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전문

임철우 '아버지의 땅' 전문

열공햐 2021. 1. 1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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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땅

 

                                                                          임철우

 

  쫓겨가는 한 마리 딱정벌레처럼 트럭은 저만치 들판 가운데로 난 황톳길을 따라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고르지 못한 노면에서 바퀴가 튀어오를 때마다 덜컹대는 쇳소리가 들려 왔고 꽁무니로 부옇게 마른 먼지가 피어올랐다.

  덮개 없는 트럭의 뒤칸에 홀로 쭈그려 앉은 채 실려 가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유난히도 자그맣게 오그라들어 있어 보였다. 뒤칸에 적재된 알루미늄 식깡들이 이따금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금속성의 광선을 되쏘곤 했다. 풀잎들이 저마다 윤기를 잃어 가고 있는 들녘과 차츰 잿빛으로 퇴색해 가기 시작하는 야산의 정지된 풍경 속에서 그것은 안간힘을 쓰며 집요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단 하나의 운동체였다.

  “더럽게 운도 없는 녀석이군. 전입해 온 지 보름만에 초상을 치르다니.”

  바지를 까내리고 오줌발을 내갈기며 오일병이 뇌까렸다. 나는 말없이 마른 풀을 짓씹었다. 바로 조금 전에 우리는 그 트럭에서 내렸었다. 야영지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차가 마을로 통하는 샛길 입구에 다다랐을 때 선임 탑승자는 차를 세워 우리 둘을 내려 주었던 것이다.

  이제 트럭은 들판을 지나 산모퉁이를 마악 꺾어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나는 아직 그 전입병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기동훈련이 시작되기 불과 며칠 전, 군장을 꾸리느라 어수선한 내무반 안으로 더플백을 껴안고 엉거주춤 들어서던 맨 첫날의 모습만 기억할 뿐이었다. 이틀만에 한 번씩 나타나는 보급 차량에 실려 녀석은 지금 본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마도 도착하자마자 특별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달려가게 되리라. 그리고 어쩌면 이미 매장을 마치고 마당에 드리운 광목 휘장이 걷히어질 무렵에야 뒤늦게 제 집에 닿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윽고 꽁무니로 먼지를 물고 차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자 텅 빈 풍경이 옹송그리며 제자리를 찾아 들어앉고 있었다.

  “자식. 안되었지 뭡니까. 키는 껀정한 녀석이 금방 울먹울먹하더라구요. 홀어머니였다지요, 아마.”

  오일병이 허리춤을 여미며 말했다.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작전도로 우측으로 엎드린 낮은 언덕바지에 택시 한 대가 간신히 드나들 수 있을 만한 좁은 샛길이 나 있었다. 길 어귀엔 허리 높이로 세워 놓은 콘크리트 표지판이 서 있고 거기엔 새마을 승공부락이라는 초록색 글자가 흰 페인트 바탕에 엉성하게 적혀 있었다. 둘은 샛길로 접어들어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언덕을 걸어 올랐다. 길 아래로 흐르는 작은 시내는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떡갈나무며 오리나무 따위의 관목들이 드문드문 깔려 있는 후미진 어귀를 돌아 언덕 등성이를 마악 올라섰을 때였다. 별안간 눈앞에서 무엇인가 여러 개의 시커먼 덩어리들이 한꺼번에 푸다다닥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으므로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움찔 뒷걸음질을 쳤다.

  까마귀떼였다. 길 양편으로 꽤 넓은 밭이 드러누워 있었다. 미처 뽑을 시기를 놓쳐 버린 배추며 무 따위가 밭고랑 여기저기에서 된서리를 맞아 썩어 가고 있는 참이었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수많은 까마귀들이 그 검고 칙칙한 날개를 퍼덕이며 밭고랑을 뒤적이고 있다가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날아오른 것이었다. 놈들은 멀리 달아나지는 않았다. 저만치 밭둑 근처까지 날아갔다가는 되돌아와 검은 헝겊 조각 같은 날개를 펄렁이며 하나 둘 땅에 내려앉고 있었다. 더러는 흘금흘금 이쪽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짐짓 태연히 등을 돌리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오일병이 거기다 대고 돌팔매질을 했다. 여기저기 숯덩이를 흩뿌려 놓은 듯 구물거리고 있던 새떼가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떠올랐다. 까우욱, 까우욱, 그것들의 울음이 황량하기 그지없는 초겨울의 빈 들녘을 공허하게 흔들었다. 이번엔 좀더 작은 돌멩이를 골라 그는 이미 날아가고 있는 새들을 향해 던졌다. 하지만 돌멩이는 밭둑까지도 채 못 미쳐 툭 떨어져 버렸다.

  “빌어먹을 까마귀까지 오늘은 영 기분을 잡치게 하는 걸.”

  땅에 내려놓았던 소총을 어깨에 다시 메면서 오일병은 타악 침을 뱉었다. 하늘 한 귀퉁이에 불길한 검은 얼룩을 만들며 그 수많은 새들은 머리 위를 두어 번 선회하더니 이윽고 저편 야산 기슭으로 날아가 버렸다. 넓은 날갯깃을 펄럭일 때마다 무엇인가가 우리들의 머리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섬뜩한 불쾌감에 절로 고개가 움츠러들곤 했다.

  “총알만 있다면 저걸 그냥…….”

  “뭘 그래? 오랜만에 보니까 까마귀도 반가운걸…….”

  “반갑다구요? 시체에서 눈알을 뽑아 먹는다는 저놈들이 말예요? 남들은 까치를 보고 길조라고들 합니다만, 난 그것조차도 기분 나쁩디다. 새라면 작고 귀여운 맛이 있어야지 원, 시꺼먼 게…….”

