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김승옥
1. 축전(祝電)
[가하] 오빠.
부호(符號)라는 걸 만든 이에게 평안 있으라. 엉망진창이 된 나의 감정을 감정의 뉘앙스라는 점에서는 완전히 인연 없는 의사(意思) 전달수단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이 신기함이여. 그렇지만 고향의 누이는 꽃봉투 속에 든 전문(電文) ―<축 순산(順産)>을 읽을 게 아니냐고? 맙쇼. 어깨 한 번 으쓱하면 다 통해 버리는 감정표시를 양영화에서 나는 좀 더 먼저 배운걸.
2. 프로필
김형. 우리는 취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닐까요? 그렇지만 자칭 소설가라는 그 작자는 술에 취해서 벌개진 얼굴을 제법 심각하게 찌그러뜨려 가지고, 허지만, 형씨, 우리는 그리워하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닐까요? 그렇게 대답하며 이 작자는 자기의 턱에 듬성듬성 난 수염을 손으로 슬슬 쓰다듬기까지 한다.
그러나 작자에 대해서라면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제게서 치기(痴氣)가 조금이라도 엿보인다면, 그건 제가 사랑하던 여자를 잃고나서부터 일겁니다. 라고 작자는 얘기하고 있지만 천만에. 작자가 치한(痴漢)이 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였다고 생각된다. 천부(天賦)의 성격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작자는 사랑 어쩌고 하면서 핑계를 만들지 못해 안달인 것이다.
뻔뻔스러워서 어디든지 잘 나서고. 뭐든지 자기가 빠지면 안 될 듯이 생각하고 친구들의 우정에 대해서도 마치 노예가 주인 섬기듯이 대해 주기를 기대하고 그나마 우정에 대한 보수(報酬)로서는 억지로 지어낸 엉터리 음담패설이다.
세상의 여자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모두 자기 소유인 양 불쌍해하고― 불쌍해하는 척하고. 그래서 내가. 취하기 위해서. 라고 말하면. 아니지요. 그리워하기 위해서죠. 라고 엉뚱한 응수를 해 오는 놈이다. 남에게 대단히 관대한 척하며 그러나 만일 상대편에서 작자를 비난하는 얘기라도 한 마디 하는 경우엔 차마 정면으로 상대를 욕하지는 못하지만 내심 끙끙 앓으면서 그 사람을 영원한 적으로 돌려버리고 그렇게 하여 생긴 적이 많은 탓인지 작자는, 내게 기관총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대낮에 한길 가운데서 드르륵 드르륵 해 봤으면 하고 정신박약자 같은 소리를 이따금씩 중얼대는 것이다.
술이라고는 활명수(活命水)만 마셔도 취하는 놈이 친구만 만나면 마치 인사라고 하는 것처럼 여보게 술 한잔 사. 졸라대고 그래서 정작 친구가 술집으로 작자를 데려가 주면 기껏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서도 얼굴이 시뻘개져 가지고. 나 변소에 좀. 그리고는 뺑소니거나 뺑소니에 실패할 경우엔 술잔 받을 기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시시한 유행가만 계속해서. 그것도 여자 목소리에 가까운 방정맞은 목소리로 불러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결국 작자는 한길의 저편을 걸어가는 행인들 중에서 아는 여자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여보세요 술 한잔 사주시요. 하고 외치고 만다. 비럭질. 아니면 일종의 추파. 술 마시기보다는 자기의 존재를 알리려는 데 목적이 있는 듯하다.
성실한 데라고는 도시 찾아볼 수가 없는 성실한 척 해 보이려는 노력만이 일종의 고통의 표정으로서 작자의 얼굴에 나타나 있을 뿐. 그나마도 작자 자기와 흡사한 친구들 앞에서나이다. 마치 자기네들에게만 고뇌(苦惱)가 ―작자가 곧잘 사용하기 좋아하는 고뇌가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정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부딪쳐서 투쟁하고 있는 고뇌에 것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웩. 정말 구역질 난다.
