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고전산문

'채봉감별곡' 전문

열공햐 2021. 8. 27.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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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봉감별곡

 

 

  어젯밤에 불던 바람은 금성(金聲, 가을의 느낌을 자아내는 소리)이 완연하다. 모란봉 추운 바람이 단풍과 낙엽을 흩날려서 평양성중으로 불어 떨어뜨리는데, 사정없이 넘어가는 저녁빛에 홀로 서창을 의지하여, 바람에 불려 떨어지는 낙엽을 맥없이 보며 앉아 있는 여인은 평양성 밖에 사는 김 진사 집 처녀 채봉이라.

김 진사는 평양에서도 조신(삼가서 몸가짐을 조심)하는 양반이라. 문벌과 재산이 남부럽지 않을 만하지만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어 항상 한탄하더니, 만년에 딸 하나를 낳아 이름을 채봉이라 하여 금옥같이 기르니, 채봉이 재주가 총명하여 침선여공(針線女工)과 시서문필(詩書文筆)이 일취월장하고, 화용월태(花容月態, 아름다운 여자의 고운 용태)가 미인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라, 김 진사 내외 극히 사랑하여 장차 그와 같은 짝을 구하여 슬하의 낙을 보려 하고 널리 서랑(남의 사위를 높이 일컫는 말)을 구하나, 그 부모의 생각에는 평양 같은 시골 구석에는 그와 같은 배필이 없는지라. 김 진사는 좋은 인물을 구하려고 서울로 올라가고, 채봉이는 별당 속에서 홀로 아름다운 태도를 지키니 세월이 여류(如流)하여 나이 이미 이팔청춘이라. 사창에 매화꽃 떨어지고 버들가지에 꾀꼬리 울 적마다 적막히 봄소식이 늦어감을 한탄하더니, 무정세월이 멈출 바를 모르는지라. 봄은 가고 여름이 지나도록 아름다운 기약은 멀어지고 정전(庭前) 낙엽에 금풍(가을의 신선한 기운을 띤 바람)이 소슬하나, 한가한 수심과 숨을 탄식을 금치 못하는 터이라. 서창에 넘어가는 햇빛을 쳐다보더니, 다시 그 단풍잎이 날아가는 곳을 따라 후원으로 나오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비를 부른다.

 

 

“이 애 취향아! 후원으로 나오너라. 단풍 구경이나 하자.”

취향이가 뒤를 따라나와 동산에 올라서더니,

“아이고, 벌써 나뭇잎이 빨갛게 되었네. 그렇게 푸르고 무성하던 빛이 다 어디로 가고, 누가 이렇게 주황 다홍을 물들여 놓았노. 아! 세월도 빠르구나. 이 동산에 홍도(紅桃) · 벽도(碧桃) · 삼색도(三色桃) 꽃송이 벌어지고 버들잎 싹틀 적이 어제 같건마는, 미각지당(未覺池塘)에 춘초몽(春草夢)하여, 정전오엽(庭前梧葉)이 이추성(已秋聲)이로구나.(중국 송나라 주희의 시구. 연못 꽃밭 속에서 봄꿈이 깨는 줄을 몰랐더니, 벌써 뜰 앞 오동잎에 가을을 알리는 소리가 깊었구나) 인생 백년이 벌써 요도(夭桃, 아름답게 꽃이 핀 복사나무라는 뜻으로, 젊고 예쁜 여자의 얼굴) 삼월 다시 나고, 삭풍(겨울철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소슬하니 인생 또한 저와 같이 겉늙는구나.”

 

 

취향이,

“그러게 말씀이오. 버들가지에 채쭉으로 안장마 급히 몰아 진사님 떠나신 지 어젯날 같건만 한여름이 다 지나도 소식조차 막연하오그려.”

  이와 같이 서로 탄식하며 채봉은 떨어지는 나뭇잎을 아껴 주워 들고 아름다운 얼굴에 대면서, 가는 허리 석양 서풍 부는 바람에 부칠 듯하게 섰더니, 마침 이 때 서편 단장 안을 엿보는데, 나이 18, 9세 가량이요, 의복이 선명하고 얼굴이 관옥(冠玉)이요, 풍채가 수려한지라. 한번 봄에 마음에 갑자기 반가운 생각이 있으나, 아녀자의 마음이라 만면 수색으로 다시는 얼굴을 들어 보지 못하고, 취향을 앞세우고 초당(草堂)으로 급히 들어가고, 동산으로 난문을 걸어 잠그니라.

  그 소년이 채봉이가 취향을 데리고 들어가 문 거는 것을 보면, 담 터진 데로 들어와 좌우로 동산을 구경하며, 채봉이 앉았던 자리에 가 앉아 보니, 오히려 나머지 향기가 있는 듯한지라.

  ‘아! 신선이 귀동천(歸東天)하니 공여양류연(空餘楊柳緣)이요, 지문오작훤(只聞烏鵲喧)이로구나.(남자의 얼굴이 예쁜 것을 가리키는 말, 문맥 상 "미인갱불견(美人更不見)"이 추가)

 

 

한번 탄식하고 초당을 바라보다가 우연히 고개를 숙여 땅을 보니, 2, 3보 밖에 수건 하나가 떨어졌거늘, 급히 주워 보니 3(95.4cm)가량 되는 명주 수건이라. 자세히 펼쳐 본즉 수건 끝에 채봉 두 자를 수놓았는지라.

‘이는 분명 그 처녀의 수건이요, 채봉은 그 이름이라.’

생각하고, 따뜻한 향기를 품속에 품고 무슨 큰 보배나 얻은 듯이 기뻐하여, 앉은 자리로 다시 오려 하는데, 대문 안으로 사람의 소리가 들리거늘, 급히 담 터진 데로 도로 나와 서서 동정을 본즉 앞서서 들어가던 여자가 나와서 무엇을 도로 찾으며 혼잣말로,

“이상도 하다. 지금 떨어진 수건이 어디로 갔을까?”

하는지라. 소년이 이 소리를 듣고 입 속으로 말이 나옴을 깨닫지 못하고,

“벌써 내게 있는 물건을 아무리 찾으면 찾을 수가 있나, 공연히 애만 쓰지.”

그때 채봉이는 동산에서 급히 돌아오느라고 수건 떨어진 것을 몰랐다가 이윽고 깨닫고서 취향을 보내 찾아오라 하니, 취향이가 수건을 찾다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앞으로 와서 공손한 말로 수건을 달라 청한다.

“서방님이 뉘신지 모르거니와 지금 말씀을 들은즉 수건을 얻으신 듯하오니 얻으셨삽거든 내어 주시면 감은만만(感恩萬萬) 이올시다.”

“수건이 어떤 사람의 물건이냐?”

“우리 소저 가지던 것이올시다.”

“소저의 수건이면 도로 줄 터이니, 소저더러 와서 가져가시라고 해라.”

“아이고 서방님, 그 무슨 말씀이오. 소저는 규중 처녀라, 어찌 외인을 대면하오리까. 그것은 필경 희언(戱言)이시니 어서 주시옵소서.”

“나는 물건 주인을 친히 보고 전하고자 하여 그리 함이라, 어찌 희언을 하리요. 그러나 너는 누구냐?”

“저는 소저를 근시(近侍)하는 시비 취향이올시다.”

“네 소저는 이름이 무엇이냐?”

취향이 방긋 웃으며,

“외간 남자께서 남의 집 규수 이름은 알아 무엇하시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 마시고 수건을 어서 주시오.”

소년이 껄껄 웃고,

“이 애 취향아, 이름이라 하는 것은 남녀를 물론하고 알고 부르는 것인데, 그렇게 천부당만부당할 것이 무엇이냐. 내가 아는 것이 있기로 묻는 말이라.”

“규수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부모가 부르자고 지은 것이지, 외간 남자야 어찌 남의 집 규수의 이름을 부르리까.”

“이 애 네 말도 그럴듯하다만, 나는 이름을 알고야 수건을 줄 터이니 이름을 말하려거든 하고 말려거든 말려무나.”

취향이 생각하되,

‘어떠한 양반이신지 우리 소저와 인물이 상적(相敵, 양편의 겨루는 실력이 서로 비슷)할 뿐이라. 소저의 이름이 수건에 있은즉 알고 짐짓 묻는 것이라. 말하면 무슨 관계 있으리오.’

 

 

하고 또 한 번 상긋 웃으며 못 이기는 체 말을 한다.

“진정 알라시면 말씀할 터이니 수건을 주시렵니까?”

“암 주다뿐이겠느냐.”

“채봉이라고 하신답니다.”

“허허! 채봉이라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우냐. 이 수건에도 그 글자 있으되, 네 말을 듣고자 함이로다. 그러나 수건을 주기는 줄 것이니, 거기 잠깐 섰거라. 곧 다녀오마.”

“다녀오실 때 오실지라도 수건을 주고 가십시오.”

“오냐, 잠깐 섰거라. 즉시 올 터이니.”

하고 급히 아랫집으로 들어와 용연(龍硯)에 먹을 갈아 양호무심필(羊毫無心筆, 양철로 촉을 만든 필)을 흠씬 찍어 수건에 절구(絶句, 한시의 근체시의 하나, 기 · 승 · 전 · 결의 네 구로 되어 있음)를 써서 취향을 갖다 주며,

“나는 대동문 밖에 사는 장필성이라. 선친께서는 선천 부사로 계시다가 돌아가시고, 편모 슬하에 지금까지 성취(成娶, 장가를 들어 아내를 얻음)를 하지 못하였음에, 주야로 전전반측(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함)하여 숙녀를 구하려고 오매불망하는 사람이라고 소저께 말씀하고 이 수건을 드리어라. 수건을 보시면 답장이 있을 것이니 불안하다마는 회답을 전하여 주기를 바라노라. 여기 서서 기다리마.”

취향이 수건을 받아보고 깜짝 놀라,

“에그! 이 수건을 어떻게 갖다 드리라고 이렇게 글씨를 써서 못 쓰게 만들었으니까. 갖다 드리면 걱정을 하실 터이니 이 일을 어찌하나.”

“수건을 버려도 내 허물이고, 네야 무슨 관계 있느냐. 갖다 드려만 보아라. 불안하다마는 일후에 은혜를 후히 갚을 날이 있을까 하노라.”

취향이 마지못해 수건을 가지고 초당으로 들어간다.

 

  이 때 채봉이 취향으로 수건을 찾아오라 하고, 홀로 난간을 의지하여 기다리되, 한식경이나 되도록 들어오지 아니하니 속으로 생각하되,

‘이 애가 무슨 일로 그저 아니 들어올까? 수건을 찾느라고 이렇게 늦는가? 혹시 그 엿보는 소년이 수건을 집어서 실랑이를 하나. 아! 참 이상스러운 일이로군. 내가 규중처녀 되어 외간 남자의 일을 생각함이 온당치 못하나, 그 소년이 대체 누구인지 모르되, 남자 중에도 그런 인물이 있는가? 그러한 인물로 문학(文學)이 유여(有餘)하면 가위 금상첨화라 하련마는, 무무한 시골 생장 무식할 지경이면 그 인물이 아깝지 아니하랴.’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는데, 취향이가 손에 수건을 들고 앞으로 오며,

“참 세상에 희한한 일도 있지요.”

채봉이 이 소리를 듣고 급한 말로,

“이 애 취향아, 무슨 일이 희한하며, 무엇하느라고 이제야 찾아오냐?”

“다른 일이 아니올시다. 수건을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아까 담 밖에서 보던 이가 수건을 집어 가지고 서서 수건 찾는 양을 보고 여차여차하기에, 달라고 하였더니 무수히 실랑이를 하다가, 수건에 글을 써서 주며 이리저리하기로 마지못하여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만 소저께 꾸중이나 아니 들을는지요. 참 그 양반이야 인물도 잘생겼어요.”

하고 수건을 앞에다 놓으니, 채봉이 얼굴이 붉어지며 수건을 펴서 보니 글에 하였으되,

 

 

수건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향기가 나부끼니.

하늘이 나에게 정다운 사람을 내렸도다.

은근한 정을 참을 수 없어 사랑의 시를 보내오니.

바라건대 홍사가 되어 동방에 들기를 바라노라.

 

연월일 만생(晩生) 장필성

 

이라 하였거늘, 소저 보기를 다하고,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눈에 정기를 모아 글씨에 쏟고 있는데, 취향이가 소저의 눈치를 알고 소저를 쳐다보며 웃으며,

“무엇이라 글을 썼어요? 좀 일러 주십시오.”

채봉이 천연한 낯으로.

“읽으면 네가 알겠느냐. 그러나 수건을 못 찾을지언정 부질없이 받아 가지고 왔느냐? 그러나 남의 글을 보고 회답 아니할 수 없고,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아무렇게나 두어 자 적어 주십시오. 그 양반이 지금 서서 기다립니다.”

채봉이 마지못하여 방으로 들어가, 색간지(色簡紙)에 글 한 구를 지어 취향을 주며,

“이번은 처음 같은 일이라 마지못해 해답하거니와, 차후는 이런 글을 가져오지 마라.”

취향이 웃고 받으며,

“소저께서는 무엇이라 하셨어요?”

“에그, 글 모르니 갑갑도 해라.”

채봉이 취향의 등을 탁 치며,

“있다가 밤에 읽어 줄 것이니 어서 갖다 주고 오너라. 그러나 아랫집에서 글 지어 가지고 나오는지, 네 그 양반이 또 그리로 들어가나 보고 오너라.”

“예, 김 첨사 집에서 유하고 있다고는 해요.”

“그러면 김 첨사 집과 어찌 되나 물어나 보아라.”

취향이 대답하고 장필성이 있는 곳으로 나와 소저의 글을 전하니, 필성이 급히 받아 본즉 하였으되,

 

그대에 권하노니 양대의 꿈을 생각하지 말고,

독서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길 바라노라.

 

장생이 보기를 다하고 속으로 깊이 감동하여 취향을 쳐다보고 말을 묻는다.

“해답 전해 주어 감사하다. 그러나 지금의 연광(年光)이 몇 살이나 되셨느냐?”

“지금 열여섯 살이올시다.”

“열여섯 규수로서 글공부를 어떻게 이처럼 하시었느냐?”

“우리 댁 진사님께서 알뜰히 교훈하셔 금옥같이 기르시는 터이올시다.”

“지금 진사께서 댁에 계시느냐?”

“서울 가셨습니다.”

“서울은 무슨 일로 가셨느냐?”

“그는 자세히 모르오나, 아마 서랑을 구하러 가신 법합니다.”

장생이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은근히 놀라며,

“응 그래, 소저를 서울로 시집보내려는 모양이냐?”

“예, 평양 바닥에는 가감(可堪)한 인물이 없다고 하시더니, 올라가셨으니까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서방님은 김 첨사 댁이 어떻게 되셔요?”

“내 외가 댁이어니와, 내가 너더러 청할 말이 있으니 들으려느냐?”

“무슨 말씀이시오. 들을 만하면 듣고, 못 들을 만하면 못 듣지요.”

“다름이 아니라 네 소저도 절대가인(絶代佳人)이요, 나는 소년재사(少年才士)라. 군자호구(君子好逑)가 다시 더할 것 있겠느냐. 초면에 이런 말 부탁하기 어렵다마는 네가 중간에 들면 될 터이니, 소저와 한번 대면하게 해주면 은혜를 잊지 아니하마.”

취향이가 그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서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장필성을 자주 쳐다본다.

“왜 대답이 없이 나만 쳐다보느냐?”

“우리 댁 진사님이 성품이 엄숙하시니, 만일 이런 일을 아시면 나는 죽고 말지니, 내게는 그런 말 마시고 외처의 매파를 보내 통혼을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나도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마는, 소저와 한번 대면 후 매파라도 보낼 것이니, 너는 나와 소저를 위하여 혼약을 맺게 하여라.”

취향이 속으로 생각하되,

‘문벌도 상적하고 인물도 막상막하이니 가히 군자호구라. 일차 시험을 하여 보리라.’

하고 이윽고 무슨 생각을 하더니, 필성의 귀에 입을 대고 무엇이라고 두어 마디를 하고 한 번 방긋 웃으며,

“그러한 후 성사 여부는 서방님에게 있사오니 후회가 없도록 하시오.”

