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순전(麴醇傳)
국순(麴醇)의 자(字)는 자후(子厚)이다.(누룩, 진한 술.의인) 그 조상은 농서(龓西) 사람이다. 90대조(九十代祖)인 모(牟)가 후직(后稷)을(농사를 맡은 벼슬) 도와 뭇 백성들을 먹여 공이 있었다. '시경(詩經)'에,
"내게 밀과 보리를 주다." (보리=모)
한 것이 그것이다. 모(牟)가 처음 숨어 살며 벼슬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밭을 갈아야 먹으리라." (벼슬을 하지 않겠다.)
하여, 밭에서 살았다. 임금이 그 자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조서(詔書)를 내려 안거(安車)로(수레) 부를 때, 군(郡)과 현(縣)에 명하여 곳마다 후하게 예물을 보내게 하였다. 신하를 시켜 친히 그 집에 나아가, 드디어 방아와 절구[杵臼] 사이에서 교분(친분)을 정하였다. 화광동진(和光同塵)하게 되니,(빛을 늦추고, 속세(俗世)의 티끌에 같이 한다는 뜻, 지혜를 자랑함 없이 오히려 그 지혜를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동화함) 훈훈하게 찌는 기운이 점점 스며들어서 온자(醞藉)한(따스한) 맛이 있어 기뻐 말하기를,
"나를 이루어 주는 자는 벗이라 하더니, 과연 그 말이 옳다."
하였다. 드디어 맑은 덕(德)으로써 들리니, 임금이 그 집에 정문(旌門)을(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세운 문) 표하였다. 임금을 따라 원구(園丘)에(제단) 제사한 공으로 중산후(中山侯)에 봉해졌다. 식읍(食邑)은(주로 공신에게 준 땅) 일만 호(一萬戶)이고, 식실봉(食實封)은(임금이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 직접 조세를 받아 쓰도록 떼어 준 일정한 지역의 민호) 오천 호(五千戶)이며, 성(姓)은 국씨(麴氏)라 하였다. 5세손이 성왕(成王)을 도와 사직을 제 책임으로 삼아 태평 성대(음주가 성행)를 이루었고, 강왕(康王)이 위(位)에(자리) 오르자 점차로 박대를 받아 금고(禁錮)(금주령)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후세에 나타난 자가 없고, 모두 민간에 숨어 살게 되었다.(밀주) 위(魏)나라 초기에 이르러 순(醇)의 아비 주(酎)가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서, 상서랑(尙書郞) 서막(徐邈)(애주가)과 더불어 서로 친하여 그를 조정에 끌어들여 말할 때마다 주(酎)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조정에 술을 가져가 마심) 마침 어떤 사람이 임금께 아뢰기를,
"막이 주와 함께 사사로이 사귀어, 점점 난리의 계단(단계)을 양성합니다."
하므로, 임금께서 노하여 막을 불러 힐문(따져 물음)하였다. 막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신이 주를 좇는 것은 그가 성인(聖人)의 덕이 있삽기에 수시로 그 덕을 마셨습니다."
하니, 임금께서 그를 책망하였다. 그 후에 진(晋)이 이어 일어서매, 세상이 어지러울 줄을 알고 다시 벼슬할 뜻이 없어, 유령(劉伶), 완적(阮籍)의(죽림칠현(은자들) 무리들과 함께 죽림(竹林)에서 노닐며 그 일생을 마쳤다.
*죽림칠현(竹林七賢) : 대나무의 숲의 일곱 현인(賢人)이라는 뜻으로, 중국(中國) 진(晉)나라 초기(初期)에 유교(儒敎)의 형식주의(形式主義)를 무시(無視)하고, 노장(老莊)의 허무주의(虛無主義)를 주장(主張)하고, 죽림에서 청담(淸談)을 나누며 지내던 일곱 선비, 곧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嵆康),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영(劉怜), 왕융(王戎) 등(等)을 이르는 말
도입 : 국순의 집안 내력과 아버지의 행적
순(醇)의 기국(器局)과(기량) 도량은 크고 깊었다. 출렁대고 넘실거림이 만경 창파(萬頃蒼波)와 같아 맑혀도 맑지 않고, 뒤흔들어도 흐리지 않으며,(맑아서 더 맑을 것이 없음) 자못 기운을 사람에게 더해 주었다. 일찍이 섭법사(葉法師)(태평광기에 나오는 인물) 나에게 나아가 온종일 담론할 때, 일좌(一座)가 모두 절도(絶倒)하였다.(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함) 드디어 유명하게 되었으며, 호(號)를 국처사(麴處士)라 하였다. 공경(公卿), 대부(大夫), 신선(神仙), 방사(方士)(높은 벼슬아치) 들로부터 머슴, 목동, 오랑캐, 외국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향기로운 이름을 맛보는 자는 모두가 그를 흠모하여(열심히 술을 마심), 성대(盛大)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순(醇)이 오지 아니하면(술이 없으면) 모두 다 추연(처량하고 슬퍼)하여 말하기를,
"국처사가 없으면 즐겁지가 않다."
