여, 일찍이 말해져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인제 아무도 위대해질 수 없습니다. , 이 무슨 짓입니까? 도대체 어쩌다 이 꼴이 된 겁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 현실의 모든 경우에 한결같이 적용되는 단 한 가지의 처방을 내린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이란, 정확하게는, 그가 자기 시대를 분석한 그의 저술 속에서 쓴, 방법론을 가리켜야 합니다. 이론 속에 엉켜 있는 방법과 정책에 대해서는 방법론의 창시자조차도 반드시는 정확하달 수 없습니다. 하물며 계승자인 경우에는, 어느 누구도 해석권을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동무들도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었을 리가 없고 그렇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어떤 결정된 진리만을 믿은 게 아니고 진리는 더 고치는 것이 용서 안 될 만큼까지 최종적으로 결정돼서는 안된다는 태도까지 믿은 것입니다. 수많은 고결한 심장의 소유자들이, 이런 공화국을 만들려고, 중세기의 순교자들보다 더 거룩한 죽음을 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들의 피에 대한 배반입니다. 그 누군가가 위대한 선구자들의 피를 착취하고 있습니다. 저는 월북한 이래 일반 소시민이나 노동자 농민들까지도 어떤 생활 감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무관심할 뿐입니다. 그들은 굿만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끌려 다닙니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구호를 외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민이란 그들에겐 양떼들입니다. 그들은 인민의 그러한 부분만을 써먹습니다. 인민을 타락시킨 것은 그들입니다. 양들과 개들을 데리고 위대한 김일성 동무는 인민공화국의 수상이라? 하하하……."

 

그는, 배를 끌어안고, 목을 젖히며 웃었다. 그의 부친은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명준은 말하면서도 부친의 눈치를 살피면서, 맞받아 주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묵묵히 듣고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웃음에 지친 그는, 방바닥에 엎드려 소리를 죽여 울었다. 아버지가 미웠다. 아무 말도 않는 아버지가.

 

그날 밤늦게, 부친이 소리 없이 문을 열고 자기 방에 들어서는 기척에, 숨을 죽였다. 불을 끈 다음이었다. 부친은 그대로 그의 머리맡에 서 있다가 쭈그려 앉더니, 그의 어깨 언저리 이불깃을 꼭꼭 여며 주는 게 아닌가. 명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슬펐다. 아버지는 이런 사랑밖에는 내게 줄 수 없단 말인가. 이튿날, 그는 하숙을 정하고 집을 나왔다. 아버지와 자기는 이제 남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월북해서도 신문사 같은 데 있었다는 일이 좋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몸의 움직임만이 있는 곳에 가서 한 번 다짐하고 싶었다. 신문 활자를 세고 앉은 사무실에서 안간힘을 한 게 잘못이 아니었던가 생각했다.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지도 않은 게 실정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서였다. 마침 야외극장 짓는 일에 각 직장 기관에서 의용 봉사원이 번갈아 나가고 있었다. 그는 거기를 자원해서 날마다 나갔다.

 

어느 날 그는, 놀이터 지붕 한 모서리를 쌓아 올리는 발판 위에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했다. 아직도 날씨는 쌀쌀한 이른 봄이었다. 먼 데 가까운 데, 산과 들에도, 봄소식이라고 할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구름이 둥둥 뜬 하늘은 별수없이 철을 말하고 있었다. 뚜우 하고 한낮을 알리는 고동이 울렸다. 어디서 오는 열찬지, 줄줄이 꼬리를 물고 벌판을 기어드는 모습에도 아늑한 맛이 풍기는 듯했다. 아마, 활짝 갠 하늘에 가득한 햇빛 때문이었으리라. 북녘에서 처음으로 맞은 평양의 봄이었다. 좋은 철이 곧 올 터이었다. 좋은 철. 오래 잊었던 일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아뜩하는 참에 발을 헛디디면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병원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은 참기 어렵게 지루했다. 팔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느나, 오른쪽 허벅 뼈에 금이 갔다. 한 달은 누워서 지내야 할 판이었다. 부친이 사흘에 한 번씩은 찾아왔다. 가끔은 계모가 음식을 가지고 올 때면, 그녀가 돌아갈 때까지 꼭 벌을 서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의 모든 시간을, 눈을 번히 뜨고 공상하는 것밖에, 할 일이라곤 없었다. 어찌 생각하면 다 귀찮은 터에, 좋은 피난처일지도 몰랐다. 윤애. 오래 잊었던 그녀의 생각을 무시로 하는 요즘이었다. 그러고 보니 월북하고 나서 그녀의 일이 떠오르기는 처음이었다. 이제는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보고 싶었다. 모로 돌아누우면서 배개에 얼굴을 묻었다.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서는 기척에,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윤애가 아닌가 했던 것이다. 윤애가 아니었다. 얼핏 보매 그렇게 비친 것이었다. 볼수록 닮은 데가 없었다. 모두 다섯. 여자뿐인 그들은 손에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따라온 간호부장이 그들을 알렸다.

 

"국립극장에 계시는 여성동무들이 위문을 나오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의 옷이며 머리 모양이 화려한 데가 있었다. 배우들인가? 음악가? 명준은 동그스름한 바탕에 눈이 기름한 얼굴을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이 병실은 남향인 탓으로, 병원 정문을 바로 눈 아래로 볼 수 있었다. 그녀들도 그리로 들어왔을 텐데, 그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간호부장은, 야외극장에 자진 동원되었다가 다친 환자라고 명준을 알렸다.

 

"참 동무들, 이 환자한테는 특별한 위문이 있어야겠는데요. 극장이 서면 동무들이 나올 곳이니깐요.

 

그걸 짓다 다치셨단 말입니다."

 

맨 앞에 선 그녀는 명준의 머리맡에 서 있다.

 

그녀는 한패를 돌아다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 특별한 위문이 어떤 게 있을까?"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꽃을 다른 병실보다 두 갑절 나눠 드리면……"

 

다른 여자가 이렇게 받았다.

 

명준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런 위문으로는 안 되겠습니다."

 

그녀들은 서로 휘둥그런 눈을 마주 쳐다보더니, 캬들캬들 웃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그녀는 침대살을 붙잡고, 한참 실랑이하듯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쓰다가, 명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요? 환자동무의 소원을 들어 줘야지요."

 

"기념 촬영을 하고 싶습니다."

 

그녀들 사이에는 탄성 비슷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돌아서서 저희들끼리 소곤소곤 의논을 하더니, 그녀가 혼자 이리로 와서 아까처럼 침대살을 한 손으로 붙들고, 말했다.

 

"지금 일어나실 수 있어요?"

 

간호부장이 먼저 대꾸했다.

 

"네트(아니), 아직 일주일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일주일 후에 저희들이 찍을 마련을 해 가지고 이리 오기루."

 

명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도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 입을 묘하게 다물고, 안고 있던 꽃묶음 속에서 몇 줄기 뽑아, 침대머리에 놓인 책상 꽃병에 꽂았다.

 

방문이 닫히자, 복도에서 그녀들이 마음놓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명준도 웃었다. 흐뭇하다. 꽃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울꽃이었다. 푸른 줄기에 조롱조롱 매달린 흰 꽃송이는 놀랍게도 싱싱했다. 후우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뛰는 듯한 게 계면쩍었다. 바로 누우면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둥근 얼굴. 가름한 눈매가 똑똑히 보였다. 배우? 가수? 혹은. 사무치는 무엇이 싸 가슴을 죄었다. 고독하니깐, 고독하니깐 나는 발판에서 떨어지고, 여기 누워 있고, 생뚱한 사람더러 사진을 찍자고 한 거야. 영미의 오빠 태식이와 주고받던 농담이 지금 떠오르는 것이었다. 바짝 메마른 마음에 지금 생각하면 철없이 지껄이던 때 간지럽도록 먹혀들던 그 우스개가, 버들가지 움트듯 부드러운 느낌을 살며시 풍겨 주었다.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제기랄 이렇게 꼬치꼬치 마르면서 살아야 할 법도 없잖아? 그는 심술궂은 핀잔을 칼 던지듯 하던 편집장을 잊으려 했다. 자기를 돌리는 듯한 편집실의 낌새를 잊으려 했다. 모를 일이었다. 그보다 더 게으르고 얼렁뚱땅하는 다른 사원은, 그 까다로운 편집장동무와 제법 사이 좋게 지내고 있었다. 자기 경우는 사상적인 일뿐만 아니라, 성격에서 오는 손해도 보는 것이리라 싶었다. 이런 사회에도 그 놀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던가. 대인관계에서 순전히 공적인 관계가 없는 성격 같은 것이 아직도 그 사람의 사회적 생활을 쉽게도 만들고 어렵게도 만드는 것이라면, 거기도 또한 북조선 사회의 반혁명성이 있었다. 혁명과 인민의 탈을 쓴 여전한 부르주아 사회. 스노브(속물)들이 활보. 자기 머리로 생각하려 들지 않는 당원들. 부르주아 사회의 월급쟁이 마음보와 다를 데 없었다. 다르다면 허울뿐.

 

문이 삐걱 열리더니 안경을 낀 간호부장이 얼굴만 기웃한다.

 

"이명준 동무 수지 맞췄어……"

 

흘겨보듯이 한 다음, 문을 탕 닫았다. 여럿이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그렇게 알게 된 그녀 은혜(恩惠), 국립극장 소속 발레리나였다. 평양에서 가장 큰 무용단체는 최승희가 거느리는 연구소고, 은혜가 있는 발레 단은 국립극장 전속으로, 고전에서 출발한 최와 달리, 소련에서 돌아온 발레 전공의 안나 김이란 여자가 단장이었다. 단원들은 그녀를 김동무라고도 부르고 그저 안나라고도 불렀다. 그녀는 퍽 은혜를 귀여워하는 듯하여, 우리 마샤라고 부르면서, 극장으로 찾아가도 곧 만나게 해주곤 했다.

 

명준은 창에서 떨어져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들쳤다. 작은 수첩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그때 찍은 사진이었다. 붉은 저녁 노을 속에서 사진은 그림엽서의 화려함을 지니는 것이었다. 사진을 도로 수첩 갈피에 넣은 다음, 다시 펜을 들었으나 얼른 내키지 않았다.

 

남만주 R현에 자리잡은 '조선인 콜호스', 중국 측이 쌀 증산을 위해서, 만주에 흩어진 조선인들을 좋은 조건으로 모아들인 집단농장이었다. 콜호스라고 하나, 잡곡 짓기에 기계력을 실험적으로 쓴다는 것뿐, 쌀 농사는 집집마다 나누어 받은 땅에서 내려오는 식대로 짓고, 농민조합을 꾸려 감으로써 한 울타리 살림을 이루고 있는 형편이었다. 물론 농작물을 제 마음대로 팔지는 못한다. 그는, 이 콜호스의 나날을 알리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 보내진 것이었다.

 

먼저 돈 안 드는 걸음을 할 수 있는 게 좋았다. 남만철도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는 거푸 어린애처럼 소리를 질렀다. 연길에 살던 어릴 적에, 봉천까지 가는 동안에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에 떨어지던 해를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으나, 다시 보는 눈에도 기막혔다. 가도가도 벌판이었다. 이 엄청난 땅덩어리가 옛날에는 동양척식회사의 차지였다고 한다. 이 땅이 주인에게 돌아간 건 좋은 일이었다. 그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북조선 농민들의 경우, 토지개혁을 좋아하는 층은 열에 다섯쯤이었다. 그는 처음에 놀랐다. 땅을 그저 얻은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다니? 그 까닭을 곧 알았다. 농토는 팔고 살 수 없게 돼 있었다. 농토는 나라 땅이었다. 그들은 지주영감의 소작인에서 나라의 소작인으로 옮아간 것뿐이었다. 그가 보기에 소시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농토는 나라 땅이었다. 그들 소시민은 아무리 벌어야 이제 '부자'가 될 가망은 없었다. 나라가 그것을 못 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시장에는 아직도 일본 때 옷이며 그릇가지가 없지 못할 상품이었다. 소비조합에 나도는 살림은, 모자라기도 하거니와 허술한 물건뿐이었다. 노동자들은 보수보다도 보수의 약속에 지쳤고, 인민 경제 계획의 초과 달성이라는 이름으로, 공짜 일을 마지못해 하고 있었다. 인민공화국이 잘 되고 있다는 소문은 요란했으나 정작 자기 둘레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개인적인 '욕망'이 터부로 되어 있는 고장. 북조선 사회에 무겁게 덮인 공기는 바로 이 터부의 구름이 시키는 노릇이었다. 인민이 주인이라고 멍에를 씌우고, 주인이 제 일 하는 데 몸을 아끼느냐고 채찍질하면, 팔자가 기박하다 못해 주인까지 돼버린 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걸음을 떼어 놓는다. '일 등을 해도 상품은 없다'는 데야 누가 뛰려고 할까? 당이 뛰라고 하니까 뛰긴 해도 그저 그만하게 뛰는 체하는 것뿐이었다. 사람이 살다가 으뜸 그럴듯하게 그려 낸 꿈이, 어쩌다 이런 도깨비놀음이 됐는지 아직도, 아무도 갈피를 잡지 못해서, 행여 내일 아침이면 이 멍에가 도깨비방망이로 둔갑할까 기다리면서. 광장에는 꼭두각시뿐 사람은 없었다. 사람인 줄 알고 말을 건네려고 가까이 가면, 깎아 놓은 장승이었다. 그는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러다 운이 좋아 은혜를 만났다. 명준이 스스로 사람임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녀를 안을 때뿐이었다.

 

그는 만년필을 손에 낀 채, 두 팔을 벌려서 책상 위에 둥글게 원을 만들어, 손끝을 맞잡아 봤다. 두 팔이 만든 둥근 공간. 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메워질 그 공간이, 마침내 그가 이른 마지막 광장인 듯했다. 진리의 뜰은 이렇게 좁은 것인가? 명준은 팔로 테두리진 그 공간 속에서 떨던 은혜의 몸을 그려 봤다. 허전한 두 팔이 만들어 낸 공간이 뿌듯이 부피를 가져오는 듯했다. 그녀의 살이 그 공간을 채워 오는 것이었다. 가슴, 허리, 무릎. 그녀의 몸은, 책상을 아랫도리로 뚫고, 윗도리는 책상 위로 솟아, 거기 그녀의 얼굴이 명준의 눈앞에 있었다. 그는 불러 낸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나 그의 이마는 기댈 데 없이 미끄러지며, 그 자신의 맞잡은 손길 위에 힘없이 떨어졌다.

 

만주에 갔다가 돌아온 지 일주일 되는 토요일, 뉘엿뉘엿 해 떨어질 무렵, 이명준은 구겨진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사의 정문을 나섰다. 집에서 기다리기로 한 그녀가 지쳐서 돌아가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됐다. 그는 시계를 봤다. 한 시간 이미 늦어 있었다. 집까지 또 30. 아무 탈 없이 지낸 하루였다.

 

모두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편집장이 말했다.

 

"오늘 자아비판회가 있으니 당원 동무들과 이명준 동무는 남으시오."

 

명준은 자기가 과녁인 줄 알아차렸다. 그는 후보 당원이었으나, 중요한 직장 세포 모임에는 자리가 주어져 있지 않았다. 자기를 남으랄 때는 자기가 이 도령임에 틀림없었다. 편집실 근무 사원 중 당원은 편집장까지 세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임이 시작됐을 때, 사람은 넷이었다. 새로 편집실에 온 젊은 사람이 당원이란 걸 그는 모르고 있었다.

 

사원들이 돌아가고 난 널찍한 편집실에는, 명준까지 쳐서 다섯 사람이 남아 있었다. 편집장은 그대로 앉고, 다른 사람들은 좌우로 두 사람씩, 편집장 책상 바로 앞 책상으로 다가앉았다. 편집장이 일어서서 말을 꺼냈다.

 

"자아비판을 할, 이명준 동무에 대한 보고를 하겠습니다. 이명준 동무는, 평소에 개인주의적이며 소부르주아적인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당과 정부가 요구하는 바 과업 달성에 있어서 과오를 범했습니다. 동북 중국에 있는 '조선인 콜호스'의 생활을 현지 보도함에 있어서 이명준 동부는, 그 소부르주아적인 판단의 낙후성으로 말미암아, 현지 동포들의 영웅적인 증산 투쟁의 모습을 여실히 파악하는데 실패 있으며, 주관적 판단을 기초로 한 그릇된 보고를 보내 왔습니다. 일찍이 위대한 레닌 동무는 말하기를 '사회제도는 일조일석에 변할지라도 인간의 이데올로기는 일조일석에 변하지 않는다'고 한 것처럼, 이명준 동무는, 그가 남조선 괴뢰 정부 밑에서 썩어빠진 부르주아 철학을 공부하던 실절의 반동적인 생활 감정에서 자신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명준 동무가 그와 같은 반동적 사고방식을 마치 정당한 것이기나 한 것처럼 반성하려 하지 않는 것은, 후보 당원으로서 당과 정부에 대한 중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과 정부 및 전체 인민의 이름으로, 냉정한 자아비판을 요구합니다. 다음에 이명준 동무의 기사 내용 가운데서, 과오를 범한 부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는 현지 콜호스의 생활을 보고하는 가운데 '……그들의 어떤 사람이 입고 있는 의류를 보았을 때 기자는 문득 놀랐다. 그것은 일제 군대의 군복에서 견장만 뗀 것이었다. 운운' '신발은 지카다비(작업화)가 제일 많았다. 운운'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생활이 물질적인 향상을 가져오려면 더 많은 땀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운운' 하는 대목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중대한 과오 입입니다. 다음에 이명준 동무의 자아비판이 있겠습니다."

 

명준은 일어서서 편집장이 비워 준 단 위에 올라섰다. 여덟 개의 눈이 그를 차갑게 지켜보고 있었다.

 

"편집장동무의 보고에 대하여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자리가 술렁거렸다. 편집장이 물었다.

 

"왜 동의할 수 없습니까?"

 

"저는 본 대로 옮긴 것뿐입니다."

