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전문

김동리 '까치소리' 전문

열공햐 2021. 1. 1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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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소리

김동리

 

  단골 서점에서 신간을 뒤적이다 『나의 생명을 물려 다오』하는 얄팍한 책자에 눈길이 멎었다. ‘살인자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생명을 물려준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나는 무심코 그 책자를 집어 들어 첫장을 펼쳐 보았다. ‘책머리에’라는 서문에 해당하는 글을 몇 줄 읽다가 나도 어릴 때는 위대한 작가를 꿈꾸었지만, 전쟁은 나에게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어 주었다는 말에 왠지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비슷한 말은 전에도 물론 얼마든지 여러 번 들어 왔던 터이다. 그런데도 이날 나는 왜 그 말에 유독 그렇게 가슴이 뭉클해졌는지, 그것은 나도 잘 모를 일이다. 위대한 작가를 꿈꾸었다는 말에 느닷없는 공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나는 그 책을 사왔다. 그리하여 그날 밤, 그야말로 단숨에 독파를 한 셈이다. 그만큼 나에게는 감동적이며, 생각게 하는 바가 많았다.  특히 그 문장에 있어 자기 말마따나 위대한 작가를 꿈꾸던 사람의 솜씨라서 그런지 문화적으로 빛나는 데가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다음에 그 수기의 내용을 소개하려 하거나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문학적 표현을 살리기 위하여 본문을 그대로 많이 옮기는 쪽으로 주력했음을 일러둔다. 특히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소위 그의 문학적 표현으로서 그의 본고장인 동시, 사건의 무대가 된 마을의 전경을 이야기한 첫머리를 거의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을 한복판에 우물이 있고, 우물 앞뒤엔 늙은 회나무 두 그루가 거인같은 두 팔을 치켜든 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몇 아름씩이나 될지 모르는 굵고 울퉁불퉁한 밑둥은 동굴처럼 속이 뚫린 채, 항용 천 년으로 헤아려지는 까마득한 세월을 새까만 침묵으로 하나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밑둥치에 견주어 가지와 잎새는 쓸쓸했다. 둘로 벌어진 큰 가지의 하나는 중둥이가 부러진 채, 그 부러진 언저리엔 새로 돋은 곁가지가 떨기를 이루었으나 그것도 죽죽 위로 벋어 오른 것이 아니라 아래로 한두 대가 잎을 달고 드리워진 것이 고작이었다.

  둘 중에서 부러지지 않은 높은 가지는 거인의 어깨 위에 나부끼는 깃발과도 같이 무수한 잔가지와 잎새들을 하늘 높이 펼쳤는데, 까치들은 여기만 둥지를 치고 있었다.

  앞나무에 둘, 뒷나무에 하나, 까치 둥지는 셋이 쳐져 있었으나 까치들이 모두 몇 마리나 그 속에서 살고 있는지는 아무도 똑똑히 몰랐다. 언제부터 둥지를 치기 시작했는지도 역시 안다는 사람은 없었다.

  나무와 함께 대체로 어느 까마득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이거니 믿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오고, 저녁 까치가 울면 초상이 나고…… 한다는 것도, 언제부터 전해 오는 말인지, 누구 하나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 까치가 유난히 까작거린 날엔 손님이 잦고, 저녁 까치가 꺼적거리면 초상이 잘 나는 것이라고 그들은 은근히 믿고 있는 편이기도 했다.

  그런대로 까치는 아침 저녁 울고, 또, 다른 때도 울었다.

  까치가 울 때마다 기침을 터뜨리는 어머니는 아주 흑흑 하며 몇 번이나 까무러치다시피 하다 겨우 숨을 돌이키면 으레 봉수(奉守)야 하고, 나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것도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여 다오’를 붙였다.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쿨룩…… 이렇게 쿨룩은 연달아 네 번, 네 번, 두 번, 한 번, 한 번, 여섯 번, 그리고 또다시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두 번이고 여섯 번이고, 종잡을 수 없이 얼마든지 짓이기듯 겹쳐지고, 되풀이되곤 했다. 그사이에 물론, 오오, 아이구, 끙 하는 따위 신음 소리와 외침 소리를 간혹 섞기도 하지만, 얼마든지 ‘쿨룩’이 계속되다가는 아주 까무러치는 고비를 몇 차례나 겪고서야 겨우 아이구, 봉수야, 한다고나, 날 죽여 다오를 터뜨릴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기침병(천만)은 내가 군대에 가기 일년 남짓 전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이때는 이미 삼 년도 넘은 고질이었던 것이다.

  내 누이동생 옥란(玉蘭)의 말을 들으면, 내가 군대에 들어간 바로 그 이튿날부터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침 아침 까치가 까작까작 울자, 어머니는 갑자기 옥란을 보고,

  “옥란아, 네 오빠가 올라는가 부다.”

하더라는 것이다.

  “엄마도, 엊그제 군대 간 오빠가 어떻게 벌써 와요?”