“과연 그렇게 해주면 은혜난망이다. 백골이 진토 되어도 잊지 못하리라.”

“그런 말씀 마시고 실기(失機)나 마시오.”

“오냐, 나는 너만 믿고 간다.”

이와 같이 약속을 단단히 하고 장필성은 김 첨사 집으로 가고, 취향은 초당으로 들어가니라.

 

  이 때 채봉이 답서를 지어 취향을 주어 보내고, 수건을 펴서 놓고 수삼차 음영(吟咏)하며 생각이 간절하여 속으로 말하되,

‘신언서판(身言書判, 당나라 때 관리 선별 기준이 되는 것으로, 몸 · 말씨 · 글씨 · 판단을 이름)이 그만한데 무슨 일로 그저그저 입장(入場)을 하지 못하였을까? 가세가 적빈(赤貧)함인가? 가합한 혼처가 없어서 그저 있음인가? 세상에 남녀는 다를지언정 마땅한 실가(室家, 가정)를 얻지 못한 사람이 또 있구나.’

하고 앉았더니, 취향이 초당에 들어와 뒤로 가만가만 걸어 채봉의 눈치를 보다가, 그 혼자 하는 말을 듣고 채봉의 앞으로 와서 웃으며 말하되,

“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혼자 하셔요? 소저께서 직녀가 되시면 저는 오작교가 되어 볼까요.”

채봉이 얼굴이 붉어지며,

“아이고 이 애가 그게 무슨 소리냐. 에라 미친년 듣기 싫다. 그러나 그 글을 갖다 주니까 무어라고 하더냐?”

“글을 보더니 입이 찢어질 듯이 좋아하며, 군자호구라 다시 더할 수 없다고 해요.”

채봉이는 다시 묻지 아니하고 방으로 들어가더라.

 

  취향이 장생과 그렇게 약속을 하여 두고 틈을 탈 길이 없더니, 하루는 소저를 모시고 초당에 앉았는데, 이윽고 월출동령(月出東嶺)에 밝기 낮 같아 사람의 심회(心懷)를 돕는지라. 취향이 채봉을 쳐다보고,

“소저는 월색이 이와 같이 밝은데, 뒷산에 가서 완월(玩月)이나 아니하시렵니까?”

“글쎄, 달이야 참 좋다. 중추명월이로구나. 후원에 가서 달구경이나 할까?”

채봉이 취향을 데리고 후원으로 나가 이리저리 거닐며 월색을 완상한다.

 

  이 때 필성은 취향과 약속하고 이날 저녁을 일찍 먹고 담 터진 데로 들어와 취향의 기침 소리를 기다리니, 취향이가 채봉과 같이 들어옴을 보고 급히 몸을 감추고 취향의 동정을 보는데, 취향이가 필성의 은신한 데를 자주보며 기침을 두어 번 하며 나오라 하는 모양이다. 필성이 급히 몸을 일으켜 채봉의 앞으로 나와 달 아래 우뚝 서니, 채봉이 크게 놀라 급히 몸을 피하려는데, 취향이가 채봉의 앞을 막아서며,

“소저는 놀라지 마옵소서. 이 양반이 일전에 글로 회답하시던 장서방님이올시다.”

“그 양반이 무슨 일로 남의 집 후원을 들어오셨단 말이냐? 빨리 나가시라고 해라.”

취향이가 미처 말할 새 없어 장필성이 앞으로 와 길이 읍하며,

“소생의 말은 일찍 취향에게 들으신 법합니다. 그러나 소생을 지금 나가라 하시니, 꽃 본 나비 어찌 그저 지나가며, 물 본 기러기 어옹(漁翁, 고기 잡는 노인)을 두려워하리이까. 소저는 소생을 저버리지 마시고 숙녀와 군자의 좋은 언약을 맺어 백년해로를 맹세함이 소원이올시다.”

채봉은 아무 말 없이 얼굴에 홍조를 띠어 차가운 달빛 아래 섰는데, 취향이 채봉을 쳐다보며,

“소저는 소비의 말을 들으소서. 오늘 이 일이 삼생기연(三生奇緣)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이 되리까. 전일 수건 잃으신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요, 수건이 장공께 들어간 것도 하늘이 시키심이라. 인력으로 막지 못할 것이며, 겸하여 장공과 문벌도 상당하고, 또 장공은 아직 취실(娶室, 아내를 얻음)하지 아니하심도 소저를 기다리심이라. 이 아니 천사기연(天使奇緣, 천국에서 인간계에 파견되어 신과 인간과의 중간에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하는 사자의 기이한 인연)이오니까. 소저께서는 조금도 서슴치 마시고 한 말씀만 하시면 백년대사를 정하는 것이올시다.”

채봉은 더욱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이켜 숨소리도 없이 섰는데, 조급히 서두르는 장필성은 다시 읍하며,

“소저께서 이와 같이 말씀을 아니하심은 소생을 더럽다 하시고 용납하지 아니하심이오니까. 굳이 말씀이 아니 계시면 소생은 이 가련한 신세를 세상에 버리고자 하오니 말씀하여 주옵소서.”

하고 앞으로 다가서며 연하여 말을 하니, 채봉이 마지못하여 아미(娥眉)를 숙이고 아니 나오는 목소리로 모기 소리만큼 내어 하는 말이라.

“전일 군자께서 주신 시구도 잊지 아니하고 있사오며, 겸하여 취향에게 들은 말도 있사오니, 어찌 다른 말씀하오리까.”

취향이 채봉의 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반가운 생각이 나서 말을 가로 타 하는 말이,

“그만하면 우리 소저의 뜻을 알 것이니, 서방님은 댁으로 돌아가서 매파를 보내소서.”

하고, 채봉을 데리고 초당으로 들어가는데, 장필성은 정신없이 초당만 바라보고 섰는 형상이 마음은 채봉을 따라 초당 속으로 들어가고 몸뚱이만 허수아비같이 섰다가 이윽고 돌아가니라.

 

  이 때 채봉의 모친 이씨가 월색이 명랑함을 보고 딸을 보러 초당으로 나오니 채봉과 취향이 없거늘, 마음이 괴이하여 후원으로 찾아오는데, 바람으로 좇아 남자의 음성이 들리는지라. 마음이 수상하여 몸을 감추고 엿들으니, 채봉이가 취향이를 데리고 어떤 남자와 수작하는 말이 귀에 역력히 들리는지라. 어찌된 일을 몰라 나가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그 남자를 보니, 백옥 같은 풍채 월하에 채봉과 같이 섰는 형상은 가히 원앙의 쌍이라. 여취여광(如醉如光, 매우 기뻐서 미친 듯도 하고 취한 듯도 함. 여광여취)하여 수작하는 이야기만 듣다가, 취향이가 필성과 작별하고 채봉과 같이 돌아옴을 보고 급히 초당 마루로 앞서서 올라가 앉으니, 뒤미처 채봉과 취향이가 오거늘, 이 부인이 시치미를 떼고 묻는다.

“아가, 어디를 갔다가 이렇게 늦게 오느냐?”

채봉은 자연 부끄러운 태도가 있어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고 취향이가 대답을 한다.

“달이 하도 밝기에 후원에서 놀다가 이제야 옵니다.”

“어린아이들이 무섭지 아니하냐? 근일 들은즉 후원 담 터진 데 사람의 소리가 있더라고 하는데, 다시는 밤중에 들어가지 말아라. 그러나 지금 들은즉 남자의 소리가 들리니 누가 들어왔더냐?”

채봉은 천만뜻밖에 이 말을 듣고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취향은 창황하여 즉시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이 부인이 이 거동을 보고 노기를 띠어 재차 묻는다.

“왜 대답이 없느냐? 나는 남자와 같이 말하는 것을 보고, 어떤 남자가 들어온 것을 책하여 보내는 줄 알았더니, 지금 여등의 동정을 보니 무슨 사정이 있구나. 이 일을 진사님이 아시기 전에 진작 실토하면 내가 먼저 조처를 하고, 진사님께 좋도록 말씀하려니와, 만일 기망(期望)을 하면 진사님께 여쭈서 살풍경(殺風景, 살기를 띤 광경)이 일 것이니, 말일 네가 기망하면 너부터 치죄(治罪, 허물을 다스려 벌을 줌)하리라. 취향아, 너는 사정을 자세히 알겠지. 네가 말하여 보아라.”

 

채봉은 더욱 망지소조(어찌할 바를 모름)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취향은 속으로 생각하되,

‘부인의 말씀이 이와 같으니, 부인을 속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바로 말씀하여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도리어 좋은 도리가 아닌가.’

하고 이 부인 앞에 가 앉으며,

“마님께서 이와 같이 하문(下問)하시니 어찌 기망을 하오리까. 이는 다 소비의 죄이오니 만사무석(萬死無惜, 한 번 죽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죄가 무거움)이올시다."

이 부인이 그 말을 들으며 더욱 수상하여,

“그래 네가 죄를 지었다면 사정이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취향이가 밤낮 채봉을 따라 후원에 단풍 구경 갔다가 수건을 잃고 찾으러 나갔던 일과, 수건이 천만의외에 장필성에게 들어가 글귀로 화답한 말이며, 오늘 밤 달 구경 갔다가 남자와 문답한 일장설화를 다하고, 입에 침이 없이 장필성의 인물을 칭찬한다.

“아이고 그 양반이야 참 가위(可謂, 가히 이르자면) 여옥귀인(如玉奇人, 얼굴이나 성질이 옥과 같이 깨끗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라. 평양 땅에서도 처음 보는 인물이니, 소저의 배필 되기 부끄럽지 아니하옵니다.”

이 부인이 이 말을 듣고, 한참 앉아서 익히 생각하더니,

“이 일을 진사님이 아시면 큰일나겠구나. 어떻게 해야 무사히 된단 말이냐?”

“좋은 연분이라. 이왕에 그렇게 된 일을 걱정하시면 어찌하십니까. 그는 마나님이 무사히 처치하려면 어려울 것 없지요.”

“어떻게 하면 좋으냐?”

취향이 부인의 귀에 입을 대고 채봉이 듣지 않게 무어라 말을 하더니,

“그렇게 하면 이런 사정을 누가 알며 일은 좀 잘 되겠습니다.”

“네 말도 그럴듯도 하다만 장씨의 문벌이 어떠하다더냐?”

“한번 청해서 물으시면 아시려니와, 전 선천 부사의 자제이고 외가 댁은 김 첨사이라 하시니 댁과 상당치 아니하십니까?”

“혼인이라 하는 것은 사람의 임의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 약비기연(若非其緣, 만약 그와 같은 인연이 아님)이면 비록 일실지내(한방에 같이 있음)에 있어도 초월(중국 춘추 시대의 초나라는 남방에 있고, 월나라는 북방에 있어, 거리가 너무나 떨어져 있음을 말함) 같으되, 연분이 되려 하면 수만 리 밖에 있어도 자연 모이나니, 어찌 인력으로 억제하리요. 사이지차(事以至此, 일이 이미 이와 같이 되어 버림)하였으니, 네 말과 같이 주선하려니와, 대관절 장씨의 글씨가 어디 있느뇨?”

 

취향이 장을 열고 수건을 내어 놓으니, 이 부인도 문학이 유여한지라. 필성의 글씨를 보더니, 절절이 칭찬하며 채봉을 돌아보고,

“아가, 네 마음을 내가 이제는 짐작하였으니 다시 더 말할 것 없거니와, 한 가지 염려는 네 부친께서 혼사로 인연하여 서울로 올라가셨는데, 만일 혼사를 정하고 내려오신다면 어찌한단 말이냐?”

취향이가 깔깔 웃으며,

“아이고 마나님,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아무리 정하고 내려 오실지라도 예단(禮緞)을 받았습니까, 파의하기가 무엇이 어려워서 염려하십니까?”

“오냐, 어찌할 수 있느냐. 비록 예단을 받으셨더라도 파의를 할 수밖에 없겠다.”

부인은 밤이 늦도록 이와 같이 의논하고 안으로 들어가니라.

 

  장필성은 그날 밤에 채봉을 만나 은근히 백년가약을 맺고 집으로 돌아와서 모친 최씨더러 말하되,

“어머님, 옛글에 하였으되, 국난(國難)에 사양상(思良相)이요, 가빈(家貧)에 사현처(思賢妻)라 하였사온데, 지금 소자의 나이 18세를 당하와도 모친을 봉양할 처속(妻屬)이 없고 가세는 점점 쇠퇴하오니, 어찌 민망하지 아니하오니까. 듣사온즉 성외(城外) 김 진사 집 규수가 현숙하다 하오니 매파를 보내 통혼을 하여 보옵소서.”

“네 나이 18세라, 그런 생각이 없겠느냐마는, 김 진사 집과 우리의 문벌은 상당하나, 빈부(貧富)가 현수(懸殊, 현격하게 다름)하니 우리와 결혼하기를 즐겨하겠느냐?”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하니, 성사는 하늘에 있거니와 통혼이야 하지 못할 것 있습니까?”

“통혼은 해 보마는 들을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튿날 최부인이 매파를 김 진사 집으로 보내 통혼하니, 이 때 이 부인이 혼자 앉아서 채봉의 혼사를 생각하고 온갖 걱정을 무수히 하는데, 밖에서 매파가 들어오며 인사를 한다.

“마님, 안녕하십니까?”

“중매 할멈 오나. 근일은 볼 수 없을 적에는 아마 재미가 많은 것이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왔나?”

매파가 방으로 들어와 앉으며,

“좋은 서랑 하나 있기에 왔습니다.”

“어떠한 신랑이란 말인가?”

“다른 신랑이 아니라 대동문 밖 전 선천 부사의 아드님인데, 인물을 반악 같고 풍채는 두목지 같고 문장은 이태백 같고 필법은 왕우군 같사오니, 가위 댁 소저의 배필이라. 중매가 수삼십년을 돌아다니되, 평생에 보는 바이옵기 말씀하오니, 진진지호(津津之好)를 맺으시면 두 댁의 중매의 생색이 날 듯합니다.”

“나도 일찍이 그 신랑이 출중하다는 말을 들었거니와 내가 한번 친히 보고자 하니, 하루 내 집으로 데려고 오게.”

“그리 하십시오. 내일 신랑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매파가 장필성의 집으로 와서 이 말을 하니, 최부인이 의외에 이 말을 듣고 불승희열(不勝喜悅)하여, 이튿날 필성을 김 진사 집으로 보낼새, 의복 일습을 새로이 입히니 가위 선풍도골(仙風道骨, 신선의 풍채와 도인의 골격, 곧 남달리 뛰어나게 고아한 풍채를 일컫는 말)이라. 그 표표(表表, 훨씬 뛰어나게 나타나는 모양)한 인물은 한 붓으로 기록할 수 없더라.

 

  필성이 매파를 따라 김 진사 집으로 오니, 이부인이 안방으로 정하여 볼새, 필성이 매파를 따라 들어가 이부인에게 절하여 뵈오니, 이부인이 반쯤 답례하고 앉으라 한 후 자세히 보니 보던 바 처음이라. 희불자승(喜不自勝, 어찌할 바를 모를 만큼 매우 기쁨)하여,

“여보, 내가 그대를 청함은 알았으려니와, 오늘 그대를 보니 기꺼운 마음 측량할 수 없소. 우리 내외 나이 50에 슬하에 아무도 없고, 지금 혈육이라고는 딸 하나뿐이라.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어 미거하기가 한량없는데, 댁 모당(母堂)께서 헛소문을 들으시고 통혼을 하시니 감히 거역하지 못하거니와, 사주단자나 걸어 놓은 후 신부의 부친이 내려오시거든 성례를 할 터이니, 그리 알고 모당께 말씀을 여쭈시오.”

하고 웃는 낯으로 수건 하나를 내어 보이며,

“그대가 이왕 공부를 많이 하였다 하니, 이 글을 누가 지은 것인지 짐작하겠나?”