  오일병의 턱없이 화난 표정을 보고 나는 자그맣게 웃었다. 그렇잖아도 꺼림칙해 있었을 그였다. 땅을 파다 말고 꽤액 비명을 지르며 삽자루를 내동댕이친 채 달아나던 아까의 모습이 떠올랐다. 괜찮아, 임마. 사람 뼉다귀를 처음 봐서 그래? 동료들이 이죽거리며 놀려 대자 그제서야 비싯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태연한 척해 보이고는 있었지만, 그는 여태 줄곧 속으로는 어딘가 개운찮은 느낌을 지워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지금도 이따금 침을 탁탁 뱉어 내며 그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지난밤 꿈자리가 더럽더라니만, 씨발.”

  마른 나뭇가지를 발길로 내지르며 그가 말했다.

  “꿈이 어땠길래.”

  “상여를 봤지 뭡니까. 그런데 이상한 게 말이죠. 장의차나 앰뷸런스였다면 또 모르는데, 울긋불긋한 상여 뒤를 쫓아가면서 엉엉 울다가 깼단 말예요. 난 상여라곤 영화 속에서밖엔 구경한 적이 없거든요.”

  그는 정말 수상쩍다는 투로 내게 얼굴을 돌리며 묻는 것이었다.

  “꿈이 맞은 셈이군. 아까 그 전입병 녀석이 꿀 꿈을 대신 꿨나 보지.”

  나는 그가 내심 무슨 생각을 하면서 묻고 있는지를 빤히 알면서도 그렇게 대꾸해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걸린다는 듯이 그는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옆구리에선 허리띠에 찬 수통과 부딪치며 소총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돌아다보니, 까마귀떼가 조금 전에 우리가 지나온 밭으로 다시 펄럭펄럭 내려앉고 있는 게 보였다. 놈들은 거기에다 무엇인가 먹을 것을 숨겨 두었던 것일까. 텅 빈 초겨울의 들녘에서 저희들끼리 몰려다니며 무엇 하나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메마른 밭고랑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배회하고 있는 그 크고 흉물스런 새떼의 모습이 까닭 없이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저걸 좀 봐라이. 새들은 사람보담도 몬치 계절을 아는 법이여.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잘게 썬 고구마를 햇볕에 말리기 위해 마당 앞 돌담장 위에 하나씩 널고 있던 참이었다. 토방에 주저앉아 잠자리를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담장에 기댄 어머니가 목을 젖힌 채 하늘을 치어다보며 서 있었다. 그녀의 눈길이 가 닿아 있는 쪽 하늘엔 언뜻 작은 점들이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 게 눈에 잡혔다. 새떼였다. 목이 길다란 것인 어쩌면 자연 시간에 배운 청둥오리나 재두루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새들은 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허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해마다 앞산 나무숲이 누런빛을 떠올리기 시작하고 가을 햇볕이 차츰 온기를 잃어 갈 무렵이면 우리는 뒷산 등성이를 넘어 날아오는 그 철새들의 행렬을 이따금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대단히 높다랗게 떠서 목을 길게 잡아뺀 채 끊임없이 날아가고 또 날아가곤 했다. 나는 새들이 그렇게 우리 마을을 지나서 앞산 너머에 있는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얘야, 저것은 북쪽에서 날아오는 철새란다. 날씨가 추워지면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봄에는 다시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여.

  어머니는 넋나간 사람처럼 하던 일을 잊은 채 아직도 고개를 길게 빼 늘이고 하늘을 치어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나도 학교에서 배워서 다 아는 얘기였다. 그 새들은 바닷가나 강 기슭에서 잔 물고기며, 우렁이, 조개 같은 것들을 먹고 산다는 것조차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함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 이전에도 벌써 그와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들어 왔던 까닭이었다. 이제는 그것이 어머니 혼자서 외는 주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름대로 여기고 있는 터였다.

  나는 다시 잠자리의 날개를 무릎 새에 끼우고, 녀석의 발에 실가닥을 묶기 위해 정신을 모았다. 잠자리가 눈알을 뒤룩거리며, 연신 발을 오므락대었으므로 실을 잡아 묶기에 애를 먹었다. 나는 그놈을 이용해 다른 잠자리들을 유인할 작정이었다.

  한참 후에까지도 어머니는 그렇게 멍하니 서서 하늘을 치어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새들은 거의 언제나 이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길다랗게 열을 지어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지나 바다를 향하고 끼륵끼륵 날아가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공연히 화가 치밀어 새들을 향해 주먹감자를 날려 보내곤 했는데, 어머니는 그 새들이 마을 들판을 지나고 멀리 맞은편 산꼭대기 너머로 가물가물 사라져 버릴 때까지 오래오래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는 또 불현듯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그래애. 저런 날짐승도 때가 되면 제 고향으로 날아올 줄을 아는 법이란다. 그 멀고 먼 북녘에서 애를 써가며 한사코 여그까장 찾아오는 걸 좀 봐라이.

  그럴 때면, 어머니는 영락없이 무엇엔가 홀려 있는 사람 같았다. 그것은 꼭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한 줄로 길다랗게 혹은 기역자나 화살표 꼴로 대열을 지어서 날아가는 새들을 향해 하는 말 같기도 했고, 아니면 당신 혼자만 아는 그 누군가와 나직하게 주고받는 얘기 같기도 했다.

  저만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인가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대략 삼십여 호나 될까.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마을 앞을 돌아 흐르는 실개천둑 위엔 이파리를 모두 떨구어 낸 껑충한 미루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이즈음엔 어딜 가보나 그렇듯 허름한 집채 위에다가 슬레이트나 함석 따위만 덜렁 씌워 놓고서 거기에 원색 페인트를 덕지덕지 개어 바른 탓으로 오히려 생경하고 조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런 모습을 그 마을도 예외 없이 지니고 있었다. 강원도 산간치고는 비교적 평탄한 인근의 밭뙈기를 일구며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눈치로 첫눈에도 가난에 찌든 벽촌의 모습이었다.