 

"그들 가운데 일제 군복을 고쳐서 입은 동무가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일제가 달아날 때 병영에서 주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카다비는 인민공화국에서도 비슷한 제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혹시 잘못 본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앞이 두 쪽으로 갈라진 왜놈들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그렇다면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보도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리얼리즘은 사실을 사실대로 옮기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동무의 위험한 반동적 사상입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인민의 적개심과 근로의 의욕을 앙양시키고 고무시키는 방향으로 취사 선택이 가해져야 합니다. 무책임한 사실의 나열을 일삼는 자본주의 신문의 생리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왜 그것이 버려져야 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인민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군복을 과도기에 입고 있다는 사실을 옮기면, 왜 인민을 모욕하는 것입니까?"

 

"동무, 작년도에, 위대한 중국 인민은, 인민 경제 계획을 초과 완수했습니다. 의류나 일상 생활 필수품은, 전 중국 인민이 입고도 남을만큼 생산했다는 말입니다. 아마 그들은, 노동을 하는 데 입기 위해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버리고 간 물건을 한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한가지 사실을 가지고, 이미 인민이 쟁취한, 풍족한 물질 생산 수준에 대해서 회의적인 보도를 하는 것은, 동무 자신의 가슴과 머리 깊이 박혀 있는 소부르주아적인 인텔리 근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체 인민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며, 빛나는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이 역사적인 마당에, 이명준 동무는 전혀 자신의 주관적 상상에 기인하는 판단으로 트집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금년 봄 중국 공산당 연차 대회에서, 모택동 동무가 보고한 경제 계획 보고 요지가 당원을 위한 교양 자료로서 배포되었으므로, 만일 이명준 동무가 그 팸플릿에 명확히 기재된 프로센토(퍼센트)로 나타난 통계를 연구했다면, 그런 과오는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명준은, 대들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숨을 죽였다. 그를 향하고 있는 네 개의 얼굴. 그것은 네 개의 증오였다. 잘잘못간에 한 번 윗사람이 말을 냈으면, 무릎 꿇고 머리 숙이기를 윽박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짜증 끝에 성낸, 미움에 일그러진 사디스트의 얼굴이었다. 명준은 문득 제가 가져야 할 몸가짐을 알았다. 빌자, 덮어놓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그의 생각은 옳았다. 모임은 거기서 10분만에 끝났다. 명준은 사무친 낯빛을 하고, 장황한 인용을 해가며, 허물을 씻고 당과 정부가 바라는 일꾼이 될 것을 다짐했다. 지친 안도감과 승리의 빛으로 바뀌어 가는 네 사람 선배 당원의 낯빛이 나타내는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명준은, 어떤 그럴 수 없이 값진 '요령'을 깨달은 것을 알았다. 슬픈 깨달음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슬기였다. 그는 가슴에서 울리는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옛날 그는 S서 뒷동산에서 퉁퉁 부어오른 입 언저리를 혓바닥으로 핥으면서 이 소리를 들었다. 그의 마음의 방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이번 것은 더 큰 울림이었다. 그러나 먼 소리였다. 무디게 울리는 소리. 광장에서 동상이 넘어지는 소리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 엎드려서 울고 싶었으나, 울기 위해서는 그는 네 개의 벽이 아직도 성한 그의 방으로 가야 했다. 아니 그의 마음의 방이 아니다. 마음의 방은 벌써 무너진 지 오랬으므로. 그의 둥글게 안으로 굽힌 두 팔 넓이의 광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혼자서 운다는 일은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젓한 몸가짐이었다.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사람은 우상 앞에서만 운다. 멍석 없이는 못 하는 지랄도 있던 것이다. 이제 명준에게 남은 우상은, 부드러운 가슴과 젖은 입술을 가진 인간의 마지막 우상이었다. 오늘 일로하여 그는 절박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전혀 다른 짐작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짐작에서 차지할 그녀의 자리는 높은 곳 한가운데 있었다. 집이 가까운 골목에 이르렀을 때는, 이명준은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문을 열자 그녀의 얼굴이 후딱 들렸다.

 

"갈까 하던 참이었어요. 인제 열 셀 동안 오시잖으면 가려고."

 

명준은, 바바리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채,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심심한 걸 메우느라고 명준의 책상에 얹힌 걸 뒤적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전. 명준은 그녀의 손에서 책을 받았다. 등을 잡고 타르르 책갈피를 넘겼다.

 

헌책가게에 있는 것을 보고 사오는 날로 끝까지 잃어 버린 책이다.

 

"재미있어?"

 

"그닥……"

 

"앉지."

 

그제야 명준은 바바리코트를 벗어서 벽에 걸고, 자기가 먼저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명준의 낌새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챘는지, 아무 소리도 없이 따라 앉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가슴이 비었다. 뱃속도 비었다. 시장기가 심할 때, 가슴과 배가 쓰리고 허할 때 같았다. 그러면서 먹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당장에는 단 한 술을 뜰 것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 가슴에서 배쪽으로 뻗치는 빈 기운이 있었다. 몸 속에 있던 내장들이 깡그리 비어 버리고, 그처럼 휑뎅그런 몸뚱어리 속을 바람이 불고 지난다. 감았던 눈을 번쩍 떴을 때, 수그린 이마 바로 앞에, 그녀의 비슴듬히 옆으로 뻗친 두 다리가 있었다. 아직도 해가 있어서 불을 켜지 않은 방안에는, 땅거미 질 무렵의 은근한 붉은 기운이 알릴락말락 녹아 있었다. 양말을 신지 않은, 맵시 있게 살이 붙은 두 다리는, 문득 생생했다. 명준은 가슴이 꽉 막혔다. 보고 있으면 볼수록, 그 기름한 살빛 물체는 나서 처음 보는 듯이 새로웠다. 곤색 스커트 무르팍에서부터 내민 다리는, 뚝 꿇어져서 조용히 놓인 토르소였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명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리라. 팔 수만 있다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진리의 벽을 더듬은 듯이 느꼈다. 그는 손을 뻗쳐 다리를 만져 보았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진리다. 이 매끄러운 닿음세. 따듯함. 사랑스러운 튕김. 이것을 아니랄 수 있나. 모든 광장이 빈터로 돌아가도 이 벽만은 남는다. 이 벽에 기대어 사람은, 새로운 해가 솟는 아침까지 풋잠을 잘 수 있다. 이 살아 있는 두 개의 기둥.

 

몸의 길은 몸이 안다. 그녀는 예사로운 애무로 아는 모양인지 하는 대로 보고만 있다.

 

"은혜."

 

"."

 

고즈넉이 네 하는 이 짐승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밖에서 졌기 때문에, 은혜에게 이처럼 매달리는 걸까. 이긴 시간에도 남자가 이토록 사무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 없을 테지. 졌을 때만 돌아와서 기대는 곳. 기대서 우는 곳. 철학을 믿었을 때, 그녀들에게 등한했었다. 사회 개조의 역사 속에 새로운 삶의 보람을 걸어 보려던 월북 직후의 나날, 윤애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무엇이 남았나? 나에게 남은 진리는 은혜의 몸뚱어리뿐. 길은 가까운 데 있다?

 

명준은 거칠게 그녀를 꺼안았다. 그의 품속에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늘 그랬다. 이 여자가, 인민을 위한 '예술 일꾼'이며, 인류의 역사를 뜯어고치는 거창한 대열에 발맞춰 나가는 '여성 투사'? 좋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은혜다. 내 거다. 그 밖에 그녀가 되고 싶어하는 여러 것일 수 있다. 그는 그녀의 뼘에 자기의 그것을 비볐다. 도톰한 입술을 깨물어 열고 부드러운 혀를 씹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방 안은 어두웠다. 그는 한 팔로 그녀를 받쳐 안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만져 본다. 목을 더듬었다. 가슴과 허리를 짚어 내러갔다. 벅찬 깨달음을 준 다리를 쓸었다. 몸의 마디마디 그 자리를 틀림없이 알고 싶었다. 움직일 수 없이 자기에게 기대는 따뜻한 벽을 손으로 어루만져, 벽돌 하나 하나를 다짐해 보고 싶었다. 손이 떨어지면 그것들은 자기한테서 떠날 것만 같았다. 순례자가 일생에 몇 번이고 성지를 찾아 의심을 죽이고 믿음을 다짐하듯이, 손에 닿고 만져지는 참에만 진리는 미더웠다. 남자가 정말 믿을 수 있는 진리는, 한 여자의 몸뚱어리가 차지하는 부피쯤에 있는 것인가. 모든 우상은 보이지 않는 걸 믿지 못하는 사람의 약함 때문에 태어난 것. 보이지 않는 것은 나도 믿지 못해.

 

"은혜, 나를 믿어?"

 

"믿어요."

 

"내가 반동분자라두?"

 

"할 수 없어요."

 

"당과 인민을 파는 공화국의 적이라두?"

 

"그럼 어떡해요?"

 

"은혜의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와?"

 

"모르겠어요."

 

사랑의 말에서는, 남자가 얼간이고 여자가 재치 있게 마련이었다. 남자가 고지식하고 여자가 교활하다는 말일까. 남자는 따지고 여자는 믿는다는 까닭에서일까. 명준은 윤애를 자기 가슴에 안고 있으면서도, 문득문득 남을 느껐었었다. 은혜는 윤애가 보여 주던 순결 콤플렉스는 없었다. 순순히 저를 비우고 명준을 끌어들여 고스란히 탈 줄 알았다. 그런 시간이 끝나면 그녀는 명준의 머리카락을 애무했다. 가슴과 머리카락을 더듬어 오는 손길에서 그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와 아들, 아득한 옛적부터의 사람끼리의 몸짓. 그녀는 생각난 듯이 말했다.

 

", , 모스크바로 가게 될는지 모르겠어요."

 

"모스크바?"

 

명준은 어리벙벙했다.

 

", 지금 당장이 아니구 명년 봄쯤."

 

"좀 자세히 얘기해."

 

"모스크바에서 예술제가 있어요. 소비에트의 각 공화국과 동구라파와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구 우리. 모두 나오는 거예요. 무용 쪽에서는 최승희 연구소에서 많이 나갈 거라는 얘길 들었지만, 나라를 통틀어 대표하게끔 파견단을 만들 테니깐, 국립극장 쪽에서도 얼마쯤 나갈건 확실해요. 게다가 안나 동무는 소련 출신 아니에요.? 길잡이 삼아 꼭 낄 테구, 그리 되면 우리두 한몫 낄 수밖에 없잖아요? 안나 동무는 그 일로, 오늘도 소련 대사관으로 갔는데, 제가 나올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명준은 번듯이 드러누웠다. 모스크바. 은혜가 모스크바로 가? 안된다. 그녀가 모스크바로 가면 다시는 그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 까닭도 없이, 그런 느낌이 불쑥 떠올랐다.

 

"얼마나 걸릴까?"

 

"뭐가요? 떠나기까지가?"

 

"아니, 거기서 머무는 사이가 말야."

 

"한 서너 너덧 달?"

 

명준은 벌떡 일어났다.

 

"아니, 뭐가 그리 오래 걸려?"

 

"예술제가 그렇게 걸리는 게 아니구요, 끝난 다음에,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한바퀴 돌 모양이던데요. 앞서도 그랬어요. 아무튼 잘은 아무도 모르고 그럴 거라는 제 짐작이에요."

 

"예술제는 확실하지."

 

"확실해요. 문화선전성에 통첩이 왔다니까요."

 

명준은 또 잠잠했다. 은혜는 조금 들뜬 말투로 이었다.

 

"기쁘지 않아요?"

 

"아니."

 

"어느 쪽이에요? 아니라면 알 수 있어요?"

 

"기쁘지 않다는 쪽이야."

 

"어머나!"

 

그녀는 놀라서 명준을 쳐다보았다.

 

"은혜, 가지 말아 줄 수 없어?"

 

대답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까닭을 찾아낼 모양인지, 깜박거리지도 않고 이쪽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한참 만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왜요?"

 

"석 달이나 은혜를 떨어져 살 수 없어."

 

그녀는 활짝 웃었다.

 

"어린애 같으셔."

 

"난 어린애야. 당원도 아니고 인민의 일꾼도 아니야. 은혜에게 어린애 노릇 하는 바보, 그게 나야."

 

"왜 자꾸 당과 인민을 끌어 대세요? 당이 사랑하지 말라는가요?"

 

"그건 게 아니구, 당보다두 나한텐 은혜가 중하다는 거야."

 

"어머나, 그건 정말 부르주아적인 사상이신데"

 

"그럼 은혜는, 내가 당을 위해서는 은혜를 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라나?"

 

"굳이 한쪽을 버릴 건 없잖아요?"

 

"버린다면?"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지금 생각해."

 

"?"

 

그녀는 아직도, 명준의 말에서 어느 만큼 한 정말과 사랑의 농담을 갈라 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어. 은혜, 모스크바엔 가지 말어."

 

"글쎄 왜 그러세요? 덮어놓고 가지 말라면그리고 제 맘대로, 가구 안 가구 할 수도 없어요."

 

"맘만 그렇게 잡으면야, 무슨 핑계로든 안 갈 수 있지 않아?"

 

그녀는 내놓고 언짢아 보인다.

 

"난 내 맘을 어떻게 옮겼으면 좋을지 모르겠어. 허지만, 은혜가 모스크바로 가면, 우린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같이만 생각돼. 억지 얘긴 줄 알아. 한 번만 억지를 받아 줘."

 

"은혜가 가서는 안 된다는 다른 까닭이 있는 게 아냐. 석 달이나 넉 달 갈라져 있는 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닐 테지. 허지만, 지금 내 심정으로선, 단 한 달도 갈라져 살 수 없어. , 아까 얘기한 대루, 이번에 은혜가 가면, 다시는 내 품에 올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있어. 제발."

 

명준은 오랜 옛날 이런 식으로 빌붙던 걸 생각했다. 그렇지. 인천 변두리, 갈매기가 날고 있는 바다로 트인 분지에서, 윤애의 알 수 없는 변덕을 버려 달라고 빌던 자기 말투. 알몸으로 자기를 믿어 달라고 빌던 말투였다. 윤애는 끝내 그녀의 벽을 허물지 않았다. 못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명준이 월북을 해낸 데는, 그녀가 안겨 준 노여움과 서운함이 그 대목에서 미치고 있었던 것만은 가리울 수 없다.

 

여자들이란, 곧잘 미신을 섬기면서, 정작 미신일 수밖에 없는 일 앞에서는, 오히려 망설이는 것은 어찌 된 노릇일까. 은혜를 모스크바로 보내면 자기는 그만 이라 싶었다. 이렇게 되고 보면 더욱 그랬다.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도, 한 번 말이 되어 나와 버리면 허물어 버릴 수 없는 담을 쌓고 만다. 지금이 그랬다.

 

"은혜, 아무 말도 묻지 말고 내 말 대루 해줘. 사랑을 위해서, 중요한 일을 농담 삼아 깔아 버리는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도 좋아. 나를 사랑한다는 걸 보여 줘.

 

", 가지 않을 테에요."

 

흑 하면서 그녀는 두 손으로 낯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고 있자니, 마냥 흘러내린다. 명준은, 그녀 앞으로 다가가 앉아서, 낯을 가린 손목을 치웠다. 손목을 잡힌 채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 하고 느끼는 그녀를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받아 줄 사람이, 그녀 말고는 누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그를 목메게 했다.

 

그녀가 돌아간 후,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오랫동안 우두커니 창 밖을 내다보았다. 마른 나뭇잎이 창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메마른 삶. 이제, 오래지 않아, 그 소리도 들리지 않을 테지. 혼자 사는 살림에는 겨우살이래야 걱정할 것은 없었다. 다만, 길어지는 밤을 생각으로 새워야 할 일이 괴로웠다. 월북하고부터 그의 시간은 달음박질 하듯 지나 온 느낌이었다. 서울 살 때는 그리도 느리던 시간의 걸음이. 아니 그때는 시간이 없었다. 있지 않았다. 적어도 나한테는. 생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다. 적어도 그는 지금 밥과 옷을 제손으로 번다. 그런데 밥과 옷을 제 손으로 번다는 게 생활이란 말의 뜻일까? 갖은 화려한 공상과 괴로운 생활의 골짜기를 거쳐 이른다는 데가 밥과 옷인가. 그런 모양이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버느냐를 가지고 다투어 오는 게 아닌가? 편집장 말이 생각난다. '동무는 오해하고 있는 듯해. 공화국을 동무가 도맡아 보살펴야 한다는 그런 생각, 그건 잘못입니다. 동무는 맡은 바 자리에서 당이 요구하는 과업을 치르면 그만입니다. 영웅주의적인 감정을 당은 바라지 않습니다. 강철과 같이 철저한 실천자가 아쉬운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저 뒤얽힌 산업 질서의 개미굴 속에서, 나날이 사람스런 부드러움을 잃어 가는 사람들과 꼭 같이 되라는 소리였다.