필성이 고개를 들어 보니 그 글은 곧 자기가 채봉에게 지어 보낸 것이라. 속으로 이 일이 벌써 탄로가 나서 이와 같이 됨이로구나 생각하고, 도리어 기꺼이 여겨 공손히 대답을 한다.

“어찌 모르리이까. 존문을 더러이 하였사오니 황송무지로소이다.”

“내가 이런 것을 다 알았으니, 어찌 다른 의향이 있으리요. 안심하고 학업에 힘을 써 남아의 본색을 잃지 마오.”

“삼가 명대로 하겠나이다.”

장생이 하직하고 돌아가니, 이 때 취향이 마침 안으로 들어왔다가 필성과 부인이 말하는 것을 듣고 급히 초당에 나가서 채봉을 보고,

“장생이 지금 안에 오셔서 마님과 이야기를 하시니, 전후사가 무사 타협이라 어찌 즐겁지 아니하리까.”

하고, 문틈으로 장생의 나아가는 모양을 가리켜 보이면서,

“저이가 신랑 되시기로 작정이 되었다오. 저 양반 처갓집 다녀가는 거동이나 좀 보셔요.”

하는데, 취향이는 제 혼인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채봉은 말없이 기뻐하더라.

 

  이 때 평양성 외에서는 새로이 좋은 혼인을 정한 모녀가 이와 같이 기뻐하며, 그 가장 김 진사 돌아오기를 하루가 삼추(三秋)같이 기다리건마는, 서울 간 김 진사는 어찌하여 돌아올 기약이 망연하던고.

 

 

  당초에 김 진사는 서랑도 듣볼 겸 환로(宦路, 벼슬길)에 유의(留意, 마음에 새겨 두어 조심하며 관심을 가짐)하여 다수한 재산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간 터이라.

남북촌 재상의 세도가를 찾을 제, 당시 허씨가 제일 세도가로 조정이 불쫓이는 바라. 김 진사 이 소문을 듣고 허씨 집 긴한 문객 하나를 친하니, 이 사람은 김양주라 하는 자라.

  위인이 아첨하는 소인(小人)으로 허씨에게 제일 긴하여 양주 목사까지 얻어 하고, 매관매작에 일등 거간으로 붙어 있는 사람이러니, 김 진사가 거액의 재산을 가지고 구사(求仕, 벼슬을 구함)차로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금혈(金穴, 금줄에 금이 박혀있는 곳)이나 얻은 듯이 대단히 절친히 지내며, 은근히 평양으로 보내 김 진사 허실(虛實, 공허와 충실)을 알아보고,   김양주가 하루는 김 진사를 대하여 말하되,

“여보 종씨, 서울 올라온 지가 1삭이나 되어도 성사는 못 되고 부비(浮費, 일을 하는데 드는 비용)만 나니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딱하구려.”

“부비야 관계 있소만 종씨 애쓰는 것을 보면 불안하오.”

“천만의 말씀이오. 그러나 좋은 도리가 하나 있으니 해서 보시려오.”

“무엇이요?”

“종씨가 단 진사로만 있으니, 우선 출력(出力, 돈을 내어서 사업을 도움)은 해야 아니하오.”

“그렇지요.”

“우선 돈 천 냥만 주시오. 건릉 정자각 수리 별단에 출력을 하시게 하리이다.”

“출력만 하면 수령(守令) 하기가 쉽겠지요.”

“그렇고말고. 벼슬이라 하는 것이 계제(階梯, 벼슬이 차차 올라가는 순서)가 있어서, 수령을 하려면 출력부터 해야 하는고로, 만일 출력을 하지 못하면 500날 가기로 할 수 있소.”

“제가 시골 사람이라 무엇을 압니까. 영감 하시기에 있지요.”

“염려 마시오. 내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뒤나 잘 대시오.”

“예, 주선만 잘 해서 주시오. 돈이 얼마나 되오.”

“허 판서 욕심이 여간 돈 가지고는 못 되는데.”

“5천 냥 가지고 되겠소. 적어도 만 냥은 가져야 현감이라도 얻으오.”

“그러면 표라도 해서 놓고 내려가서 치르리다.”

“그야 관계없소.”

“어찌하든지 사흘 안에 출력 칙지를 갖다 드릴 것이니, 한턱이나 하오.”

“한턱뿐이오. 정 그러면 두 턱이라도 하리라.”

 

  이와 같이 서로 약속하여 보내고, 김 진사는 돈 구처를 생각하느라고 잠을 자지 못하며, 김양주가 오기를 고대하더라. 하루는 김양주가 분발과 칙지를 갖다 주며, 헛 생색을 무척 낸다.

“종씨, 이번 출력은 만 냥 싸오. 그러나 칙지 같은 것은 함부로 받지 못하는 것이니, 사모관대(紗帽冠帶, 정식 예장)를 하고 북향사배(北向四拜)한 후 정한 소반에 받아 놓은 것이니, 예절대로 하시오.”

“관대가 있어야 아니합니까?”

“참 없겠구려. 가만히 계시오. 내 집에 있으니 가지고 오라고 합시다.”

하고 하인을 시켜 갖다 입고 북향사배 후 칙지를 받은 후, 또 김양주에게 사례한다.

“영감의 혜택이 아니시면 어찌 오늘 천은(天恩)을 입사오리까.”

“내야 심부름할 따름이지, 무슨 힘이 있소. 모든 주선이 다 허 판서 대감의 힘이지요. 그러나 가지고 온 사람을 연단으로 필육(匹肉) 몇 끝을 주시오. 그것은 으레 주는 것이오.”

“영감이 말씀 아니하셨더라면 실례를 할 뻔하였소.”

하고, 명주 한 필, 백목 한 필을 주어 보내고, 또 하인을 보내 좋은 탕건(宕巾)을 사온 후에, 의관을 일신하게 차리고 나니, 김양주가 쳐다보며,

“허허, 참 훌륭한 참봉 나리로구나.”

하는데, 김 진사는 좋은 생각이 절로 나서 김양주를 대하여 말하되,

“영감! 승륙(陞六) 턱을 아니할 수 없은즉, 어디든지 가서 소리나 한 마디 듣고, 술이나 한잔 잡수십시다.”

김양주는 속으로 돈백이나 인정을 쓸 줄 알았더니 술로 때우려 하는 것을 보고, 헛 과장을 핀다.

“종씨! 천만의 말씀이요. 한턱이 무엇이요. 일전에 말한 것을 실없는 말인데, 정말로 들으셨소?”

“정말이든 실없는 말이든지 가십시다. 내가 서울 온 후 기생의 집이라곤 구경을 하지 못하였으니, 구경 좀 시켜 주시구려.”

“그리하시오. 어렵지 않소. 나는 종씨가 과용하실까 그리 하는 것이요.”

“그토록 알아주시니 어떻다 할 길 없소. 하여간에 갑시다.”

“정 가시고 싶거든 갑시다.”

“어떤 집이 좋소.”

“산홍이도 좋고 옥희도 좋지. 어떤 집으로 가시려오?”

“그중에 가곡 잘 부르는 기생에게 갑시다.”

“오궁골 난홍이 집으로 갑시다.”

하고 둘이서 오궁골로 가서 김 진사는 뒤에 서 있고 김양주가 대문에서 부른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안에서 어떤 자가 대답하되,

“기생 놀이 가고 없소.”

김양주가 이 소리를 듣고 김 진사를 돌아보며,

“여보 김 진사. 우리가 아마 난홍이와 인연이 없나 보오. 남문동 산홍이 집으로 갑시다.”

김 진사는 절에 간 색시라. 또 김양주를 따라가니, 김양주 남문으로 들어가더니, 한 집 대문에 가 또 서서는,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오궁골서 대답하듯 안에서 대답을 한다.

“들어오오.”

김양주가 김 진사를 돌아보며,

“산홍이는 있나 보아. 들어갑시다.”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방 안이 툭 터지도록 사람이 둘러앉았고, 기생은 아랫목에 앉았더라.

김양주가 방으로 들어서며,

“평안하오, 무사한가?”

하는데, 기생은 일어서며,

평안하시오.”

앉았던 사람들은 일제히,

“네, 평안하오.”

김양주가 좌우를 돌아보며,

“좌석 좀 죕시다.”

한즉, 여럿이 아이 기름 짜듯 조금씩 좁히니, 두 사람 앉을 자리가 생기더라. 김양주와 김 진사는 빈 좌석에 앉아서 김양주가 담배를 뻑뻑 빨아 뿜으니, 방 안이 용문산 안개 끼듯 천장이 뵈지 않도록 연기가 자욱하여 사람의 골머리를 때리는데, 좌우에 앉았던 사람들이 미안한 마음이 있어 하더니, 하나 둘씩 차차 나가니, 만일 만만한 사람이 이와 같이 할 것 같으면,

명색이 무엇이냐. 너와 같은 외입장이는 처음 본다. 나가거라.”

하겠지만, 김양주는 당시 허 판서 집 얼간으로, 도처에 세력이 홍두 같은 터이라. 이러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 각기 나가니라. 나중에는 주인 기생과 김양주, 김 진사 세 사람만 남았더라. 김양주가 껄껄 웃으며,

“허허, 그 외입장이들이 우리가 오니까 모두들 달아나나.”

산홍이가 상글상글 웃으며,

“신입구출(新入舊出)이니까 그렇습니다그려.”

“가위 외입장이 문자로구나. 이애 산홍아, 어디 가서 상이나 하여 오라고 해라.”

산홍이가 미닫이를 열고 내다보며,

“이리 좀 오오.”

하고 부르니, 어떠한 걸자(乞子, 걸인) 하나가 의복을 이도령 당년에 어사출도하던 의복같이 입고, 이마에는 망건자리가 없이 수양버들 같이 귀 뒤로 축 늘어졌고, 얼굴은 아편장이와 같이 누렇게 뜬 위인이 건넌방에서 툭 뛰어나오며,

“왜 그러냐?”

“어디 가서 약주 좀 차려 오오.”

그 자가 뒤축도 없는 승혜(繩鞋, 삼으로 삼은 신)를 찍찍 끌고 밖으로 나가더니, 얼마 만에 주안(酒案)을 차려 놓는지라. 산홍이가 주전자를 잡고 술을 잔과 같이 가득 부어 놓고 김양주를 쳐다보며,

“영감, 수배(受杯)하십시오.”

“어떻게 먹으란 말이냐?”

“어떻게 잡숫다니요. 아시지요.”

“이 애 나도 마실 줄은 안다만 네 집에 와서 술 먹을 때에는 소관이 하사아냐. 가곡 한 마디 듣자는 것이지.”

산홍이가 이 말 저 말 없이 잔을 들며,

 

 

“잡으시오. 잡으시오. 이 술 한 잔 잡으시면 천만년을 사오리라.”

김양주가 술을 받아 마신 후에 또 한 잔 가득 부어 김 진사에게 권하며,

“먼저 권주가 하였으니 지금은 다른 것으로 하겠어요.”

“네 마음대로 하여라.”

산홍이가 잔을 여전히 들며,

“창 밖에 국화를 심어 국화 밑에 술을 빚어 주니,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달이 돋아 온다. 아해야, 거문고 내어 청 처라 님 대접하리라.”

김 진사가 술을 받아 마시고 희색이 만면하여 기생을 쳐다보며,

“이 애, 그 가곡 참 좋다. 가위 명기로구나. 이애 산홍아, 수고한 끝에 편(編, 노래 곡조의 한 가지) 하나 하려무나.”

산홍이 웃으며,

“황송한 말씀이올시다마는, 줄수록 낭랑(朗朗, 소리가 매우 흥겹고 명랑한 모양)이라더니 들을수록 낭랑이오니까.”

“요년, 서방을 떼어 버리려고 게 무슨 버릇없는 소리냐.”

“기생은 영감과 흉허물 없어서 응석으로 한 소리인데 노하시었습니까?”

“허허 그 계집애, 나는 정말이냐마는 좌석에 초면 친구가 계신데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냐.”

“실수하였습니다. 편을 하라시니 편이나 하나 하고 소리를 할까요. 그러나 요사이 실음(失音, 목소리가 쉼)이 되어서 목청이 나가야 하지요.”

하더니, 두세 번 기침을 하고 고하성을 내어 한다.

“기생 수고하였네.”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김양주가 김 진사를 쳐다보며,

“종씨, 어떠하오?”

“여러 날 객회가 울적하더니 오늘이야 심신이 쾌활하외다.”

“허허, 울적할 때에 이런 가곡을 들으면 정신이 상쾌하여집니다.”

“어찌하였든지 오늘은 취하도록 먹읍시다.”

하고, 일배일배 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로 취하도록 먹은 후 김양주는 더욱 허튼소리가 나오고, 김 진사는 한층 더 친한 정분이 생긴다.

“종씨, 어찌하였든지 허씨 댁만 잘 다니면 삼상육경(三相六卿)이라도 할지 모르니, 꼭 나 하라는 대로만 하오.”

“암, 이를 말씀이오.”

“나는 종씨만 태산같이 믿고 있소. 그러나 내일 허 판서를 가서 뵈옵시다.”

“내가 가서 뵈오면 무엇하오. 종씨가 있는데!”

“그러해도 한번 가서 눈에 뵈이는 것이요 다음날 좋은 일이 많소.”

“아무러나 종씨 하라는 대로 합시다.”

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면서, 순 바꿈으로 술을 잔뜩 먹고 밤이 늦어 그 기생집을 나와 각각 돌아가니라.

 

  이튿날 김양주와 김 진사가 일찍 소쇄하고 서로 찾을새, 김 진사 유한 데는 야주개요, 김양주 집은 사직골이라. 각각 심방차로 나갔다가 내수사(內需司, 조선 시대 때 대궐에서 쓰는 쌀 · 베 · 잡물과 노비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부) 앞에서 서로 만났더라. 김양주가 김 진사를 보고 반겨서 말한다.

“야! 종씨, 병이나 아니 나셨소. 나는 지금 궁금해서 종씨를 찾아가는 길인데.”

“나는 관계없지만 영감도 관계하지 않으십니까? 나도 지금 궁금하여 영감댁으로 문안차 가는 길이올시다.”

“대단 미안하외다. 우리 나선 김에 허 판서나 가서 뵈오시려오.”

“아무러나 합시다.”

하고, 김양주를 따라 사직동으로 가니, 김양주가 허 판서 집 사랑으로 쑥 들어가더니, 얼마 만에 김양주가 도로 나와 들어가자 하거늘, 김 진사가 옷을 다시 고쳐 입고 따라 들어가니, 큰사랑을 지나며 뒤 별당으로 들어가더니, 방으로 들어와 뵈라 하거늘, 김 진사가 절하고 뵈니, 허 판서가 김양주를 쳐다보고,

“이 사람이 그저께 출력한 사람인가?”

김양주가 허리를 땅에 닿도록 구부리고,

“예, 그렇습니다.”

허 판서가 다시 김 진사를 쳐다보고,

“어, 매우 단아한 선비로 되었군. 그대 수령 하나 하기가 원이라지. 우선 시험조로 조그마한 과천 현감을 하여 볼까. 미상불 과천이 좋지. 울고 들어가서 웃고 나오는데.”

김 진사는 무슨 영문이니도 모르고 가만히 섰는데, 김양주가 묻는다.

“지금 과천이 공관(空官)이오니까?”

“응, 과천 현감이 사직소(辭職疏)를 하였지.”

“가격은 얼마 가량 하십니까?”

“허어, 만 냥 하나는 있어야 할걸. 내 생각 같아서는 택인(擇人)하는 처지에 돈이 관계없지만, 다른 사람이야 그리 흔한가.”

이와 같이 가장 청백한 체하는 것을 김 진사는 진실한 마음에 정말로 알고 어떻게 고맙게 말씀을 하되,

“대감 혜택으로 출력을 하여주시고, 또 현감까지 맡기시니 황송무지올시다.”

“허!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오늘 별단에 시켜 줄 것이니, 돈표를 써서 두고 가소.”