하였다. 그가 당시 세상에 애중(愛重)됨이(사랑하고 소중(所重)하게 여김) 이와 같았다.
태위(太尉)(고려시대 삼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 산도(山濤)가(이름) 감식(鑒識)이(보는 눈) 있었는데, 일찍이 그를 말하기를,
"어떤 늙은 할미가 요런 갸륵한 아이를 낳았는고. 그러나 천하의 창생(蒼生)을 그르칠 자는 이 놈일 것이다." (술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워 질 것이다. 국순이 간신이 될 것을 암시하는 반어적 표현)
라 하였다. 공부(公府)에서 불러 청주 종사(靑州從事)(배꼽 밑까지 시원하게 넘어가는 좋은 술)를 삼았으나, 격의 위가 마땅한 벼슬 자리가 아니므로, 고쳐 평원 독우(平原督郵)(명치 위에 머물러 숨이 막히는 나쁜 술)를 시켰다. 얼마 뒤에 탄식하기를,
"내가 쌀 닷 말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鄕里) 소아(小兒)에게 향하지 않으리니, 마땅히 술 단지와 도마 사이에서 서서 담론할 뿐이로다." (도연명이 평택 현령으로 있을 때 사찰 나온 관리에게 절할 수 없다며 '귀거래사'를 쓰고 사직한 한 일을 인용)
라고 하였다. 그 때 관상을 잘 보는 자가 있었는데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 얼굴에 자줏빛이 떠 있으니, 뒤에 반드시 귀하여 천종록(千鍾祿)을(천 가지 녹봉, 혜택) 누릴 것이다. 마땅히 좋은 대가를 기다려 팔라."
라고 하였다. 진후주(陣候主) 때에 양가(良家)의 아들로서 주객 원외랑(主客員外郞)을 받았는데, 위에서 그 기국을(기량) 보고 남달리 여겨 장차 크게 쓸 뜻이 있어, 금구(金甌)(쇠나 금으로 만든 사발로 당 현종이 재상을 임명할 때 이용함)로 덮어 빼고 당장에 벼슬을 올려 광록 대부 예빈경(光祿大夫禮賓卿)으로 삼고, 작(爵)을 올려 공(公)으로(벼슬의 위계, 공작) 하였다. 대개 군신(君臣)의 회의에는 반드시 순(醇)을 시켜 짐작(斟酌)하게(헤아리게) 하나, 그 진퇴(進退)와 수작이(술을 주고 받는 일) 조용히 뜻에 맞는지라, 위에서 깊이 받아들이고 이르기를,
"경(卿)이야말로 이른바 곧음[直] 그것이고, 오직 맑구나. 내 마음을 열어 주고 내 마음을 질펀하게 하는 자로다."
라 하였다. 순(醇)이 권세를 얻고 일을 맡게 되자, 어진 이와 사귀고 손님을 접함이며, 늙은이를 봉양하여 술·고기를 줌이며, 귀신에게 고사하고 종묘(宗廟)에 제사함을 모두 순(醇)이 주장하였다.(술이 다양하게 쓰임) 위에서 일찍 밤에 잔치할 때도 오직 그와 궁인(宮人)만이 모실 수 있었고, 아무리 근신(近臣)이라도 참예(참여)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위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정사를 폐하고, 순은 이에 제 입을 재갈물려 말을 하지 못하므로(간언을 하지 않음. 간신) 예법(禮法)의 선비들은 그를 미워함이 원수 같았으나, 위에서 매양 그를 보호하였다. (임금이 술에 빠져 국정에 관심이 없다. 임금의 사리분별을 막는 국순(간신의 무리))
순은 또 돈을 거둬들여 재산 모으기를 좋아하니, 시론(時論)이(한 시대의 여론) 그를 더럽다 하였다.