  외딴집 하나를 지나쳤을 때 담장도 없는 허름한 그 집 토방에서 개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우리를 보고 깽깽 짖어 댔다. 바싹 마르고 못생긴 잡종개였다. 마을 초입을 들어서니 작은 구멍가게가 눈에 띄었다. 아마도 유일한 가게인 모양으로 담배라고 쓰인 양철 표지가 기둥에 붙어 있고 그 곁에 빨간 우체함도 걸려 있었다. 우선 거기서 물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독히 낡고 엉성한 유리문은 닫힌 채로였다. 온통 빈집들뿐인가 싶게 주위는 인기척이 없었다. 오일병은 가게 앞에 펴놓은 먼지 낀 평상 위에 소총과 철모를 벗어 놓고 걸터앉더니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나는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창살마다엔 먼지가 켜를 이루고 있었고, 안에는 아무도 뵈지 않았다. 밀어 보니 문은 잠기지 않은 채였다. 가게라고 해야 건빵 부스러기 따위가 대부분인 싸구려 과자 봉지들이 종이상자에 담겨져 있었고, 소주병과 라면, 비누, 성냥, 고무줄 정도가 진열품의 전부였다. 몇 차례 부르고 나서야 때묻은 창호지가 너덕너덕 붙여진 쪽문이 반쯤 열리고 사람의 머리통 하나가 비죽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흰 머리카락이 반이나 섞인 노파였다.

  “누굴 찾으시우.”

  노파는 이쪽이 군복 차림임을 확인하고 나자 꿈지럭거리며 문턱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여전히 문고리를 한 손으로 쥔 채로였다. 어슴푸레한 방 안에 다른 누가 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바닥에 깔린 꾀죄죄한 이불자락이 내다보였다.

  “실례합니다. 좀 알아볼 말씀이 있는데요.”

  “무, 무슨 일이신데 그러시우.”

  철모를 벗어 들고 나는 부러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려 했다. 노파는 이쪽을 아직 경계하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마을 이장집을 물었다.

  “이장? 무엇 때문에 찾는지는 모르겠수만, 지금 가본들 이장은 못 만날 텐데…….”

  그제서야 노파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 통에 쪽문이 소리를 내며 비스듬히 젖혀져 버렸다.

  “아침 나절에 여길 들렀었는데, 읍내에 볼일이 있는 모양입디다. 막차는 해질녘에나 올 테니까 한참 멀었구…….”

  “뭐, 꼭 이장님이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마을 어르신들 중에서 아무나 좀 뵈었으면 합니다만.”

  나는 눈곱이 뀌적뀌적한 노파의 실눈을 바라보며 약간 답답한 느낌으로 말했다. 그때 방 안에서 인척이 있었다.

  “왜 그러시오.”

  작달막한 키의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문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때까지 방 안에 누워 있었던 모양이었다. 첫눈에도 병중이 아닌가 싶은 안색이었지만, 평생 흙을 일구며 살아온 촌로답게 주름살이 팬 이마엔 아직 강건함이 엿보였고 나를 쏘아보는 눈초리에도 어딘가 힘이 있었다. 나는 우선 우리가 마을 가까운 산기슭에서 며칠 전부터 야영 훈련중인 부대의 일원임을 밝혔다.

  “그런데 실은, 오늘 오전에 참호를 파다가 우연히 사람의 유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유골이라구?”

  노인이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노인의 그 말에 오히려 방문에 붙어있던 노파가 엉덩이를 들썩 하고 일어서려 했다.

  “네. 틀림없는 사람의 뼈였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줄 알았으면 누가 삽을 대었겠습니까. 누가 보더라도 묘라기엔 너무 반듯한 평지였어요. 근처엔 다른 묘 같은 것도 전혀 없었고요.”

  “으음, 그렇겠지…….”

  뜻밖에도 노인은 짚이는 게 있는 듯 고개를 주억이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디쯤이나 됩디까, 군인양반.”

  노파가 징겅징겅 마루를 질러오며 물었다. 그녀의 반응은 좀 의외였다. 내가 대강 그 위치를 설명해 주고 있는 동안 오일병은 얼굴을 찡그린 채 곁에서 듣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맨 먼저 삽 끝으로 뼛조각을 헤집어 냈던 게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즈음, 기동훈련을 대비한 야전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은 두 사람씩 한 조가 되어 경계용 참호를 각 이십 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파야 했다. 우리 소대에게 할당된 몫은 삼부 능선에 위치한 자리였다. 나와 오일병은 하필 맨 좌측 끝을 맡게 되었다. 소대장이 군화 뒤축을 빙글 박아 돌리며 표시해 준 그곳은 그다지 넓진 않았으나 주위에 비해 반반한 평지를 이루고 있는 걸로 보아 꽤 오래전에 버려둔 해묵은 밭자리가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유난히 잡초가 무성하게 어우러져 있는 그 자리에 섰다. 말라붙은 이파리들을 달고 키가 넘게 자란 쑥대며 엉겅퀴 같은 억세고 질긴 풀들이 서로 완강히 얽혀 있었다.

  젠장, 뭐라도 숨어 있을 것같이 음침하군.

  내키지 않는다는 듯 오일병이 코를 찡그렸고, 나 역시 왠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풀섶을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삽날을 비껴 들고 더부룩한 풀더미를 밑동부터 쳐나가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 굵기의 풀줄기들은 삽날로 서너 차례 내리쳐야만 쓰러졌다. 그래도 땅 표면이 그리 두껍게 얼어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무릎 깊이만큼 파들어가자 거기서부터는 흙 빛깔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지금껏 우리가 퍼냈던 것보다도 훨씬 습기차고 검붉은 흙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주위에 스멀스멀 퍼져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것은 어릴 적, 내가 살았던 퇴락한 고가의 마룻장 밑으로부터 비라도 금방 구죽죽이 뿌릴 성싶은 날이면 솔솔 스며 나오곤 하던 그 눅눅하고 음습한 냄새를 연상케 했다. 휑하니 넓기만 한 큰 집에 혼자 남아 있을 때나 무료할 때면 나는 늘 마루 위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고개를 디밀어 마루 밑을 오래 들여다보곤 했었다. 마루 밑 깊숙한 저편엔 언제나 까마득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괴괴한 어둠과 그 어둠에서 끊임없이 솔솔 풍겨 나오는 음습한 곰팡이 냄새는 마치 은밀한 범죄 장면을 숨어 지켜보고 있는 듯한 은근하면서도 유혹적인 두려움과 함께 전신에 아릿한 쾌감과 흥분을 불러일으키곤 했던 것이다.