김양주가 급히 연상(硯箱, 벼룻집)을 열고 먹을 갈려 하는데, 마침 연적에 물이 없는지라. 김양주가 현령(懸鈴, 방울을 닮. 또는 그 방울)을 치는데 현령 줄소리가 떠렁 나더니, 열여섯 살 가량 된 미동(美童) 하나가 소리를 길게 빼어 대답하고 나온다. 김양주가 연적을 주며,

“아가, 여기 물을 넣어 가지고 오너라.”

미동이 받아가지고 별당으로 내려가는데, 비록 남자이지마는 얼굴은 추천명월(秋天明月) 같고, 풍채는 두목지(중국 당나라의 시인. 풍채가 좋기로 유명했음). 그 아름답고 출중한 모양이 김 진사 눈에 보던 바 처음이라. 문득 채봉이 생각이 나서 옆에 사람이 듣는 줄 깨닫지 못하고,

 

“그 아이 신통해. 우리 애기와 같기도 하다. 언제나 저런 사위를 얻어 짝을 지어 줄꼬.”

하는데, 허판서와 김양주가 역력히 듣고 있더라.

미구에 미동이 연적을 갖다 놓고 들어가거늘, 김 진사는 혼을 잃고 미동이 가는 데를 바라보나, 이 미동은 허 판서의 미동인데, 허 판서의 눈에는 세상 남녀간에 이 미동만한 인물이 없고, 허 판서가 항상 칭찬하는 터이러니, 김 진사의 말을 듣고 별안간 딴 욕심에 생각이 들어가니 슬프다, 500여 리 밖에 있는 채봉이 신상에 무수한 풍운(風雲)이 이로부터 일어남을 어찌 뜻하였으리요. 김양주가 먹을 다 갈고 김 진사를 탁 치며,

“무엇을 그리 정신없이 보고 있소. 어서 어음이나 써서 바치고 갑시다.”

“네, 쓰지요. 그런데 5천 냥은 지금 있고 5천 냥은 평양으로 기별을 해서 가져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려가야 할 터인데 어찌하면 좋습니까?”

허 판서는 다른 벼슬 팔기에 수단 있는 양반이 아니라, 기왕 김 진사의 본가 허실을 아는고로, 이 말을 듣고 선뜻 허락을 한다.

“응, 그러면 5천 냥 가진 표는 나를 주고, 5천 냥은 어음만 써서 놓았다가 나중에 들여놓게그려.”

김 진사가 인지표 5천 냥 어음을 내어 놓고, 5천 냥 조는 표를 써서 놓았으나, 허 판서가 받아 연상 서랍에 넣고 웃는 낯으로 김 진사를 쳐다보고,

“내일이면 과천 현감을 할 터이니, 인제는 김 현감이라고 하지.”

“황송합니다.”

“내일이면 할 터인데, 무슨 관계 있나. 그런데 아까 댁 상노(上奴) 놈을 보고 무엇이라고 하였나?”

“위인이 하도 얌전하기로 칭찬하였습니다.”

“그래, 칭찬한 줄은 알아. 그런데 사위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하지 아니하였나?”

허 판서는 속이 있어서 묻는 말이지만, 김 진사는 어찌 그런 속을 알리요. 조금도 의심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드디어 황감하여 대답한다.

“네, 그러하였습니다. 소인에게 미거한 여식이 있사온데, 위인이 과히 용렬하지 아니하므로, 신랑을 듣보아 그와 같은 것으로 짝을 지어 주려고, 우금(于今) 열여섯 살이 되도록 시집을 보내지 못하였사온데, 댁 상노를 보온즉 모양이 비슷하옵기에 무심코 속으로 말한다는 것이 대감께까지 입문이 되었습니다.”

허 판서가 이 말을 듣고 불 같은 욕심이 일어나며 체면도 돌아보지 않고, 너털웃음을 껄걸 웃으며,

“여보게 김 현감, 나는 그 상노 놈과 등분이 어떠한가?”

“황송합니다.”

“황송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내가 김 현감더러 청할 말이 있으니, 즐거이 들을 터인가?”

“대감의 분부이오면 사차불피(死且不避, 죽어도 피하지 않음)오니, 어찌 감히 듣지 않사오리까.”

“다른 청이 아니라, 내가 자네 사위가 되고자 하니 어떠한가?”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천만의 말인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들어 보게. 김양주가 여기 앉아 있지만 김양주는 내 속을 다 아네. 내가 작년에 별실 되는 사람을 죽이고, 인해 가합한 사람이 없어서 지금껏 그저 있는 모양이니, 자네 딸을 내게 줄 것 같으면 자네 딸도 호강을 시킬 것이요, 자네 작은 수령으로만 다니겠나. 감사라든지 참판 · 판서는 하지 못할라고.”

당초에 김 진사가 서울 올 때에는 천금 같은 딸을 위하여 좋은 배필을 얻어 슬하의 낙을 보려 함이더니, 그때는 평안도 사람으로는 벼슬 얻어 하기가 승천(昇天) 적선(謫仙)하기같이 어려운 세월이라. 김 진사가 천만뜻밖에 세가를 만나 출력하고, 또 이와 같이 세도 재상의 농락에 들어 수작을 하여 봄에 헛된 영광에 불 같은 욕심이 나는지라. 스스로 생각하며,

‘채봉의 위인이 녹록하지 아니한즉, 제 팔자가 세어 이 부가(富家)에 별실(別室)이나 주어 호강이나 시키고 나는 부원군 부럽지 아니하게 벼슬이나 실컷 하리라.“

하고, 흔연(欣然)히 허락한다.

“미련한 여식을 더럽다 아니하고 이와 같이 하렴하시니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마는, 미거한 것이 감당할는지 그것을 몰라 염려올시다.”

“허허, 별소리를 다 하네그려. 내 이애기를 들은즉 평양 사람들이 남녀간 숙성하다는걸 그래. 어느 날 떠나가려나?”

“내일 내려가서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러면 빨리 데리고 올라오게. 그 동안 나는 자네 일을 주선하여 줄 것이니.”

김 진사가 대열하여 익일에 허 판서에게 하직하고 평양으로 내려가니라.

 

  이 때 이 부인은 채봉의 혼인을 정하고 김 진사 내려올 동안에 혼수범절을 준비하여 방에서 의복을 마련하고 앉았더니, 김 진사가 내려와 밖으로 들어오며,

“마누라, 어디 갔소?”

하고 마루에 덜컥 앉으니, 이 부인이 그 목소리를 듣고, 손에 잡았던 가위를 집어 던지고 급히 뛰어나오며, 기다렸던 차에 첫인사로,

“진사님이오! 왜 이렇게 더디 내려오셔요. 나는 그간 애기 혼인을 정하고 내려오시기를 고대하였지요.”

김 진사가 혼인 정하였다는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라며,

“응, 혼인을 정하였다니, 누구와 정하였단 말이오?”

“노독(路毒)도 계실 터이니 방으로 들어와 앉으시오. 차차 이야기를 할 것이니 방으로 들어오시오.”

“관계치 않소. 우선 급하니 말을 하오. 그러나 이제도 진사님이야. 내가 그래 참봉 초사(參奉初仕)를 하였는데.”

하며, 방으로 들어와 갓과 탕을 벗어 부인을 주니, 부인이 받아 벽에 걸고 반겨 옆에 들어앉으며,

“아이고 반가워라. 올해 운수가 겹겹이 좋구려. 영감 초사를 하시고, 애기 혼인 정하고, 그러나 왜 혼인 정하였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시오. 그런 것이 아니라 대동문 밖에 사는 장 선천 부사의 아들과 정혼하였다오.”

“장 선천 부사의 아들과 정혼하였어? 그 거지 다 된 거 하고. 흥, 기막힌 사위를 정하고 내려왔으니 애기를 데리고 우리 서울로 올라가서 삽시다.”

이부인이 이 소리를 듣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기막힌 사위가 어떠한 거란 말이오?”

하고 묻는다. 김 진사는 연해 허풍을 친다.

“흥, 알면 곧 기가 막히지. 누구인고 하니 사직골 허 판서 댁 세도가 이 천지에서 제일이야.”

부인은 이 말을 듣고 일변 끔찍하고, 일변은 기가 막혀 다시 묻는다.

“허 판서면 정실이란 말이오? 부실이란 말이오?”

“정실도 아니오, 부실도 아니오, 별실이라오.”

“나는 그러지 못하겠소.”

“허 판서 아니라 허의정이라도 왜 못 해.”

“영감도 서울 가시더니 환심되셨구려. 전일에는 평생 말씀이 저같이 얌전한 신랑을 택해서 슬하에 두고 걱정 근심이나 아니 시키자고 하시더니 오늘 이게 무슨 말이오. 그래, 그것을 금지옥엽(金枝玉葉)같이 길러서 남의 첩으로 준단 말이오.”

“허허, 아무리 남의 첩이 되더라도 호강만 하고 몸 편하였으면 좋지.”

“남의 눈에 가시에 되어 무슨 독을 당할지를 몰라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아도 호강만 하면 제일강산(第一江山)이란 말이오. 나는 죽어도 그런 호강을 아니 시키겠소.”

김 진사가 이 말을 듣고 열이 번쩍 나서 무릎을 탁 치며 큰 소리를 한다.

“그래 그런 자리가 싫어. 조런 복 찰 것 보았나. 딴소리 말고 내 말을 좀 들어 보아. 우선 춤출 일이 있으니.”

“무엇이 그런 좋은 일이 있어 춤을 춘단 말이오.”

“내가 백두(白頭)로 늙을 것을 우선 허 판서의 주선으로 출력을 하였지. 또 내일 모레 과천 현감을 할 터이니, 채봉이가 그리 들어가 살면 제 평생도 좋거니와, 감사도 있고 참판도 있고 판서도 있은즉, 그때는 마누라가 정경부인(貞敬夫人)은 떼어 놓은 당상(堂上)이니 이런 경사 어디 있소. 두말 말고 데리고 올라갑시다.”

이부인도 그 말에 귀가 솔깃하여 하는 말이,

“영감이 기어코 하려 드시면 낸들 어떻게 하겠소마는, 애기가 즐겨서 말을 들을는지 모르겠소.”

채봉은 이 때 초당에 앉아 글을 읽더니, 부친의 음성을 듣고 취향을 데리고 내당에 들어오다가 자기 혼삿말 하는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고 서서 듣고 말이 그치기를 기다려서 부친 앞에 나와서 날아가듯 절을 하고,

“아버님, 원로에 안녕히 다녀 내려오셨습니까?”

김 진사가 보고 귀한 생각이 나서 한층 더 나서 등을 어루만지며,

“오! 잘 있었더냐? 그래 그간 글공부도 더 하고, 바느질도 많이 익혔느냐?”

하고 부인을 쳐다보고 벙글벙글 웃으며,

“여보 마누라! 참 애기가 이제는 여공을 배워도 쓸 데가 없구려. 침모(針母)가 있어서 다해서 바칠 터이니.”

채봉이 얼굴을 숙이니, 양볼에 도화 기운이 띠었더라. 김 진사가 다시 채봉을 보고,

“아가, 너 거상(巨相)의 별실이 좋으냐, 여염집 부인이 좋으냐? 아비 어미 있는데 부끄러울 것 무엇 있니. 네 소원대로 말해라.”

채봉이가 예사 여염집 처녀 같으면, 이런 말에 대하여 아무리 부모의 말일지라도 무엇이라고 대꾸를 하여 대답하리요마는, 채봉은 원래 학식도 있을 뿐외라, 장생의 일이 잠시도 잊혀지지 아니하더니, 부모의 하는 말을 들은 터이라 조금도 서슴지 않고 안색을 바로 하고 대답하되,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뒤가 되기는 원이 아니올시다.”

“허허! 그 자식 네가 남의 별실 구경을 못 해서 이런 소리를 하나 보다마는, 별실이야 참 세상에 그 같은 호강은 또 없느니라.”

이부인이 말을 가로막아 김 진사를 쳐다보며,

“영감은 어린 자식에게 별 말씀을 다하시는구려. 계집의 자식이란 것은 바깥 부모의 하시는 대로 좇아가는 법이지. 아가 너는 네 방으로 가거라.”

 

  채봉을 보내고 두 내외가 서울로 올라갈 의논을 하고, 그날로 가장집물(家藏什物)을 방매하여 상경할 행장을 차리니라.

이 때 채봉이 초당으로 나와 장씨의 일을 생각하고 홀로 탄식하되,

“부운 같은 이 세상에 부귀공명이 무엇인고. 그와 같이 나를 사랑하던 우리 부모가 일조에 날로 하여금 신의를 배반하고 천첩의 몸이 되게 하려 하니 가엾고 한심한 일이로구나. 부모는 부귀에 눈이 어두워 그러하거니와, 나는 여자의 몸이 되어 한번 허락한 마음을 변하지 아니하여 잠깐 동안 부모의 근심을 끼칠지라도, 내 몸이나 불의지죄(不義之罪)를 면하리라.”

하는데,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이윽고 한 꾀를 생각하고 취향을 대하여,

“이애, 취향아! 내가 너를 몇 해 동안 친형제같이 알고 지낸 터이어니와, 내 억울한 사정을 알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장씨의 일은 너도 아는 바이어니와, 아무리 부모의 분부인들 그런 중한 언약을 오늘날 배반할 수 있나.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글쎄올시다. 당초에 서울서 정혼을 하고 오시더라도 퇴혼을 하겠다고 말씀하시던 마님께서 마음이 변하였으니, 아마 소저는 서울 마나님이 꼭 되는 길밖에 없을까외다. 그러나 올라가시면 그만이지마는, 나는 이 바닥에서 살며 장씨를 무슨 낯으로 봅니까.”

채봉이 이 말을 듣더니,

“이애, 그렇지 않는 도리가 있다.”

하고 취향의 귀에 입을 대고 무슨 비밀한 말을 하고 다시 말을 이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할 수밖에 없으니, 가다가 중로에서 몸을 피할 터이니, 너는 어멈하고 뒤를 밟아 오너라.”

취향이 고개를 까딱까딱하고,

“그러시면 진사님과 마님께서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소저 생각이 그러하시면 시키는 대로 하지요.”

익일 오경(五更)에 발정(發程)할새, 취향이 손을 잡고 이별하거늘, 주머니에서 돈 50냥을 주며 은근히 부탁하되,

“이걸로 노자를 삼아 부디 어젯밤 약속을 잊지 말고 따라오너라.”

총총히 작별하고 교군에 올라앉으니, 김 진사와 이부인이 속도 모르고 채봉의 마음 돌림을 만분 다행하여 곧 발정하더라.

이날은 전후 분별하느라고 자연 해가 오시(午時, 오전 3시~5시)나 되었으니, 이튿날 떠나도 좋으련마는, 김 진사 생각에는 하루가 바빠서 급히 떠난 터이라. 중화지경 들어서서 만리교에서 해가 저물거늘, 조용한 주막을 얻어 이 부인과 채봉은 안으로 들어가고 김 진사는 밖에서 쉴새, 밤이 삼경쯤 되어 사면에서 으악 소리가 나면서 화광(火光)이 충천(沖天)하거늘, 김 진사가 누웠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 나와 보니, 사면에 화적(火賊)이 물밀 듯 들어오며 사람을 만나는 대로 죽이는데, 집 안에 있는 사람은 벌써 어디로 도망하고, 개새끼 하나 볼 수 없는지라. 창황망조(蒼皇罔措)하여 급히 안으로 들어가니, 이부인과 채봉은 간데없고, 처처에 들리나니 곡성뿐이라. 어찌할 줄을 모르며 연하여,

“채봉아, 채봉아.”

하고 부르는데, 화적은 벌써 그 집으로 가까이 왔는지라. 방에 있는 행장은 미처 집어내지도 못하고 담을 넘어 밖으로 나와서, 곡성 나는 쪽을 바라보고 쫓아가며 뒤를 돌아보니, 벌써 자던 집은 불덩어리가 되었더라. 김 진사는 행장에 있는 돈 생각은 둘째요, 이부인과 채봉을 목이 터지도록 부르며 쫓아간다. 이 때 이부인은 채봉을 데리고 자다가 주인 마누라가 깨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나니, 옆에 누웠던 채봉은 간데없고, 사면에 화광이 충천하여 낮같이 밝으며 아우성 소리가 귀를 때리는데, 아무 정신을 못 차려 주인 마누라에 이끌려 뒷문으로 나와 달아나는데, 남녀가 섞여 피란하는지라.