작자는 가난하다는 게 무슨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좌우간 가서 붙들고는. 제겐 돈은 없지만 순정은 있습니다. 고 말하며 아마 상대편의 <순정>을 구걸하는 모양인데 작자의 그런 태도란 만약 작자에게 쇠푼이라도 있었더라면. 저의 집엔 자가용도 피아노도 텔레비도 있으니 저와 결혼해 주세요. 라고 틀림없이 말할 놈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마치 백만장자의 손자나 되는 것처럼 빠라, 술집. 다방에서도 비싼 차(茶)로, 자기에게 아무 소용없는 피리나 풍선을 한꺼번에 열 개씩이나 사고. 뻐스표 파는 아주머니들께 푹푹 인심쓰고 …… 그렇게 하여 오랜만에 좀 두둑했던 호주머니를 하루 아니 불과 서너시간 안에 다 써 버리고 나서는 또. 제게는 돈은 없지만……. 이다. 자기가 지금 얼마나 째째한 말을 하고 있는가를 작자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이젠 그걸 마치 장난하듯이 마구 써먹으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동정할 데라고는 한 군데도 찾을 수가 없어서 좀 가엾다고나 할까. 어지간히 살고는 싶은 것인지 급작스런 죽음을 당할 경우에 대비해서 품속에 늘 유서(遺書)를 품고 다닌다. 따는 그 유서가 한 번 보고 싶기도하다. 거기에만은 다소 진실에 가까운 얘기가 쓰여 있을는지. 그러나 모르긴 해도 아마 그것을 보지 않는 편이 다행스러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작자의 거짓말은 지나칠 정도로 능숙하니까. 약속 어기는 것쯤은 예사인 모양이다. 그리고 작자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과거뿐이기 때문에 ―그것도 지금 여기에 그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작자에게도 과거가 있나 보다고 짐작할 정도지 그렇잖았더라면 그나마 못 믿었을 것이다. ―항상 자기의 과거만 얘기한다. 몇 살 때에 나는 ……. 이런 식으로 가만히 듣고 앉아 있을 수밖에 별 도리 없지만. 그 얘기도 대부분이 조작이리라는 건 뻔하다. 어떠한 조작된 과거라도 그것을 몇 번 반복하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작자에게는 생각되는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작자의 과거는 굉장히 다행했고 풍성했고 진실한 것이었고 그래서 작자의 말대로 태어나지 말든지 혹은 태어나서 곧 죽었어야 했든지. 요컨대 과거 속에서 사라져 버렸어야만 행복했을 터이다. 그렇지만 조작된 과거. 더구나 진짜였던 것처럼 되어 버린 과거. 나는 그걸 상상할 수조차 없다. 지금의 자기를 수년 후엔 또 무어라고 장식할는지. 진실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른다는 점에서. 만약 작자가 전쟁터의 군사라면 틀림없이 자진하여 이중간첩(二重間諜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총살형(銃殺刑)의 법령을 알면서도 할는지 모를 놈이다.
사랑. 사랑 받지도 못하고 사랑을 주기도 무서워져서 치한이 되었다니. 뻔뻔스러운 얘기다. 저 고귀한 사랑이 작자와 같은 사람에 의해서 더럽혀지는 것이 아닌가. 사랑을 무슨 금전거래로 알고 있는 건 아닌지. 사랑이라고 해도 작자의 사랑은 치사하기 짝이 없다. 언젠가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던 작자는 우리가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바로 앞좌석에 앉은 어느 청년 하나에게 이상한 눈치를 보내더니 급기야 험상궂고, 증오하는. 금방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를 그 청년에게 쏘아 대는 것이었다. 천만 다행으로 그 청년이 작자의 그 시선을 못 느꼈기 때문에 큰 일은 나지 않고 우리는 버스를 내렸지만 알고 보니 그 청년과는 전연 알지 못하는 사이. 길을 가다가 이따금씩 버스칸 같은 데서 작자는 누구나 한 사람을 작자의 옛 여자를 빼앗아 간 남자(실제의 그 남자를 작자는 모르기 때문에)로 가정해 두고 혹은 어떤 여자가 옛 여자와 코가 닮았다든가 입이 닮았다든가 웃음소리가 닮았다든가 하는 것을 발견하면 작자는 그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험악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었다. 사랑치고는 치사한. 치사하다기 보다는 만일 천치(天痴)들이 사랑을 한다면 아마 그런 식으로 할 사랑이면서 주제에 작자는, 사랑이 어쩌니. 하는 것이다. <사랑은 주는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 ―이러한 사랑의 ABC도 작자는 들어보지 못한 게 분명하다.
작자는 또한 거만하고 동시에 째째해서. 자기가 거리를 지나가면 길 가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돌아보아 주는 인물이 됐으면. 하고 바라고 그래서 영화배우나 됐더라면 만족했겠지만 그러나 용모에게 자신이 없었던지 소설가라고 스스로 칭호를 붙여 놓고 으스대기만 하는 놈이다. 소설가라야 얄팍한 소설책 한 권을 출판해 놓았을 뿐이다. 나는 작자가 항상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그 저서(著書)라는 걸 언젠가 본 적이 있지만 책이라야 획수도 제대로 붙지 않은 낡아빠진 활자로 찍혀져서 우선 보고 싶은 맘이 내키지 않는데다가 잠깐만 훑어봐도 <사랑, 오뇌, 회오, 연민, 죄, 벌, 자세, 인간, 미덕, 신, 악마, 종교, 사회, 정시의 후진 후진……> 그리고 다시 <사랑, 오뇌, 회오, 연민, 죄, 벌, 자세, 인간, 미덕, 신, 악마, 종교, 사회, 정신의 후진 후진……>이다.
내가 잘 알고 있거니와, 작자는 빚이라도 진 기분으로 하루 저녁쯤 <고뇌>하고는 그 길로서 이젠 체면은 섰다는 듯이 열흘을 배짱 편하게 사는 놈인 것이다. 하룻밤 벌어서 열흘을 살 수 있다면. 오오. 세상 어디에 가난뱅이가 있겠는가.