  어이쿠, 이게 뭐야!

  코를 킁킁거리면서도 작업을 계속해 가는데 갑자기 오일병이 억, 하고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 이제 막 삽 끝에 떠올라온 흙덩이를 들여다보다 말고 삽자루를 팽개친 채 그는 구덩이 밖으로 벌벌 기어나가고 있었다. 그 바람에 뭉툭한 흙덩이가 내 발치에 떨어졌다. 사람의 해골이었다. 눈알이 있던 자리엔 꺼멓게 뚫린 두 개의 구멍이 흙더미 속에 박힌 채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동료들이 달려왔고 잠시 후엔 소대장과 인사계까지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끼여들었다. 소대장은 그걸 다시 제자리에 아까처럼 파묻어 버리라고 말했다. 그런데 인사계 김중사가 손을 저으며 나섰다.

  저, 모르시는 얘깁니다. 아무리 족보 없는 유해라고 해도 조상을 그리 함부로 대하는 법이 아니에요. 이런 일이 우연 같지만 알고 보면 그게 다아 인연이 닿아 이리 된 것인 줄 누가 압니까. 잘못하다간 자칫 복이 될 것을 화로 바꾸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인사계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자기도 두어 번 겪었는데 굴러다니는 뼛조각이라고 함부로 내팽개쳐 버린 다음엔 반드시 뒤끝이 곱지 않았노라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실지로 있었다는 몇 가지의 다소 믿기 어려울 불상사에 대해 일일이 예를 들어 주기도 했다. 심심하면 아무나 붙잡고 운을 봐주겠다며 손바닥을 벌려 보곤 하던 그였다.

  결국 우리는 관도 없이 묻혀 있던 그 뼛조각들을 조심스레 파내기 시작했다. 유골은 비교적 온전하게 제 모습을 갖춘 채 묻혀 있었다. 고작 무릎 깊이만큼의 흙 속에 묻혀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지런했다. 하지만 주위로부터는 여전히 시큼한 냄새가 줄곧 피어올라 왔다. 맨 먼저 머리뼈를 끄집어냈고, 이어서 갈비뼈가 엉성하게 붙은 몸통 부분을 끄집어내었을 때 지켜보던 우리들은 문득 아, 하고 낮은 탄성을 질렀다.

  저건 피피선 아냐?

  누군가가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에 몇 겹이나 되는 철사줄이 감겨져 있는 것이었다. 흔히들 피피선이라고 부르는, 아직도 군용 유선 전화선으로 쓰이고 있는 바로 그 전선이었다. 그것은 두 팔과 손목 뼈까지도 치밀하게 결박해 놓고 있었다. 시신이 누워 있던 자리의 흙은 유난히도 검붉은 찰흙빛이었다.

  한순간, 구덩이 옆에서 줄곧 지켜보던 나는 저도 몰래 삽자루를 놓고 말았다. 삽은 미끄러지며 구덩이 속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지고 있었다. 모를 일이었다. 몇 겹으로 뭉쳐진 채 결박해 놓고 있는 그 검고 가느다란 철사줄을 바라보던 순간, 나는 불현듯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보았던 것이었다. 저걸 좀 바라이, 새들도 때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올 줄을 아는 법이여. 담장 모서리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서서 하늘을 치어다보며 어머니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것 보라구요, 영감. 내가 아까 뭐랍디까. 엊저녁 꿈에 글쎄 그 어르신네를 보았다니까요.”

  노파가 허둥대는 음성으로 노인을 향해 말했다.

  “거 참, 쓸데없는 소릴.”

  “정말이라니까요. 영락없이 생시에 보던 그대로였었다우. 그 훤칠한 얼굴로 삐긋이 웃으시면서 아, 영감을 찾아왔노라고 그러잖아요. 원, 설마 생시인들 그리 역력할 수가 있을까.”

  “제발 그만 좀 해두라니까 그러는군. 임자는 가서 술 한 병하고 뭣 좀 집어 오구려. 조상을 뵈었다는데 빈손으로 갈 수야 없는 노릇이니…….”

  노인은 퉁명스레 쏘아 주고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짙은 회색 두루마기를 걸쳐 입고 나왔다. 우리는 소총을 다시 어깨에 메고 일어섰다. 노파가 한 되짜리 소주병과 북어 서너 마리를 신문지에 쌌다. 그것들을 나와 오일병이 받아서 하나씩 옆구리에 끼었다.

  “추우신데 공연한 걸음을 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오, 젊은이. 이런 일은 꼭 남의 일만은 아니니까…….”

  노인은 그렇게 선선히 대답하고 훌쩍 문을 나서고 있었다. 노파가 마을 초입까지 따라나왔다.

  “거기 가거든 찬찬히 잘 살펴보시구려. 그 어르신은 키가 크고 몸매가 굵은 분이시니까 어쩌면 알아보실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수.”

  더는 따라 나서지 않을 생각인지 노파는 걸음을 멈추고 남편에게 당부를 했다.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한 번 까딱해 보였을 뿐 말없이 그녀를 떼어놓고 우리들을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가 한쪽 다리를 조금씩 절고 있음을 발견했다. 얼핏 보면 잘 드러나지 않았으나 분명히 노인은 왼편으로 기우뚱대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도 퍽 정확하게 떼어놓는 걸음걸이였다. 외딴집을 지나칠 때, 예의 그 잡종개가 달려나오더니 또 짖어 대기 시작했다. 먹을 걸 제대로 주지 못하는지, 홀쭉하니 달라붙은 뱃가죽에 뼈가 앙상하게 불거져 나온 꼬락서니로 개는 제법 그르렁거리는 시늉을 했다.