위에서 묻기를,
"경(卿)은 무슨 버릇이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옛날에 두예(杜預)는 좌전(左傳)*의 벽(癖)이 있었고, 왕제(王濟)는 말[馬]의 벽이 있었고, 신(臣)은 돈 벽이 있나이다."
*좌전: 춘추좌씨전. 중국(中國)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의 태사(太史)인 좌구명(左丘明)이 공자(孔子)의 『춘추(春秋)』를 풀이한 책(冊)
하니, 위에서 크게 웃고 권고(眷顧)가(돌봄) 더욱 깊었다. 일찍이 임금님 앞에 주대(奏對)할 때,((임금의 물음에 신하(臣下)가)대답(對答)하여 아룀) 순이 본래 입에 냄새가 있으므로 위에서 싫어하여 말하기를,
"경이 나이 늙어 기운이 말라 나의 씀을 감당치 못하는가."
라 하였다. 순이 드디어 관(冠)을 벗고 사죄하기를, (떠날 시기를 놓쳐 쫓겨나는 상황을 풍자)
"신이 작(爵)을 받고 사양하지 않으면 마침내 망신(亡身)할 염려가 있사오니, 제발 신(臣)을 사제(私第)에 돌려 주시면, 신(臣)은 족히 그 분수를 알겠나이다."
라고 하였다. 위에서 좌우(左右)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나왔더니, 집에 돌아와 갑자기 병들어 하루 저녁에 죽었다. 아들은 없고, 족제(族弟)(집안의 아우) 청(淸)이, 뒤에 당(唐)나라에 벼슬하여 벼슬이 내공봉(內供奉)에 이르렀고, 자손이 다시 중국에 번성하였다.
전개 : 국순의 일생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작가의 대리인, 글쓴이가 대상에 대해 논평하는 가전체의 전형적인 마무리 방식으로 소설의 서술자 개입과 유사)
"국씨(麴氏)의 조상이 백성에게 공(功)이 있었고, 청백(淸白)을 자손에게 끼쳐 창이(울창주, 제사의 강신에 쓰는 술) 주(周)나라에 있는 것과 같아 향기로운 덕(德)이 하느님에까지 이르렀으니, 가히 제 할아버지[祖]의 풍(백성을 먹여살렸던 국순의 90대조인 모(牟)의 기풍)이 있다 하겠다. 순(醇)이 들병의(설병, 자은 병) 지혜로 독 들창에서 일어나서, 일찍 금구의 뽑힘(나라에 중용됨)을 만나 술단지와 도마에(조정에) 서서 담론하면서도 가(可)를 들이고 부(否)를 마다하지 아니하고,(옳고 그름은 변론하지 않고) 왕실(王室)이 미란(迷亂)하여(정신(精神)이 혼미(昏迷)하여 어지러워) 엎어져도 붙들지 못하여 마침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신하의 도리를 못함. 공도동망(共倒同亡)) 거원(巨源)의(산도) 말이 족히 믿을 것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논평 : 국순에 대한 사신의 부정적 평가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수능특강 '국순전' 본문
국순(麴醇)의 자(字)는 자후(子厚)이다. 그 조상은 농서 지역 출신이다. 군순의 90대 조상인 모(牟)는 후직(后稷)을 도와서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도록 한 공로가 있었다. '시경(詩經)'에서 "우리에게 밀과 보리를 주었구나."라고 한 구절은 이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밥을 먹도록 하는 공로) 모는 처음에는 숨어서 벼슬하지 않고서 "나는 반드시 농사를 지어 먹고살 것이다."(벼슬을 하지 않고 살겠다.)라고 하면서 시골에서 살았다. 뒷날 임금이 모의 소문을 듣고, 조서(詔書)를 내려 안거(安車)를 보내 모를 불렀다. 그리고 임금이 지방에 명령을 내려 모가 가는 곳마다 후하게 예물을 보내도록 하고,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모의 집을 방문하도록 했다. 그러자 모는 사람들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친분을 맺었으며,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감추고 사람들과 뒤섞여 살았다. 그러자 모는 기뻐하면서 "나를 완성하는 것은 벗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정말 옳구나."라고 말했다. 점점 모의 맑은 덕이 알려지면서, 임금님이 모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주었다. 그 뒤 모는 임금을 따라 환구에서 제사를 지냈다. 임금은 그 공으로 모를 중산후(中山侯)에 책봉하고, 식읍(食邑) 1만 호와 식실봉(食實封) 5천 호를 내려 주었으며, 국씨(麴氏)라는 성을 하사했다.