치한(痴漢). 작자의 뻔뻔스러움에 대해서는 좀 전에도 얘기했지만 그것은 작자의 용모에서도 나타난다. 작자의 머리는 도대체 몇 달 동안이나 이발을 하지 않은 것인지 앞머리의 머리털 끝을 늘어뜨리면 유난히 기다란 그의 코끝에 머리털의 끝이 닿는다. 목욕도 얼마동안에 한 번씩이나 하는지(나는 그가 무슨 자랑이라고 하듯이. 나 어제 목욕했어. 칠개월만이지. 하며 히쭉거리던 걸 본 일이 있다) 작자의 곁에 가면 짜릿한 냄새가 난다. 옷도 너털너털. 이런 것들은 만약 작자가 조금만 노력하면 고쳐질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도 작자가 자기의 그러한 용모를 우겨댈 수 있는 것은. 그의 친구들이. 저 자는 소설가니까 저런 용모가 당연하고 또 어울리기도 해. 말하자면 체하는 건데 괜찮거든. 이라고 얘기해 주기 때문이다. 사실은 작자의 성미가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더러워서 목욕도 이발도 하기를 죽자고 싫어하는 터인데 친구들이 그렇게 자기들 나름으로 변명을 해 주니까. 얼씨구 잘 됐다 싶은지. 그렇고 말고. 소설가란 다 이런거야. 하며 헤헤 웃음으로써 얼렁뚱땅 넘겨 그 용모를 유지해 버리는 것이다.
작자는 시시한 일로도 곧잘 웃는다.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웃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취하기 위해서. 라고 얘기하면. 아니지요. 그리워하기 위해서 라고 엉뚱한 응수를 해 오는 놈이다. 잘 웃고 그리고 그리워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는 작자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굉장히 착한 사람을 보는 눈초리로 보지만 그런 사람들이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자를 착한 놈으로 보았던 자기 자신이 창피해서 얼마나 얼굴이 새파래질까.
언젠가. 무슨 용무로서 였던지는 잊었지만. 작자와 함께 어느 여학교엘 간 적이 있었다.
교무실에서 용무를 마치고 나서 우리가 그 교사(校舍)의 현관을 통해 나올 때였다. 현관에는 학생들에게 오는 편지를 꽂아 두는 우편함이 설치되어 있었고 마침 수업 중이어서 현관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인지 작자는 그 우편함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편지 하나를 냉큼 집어서 호주머니에 쑤셔 넣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짓 하는 데에는 길이 들어버린 탓인지. 편지를 집어넣는 그 속도라든가 태도는 내가 무어라고 말릴 틈도 없이 순간적으로 그리고 거의 무의식적이라고나 얘기해야 할 것이었다. 작자의 치기(痴氣)에 대해서는 알대로 다알고 있기 때문에 그때 나는 좋다 그르다 한 마디 안 해 버리기도 했지만 그가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편지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작자는 편지같은 건 다 잊어버렸다는 듯이 아니 편지를 훔쳐 넣은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걸어가다가 결국 내가 궁금증을 참다 못하여. 그 편지. 하고 주의를 주자. 정말로 잊어버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아 그랬지. 하며 그제서야 편지를 꺼내들고 봉투의 앞뒤를 뒤척여 보며. 흠 글씨 참 못썼군. 설상가상으로 편지봉투에 연필글씨야. 하며 혀를 끌끌 차는. 내 참 그 어처구니없는 꼴.
작자는 봉투를 북 찢고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편지만이 아니었다. 그 편지 안에 꼼꼼하게 싸인 돈이 이백원―우체법규정의 철망을 용케 빠져나와서 바야흐로 수취인(受取人)의 손에 안착(安着)하려던 백원짜리 지폐 두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 내용은 홀어머니가 딸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고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고 기억된다. <납부금과 하숙비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장만하고 있으나 여의치 않다. 좀 더 기다려 보아라. 우선 구한 돈 보내니 이걸로 그 동안 견디어 보기 바란다.> 있는 힘을 다하여 구한 돈이 이백원. 그 어머니의 철자법에 무식한 글은 그러나 거의 울음으로 찬 느낌을 주고 있었다. 딸은 틀림없이 초조한 기대를 갖고 고향에서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만일 이 편지가 딸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딸은 어머니의 글이 풍겨 주는 것에서 자기 신분의 분수를 생각하고.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고 그 이백원을 여비로 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리고 어머니와 얼싸안고 울고 그리고…… 뜻밖의 수확인걸. 공짜로 얻은 건 얼른 써 버려야지 그렇잖으면 도루 잃어버린다오. 하며 작자는 그 지폐 두장을 내게 흔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과연 작자는 싫다는 나를 억지로 끌고 술집으로 데리고 가더니 죽이고 싶도록 기분 좋은 태도로 술을 마셔 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리워하기 위해서 라고 말하는 바인데 도대체 무엇이 그립다는 것일까.