 

여기도 기를 꽂을 빈터는 없었다. 위대한 것들은 깡그리 일찍이 말해진 후였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보다. 어김없이 움직이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북조선에는 혁명이 없었던 탓일 것 같았다. 인민 정권에서는 인민의 망치와 낫이 피로 물들여지며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전세계 약소 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한 벗'인 붉은 군대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바스티유의 노여움과 기쁨도 없고, 동궁(冬宮) 습격이 아슬아슬함도 없다. 길로틴에서 흐르던 피를 본 조선 인민은 없으며, 동상과 조각을 망치로 부수며, 대리석 계단으로 몰려 올라가서, 황제의 안방에 불을 지르던 횃불을 들어 본 조선 인민은 없다. 그들은 혁명의 풍문만 들었을 뿐이다. 30년전에 흥분이 있었다는 풍문을 듣고 흥분할 수 있다면 그는 감정의 천재다. 1789년에 있었던 흥분의 얘기를 듣고 흥분할 수 있다면 그는 천재다. 하물며 남의 나라의. 세계는 하나라? 그건 그 흥분이 있었던 다음부터의 애기다. 북조선 인민에게는 주체적인 혁명 체험이 없었다는 데 비극이 있었다. 공문으로 명령된 혁명, 위에서 아래로, 그건 혁명이 아니다. 그 공문을 보낸 사람이 '전세계 약소 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훤한 벗'이라도 그렇다는 일은, 이 사상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에게는 좀체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서운 일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인이 성경을 두고, 비록 그것이 신이 보낸 말이라도 ''이 보낸 말이고 보면 자기를 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껏 지내 온 바를 가지고 생각한다면, 하느님은 어쨌건, '전세계 약소 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한 벗'''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대신 살 수 없는 것처럼, 혁명도 공문으로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공문 혁명이 주어진 조건이었다면, 그런 조건에 어울리는 행동의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한테 맡겨진 혁명일 것이다. 북조선의 공산주의자의 혁명가로서의 품위는 이 일을 어떻게 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공문 혁명의 테두리에 눌러앉은 벼슬아치가 돼서, 제 머리로 생각해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진리에 대한 해석의 권리를 혼자 차지하려는 사람들만 설치는 고장. 이런 사회에서 혁명의 흥분을 꾸미는 자는 위선자다. 혹은 쟁이다. 혁명쟁이다. 혁명을 팔고 월급을 타는 사람들. 아버지도 그런 쟁이가 돼 있었다. 아버지는 일자리를 얻기 위하여 월북한 것일까. 하하하, 정말 혁명을 느낀 건 로베스피에르와 당통과 마라와 레닌과 스탈린뿐이다. 인류는 슬프다. 역사가 뒤집어씌우는 핸디캡. 굵직한 사람들은 인민을 들러리로 잠깐 세워 주고는 달콤하고 씩씩한 주역을 차지한 계면쩍음을 감추려 한다. 대중은 오래 흥분하지 못한다. 그의 감격은 그때뿐이다. 평생 가는 감정의 지속은 한 사람 몫의 심장에서만 이루어진다. 광장에는 플래카드와 구호가 있을 뿐, 피 묻은 셔츠와 울부짖는 외침은 없다. 그건 혁명의 광장이 아니었다. 따분한 매스 게임에 파묻힌 운동장. 이런 조건에서 만들어 내야 할 행동의 방식이란 어떤 것인가. 괴로운 일은 아무한테도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정이었다. 혼자 앓아야 했다. 꾸준히 공부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에게 탓을 돌릴 수 없는 진짜 절망이 찾아왔다. 신문사와 중앙도서실의 책을 가지고 마르크시즘의 밀림 속을 헤매면서 이명준은 처음 지적 절망을 느꼈다. 참으로 그것은 밀림이었다. 그럴듯한 오솔길을 발견했다 싶어 따라가면 어느새 그야말로 '일찍이' 다져진 밀림 속의 광장에 이르는가 하면, 지금 자기가 가진 연장과 차림을 가지고는, 타고 내리기가 어림없는 낭떠러지가 나서는 것이었다. '전세계 약소 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한 벗'들도, 이 밀림의 어디선가에서 길을 잘못 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 밀림에는 다져진 길도, 따라서 지도도 없으며, 다 제 손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목숨에 대한 사랑과, 오랜 시간이 있어야 할 모양이었다.

 

명준은 은혜마저 없는 평양을 견딜 것 같지 않았다. 은혜는, 많은 여자가 그런 것처럼, 꼭 어느 사회가 아니면 못 산다는 여자가 아니었다. 로자 록셈부르크가 될 수 없는 여자였다. 이 독일 여자처럼,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경제학으로 풀이할 만한 배움도 없었고, 나름도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사상을 아랑곳 않는 데에 명준은 가다가 놀랄 때가 많았다. 명준에게는 그것이 좋았다. 무지한 여자한테서 쉴 데를 얻자는 저 좋을 마련만은 아니었다. 될 수만 있으면 그녀와 바꾸고 싶었다. 자기 영혼과 아무 탯줄이 닿지 않는, 시대의 꿈에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그녀에게서 명준은 은총을 보았다. 신은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생각의 버릇을 주지 않는 듯싶었다. 그녀에 대한 이런 생각에는 나중에 따져 보면 거짓이 섞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어떤 때 스스로 참이라고 느끼는 일을, 거짓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은혜가 모스크바로 가겠다고 우겼다면 명준은 어떻게 됐을까. 그 생각은 그를 떨게 했다. 그녀가 울면서 그의 청을 받아들였을 때, 명준은 분에 넘쳐 기뻤다.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자리를 바꾸면 자기를 웬걸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볼쇼이 테아트르에서 호화스런 공연에 끼이고, 구라파를 돌아 다니는 것은 화려한 기쁨일 것이었다. 더구나 예술가라면. 그녀는 가끔 이데올로기로 갈라진 세계 지도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망발 말하는 때가 잦았다.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했으면 도움이 되겠는데.'

 

발레라면 파리라야 할 까닭이 없었다. 제정 때 세워진 발레 학교가 그대로 자라 왔고, 가장 아껴 주는 예술 가닥의 하나라는 것은, 명준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런 참에 따라가면 어떤 좋은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명준의 억지를 받아 준 그녀를 생각하면, 사랑을 위해서 증거를 보이겠다는 마음이 고마웠다.

 

이부자리를 내려서 깔고 그 속으로 기어들었다. 은혜가 놓고 간 대로 로자 룩셈부르크 전이 책상 밑에 떨어져 있다. 책을 손에 들고 뒤적이다가 코 끝에 가져갔다.

 

생각 탓인지 그녀 몸 냄새가 나는 듯했다. 책을 떼고, 그녀의 냄새를 따로 떠올려 본 다음, 다시 책을 코 끝에 댔다. 없었다. 처음 방에 들어와 앉았을 때 보았던 그녀의 다리 생각이 났다. 그렇지. 그녀의 다리가 내게 준 놀라움을 은혜는 모를 거다. 언젠가, 그녀에게 지지 않을 만큼 갚으면 되지 않나. 갚겠다. 갚을 수 있다. 불을 껐다. 바람이 많이 부는 듯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소리가, 큰물 진 여울처럼 도도했다.

 

방 안의 훈훈한 기운으로 유리에 닿은 물기가 빗물처럼 무늬져 흐르는 창가에 서서 명준은 멀리 바다를 내다보았다. 명사십리가 한 줄 굵은 띠마냥 수평선 위에 떠 있다. 이곳 원산 해수욕장에 자리잡은 노동자 휴양소에 한 주일째 묵고 있다. 취재하러 온 게 아니고, 진짜 휴양이다. 전국의 일터에서 모범 일꾼들만 오는 곳에, 어쩌다 명준을 보내 준 건지, 처음엔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부친이 마련한 줄을 나중에야 알았다. 부친의 그런 방식에 명준은 더 맞서지는 않았다. 전번 자아비판회 때 알아차린 요령을 저도 모르는 새에 생활에 옮기고 있는 요즈음의 그였다. 오랜 세월 소리 없이 일해야 할 앞날이었다. 그러자면, 작은 일을 가지고 속물들과 부딪쳐서는 안 된다.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이 웅덩이에 빠져 죽어서는 안 된다.

 

이 휴양소 건물은, 원래 개인 소유의 별장이었던 걸 나라 차지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여름이 제철이지만, 겨울은 또 겨울대로, 솔밭 사이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아담한 별장 속 한 칸을 차지하고, 바다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고, 바다 소리에 잠이 깨는 나날도 나쁠 건 없었다. 이런 데까지도, 독보회니 교양사업이니 하는 것이 있었으나, 딴 여느 일터의 그것에 대면 훨씬 누그러진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월북한 다음, 사회에서 쓰는 낯선 말에 익숙해지기까지, 한동안 괴로운 말의 헛갈림을 겪었지만, 이 교양사업이라는 것도 그 한 가지였다. 그때까지 명준의 말버릇에서는, 교양이란 낱말은, 퍽 개인적인 겪음에 치우친 낱말로 돼 있었다. 그 교양이란 말에 붙인 사업이란 낱말은, 글라디올러스 화분에 붙잡아맨 전기 모터처럼, 영 어색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같은 말을 여러 사람이 되풀이할 때, 거기 새 짜임새가 나오는 것이었다. 동무라는 부르기만 해도 그랬다. 누구에게나 들어맞을 부름말이 없었던 탓도 있었으리라. 변증법을 빌린다면, 양적인 발전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 휴양소에도 그 교양사업이라는 게 여전히 있었으나, 심한 것은 아니었다. 하긴, 모처럼 마음과 몸을 쉬려는 곳에까지, 곧이곧대로 정치 교육을 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탓으로 이 휴양소에 사는 사람들은, 한동안이나마 마음의 시집살이에서 벗어나는 셈이다. 스팀 난방이 된 방 안에서 잠자리에 들 적마다, 명준은 가끔 헛갈린다. 나는 부르주아의 외아들인가? 중앙 정부의 높은 벼슬아치를 아버지로 가진 젊은 탕치객?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윗사람은 허술하게 입고 먹어야 한다는 건,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는, 동양의 거짓말이다. 꺼림하다면, 이만한 호강이 아직도 당 지도층이라든가, '모범 일꾼'들쯤이나 누릴 수 있는, 본보기에 머물러 있는 일일 게다. 그만두자. 이러니 나란 놈이 살찌긴 다 틀렸지. , 왜 자리가 높은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서, 그 아들이 며칠 호강을 하기로서니, 인민공화국이 결딴날까. 이명준. 시시한 소리 말아라. 역사는 흔히 개가죽을 쓰고 호랑이 춤을 추지 않더냐. 때가 되면 개가죽은 헌 개가죽처럼 동댕이쳐질 텐데 왜 어릿궂게 앙앙거리느냐. 국으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라. 큰 새의 뜻을 누가 알리요. 바둥대 봤자, 아버지랑 그 또래가 이 사회를 한동안은 움직이게 돼 있지 않으냐.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사람들을 묻게 하라.

 

맑은 겨울 날씨였다. 비쳐 보이는 하늘의 푸름에 대면, 바다는, 그보다는 짙은, 풀빛으로 그늘져 보였다. 오른편으로 멀리 두 마리 세 마리 갈매기들이 너울거린다. 이런 하늘 밑에서 사람이 즐겁지 말란 법이 있을까. 내 나라의 하늘은 일류 풍류객이야. 결코 찌푸리지 않거든. 울부짖지 않거든. 멋쟁이야.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다보았다. 식당에서 일하는 소녀가 간단한 아침 끼니와 신문을 가져왔다. 소녀의 뺨이 쟁반에 담아 온 사과처럼 빨갰다. 명준은 그 뺨을 손가락으로 꼭 찌르면서 시시덕거렸다.

 

"김동무, 오늘 아침엔 정말 이쁜데."

 

"거짓말."

 

열네 살 짜리 소녀는 애교도 없이 짧게 대답하고는 문간에서 혀를 낼름해 보인 후, 문을 닫았다. 콩콩콩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간다. 명준은 흥겨워졌다. 한 손으로 사과를 집으며 신문을 펼쳐 들었을 때 그는 소리를 질러 버렸다. 다시 기사를 들여다보았다. 지방 소식에,

 

'무용 예술 일꾼들 이곳에……'

 

크게 나 있다.

 

그 글자 뒤에서 은혜의 환히 웃는 얼굴이 기웃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일행은 전국을 돌며 공연하고 있었다. 일행에는 모스크바로 가게 된 맴버들이 많았으나, 은혜는 프로그램을 메우기 위해 같이 간다고 하면서 평양을 떠난 지가 열흘 전이었다. 지금쯤은 함경도 쪽을 돌고 있으려니 짐작하고 있던 그녀를 여기서 만날 생각을 하니, 몸이 떨리도록 기뻤다. 공연은 한시부터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트렁크 속에서 면도칼을 찾아 들고 세면소로 달려갔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아니, 이렇게 대뜸 나와도 되나?"

 

"안 되긴. 그보다도 어떻게 된 거예요?"

 

", 원산까지 왔다 기에 불현 듯 보고 싶어서 왔지."

 

그녀는 노려보았다. 명준은 그냥 웃었다.

 

"쪽지를 받았을 때, 마침 제 차례여서, 대충 읽어 보고 신발 속에 끼우고 무대로 나갔지 뭐예요. 아무리 관람석을 훑어봐도 없지 않아요? 그래 끝나고 들어와서 신발 속을 찾으니 원, 간데온데 없단 말이에요. 그래 혹시 무슨 잘못이나 아닌가 했지요."

 

극장 뒷문으로 발레리나를 모시고 나오는 제가, 쑥스러웠다. 그녀는 자본가들의 노리개가 아니란 말이다. 떳떳한 예술가는 애인도 가져서는 안 되는가.

 

난 패트런이 아니다. 그녀의 패트런은 인민이다. 이건 부르주아 사회의 무대 뒷풍경이 아니야. 그런 구질구질한 꼴은, 이 사회에서는 싹틀 수 없어. 그런 것은 좋다. 그렇게 생각하니, 홀가분했다. 국영 식당에서 끼니를 마치고, 송도원까지, 그들은 걸어왔다.

 

물 놀이터로 넘어서는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때는, 겨울 해가 벌써 다 기울었다. 솔바람이 파도 소리보다도 요란했다. 송도원이란 이름은, 소나무와 파도란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명준은 옆에 걸어오는 은혜에게 말해 봤다.

 

"글쎄요."

 

그녀는 건성으로 치워 버렸다. 그녀는 시무룩해 보였다. 방 안에 들어서면서 명준은 그녀의 낯빛부터 살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전등불 밑에서 보는 그녀는 훨씬 밝아 보였다. 그녀는 먼저 머릿수건을 풀고 장갑을 벗고, 다음에 외투를 벗어 벽에 걸었다. 명준은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그는 흐뭇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놀이마당에 서 있던 여자를, 자기 잠자리에 데리고 들어온 남자가 느끼는 으쓱함이었다. 명준은, 그런 시시한 느낌에 맞설 수 있는, 무언가 세찬 말을 하고 싶은 북받침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창에 마주서서 어두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를 부르는 몸매였다. 그녀의 뒤로 다가섰다. 그녀는 바깥을 내다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창 유리에는 축축이 물이 흐르고 있다. 뒤에서 본 목덜미가 유난히 하얗다. 명준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만난 것은, 3월 중순, 국립극장 무대 뒤에서였다. 순회 공연에서 돌아온 은혜는 고단해 보였다. 그는 은혜를 한편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예술단이 모스크바로 가는 게 어느 달이었지?"

 

그녀의 낯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왜 또 그런 말을 하세요?"

 

"미안해. 요사이 내가 좀 이상해. 은혜가 이러구 있다가 그때 가서 훌쩍 떠나 버릴 것만 같단 말야."

 

"어머나!"

 

그녀는 두 손바닥으로 낯을 가려 버렸다.

 

"잘못했어. 저것 봐. 사람들이 이쪽을 본대두."

 

그녀는 그래도 손을 떼지 않았다.

 

"잘못했어. 날 봐. 날 보라니깐."

 

그제야 그녀는 손을 뗐다. 그녀는 빤히 명준을 쳐다보았다.

 

"절 못 믿으시는군요. 그럼 그렇게 할까요?"

 

"맘대루 해."

 

그는 휙 돌아서 나왔다. 은혜는 따라오면서 속삭였다.

 

"이따 저녁에 가겠어요."

 

그날 밤 그녀는 오지 않았다.

 

이튿날 저녁 신문에서 명준은, 은혜 일행이 그날 아침 모스크바로 떠난 줄을 알았다.

 

19508.

 

공산군이 들어온 서울. 원래 S서 자리 지하실에서, 이명준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미 오빠 태식과 마주앉아 있다. 방에서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불빛도 어두웠다. 서 건물은 내무성 직속 수사기관인 정치보위부에서 쓰고 있었다. 잡혀 있던 태식이 정말 끌려왔을 때, 기쁨과 비슷한 것이 솟아나는 것을 깨닫고 소름이 끼쳤다. 우연이었다.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영미네 가족은 모두 남하하고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태식이 시내에서 잡혔을 때, 그는 소형 사진기를 가지고 있었고, 필름을 빼내 돋워 보니 서울 둘레에 흩어진 공산군 시설이 찍혀 있었다 한다. 태식이가 그런 일을 하다가 잡혔다는 일이 믿어지지 않는다. 더 뜻밖의 일은 윤애가 태식이와 결혼했다는 일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만나러 왔었다. 이층 창문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명준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대로 돌아갔을 것이다. 면회는 허락돼 있지 않았다. 그녀는 명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식을 놓아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묻는 말에 짧게 마지못한 대구를 할 뿐. 마치 무서운 사람을 대하듯 황황히 돌아갔다. 오늘 오후에도 또 오기로 돼 있다. 면회를 허락한 것이 아니고 명준이 쪽에서 부른 것이었다.

 

수갑을 차고 고개를 수그린 태식은, 며칠 내리 받은 고문 때문에 코의 테두리가 허물어져 있었다. 코 언저리가 두루뭉실하니 삐뚤어진 부은 얼굴은, 얼핏 문둥이처럼 보였다. 그를 보자 솟아난 기쁨을 명준은 풀이할 수 없었다. 풀이만 된다면 웬만한 일은 그런 대로 다룰 수 있었다. 악마도 풀이할 수만 있으면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붙들려온 태식을 보고 느낀 기쁨을 그는 풀이하지 못했다. 태식은 그의 친구였다. 은인의 아들이었다. 영미의 오빠였다. 다 그만두더라도, 그와 태식의 사이는 나쁜 편이 아니었다. 어딘지 마지막 한 장이 서먹서먹 한 사이긴 했으나, 그 무렵 친구를 들라면 그를 들어야 할 처지였다. 그런데도, 붙들려 온 태식은 그에게 전리품으로 비쳤다. 풀이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의 앞사람에게서 일을 넘겨 받는 며칠 동안, 그는 체포된 용의자들을 만나지 못했었다. 윤애의 갑작스런 나타남과 그녀의 말로 태식의 수감된 사실을 알았다. 자기 여자를 차지한 자가 손아귀에 들어 있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다.

 

그 풀이는 고깃간에 걸린 날고기처럼 거슬렸다. 셀로판과 레으스밖에는 가지지 못한 이명준에게는, 그런 날 비린 고기를 쌀 거친 나무껍질이 없었다.

 

"자네가 이런 일을 하다니 뜻밖이야."

 

태식은 부은 눈을 들어서 의심스럽게 건너보았다.

 

"속에 있는 대로 대답해도 괜찮겠나?"

 

"물론이야. 맘대로 대답하게, 옛날처럼."

 

"그럼 말하지. 자네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내게는 뜻밖일세."

 

"알겠어. 그러나 나 같은 인간은 이렇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자야. 허나 자네는."