  휑하니 비어 있는 들판 한가운데에서 껀정하니 바람을 맞으며 늘어서 있는 전신주들을 옆에 끼고 우리 셋은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얼마쯤 걷다가 돌아보니 그때까지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노파가 마악 등을 돌린 채 구부정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게 보였다.

  철새들이 날아오는 가을 무렵이면 나는 늘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어머니의 보습을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꽤나 나이가 들었을 때까지도 나는 왜 그 하찮은 새들의 이동이 어머니의 눈빛을 아득하게 풀리도록 만들곤 하는 것인지, 그리고 사람보다도 먼저 계절을 알아차리고 따뜻한 남녘으로 날아온다는 새들의 그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어김없는 본능이 왜 하필 그녀에게만은 그토록 새삼스러운 의미를 지녀야 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때인가 끼륵끼륵 이상한 울음 소리를 남기며 우리 마을을 지나쳐 가는 철새의 무리를 바라보면서 어머니는 어쩌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한여름 땡볕 속에 쭈그리고 앉아 비탈진 밭고랑을 호미질해 나가다가도 이따금 고개를 들어 동구밖으로 뻗어 나간 고갯길을 하염없이 멍한 눈으로 바라다보기도 하고, 빨래를 줄에 널거나 마당 귀퉁이에서 푸성귀를 다듬고 있다가도 깜박 넋을 놓아 버린 사람처럼 허공으로 시선을 물빛으로 풀어 던지며 문득 긴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는 새로이 알아냈던 것이었다. 그때가 아마 열두서너 살이었으리라.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우리집엔 어머니와 나 둘뿐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실한 의문점으로 여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먼 곳으로 배를 타고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시지 못하게 된 것이야. 아버지에 대해 물으면 어머니는 겨우 그렇게만 대답해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나는 교실에 가방을 남겨 둔 채 혼자 집으로 울먹이며 돌아왔던 적이 있었다. 같은 반의 먼 친척뻘 되는 녀석으로부터 나는 아버지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우연히 전해 듣게 되었던 것이었다. 대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와 나는 다짜고짜 어머니를 붙잡고 덤벼들 듯이 따져 물었다.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로 짧게 스쳐 지나가던 그 참담한 고통의 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내게 간신히 이렇게 대답하던 것이었다.

  그래. 아버진 죄를 지었단다. 아직은 넌 모를 테지만, 그 때문에 아버지는 집을 떠나신 거여. 하지만…… 네 아버지는 눈매가 고운 분이셨다. 우리 마을에서 단 하나뿐인 학생이었고…… 남들이 사람을 해치려는 걸 한사코 말리시려고 했지. 그 때문에 살아난 사람도 여럿이 있어. 정말이여.

  그런 어머니의 변명은 끝끝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그 후로 나는 좀처럼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뜻밖에도 아버지의 죄를 순순히 시인하는 그녀의 한마디가 내게는 그토록 엄청난 충격으로 깊이 남겨졌던 탓이리라.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아버지의 그 죄라는 것을 내 스스로 함께 나누어 지니고 만 느낌이었고, 그 때문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나는 눈빛이 깊고 어두운 아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버지의 무서운 환영은 저주처럼 내 곁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시커먼 어둠 저편에 숨어서 음산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어디에나 숨어 있었다. 내 어릴 때 이따금 고개를 디밀어 들여다보면 마루 밑 저편 깊숙이 도사라고 있던 그 까마득한 어둠 속에도 그 어둠 속에서 술술 기어나오던 그 눅눅하고 음습한 냄새 속에서도 내가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그 사내는 핏발 선 눈알을 번득이며 나를 쏘아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어디서 묻었는지도 모르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까지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처럼 내게는 저주와 공포의 낙인으로 깊이 박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낙인을 가슴에 지닌 채, 나는 끝끝내 나를 휘감고 있는 어떤 엄청난 죄악감과 불길한 예감으로부터 영영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산골짜기를 돌아나온 바람이 섬뜩한 한기를 뿌려 주고 내달아났다. 노인은 줄곧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조금씩 한쪽 다리를 절며 걷고 있는 노인의 허리는 그러나 곧게 세워져 있었다. 한 발을 절룩이면서도 그렇듯 허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노인은 분명 내심 안간힘을 쓰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그가 헤쳐 나온 지난 삶 또한 그렇게 흐트러짐 없이 질기고 옹골찬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멀리 떨어진 산기슭에서 까마귀떼가 이따금 날아올랐다가 다시 펄럭펄럭 내려앉곤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하늘 한쪽 끝이 부패한 짐승의 살덩이처럼 스멀스멀 부풀어오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암만해도 이거, 우리가 저 영감네 산소를 작살내 놓은 건 아닐까요, 이병장님.”

  오일병이 곁으로 바싹 다가오며 말했다.

  “설마 그럴라구. 제대로 쓴 묘라면야 관도 없이, 게다가 그런 흉한 꼴을 하고 있겠어.”

  “하기야…….”

  그는 옆구리에 낀 술병을 반대쪽으로 옮겨 안으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어, 눈이 쏟아질 것 같군.”

  앞서 가던 노인의 음성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정말, 하늘 한끝으로부터 검고 두터운 구름이 낮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어느새 해는 보이지 않았다.

  야영지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가파른 비탈을 마저 걸어 올랐을 때 김중사가 나와 노인을 맞았다. 대부분 구덩이 파기를 마치고 땔나무를 긁어다가 불을 피워 손을 녹이고 있는 참이었다. 낯선 분위기 탓인지 노인은 적이 당황한 얼굴빛을 띠고 있었다.

  “영감님,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얼굴에 애티가 남아 있는 소대장이 거수경례를 붙이자 노인은 황황히 허리를 숙였다.

  우리는 노인을 이끌고 유해가 나온 자리로 갔다. 구덩이는 파다 중지했던 대로 내버려져 있었는데, 그 곁에 신문지를 깔고 예의 그 뼛조각들을 모아 놓은 게 보였다. 노인은 한동안 그걸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문득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의 주름 많은 이마가 어둡게 보였다.