고향이 그립다는 것인지? 작자는 나로서는 생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시골에서 올라와서 서울을 빙빙 돌아다니며 사는 놈인데 그러고 보니 작자의 저 광증(狂症)에 가까운 생활 태도는 무전여행자(無錢旅行者)의 그것 아니면 촌놈이 서울에 와 보니 모든 게 신기하기만 해서 어쩔 줄을 몰라 아니 무턱대고 우쭐대고 싶은 저 촌뜨기 의식에 가득 차서 괜히 심각한 체 해보았다가? 시시하게 웃어 보았다가 술 사 달라고 조르고 사랑이 어쩌니 하고 있는 게 분명한 것이다. 고향이 그립다는 것인지? 그러나 고향이 그리운 것 같지도 않다. 작자의 고향에는 자기의 어머니와 누이가 살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만 작자는 그들에게 대해서 별 애착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작자에게 보낸 그의 어머니의 편지를 한 번 읽은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세상에서 그처럼 다정하고 착하고 그리고 내가 그 편지 속에서 받은 느낌으로 상상해 보건대 그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어머니가 좀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의 하얀 석상(石像)을 볼 때 받는 느낌 같았다고나 할까. 요컨대 작자에게는 분에 넘치기 짝이 없이 훌륭한 어머니인 것이다. <아들아 먼 곳에 너를 보내 놓고 마음 한시도 놓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면 내 아들이 아무리 먼 곳에 가 있더라고 심신 평안하다 하여 지난 주일부터는 읍내에 있는 성당(聖堂)에 다니기로 하였다. 어느 곳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읽은 그의 어머니의 편지 한 구절이다.
내가 그 편지를 읽고 있는 동안에 작자는 우리 마을에서 성당이 있는 읍내까지는 꼬박 삼십리 길인데…… 왕복 육십리. ……미친 짓하고 계셔. 라고 투덜대더니 괜히 화가 나 가지고 내가 그 편지를 돌려주자 북북 찢어서 팽개쳐 버리는 것이었다. 그럼 착하신 어머니께 <미친>이라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는 그야말로 미친 바보. 멍텅구리. 촌놈. 얼치기. 치한.
작자의 객기(客氣) 중의 하나는 이따금씩 쉽사리 속아넘어가 줄만큼 순진한 사람을 만나면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얘기를 끄집어내서 상대의 환심을 사려는 그 버르장머리이다. 내가 작자의 그러한 못된 버르장머리를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으로 그러기 때문에 그는 나를 되도록 피하려고 애쓰며 또한 아무리 예수님처럼 순진한 사람이 작자의 앞에 앉아 있더라도 내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심각한 얘기를 꺼내는 것 같은 짓은 감히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더 참을 수가 없었던지 며칠 전에는, 창을 통해서 황혼을 맞고 있는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다방에서 내 앞에 고개를 숙이며 심각한 투로 작자는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만일 신(神)이 계시다면……
염병할 자식. 난데없이 신은 왜 들추어내는 거냐. 오오. 명작(名作)이라면 대부분이 반드시 신을 붙들고 어쩌구 저쩌구 하고 있으니까. 짜아식 아아쭈 흉내를 내보려구. 작자의 다음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아 버렸다.
그러나 귀가 완전히 막힐 수는 없는 모양이다. 결국 나는 작자의 말소리를 ―먼 곳에서 들려 오는 듯하긴 했지만 별 수 없이 작자의 말소리를 들어 버렸다.
―내게도 다소 인간적인 데는 있다고 말씀하실 거야.
그렇지만 이 얼치기. 가짜. 흰수작만 하는 소설가여. 슬픈 목소리로 솔직히 이렇게 중얼거리실지어다. 심각한 체라도 하지 않고서는 살수가 없다고.
3. 갈대들이 들려 준 이야기
온 들에 황혼(黃昏)이 내리고 있었다. 들이 아스라니 끝나는 곳에는 바다가 장식처럼 붙어 보였다. 그 바다가 황혼녘엔 좀 높아 보였다. 들을 건너서 해풍(海風)이 불어오고 있었지만 해풍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았다. 짠 냄새뿐 말하자면 감각(感覺)만이 우리에게 자신을 떠 넘기고 지나갈 뿐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것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우리들은 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던 것일까. 설화(說話)가 없어서 우리는 좀 우둔했고 판단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누구나 그렇듯이 세상을 느끼고만 싶어했다. 그리고 그들이 항상 종말엔 패배를 느끼고 말 듯이 우리도 그러했다. 들과 바다---아름다운 황혼과 설화가 실려 있지 않은 해풍 속에서 사람들은 영원(永遠)의 토대(土臺)를 장만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都市)로 몰려갔다. 그리고 더러는 뿌리를 가지게 됐고,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시들어져 갔다는 소식이었다. 차라리 이 황혼과 해풍을 그리워하며, 그러나 이 고장으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차게 빛나는 푸른 색의 아스팔트 위에 그들의 영혼과 육체를 눕혀 버리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한낱 자연의 현상에 불과한 저 황혼과 해풍이 그리하여 내게는 얼마나 깊고 쓰라린 의미를 가졌던가! 숱한 사람들에게 인간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고, 동시에 보다 깊은 패배감을 안겨 주고 무심히 지나가 버리는 저것들.