 

"깔보지 말게. 모든 인간은 다 그런 가능성이 있네."

 

"자네가 이처럼 고생할 만한 갓이 남조선에 있었던가?"

 

"자네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만한 값이, 북한에 있었던가 묻고 싶어."

 

", 되묻지 말고, 먼저 내 물음을 받아 주게."

 

"값이 있어서만 사람이 행동하는 건 아닐세."

 

"그럼?"

 

"값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도 행동할 수 있어."

 

"자네 같은 애국자를 왜 남조선이 알아주지 못했을까. 나는 여기 잡혀 오는 자들을 정말 미워해. 이렇게 애국자가 수두룩한데 왜 남조선이 요 꼴이 됐지?"

 

"말해도 좋은가?"

 

"그러래두."

 

"자네 같은 사람이 넘어갔기 때문이야."

 

"고맙네. 허지만 자넨 남지 않았나."

 

"아니야, 내가 남은 건 625일에서 오늘까지 뿐이야."

 

"늦었군 그래, 늦었어. 나한테 부탁이 없나?"

 

"죽여 주게. 고문을 이 이상 참을 수 없어. 자네가 아직도 나한테 우정이 있다면, 나를 곧 죽여 주 게."

 

"자네의 죽음을 아무도 몰라도 좋은가?"

 

"자네, 북한으로 가더니 속물이 됐군. 난 괴로우니깐 빨리 쉬고 싶다는 것 뿐이야."

 

"난 현재로선 자네한테 우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 지금 똑똑히 느꼈어. 내가 괴로워할 때 자넨 웃고, 자네가 괴로워할 때 나는 웃어야 하도록 돼 있다는 걸 지금 똑똑히 알았네. 난 웃어야겠어."

 

"자넨 그다지도 악한이었나?"

 

"악안? 맞았어. 더 듣기 좋게 악마라고 불러 줘. 내 생애에 단 한번 악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지 말아 줘. 난 악마가 돼봐야겠어. 이런 북새통에 자네 한 사람쯤 풀어 주는 건 지금 내가 가진 힘으로 도 넉넉해. 허지만 안 하겠어. 신파는 않겠어. 옛날 은인의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풀어 주는 공산당원. 안 돼. 그러면 나는 끝내 공중에 뜬 몸일 뿐이야. 이런 기관에 온 것도, 내가 자원한 일이야. 나는 이번 싸움을 겪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아니 비로소 나고 싶단 말이야. 이런 전쟁을 겪고도 말끔한 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 내손을 피로 물들이겠어. 내 심장을 미움으로 가득 채워 가지고 돌아가야겠어. 내 눈과 귀에, 원망에 찬 얼굴들과 아우성치는 괴로움을 담아 가져야겠어. 여태껏 나는 아무것도 믿지 못했어. 남조선에서 그랬구, 북조선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어. 거기서 나는 어떤 여자를 사랑했어. 나는 그녀를 믿었지. 그러나 그녀도 나를 속였어. 그녀를 미워하지는 않아. 좀 어려운 약속을 했는데 결국 지키지 못하더군. 그녀는 지금 모스크바에 있어. 지금 나에겐 아무것도 없어. 무엇인가 잡아야지. 그게 무엇인가는 물을 게 아니야. 싸움에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자는 바보 뿐이야. 바이블에 나오는 게으른 종처럼. 전리품을 긁어모아야지. 당이 논아 주는 전리품을 바랄 수는 없어. 내 손으로 뺏어야 돼. 나의 남은 생애를 쓰고도 남을 전리품을. 옛날부터 싸움이란 그런 거야. 그때 자네가 나타난 거야. 옛 은인의 아들. 맘 맞는 농담을 지껄이던 짝패. 그리고…… 그건 말하지 않지. 이보다 좋은 거리가 어디 있나. 나는 그걸 짓밟겠다는 거야. 그 썩어진 모랄의 집에 불을 지르겠단 말이거든. 그래서 범죄인이 되겠어. 또는 인민의 영웅이 되겠어. 마찬가지 말이야. 어쩔 수 없이 나를 얽어매는 죄를 내 손으로 만들겠다는 거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나면서부터 지고 나온다는 원죄 따위 부르주아 꿈 넋두리가 아니야. 내 손으로 밝히 해낸 나의 죄. 그래서 태어나겠다는 걸세. 내 탄생을 도와 주게. 그리고 자네 부인이, 지금쯤, 이층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녀도 나의 탄생을 도와야해. 사람이 태어나기야, 여자한테서 말고야 다른 길이 있겠나?"

 

태식이 의자에서 벌컥 일어섰다.

 

"악한."

 

"그렇지. 더 흥분해 주게. 자연스럽게 내가 탄생할 수 있도록."

 

"윤애한테 손대지 말어. 제발 부탁이야. 자네의 마지막 양심을 믿어. 그건 자넬 괴롭힐 뿐이야. 다른 발업으로도 얼마든지 자기를 살릴 수 있잖아? 제발."

 

"다른 방법! 알아듣지 못하는군. 나더러 속물이 됐다더니. 하긴 영미라도 있다면, 영민 어디 있나? 내가 월북한 후 개는 뭐래?"

 

말이 끝나기 전에 탁, 침이 날아왔다.

 

그는 한 손으로 낯을 문지르면서 빙긋 웃었다.

 

"아첸 스파시보. 생큐 베리 머치란 러시아 말일세."

 

순간 그의 주먹이 태식의 얼굴을 갈겼다. 수갑이 차인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쓰러지는 태식을, 발길로 걷어찼다. 태식의 얼굴은 금시 피투성이가 됐다. 그 핏빛은, 몇 해 전 바로 이 건물에서, 형사의 주먹에 맞아서 흘렸던, 제 피를 떠올렸다. 그때 형사가 하던 것처럼, 태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또 한 번 얼굴을 갈겼다. 제 몸에 그 형사가 옮아앉은 것 같은 환각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의 몸을 짓이기는 버릇은 이처럼 몸에서 몸으로 옮아가는 것이구나. 몸의 길. 그는 발을 들어, 마루에 엎어진 태식의 아랫배를 차질렀다. 꼭 제 몸이 허수아비 놀 듯, 자기와 몸 사이에 짜증스런 겉돎이 있었다. 그 틈새를 없애려고, 쉬지 않고 팔과 다리를 눌렀다. 태식은 더 움직이지 않고 마루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서 죄수의 코에 손을 대보았다. 다음에 가슴을 짚어 보았다. 죽진 않았어.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서 아랫주머니를 찾아 손수건을 꺼냈다. 손에 묻었던 피를 빨아들인 수건은 금방 질척거렸다. 아직도 깨끗한 가장자리를 써서 손톱까지 말끔히 닦은 다음, 그것을 방 귀퉁이를 향하여 집어던졌다. 그리고 나서 문간에 선 감시병을 불렀다.

 

"감방으로 옮기시오."

 

이른 다음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가슴이 개운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지.

 

갈매기가 보이는 바다로 트인 분지에서 윤애를 애무했을 때도 그는 이랬었다. 쑥이었던 그가 능란한 사랑의 솜씨를 부린 것에 스스로 놀라던 일. 그때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도 끔찍할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다. 히틀러의 고문관들도 이렇게 해낸 것일 테지. 스페인의 종교 재판관들도 이렇게 해낸 것이지. 왕조의 형리들도 이렇게 곤장을 친 것이지. 그리고 윤애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를 덮치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다.

 

그녀는 전날처럼 명준의 책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가, 그가 들어서자, 일어섰다. 모시 치마저고리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몇 해 전처럼 싱싱한 데가 없는 대신에, 점잖은 티가 깃들여 있었다. 고생스럽게 걱정으로 지내는 여자로서는 이유가 있어 보였으나, 그녀의 눈과 가는 목이 어쩔 수 없이 애처로웠다. 그녀는 의젓하려고 애쓰는 듯했다. 명준은 병신스럽다고 생각했다. 여기는 너의 집 응접실이 아니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다. 일이 얼마나 중한지 그녀는 모르는 건가. 또는 명준에게 한 가닥 바람을 걸고 있는가.

 

"앉아요."

 

그녀는 앉으면서 치마 꼬리를 여밀싸했다.

 

"윤애."

 

그녀는 겁에 질린 눈초리로 건너다봤다. 오랜만에 불러 보는 그녀의 이름이, 잠깐 그를 어지럽게 했다. 이러려는 게 아니지.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얘기도 없이 사라져서 미안했어."

 

"……"

 

"허지만 또 이렇게 오지 않았어? 어쩌면 윤애를 한 번 더 보기 위한 것인지도 몰라."

 

"그 말씀은 말아 주세요."

 

"그래? 그럼 무슨 얘길 할까?"

 

명준은 담배를 꺼내서 붙여 물었다. 되도록 천천히 연기를 즐겼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우고 일어서서 윤애 앞으로 걸어갔다. 오른손으로 그녀의 턱을 쳐들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입술이 까칠하게 탔다. 덮치듯 입술을 댔다. 윤애는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뒤로 물러섰다.

 

"왜 이러세요? 사정을 아시면서."

 

명준은 허하게 웃었다.

 

"사정? 옛날 애인이지만, 지금은 친구의 부인이라는? 알아. 아니깐 그러는 거야."

 

그는 한 발 다가섰다.

 

"용서해 주세요. 이러지 마세요."

 

그녀의 말이 명준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됐다.

 

"용서? 무얼 용서하란 말이야.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 가르쳐 줘."

 

그는 물러서는 그녀를 따라 한 발씩 다가섰다.

 

"윤애, 난 지금도 윤앨 사랑해."

 

"정말 그러시다면 저를 모욕하지 말아 주세요."

 

"무슨 소릴. 사랑한대두. 모욕? 그 부르주아적 상투어를 버려. 윤애는 아직도 바보군. 그 동안에도 그걸 배우지 못했나?"

 

윤애를 벽에 밀어붙였다.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아 벽에다 붙박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붙잡힌 팔을 빼려고 얼굴이 뻘겋게 달았다. 그녀의 이마에 솟은 땀방울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왜 그녀는 마다해야 할까. 그때도 이렇게 마다했다. 그때와는 달라. 그때는 난 너한테 반한 참한 젊은이였지. 지금은 이긴 자로서 너를 능욕하려는 거다. 저고리 동정에 손가락을 걸어 아래로 잡아 찢었다.앞죽지가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숨결이 한꺼번에 높아지면서 주저앉을 듯이 했다.

 

"용서해 주세요, 명준 씨."

 

너는 왜 울부짖지 않느냐. 너의 남편처럼 내 낯에 침을 뱉지 못하느냐. 그녀의 남은 소매를 잡아뗀다. 이제 그녀의 윗몸에서 반이 알몸이었다. 손을 바꾸어 잡고, 나머지 반을 잡아뗐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벽에 밀어붙이고,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모아 쉬었다. 가슴이 그때마다 부풀었다 꺼지고 했다. 희고 푸짐한 가슴이었다. 이 가슴이 그의 것이던 때가 있었다. 지금 힘으로 이 가슴을 빼앗을망정, 그것을 가지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그를 미치게 했다. 언뜻 은혜가 생각났다. 그녀는 한 번도 마다하는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를 기쁘게 안아 주었다. 그 가슴은 지금 모스크바에 있다. 모스크바의 어두운 하늘 밑까지 그 가슴을 가져가야 할 까닭이 어디 있었을까. 마지막까지 좋은 말만 하다가 그녀는 떠나 버린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가슴들.

 

이 희고, 반드르르한, 풍성한 거짓말. 그녀의 목에 팔을 감고 힘껏 끌어당겼다. 어디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멍하도록 하릴없는 가락이었다. 바로 뒤에 잇닿은 산에서 난다. 그녀는 죽은 사람처럼 그의 가슴에 안겼다. 두 팔로 안은 그녀는 따뜻했다. 가슴과 둥그런 배가 예전에 안기던 그녀의 부피를 그대로 옮겼다. 그때, 또 새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안은 채 마루에 뒹굴었다. 목과 가슴에 입술을 댔다. 새 울음이 갈매기 울음처럼 들렸다. 인천 교외, 그 분지의 모래 바닥이다. 그 갈매기들이 눈에 보인다. 배들이 돛을 번쩍이며 바다로 나아간다. 뚜뚜 뱃고동 소리.

 

햇빛이 가득한 하늘이 푸르다. 이 빌어먹을 놈의 땅에, 하늘은 왜 그렇게 푸르담. 그의 몸 가운데 어디선가 막혔던 사태가 좌르르 흐르는 소리가 난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자꾸 흐른다. 이건 뭐야. 사태는 눈물이 되어 몸 밖으로 흘러내린다.

 

"윤애, 인제 눈을 떠. 나를 봐."

 

그녀는 넋빠진 듯 쳐다보다가 힘없이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따뜻한 물이 그의 가슴을 적셨다. 그녀를 일으켜 앉히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두개골 밖에서 부는 바람이 그대로 두개골에 스며서 뚫고 지나갔다. 밝은 전등빛 아래, 그녀는, 윗도리를 오그리고, 마루에 한 손을 짚고 앉아 있었다. 사이를 두고 새우는 소리는 아직도 들렸다. 창으로 가서 그것을 열었다. 건물에서 비치는 불빛으로 나뭇잎이 부옇게 떠 보였다. 그날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 건물에 들어온 이후, 날마다 틈만 있으면 보아 왔기 때문에, 밤눈에도 그 자리를 대뜸 어림할 수 있었다. 그곳 잔디 위에 번듯 나가 누운 몇 해 전의 자기를 본다. 혀끝으로 입 언저리를 핥고 있는 그를. 개미를 발로 이기고 있는 그. 그날 푸른 하늘 대신, 부시듯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이 그 위에 있었다.

 

창을 열어 놓은 채 윤애 앞으로 돌아와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자기 웃옷을 벗어서 그녀에게 입히고 나서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돌아가."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복도 모퉁이에 선 보초를 불러서 그녀를 넘겨 주었다. 남자 저고리를 걸치고 보초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가자, 문을 닫고 그대로 거기에 기대섰다. 그는 두 손바닥을 딱 마주치며 어깨를 추슬렀다.

 

"너는 악마도 될 수 없다?"

 

그는 마주서 있는 사람에게 대고 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어 물어봤다. 그는 또 손뼉을 쳤다. 빈방 밤시간에 그 소리는 날카롭게 울렸다. 그는 호탕하게 한 번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목구멍에서 나온 소리는 정작 약하고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뒤통수를 도어에 탕탕 부딪히면서 언제까지나 웃고 있었다.

 

낙동강 싸움터 어두운 밤에 비가 내린다. 이명준은 귀를 기울여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했으나, 어둠을 적시는 빗소리뿐, 다른 소리를 가려 낼 수는 없었다.

 

눈을 크게 뜨고, 제가 앉아 있는 이 동굴에 이르는 좁은 오르막길에서 그럴싸한 모습을 어림해 보자고 애써도, 헛일이었다. 빗소리와 어둠만이 가득 차 있었다. 사람이란 부질없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함빡 어둠 속에서도, 이명준은 눈을 뜨고 있었다. 비록 어둠 속일망정, 기다림의 몸짓은 그런 모양이다. 몸에 밴 버릇은 그런 때 우스꽝스러웠다. 들리는 소리도 없는데 귀를 쫑긋해야 어울리고, 보이는 그림자도 없이 눈을 사려 뜨는 게, 삶에 길들여진 오관의 버릇인 모양이다.

 

철늦은 비에 덜덜 떨면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지켜보며, 거기서 나타날 그림자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삶에 진 이명준이 이 싸움터에서 지닐 수 있는 단 하나 남은 몸짓이었다. 비옷을 두르고 있는데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동굴은, 입구에서부터 3미터쯤 한 지름을 가진 반달 모형의, 모랫기가 승한 자연 굴이었기 때문에, 밖에서 내리는 비는 거기까지는 뿌리지 않았다. 그는 동굴의 안쪽이 아니고 입구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날 길에 되도록 가까이 있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은혜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애와 그 남편 태식을 놓아 준 다음, 이명준은 이곳, 전세가 기울어져 가는 낙동강 싸움터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었다. 잘된 일이었다. 붙들려 오는 사람들을 고문하는 데도 지쳐 버린 때였다. 처음에는, 사람의 몸을 짓밟는 악한 기쁨이 있었다. 자기 팔다리의 힘찬 움직임이, 다른 한 사람 위에 불러일으키는 움직임은, 이명준에게 몸의 길을 믿게 해주었다. 그의 팔에 감긴 띠가 그들의 등에 떨어질 때, 희생자들은 에누리없이 곧이 곧은 외마디소리를 울려 주었다. 그는 팔을 놀리면서 희생자들이 그들의 한창때에 어떠했을까를 그려 보았다. 흰 칼라가 말쑥한 양복에 윤나는 구두를 신고 돌아다녔을 거다. 그 치사한 악덕으로 번 그들의 돈으로, 만화보다 더 초라한 조국에서, 자기들만은 서양 사람들의 자리에서 사는 듯한 꿈속에서 살아온 그들일 것이었다. 백 사람이 나무 뿌리를 먹는 갚음으로만 한 사람이 파리제 화장수를 쓸 수 있는 슬픈 틀 속에서, 아무 뉘우침도 없이 살아 온 사람들이란 걸 떠올리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경제학의 추상적인 법칙을, 이명준 자신의 주체적 증오로 옮기려 했다.

 

명준이 조바심이 나게 된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늦추 잡고 있었다. 견뎌야 할 오랜 시간이, 이 사회를 바른 모습으로 돌리고, 그런 모습에 맞춰 남녘을 끌어 붙일 때까지 사이에는 놓여 있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자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은 물밀 듯 남으로 밀고 내려갔다. 혼자서 마음 ''에서 해낸 꼼꼼한 계산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의 움직임이 더 그럴듯해 보였다. 겁이 났다. 역사란 하나 다음에 둘이 오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인가? 속물로 보인 사람들이 실은 정치적 '어른'이었던 것인가? 잘못하면 '역사'는 자기를 남겨두고 줄달음칠 것 같은 무서움이 덮쳤다.