  “여길 파라고 지시한 것도 나였습니다만, 처음부터 전혀 묘 같지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것이 여기 묻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행여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싶은지 소대장은 변명처럼 말했다.

  “알고 보면 조금도 이상스런 일은 아니지요. 이 부근이 워낙 그런 자리였으니까요.”

  노인은 한동안 묵묵히 그것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역시 우리 짐작대로 육이오 때에…….”

  “여기만은 아니지요. 마을에서 십여 리 안팎 어디를 파보더라도 이렇듯 주인 없는 뼈다귀 하나쯤 찾아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외다.”

  “그렇게까지 심했습니까. 예전에 여기서 무슨 유명한 전투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한 것 같은데.”

  부쩍 호기심을 보이며 되묻는 소대장의 앳된 얼굴을 흘깃 쳐다보더니 노인은 몸을 돌려 짧은 동안 먼산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게 어디 꼭 이 마을에 한한 일이겠소만, 유난히도 여기선 사람 죽는 꼴을 지겹도록 지켜본 셈이지요. 저기를 보시구려.”

  노인은 손가락을 들어 멀리 산을 가리켰다. 반도의 등줄기라고들 하는 태백산맥의 거대한 모습이 잔뜩 찌푸린 하늘 한쪽을 가리운 채 몸을 틀고 엎드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방 어디에나 험준한 산으로 시야가 꽉 막혀 있는 지형이었다. 어디를 향해 나아가든지 이내 깎아 세운 듯한 산허리에 맞부딪치고 말 게 뻔했다.

  “저기가 바로 태백산맥의 원 등줄기인 셈이오. 저길 타고 올라 등성이만 따라가노라면 남북으로, 지리산에서부터 금강산까지 곧장 이어져 있다고들 하지요. 예전엔 하늘이 뵈지 않을 만큼 울창한 산이었소.”

  우리는 노인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거대한 파충류의 등허리처럼 꿈틀거리며 뻗어져 나온 산맥의 등줄기는 곧바로 마을 북쪽에 마주 뵈는 산으로 잇닿아 있었다. 그런데 그 산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깎아지른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절벽을 멀리 돌아 나가자면 자연히 이 마을 근처를 지나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노인의 말로는 그게 바로 문제였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부터 낯선 사람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하더라는 것이었다. 전선이 훨씬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엔 정작 총성조차 뜸하 던 마을은 느닷없이 쑥밭이 되다시피 했다. 산사람들은 주로 밤에만 나타나 식량이며 옷가지를 약탈해 갔고 때로는 길잡이로 쓰기 위해 마을 주민들을 끌고 가기도 했다. 지리산에서부터 줄곧 걸어왔다는 패거리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굶주리고 지친 몰골로 북쪽을 향해 도주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그들의 퇴로를 막기 위해 국군이 들어왔고, 그때부터 전투는 산발적이나마 밤낮으로 계속되어졌다.

  “끝내는 소개령이 내려져서 마을은 이주를 하게 되었으나 그 와중에 주민들의 수효도 꽤 줄었지요.”

  노인은 밤새 총소리가 어지럽던 다음날엔 들녘이며 산기슭에 허옇게 널린 시체를 모아다 묻는 일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났고 사람들은 마을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름도 고향도 모르는 그 숱한 낯선 시신들을 묻었던 자리엔 해마다 키를 넘기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돋아나곤 했다. 그 때문에 몇 년 동안은 누구도 아예 감자나 무 따위는 밭에 심으려고 하지 않았노라고 노인은 말했다.

  누군가가 헌 타월과 신문지를 가져왔다. 노인은 뼛조각을 하나씩 집어 들고 수건으로 흙을 닦아 낸 다음 그것을 펼쳐진 신문지 위에 가지런히 정리해 놓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치도 아마 빨갱이였겠구만. 안 그래요?”

  소대장이 지휘봉의 뾰족한 끝으로 쿡쿡 찌르듯 유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인사계가 되물었다.

  “어째서요.”

  “산을 타고 도망치던 빨치산들이 그리 많이 죽었다잖아. 이치도 보기엔 군인은 아니었을 것 같고, 그렇다고 근처의 주민이었다면 가족이 있을 텐데 임자 없이 이리저리 팽개쳐 뒀을라구.”

  “그걸 누가 압니까. 그때야 워낙 피차에 서로 죽고 죽이던 판인데…….”

  그때였다. 쭈그려 앉아서 손을 움직이고 있던 노인이 불쑥 소리치는 것이었다.

  “어허, 대관절…… 대관절 그게 어떻다는 얘기요. 죽어서까지 원 아무리 이렇게 죽어 누운 다음에까지 이쪽이니 저쪽이니 하고 그런 걸 굳이 따져서 무얼 하자는 말이오. 죽은 사람이 뭣을 알길래…… 죄다 부질없는 짓이지. 쯔쯧.”

  노인의 음성은 낮았지만 강하고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 뼛조각에 묻은 흙을 정성스레 닦아 내고 있었다. 무슨 귀한 물건마냥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신중히 손질하고 있는 노인의 자그마한 체구를 우리는 둘러서서 지켜보았다. 모두들 한동안 입을 다물었고 나는 흙에 적셔진 노인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땅속에 누운 사람의 잠을 살아 있는 사람이 깨워서야 되겠소. 또 그럴 수도 없는 법이고. 원통한 넋이니 죽어서라도 편히 눈감도록 해야지, 암. 그것이 산 사람들의 도리요…… 하기는, 이렇게 불편한 꼴로 묶여 있었으니 그 잠인들 오죽했을까만.”