그 날 황혼녘에 나는 누이를 마을에서 좀 떨어져 있는 작은 강의 뚝으로 불러내었다. 강은 이 들의 한복판을 꾸불꾸불 가르며 흐르고 있었다. 대개의 강물과는 반대로 이 강의 수원(水源)은 바다였다. 바다가 썰물일 때면 따라서 이 강의 물도 빠지고, 바다가 밀물일 때면 이 강도 함께 부풀어 오르는 것이었다. 이 강가의 무성한 갈대밭 사이에 매여 있는 작은 돛배들은 밀물일 때를 기다려서 떠나고 혹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 강이 들의 농업수(農業水)가 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연안(沿岸)의 고기잡이라든가에는 퍽 친절한 수로(水路)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사는 마을은 이 강과 그리고 이 들에 매달려 있었다. 밀물 시간이어서 강물은 바다쪽으로부터 빠르게 흘러오고 있었다. 갈대숲 사이에는 부리가 긴 물새들이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간간이 고기들이 강물 위로 펄쩍 뛰어오르곤 해서 주위의 정적을 돋구어 주고 있었다. 강물은 황혼 속에서 금빛이었다. 해풍이 퍽 세게 불어와서 내 곁에 말없이 앉아 있는 누이의 머리칼을 흩날리고 있었다. 결국 이 황혼과 이 해풍이 누이의 침묵을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누이는 도시로 갔었다. 어머니와 내가 누이를 도시로 보냈었다. 그리고 며칠 천 갑자기, 거진 이 년 만에 이 곳으로 다시 돌아왔었다. 누이가 도시에 가 있던 그 이 년 동안 나는 얼마나 지금 우리 앞에서 지상을 포옹하고 있는 이 자연 현상들에게 누이의 평안을 빌었던가. 그러나 도시에서는 항상 엉뚱한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어떠한 일들이 누이를 할퀴고 지나갔었을까, 어떠한 일들이 누이를 빨아먹고 갔었을까, 어떠한 일들이 누이를 찢고 갔었을까, 어떠한 일들이 누이에게 저런 침묵을 떠맡기고 갔었을까. 누이는 도시에서의 이야기를, 나와 어머니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하려 들지 않았었다. 우리는 누이가 지니고 왔던 작은 보따리를 헤쳐 보았다. 그러나 헌 옷 몇 벌과 두어 가지의 화장 도구를 발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걸로써는 누이에게 침묵을 만들어 준 이 년의 내용을 측량해 볼 길이 없었다. 누이의 침묵은 무엇엔가의 항거(抗拒)의 표시였다. 우리를 향한 항거였을까, 도시를 향한 항거였을까. 그렇지만 우리를 향한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누이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침묵으로써가 아니라 높은 목소리로 누이는 우리를 질책(叱責)했어야 하는 것이다. 높은 목소리로 질책하는 방법이 침묵의 질책보다 더 서툴렀다는 것은 결국 도시에서 배워 왔단 말인가?
반대로, 도시를 향한 항거(抗拒)라면---아마 틀림없이 이것인 모양이었는데---그렇다면 누이의 저 향수(鄕愁)와 고독을 발산하는 눈빛, 사람들이 두고 온 것들에게 보내는 마음의 등불 같은 저 눈빛을 우리는 무엇으로써 설명해야 할 것인가?
누이가 돌아오고, 누이가 도시에서의 기억을 망각하려고 애쓰는 듯한 침묵 속에 빠져 드는 것을 보고 우리는 아마 누이가 도시에서 묻혀 온 고독이 병균처럼 우리 자신들조차 침식시켜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 황혼과 이 해풍, 그들이 우리에게 알기를 강요하던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미소를 침묵으로 바꾸어 놓는, 만족을 불만으로 바꾸어 놓는, 나를 남으로 바꾸어 놓는, 요컨대 우리가 만족해 있던 것을 그 반대로 치환(置換)시켜 버리는 세계였던 것인가. 누이는 적어도 우리가 보낼 때에는, 훈련을 받기 위해서 그 곳에 간 것이 아니라 완성되기 위해서 간 것이었다. 그런데 침묵의 훈련만을 받고 돌아오다니.
어제 저녁, 어머니는 당신이 우리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표시로 되어 잇는 밀국수를 끌어서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말씨와 정성어린 손짓으로 누이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도시에서 무슨 일을 했던가, 어떤 고난을 겪었던가, 무엇이 재미있었던가, 남자를 사귀었던가, 그렇다면 어떤 남자였던가고 얘기해 주기를 간청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짐작컨대 누이의 쓰라린 추억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누이는 어머니를 붙들고 소리 없이 울었다. 석유 등잔불의 펄럭이는 빛이 그들의 그림자를 더욱 쓸쓸해 보이게 했다. 왜 저를 태어나게 했어요라고 누이는 말했다. 어머니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누이는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새삼스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요, 어머니라고 누이는 말하고 싶었던 거다. 하루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무서운 사건이 세계의 은밀한 곳에서 벌어지고 그리고 다음날은 희생자들이 작은 조각에 몸을 기대고 자기들의 괴로움을 부유(浮遊)하는 것이다.