 

전쟁이 나기까지 끝내 배우지 못한 무엇인가를 S서 건물 지하실에서 배우려 했다. 역사를 따라잡기 위해, 잡혀 온 인간들이 밉상스런 인민의 적이라는 느낌을 자기 속에 키우기 위해서, 이명준은 가죽띠를 휘둘렀다. 희생자들이 나타내는 되받음도 가지가지였다. 의젓하려 애쓰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는 사람도 있었다. 비굴한 사설을 늘어놓으며, 매 한번 마다 부서지는 소리를 내는 자. 고문을 하는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아리송한 눈의 연기를 하는 지능족. 아픔을 받아들이는 나름의 모양을 처르면서, 그는 점점 시들해 갔다. 태식을 고문했을 때 느꼈던 그런 싱싱한 죄악의 기쁨은 아주 짧은 동안에 사라져 갔다. 덮개를 씌운 전등에서 비치는 동그란 불빛 아래, 그가 내리치는 가죽띠에 몸부림치는 몸은, 인민의 적이니, 증오할 자본주의자니, 민족반역자니, 간첩이니, 그런 버젓한 것이 아니었다. 옷을 걸치고, 말을 하는, 젖먹이 짐승의 하나일 뿐이었다. 처음에 그들이 보여 주는 괴로움의 흉내는 곧이 곧은 걸로 비쳤다. 사람이 사람에게서 바랄 수 있는, 가장 알짜 반응인 것 같더니.

 

그는 끝내, 윤애의 몸에서 똑똑한 응답을 받아 보지 못했었다. 깡그리 그녀를 차지했다고 믿기가 무섭게 그녀가 보이곤 하던, 알 수 없는 버팀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물건을 만지려고 할 때처럼, 밑창 없는 안타까운 허망 깊이 그를 차 넣었었다. 사람의 사귐이 몸의 그것조차도 얼마나 믿지 못할 길인가를 말해 주었다.

 

고문은 그렇지 않다고 처음에 생각한 것이다. 그가 준 팔의 힘에 꼭 맞먹는 외마디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믿은 것은, 그러나 잘못이었다. 엄살을 부리는 사람이 있었고, 참아 내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는 쪽과 받는 쪽의 셈을 헛갈리게 했다. 다섯을 줬는데 여섯을 받는 사람과, 넷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어긋남을 줄이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매를 더하는 것, 꾀죄죄한 체면을 차릴 수 없도록 녹초를 만들어 버리는 길이었으나, 그 길은 길이자, 벼랑 끝이었다. 저쪽을 없애 버리고는 내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분별이 없어져 버린 몸은 어울릴 값어치가 없었다. 지칠 대로 지쳐서 함부로 지르는 헛소리를 참다운 항복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의식을 되찾고 숨을 돌리자마자, 그들은 또다시 점잔을 부리려 했고, 또 녹초를 만들면 의식을 잃은 살덩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명준은, 고문에서도 졌다. 그리고 그 무렵, '역사'를 앞지르는가 싶던 '어른'들의 ''의 움직임도 '역사'의 느린 걸음걸이에 져가고 있었다.

 

현대 무기라는 매개물은, 싸움터에서조차 몸과 몸의 만남을 가로막는다. 더구나 소총이 미치지 못하는 사이를 두고 포격만 해대는 전쟁은 나쁜 장난 같았다. 지지는 햇볕 아래 멀리 울리는 풋소리를 들으며 참호에 서 있으면, 이 거창한 죽임의 마당이, 문득 자기와는 동떨어진 먼 이야기인 것만 같은 때가 있었다.

 

사단 사령부에서 은혜를 먼 빛으로 보았을 때,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이거니 여기고 그대로 지나쳤다. 깊이 생각지도 않았고, 언뜻 지나가는 환상으로 돌렸다. 등뒤로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오며,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발을 멈춘 채 얼른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간호병이었다.

 

어제 저녁 여기서 만났을 때, 그녀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 안 하든 마찬가지였다.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 너무 고마웠다. 그녀를 탓하는 마음은 아주 없었다.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를 가릴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상과 애인과 육친을 깡그리 잃어버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죽음과 서로 멍하니 바라보고 앉아 있던 그의 앞에 또다시 나타난 은혜는 어쨌든 조용했던 그의 마음을 헝클어 놓은 데서 얼핏 짜증스러우면서도, 외치고 싶은 기쁨을 주었다.

 

소리를 들은 듯하여, 굴 밖으로 몸을 내밀싸하면서 어둠을 내다보았으나, 이내 기척이 없다. 오지 못할 일이 생긴 게 아닌가? 두시쯤 됐겠지. 낮에 올 수 있다고 했으니 그 동안 일이 생기지만 않으면, 꼭 올 터이었다. 점점 조바심이 생겼다. 혹시 길을 잃어버리지나 않았는지. 그는 이 굴을 사령부로 가는 길에 지름길을 찾아보느라 일부러 산을 타고 넘어가다가 찾아냈다. 그런 다음부터는 어쩌다 틈이 생기면 와서 드러누웠다가 가는, 그만이 아는 곳이었다. 웬만해서는 눈에 띄지 않게 자리잡은 이 동굴에 누워 있는 시간에는, 홀가분하게 쉴 수 있었다. 누구 한 사람, 더 데리고 올까 하다가 그만둔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알면, 이 바위 굴이 주는 포근한 힘이 그만큼 적어지리라 싶어서였다.

 

가까이서 분명히 기척이 났다.

 

명준은 어둠 속에서 몸을 도사렸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은혜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굴 밖으로 나서며, 손으로 더듬어 그녀를 안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비옷을 벗겨서 입구에 가까운 안쪽에 놓았다. 걸어온 탓인지 그녀의 몸은 따뜻했다. 굵은 모래로 된 바닥에서 오르는 찬 기운을 막기 위하여 땅에 자기 비옷을 깔았다. 등으로 팔을 돌려 그녀를 안았다. 그의 저고리 앞자락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용서해 주세요."

 

S서 이층에서 윤애도 그더러 용서해 달라고 했다. 은혜도 지금 용서를 빈다. 윤애와 은혜의 똑같은 말은, 뜻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윤애의 말은 악마에게 빌붙는 천사의 그것이었다. 은혜의 말은 애인 앞에 뉘우치는 죄지은 여자의 그것이다. 하지만 난 윤애에게 끝내 악마로 대하지는 못했지. 놓아 보낸 건 잘했어. 태식을 도망시킨 것도 잘했어. 은인의 아들을 놓아 보낸 것이라 생각지 말자. 윤애의 남편을 살려 준 것이다. 윤애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설령 나타난다 하더라도 다시는 윤애일 수 없다. 그녀 말대로 사정을 알았으니까. 이렇게 은혜가 다시 내 앞에 있잖아? 게다가 용서까지 빌잖아? 하구말구. 용서하구말구. 무얼 용서하라는 지. 용서고 뭐고 할 만한 일인지는 몰라도 은혜, 네가 용서하라니 용서하구말구. 난 이제 다른 일에는 아무 자신이 없어도 용서하는 재주만은 자신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아마 전생에 퍽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일 거다. 그러니 그토록 용서하라고 외쳤지.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 있거든 이 여자를 돌로 치라 했을 때, 분명히 저도 넣어서 한 말이야. 예수 처럼 휼륭하진 못해도 너 하나는 용서하겠어. 그는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추슬러 올리며 그녀의 귀에 입을 댔다.

 

"사랑해."

 

"모스크바에서도 아무 재미 없었어요. 잘못했어요. 전쟁으로 귀국한 후 모집이 있었을 때, 전 간호병으로 제일 먼저 지원했어요. 꼭 뵙고 용설 빌고 싶었어요. 이젠 죽어도 좋아요. 잘못했어요. 제가 미우시더라도 용서해 주세요."

 

"사랑해.

 

"용서한다고 말씀해 주세요."

 

"사랑한다는 말은, 용서한다는 말을 열 번 거듭한 거나 같지 않아?"

 

그녀는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윤애가 우는 것을 보기는 꼭 한 번이다. S서 이층에서 그가 능욕하려던 생각을 버렸을 때였다. 그때도 그녀는, 이내 눈물을 거뒀었다. 윤애는 야무진 여자였다. 은혜는, 전쟁 전 평양 그의 하숙에서, 모스크바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때도, 이렇게 울었었다. 그리고는 지금, 그 다짐을 깨뜨린 것을 용서하라면 서도 울고 있다. 따지고 보면, 윤애는 한 번도 명준을 어긴 적이 없다. 어겼다면 명준이 쪽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때 앞뒤가 어찌 됐든, 알리지도 않고 월북한 일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배반이라고 부를 밖에 다른 말이 없다. 그러나 별난 일이다. 조리가 바르고, 야무지면서, 그를 어긴 일도 없는 윤애는, 속까지 다 알지는 못했다는 느낌으로 남아 있는데, 뚜렷이 어긴 은혜를, 한치 틈새도 없이 믿고 있는 자기를 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맹세했을 때, 그녀는 참을 나타낸 것이리라. 또 지금 용서를 비는 그녀의 마음에도 거짓은 없으리라. 그는 그녀를 울게 내버려두었다. 비 오는 소리는, 동굴 안에서 들으면, 땅과 하늘이 웅얼웅얼 대는 우람스런 중얼거림처럼, 크지만 부드러웠다. 그녀의 울음 소리도 빗소리처럼 부드러워서, 언제까지나 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들은 거의 날마다 만났다. 밤일 때도 있고 낮일 때도 있었다. 약속하지 않은 때도 명준은 불현듯 그녀가 동굴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사람 눈을 피하여 산을 넘어가면 대게 틀림없이 동굴 안쪽 벽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녀를 보기가 일쑤였다. 격식이라든가, 미묘한 예절의 번거로움 같은 것이, 짜증스럽고 뜻없이 보이는, 싸움터였다. 모습 없는 죽음의 그림자와 맞서서 지내야 하는 나날, 그들은 서로의 몸뚱어리에서, 불안과 안타까움을 지워 줄 힘을 더듬었다.

 

굴 속에 앉아서 내다보면, 훨씬 오른편으로, 위쪽 절반이 뚝부러져 나간, 고압선 탑이 바라보였다. 그 위로 흰 구름이, 뭉실하니 걸려 있다. 소학교 다닐 때, 보고 그리기 시간에 십 센티 평방의 그물을 만들어 가지고, 그 네모진 틀 속에 들어오는 풍경을 그린 적이 있다.

 

그 틀을 쓰면, 헤 넓기만 해서 어디서부터 그려야 할지 모를 풍경을, 마음 내키는 대로 도려 낼 수 있었다. 이 동굴의 입구는, 그 틀처럼 모서리가 반듯하지는 않았다. 모서리가 부서진 네모꼴처럼 엉성한 데다가, 가장자리에 길쭉길쭉한 잡초가 무성하게 뻗어 있다. 그런 대로, 그렇게 열린 공간이 뚜렷했고, 내리 맑은 날씨로 아물거리는 아지랑이 속에 펼쳐진 풍경은 아름다웠다. 이 굴에세 풍경을 보기 비롯하면서, 세상에 있는 모든 풍경은 다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왼쪽으로도 막히고, 오른쪽으로도 막히고, 아래위도 가려진 엉성한 구멍을 통하여, 명준은 딴 세계를 내다보고 있었다. 굴 속, 손바닥만한 자리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전차와 대포와 사단과 공화국이 피를 흘리고 있는 저 바깥 세상을 구경꾼처럼 보고 앉은 자기의 몸가짐을 나무라기에는, 이명준은 너무나 지쳐 있었다. 훈훈한 땅김이 자기 체온처럼 느꺼지는 동굴 속에서, 이명준은 땅굴 파고 살던 사람들의 자유를 부러워했다. 땅굴을 파고 그 속에 옆드려 암수의 냄새를 더듬던 때를 그리워했다. 이렇게 내다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원시인의 눈에는, 모든 게 아름다웠을 게다. 저 푸짐한 햇빛들의 잔치. 이 친근한 땅의 열기. 왜 우리는 자유스럽게 이 풍경을 아름답다고 보지 못하는가. 바스락 소리가 났다. 은혜였다. 그녀는 몸을 구부리고 입구를 빠져 들어돠, 명준의 곁에 길게 드러누웠다. 약품 냄새가 풍긴다. 그녀는 모자를 벗어서 뒷머리에 괴었다. 그러다가, 불쑥 말했다.

 

"왜 이런 전쟁을 시작했을까요?"

 

"고독해서 그랬겠지."

 

"누가?"

 

"김일성 동지지."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한참 만에, 이쪽으로 돌아누우면서, 명준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자기가 외롭다고 남을 이렇게 할 권리가 있나요?"

 

"권리? 권리가 있어서만 움직인다면 벌써 천당이 왔을 거야."

 

"김일성 동무는 애인이 없었던가 보지요?"

 

"있어도 신통치 않았겠지."

 

"이 동무가 수상이라면 어떡하시겠어요?"

 

"? 나 같으면 이따위 바보 짓은 안 해. 전쟁 따윈 안 해. 나라면 이런 내각 명령을 내겠어. 무릇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삶을 사랑하는 의무를 진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적이며, 자본가의 개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스파이다. 누구를 묻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한다. 이렇게 말이야."

 

"하하하."

 

그녀는 남자처럼 웃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명준의 목을 마구 흔들어 댔다.

 

"그런 시인을 수상으로 가진 인민들만 봉변이군요."

 

"시인? 아 그럼 그 과학적인 친구들이 앉아서 한다는 게 요꼴인가? 아니야."

 

자기 목에 걸린 은혜의 팔목을 잡아서 끌어당겼다. 여자의 눈빛이 흐려지면서, 몸이 빳빳해졌다. 그는 여자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가슴. . 다리. 그녀의 몸이 그의 몸과 꼭 붙어서 떨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녀와 같이 지내던 일을 떠올린다. 처음 모스크바 행을 얘기하던 날 저녁의 일. 원산 해수욕장의 하룻밤. 그리고 배신. 사랑스럽고 밉던 여자가 다 한 여자였다. 지금 품에 안고 있는 이 몸이었다. 이 몸이 모스크바로 옮아가면 배신이 되고, 낙동강으로 옮아오면 뉘우침이 된다? 오른손으로, 은혜의 군복 앞 단추를 끌렀다. 다음에는, 가죽띠를 끌렀다. 마디가 굵은 버클이 무디게 절그럭거린다. 이 고운 몸에, 이 무슨 흉한 쇠붙이란 말인가. 이 몸을 볼쇼이 테아트르의 대리석 기둥이 받치는 놀이마당에서, 전차가 피를 토하는 이 스산한 마당까지 불러 온 자는 누군가. 이 예술가의 가냘픈 몸의 도움까지 받아 가면서 해내야 할 사람잡이에 내몰기 위해서? 안 된다. 너희들이 만일 인민의 이름을 팔면서 우리를 속이려 든다면, 우리도 걸맞은 분풀이를 해줄 테다. 사람을 얕잡아보지 마라.

 

너희가 한푼을 속이면, 어김없이 한푼을 속히 우리라. 전차와 대포를 지키라고 너희들이 데려다 놓은 자리에서, 우리는 원시의 광장을 찾아가고 있다. 이렇게.

 

단추와 가죽 허리띠를 끌러 낸 풀빛 루비슈가 웃저고리를 벗긴다. 그녀의 드러난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그 가슴속에서 만 가지 소리가 들린다. 악을 쓰는 기관총 소리가 들려 온다. 발작처럼 터지는 풋소리. 땅바닥을 씹는 전차의 바퀴 소리. 악의가 웅어리진 강철 덩어리를 떨어뜨리는 폭격기의 엔진 소리. 그들 소리보다 한바퀴 더 아득히 들리는 소리. 솔밭을 지나는 바람 소리. 둑을 때리고 부서지는 물결, 먼바다 소리.

 

눈을 뜨고 은혜를 들여다본다. 그녀도 눈을 뜨고 남자의 눈길을 맞는다. 서로, 부모 미생전 먼 옛날에 잃어버렸던 자기의 반쪽이라는 걸 분명히 몸으로 안다. 자기 몸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사랑스러울 리 없다. 그는 팔을 둘러 그녀의 허리를 죄었다. 뉘우치지 않는다. 내가 잘나지 못한 줄을 벌써 배웠다. 그런 어마어마한 이름을랑 비켜 가겠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 이 햇빛. 저 여름풀. 뜨거운 땅. 네 개의 다리와 네 개의 팔이 굳세게 꼬아진, 원시의 작은 광장에, 여름 한낮의 햇빛이 숨가쁘게 헐떡이고 있었다. 바람은 없다.

 

어느 날 굴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한 손에 가위를 든 채였고, 명준은 전초선에서 들어온 적정 보고를 쥐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 환자용 천막에서 일하다가 그대로 온 모양이었고, 명준의 손에 든 보고서는, 늦지 말고 알려야 할 성질이었다. 주머니에 넣지도 않고 한 손에 거머쥔 흰 쇠붙이를, 명준은 부신 듯 바라보았다. 쇠붙이가 되비쳐 보내는 여름 햇빛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손에 하나씩, 죄의 증거를 들고 있었다. 은혜의 손에 들린 가위가 이런 시간에 이런 자리에 와 있는 탓으로, 몇 사람의 병사가 혹시 살았을 목숨을 잃었을는지도 모르며, 적어도 끊지 않아도 될 다리를 끊어야 할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나이팅게일의 몹쓸 후배였다. 명준이 들고 있는 보고서에는, 우군의 한 사단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어떤 움직임의 낌새가 적혔는지도 몰랐다. 그저 말이 아니라, 그것은 있을 법한 일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 그들이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반역자로서만 가능했다. 그는 동굴 어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그녀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전세는 나날이 못해지고 있었다. 항공기의 도움을 받지 못한 공산군은 조그만 곳을 지켜 내기 위해서도 된 값을 치렀다. 의료시설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고 보니 군의관과 간호부의 가림도 뜻없는 일이 됐다. 응급처치에도 모자랄 거리를 가지고는, 군의관이라고 별 재주가 있을 턱이 없었다. 은헤는 환자들을 돌보느라 하루에 서너 시간 잠을 잘까말까였다. 낮 동안 동굴에서 만날 때도 그녀는, 먼저 와서 졸고 있을 적이 많았다. 명준의 가슴에서 떨다가도, 불시에, 환자들이 기다린다고, 쉽사리 가라않아 주지 않는 숨결 사이로 앓는 소리 하듯 띄엄띄엄 말하면서, 그를 밀치고 일어섰다. 잘 알고도 남는 그런 몸가짐마저도 당장에는 서운한, 몸의 길이 이럴 때는 슬펐다.