모의 5세손은 성왕(成王)을 도와 국가에 충성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태평 성대(음주가 성행)를 이룩했다. 그러나 강왕(康王)이 즉위한 뒤, 모의 5세손을 홀대하여 벼슬을 하지 못하도록 하엿다. 그 결과 모의 5세손의 후손들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없어졌고, 모두 민간에 숨어 살게 되었다.(금주령이 내림. 밀주)
(중략) - 가계(도입)
순(醇)의 재주와 도량이 크고 깊으며 넓기가 만경 창파(萬頃蒼波)와 같아, 맑게 하려 해도 맑아지지 않고 흔들어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풍류적인 성격은 한 시대를 기울게 했고, 사람들에게 기운을 매우 더해 주었다. 순이 섭법사(葉法師)에게 나아가 하루 종일 담론을 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을 모두 졸도하게 만들었다.(술에 취함) 그리하여 순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니, 사람들이 순을 국처사(麴處士)라 했다. 공경대부, 신선, 방사(方士)로부터 머슴, 목동, 오랑캐, 외국인까지 순의 향기와 이름을 마신 사람은 모두 순을 사모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매번 성대하게 모일 때마다 순이 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여 "국처사가 없으면 즐겁지 않다."하고 말했으니, 사람들이 순을 사랑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태위 산도가 물건을 감식하는 능력이 있었는데, 일찍이 순을 보고 "어떤 늙은 할미가 이렇게 훌륭한 아이를 낳았는가? 천하 사람들을 장차 잘못되게 할 사람은 바로 이 아이가 틀림없다."라고 했다.(술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워 질 것이다. 국순이 간신이 될 것을 암시하는 반어적 표현) 공부(公府, 임금님이 일하는 곳)에서 순을 불러 청주종사(靑州從事)(배꼽 밑까지 시원하게 넘어가는 좋은 술)를 임명했으나, 위가 막히기 때문에 담당할 수 있는 것이 못 되었다. 그리하여 평원독우(平原督郵)(명치 위에 머물러 숨이 막히는 나쁜 술)로 벼슬을 고쳤다. 순이 오래 있다가 한탄하기를, "내가 닷 되의 쌀 때문에 허리를 굽혀 시골의 어린아이에게 향하지 않을 것이며, 마땅히 순 단지와 도마 사이에 서서 담론할 뿐이다."라고 했다.(도연명이 평택 현령으로 있을 때 사찰 나온 관리에게 절할 수 없다며 '귀거래사'를 쓰고 사직한 한 일을 인용) 그때 관상을 잘 보는 어떤 사람이 순에게 "그대는 붉은 기운이 얼굴에 있으니 뒤에 반드시 귀하게 되어 천종록(千鍾祿)을 누릴 것이다. 마땅히 기다려 좋은 값에 팔라."라고 말했다.
진(陣)나라 후주(候主) 때에 좋은 집의 자식들을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으로 임명했다. 당시 임금이 순의 사람됨을 남다르게 여겨, 장차 순을 크게 쓸 뜻이 있었다. 그리하여 금으로 사발을 덮어 순을 선발해 광록대부(光祿大夫) 예빈경(禮賓卿)에 임명하고 작(爵)을 올려 공(公)으로 삼았다. 무릇 임금과 신하들이 회의를 할 때마다, 임금이 반드시 순으로 하여금 그것을 짐작하도록 했다. 순이 나아가고 물러나고 응대하는 것이 조용히 뜻에 맞으니, 임금이 순의 의견을 널리 수용하면서, "경이 말하는 것은 모두 곧고 맑아, 내 마음을 열어 주고 내 마음을 풍부하게 해 주는 구려."하고 했다. 순이 권력을 잡은 뒤 어진 사람과 사귀고 손님을 접대하고 늙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었으며, 귀신에게 제사 지내고 종묘에 제사 지낼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임금이 저녁에 연회를 베풀면서 순과 궁인(宮人)들만 참석하게 하고, 비록 가까운 신하라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이로부터 임금이 주사에 빠지고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그러자 순은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법을 아는 선비들이 순을 원수처럼 미워했지만, 임금이 매번 순을 보호했다.(임금이 술에 빠져 국정에 관심이 없다. 임금의 사리분별을 막는 국순(간신의 무리)) 순이 세금을 거두는 것을 좋아하고 재산을 모으는 데 힘을 쓰니, 당시의 여론들이 순을 비천하다고 했다. 임금이 순에게 "그대는 어떤 버릇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순은 "옛날에 두예(杜預)는 '좌전(左傳)'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었고, 왕제(王濟)는 말[馬]에 몰두하는 버릇이 있었으며, 저는 돈에 몰두하는 버릇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임금이 크게 웃으면서 순을 더욱 마음에 두었다.