강물이 빠르게 밀려오고 금빛 하늘이 점점 회색으로 변해가는 이 시각에 내게는 아직도 신비한 힘을 보여주는 자연 속에서 나는 누이로 하여금 도시의 모든 기억을 토해 버리게 할 생각이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이를 위해서였다. 이 년 동안을 씻어버리고 다시 이 짠 냄새만을 싣고 오는 해풍으로 목욕시키고 싶었다. 숲 속의 짐승들이 감각만으로써 살아갈 수 있듯이 그렇게 살아가게 하고 싶었다. 인간이란 뭐냐. 인간이란? 저 도시가 침범해 오지 않는 한, 우리는 한 고장을 지키기에 충분한 만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영원의 토대를 만든다는 것, 의지의 신화들을 배운다는 것, 우는 법을 배운다는 것, 침묵을 배운다는 것, 그것만이 인간인 것이냐?
세상은 넓은 것이다. 불만이고자 하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동시에 만족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포용한다. 세상이 거절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족해 있다는 것을 - 작으나마 고요한 풍경 속에서 만족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도 좋은 것이다. 도시에 갔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여간해선 돌아오지 못하고 마는 이유는 어디 있는 것일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누이는 돌아왔다. 그러나 옷에 먼지를 묻혀 오듯이, 도시가 주었던 상처와 상처의 씨앗을 가지고 돌아왔다. 무수히 조각난 시간과 공간, 무수히 토막난 언어와 몸짓이 누이의 기억을 이루고 있으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수한 것들, 별들처럼 고립되어 반짝이는 그 기억들이 누이의 가슴에 박혀서 누이의 침묵을 연장시키고 혹은 모든 것을 썩어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냐, 그 파편들은 무엇이냐?
그리하여 나는 동화 속의 인물처럼 말하였던 것이다---이번엔 내가 가보자.
내가 사랑하고 만족해 있던 황혼과 해풍에 꿋꿋한 맹세조차 했었던 것 같다.
4. 누이의 결혼
퍽 오래 전에 고향으로부터 소식이 왔다. 누이가 결혼을 한 것이다. 해풍 속에서 살결을 태우며 자라난 젊은이와, 만일 그 때 누이가 내 곁에 있었더라면, 그 애가 알아먹든 못 알아먹든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람들에게 제각기의 밤이 있듯이 제각기의 얘기가 있는 것이다. 도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랑하고 동시에 배반하고 그러면 한편에서도 사랑하고 동시에 배반하고 요컨대 심판대(審判臺)를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최후 심판의 날’을 상상해 보지만 얼마나 난해(難解)한 순환(循環)일까. 황혼과 해풍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누구나 고독했다.
또 하나의 소식. 누이가 어린애를 낳았다고, 사람 하나를 탄생시켰다고.
5. 일지초(日誌抄)
절망(絶望)이란 단순히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논리(論理)가 꺾이고 지성(知性)이 힘을 잃고 최악(最惡)의 감정 예컨대 증오(憎惡)조차 사라져 버리는 저 마구 쓰리기만한 감촉(感觸)의 시간. 도회(都會)를 떠난다고 해도 이미 갈 곳은 없고 죽음으로써도 해결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아서 불 더미 속에 쌓이기나 한 듯이 안절부절못하는 사나이여. 유희(遊戱)의 기록이라도 하라.
멀고 깊은 산 속으로 왕릉(王陵)을 보러 가던 길에. 길섶에 피어 있는 작은 패랭이꽃 한송이를 보고 그 꽃 곁에서 놀며 하루를 보내 버리고 돌아오다. 흐린 날씨. 바람이 꽤 세게 불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변소에 가서 뒤를 보며 울었다. 드디어 내게도 변비(便秘)가 생겼구나고.
영원(永遠)과 순간(瞬間)의 동시적(同詩的) 구현(俱現)―인간. 으흥, 그래서 모호하군.
"한국시(韓國詩)엔 운(韻)이 없어서 맛이 없어." 어느 친구의 말.
"그렇고 말고. 불란서 시의 그 운의 맛이란…… 헤헤." 나여. 나여. 말끝을 흐려 버리고 헤헤는 왜 나왔느냐. 실력이 없다는 증거. 시시한 의견은 삼가라. 함부로 떠들다가는 헤헤가 나오고 그러면 자기의 무식을 개탄하고 동시에 열등감을 느끼고 그래서 똑똑한 의견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결과는 의외로 나빠진다.
"저. 노형. <다스라니스키>라는 노서아 소설가를 아시는지요?" 내가 묻는다.
"저<죄와 벌>의 작가 말씀인가요?" 친구는 대답한다.
"아니지요. 그건 <도스또예프스키>고요."
"모르겠는데요." 친구는 당황한다. 진작 이럴걸. 간단하잖느냐 말이다. 항상 질문하는 편이 되고 그러면 상대는 얼떨떨해져서 열등감을 약간은 느끼고 나는 그걸 보고 약간은 우쭐대고 <다스라니스키>라는 이름은 방금 내가 지어낸 것 따라서 그런 소설가란 없었던 것이다.
<운명(運命)과 우연(偶然)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둘다 부정해 본다>
증명 : 거울 앞에 서라. 거기에 비추인 네 얼굴을 보라. 웃는가? 아니 그 반대다. 그럼 네 선조로부터 시작되어 반복되는 저 위대한 실험을 생각하라―그러나 그것도 또렷한 불확실(不確實).