  이부인은 영감과 채봉이가 섞여 달아나는 줄 생각하고, 급히 가며 채봉을 부르다가 대답이 없으면 김 진사를 부르며 따라가는데, 뒤에서 채봉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거늘, 급히 고개를 돌리며 마주 채봉을 부르니, 김 진사가 앞에서 마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급히 뛰어오니, 또한 채봉은 보이지 아니하고 부인뿐이라. 이 부인을 붙들고,

“채봉이 어디 갔소? 아이고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나도 영감과 채봉을 찾느라고 여기까지 오는 길인데, 채봉이가 어디를 갔단 말이오? 사람 중에 섞였나 좀 찾아봅시다.”

두 내외가 손을 마주잡고 지척을 분별하지 못하는 밤길에 허둥지둥하며 채봉을 부르니, 채봉은 벌써 평양길을 향하여 간 지 벌써 10리나 상거(相距. 멀리 떨어져 있는 사이)가 되었는지라. 누가 대답을 하리요. 사람의 자취는 멀어지고 부르는 소리만 기진하여진다. 두 내외 땅에 털썩 주저앉으며,

“에구머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냐. 우리 채봉이가 죽었구나. 죽지 않았으면 도적에게 잡혀갔을 터이니, 이 노릇을 어찌 한단 말이오.”

이와 같이 기가 막혀 탄식하더니, 이 때 도적놈들이 노략질을 다 하여 가지고 평양으로 돌아가고, 피란꾼들도 동네의 불을 끈 후에, 주인 노파가 김 진사 내외를 찾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김 진사는 급히 바깥방으로 들어가 보니, 도적이 벌써 행장을 풀어 헤치고 재산을 다 가져간지라. 김 진사는 눈이 캄캄해져서 방바닥에 가 털썩 주저앉아 부담을 안고,

“애고애고.”

하는데, 이부인이 채봉의 행장을 안고,

“채봉아, 채봉아! 너는 어디 가고 쓰던 세간만 있단 말이냐. 죽었느냐 살았느냐. 죽었으면 잊기나 하련마는, 살아서 도적에게 붙들려 갔으면 고생이 오죽하랴.”

하며 뼈가 녹는 듯 울고, 김 진사는 다시 부인을 붙들고 우니, 주인 노파가 옆에서 보다가 위로하되,

“우지 마시오. 이런 일이 일시 액운이라. 가엾은 말씀 어찌다 하겠소마는, 이곳이 도적이 심한 데라. 여간 재물 잃고 자식 잃은 사람이 비일비재(非一非再)외다. 차역 운수이니 울으시면 무엇 하시오.”

하고 물러나니, 부인은 이날 밤을 이렇게 새이는데, 김 진사의 마음에는 당장 생각하면 자결이라도 하고 싶으나, 사람이 허욕에 뜨이면 눈앞이 어두운 법이라. 홀로 생각하되,

‘서울에 5천 냥 맡긴 것이 있고, 겸하여 과천 현감은 그간 되었을 터이니, 몸이 귀히 된 후 채봉도 수소문하여 찾고 재산도 다시 모으리라.’

하고 여간 나머지 행구를 팔아 노수를 삼아 두 내외가 도보로 서울을 올라가니라.

김 진사 내외가 상경하여 이왕 객주집으로 사관을 정하고, 이튿날 허 판서를 가서 보니, 허 판서가 김 진사를 보고 반겨,

“아! 김 현감 오시나. 그래 올라오는데 노독이나 아니 났나? 자 우선 급한데 과천 현감을 구경하려나.”

하더니, 문갑에서 칙지를 내어 주는지라. 김 진사가 칙지를 보고 가슴이 주저앉으며 혼 빠진 사람처럼 앉아서 눈물만 흘리고 받지를 못한다. 허 판서가 거동을 보고 껄걸 웃으며,

“왜 그래? 너무 반가워서 그러하지.”

김 진사가 일어나 절을 하여 칙지를 받아 앞에 놓고,

“대감 혜택으로 천은을 입었습니다마는, 운수가 불길하여 올라오다가 죽을 풍파를 겪고 올라왔으나, 대감 뵈올 낯이 없습니다.”

허 판서가 깜짝 놀라며,

“응, 그게 무슨 소리냐? 풍파를 겪다니?”

김 진사가 전후의 말을 다하니, 허판서가 별안간 눈이 실죽하여지며, 조금도 가엾은 생각이 없이,

“허! 이런 맹랑한 놈 보아! 제가 어찌하였든지 과천 현감은 할 터이니까, 내려갈 때에는 허락을 다하고 지금은 딴소리를 해.”

하며, 부르르 놀라는 체하고 김 진사의 얼굴을 훑어보며,

“대단히 놀라운 말일세. 재물은 도적이 가져갔거니와, 딸이야 못 찾아 가지고 온단 말인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대감 위력이나 빌어가지고 찾고자 하여 올라왔습니다.”

허 판서가 발연변색(勃然變色)하여 대성으로 꾸짖어 가로되,

“이놈, 부모가 되어서 난중에 자식을 잃고 찾을 생각도 아니하고, 뉘 위력을 빌어서 찾으려고 내버리고 왔어. 맹랑한 놈.”

하더니, 하인을 불러서 구류를 시키라 하며,

“이놈, 네 딸을 데려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돈 5천 냥을 마저 바치든지 해야 무사하리라. 이놈아, 이따위 소리를 뉘 앞에서 하느냐. 시골 내려간 동안에 주선을 다 해서 주마고 하였더니, 현감은 할 터이니까, 지금 와서 그까짓 소리를 한단 말이냐.”

하고, 다시 말할 새 없이 가두더라.

 

이 때 이부인은 사관에 혼자 앉아서 채봉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김 진사 나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이날 밤이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되 김 진사는 아니 나오는지라. 마음에 의혹이 들어 사람을 얻어 보내 알아보니, 약시약시(이러하고 이러하다)한 일로 갇혔단 말을 듣고, 가슴에 오뉴월 장마에 토담 무너지는 듯하고 눈이 캄캄하여,

“에구머니.”

하는 소리에 엎드러져서 까무러치는지라. 식주인이 이 거동을 보고 더운물을 먹이며 사지를 주무르니, 한식경이나 되어 정신을 차리고 길게 한숨 한 번 휘 쉬고 하수 같은 눈물이 옷깃에 떠벅 떨어지며,

“애고, 이게 웬일이냐. 자다가 얻은 병인가, 졸다가 얻은 병인가. 이제는 속절없이 채봉의 소식도 못 알아보고 죽겠구나.”

“어떻게 된 일이오?”

하고 식주인이 물으니, 이부인이 전후 설화를 다함에 식주인이 혀를 홰홰 두르며,

“애고 가엾어라. 이런 것은 돈 주고 얻은 병이구려. 바깥양반 좀처럼 나오실 수 없소. 이런 일이 한두 번이라고. 대단히 어렵소. 필경 돈을 해서 넣든지, 따님을 찾아 넣든지 해야 나오지, 그렇기 전에는 댁일이 썩 상하였소.”

이부인이 더욱 눈물을 흘리며,

“그러면 돈은 할 수 없고, 딸을 찾을 수 없으니······”

“볼일은 다 보았구려. 그것 참 안되었소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알 수 없소. 평양으로 내려가 찾아보오. 여기는 오만 날 있어도 소용없소.”

이부인이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한즉 그럴듯도 한지라.

“주인의 말이 당연하오. 그러나 노비가 없으니 어떻게 500여리를 내려갈 수가 있소. 어렵지만 이것을 좀 팔아다가 주시오.”

하고 머리의 비녀를 빼어 주니, 식주인이 받아 가지고 나가더니 팔아다 주거늘, 부인이 받아 가지고 평양으로 내려가더라.

대거 세상에 근심과 고생은 공교한 기회에서 생기는지라.

  이 때 채봉은 취향과 약속한 후 만리교에서 이 부인이 잠든 사이를 타서 도망하여 취향과 취향 어미를 데리고 평양으로 도로 내려와 취향의 집에서 있으며, 부친의 기별을 기다리고, 차차 길을 얻어 장씨에게 통하려고 우선 서화(書畵)에 낙을 붙이고 있으니, 대개 채봉이는 만리교에서 화적이 들기 전 두어 식경이나 앞서 도망한고로, 김 진사가 그 지경이 된 줄은 모르고 있더라. 이 때 부인이 주야 열흘 만에 평양에 당도하니 어디로 가리요. 속으로 생각하되,

‘애기가 이리로 오면 필연 취향의 집으로 왔을 터이니, 취향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이 옳다.'

하고 대동문을 들어서며 좌우를 돌아보고, 울어 탄식하는 말이,

“산천과 물색은 의구하다마는 나는 불과 1삭 동안에 행색이 이렇게 초췌하여졌단 말이냐?”

이렇듯 한숨지으며 애련당 고을에 들어서서 취향의 집으로 들어가니, 이 때 채봉은 취향을 데리고 선후 방침을 의논하며 앉았는데, 이부인이 안으로 들어오며 취향부터 부른다.

“취향아, 취향아!”

채봉과 취향이 부인의 음성을 어찌 모르리요. 한걸음에 우르르 뛰어나오는데, 이부인이 미처 채봉은 보지 못하고 앞선 취향부터 보고,

“취향아, 우리 댁 아기씨 여기 왔니?”

채봉이 급히 이 부인의 손을 잡고,

“어머니, 나 여기 있소.”

이 부인이 얼싸안고,

“이 일을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우리 집이 오늘날같이 불시에 망할 줄을 꿈에나 생각하였을까.”

채봉이 이 말을 듣고 소스라쳐 놀라 울며,

“망하다니! 불초녀(不肖女)로 무슨 풍파가 났소?”

이부인이 정신을 진정하고 방으로 들어가 앉으며,

“어떻게 되어서 네가 이리로 왔니?”

채봉이 부인의 행색을 보고, 이 말에는 대답을 아니하고 도리어 묻기부터 한다.

“글세 어머니, 나 여기에 온 것을 장차 이야기할 것이니, 어머니의 이야기부터 하시오. 아버지는 어디 계시며, 어머니는 무슨 일로 이렇듯이 혼자 오시오?”

하는데, 부인은 한참 동안 가슴이 답답하여 앉았다가, 만리교에서 도적을 만난 일과, 서울에 갔다가 허 판서가 영감을 가두고 으르고 공갈을 하던 말을 다 하며,

“이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 돈을 5천 냥을 하여 놓든지, 너를 데려오든지 하라 하니, 너는 아버지를 살리려거든 나와 같이 서울로 올라가자.”

채봉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머금고 지난날 만리교 주막에서 취향과 약속하고 밤중에 도망하여 온 말을 대간하고,

“어머니, 나는 죽어도 서울 올라가기는 싫소. 이 자식은 죽은 걸로 아십시오.”

“네가 아니 가면 아버지는 아주 돌아가시란 말이냐. 너를 찾아 놓든지, 돈을 해서 놓아라 하니, 너라도 가야지.”

채봉이 묵묵히 앉아서 홀로 사세를 생각하니,

‘가련한 부모는 이미 범의 아구리에 들었으며, 가산은 탕진 무여하고, 이 몸은 죽어도 먹은 마음 변할 생각이 없으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리요. 내가 올라가면 장씨의 죄인이 될 것이요, 돈도 못 하고 나도 아니 올라가면 부모는 환란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이 몸이 죽고 모를까. 죽으면 나는 허물이 없는 사람이 되려니와, 늙고 병든 부모는 속절없이 죽는 사람이라. 죽기도 살기도 어려우니 슬프다. 천지가 광활하나 가련한 박명 여자의 한 몸을 용납할 곳이 없는가. 세상에 뉘가 만일 돈을 주어 내 부모를 구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를 데려다가 종 노릇을 시키거든 종 노릇을 하고, 기생 노릇을 시키거든 기생 노릇이라도 하리라.’

이와 같이 결심하니, 세상에 한없는 것은 눈물이라. 어린 간장을 녹여 뜨거운 눈물이 되어 옷자락에 떨어진다. 채봉이 안색을 천연히 하고 모친을 대하여,

“그러면 돈을 하여 드릴 터이니 어떠하시오.”

“네가 5천 냥 돈이나 되는 것을 어떻게 판비(辦備)를 한단 말이냐?”

“네, 염려 마시고 며칠만 기다려 보시옵소서.”

하고 창연히 하수 같은 눈물을 흘리며 앉았는데, 부인은 일희일비(一喜一悲)하여 의혹(疑惑)이 만단(萬端)하여, 다만 채봉의 눈치만 보고 앉았고, 채봉은 치맛자락을 들어 시름없이 흐르는 눈물만 씻는다. 채봉이 취향을 돌아보며,

“취향아! 어머님 어디 갔니? 좀 불러라.”

“어머님이 봉선의 집에 가셨소.”

“좀 불러라.”

취향이 밖으로 나가더니, 한식경이나 되어 어멈과 같이 돌아오니, 취향모가 이부인을 보고 깜짝 놀라며,

“애고 마님, 웬일이십니까?”

하는데, 부인이 서글프게 탄식하고,

“허, 우리 집은 기둥뿌리 하나 없이 졸지에 이 지경이 되었으니까 말이 아니 나오오.”

“네, 왜 그렇게 되셨어요? 벼슬하러 올라가신다더니. 그러나 아가씨 못 보아 오죽 그리워하겠습니까.”

채봉이 취향모를 바라보며,

“내가 어멈에게 청할 말이 있으니, 힘을 좀 쓰려나.”

“무슨 청이시오?”

“부끄러워서 말이 아니 나오네마는, 내 몸을 좀 팔아 주게.”

취향모가 이 말을 듣고 펄쩍 놀라며,

“애고 무슨 말씀이오. 공연히 망년의 말씀을 하시는구려.”

“정말일세.”

채봉이 전후 사연을 다 말하니, 취향모 역시 눈물을 흘리고,

“아이고! 딱해라. 댁이 어떻게 하여 오늘 이런 변화가 납니까. 그런데 팔리면 어떻게 팔리셔요?”

“지금 형편이 이러하니, 돈이 쉬이 되도록만 주선을 하게그려.”

“기생이나 되시려면 돈이 쉬이 나오지만.”

“박복(薄福)한 인생이 무엇을 관계하겠나. 기생으로 팔릴 것이니 어디 가합한 곳이 있나?”

“그렇기로 기생 노릇을 어찌하려오. 한 자리가 있기는 있지요.”

“어디인가?”

“지금 봉선의 집으로 갔더니, 봉선 어미가 봉선을 팔아서 서울로 보내고 집이 비었는데, 기생 하나를 사지 못하여 하던데요.”

“그러면 주선을 하게.”

이 부인이 옆에 앉아서 이 말을 듣고 한심을 하고 분한 생각이 나서 채봉을 돌아보며,

“이애, 나는 네 일을 알 수가 없다. 재상의 별실은 싫고 기생 노릇 하기가 원이란 말이냐. 내가 너를 길러 마땅한 사위를 얻지 못하고 기생을 만든단 말이냐. 네가 정말 아비를 살릴 생각이 있거든 나와 같이 올라가자.”

“나는 기생이 될지언정 재상의 별실은 소원이 아니오.”

“애기씨, 무슨 말씀을 그렇게 이상히 잡수시오.”

“그러지 마시고 마님과 서울로 올라가시오.”

“나는 살아도 평양, 죽어도 평양, 다른 마음 없으니, 부질없이 권하지 말게.”

 

  대저 채봉은 속으로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 이리 하지만, 이부인과 취향모는 도리어 못마땅하게 알더라. 취향모는 어찌할 수 없어 봉선 어미 집으로 가서 이 말을 하니, 채봉의 자색과 서화의 재조가 이름남 터이라. 봉선 어미가 듣고 불승대희(不勝大喜)하여,

“취향 어미, 정말이오?”

“그러면 정말이지, 어떤 소리라고 거짓말하겠소.”

“정말이면 좋기는 한량없이 좋소. 그런데 돈은 얼마나 달라고 합더이까?”