  노인은 어느 틈에 꾸짖는 듯한 말투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개골과 다리뼈를 꼼꼼히 문질러 닦은 뒤, 노인은 몸통뼈에 묶인 줄을 풀어 내기 시작했다. 완강하게 묶인 매듭은 마침내 노인의 손끝에서 풀리어졌다. 금방이라도 쩔걱쩔걱 쇳소리를 낼 듯한 철사줄은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살을 녹이고 뼈까지도 녹슬게 만든 그 오랜 시간과 땅 밑의 어둠을 끝끝내 견뎌 내고 그렇듯 시퍼렇게 되살아 나오는 그것의 놀라운 끈질김과 냉혹성이 언뜻 소름끼치도록 무서움증을 느끼게 했다.

  노인은 손목과 팔에 묶인 결박까지 마저 풀어 낸 다음 허리를 펴고 일어서더니 줄묶음을 들고 저만치 걸어나갔다. 그가 허공을 향해 그것을 멀리 내던지는 순간 나는 까닭 모르게 마당가에서 하늘을 치어다보며 서 있는 어머니의 가녀린 목줄기와 그녀가 아침마다 소반 위에 떠서 올리곤 하던 하얀 물사발이 눈앞에 떠올랐다가 스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멀리 메마른 초겨울의 야산이 헐벗은 등을 까내놓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사위는 온통 잿빛의 풍경이었다. 피잉, 현기증이 일었다.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가 모래밭을 걸어오고 있었다. 돌돌거리며 흐르는 물소리를 거슬러 강변 모래밭을 어머니가 혼자 저만치서 다가오고 있었다. 모래밭은 하얗게 햇살을 되받아 쏘며 은빛으로 반짝였다. 허리띠를 질끈 동인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흐느적이며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햇살에 부신 눈을 가늘게 오므리고 줄곧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꿈속에서처럼 나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는 한 사내의 환영을 보았다. 그건 아버지였다. 언젠가 어머니의 낡은 반닫이 깊숙한 옷가지 밑에 숨겨져 있던 액자 속에서 학생복 차림으로 서 있던 그대로 그건 영락없는 그 사내였다. 나를 어머니의 뱃속에 남겨 놓은 채 어느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밤, 산길을 타고 지리산인가 어디로 황황히 떠나가 버렸다는 사내. 창백해 뵈는 뺨에 마른 몸집의 그 사내가 어머니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눈으로 풀밭에 앉아 나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의 눈썹과 코, 입의 윤곽과 야윈 목줄기까지 뚜렷이 드러날 만큼 가까워졌을 때 사내의 환영은 어느 틈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얗게 반짝이는 모래밭 위로 어머니가 찍어 내는 발자국만 유령처럼 끈질기게 그녀의 발꿈치를 뒤따라오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관 대신에 신문지로 싼 유해를 맨 처음 그 자리에 다시 묻어 주었다. 도톰하니 봉분을 만들고 뗏장까지 입혀 놓고 보니 엉성한 대로 형상은 갖춘 듯싶었다. 노인은 술을 흙 위에 뿌려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한 모금 마신 다음에 잔을 돌렸다. 오일병이 노파가 준 북어를 내놓았고, 덕분에 작은 술판이 벌어졌다. 음복인 셈이었다.

  “얌마, 이런 느닷없는 장례식도 모두 너희 두 놈들 때문이니까, 자 한 잔씩 마셔라.”

  “그래그래, 어쨌든 너희들은 좋은 일 했으니 천당 가도 되겠다.”

  소대장이 병을 기울였고 다른 녀석들도 낄낄대며 한마디씩 보태었다.

  술이 가득 차오른 반합 뚜껑을 나는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저것 봐라이. 날짐승도 때가 되면 돌아올 줄 아는 법이다. 어머니가 말했다. 저만치 웬 사내가 서 있었다. 가슴과 팔목에 철사줄을 동여맨 채 사내는 이쪽을 응시하며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퀭하니 열려 있는 그 사내의 눈은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채로였다. 애앵. 총성이 울렸고 그는 허물어지듯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불현듯 시야가 부옇게 흐려 왔다.

  아아.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쓰러져 누워 있을 것인가. 해마다 머리맡에 무성한 쑥부쟁이와 엉겅퀴꽃을 지천으로 피워 내며 이제 아버지는 어느 버려진 밭고랑, 어느 응달진 산기슭에 무덤도 묘비도 없이 홀로 잠들어 있을 것인가.

  반합 뚜껑에서 술이 쭐쭐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노인과 함께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노인이 몇 번이나 그만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지만 이번엔 올 때와는 달리 내가 앞장을 섰다. 짙은 잿빛 구름장들이 점점 낮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바람에 쫓기듯 구름은 어지러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마주 뵈는 산등성이로부터 내달려 오고 있는 참이었다.

  신작로로 나면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한쪽으로 조금씩 끌리는 노인의 걸음걸이가 아까보다는 더디었다. 가끔 등뒤에서 달려온 바람이 그의 낡은 두루마기 자락을 불어 올리곤 하였다.

  “저, 영감님, 아까 할머니 말씀을 얼핏 들으니까 누구를 찾고 계시는 것 같던데요.”

  찬찬히 잘 살펴보라고 당부하던 노파의 말이 생각나서 물었으나 노인은 한동안 묵묵히 걷기만 했다. 괜한 소리를 꺼냈나 싶은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까 노인이 입을 열었다.

  “실은 그때 나도 형님 한 분을 잃어버렸어. 내 다리가 이 꼴이 된 것도 그때부터이고…… 형님은 길잡이로 앞세워져서 한밤중에 끌려나갔다네. 산을 넘다가 함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가 봤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형님의 시체는 끝내 찾지 못했어.”

  우리는 그새 마을로 통한 샛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언덕길이었다.

  “그런데 간밤 꿈에 그 사람이 꿈을 꾸었다는구먼. 실없는 할멈 같으니라구…… 이런 일이 생길려구 그랬는지 원.”

  상여를 보았다던 오일병의 꿈 얘기를 기억해 내며 나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럼, 좀전의 그 유해가 혹시…….”

  “허허, 이제 와서 누가 그걸 어떻게 알아볼 수가 있겠는가. 무슨 특별한 표식이 남아 있다면 또 몰라도…… 하지만 그게 누구이든지 간에 불쌍한 영혼 하나, 늦게나마 땅속에 편히 눕게 해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 아닌가. 허허.”