 

누워서 보면, 일부러 가리기나 한 듯, 동굴 아가리를 덮고 있는 여름풀이, 푸른 하늘을 바탕 삼아 바닷풀처럼 너울너울 떠 있다. 접은 지름 3미터의 반달꼴 광장. 이명준과 은혜가 서로 가슴과 다리를 더듬고 얽으면서, 살아 있음을 다짐하는 마지막 광장.

 

그 무렵, 공산군이 가진 화기의 모두가, 전선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산허리에 판 대피호에서 꿈쩍을 못 하던, 나머지 전차들이, 앞쪽의 더 나은 쏠 자리로, 밤을 타서 옮아갔다.

 

있는 대로 예비대가, 모조리 앞쪽으로 놓아졌다. 명준은 사령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 총공격이 가깝게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알렸을 때, 은혜는, 방긋 웃었다.

 

"죽기 전에 부지런히 만나요, ?"

 

그날 밤 명준은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렸으나, 끝내,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튿날, 공산군의 모든 화기는, 마지막 총공격의 불문을, 한꺼번에 열었다. 그러나, 움직임이 새어 나갔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거의 때를 같이하여,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까맣게 하늘을 덮고 나타난 유엔 공군의 폭격기는, 고맙게도 모여 준 공산군 화기와 병력을 갈겨 댔다. 낙동강에 물이 아니라 피가 흘렀다는 싸움은 이날의 그것이었다. 은혜는 부지런히 만나자던 다짐을 아주 어기고 말았다. 전사한 것이다.

 

테이블에 펼쳐진 해도 위에 컴퍼스가 던져져 있고, 선당은 보이지 않았다.

 

마카오가 가까워 오자, 석방자들은 또다시 선장에게 상륙시켜 주도록 말해 보라고 그를 졸라 대기 시작했으나, 명준은 끝내 깔아 버리고 말았다. 그들 얼굴에 새겨진 불만과 적의를 보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오래 쌓인 고달픔이 한꺼번에 덮쳐드는지 어깨가 무겁고, 남하고 말 붙이기가 귀찮았다.

 

송환 등록이 시작됐을 무렵 갈팡질팡하던 일이 떠올랐다. 제삼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자기를 위해 마련된 길이라고 그는 생각했었다.

 

싸움이 멎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명준은 깊은 구렁에 빠졌다. 북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예 없었다. 아버지가 전쟁 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 수는 없었으나, 설령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 한 가지만으로 북을 택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살 테지. 효도 같은 걸 하기엔, 현실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리고 북녘 같은 데서 살붙이란 무엇이던가. 그러고 보면, 이제 그가 북으로 가야 할 아무 까닭도 없었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은혜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에 들어 있다는 것을 풀어서 말하면, 그 사회 속의 어떤 사람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라면,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의, 어디다 뿌리를 박을 것인가. 더구나 그 사회 자체에 대한 믿음조차 잃어버린 지금에. 믿음 없이 절하는 것이 괴롭듯이, 믿음 없이 정치의 광장에 서는 것도 두렵다. 코뮤니스트란, 월북할 때 그러려니 그려 본, 그런 인종들이 아니었다. 한때 그들의 존재를, 믿음이 없어진 현대에서, 한가지 기적으로 생각했다. 이상주의의 마지막 지킴꾼들. 그는 스탈리니즘과 기독교, 특히 카톨릭을 한 가지 정신의 소산으로 보는 아날로지를 배급받은 수첩에 적어 보았다.

 

그리스도교

 

1. 에덴 시대

 

2. 타락

 

3. 원죄 가운데 있는 인류

 

4. 구약 시대 여러 민족의 역사

 

5.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남

 

6. 십자가

 

7. 고해성사

 

8. 법왕

 

9. 바티칸궁

 

10. 천년왕국

 

스탈리니즘

 

1. 원시 공산사회

 

2. 사유제도의 발생

 

3. 계급사회 속의 인류

 

4. 노예·봉건·자본주의 사회의 역사

 

5. 칼 마르크스의 나타남

 

6. 낫과 망치

 

7. 자아비판제도

 

8. 스탈린

 

9. 크렘린궁

 

10. 문명 공산사회

 

에덴 동산에서의 잘못에서 법왕제에 이르는 기독교의 걸음걸이는, 그대로 교뮤니즘의 낳음과 자람의 걸음에 신기롭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들은, 쌍둥이 그림이었다.

 

철학을 배운 그는, 이 곡절을 흘려 보지는 못했다. 곡절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제자였다는 데 있었다. 헤겔은, 바이블에서, 먼저, 역사적 옷을 벗기고, 다음에 고장 색깔을 지워 버린 후, 그 순수 도식만을 뽑아 낸 것이다. 말하자면, 헤겔의 철학은, 비이블의 에스페란토 옮김이었다. 도식이란, 그것이 뛰어날수록 본뜨기 쉽다. 마르크스는 선생이 애써 이루어 놓은 알몸에다, 다시 한 번 옷을 입혔다. 경제학과 이상주의의 옷을.

 

초대 교회의 고지식한 정열과 알뜰한 믿음을, 현대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듯이, 비록 코뮤니즘이 겉으로는 넓은 땅을 거느리기에 이르렀지만, 그 창시자들의 바르게 생각하고 착하게 살렸던, 고지식한 마음은 없어진 지 오래다. 유럽 사람들의 믿음에서 헤겔의 철학이 달콤한 아편이요 씻어 낼 수 없는 독소가 된 것처럼, 이명준에게 있어서, 스탈린주의 사회에서 살아 보았다는 겪음은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굿마당에서 그들은, 헛것을 섬김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제 머리로 참을 헤아림이 아니라 푸닥거리에 기대는 곳이었다.

 

제가 낸 신명이 아니라, 무쇠 같은 멍에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사랑과 용서가 아니라, 미움과 앙갚음이었다.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 성경 대신 마르크스를 택한, 차르 나라였다.

 

스탈리니즘에 있어서의 마틴 루터는, 아직 없다. 크렘린의 서슬에 맞선 사람은, 이단 신문소에서 화형이 되었다. 권위는 아직도 튼튼하다. 하느님이 다시 온다는 말이 2천 년 동안 미루어져 온 것처럼, 공산 낙원의 재현은 30년 동안 미루어져 왔다. 여기까지가 그가 알아볼 수 있었던 벼랑 끝이었다. 벼랑을 뛰어넘거나 타고 내리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 무서운 밀림에 과연 얼마나한 자리를 낼 수 있을지, 자기 힘에 대한, 지적 체력에 대한 믿음이 자꾸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북조선 사회에서는 이런 물음을 누군가와 힘을 모아 풀어 나간다는 삶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벌써 전쟁이 나기 전에 알고 있은 일이었다. 오랜 세월을 참을 차비가 되어 있었다. 역사의 속셈을 푸는 마술 주문을 단박 찾아내지 못한다고 삶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참고, 조금씩, 그러나 제 머리로 한치씩이라도 길을 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그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북조선 같은 데서, 적에게 잡혔다가 돌아온 사람의 처지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이명준은 자기한테 돌아온 운명을 한탄했다. 적어도 남만큼한 충성심을 인정받으면서, 자기가 믿는 바대로 남은 세월을 조용히, 그러나 자기 힘이 미치는 너비에서 옳게 써나간다는 삶조차도 꾸리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제국주의자들의 균을 묻혀 가지고 온 자로서, 일이 있을 적마다 끌려 나와 참회해야 할 것이었다. 마치 동네 안에 살면서도 사람은 아닌 문둥이처럼. 그런 처지에서 무슨 일을 해볼 수 있겠는가.

 

이것이 돌아갈 수 없는 정말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남녘을 택할 것인가? 명준의 눈에는, 남한이란 키에르케고르 선생 식으로 말하면,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 아닌 광장인 것이었다.

 

미친 믿음이 무섭다면, 숫제 믿음조차 없는 것은 허망하다. 다만 좋은 데가 있다면, 그곳에는, 타락할 수 있는 자유와, 게으를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정말 그곳은 자유 말을이었다. 오늘날 코뮤니즘이 인기 없는 것은, 눈에 보이는, 한마디로 가리킬 수 있는 투쟁의 상태 ---- 적을 인민에게 가리켜 줄 수 없게 된 탓이다. 마르크스가 살던 때에는 그렇게 뚜렷하던 인민의 적이 오늘날에는, 원자 탐지기의 바늘도 갈팡질팡할 만큼 아리송하기만 하다. 가난과 악의 왕초들을 찾기 위하여, 나누어지고 얽히고 설킨 사회 조직의 미궁 속을 헤매다가, 불쌍한 인민은, 그만 팽개쳐 버리고, 예대로의 팔자풀이집, 동양 철학관으로 달려가서, 한 해 토정비결을 사고 만다. 일류 학자의 분석력과 직관을 가지고서도, 현대 사회의, 탈을 쓴 부패 조직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든 판에, 김서방 이 주사를 나무라는 건, 아무래도 너무하다. 그래서 자유가 있다. 북녘에는, 이 자유가 없었다. 게으를 수 있는 자유까지도 없었다. 그건 제 멋 짓밟기다. 남한의 정치가들은 천재적이었다. 들어찬 술집마다 들어차서, 울랴고 내가 왔던가 웃으랴고 왔던가를 가슴 쥐어 뜯으며 괴로워하는 대중을 위하여, 더 많은 양조장 차릴 허가를 내준다. 갈보장사를 못 하게 하는 법률을 만들라는 여성 단체의 부르짖음은 그날 치 신문 기삿거리를 만들어 주는 게 고작이다. 그들의 정치철학은 의뭉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런 데로 풀리는 힘을 막으면, 물줄기가 어디로 터져 나올지를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에겐, 진심으로, 교회에 나가기를 권유하고, 외국에 보내서 좋은 가르침을 받게 하고 싶어한다.

 

이런 사회. 그런 사회로 가기도 싫다. 그러나 둘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박헌영 동지가 체포되었다 하오. 전해 듣게 된 그 흉한 소식. 아버지.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짐승이었다. 그때, 중립국에 보내기가 서로 사이에 말이 맞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얼이 빠져 주저앉을 참에 난데없이 밧줄이 내려온 것이었다. 그때의 기쁨을 그는 아직도 간직한다. 판문점. 설득 자들 앞에서처럼 시원하던 일이란, 그의 지난날에서 두 번도 없다.

 

방 안 생김새는, 통로보다 조금 높게 설득 자들이 앉아 있고, 포로는 왼편에서 들어와서 바른편으로 빠지게 돼 있다. 네 사람의 공산군 장교와, 국민복을 입은 중공 대표가 한 사람, 합쳐서 다섯 명. 그들 앞에 가서, 걸음을 멈춘다. 앞에 앉은 장교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한다.

 

"동무, 앉으시오."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이번에는, 그 옆에 앉은 장교가 나앉는다.

 

"동무, 지금 인민공화국에서는, 참전 용사들을 위한 연금 법령을 냈소. 동무는 누구보다도 먼저 일터를 가지게 될 것이며, 인민의 영웅으로 존경받을 것이오. 전체 인민은 동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고향의 초목도 동무의 개선을 반길 거요."

 

"중립국."

 

그들은 머리를 모으고 소곤소곤 상의를 한다.

 

처음에 말하던 장교가, 다시 입을 연다.

 

"동무의 심정도 잘 알겠소. 오랜 포로 생활에서, 제국주의자들의 간사한 꼬임수에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용서할 수 있소. 그런 염려는 하지 마시오. 공화국은 동무의 하찮은 잘못을 탓하기보다도, 동무가 조국과 인민에게 바친 충성을 더 높이 평가하오. 일체의 보복 행위는 없을 것을 약속하오. 동무는……"

 

"중립국."

 

중공 대표가, 날카롭게 무어라 외쳤다. 설득하던 장교는, 증오에 찬 눈초리로 명준을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좋아."

 

눈길을, 방금 도어를 열고 들어서는 다음 포로에게 옮겨 버렸다.

 

아까부터 그는 설득 자들에게 간단한 한마디만을 되풀이 대꾸하면서, 지금 다른 천막에세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 광경을 그려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도 자기를 세워 보고 있었다.

 

"자넨 어디 출신인가?"

 

"……"

 

", 서울이군."

 

설득 자는,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면서,

 

"중립국이라 지만 막연한 얘기요. 제 나라보다 나은 데가 어디 있겠어요. 외국에 가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지만, 밖에 나가 봐야 조국이 소중하다는 걸 안다구 하잖아요? 당신이 지금 가슴에 품은 울분은 나도 압니다. 대한민국이 과도기적인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는 걸 누가 부인합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 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허허허,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 나라 내 민족의 한사람이, 타향 만리 이국 땅에 가겠다고 나서서, 동족으로서 어찌 한마디 참고되는 이야길 안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남한 2천만 동포의 부탁을 받고 온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서, 조국의 품으로 데려오라는……"

 

"중립국."

 

"당신은 고등교육까지 받은 지식인입니다. 조국은 지금 당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버리고 떠나 버리렵니까?"

 

"중립국."

 

"지식인일수록 불만이 많은 법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 몸을 없애 버리겠습니까? 종기가 났다고 말이지요. 당신 한 사람을 잃는 건, 무식한 사람 열을 잃은 것보다 더 큰 민족의 손실입니다. 당신은 아직 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나는 당신보다 나이를 약간 더 먹었다는 의미에서, 친구로서 충고하고 싶습니다.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서, 조국을 재건하는 일꾼이 돼주십시오. 낯선 땅에 가서 고생하느니, 그쪽이 당신 개인으로서도 행복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대단히 인상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 어떻게 생각지 마십시오. 나는 동생처럼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만일 남한에 오는 경우에, 개인적인 조력을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명준은 고개를 쳐들고, 반듯하게 된 천막 천장을 올려다본다. 한층 가락을 낮춘 목소리로 혼잣말 외듯 나직이 말할 것이다.

 

"중립국."

 

설득 자는, 손에 들었던 연필 꼭지로, 테이블을 툭 치면서, 곁에 앉은 미군을 돌아볼 것이다. 미군은, 어깨를 추스르며, 눈을 찡긋 하고 웃겠지.

 

나오는 문 앞에서, 서기의 책상 위에 놓인 명부에 이름을 적고 천막을 나서자, 그는 마치 재채기를 참았던 사람처럼 몸을 벌떡 뒤로 젖히면서,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찔끔찔끔 번지고, 침이 걸려서 캑캑거리면서도 그의 웃음은 멎지 않았다.

 

준다고 바다를 마실 수는 없는 일. 사람이 마시기는 한 사발의 물. 준다는 것도 허황하고 가지거니 함도 철없는 일. 바다와 한잔의 물. 그 사이에 놓인 골짜기와 눈물과 땀과 피. 그것을 셈할 줄 모르는 데 잘못이 있었다. 세상에서 뒤진 가난한 땅에 자란 지식 노동자의 슬픈 환상. 과학을 믿은 게 아니라 마술을 믿었던 게지. 바다를 한잔의 영생수로 바꿔 준다는 마술사의 말을. 그들은 뻔히 알면서 권력이라는 약을 팔려고 말로 속인 꼬임을. 어리석게 신비한 술잔을 찾아 나섰다가, 낌새를 차리고 항구를 돌아보자, 그들은 항구를 차지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참을 알고 돌아온 바다의 난파자들을 그들은 감옥에 가둘 것이다. 못된 균을 옮기지 않기 위해서. 역사는 소걸음으로 움직인다. 사람의 커다란 모순과 업()에 비기면, 아무 자국도 못 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대까지 사람이 만들어 낸 물질 생산의 수확을 고르게 나누는 것만이 모든 시대에 두루 맞는 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 아닌가. 벌써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 동네가 알아낸 슬기. 사람이라는 조건에서 비롯하는 슬픔과 기쁨을 고루 나누는 것. 그래 봐야, 사람의 조건이 아직도 풀어 나가야 할 어려움의 크기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이루어 놓은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이루어야 할 것에만 눈을 돌리면, 그 자리에서 그는 삶의 힘을 잃는다. 사람이 풀어야 할 일을 한눈에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은혜의 죽음을 당했을 때, 이명준 배에서는 마지막 돛대가 부러진 셈이다. 이제 이루어 놓은 것에 눈을 돌리면서 살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다. 팔자소관으로 빨리 늙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된 몸의 길, 마음의 길, 무리의 길. 대일 언덕 없는 난파꾼은 항구를 잊어버리기로 하고 물결 따라 나선다. 환상의 술에 취해 보지 못한 섬에 닿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 섬에서 환상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서운 것을 너무 빨리 본 탓으로 지쳐 빠진 몸이, 자연의 수명을 다하기를 기다리면서 쉬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 결정한, 중립국 행이었다.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 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 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 지도 모를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병원 문지기라든지, 소방서 감시원이라든지, 극장의 매표원, 그런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쓰는 일이 적고, 그 대신 똑같은 움직임을 하루 종일 되풀이만 하면 되는 일을 할 테다. 수위실 속에서 나는 몸의 병을 고치러 오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나는 문간을 깨끗이 치우고 아침 저녁으로 꽃밭에 물을 준다. 원장 선생이 나올 때와 돌아갈 때는 일어서서 경례를 한다. 간호부들이 시키는 잔심부름을 기꺼이 해줘야지. 신문을 사달라느니 모퉁이 과자집에서 초콜릿 한 개만 사다 달라느니 따위 귀여운 부탁을 성심껏 해준다. 그녀들은 봉급날이면 잔돈푼을 모아서 싸구려 모자나 양말 같은 조촐한 선물을 할 게다. 나는 고마워라 허리를 굽히며 받는다. 그리고 빙긋 웃는다. 그녀들 주엔 새로 온 애송이가 이렇게 물어 본다.

 

"리 아저씬 중국분이시죠?"

 

그러면 고참 언니의 한 사람은, 가벼운 경멸을 섞으면서 신입생의 무지를 고친다.

 

"애두, 코리안이란다."

 

나는 내내 웃음을 띤 채 말이 없다. 잠도 숙직실에서 잔다. 밤중에 돌아보다가 숙직 간호원이 끄기를 잊어버린 가스 화덕을 발견하여, 그 큰 병원을 불에서 구하게 된다. 나는 표창을 받고 사무실로 올려 주겠다고 한다. 나는 모자를 집어 들고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말한다.