위대한 사상(思想)과 위대한 파괴(破壞)와는 어쩔 수 없는 관계인 모양이다. 무엇인가를 발굴해 가는 예지(叡智)는 신(神)의 나라를 허물어 버리고 있다. 저 하늘에 있던 나라의 모든 건물이 지상(地上)에 끌려 내려와 세워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의 옥좌(玉座)마저 지상에 놓일 때 그 의자 위에는 <나>가 앉을까? <남>이 앉을까?
<아아쭈>라는 유행어(流行語). 없었으면 좋겠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무엇인가를 자꾸만 주고 싶어한다. 빨간 표지의 수첩을. 목도리를. 비누를. 사진을. 그렇게 하여 과거를 떠맡기고 여자는 떠나는 것이다. 남자는 그 물건들에 둘러싸여 <사랑하는 이>라고 불러 본다. 여자는 내게 자살을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 본다. ―히히 18세기로군 또는 유행가
내게는 비평능력(批評能力)이 없다. 세상에 태어나서 꼭 한 번 비평해 보았다. 그 여자가 나와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나의 비평―옳은 말이다. 아니다. 옳은 말이다. 아니다.
◆ <두사람을 존경하리로다>라는 제목이 붙은 꿈 이야기
問 "선생님. 잃어버린 한 여자를 잊는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셨습니까?
答 "십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아직……."
(선생님은 병신이군요.)
問 "선생님은?"
答 "일년. 그리고 때때로 생각날 정도"
(선생님도 병신.)
問 "선생님. 당신은?"
答 "삼개월. 그러자 여자의 얼굴조차 희미해지더군."
(선생님도 병신.)
問 "선생님. 당신은?"
答 "일주일. 요컨대 술이 깨고 보니 잊어버렸더군."
(선생님도 병신.)
問 "선생님. 당신은?"
答 "여자가 헤어지자는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선생님도 병신.)
問 "선생님. 당신은?"
答 "글쎄. 난 여자를 많이 주무르기는 해보았지만 서두 그러면서 뭐 사랑 같은 건 …… 글세…… 주어 본 적이 없으니까……"
(앗! 선생님. 선생님. 당신을 존경하겠습니다.)
이 문답 곁에 앉아 있던. 곧 죽어 가는 어느 파파 영감이 나를 부르더니
"여보게 젊은이. 나는 한평생을 젊은 날 잃어버린 한 여자 생각만으로 살아왔는데 그럼 나도 병신이란 말인가?"
노인의 말에 나는 그만 기절해 버렸다. 저런 사람이 있었다니 너무도 너무도 기뻐서
1
2
그러면 다시
1―내 감정의 변증법(辨證法)
장미 곁에서 방귀를 뀌다. 어느 쪽의 냄새가 더욱 강했던가?
벗들아. 너희들의 이성(理性)을 과시하며 나를 조롱하지 말아다오.
벗들은 교과서의 가르침대로 한 번쯤은 내게 충고를 하고 그리고 내가 우쭐우쭐하고 있는 사이에 그들은 토라진 계집애들처럼 홱 돌아서서 어깨를 아주 나란히 하고 총총히 떠나 버린다.
너의 의견과 나의 의견이 있을 뿐―우리들이 내리는 공통된 결론.
딱한 친구를 보는 것은 내 자신을 보는 것보다 더 괴롭다. 내게 점심을 사준 어느 친구에게 답례(答禮)로 음담(淫談)을 하나 들려주었더니 내게 잘 보이려고 그 순진하기 짝이 없는 친구. 자기도 그쯤은 예사라는 듯한 태도로 기상천회의 음담을 이마에 심줄을 세워 가며 하는 그 모습. 억지로 따라 웃어 주긴 했지만 서글퍼서 나는 죽고만 싶었다.
안색(顔色)을 팔고 국화(菊花)를 사는 노인을 보았다. 저렇게 늙고 싶은데.
"당신네 같은 처녀들보다는 닳아진 창녀(娼女)를 난 더 좋아합니다."라고 말하여 한 처녀를 울려 보냈다. 왜 나는 거짓말을 했을까? 창가(娼家)는 구경도 못한 놈이.
경계하면서 사랑하는 척. 시기하며 친한 척. 기뻐하며 슬퍼해 주는 척. 저는 너그럽습니다. 라고 표시하기 위하여 웃으려는 저 입술의 비뚤어져 가는 저 선(線)이여 <모나리자>같은 선생님. 만수무강하십쇼.
"이걸 안 하면. 넌 굶어 죽어. 알겠어?"
"네."
"이걸 안 하면. 넌 동지를 배반하는 거야. 알겠어?"
"네."
"남들이 그걸 할 때 그걸 구경하고 있는 네가 아무렇지도 않은 심정으로 그들을 구경하듯이. 이번에 네가 한다고 해서 거리를 지나가는 너를 특별히 너만 바라보며 웃거나 할 사람은 없어. 알겠어?"
"네."