  노인은 쓸쓸히 웃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 웃음을 삼켜 버렸다. 주위가 문득 어두워진 느낌이 들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바라보니 들녘 저편은 우윳빛 유리를 끼워 놓은 듯 희부옇게 흐려져 있었다.

  “눈이 내리는군요. 첫눈이지요 아마.”

  “그렇구먼.”

  우리는 한동안 밭둑 위에 서서 희끗희끗 땅 위로 내려앉기 시작하는 눈발을 말없이 눈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저만치 밭둑 너머로 마을 지붕들이 보였다. 저녁을 짓는 것일까. 몇 오라기 가느다란 연기가 실타래로 풀어지며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이젠 다 왔나 보구먼. 그만 돌아가 봐요. 혼자 돌아가려면 먼 길이 될 터인데.”

  노인이 웃으며, 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순순히 걸음을 멈추었다. 벌써 노인은 저만치 마을을 향해 기우뚱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차츰 굵어져 가는 눈발 사이로 멀어지는 노인의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나는 휘어 돌아간 밭언덕 귀퉁이가 그의 모습을 완전히 감추어 버릴 때까지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맡에 밥상을 놓는 기척이 들리고 이내 어머니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첫 휴가를 받아 도착한 다음날이었다. 밤새 완행열차를 타고 내려와 집에 닿자마자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눈을 비비며 일어났던 나는 그득한 밥상을 보고 놀랐다. 아이들처럼 연시 수줍은 웃음을 흘리며 어머니는 나를 쳐다보았다.

  참, 이상도 하지. 네가 온다는 말에만 정신이 팔려 깜박 잊고 있었는데, 글쎄 오늘이 그 양반 생일이로구나.

  누구 말예요?

  느그 아버지 말이다.

  얼결에 그렇게 말해 놓고, 그제서야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황황히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도대체 지금 정신이 있으세요, 어머니. 그 얘긴 다시 꺼내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아버진 진작 죽은 사람이에요. 아니, 설사 살아 있더라도 우리한테는 그게 백번 나아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냐. 얘야. 아직 살아 계실지 누가 안다고 그래.

  죽었어요. 그런 줄만 아시라니까요!

  그래도…… 살아 있기만 하믄야 언제고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디…….

  나는 기어코 폭발하고야 말았다.

  어떻게요? 이제 와서 대체 어떻게, 어떤 꼬락서니를 하고 서로 만난다는 말입니까, 네?

  입에 씹히는 대로 나는 내뱉고 있었다. 숟가락을 쥔 손이 벌벌 떨릴 지경이었다.

  아, 아니다. 내가 잘못했다. 빌어묵을놈의 이, 이…… 주둥어리가 방정이지 뭐이다냐.

  어머니는 훌쩍 등을 돌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저고리섶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외아들 앞에선 좀체 눈물을 비치지 않던 그녀였다. 어머니가 그토록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려 왔었음을. 내 유년 시절의 퇴락한 고가의 마루 밑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음습하고 불길한 냄새와 함께 나를 쏘아보고 있던 한 사내의 눈빛을, 그리고 청년이 된 지금까지도 가슴을 새까맣게 그을려 놓으며 깊숙한 상흔으로만 찍혀져 있을 뿐인 그 증오스런 사내의 이름을, 어머니는 스물다섯 해가 넘도록 혼자서 몰래 불씨처럼 가슴속에 키워 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한테 그 사내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곱고 자상한 눈매로서만, 나직한 음성으로서만 늘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울고 있는 건 그 미련스럽도록 끈질긴 기다림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아니, 사실상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녀의 기다림이 얼마나 까마득하게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자꾸만 자꾸만 밀려나가고 있는 것인가를 말이다. 스물다섯 해의 세월이, 스스로 묶어 놓은 그 완고한 기만이 목에 잠기어 흐느낌도 없이 지금 어머니는 울고 있는 것이었다. 밥상을 받아 놓은 채 나는 고개를 처박고 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우리 가족의 그 오랜 어둠과 같은 미역가닥이 국그릇 속에서 멀겋게 식어 가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노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새 수북이 쌓인 눈을 밟으며 나는 오던 길을 천천히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깨에 멘 소총이 수통과 부딪치며 쩔렁쩔렁 소리를 냈다. 나는 어깨로부터 전해 오는 그 섬뜩한 쇠붙이의 촉감과 확실한 중량을 새삼스레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누구인가를 겨누고 열려 있는 총구의 속성을, 그 냉혹함을, 또한 그 조그맣고 둥근 구멍 속에서 완강하게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는 소름끼치는 그 어둠의 깊이를 생각했다.

  까우욱. 까우욱.

  어느 틈에 날아왔는지 길 옆 밭고랑마다 수많은 까마귀들이 구물거리고 있었다. 온세상 가득히 내려 쌓이는 풍성한 눈발 속에 저희들끼리만 모여서 새까맣게 구물거리며 놈들은 그 음산함과 불길함을 역병처럼 퍼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얼핏, 쏟아지는 그 눈발 속에서 나는 얼어붙은 땅 밑에 새우등으로 웅크리고 누운 누군가의 몸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였다. 손발이 묶인 아버지가 이따금 돌아누우며 낮은 신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나는 황량한 들판 가운데에 서서 그 몸집이 크고 불길한 새들의 펄렁거리는 날갯짓과 구물거리는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머리 위로 눈은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굵고 탐스러운 눈송이들은 세상을 가득 채워 버리려는 듯이 밭고랑을 지우고, 밭둑을 지우고, 그 위에 선 내 발목을 지우고, 구물거리는 검은 새떼를 지우고, 이윽고는 들판과 또 마주 바라뵈는 거대한 산의 몸뚱이마저도 하얗게 하얗게 지워 가고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새벽마다 샘물을 길어 와 소반 위에 떠서 올려놓곤 하던 바로 그 사기 대접의 눈부시도록 하얀 빛깔이었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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