 

"인제 가봐야겠습니다, 원장 선생님. 자리를 너무 비우면 안 됩니다."

 

마당을 가로질러 수위실로 걸어간다. 창문에 붙어 서서 존경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원장 선생의 눈길을 등에 느끼면서. 나는 신문을 가끔 본다. 그것도 '해외 토픽'쯤이다. 몇 년에 한 번쯤, 코리아 얘기가 서너 너덧 줄 날 때가 있을 것이다. '코리아 관광협회에서는, 코리아에 오는 외국 여행자들이 해마다 늘기 때문에, 어린애들이 그들을 따라다니느라고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현지 주민의 불평을 정부 당국에 강력히 드러낸 탓으로 내각이 넘어졌다.'

 

이 글을 보면서 나는 빙긋 웃는다. 기웃해 들여다보던 간호부가 한마디 한다.

 

"이런 나라는 얼마나 살기 좋을까?"

 

결혼? 안 한다. 결혼하지 못해서 색시 고르러 온 게 아니므로. 또는 도시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망루에서 하루 종일 보내는 소방서 불지기는 어떤가.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도희 경치는 삶의 터이자 노래일 거다. 그 노래가 곧 삶이 된다. 딱정벌레처럼 발발 기어 다니는 자동차들. 성냥갑 모양 반듯한 공장과 굴뚝. 장난감 같은 도시의 지붕이 늘 발밑에 있다. 나는 그 지붕 밑에 벌어지는 삶을 떠올려 본다. 사내가 색시 앞에 꿇어앉아서 사랑한다고 한다. 내 사랑을 어떻게 알렸으면 좋겠느냐고 도리어 졸라 보는 체한다. 여자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웃기만 한다.

 

"아가씨, 믿어 드리시우. 그 양반 하는 말이 정말입넨다."

 

나는 자기 자리도 잊어버리고 들리지도 않을 소리를 거든다. 안 들려도 그만이다. 좋은 말을 듣고 싶으면 더 휼륭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게다. 결국 조언이란 쓸데없는 것, 사람에게 조언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만이 조언할 수 있지만 그도 지금은 지쳤다. 옛날처럼 상냥하지 못하다. 사람이 나쁘달 수도 없다. 어떻게 되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된 것뿐이다. 사람과 하느님, 어차피 남남끼린데 잘된 일이다. 불이 보인다. ? 시장네 집 언저리다. 요란한 나팔 소리. 길을 막는구나. 달린다. 옳지 벌써 호스에서 물이 뿜어지누나. 엣헴 더 볼 것 있나. 제때에 알아보면 꺼버린 거나 다름없지. 사람 일도 그렇다? 몰라 몰라. 귀찮은 말씀은 이제는 그만. 불 끄는 놈이 객담은 무슨 객담.

 

또 극장 매표원은 어떻구. 돈을 디미는 손을 보고, 일자리며 나이며 틀림없이 알아맞히게 이골이 날 즈음, 표팔이를 자동식으로 하자는 소리가 나온다. 나는 전국 표팔이 일군들의 앞장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대통령 관저 앞에서 들었다 놓는다.

 

"극장 매표구에서 겪는 즐거운 붐빔을 죽이지 말라."

 

지나가던 대학생이 플래카드의 문구를 보고 친구보고 말한다.

 

"옛날 모더니스트들의 시 구절 같잖아?"

 

낮굿이 있을 땐 밤에는 쉰다. 수수한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단골 술집으로 간다. 가벼운 것만 마시고 팁을 톡톡히 놓고 가는 손님이래서 그들은 늘 상냥하다. 여급이 사랑 비슷한 걸 하자는 눈치를 보인다. 나는 손가락으로 '못써 그런 소리' 해 보인다. 그녀는 숫처녀처럼 빨개지면서 그러나 눈썹을 슥 치켜 보이고는 선선히 돌아서 버린다. 나는 아파트에서 산다. 나가는 시간과 돌아오는 시간이 그대로 어김 없는 탓으로, 정말은 그보다 방세가 꼬박꼬박인 탓으로 마담은 안팎일 같은 걸, 가까운 살붙이한테 털어놓듯이 건네 오는 때가 많다. 그러면 나는 숫제 농으로 돌려 버린다. 8호실 젊은 친구는 술만 마신 날이면 가스 시설이 나쁘다는 투정이니 어쩌면 좋아요, 꼴에 방세는 몇 달씩 밀리면서. 할라치면 내 대답, 아 가스 회사 사람을 한 분 7호 실에 들이시구려. 마담은 웃고 만다. 마담도, 겪고 난 사람이다.

 

이런 모든 것이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중립국을 골랐다.

 

그는 벽장문에 달린 거울에 얼굴을 비춰 봤다. 핏발 선 눈. 꺼진 볼. 흐트러진 머리. 5월달 새잎처럼 싱싱한 새 삶의 길에 내가 왜 이 꼴인가?

 

그는 다시 층계를 밟아 내려왔다. 어제 저녁에 보초를 서던 늙은 뱃사람이 나무궤짝을 메고 지나가다가 그를 보자, 말을 걸었다.

 

"미스터리, 캘커타에 가면 내가 한잔 사겠소."

 

전날 밤 일이 배 안에 퍼진 게 틀림없었다. 철없는 석방자들이 야료를 부린 가운데서 알 만하게 굴었대서, 믿음이 더해진 눈치다. 꼬집어 그럴 만한 일은 없어도, 어느 편인가 하면 건성으로 쌀쌀하기만 하고, 가끔 건방지기조차 하던 무라지의 어제 저녁에 보여 준 마음씨도, 분명히 그런 데서 오는 것이었다. 명준은 그런 배 안의 눈치를 채자 말할 수 없이 울적해졌다. 남들이 멋대로 자기를 영웅으로 만들어 버린 게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한 일이 아니었다. 따지고 들면, 그때 김이 왜 그토록 미웠는지 알 수 없다. 그때 내 가슴을 메스껍게 하던 덩어리를 본인도 풀이하지 못하는데, 이 사람들은 용케 척척 알아서 값을 매긴다. 뱃사람이 메고 있던 궤짝은 가벼운 물건이었던 모양으로, 그는 한 손으로 궤짝을 꼬나 갑판에 놓으면서, 명준에게 담배를 청했다.

 

"캘커타에 닿는 대로 상륙시킬 모양이니깐."

 

"그때 술을 사신단 말씀이죠?"

 

"."

 

"왜 저한테 술을 삽니까?"

 

"? 왜라니? ."

 

이 늙은 바다의 노동자는, 명준의 물음에 적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의 단순한 머리로, 딴은, 제가 명준에게 느끼는 호감을 풀이하기는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명준은 우스워졌다. 그는 짓궂게 다그쳤다.

 

"글세 왜 저한테 술을 사산답니까?"

 

뱃사람은 내려놓았던 짐을 도로 어깨에 얹었다.

 

"좌우간 사고 싶으니까."

 

그는 말을 마치고는, 더 어물거리다가는 봉변이나 할 것처럼, 일부러 아랫도리를 묘하게 휘청거리며, 게다가 짐을 붙잡지 않은 한쪽 팔을 내저어 크게 활개를 치면서, 뱃머리 쪽으로 내빼 버렸다. 명준은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바다의 말은 남자답다. 좌우간 사고 싶으니까.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생각을 고쳐, 뒤쪽 난간으로 찾아갔다. 어쩌다 보니 그 자리에 단골이 돼 있었다. 혼자 있고 싶을 때는, 발길이 알아서 이리로 옮겼고, 무슨 궁리를 하더라도 여기 오면 마무리가 되었다. 게다가 이 모퉁이는 발길도 드물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아무 꾸밈도 없는 민숭한 갑판이, 하얗게 햇빛이 눈부신 작은 놀이터 같았다. 이렇게 벽을 기대고 서서 갑판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노라면, 소학교 때, 교사 담벼락에 기대어 햇볕을 쬐던 일이 생각난다. 그토록 호젓했다. 여러 사람이 북적거리는 데를 비켜 늘 이런 자리를 찾아오는 마음. 남하고 돌아선, 아무리 초라해도 좋으니까 저 혼자만이 쓰는, 그런 광장 없이는 숨을 돌리지 못하는 버릇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약한 자가 숨는 데였다. 낙동강 싸움터에서 찾아낸 굴도 그렇다. 그는 거기에 아무도 데리고 가지 않았다. 데리고 가면 그 동굴이 주는 거룩한 호젓함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은혜가 나타났을 때, 그녀도 굴을 쓰게 해주었다. 한 마리 가장 가까운 암컷에게만은 숨는 굴을 가리켜 주었다. 사람이란 그런 것, 아니 나란 놈. 그 스산한 마당에서, 일 미터 평방의 자리에 잠시 단 혼자서만 앉아 본다는 건 무엇이었을까. 애당초 여자를 끌어들일 셈이 아니었던 바에야, 자기 혼자의 때와 자리를 몰래 만들어 놓자는 생각 말고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아니면 어떤 영감으로 은혜가 오리라 미리 알고, 그녀와 둘이서 뒹굴 굴을 만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웃기지 말자, 누군가를 웃기지 말자. 남이 들으면 창피하다. 우리 목숨을 주무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장삼이사, 그놈이 그놈이다. 자기만 별난 줄 알면 못난이 사촌이다. 광장에서 졌을 때 사람은 동굴로 물러가는 것. 그러나 과연 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사람은 한 번은 진다. 다만 얼마나 천하게 지느냐, 얼마나 갸륵하게 지느냐가 갈림길이다 . 갸륵하게 져? 아무튼 잘난 멋을 가진 사람들 몫으로 그런 자리도 셈에 넣는다 치더라도 누구든 지는 것만은 떼어놨다. 나는 영웅이 싫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 좋다. 내 이름도 물리고 싶다. 수억 마리 사람 중의 이름 없는 한 마리면 된다. 다만, 나에게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달라. 그리고, 이 한 뼘의 광장에 들어설 땐,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만한 알은체를 하고, 허락을 받고 나서 움직이도록 하라. 내 허락도 없이 그 한 마리의 공서자를 끌어가지 말라는 것이었지. 그런데 그 일이 그토록 어려웠구나.

 

갑판을 눈 여겨 내려다보면, 그 위에 비치는 햇빛의 밝기는 넓이 구석구석마다가 고르지는 않았다.

 

퍽으나 미미하지만 어룽어룽한 다름이 있다. 갑판의 나뭇결 빛깔이 얼마쯤씩 다른 탓인가 하고 살펴보는데, 잘 모르겠고, 그것은 아무튼 그 위에서 되비치는 빛의 꺾임은 고르지 못하다. 쭈그리고 앉아서 갑판에 손바닥을 댔다. 따뜻했다. 손을 움직여 쓸어 보았다. 꺼끌꺼끌한 겉은 그 따뜻한 기운만큼은 정답지 못했으나, 손바닥을 맞아들이는 부피에는 닿음 세만이 지니는 믿음성이 있었다. 자꾸 슬어 보았다. 지난날, 은혜의 몸을 이렇게 쓸어 보았다. 이 햇빛에 익은 나무처럼 따뜻하고, 그보다는 견줄 수 없이 미끄러운 물질이었다. 자기 손을 보았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더듬고, 무엇인가를 잡고 있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외로운 놈이었다.

 

희망의 뱃길, 새 삶의 길이 아닌가. 왜 이렇게 허전한가. 게다가 무라지와 늙은 뱃사람은 캘커타에서 술까지 살 것이다. 왜 이런가. 일어서서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배 꼬리에서 바닷물이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들어서는 뒤로 길다란 물이랑을 파간다. 거대한 새끼가 꼬이듯 틀어 대는 물살은 잘 자란 힘살의 용솟음을 떠올렸다. 그때, 그물거품 속에서 흰 덩어리가 쏜살같이 튀어나오면서, 그의 얼굴을 향해 뻗어 왔다. 기겁하면서 비키려 했으나, 그보다 빨리, 물체는 그의 머리 위로 지나서, 뒤로 빠져 버렸다. 돌아다봤다. 갈매기였다. 뱃고리 쪽에서 내려꽂히기와 치솟기를 부려 본 것이리라. 그들이었다. 배를 탄 이후 그를 괴롭히는 그림자는. 그들의 빠른 움직임 때문에, 어떤 인물이 자기를 엿보고 있다가, 뒤돌아보면 싹 숨고 마는 환각을 주어 왔던 것이다. 그는 붙잡고 있는 난간에 이마를 기댔다. 머릿속이 환히 트이는 듯, 심한 현기증으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자 울컥 메스꺼웠다. 난간 박으로 목을 내밀기가 바쁘게 희멀건 것이 저 아래 물이랑 속으로 떨어져 갔다. 바다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 배설물의 낙하는 큰 바다에 침을 뱉은 것처럼 몹시 작은 느낌을 주는 광경이었다. 습쓸한 군침이 입 안에 가득 괴었을 때, 한꺼번에 뱉어 버리고 돌아섰다. 여태까지 뱃멀미는 없었다. 배가 크고 날씨가 맑아서 여태까지 편한 바닷길이었다. 아직도 보초를 섰던 자리쯤에서 다시 한 번 침을 뱉고 복도로 들어섰다. 뱃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나, 밖으로 향한 창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어서, 문간은 한결같이 컴컴했다.

 

자기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자기를 따라오던 그림자가 문간에 멈춰 섰다는 환각이 또 스쳤다.

 

박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양주병이 언뜻 보였다. 그는 팔을 뻗쳐 병을 잡으면서 돌아섰다. 흰 그림자가 쏜살같이 저만치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따라가면서 힘껏 병을 던졌다. 그림자는 멀리 사라지고 병은 문지방에 부딪혀서 박살이 되어, 깨어진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더 따라가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고 선 박을 남겨 놓고, 자리에 기어 올라가서 번듯 누웠다. 가슴이 활랑거린다. 손을 가슴에 얹었다. 풀무처럼 헐떡거린다. 망막에서는 포알처럼 튀어들던 바다새의 흰 부피가, 페인트를 쏟아 부은 듯, 아직도 끈적거렸다. 벌떡 일어났다. 도로 누웠다. 다시 일어났다. 아무리 해도 편치 않았다. 누워서 쉬려던 생각을 버리고 방바닥에 내려섰다. 아직도 거기 서 있는 박을 흘끗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할 듯이 다가섰으나 못 본 체해 버리고 방을 나섰다. 좌우 문간에서 서성거리던 얼굴들이 한결같이 쑥 들어갔다. 곧장 선장실로 올라왔다. 선장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벽장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양이 보기 싫어서 저쪽을 보고 돌아앉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제 저녁 그를 덮친 당돌한 물음이 언뜻 살아났다. 뒤를 이어 배 꼬리 쪽에서 쏜살같이 날아오던 흰 새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 그들이라? 그는 주먹을 들어 이마에 댔다. 머릿속은 오히려 말짱했다.

 

또 속이 올라왔다. 이를 악물고 쓴 침을 삼켰다. 갈갈. 갈매기 우는 소리가 났다. 날 듯이 창가로 달려가, 윗몸을 밖으로 내밀며 고개를 치켰다.

 

그들은 잠시 쉬려는 듯, 마스트에 매달려 있었다. 저것들 때문이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갈갈, 께륵, 께륵. 울음 소리는 비웃는 듯 떨어져 온다. 그는 목이 아파서 고개를 돌렸다. 섬뜩한 짓을 한 이 불길한 새들. 허공을 한참 쳐다보던 눈이 찬장에 달린 거울에 멎었다. 눈에 살기가 있다. 찬장문을 연다. 오른편에 사냥총이 세워져 있다. 약실을 살펴봤다. 총알이 없다. 총알은 서랍 속에 있었다. 총알을 잰 다음, 잠글쇠를 풀었다. 사냥할 때에 지척에 있는 짐승에게 다가가는 포수처럼, 살금살금 걸어서 창에 이르렀다. 갈매기들은 아직 거기 있었다. 창틀에 등을 대고, 몸을 밖으로 젖히고, 총을 들어 어깨에 댔다. 하늘에 구름은 없었다. 창대처럼 꼿꼿한 마스트에 앉은 흰 새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마리 가운데 아래쪽, 가까운 데에 앉은 갈매기가 총구멍에 사뿐히 얹혀졌다. 이제 방아쇠만 당기면 그 흰 바다새는 진짜 총구 쪽을 향하여 떨어져 올 것이다. 그때 이상한 일이 눈에 띄었다. 그의 총구멍에 똑바로 겨눠져 얹혀진 새는 다른 한 마리의 반쯤 한 작은 새였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은혜가 한 말. 총공격이 다가선 줄 알면서도 두 사람은 다 어느 때하고 다르지 않았다. 사랑의 일이 끝나고, 그들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

 

깊은 우물 속에 내려가서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누구의 목소리 같지도 않은 깊은 울림이 있는 소리로 그녀가 불렀다.

 

"?"

 

"--"

 

명준은 그 목소리의 깊이에 몸이 굳어졌다.

 

"뭔데, ?"

 

"--"

 

그녀는 돌아누우면서 남자의 목을 끌어당겨 그 목소리처럼 깊숙이 남자의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남자의 귀에 대고 그 말을 속삭였다.

 

"정말?"

 

"아마."

 

명준은 일어나 앉아 여자의 배를 내려다봤다. 깊이 파인 배꼽 가득 땀이 괴어 있었다. 입술을 가져간다. 짭사한 바닷물 맛이다.

 

"나 딸을 낳아요."

 

은혜는 징그럽게 기름진 배를 가진 여자였다. 날씬하고 탄탄하게 죄어진 무대 위의 모습을 보는 눈에는, 그녀의 벗은 몸은 늘 숨이 막혔다. 그 기름진 두께 밑에 이 짭사한 물의 바다가 있고, 거기서, 그들의 딸이라고 불릴 물고기 한 마리가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붙들어 자기 가슴으로 넘어뜨리면서, 남자의 뿌리를 잡아 자기의 하얀 기름진 기둥 사이의 배게 우거진 수풀 밑에 숨겨진, 깊은, 바다로 통하는 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딸을 낳을 거예요. 어머니가 나는 딸이 첫애기래요."