일찍이 임금의 면전에서 보고를 했는데, 순은 평소에 입내가 있었다. 임금이 그것을 싫어해 순에게 "그대는 나이가 많고 기운이 고갈되어 나의 쓰임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라고 했다. 그러자 순은 관(冠)을 벗고 사죄하기를,(떠날 시기를 놓쳐 쫓겨나는 상황을 풍자) "제가 받은 관직을 사양하지 않으면 임금님을 속이게 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관직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셔서 제가 만족한 상태에서 그만둘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임금이 좌우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순을 부축해서 나가도록 했다. 순은 집으로 돌아온 뒤, 갑자기 병이 생겨서 그날 저녁에 죽었다.
순은 아들은 없었고, 친척 동생인 청(淸)이 당나라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내공봉(內供奉)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의 자손이 중국에서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 -행적(전개)
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글쓴이가 대상에 대해 논평하는 가전체의 전형적인 마무리 방식) "국씨의 선조는 백성들에게 공이 있었고, 청렴결백을 자손들에게 남겼다. 예를들어 창은 주나라에서 아름다운 덕을 하늘에 이르도록 했으니, 할아버지의 풍도(백성을 먹여살렸던 국순의 90대조인 모(牟))가 있었다. 그러나 순은 괄병의 지혜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금 그릇의 선거에 뽑혀(나라에 중용됨) 술 단지와 도마에 서서 담론하면서도, 임금에게 옳은 말을 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잘못된 것을 폐지하도록 하지도 않았으니(부정적), 그로 인해 왕실이 혼란해지고 엎어져도 붙잡지 못하여 마침내 천하의 웃음거리를 만들었다. 거원(巨源)의 말이 정말 믿을 만하구나." -평결(비판)
-임춘, 국순전(麴醇傳)
가전, 사물 의인화, 우의
*안거 : 노약자나 부녀자가 앉아서 타고 갈 수 있게 만든 수레
*섭법사 : 중국 당나라 때의 도사. 도술로 술독을 사람으로 변하게 한 뒤 같이 술을 마셨다고 함
*산도 : 중국 진나라 때의 학자·정치가,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으로 자(字)는 거원(巨源)임
*청주종사 : 배꼽 밑까지 시원하게 넘어가는 좋은 술. '높은 벼슬'을 뜻함
*평원독우 : 명치 위에 머물러 숨이 막히는 좋지 않은 술. '낮은 별슬'을 뜻함
*작 :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제사 때 쓰던 술잔
*창 : 제사의 강신(降神)에 사용하는 술
*국순 : 술의 의인화. ‘국’은 누룩
*모 : 보리의 의인화
핵심 정리
• 갈래 : 전(傳), 가전(假傳), 고전수필(산문문학)
• 시대 : 고려 후기(고려 고종)
• 형식 : 가전체
• 구성 : 일대기적·순차적·전기적(傳記的) 구성
• 성격 : 풍자적, 우의적, 교훈적
• 표현 : 의인법
• 제재 : 술(누룩)
• 구성 : 도입 - 전개 - 논평의 3단 구성 (가계-행적-평결(비판))
- 도입 - 국순의 가계(家系) 소개
- 전개 - 국순의 성품과 정계 진출, 임금의 총애와 국순의 전횡(專橫), 국순의 은퇴와 죽음
- 논평 - 국순의 생애에 대한 사관의 평가
• 특징
-술을 의인화 하여 표현(가전체)
-계세징인(戒世懲人)의 교훈성이 강한 작품
-술의 부정적 측면을 풍자하고 있다
-전(傳)의 형식으로 인물의 일대기를 서술하고 있다.
*세상 사람을 경계하고 징계한다.