“그런 것은 대면하여 의논하구려. 봉선이는 얼마에 팔았소? 그 가량이겠지.”

“7천 냥에 데려갔소.”

“어찌하였든지 같이 가서 의논을 합시다.”

하고 봉선 어미를 데리고 취향의 집으로 오니, 채봉이 봉선 어미를 보고,

“봉선 어머니 오시오. 청하기는 다름이 아니라, 내가 기생이 되고자 하니 마음에 어떠하시오?”

“좋기는 하지마는 정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말이오. 취향 어미에게 대강이라도 들으셨지요?”

“그래 들었소만, 그러면 돈은 얼마나 주리까?”

“6천 냥만 주시오.”

봉선 어미가 껄걸 웃으며,

“그리하지요. 봉선이가 가더니 채봉이가 오니, 내가 봉하고는 인연이 대단한 모양이로군.”

하고, 집으로 가서 돈 6천 냥을 갖다가 주고 이 부인의 표를 받아가니, 이 부인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저런 복 찰 년 어디 있나. 오냐 나는 모르겠다.’

하면서도 모녀 정리이라. 천륜이야 어찌하리요. 채봉의 손을 잡고,

“아가, 정말 이렇게 마음을 먹느냐? 네가 평생에 장씨를 지키겠노라 하더니, 오늘 네 거동을 보니 어디 장씨를 지키는 것 같으냐?”

“어머니는 이 자식 생각하지 마시고 서울 가서 아버지나 나오시게 하시고 나오오.”

만리교에서 불에 타 죽었다 여기라며, 5천 냥을 주고 또 500냥을 주며,

“5천 냥은 아버지 나오시게 하고, 500냥은 나오시거든 노자로 쓰시고 내려오시오. 500냥은 내가 쓰겠소.”

이부인이 하릴없이 영감이나 구해 내고 차차 조처하리라 하고, 눈물을 씻고 돈을 받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니라.

 

 

  채봉이 모친을 이별하고 봉선어미 집으로 들어와 기생 노릇을 시작할새, 우선 이름을 송이라 개칭하니, 이는 대개 스스로 절개를 솔에 비하여 장생의 언약을 변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그러나 속 모르는 기모(妓母)는 춘삼월 호시절에 피어나는 꽃송이로 생각하고 더욱 사랑하여 사방에 광파(廣播, 두루 퍼뜨림)하니라.

  이 때 평양 소년들이 송이라 하는 기생이 새로 나왔는데, 인물도 똑똑할 뿐아니라 서화가 분명하다는 말을 듣고 한번 보기를 원하는데, 송이는 모두 불응하여 이상한 문제를 내어놓았으니, 그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권군막상양대몽 노력고서입한림이라 하는 글귀를 알아보기 좋게 써서 방문 위에 붙이고, 또 주서(注書)하되,

“이 시를 답한 것이 어떻게 한 시를 대하여 이와 같이 답장한 것을 알아내는 사람이라야 몸을 허하리라.”

하였더라.

  대저 이는 전날 장필성에게 답한 바라.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르고 귀신도 모르고, 아는 사람은 다만 채봉과 장생뿐이라. 뉘가 능히 해득(解得)하리요. 평양 바닥의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내어 한번 상관하기를 원하니, 한 사람이 열 사람에게 물어 보고, 열 사람이 백 사람에게 물으니, 외입하는 사람이나 아니라 하는 사람이나 입으로 외이기를 중의 나무아미타불 부르듯 하되, 아무도 맞히는 자가 없으니, 대저 기생 어미는 나룻배 부리는 사공과 일반이라. 한 번이라도 더 태울대로 부르고, 한 사람이라도 더 타도록 내리기를 좋아하는 터에 하물며 중가(重價)를 주었는데, 첫 개시부터 형편이 이러하니, 이 시로 인연하여 봉이 아니던가 하여 불쾌히 여기지만, 송이는 원래 서화가 분명한고로 서화를 받아 가는 데 공전이 적지 아니하니, 기모는 속으로 생각하되,

‘서화를 받아 가는 공전이 이와 같이 많으니, 글귀를 풀어 내는 사람이 있어 머리를 얹어 주면 그 후로는 생기는 것이 불소할 터인데, 평양 바닥에 이렇게 글이 없나?’

하고, 은근히 글귀를 풀 사람을 기다리니라. 이 때 장필성은 김 진사가 서울에서 오면 혼인을 하려 하고 고대하더니, 김 진사가 내려와서 이 말 저 말 없이 서울로 모두 살러 갔다는 소리를 듣고 낙심천만하여 속으로,

‘세상의 인심은 난측(難測, 측량이 어려움)이라.’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단념하고 가끔 채봉이가 보낸 답서를 보며 심사를 불평하더니, 하루는 한 친구가 와서 송이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라.”

하며,

“이런 시가 혹 이전에 있기는 한가?”

하는데, 장필성이 이 시를 보니, 전날 김 진사 집 동산에서 취향이 손으로 전하던 채봉의 시라. 한참 들여다보며 홀로 생각하되,

‘세상에 알 수 없는 일도 있다. 이 글은 나와 채봉 이 외에는 알 사람이 없는데, 어찌 기생의 방에 붙었으며 그 기생이 어떠한 계집이기에 글 푸는 사람을 구하기는 무슨 까닭인고. 내 한번 그를 보고 허실을 알아보리라.’

하고 겉으로 모르는 체하며,

“글쎄,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 없네그려.”

하고 보내고 궁금증이 나서, 곧 송이의 집으로 찾아와서 기생 어미를 보고,

“내가 글귀를 알아낼 터이니 어떠하오.”

기생 어미가 밤낮 일로 걱정하다가, 이 말을 듣고 불승대희하여 쫓아 나가 보니, 의복이 초라한 사람이라. 심중에 미흡하여 필성을 한참 유심히 보더니,

“한 번도 뵈온 적이 없사온데, 댁이 어디셔요?”

“나는 대동문 밖에 사는 장서방이요.”

기생모가 장씨를 데리고 들어오는데, 필성은 뒤에 서고 기생모는 앞을 서되 송이의 방으로 들어가며 기생모가 송이를 불러,

“송이야! 대동문 밖에 사는 장서방님이 글귀를 해석하마 하셨으니 청하여 들어 보아라.”

송이가 적적히 앉아서 붓으로 매란을 그리고 있더니, 대동문 밖 장서방이라는 말을 듣고 별안간 무색한 빛이 생기니, 이는 다름아니라 장차 정인(情人)을 만나 제 소원을 이루게 되었으니, 전일을 생각하고 오늘을 생각하니 분하고 무안한 생각이 나더니, 송이가 벌떡 일어서며,

“그러면 들어오십사고 하시오.”

기생 어미가 필성을 바라보며,

“그러면 이리 들어오셔서 말씀을 하시오.”

 

 

필성이 방으로 들어서며 우선 아랫목에 앉은 기생을 보니 갈 데 없는 김 진사의 딸이요, 문 위에 붙인 글을 보니 채봉의 필적이 분명하다. 송이는 들어오는 필성을 보니 갈 데 없이 그리고 기다리는 필성이라. 서로 무색하여 한참 앉았다가, 송이가 아니 나오는 목소리로,

“글귀를 푸신다니 말씀하시오.”

하니, 이는 기생모가 보는데 감히 사색을 내지 못함이러라. 필성이 그제야 송이를 바라보며,

“내 의견껏 하여 보지만 기생의 주견(主見)과 적합할는지?”

하고, 수건에 써서 취향이 주었던 말을 달리 비유하여 글귀를 말하니, 송이가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하여지며 얼굴을 겨우 들어 기생 어미를 쳐다보고,

“장서방께서 맞히셨습니다.”

기생 어미는 오래 기다린 터에 해석한 것만 다행히 여기고, 아무 내력을 모르지만, 양인심사(兩人心事)를 양인지(兩人知). 필성과 송이는 서로 심사를 짐작한다. 그러나 필성이는 채봉이가 무슨 일로 이처럼 됨을 몰라 궁금하고 무료하여 앉았더니, 송이가 어미를 보고,

“어머니, 내가 할말이 있으니까, 오늘은 장서방을 뫼시고 할 터이니, 장국이나 장만하여 주시오.”

기생 어미는 급히 나가서 장국을 마련하여 속으로,

‘장씨가 넉넉지 못한 모양인데 마수거리에 허탕이 아닐까. 오냐! 그래도 관계없다. 차후로는 송이가 외입을 개시할 터이니, 봉이나지지 않다.’

하고 장국을 장만하여 겸상을 하여서 들여다놓으며,

“세상에 글이라 하는 것이 보배올시다. 오늘 장서방께서 저런 꽃 같은 기생을 글 아니면 머리를 쪽지어 주시겠습니까.”

하고 나가니, 송이가 더욱 아미를 숙이고 얼굴이 붉어졌다가 겨우 진정하고 겸상한 장국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서방님은 전일 생각을 잊지 않으셨는지 모르되, 첩은 오늘 몸이 기생이 되었으나 조금도 실신(失身)한 일이 없으니, 더럽다 마시고 장국을 잡수신 후 오늘 가약을 이루실 줄 아시옵소서. 첩의 몸이 이와 같이 됨은 밤이 늦은 후 말씀하오리다.”

필성이가 장국 그릇을 집어 올려 놓으며,

“전자 일은 말할 것 없이 자네가 이와 같이 됨은 다 내 불행이라 정화(情話)는 있다 하려니와, 이제는 아주 파탈하고 같이 먹세.”

송이는 옥루가 떨어짐을 깨닫지 못하고, 억지로 두어 젓가락 먹은 후 상을 물리고 밤을 지낼새, 때는 정이 모춘 삼월이라. 만화방창(萬化方暢, 봄이 되어 만물이 번화스럽게 자라남)에 화기난만(和氣爛漫, 온화한 기운이 많이 흩어져 성함)하고, 서천에 밝은 달이 사창을 비치고, 동산에 우는 두견 불여귀(不如歸)를 화답하니, 사람의 심사 창연(愴然, 매우 새파란 모양)하다.

대저 채봉이 전날 후원에서 꿈결같이 만난 후로, 심중에 있는 장씨를 이와 같이 만나기는 오늘이 처음이라. 전날에는 요요(寥寥, 괴괴하고 쓸쓸)한 별당 후원에서 규수의 몸으로 만났거니와, 오늘은 기생의 집에서 기생의 몸으로 대하니, 내 마음은 일편빙심(一片氷心, 한 조각의 맑고 깨끗한 마음)이 금석(今昔)이 일반이언마는, 장씨의 생각이야 어떠한지도 알 수 없고, 또 장씨의 생각에도 나는 오히려 전일사를 생각하여 한없이 반갑다마는, 기생 된 사람의 생각이 어떠할지 몰라 적적한 방 가운데 둘이서 한참을 마주 보며 앉았다가 필성이가 먼저 말을 한다.

“전일에는 규수라,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하였지마는, 오늘은 송이로 대접할 수밖에 없네. 그래 송이 어찌해서 기생으로 나왔어?”

송이가 이 말을 들으니, 금석지탄(今昔之嘆)을 견디지 못하여 뜨거운 눈물이 치마 앞자락에 떨어진다. 장필성이 이 거동을 보고 속으로 마음을 짐작하여 도리어 측은하고 분한 생각이 들어 위로한다.

“여보게, 자네 몸이 오늘 기생이 되었으나, 전일 후원에 맹세한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리니, 안심하고 무슨 일로 이와 같이 된 이야기를 하게.”

송이는 수건으로 눈물을 씻고,

“군자께서 이처럼 말씀하시니 더욱 불안하외다. 첩이 전일에는 규중 처녀라 정실로 인정하셨거니와, 오늘은 기생의 몸이 되었사오니 어찌 정실로 알아주리까. 이 몸은 비록 빙옥(氷玉)같이 가졌지마는, 정실이라 하는 것은 여자의 목숨이라. 첩인들 모르리이까마는, 몸이 죽을 지경에 들어 죽지 아니함은 죽어도 잊지 못하는 님을 위함이요, 또 첩은 비록 부모로 인하여 기생으로 팔렸사오나, 몸이 일만 번 죽어 수화에 들지라도 수절(守節) 두 자를 지킬 터이니 버리시지 말으심을 바라나이다.”

“그는 염려하지 말게. 자네 마음이 이러할진대 나도 정남(貞男) 두 자를 가져 서로 저버리지 아니할 것이요, 비록 자네의 몸이 일시의 액운으로 이와 같이 되었으나, 마음이 변하지 않는 줄을 아는 바이니, 나는 정실로 맞을 터이라. 그러나 걱정은 내 집안 형세가 빈한한즉 자네 몸을 빼내어 올 도리가 없네그려.”

“그것은 염려하지 마시오. 첩이 형편을 보아 차차 주선하오리이다.”

처음에는 서로 서먹하여 자세한 말을 하지 못하다가, 이와 같이 정화를 타파하매, 일야지간(一夜之間)에 몇십 년 살던 부부같이 정밀하였더라. 필성이 또 묻는다.

“무슨 일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나는 처음에 서울로 반이 한단 말을 듣고 속으로 세상 인심을 난측이라 한탄하였네그려.”

“처음에 군자께 분란 당한 말씀을 아니함은 군자의 마음을 모름이려니와, 이제야 무슨 말씀을 하지 못하오리까.”

하고, 채봉이 당초에 김 진사가 서울에서 내려와 하던 말이며, 이 부인과 자기는 반대하다가, 이 부인은 호강한다는 데 마음이 변하여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던 말과, 뒤로 은근히 취향과 약속하고 만리교 주막에서 밤중에 도망한 말이며, 김 진사 내외는 도적을 만나 재산을 잃고 올라갔다 허 판서가 5천 냥 돈을 해서 놓든지 자기를 찾아오든지 하라 하고 부친을 구류하였기로 모친이 찾아 내려온 일과, 자기가 몸을 팔아서 올려 보낸 말을 다 하며, 또 한숨을 쉬고,

“우리 어머니는 돈을 가지고 올라가신 지 한 달이 되었는데, 그저 소식을 몰라 걱정이올시다.”

하며, 장랑을 만나 맺힌 회포를 풀고 나니, 부모의 생각이 다시 나서 흐르는 눈물이라.

“나는 그런 줄은 모르고 분하고 야속한 생각이 들었네그려.”

밤이 깊도록 만단정회(萬端情懷)를 다하고 동촉을 물린 후 금침에 드니, 원앙이 녹수(綠水)에 깃들인 것 같더라.

 

  이와 같이 3일은 지낸 후, 송이가 돈 100냥을 내어 필성을 주며,

“화채(花債)라 하는 것은 어미를 아니 줄 수 없사오니, 이 돈을 주시고 내일 오시옵소서.”

필성이가 받아 가지고 있다가 기생 어미를 부러 돈을 주니, 기생 어미가 당초에 장씨의 모양을 보고, 아주 꺽자를 치고 있다가, 천만의외에 돈을 보고 불승대희하여, 차후로는 필성이가 매일 오는데, 기생 어미가 조금도 싫은 기색이 없이 대접하더니, 마침 하루는 어떤 소년 호색이 들어와 놀음을 받으라 하거늘, 기생 어미가 좋아서 허락하고 송이더러 말하니, 송이가 크게 놀라 급히 돈 300냥을 내어놓으며,

“아이고 어머니, 장서방께서 아까 가실 때 한 달만 더 유하겠다 하시고 이 돈을 어머니 어디 가신 사이에 주고 간 것을 진작 드리지 못하였사오니 이를 어찌하나. 선후 차례가 있사오니 지금 오신 양반은 곧 퇴하시오.”

기생 어미 돈을 보고,

“암, 선후가 있지. 나는 그런 줄 몰랐구나.”

하고, 300냥에 입이 벌어져서 그 놀음을 퇴하니라. 이날부터 필성이는 한 달을 숙식하고 지내는데, 송이가 가끔 돈을 필성을 주어 용돈을 쓰게 하니 기생 어미는 더욱 좋아한다. 필성은 이로부터 서로 사랑이 가득하나, 필성은 적빈(赤貧)한 사람이라. 송이도 남은 돈이 차차 다하매, 몸을 빠져나올 틈을 찾을 길이 없어 수심이러라.