 

총구멍에 똑바로 겨눠져 얹혀진 새가 다른 한 마리의 반쯤한 작은 새인 것을 알아보자 이명준은 그 새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자 작은 새하고 눈이 마주쳤다. 새는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눈이었다. 뱃길 내내 숨바꼭질해 온 그 얼굴 없던 눈은. 그때 어미 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우리 애를 쏘지 마세요? 밤에 댄 총몸이 부르르 떨었다. 총구에는 솜구름처럼 뭉실한 덩어리가 얹혔을 뿐. 마스트 언저리에 구름이 옮아왔다.

 

망가진 기계가 헐떡이듯, 밖으로 나갔던 몸을 간신히 창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총을 내린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에는 굵다란 진땀이 이마에 솟고, 볼 따귀가 민망스럽게 푸들푸들 떨린다.

 

사람이 올라오는 기척에, 재빠르게 탄알을 뽑으면서 돌아서서, 벽장문을 열고, 먼저 있던 자리에 총을 놓았다. 벽장문을 닫고 돌아선 것과 거의 같이, 선장이 들어섰다.

 

가까운 사이에 흔히 그렇듯이, 선장은, 명준을 새삼 거들떠보는 일도 없이,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서, 해도 위에 몸을 굽혔다. 명준은, 낯빛을 감추려고 창문에 붙어 선 채, 선장에게 등을 돌렸다. 해도 위에 컴퍼스 스치는 소리만 바스락댄다.

 

"미스터 리."

 

"."

 

"인도에 가면 내 근사한 미인을 소개함세."

 

"미인을요."

 

", 내 조카야. 먼저 우리 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그는 구부렸던 몸을 일으켜, 멍한 눈으로, 명준이 막아 선 창문과 반대 창문으로 멀리 내다보았다. 곧 만나게 될, 가족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선장은 끝내 테이블에서 떨어져, 벽장 앞으로 가더니, 문을 열고, 사냥총을 꺼내 들었다. 명준은 굳어졌다. 선장은 엽총을 이리저리 만져 보다가, 먼젓번처럼, 명준에게 넘겼다. 명준은 총을 받아, 제대로 꼼꼼한 몸짓으로 어깨에 댔다. 그는 총대와 몸을 함께 핑그르르 움직여, 바다를 겨냥했다. 총 끝이 가리키는 곳 멀리, 바다와 하늘이 아물락말락 닿고 있다. 바다를 쏠 것인가.

 

총몸을 받친 왼팔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다. 그는 겨눔을 풀고, 총을 선장에게 돌려주고, 방을 나온다. 뱃간으로 간다. 방 안에 박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문간에는, 부서진 유리병 조각이 그대로 흩어져 있다. 마루에 널린 유리 조각을 밟는다. 유리는 구두 밑에서 짝짝, 소리를 낸다. 얼마를 그러니까, 더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방 안을 휘돌아본 후에, 또 갑판으로 나온다. 도무지 앉아야 할지 서야 할지, 허둥거려진다. 그는 선장실을 올려다본다. 또 그곳으로 갈 수도 없다. 켈커타에서 술을 산다던 늙은 뱃사람을 찾아볼까? 한참 걸어서 기관실로 간다. 거기에 그는 없다. 식당에 가본다. 그곳에도 없다. 안타까워진다. 침실로 간다. 그의 자리는 비어 있고 몸이 불편한 모양인지, 젊은 뱃사람 하나가, 이마에 손을 얹고 누워 있다. 다시 갑판으로 돌아온다. 그 늙은이를 만나서는 어쩌자는 것인가. 그를 찾아 헤매는 일은 그만두기로 한다. 발길은 절로 뒷갑판, 그의 자리로 옮아간다. 그곳은, 여전히 언저리를 얼씬하는 사람의 기척도 없이 햇살만 창창하다. 손잡이 틀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스크루가 파헤치는 물 이랑을 본다. 아무리 보아도 지루하지 않다. 한참 보고 있으면, 물살의 움직임이 이쪽의 마음을 끌어당겨 그의 마음도 바다가 되어, 거기 물거품을 일으키면서, 물 이랑을 파헤친다. 착각이 아니라, 확실한 평행 현상이 일어난다. 물결과 마음의 사이는, 차츰 가까워진다. 끝내 그의 몸과 물결은 하나가 된다. 그의 몸은 꿈틀거리는 물이랑을 따라, 곤두박질한다. 꼬이고 풀리는 물결 속에 그의 몸뚱어리가 풀려 나간다. 그의 몸은 친친 막아 놓은 밧줄처럼, 배에 얹힌 대로지만, 스크루의 물거품처럼, 술술 풀려 나가서는, 말간 바닷물이 된다. 몸의 세포가 낱낱이 흩어져, 세포 알알이 물방울과 어울려 튄다.

 

자꾸 뒤로 뽑아 내는 물 이랑은, 이윽고, 크낙한 바다의 무게 속에, 가라앉아 버린다.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바다의 이물심은 견줄 데 없이 세다. 그는 상처를 줄 수 없는 불가사리다. 그 속에 파붇힌다. 자꾸 몸이 풀린다.

 

꼬꾸라질 듯 앞으로 숙인 몸을, 황망히 끌어들인다. 손잡이에서 멀어져, 갑판에 주저앉는다. 눈에서는 아직도, 소용돌이쳐 뻗어나는 물결의 그림자가 아물거린다. 그것마저 사라져 버렸을 때 막막한 그림자가 등에 업혀 온다. 또 일어서서, 손잡이를 잡는다.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든지 바라보면서, 자기 안에 있는 빈 데를 메우지 않으면, 금방 쓰러져 버릴 것 같다. 얼마를 그러고 있다가 또 뱃간으로 돌아온다. 방은 아까처럼 비어 있다.

 

자기 자리로 올라간다. 자려고 해서가 아니다. 그저 찾는 것도 없이, 머리맡을 어물어물 더듬는다. 손에 딱딱한 물건이 잡힌다. 부채다. 문간에서 기척이 난다.

 

얼른 돌아다보았으나, 아무도 나타나지는 않는다. 되도록 천천히 다락에서 내려와, 마루에 내려선다. 무슨 할 일이 없는가 찾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린다. 방 안에 새삼스레 그의 주의를 끌 만한 것은 없다. 발끝으로 살살 밀어서 유리 조각을 한곳에 모으고, 꽉 밟는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더 힘있게 밟는다. 그만한 힘으로 발바닥을 올려 밀 뿐, 유리는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진 모양인지, 꿈쩍도 않는다. 복도로 나선다. 복도에도 인기척은 없다. 선장실로 올라간다. 선장은 없다. 벽장문을 연다. 총이 제자리에 세워져 있다. 벽장문을 닫는다. 서랍을 열고, 아까 선장이 들어오는 바람에 미처 돌려 놓지 못한 총알을 제자리에 놓는다. 몹시 중요한 일을 마친 사람처럼, 홀가분해진다. 테이블로 가서 해도를 들여다본다. 이 배가 밟아 온 자국이 연필로 그려져 있다. 선장이 하는 것처럼 컴퍼스를 손가락으로 꼬나 잡고, 해도 위를 재보는 시늉을 한다. 한참 장난을 하다가 컴퍼스를 던져 버린다. 그때 여태까지 한 손에 부채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안다.

 

아까, 침대에서 손에 잡힌 대로, 들고 온 것이다. 의자에 걸터앉아서 부채를 쭉 편다. 바다가 있고, 갈매기가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다가, 스르르 눈을 감는다. 머릿속으로 허허한 벌판이 끝없이 열리며, 희미한 모습이 해돋이처럼 차츰 떠올라온다.

 

……펼쳐진 부채가 있다. 부채의 끝 넓은 테두리 쪽을, 철학과 학생 이명준이 걸어간다. 가을이다. 겨드랑이에 낀 대학신문을 꺼내 들여다본다. 약간 자랑스러운 듯이. 여자를 깔보지는 않아도, 알 수 없는 동물이라고 여기고 있다.

 

책을 모으고, 미라를 구경하러 다니다.

 

정치는 경멸하고 있다. 그 경멸이 실은 강한 관심과 아버지 일 때문에 그런 모양으로 나타난 것인 줄은 알고 있다. 다음에, 부채의 안쪽 좀더 좁은 너비에, 바다가 보이는 분지가 있다. 거기서 보면 갈매기가 날고 있다. 윤애에게 말하고 있다. 윤애 날 믿어 줘. 알몸으로 날 믿어 줘. 고기 썩는 냄새가 역한 배 안에서 물결에 흔들리다가 깜빡 잠든 사이에, 유토피아의 꿈을 꾸고 있는 그 자신이 있다. 조선인 콜호스 숙소의 창에서 불타는 저녁놀의 힘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는 그도 있다. 구겨진 바바리코드 속에 시래기처럼 바랜 심장을 하고 은혜가 기다리는 하숙으로 돌아가고 있는 9월의 어느 저녁이 있다. 도어에 뒤통수를 부딪히면서 악마도 되지 못한 자기를 언제까지나 웃고 있는 그가 있다. 그의 삶의 터는 부채꼴, 넓은 데서 점점 안으로 오므라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은혜와 둘이 안고 뒹굴던 동굴이 그 부채꼴 위에 있다.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목숨이 꿈이 다르지 않느니. 어디선가 그런 소리도 들렸다. 그는 지금, 부채의 사북자리에서 있다. 삶의 광장은 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 자 이제는? 모르는 나라, 아무도 자기를 알 리 없는 먼 나라로 가서, 전혀 새사람이 되기 위해 이 배를 탔다. 사람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성격까지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성격을 골라잡다니! 모든 일이 잘 될 터이었다. 다만 한 가지만 없었다면.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돌아서서 마스트를 올려다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본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 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질친 그는 지금 핑그르르 뒤로 돌아선다.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자기가 무엇에 홀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 넉넉한 뱃길에 여태껏 알아보지 못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피하려 하고 총으로 쏘려고까지 한 일을 생각하면, 무엇에 씌었던 게 틀림없다. 큰 새 작은 새는 좋아서 미칠 듯이, 물 속에 가라앉을 듯, 탁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되돌아오면서, 그렇다고 한다. 무덤을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시들이, 손짓해 본다. 내 딸아.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옛날, 어느 벌판에서 겪은 신내림이, 문득 떠오른다. 그러자, 언젠가 전에, 이렇게 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벌판을 지금처럼 떠올린 일이, 그리고 딸을 부르던 일이, 이렇게 마음이 놓이던 일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활짝 웃고 있다.

 

밤중.

 

선장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른 손목에 찬 야광시계를 보았다. 마카오에 닿자면 아직 일렀다.

 

"무슨 일이야?"

 

"석방자가 한 사람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

 

"지금 같은 방에 있는 사람이 신고해 와서, 인원을 파악해 봤습니다만, 배 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선장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물었다.

 

"누구야 없다는 게?"

 

"미스터 리 말입니다."

 

이튿날.

 

타고르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삼천 톤의 몸을 떨면서, 한 사람의 손님을 잃어버린 채 물체처럼 빼곡이 들어찬 남지나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 간다.

 

흰 바다새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마스트에도, 그 언저리 바다에도.

 

아마, 마카오에서, 다른 데로 가버린 모양이다.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 소설  
- 배경 : 시간 - 8·15 해방 ~ 6·25 종전 / 공간 - 남한과 북한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성격 : 관념적, 철학적  
- 문체 : 과거 회상의 독백체와 관념적 문체.  
- 주제 :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이상적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  
- 인물 :

  이명준 - 주인공. 남한과 북한을 오가면서 남한의 나태와 방종·북한의 부자연스러운 이념적 구속에 환멸을 느끼고 진정한 '광장'을 찾아가기로 하지만, 결국 삶의 참된 가치의 실현에 의문을 느끼고 바다로 투신 자살함.  
   이형도 - 명준의 부친. 남로당원으로 월북하여 북한에서 고위 관리를 하고 있지만, 명준에게 이상적 혁명가의 모습을 보이지 못함으로써 역시 회의의 대상이 됨.  
   윤애 - 명준의 남쪽 애인. 명준의 월북 후 명준의 친구와 결혼하여 평범하게 사는 여인.  
   은혜 - 명준의 북쪽 애인. 북한군 간호 장교로 종군하다가 명준의 아이를 가진 채 전사(戰死). 명준의 삶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었던 여인.  
- 구성 : 

발단 -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고초를 겪다가 명준도 월북함.  
전개 - 북쪽 사회의 부자유와 이념의 허상에 환멸을 느낌.  
위기 - 인민군으로 종군하다가 포로가 됨.  
절정 - 포로 석방 때 제3국을 선택함.  
결말 - 타고르호(號)에서 바다로 투신함.  

 

 

최인훈(崔仁勳, 1934년 4월 13일 ~ 2018년 7월 23일)

 

  대한민국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극작가이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광장》이 꼽힌다. 함경북도 회령에서 목재상인 집안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이 터진 1950년 12월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1956년 서울대학교 법대를 중퇴한 후 장교로 임관하여 1959년에서부터 1962년까지 군 복무를 했다.

 

  1958년 시인으로 첫 등단을 한 이후 장교 복무 중이던 1959년 《자유문학》에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 〈라울 전〉 등을 발표하면서 정식 등단했다.

 

  1960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광장》으로 문제작가의 평판을 받았는데 현실, 세계관계, 나아가서는 존재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품들이 많다. 작품에 〈구운몽(九雲夢)〉, 《회색인,》 〈크리스마스 캐럴〉, 〈열하일기(熱河日記)〉, 〈서유기(西遊記)〉, 〈화두〉 등이 있다. 단편 〈웃음소리〉로 12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1977년에는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로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을 수상하였으며 희곡도 몇 편 썼다. 다만 그의 희곡은 무대 상연을 본목적으로 쓴 게 아니라서 레제 드라마에 가깝다. 같은 해에는 서울예술전문대학(지금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되어 2001년 5월에 정년 퇴임할 때까지 재직했다. 정년퇴임한 후에도 특강을 했으며,

 

  2009년에 본인의 희곡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을 때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은퇴라는 것은 없다"고 관객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극작가로서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1977), 중앙문화대상 예술부문 장려상(1978), 서울극평가그룹상(1999),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상(2004) 등을 수상하였다.

2018년 7월 23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명지병원에서 대장암으로 타계하였다. 이문열, 성석제, 김승옥 등의 문인들과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등이 조문하였다. 사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줄거리  

  주인공 이명준은 대학 철학과 학생으로 아버지의 친구 집에 얹혀살고 있다. 그는 자기만의 밀실에 들어앉아 현실을 편협하게만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 살면서 대남 방송(對南放送)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를 빌미로 이명준은 경찰서에 불려가서 구타를 당하면서 아버지와 현재 어떤 연락이 있는가 조사를 당한다. 형사들은 그를 빨갱이로 몰아붙인다. 이를 계기로 그는 남한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한다.  

  그러나 이명준의 비판적 눈에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 제도의 굳어진 공식인 명령과 복종만이 보일 뿐이며, 활기차고 정의로운 삶은 찾을 수가 없었다. 즉, 진정한 삶의 광장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명준은 남과 북에서 이념의 선택을 시도했으나, 어느 곳에서도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는, 일종의 허무주의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명준은 '은혜'와의 사랑에서 이념의 무의미함을 다소나마 보상받지만, 그것은 개인적 삶의 한정된 행복일 뿐이고 진정한 의미의 광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전쟁에 뛰어든다. 그렇지만 전쟁에서도 새로운 삶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는 포로가 된다. 포로 송환 과정에서 남이냐 북이냐의 선택의 갈림길을 맞게 된 그는 중립국을 택한다. 이제 그가 나설 광장은 남쪽과 북쪽 어느 곳에도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을 싣고 가는 인도의 상선(商船) 타고르호(號)가 남지나해를 지나 항해하는 어느 날 밤, 그는 바다에 투신 자살하고 만다. 

 

 

 

이해와 감상  

  1960년 <새벽> 10월호에 발표. 이후 여러 차례 손질을 거쳐 장편으로 개작(改作)했기 때문에 판본(板本)에 따라 내용과 문체상의 차이가 많다. 남북 분단의 비극을 이데올로기적(的)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남과 북에 대한 객관적 반성이 나타나 있고 그 초월의 갈등과 상황의 비극성이 밀도 있게 표현되어 있다.  

  본격적으로 분단 문제에 접근한 대표적인 예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민족의 분단을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선택의 기로(岐路)에서 방황하는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북쪽의 사회 구조가 갖고 있는 폐쇄성과 집단 의식의 강제성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남쪽의 사회적 불균형과 방일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제3자적인 입장에서 볼 때 남과 북 어느 쪽도 진정한 인간의 삶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자살을 통해 이념 선택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음을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완강하게 고정되고 있는 분단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 또는 관념은 '밀실'과 '광장'이다. '밀실'이란 자신만의 내밀한 삶의 공간이며, '광장'이란 사회적 삶의 공간이다. 바람직한 인간의 삶이란 이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상호 관계와 작용 속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한 사회의 역사적 조건을 주체적으로 수용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이명준은 철학도로서의 밀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광장'을 찾아 월북하고, 그 '광장'에서 절망을 한 후 은혜와의 '밀실'을 기도한다. 다시 전쟁이란 '광장'을 거쳐서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밀실'인 중립국을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최후에 선택한 바다는 이념이 배제된 밀실이며, 사랑만이 참다운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광장이다. 따라서, 이명준의 바다는 그만의 광장이요, 동시에 밀실인 것이다.  

  또 하나, 이 소설의 결미(結尾)는 '갈매기'와 '바다'의 서사시이다. 선상(船上)에서 맨처음 갈매기를 보는 순간, 그 새는 감시자의 눈길로 불안감을 주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갈매기는 이명준의 아픈 사랑의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특히, 죽은 은혜와 그의 딸(낙동강 전투에서 은혜는 명준의 딸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음)을 상징한다. 바다생명 본향(本鄕)이라는 원형적 심상과 죽음 뒤에 오는 새로운 탄생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 바다 위에 갈매기('사랑'의 징표)가 날고 있다는 것은 이 바다가 진정한 사랑이 가능한, 이명준만의 밀실이요 광장임을 다시 확인케 한다. 다만, 그것이 시민적 광장이 아니란 점에 이 소설의 현실적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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