• 의의
-현재 전하는 가전체 작품의 효시가 된다.
-같은 술을 의인화한 이규보의 ‘국선생전’에 영향을 주었다.
• 주제 : 인간이 술을 애증하다 타락, 패망함을 풍자함. 간사한 벼슬아치를 풍자, 위국충절(爲國忠節)의 교훈
• (열)전 : 역사서에 들어갈 만한 인물을 기록한 글
• 가전(가정), 사전(개인), 탁전(자서전-박문지사전, 예산은자전), 기전
• 출전 : 동문선(東文選)
작가 임춘(林椿, 생몰년 미상)
고려 인종 때의 문인이다. 예천 임씨(禮川林氏)의 시조이며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이다.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의 난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이른바 강좌칠현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과 당시(唐詩)에 뛰어났던 그의 유고(遺稿)는 이인로가 《서하선생집》으로 편찬하였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그의 시문이 기록되어 있다. 두 편의 가전체(假傳體) 소설이 전하는데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이다.
예전박물관 이달의 인물 '임춘' 관련글
고려 건국공신의 후예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할아버지 임중간(林仲幹), 상서(尙書)를 지낸 아버지 임광비(林光庇), 한림원학사를 지낸 큰아버지 임종비(林宗庇) 등 그의 집안은 고려전기의 명망있는 집안이었다.
임춘이 태어나고 죽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무신정변(武臣政變)이 일어난 의종(毅宗, 1146~1170) 초에 태어나서 무신집권기였던 명종(明宗, 1170~1197) 때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춘은 무신정변 이전부터 상당한 명성을 얻었고,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세 번의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십대에 문음(門蔭; 조상(祖上)의 음덕(陰德), 또는 그 덕으로 벼슬하는 것)으로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지만,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거절했다.
무신정변이 일어나 온 집안이 화를 당하게 되자, 목숨을 부지하고자 먼 시골로 도피하여 빈곤과 유랑의 삶을 이어나갔다. 그는 문반에 대한 탄압을 피해 개경으로 갔지만, 가진 것이 없어 5년간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김보당(金甫當, ?~1173)이 난을 일으켜, 홀몸으로 개경을 벗어나 영남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영남지방에서 7년간의 떠돌이생활을 마치고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공음전(功蔭田; 고려시대에 공신과 오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공을 따져 지급하던 토지)까지 병사들에게 빼앗기고 병든 아내와 과부가 된 누이만이 남아있었다. 힘든 생활 중에서도 과거시험을 준비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의와 빈곤 속에 방황하다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임춘은 젊어서 학문과 문학으로 명성이 높았고, 남다른 자부심과 기상을 지녔지만 문신 수난의 시대상황에서 참담하게 살아가다 요절하였다. 와도헌(臥陶軒) 이인로(李仁老, 1152 ~ 1220), 복양(濮陽) 오세재(吳世才, 1133~?), 조통(趙通, 생몰년 미상), 황보항(皇甫抗, 생몰년 미상), 함순(咸淳, 생몰년 미상), 이담지(李湛之, 생몰년 미상)와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1이라 불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가전체소설인 『국순전(麴醇傳)』 · 『공방전(孔方傳)』이 있으며, 문집인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은 이인로에 의하여 6권으로 편찬되었다.
임춘은 예천의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다.
-출 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진영·안영훈 譯註(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서하선생임춘시집(西河先生林椿詩集)』, 민속원, 1998
진성규 譯註, 『서하집(西河集)』, 대진사, 1999
여운필, 『임춘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 韓國漢詩硏究, 1996 - 작성자 : 학예연구원 오주한
이해와 감상
• 국순의 양면성 = 인간의 양면성
- 긍정적 측면 : 도량이 크며 남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재간이 있어 위 아래로 흠모를 받음.
- 부정적 측면 : 벼슬길에 올라 임금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돈을 거두어들임.
• 비탄을 받다가 결국 비참하게 죽는다.
- 신하된 자로 자기의 분수를 지키면 왕의 신임을 얻어 필요한 인물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비난의 대상이 된다.