<데모>에 한 번 참가하는데 자신에게 몇 번 다짐해야 했던가. 알고보니 <데모크라시>가 팽개쳐 버릴 도련님이였구나.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 상냥한 여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담한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들만 있으면 문학도 버리겠다고 장담해 본다. 쓴다는 것도 결국은 아편(阿片). 말라만 가고 헛소리를 하게 되고. 아아.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파이프를 물고 소파에 파묻혀 앉은 독자가 되고 싶다. 물론 고뇌를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렇지만 그들을 존경하기만 하면 그걸로써 의무감이 해방을 느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그럼. 돼지가 되라고요? 맞습니다. 돼지가 됐었더라면……
제게도 역시 사는 편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생 전체를 훑어 생각할 때가 아니라. 음식을 맛나게 먹을 때나 밤거리에서 불빛이 밝은 쇼 윈도우를 구경할 때나 맘에 드는 옷을 입을 때 나와 같이 뭐 여럿 앞에서 큰 소리로 얘기하기엔 창피할 정도로 시시한 일을 하고 있을 때 말입니다.
박수 받고 싶어서 철봉대를 붙들고 다섯 바퀴 돌고, 집에 돌아와서 껍질이 벗겨져 쓰린 손바닥을 호호 불다.
치한인가보다. 나는 정말. 좀 <쌘치>한 치한인가보다.
서울 역전(驛前) 광장의 남쪽에 있는 공중변소엘 들어가다. 먼지가 앉고 때낀벽에는 희미한 연필글씨로 편지 서두(序頭)의 낙서(落書)가 있었다. ―<아버님 보옵소서>
누더기를 입고 머리가 산발한 지게 품팔이꾼이 손가락 만한 연필에 연방 침을 칠해가며 울면서 이 편지의 낙서를 하고 있는 게 상상되다. 고향에서는 예의바르게. 매일새벽. 아버님의 방문 밖에서 아침 문안을 드리던 아들. 금의환향(錦衣還鄕)을 맹세하고 상경했지만 이제는 돌아가기도 부끄럽고 편지 올리기도 괴로워서 ……아, 왜 맹세했던가. 왜 맹세했던가.
일본(日本) 어느 엉터리 시인의 단가(短歌) 하나를.
<웃기 잘하던
그 청년이 죽으면
세상도 조금은 쓸쓸해지겠지.>
오늘 새벽 나는 유서를 고쳐 썼다. <나는 착한 사람입니다>라고. 단 한가지 남은 거짓말만이라도 철저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이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미화(美化)시켜 주려는 선의가 세상엔 아직 있기 때문에 나의 이러한 유서는 어쩌면 액면(額面) 그대로 받아들여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각(馬脚)이 드러나면 그때는. 오늘 오후에 나는 유서를 찢어 버렸다.
가엾다. 가엾다. 가엾다. 가엾다. 가엾다. 가엾다. 가엾다. 이젠 됐나. 김군?
천번만 먹을 갈아 보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진실만이 결정(結晶)되어 남을까? ―한 <카타르시스>신봉자의 독백.
어느 날. 고향의 어머니께 보내고 싶은 마음 간절했던 편지의 한 구절―<실은 의사(醫師)가 되고 싶었는데 병자(病者)가 되어 버렸어. 라고 힘없이 말하며 병들어 죽어 간 친구를 오늘보고 왔습니다.>
누이에게 쓰고 싶던 편지의 한 구절―<도시에 가서 침묵을 배웠던 네가. 도시에서 조리에 맞지 않는 감정의 기교만을 배운 나보다 얼마나 훌륭했던가.>
별도 보이지 않는 밤에. 고향의 논두렁이 그리워서 중량교쪽 어느 논두렁에 가서 서다. 개구리들이. 거꾸러져라 거꾸러져라 거꾸러져라 거꾸러져라. 고 내게 외쳐대다.
6. 다시 축전(祝電)
[가하] 오빠.
부호라는 걸 만든 이에게 평안 있으라. 엉망진창이 된 나의 감정을 감정의 뉴양스라는 점에서는 완전히 인연이 없는 의사(意思)전달의 수단으로써 표시할 수 있는 이 신기함이여 그렇지만 고향의 누이는 꽃봉투 속에 든 전문(電文)―<축, 순산(順産)>을 읽을 게 아니냐고? 그래도 좋다. 나의 착한 누이가 만일. <우리의 이 모든 괴로움 속에서 태어난 네 자식은 우리가 그것을 겪었었다는 이유로서 구원받을 미래인이 아니겠는가>라는 나의 기도를 제대로 읽어 주기만 한다면 누이도 나의 축전을 받아들고 과히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리라. 제발 지금 나의 이 뒤얽힌 감정 중에서도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이 한가지의 기도가 실현된다면 그러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문학 > 소설전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영수 '갯마을' 전문 (0) | 2021.01.19 |
---|---|
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전문 (1) | 2021.01.19 |
임철우 '아버지의 땅' 전문 (0) | 2021.01.19 |
김동리 '까치소리' 전문 (0) | 2021.01.19 |
이청준 '서편제' 전문 (0) | 2021.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