 

 

  고진감래(苦盡甘來)는 인간의 공도(共道). 평양 감사로 내려오는 양반은 당시 명망이 조야에 진동하는 이보국이라 하는 양반이신데, 향년 80세 벼슬로는 지내지 못한 것이 없었으나, 무슨 일로 인연함인지 80이 되어도 평양 감사를 지내지 못하는고로, 물색(物色)도 구경할 겸 수석(水石)이 좋다는 말을 듣고, 을밀대 아래에 별저(別邸)를 굉장히 짓고, 평양 감사를 일부로 해서 내려와 지내더니, 하루는 송이가 서화가 분명하다는 말을 듣고 송이를 부르니, 송이가 감사의 부름을 듣고 속으로,

‘옳다! 오늘이야 이 구렁을 벗어나리로다.’

하고, 즉시 시자를 따라가서 이 감사에게 절하여 뵈오니, 이 감사가 송이를 보고 붉은 얼굴에 백수(白首)를 어루만지며,

“오! 네가 송이냐. 오늘 보니, 듣던 말과 같구나. 그러나 들으니 네가 서화가 도저하다니 과연이냐?”

송이가 두 손을 마주 잡고 공손히 하는 말이,

“변변하지 못하온 것을 그렇게 하문하셨나이까?”

“내가 친히 보아야 알지.”

하고,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내어놓는데 남포벼루, 수양명월에 산호(珊瑚)연적이요, 청황모(靑黃毛) 무심필(無心筆)에 백능운화지(白稜雲崋紙). 송이가 마지못하여 섬섬옥수(纖纖玉手)로 붓대를 잡고 먹을 진하게 갈아 지상에 일필휘지(一筆揮之)하니 자자주옥(字字珠玉)이라. 이 감사가 보기를 다하고,

“글씨를 보고 너를 보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구나. 글씨 체격과 네 위인을 보니 기생 될 아이는 아닌데 어떻게 되어서 기생이 되었느냐?”

송이가 말을 들으매, 그 감사의 인후(仁厚)한 도량에 몸을 도와 줄 듯한즉, 일변은 반갑지만 옛날 일을 생각하며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여 눈물을 머금고,

“기생은 본래 성외에 사는 김 진사의 딸로 양가의 여자이옵더니, 부모의 빚을 갚으려고 몸을 자매(自賣)하였나이다.”

이 감사가 웃고 칭찬하며,

“허허! 가위 효녀로구나. 그러면 너는 원래 천인의 자식이 아니란 말이냐? 네 부모는 어디 있으며, 무슨 빚이 있었단 말이냐?”

하고 물으니, 송이가 안색을 바로하고 김 진사가 서울로 구사(求仕)하러 간 일과, 모친이 내려와 빚 걱정하는 일과, 부득이하여 몸을 팔아서 보낸 일을 대강 말하니, 이 때 감사는 연로한지라. 안력이 쇠하여 허다한 공사를 일일이 볼 수 없고, 아객들 더러 글을 보아 대강 뜻을 말하라 하여 처결하나, 항상 미덥지 못하여 마음에 들지 아니하는 날이 많은 터이라. 감사가 생각하되,

‘저 기생은 문필이 유려하고 나이 어린 여자라. 문자를 보려하면 남자보다 소상히 할 것이요, 또 내가 제 몸이 액운에 빠진 것을 건져 주면 아마 은혜에 감동하여 내 심복이 될 터이니, 내가 한번 저 기생을 불러 보리라.’

하고 좌석을 조용히 하고 송이를 불러 이르되,

“이 애, 내가 연만하여 눈이 어두워 공사가 들어오면 친히 못하니, 네가 내 안목이 되어 마음을 정히 먹고 내 앞에서 전후문자를 살펴 주면 어떠하겠느냐. 네가 내 앞에 있으면 네 부모를 만나기도 자연 쉬울 도리가 있을 터이니.”

송이가 안심히 열하여 일어나 절하며,

“천기를 불쌍히 여기사 이와 같이 하해지택(河海之澤)을 내리사 건져 주고자 하시니, 백골이 진토 되어도 잊지 못하겠사오나, 몸값이 있사오니 봉행하지 못할까 하나이다.”

“이 자식아. 내가 너를 부리고자 할진대 몸값을 주고 데려오겠지, 그저 오라고 할 리가 있느냐. 대관절 몸값이 얼마란 말이냐?”

“본전이 6천 냥이올시다.”

“그것은 걱정하지 마라.”

하고, 즉시 사령에게 기생 어미를 불러들여, 7천 냥을 내어 주며,

“이 애, 송이는 내가 부리고자 하여 본전에 천 냥을 더 주는 것이니, 네 마음에 어떠냐?”

기생 어미의 생각에는,

‘좀 재미가 없으나 어찌하리요. 사또께서 몸값을 아니 주시고도 바쳐라 하시면 거역하지 못하올 터이온데, 하물며 돈을 더 차하를 하시니 무슨 잔말을 하오리까.’

하고 받아 가지고 나오니라.

 

 

  차후로 송이는 감사가 있는 별당 건넌방에 가 독처(獨處)하고 있어, 감사 앞에서 전후 거행을 하여 마음에 기생을 면함은 다행하나, 주야로 잊지 못하는 바는 부모의 소식과 장필성을 보지 못함을 한하고, 이 감사가 보는 데는 감히 그 기색을 드러내지 못하니, 혼자 있을 때에는 주야 탄식으로 지내더라. 장필성이 이 소문을 듣고 또한 다행하나, 이 때 감사는 송이 있는 별당은 외인을 일체 엄금하니, 다시 만날 길이 없어 수심으로 지내더니 한 계획을 생각하되,

‘나도 감사 앞에서 거행하는 관속이 되었으면 채봉을 만나기가 쉬우리라.’

하고, 여러 가지로 주선하더니, 이 때 마침 감사가 문필이 있는 이방(吏房)을 구하는지라. 필성이 한 길을 얻어 이방이 되어 감사에게 현신(現身)하니, 감사가 일견에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되,

“가위 옥여기인(玉女奇人)이로다. 필성아, 이방이라 하는 것은 승상 접하는 책임이 중대하니 아무쪼록 일심봉공(一心奉公)하여 민원(民怨)이 없도록 잘 거행하라.”

필성이 국궁수명(鞠躬受命)하고, 차후로 공사문첩(公事文牒)을 가지고 매일 드나들며 송이의 소식을 알고자 하나, 별당이 깊고 깊어 지척이 천리라, 어찌 알리요.

 

  차시 송이는 별당에 있어 이 감사가 들어와 공사에 쓸 것을 쓰라면 쓰고 제사를 내라면 내고 하더니, 하루는 공사문첩 한 장을 본즉, 필성의 글씨가 완연한지라. 속으로 생각하되,

‘이상하다. 필법이 장서방님 필적 같으니, 혹 공청(公廳)에 드나드나?’

하고 감사더러 묻는다.

“요사이 공사 들어온 것을 보면 전의 글씨와 다르오니 이방이 갈렸습니까?”

“응, 전 이방은 갈고, 장필성이란 사람으로 시켰다네. 보아라, 글씨를 잘 썼지.”

송이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암암이 기꺼하여,

‘어떻게 하면 한번 만나 볼까? 그렇지 못하면 서사의 왕복이라도 할까? 사람을 시키자니 만일 대감이 알면 무슨 죄를 내릴지 몰라 하지 못하고, 무슨 기회를 기다리나?’

이렇듯이 때를 타지 못하여 필성이나 송이나 서로 글씨만 보고 창연히 지내기를 이미 반년이라. 자연 서로 상사병이 될 지경이더라.

 

  이 때는 추구월망간(秋九月望間)이라. 월색이 명랑하여 남창에 비치고, 공중에 외기러기 응응한 긴 소리로 짝을 찾아 날아가고, 동산의 송림 사이에 두견이 슬피 울어 불여귀를 화답하니, 무심한 사람도 마음이 상하거든 독수공방에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송이야 오죽할까. 송이가 모든 심사를 저버리고 책상머리에 의지하여 잠깐 졸다가 기러기 소리에 놀라 눈을 뜨고 보니, 남창에 밝은 달 허리에 가득하고 쓸쓸한 낙엽송은 심회를 돕는지라. 잊었던 심사가 다시 가슴에 가득해지며 눈물이 무심히 떨어진다. 송이가 남창을 가만히 열고 달빛을 내다보며 위연 탄식하는데,

‘달아, 너는 내 심사를 알리라. 작년 이 때 뒷동산 명월 아래 우리 임을 만났더니, 달은 다시 보건마는 임을 어찌 보지 못하는고. 심양강의 탄금녀는 만고문장 백낙천을 달 아래 만날 적에, 설진심중무한사(說盡心中無限事, 마음속에 있는 한없는 얘기를 다함)를 세세히 하였건마는, 나는 어찌 박명하여 명랑한 저 달 아래서 부득설진심중사(不得說盡心中事,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다 말하지 못함)하니 가련하지 아니할까. 사람은 없어 말 하지 못하나, 차라리 심중사를 종이 위에나 그리리라.’

 

하고, 연상을 내어 먹을 흠씬 갈고 청황모 무심필을 듬뿍 풀어 백능화주지를 책상에 펼쳐 놓고, 섬섬옥수로 붓대를 곱게 쥐고 장우단탄(長吁短嘆, 탄식함을 마지않음)에 맥맥이 앉았다가, 고개를 돌려 벽공의 높은 달을 두세 번 우러러보더니, 서두에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 다섯 자를 쓰고, 상사가 생각 되고, 생각이 노래 되고, 노래가 글이 되어 붓끝을 따라오나, 붓대가 쉴 새 없이 쓴다.

쓰기를 마침에 붓대를 던지고 정신없이 앉았으니, 하늘이 비록 눈이 없으나 박명홍안(薄命紅顔, 젊고도 아름다운 얼굴의 기막힌 운명)의 원탄을 모르리요. 월도천심야심경(月道天心夜三更, 달이 중천에 떠올랐으니, 밤이 벌써 삼경이 되었음)에 슬픈 노래 안남비(雁南飛). 아득한 정신은 기러기 소리를 따라 멀어지고, 몸은 책상머리에 엎드렸더니, 잠시 잠이 들어 주사야몽 꿈이 되어 장주의 나비같이 두 날개를 떨치고 바람을 쫓아 중천을 떠다니며 사면을 살피니, 오매불망하던 장필성이 적막공방에 혼자 몸이 전일의 답서를 내놓고 보며, 울고 울고 보며 전전반측 누웠거늘, 송이가 들어가 마주 붙들고 울다가 꿈 가운데 우는 소리가 잠꼬대가 되어 아주 내쳐 울음이 되었더라. 사람이 늙어지면 상하 물론하고 잠이 없는 법이라. 이 때 이 감사는 연광도 80여 세뿐 아니라, 일도방백(一道方伯)이 되어 밤이나 낮이나 어떻게 하면 백성의 원성이 없을까, 어떻게 하면 국은(國恩)을 보답할까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누웠더니, 홀연히 송이의 방에서 느껴 우는 소리가 들리거늘, 깜짝 놀라 속으로 짐작하되,

‘지금 송이가 나이 열일곱이라. 필연 무슨 사정이 있어 저리 하나 보다.’

하고 가만히 나와 보니, 남창을 열고 책상머리에 누웠는데, 불을 돋우어 놓고 책상 위에 무엇을 써서 펼쳐 놓았거늘, 마음에 괴이하여 가만히 들어가 화주지를 펼치고 본즉 추풍감별곡이라. 대강 보고 손으로 송이를 흔들어 깨우니, 송이가 깜짝 놀라 눈을 떠 본즉 감사라. 대경실색하여 급히 일어서니, 이 감사가 화주지를 말아 들고,

“송이야, 놀라지 마라. 비록 상하지분은 있으나, 내가 너를 친딸이나 다름없이 귀히 하는 터이니, 무슨 사정이 있거든 내게 말을 하면 그 아니 좋겠느냐. 오늘 심중에 미안한 일을 다 말하여라. 이 자식아, 나는 너를 딸같이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아비같이 생각하지 않고, 이와 같이 원한을 가지고 말 아니하고 있단 말이냐?”

송이가 창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겨우 입을 열어,

“소녀의 죄가 만사무석(萬死無惜)이올시다.”

이 감사가 허허 웃고

“내가 네 소회를 듣고자 하니, 마음 있는 대로 다 말하여라.”

송이가 한출첨배(汗出添背) 되고, 몸은 떨려 말을 하지 못하고 섰더니, 감사가 또 말을 재촉한데,

“이처럼 하문하시니 어찌 기망하리까.”

하고 눈물을 지우고 단정히 서서, 당초 후원에서 장씨와 글로 화답하던 일과, 그 모친이 장씨를 청하여 혼약을 한 일과, 김 진사가 서울로 올라가서 벼슬을 구하다가 허 판서와 관계가 된 말이며, 허 판서가 저를 별실로 달라는 것을 김 진사가 허락하였으되, 저는 장씨의 약속을 지키느라고 만리교에서 도망하였다가, 그 후 모친이 찾아 내려옴으로 몸을 팔아 올려 보내고, 기생이 된 후 오히려 장씨를 잊지 아니하고, 글로써 화답할 사람을 구하여, 장씨를 만나 몸을 허락한 말을 다하고,

“대감의 천지 같은 은혜는 결초보은(結草報恩)하여도 잊지 못하겠나이다.”

하며 엎드려 우니 감사가 등을 어루만지며,

“송이야, 울지 마라. 네 사정이 그런 줄은 몰랐구나. 그러나 오늘은 알았으니 어찌 네 원을 풀어 주지 못하겠느냐. 이제야 안즉 장필성도 사정이 있어 이방으로 들어왔구나. 명일은 장필성을 불러 보게 하리라. 눈물이라 하는 것은 인정의 지극한 이슬이라. 그러므로 억울하고 그리워도 눈물이요, 좋고 반가워도 눈물이라.”

송이가 감사의 말을 들으매 다시 눈물이 떨어짐을 깨닫지 못하다가도, 반갑고 상쾌한 끝에 부모 생각이 새로 나서 다시 감사에게 말을 한다.

“분부가 이와 같사오니 하정에 망극하오이다. 그러하오나 소녀의 부모가 소녀로 인하여 곤경에 들어 소식을 모르오니 차생 원한이올시다.”

감사가 말을 듣고 더욱 가상한다.

“효열지심(孝烈之心)이 가위 천심에서 나오는 말이로구나. 오냐, 그것도 급히 주선하여 알게 할 터이니 염려하지 마라.”

하고, 안방으로 건너와 혼자 누워 화주지에 쓴 글을 여러 번 보더니 칭찬함이 마지아니하더라.

 

  이튿날 아침 일찍 장필성을 부르니, 필성이 속으로 생각하되,

‘사또께서 일찍이 부르시는 일이 없더니 무슨 일로 이와 같이 부르시나?’

하고 이 감사께 문안하니, 이 감사는 흔연히 희색을 띠고,

“별장으로 들어오라.”

하거늘, 필성이 더욱 이상히 여기고 따라 들어오매, 감사가 방으로 불러 들여앉히고 송이를 부르니, 송이가 건넌방으로 들어오매, 필성과 서로 만나 놀라서 소스라쳐 말없이 마주앉으니,

 

 

가위 양인심사양인지(兩人心事兩人知,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이 다 알고 있음). 감사의 앞이라 감히 말을 하지 못하니 그 곤경이 어떠할까. 이 감사가 껄걸 웃고 필성을 보고,

“필성아, 네가 송이를 위하여 이방 천역(賤役)을 자원하고 들어온 지가 6, 7삭이 되어도 보지 못하였다가 오늘에야 서로 만나 보니 어떠하냐?”

필성이 더욱 놀라 어쩔 줄 모르다가 일어서 절하며,

“황공하여이다.”