• 작품 해설
술을 의인화 하여 술에 탐닉하다가 패망함을 풍자한 가전체 문학의 효시이다. 고려 고종 때 임춘이 지은 작품으로서, 가전체 작품이 모두 그렇듯이 이 작품도 교훈성이 강하고 세상을 경계하고 사람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술의 내력과 성쇠를 통하여 술에 빠져 향락만을 일삼는 문신들과 방탕한 무리들을 풍자하고 요사스런 간신배들을 엄준하게 꾸짖고 있다. 이와 같은 가전체는 ‘전기’의 형식과 허구적 성격으로 후대 소설 형성의 모태가 되었다. [Tino's국어이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전(傳) : 인물의 생애나 사적(事績)을 다룬 글, 사관(史官)이 기록한 역사적 인물의 공식적 전기(傳記)인 사전(史傳)을 가리키는 말로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의 열전(列傳)에서 유래
• 사전(私傳) : 개인적으로 기록한 인물의 전기를 다룬 비공식적인 글, 후대로 오면서 문인이나 학자들이 사전(史傳)의 형식을 본떠 그들의 문집이나 글에서 실존 인물에 주목하여 입전(立傳)*함, 사관이 기록한 역사적 기록만 인정하다가 인물의 전기까지 확장
* 입전: ‘전’에서 한 인물의 생애를 서술하는 것.
• 사전의 종류
-가전(假傳) : 사물을 의인화하여 인간이 추구해야 할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는 글
-탁전(託傳) : 자신의 행적이나 인생관을 가상 인물에 의탁하여 서술해 스스로 평가하는 글
-인물전(人物傳) : 실제 인물이나 허구적으로 창조된 가상 인물의 행적을 타인이 평가한 글
'가전'과 '탁전'은 주로 고려 중기 이후에 창작, 인물전은 주로 조선 시대에 창작되었다. 사전(私傳) 중 대표적인 것이 인물전인데, 조선 전기 인물전의 입전 대상은 당대 사회가 지키고자 했던 이념과 규범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역사적으로 기릴 만한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즉 조선 전기 인물전은 작품을 통해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을 겪으면서 지배 계층이나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상업 자본이 형성되면서 중인이나 평민들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되는 변화 속에서 인물전의 성격도 크게 바뀌었다.
조선 전기 인물전은 주로 사대부가 창작했는데, 이와 달리 조선 후기 인물전의 창작에는 사대부는 물론 중인 계층이 대거 참여했다. 이렇게 작가의 폭이 넓어지자 작가가 역사나 역사적 인물을 서술한다는 의식은 희미해지고 인물전도 역사서와의 관련성이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조선 후기 인물전은 조선 전기와는 달리 역사적 인물의 선행과 미담보다는 당대의 시정(市井) 공간에서 직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인물들의 다양하고 특이한 삶에 주목하여 사실보다 흥미를 추구했다. 그래서 작가들은 입전 인물의 삶의 진면목을 생동감 있게 나타내기 위해 사실을 윤색하거나 설화적 요소를 수용하고 나중에는 아예 허구적 인물까지 등장시키는 수법을 보여 주었다.
대체로 전은 인물의 가계나 신분 사항을 기록하는 인정 기술(人定記述), 인물의 삶의 자취를 보여 주는 행적(行績), 작가가 인물의 삶에 대해 논평하는 논찬(論贊)의 3단계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인물전은 이러한 구성을 준수하면서도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작가가 이전 시기와 다른 새로운 인물을 포착하여 입전하면서 인정 기술 부분을 약화하거나, 인물의 행적을 단순하게 나열하지 않고 인물의 행동 또는 사건의 장면을 소설처럼 구체적으로 재현하거나, 논찬을 작품의 앞에 두거나 앞뒤 모두에 두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조선 후기 인물전은 이전과 다른 문체의 특징을 보여 준다. 사전(史傳)이나 조선 전기의 인물전은 문체가 엄숙하고 장중한 경우가 많은 데 반해, 조선 후기 인물전은 기존의 문체를 포함하면서도 경쾌하고 발랄한 문체, 풍자적인 문체를 보여 준다. 이는 작가의 문학적 취향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서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이와 같은 특성들을 정리하면, 조선 후기 인물전은 다양한 계층의 작가들이 인물들의 주체적인 삶을 포착하여 당대의 사람들에게 내재되어 있던 새로운 의식(意識)을 부각하려 한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의 이면에 묻힌 사람들의 삶을 끌어내어 문학에 부활시킴으로써 당대의 실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시도하고 획일적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비판 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춘의 '국순전'과 이규보의 '국선생전'
이규보의 「국선생전」은 임춘의 「국순전」과 함께 술(누룩)을 의인화하여 교화를 목적으로 쓰여진 가전(假傳)문학이지만 주제는 다르다. 「국순전」은 주인공인 국순이 세상에서 귀하게 대접받고, 방탕한 군주에게 크게 등용되었다가 나라를 어지럽혀서 내침을 당하고, 분한 나머지 병들어 죽는다는 내용이다. 「국선생전」의 국성은 일시적인 시련을 견딜 줄 알아서 성품이 어질고 덕과 충성이 지극한 긍정적 인물로 서술되었다.