“내가 이미 네 사정을 아는 도리가 있으니 안심하라. 너희 둘을 앉히고 보니 가위 천생여질(天生麗質)을 난자기(難自期)로구나. 오늘 곧 송이를 내어 줄 터이로되, 네가 송이의 수건에 써서 준 글을 봄에 의작홍사입동방(擬作紅絲入洞房)이라. 언약이 깊었으니 혼인을 아니할 수 없은즉, 송이의 부모를 내려오게 한 후, 내가 중매 되어 혼인을 꾸밀 터이니 그리들 알아라. 그러나 오랫동안 서로 그리던 정회가 많을 터이니, 송이를 데리고 건넌방으로 건너가거라.”

하여 보내니, 서로 반가운 생각이 가슴에 사무쳐서 그리던 정회는 오히려 뒤지고, 감사의 은덕에 감동하여 서로 놀랍고 반가운 이야기만 한다.

“허허, 사또께서 우리의 일을 어찌 아시고 이와 같이 은덕을 내리시나?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우리가 죽어도 이 은덕을 잊지 못하리로다.”

“송이 꿈 가운데 만난 님을 생시에 뵙기는 다름이 아니라, 작야에 월색이 하도 명랑하기로 소회를 풀어 글을 지어 책상에 두고 누웠더니, 잠이 들어 꿈을 꾸어서 꿈에 서방님과 만나 붙들고 울다가 잠꼬대하는 소리를 사또께서 들으시고, 나를 깨워 약시약시 하문하시고 오늘 이와 같이 되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하면 만 분의 일이라도 갚을까.”

하고, 필성의 무릎에 앉으며 뼈가 녹아 눈물이 쏟아지니, 이는 송이가 님 그리던 원정에 나오는 눈물도 아니요, 부모를 생각하는 눈물도 아니요, 하해 같은 이 감사의 은덕에 느껴 우는 눈물이라. 필성이 또한 울음 반 웃음 반으로,

“우리 양인의 심사를 하늘이 통촉하사 이러한 감사를 뫼셔 하늘 같은 은덕을 입었구나.”

하며 울고 붙들고 하더니, 이 때 동헌에서 공사청령(公事廳令) 길게 나니, 송이가 깜짝 놀라 급히 필성을 일으켜 보내며,

“공사령이 내렸으니 어서 나가셔요. 이제는 우리가 원이 없거니와 부탁해요. 은혜를 생각하여 공사에 조심하셔요.”

필성이 웃고 대답하되,

“부탁한 말 명심할 것이니, 하루 바삐 장인 장모를 돌아오시도록 주선을 하오.”

만덕산 늦은 안개가 햇살에 사라지듯 얼굴에 가득하던 수색이 벗어지고 회색이 가득하여 총총 작별하고 물러나오니, 감사가 공사를 시작하고 이방 장필성을 불러 형조에 보장(報狀)을 써 김 진사를 빼내려고 급히 전인(傳人)을 띄우니라. 슬프다, 세상 사는 귀천(貴賤)이 유명(有名)이요, 희비(喜悲)가 무상(無常)이라. 평양성중에는 채봉의 일개 소녀가 이러한 풍랑을 겪고 차차 호운(好運)을 만회하건마는, 500여 리 밖에 옥중 고객 김 진사는 이를 어찌 알며, 또 그와 같이 세력이 흔천동지(掀天動地)하던 허 판서인들 어찌 그러한 지위를 오래 누리기를 기필하리요.

 

 

  이 때 이부인이 평양서 채봉을 이별하고 서울로 올라와 돈 5천 냥을 바치고 김 진사가 방송되기를 희구하니, 허판서는 돈을 받은 후 과천 현감을 면직시키고, 또 트집하여 이르되,

“무단히 양반을 속였은즉 딸마저 찾아 놓아야 무사히 방송하리라.”

하거늘, 김 진사가 기가 막혀 어찌할 수 없어,

“내 딸은 벌써 죽었으니, 나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대감 마음대로 하시오.”

하며 악을 쓰나 허 판서는 더욱 노하여,

“아주 옥중 귀신을 만들리라.”

하고 여전히 가두어 두니 이부인이 생각하되,

‘사세가 이와 같으니 평양으로 내려가서 채봉더러 이런 말을 하여도 이제는 채봉이가 하고 싶어도 소용이 없으니, 여기서 죽으나 사나 끝이나 보리라.’

하고 남의 집 방을 얻어 들고, 침선을 팔아 가며 옥중 공궤를 하더니, 미구(얼마 오래지 아니함)에 허 판서가 범람한 마음을 먹다가 발각되어 복주(伏誅, 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음. 또는 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게 함)를 당한 후

조정에서 허씨의 삼족(三族)을 멸하고, 문인(門人)은 죄지경중(罪之輕重)을 마련하여 각기 처벌하는데, 김양주는 처교(處絞, 죄인을 교수형에 처함)하고, 또 사구류(私拘留, 권세가 있는 사람이 법에 의하지 아니하고 남을 사사로이 구금함)에 있는 김 진사는 우선 형조에 이수(移收)하고 죄의 유무를 사실하더니, 마침 이 때 평양 감사의 보장이 들어오니, 조정에서 의심하지 아니하고 김 진사를 무죄 방송하니라. 김 진사가 천은(天恩)을 축수하고 옥문을 나서니, 이부인이 벌써 옥문에서 기다리는지라. 반기며 같이 사관으로 나와서 붙들고 일장통곡하며 전후사를 말하고,

“만일 채봉이가 아비만 믿고 허가와 결친(結親)하였던들 어린 자식이 참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리니, 기생에 팔렸더라도 오히려 죽기보다는 다행이오. 아무리 부녀간이라도 나는 채봉이 볼 낯이 없소그려.”

“부인 차역(此亦, 이것도 역시) 운수요, 피역(彼亦, 저것도 역시) 운수라.”

“왕사(往事)는 물론(勿論, 말할 것도 없음)하시고 평양으로 내려가서 채봉의 몸이나 빼낼 도리를 합시다.”

하고, 즉시 도보로 발정하여 평양으로 내려오니, 산천 풍물은 의구히 있건만 사람은 어이 금석이 달라졌으며, 불쌍한 채봉이는 뉘에게 가서 의탁하였는고. 김 진사 내외가 취향의 집으로 찾아오니, 취향 모녀가 반기며 맞으며 인사를 하는데, 김 진사가 우선 채봉의 말을 묻는다.

“아가씨 잘 있느냐?”

“예, 잘 있습니다.”

하고, 그간 봉선 어미 집에서 글귀로 장씨를 찾아 만나던 말이며, 이 감사가 몸값을 갚고 데려다 둔 말을 일일이 고하니, 김 진사 내외가 듣고 만심환희하여 묻되,

“부인, 그러면 그간 아가씨를 보았느냐?”

“감사 댁으로 들어가신 후로는 당초에 외인은 남녀를 물론하고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심으로 들어가 뵈옵지 못하였습니다.”

김 진사 내외가 즉시 이 감사 댁으로 찾아가니, 이 감사가 보고 일면여구(一面如舊)같이 반기며 별당으로 불러들여 송이를 만나게 하니, 일륜의 맺힌 정곡(情曲) 근심 슬픔이 다 녹아 눈물이 되어 흐르고, 세 부녀가 마주 붙들고 일장 통곡을 한 후, 송이가 이 감사의 은덕으로 신명을 보존하고 장씨와 만난 일과, 형조에 보장한 일을 세세히 말하니, 김 진사가 더욱 놀라 일어나 절을 하며,

“대감의 하해 같은 은혜가 백골난망이올시다.”

이 감사가 껄껄 웃으며,

“이는 관장(官長)된 사람의 떳떳한 일이라. 무슨 은혜라 하리요. 사람의 귀천이 유명이라. 헛된 영광을 바라면 패가망신하기 쉬운 법이니, 어린 자식을 생각하여 후일을 경계하라. 그러나 그대는 복이 많아서 송이 같은 딸을 두고, 장필성 같은 사위를 보게 되는 것을 나는 다행한 일로 아노니, 오늘 송이를 내어 주니 급히 혼인을 성례하여 가업을 안락하게 하라.”

하며 분부하고, 송이를 불러 오래 부리던 행하(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주인이 부리는 사람에게 주는 돈이나 물건)로 집과 전곡(돈과 곡식)을 주어 보내니, 김 진사 부녀가 고두사은(머리를 조아리며 은혜에 감사함)하고 물러나와 길일을 택하여 장생을 맞아 혼례를 행하니라.  

 

 

 

 

핵심 정리

• 갈래 : 애정 소설, 연정 소설, 세태 소설
• 성격 : 사실적, 비판적, 진취적
• 제재 : 채봉과 장필성의 사랑

• 구성
-발단 : 채봉과 장필성이 만나 가약을 맺음
-전개 : 김 진사가 채봉을 허 판서의 첩으로 보내 벼슬을 사려 함
-위기 : 상경 도중 채봉이 도망하고 김 진사가 하옥됨
-절정 :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채봉은 기생이 되고 강필성과 재회함
-결말 : 이보국의 도움으로 채봉과 장필성이 결혼함
• 제재 : 채봉과 필성의 사랑
• 주제 : 권세에 굴하지 않는 순결하고 진실한 사랑
• 특징 :
  ① 여성 주인공의 적극적이고 주체적 의지가 드러남
  ②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조선 후기의 타락한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드러냄
  ③ 우연성과 비현실성을 탈피하고 사건 전개가 사실적이고 현실적

• 의의 : 조선시대 소설에서는 드물게 보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무엇보다도 우연성과 비현실성이 점차 사라지면서 고전 소설의 말미에 놓이는 작품으로 내용 중에 채봉이 지어 부르는 가사체(歌辭體)의 '추풍감별곡'이 있으며, 동명(同名)의 서도창(西道唱)이 따로 있다. 

 

 

줄거리 

 여주인공 채봉은 평양성 밖 김진사의 딸로, 봄날 꽃구경에 나섰다가 전 선천부사의 아들 장필성을 만나 서로 호감을 갖게 된다. 필성은 채봉이 수줍어 도망하다가 떨어뜨린 손수건을 주워 연정을 담은 시를 써서 시비 추향에게 전한다. 이를 받아 본 채봉이 화답시를 보낸다. 채봉의 어머니 이부인이 채봉을 질책하자 채봉이 사실을 고한다. 필성이 어머니를 통하여 채봉의 집에 매파를 보내자, 채봉의 아버지 김진사가 서울 가고 없는 동안에 부인이 혼자 결정하여 약혼한다.

 김진사는 세도가 허판서의 문객 김양주를 통하여 벼슬할 생각을 한다. 김양주는 김진사에게 과년한 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딸을 허판서의 애첩으로 들여보내고 그 대가로 벼슬을 하도록 권한다. 김진사가 주저하던 끝에 승낙하고 허판서에게도 약속을 하고 온다. 돌아온 김진사는 부인에게 딸을 데리고 상경하자고 하니 부인은 대경실색하고, 채봉은 눈물만 흘린다. 부인과 채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진사는 전답과 기타 가산을 정리하여 상경한다.

 김진사 일행은 도중에 화적을 만나는데, 이때 채봉은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평양으로 되돌아온다. 김진사는 화적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허판서에게 사정을 알리지만 허판서는 대노하여 김진사를 옥에 가둔다. 부인은 할 수 없이 채봉을 찾으러 다시 평양으로 온다. 채봉은 평양에서 시비 추향의 집에 묵고 있었는데, 기생어미가 그녀에게 기생되기를 권하나 거절한다.

 채봉의 어머니는 추향의 집에서 딸을 만나 아버지가 하옥되어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상경하자고 조른다. 채봉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기생으로 몸을 팔기로 작정하고 기생어미로부터 돈을 받아 어머니에게 준다.

 기명을 송이라고 한 채봉은 장필성에게 화답하여 보낸 한시를 내놓고 그것을 풀이하는 사람에게 몸을 허락하겠다고 하지만 아무도 풀지를 못한다. 필성은 기생 송이가 제시하였다는 한시를 듣고 하도 신기하여 찾아갔다가 채봉을 만나고, 그 뒤 밤마다 찾아가서 사랑을 속삭인다.

 한편, 평양감사 이보국이 송이의 서화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와 곁에 두고 서신과 문서를 처리하는 일을 맡긴다. 필성은 채봉을 잃고는 채봉을 그리워하며 고민으로 지내다가 감영의 이방이 되기를 자원하여 채봉을 만나고자 한다.

 채봉은 별당에 거처하면서 필성을 날마다 그리워하고 있다가 어느 달 밝은 밤에 ‘추풍감별곡’을 지어서 부른다. 이 노래를 들은 감사가 채봉을 불러 천한 이방을 사모한다고 질책한다. 이에 채봉은 현재 이방으로 와 있는 필성과의 관계를 고백한다. 감사는 두 사람의 사랑을 가상히 여겨 필성을 불러서 상면하게 하고 감사 자신이 혼례와 관련된 일들을 주관하여 두 사람의 지난날의 인연을 성취시켜준다.

 

 



이해와 감상

  조선 말기에 쓰인 것으로 추측되는 작자 · 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1책. 국문필사본 · 활자본. ‘ 추풍감별곡 ’ 이라는 표제도 있는데, 이는 작품 안에 삽입된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필사본으로는 규장각본이 있고, 활자본은 1913년 박문서관본, 1952년 세창서관본이 있다. 남녀주인공이 기구하게 헤어지고 만나는 과정을 그린 애정소설로 총 60여 면, 120회로 된 장회 소설이다.

 

  이 작품을 중국 소설집 《금고기관(今古奇觀)》에 나오는 〈왕교란백년장한(王嬌鸞百年長恨)〉을 번안한 작품이라고 평가하지만 서두에서 남녀 주인공의 결연 과정만 모방했을 뿐이다. 제재로 보나 배경으로 보나 현실 생활에서 취재했으며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횡행하던 조선 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설정했는데, 이 작품처럼 현실성을 띠고 있는 조선 시대 고대 소설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장필성과 채봉이 어떠한 권세에도 굴하지 않고, 체면도 불구하고 사랑을 찾으려는 순결하고도 진실한 애정 생활을 표현하고 있으며, 나아가 조선 말기의 부패하고도 몰락해 가는 양반 위정자들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김 진사의 유관주의적 사상과 허 판서 · 김양주 등의 생활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애정 소설의 여주인공 대부분을 기생 출신에서 택한 데 비해 이 작품은 양가의 규중처자를 여주인공으로 삼았으며, 중국을 배경으로 한 애정 소설이 대부분이 일부다처주의적 애정 생활을 공공연하게 표현해 놓은 데 비해 이 작품은 진실한 애정으로만이 결합되어 일부일처주의의 애정 생활을 표현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조선 시대 소설로는 드물게 보는 수작이며, 사건의 현실성으로 봐서는 <춘향전>보다 나은 작품이라고도 생각된다. 필사본으로는 규장각본이 있고, 활자본은 1913년 박문서관본, 1952년 세창서관본이 있다.


 “평안도 사람이 벼슬하기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려운 이 시절에”라는 표현에서는 서북 지역(평안도)의 사람들에 대해 차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19세기 초에 발생한 ‘홍경래의 난’은 이러한 차별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애정 소설의 저변에는 서사적 전통이 깔려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 인물의 ‘주체성 발현의 전통’이다. 우리 애정 소설에서는 애정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주체로서 몸부림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오랫동안 형상화되어 왔다. ‘채봉감별곡’은 그런 애정 소설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킨 작품이다. 특히, 환경과 대면해 주체성을 발현하는 현실적 인물을 이전의 어느 소설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형상화해 냄으로써 우리 애정 소설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근대화된 작품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조선 후기의 세태를 반영한 이 작품은, 딸을 팔아서까지 벼슬하려고 하는 김 진사, 부모의 명을 거역하고 도망하였다가 기생이 되는 채봉, 애인을 만나기 위하여 천한 이방이 되는 필성 등, 기존 질서를 벗어나 파격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들이 많다. 이는 신분 질서의 와해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욕망과 출세욕을 다룬 개화기의 고전 소설들과도 상통하는 점이다. 현실적·합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의 전개와 사실에 가까운 표현법 등은 이 작품이 근대 소설로 옮겨 가는 과정에 있는 작품임을 시사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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