「국선생전」은 「국순전」의 영향을 받아 창작되었으나, 「국순전」이 향락만을 일삼는 요사한 벼슬아치를 풍자한 반면, 「국선생전」은 위국충절의 대표적 인물을 등장시켜 사회적 교화를 강조하였다. 이 작품에 대한 작자 자신의 사평(史評)을 보면, 구체적인 작의(作意)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직접 서막의 이름을 인용하였다는 면에서 『태평광기』의 서막설화에 영향을 입은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으며, 우의적 수법면에서는 임제의 「수성지」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ttime.co.kr]
사전문
- 사전문(史傳文)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의 행적을 서술하는 문체를 말한다. 사전문에 속하는 문체로는 각종 역사류(歷史類) 산문을 비롯하여 전(傳), 행장(行狀) 등이 있다.
‘역사류 산문’은 『춘추(春秋)』, 『자치통감(資治通鑑)』,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과 같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사건을 서술하는 편년체(編年體) 역사서,
『사기(史記)』, 『삼국사기(三國史記)』 등과 같이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등과 같이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역사서 등을 말한다.
‘전(傳)’은 대개 제왕(帝王)의 사적을 기록하는 본기(本紀), 제후(諸侯)의 사적을 기록하는 세가(世家), 제왕과 제후를 제외한 개별적인 역사 인물의 행적을 기록하는 열전(列傳) 등으로 구성되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의 열전(列傳)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사관(史官)이 지은 열전뿐만 아니라 사관이 아닌 일반 문인이 지은 개별적인 전을 아울러 가리키는 것이다. 일반 문인이 지은 개별적인 전 중에는 사관이 지은 열전과 달리 죽은 사람이 아닌 당대에 살아 있는 사람, 역사적인 인물이 아닌 하층의 보통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들도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유종원(柳宗元)의 「동구기전(童區寄傳)」, 이옥(李鈺)의 「장복선전(張福先傳)」 등이 있다.
또, 전(傳)의 형식을 빌린 자전(自傳), 탁전(托傳), 가전(假傳) 등도 이 ‘전(傳)’에 포함시켜 다룰 수 있다.
‘자전(自傳)’은 작가가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 전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도연명(陶淵明)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이규보(李奎報)의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 등이 있다.
‘탁전(托傳)’은 가설적(假設的)인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전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유종원의 「종수곽탁타전(種樹郭槖駝傳)」, 성간(成侃)의 「용부전(慵夫傳)」 등이 있다.
‘가전(假傳)’은 사물의 행적을 의인화(擬人化)하여 기록한 전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한유의 「모영전(毛潁傳)」, 임춘(林椿)의 「국순전(麴醇傳)」 등이 있다.
‘행장(行狀)’은 죽은 이의 세계(世系), 관향(貫鄕), 성명, 자호(字號), 생졸 연월, 관적이나 행적 등을 기록하여 예관(禮官)이 고인(故人)의 시호(諡號)를 제정하거나 사관이 사서(史書)를 편찬하는데, 또는 기타 신도비(神道碑)나 묘지명(墓誌銘) 등과 같은 고인을 위한 글을 짓는 데 참고하도록 자료로 제공되는 글인데, 그 자체가 독립된 하나의 문체로서 통행되기도 하였다. 행장이란 용어 대신에 장(狀), 행록(行錄), 행술(行述), 행략(行略), 사략(事略) 등의 용어가 제목으로 달리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한유의 「증태위동공행장(贈太尉董公行狀)」, 유종원의 「단태위일사장(段太尉逸事狀)」 등이 있다.
이외에도 사전문에 속하는 문체로는 또한 연보(年譜), 실기(實記) 등 여러 가지가 있다.
- 2007 개정 교육과정 한문 Ⅱ - 3. 내용: 나. 영역별 내용[Ⅱ이해⑶] / 사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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