하니까, 

  “그렇지만 까치가 울잖았냐?”

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처음엔 아침 까치가 울 때마다 얘가 혹시 돌아오지 않나 하고 야릇한 신경을 쓰던 어머니는 그렇게 한 반년쯤 지난 뒤부터, 그것(야릇한 신경을 쓰는 일)이 기침으로 번져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반년쯤 지난 뒤부터’라고 했지만, 그 시기는 물론 확실치 않다. 옥란의 말을 들으면 그전에도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몇 달이 지나도록 편지도 한 장 없는 채 아침 까치는 곧장 울고 하니까,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눈길엔 야릇한 광채가 어리곤 하더니, 그것이 차츰 기침으로 번져지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첨에는 가끔 그렇더니, 날이 갈수록 점점더 심해져서 한 일 년 남짓 되니까, 거의 예외 없이 회나무에서 까작까작하기만 하면 방에서는 쿨룩쿨룩이 터뜨려지게 마련이었다는 것이다(처음은 아침까치 소리에 시작되었으나 나중은 때의 아랑곳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런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들을 몹시 기다리는 병(천만)든 어머니가 아침 까치가 울 때마다 손님 아닌 아들이 온다는 기대를 걸어 보다간 실망이 거듭되자 기침을 터뜨리고(그렇지 않아도 자칫하면 터뜨려지게 마련인), 그것이 차츰 습관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얘길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해서 터뜨려진 질기고 모진 기침 끝에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날 죽여 다오’를 덧붙였대서 그 또한 이해하기 힘든 일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전에도, 그렇게 까무러칠 듯이 짓이겨지는 모진 기침 끝엔 ‘오오, 하느님!’ ‘사람 살려 주!’ 따위를 부르짖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오오, 하느님!’ ‘사람 살려 주!’가 ‘아이구 봉수야!’ ‘날 죽여 다오!’로 바꿔졌을 뿐인 것이다. 살려 달란 말과 죽여 달란 말은 정반대라고 하겠지만 어머니의 경우엔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비슷한 말이라고 보는 편이 가까울 것이다. ‘죽여 다오’는 ‘살려 다오’보다 좀더 고통이 절망적으로 발전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군대에서 돌아와, 처음 얼마 동안은 어머니의 입에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견딜 수 없는 설움과 울분을 누를 길 없어 나도 모르게 사지를 부르르 떨곤 했었다.

  ‘아아, 오죽이나 숨이 답답하고 괴로우면 저러랴, 얼마나 지겹게 아들이 보고 싶고 외로웠으면 저러랴.’

  나는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측은하고 불쌍해서 그냥 목을 놓고 울고만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어머니를 치료해 드리거나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어떠한 힘도 재간도 없었다. 그럴수록 어머니가 겪는 무서운 고통은 오로지 나의 책임이거니 하는 생각만 절실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심경도 누구에게나 대체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나 자신마저 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이에 곁들여 생긴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나의 심경의 변화라고나 할까. 나는 어느덧 그러한 어머니를 죽여주고 싶은 충동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구, 봉수야, 날 죽여다오’ 하고 부르짖는 것은, ‘오오, 하느님, 사람 살려 주’하던 것의 역표현(逆表現)이라기 보다도 진한 표현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서도 말한 대로다. 나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러한 어머니에게 죽여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을까.

  그것도 어쩌다 한번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처음 한번 그런 일이 있고 나서는 그 뒤부터 줄곧 그렇게 돼버린 것이다. 까치가 까작 까작 까작 하면, 어머니는 쿨룩 쿨룩 쿨룩을 터뜨리는 것이요, 그와 동시 나의 눈에는 야릇한 광채가 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옥란의 말을 빌리면 옛날 어머니가 까치 소리와 함께 기침을 터뜨리려고 할 때, 그녀의 두 눈에 비치던 것과도 같은 야릇한 광채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목에 걸린 가래를 떼지 못하여 쿨룩 쿨룩 쿨룩을 수없이 거듭하다 아주 까무러치다시피 될 때마다 나는 그녀의 꺼풀뿐인 듯한 목을 눌러 주고 싶은 충동에 몸이 부르르 떨리곤 했다.

  그것은 처음 며칠 동안이 가장 강렬했던 것같이 기억된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면 내가 그것을 경험하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에서 이삼 일간이었다고 믿어진다. 나는 그 무서운 충동을 누르지 못하여 사흘째 되던 날은, 마침 곁에 있는 물사발을 들어 방바닥에 매어쳤고 나흘째 되던 날, 꺽꺽거리며 고꾸라지는 어머니를 향해 막 덤벼들려는 순간, 박에 있던 옥란이 낌새를 채고 들어와 내 머리 위에 엎으러짐으로써 제지되었고 닷새째 되던 날은, 마침 설거지를 하는 체하고 방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옥란이 까치 소리를 듣자 이내 방으로 뛰어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겨우 단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역시 어머니의 까무러치는 꼴을 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이성을 잃은 듯, 나와 어머니 사이를 가로막다시피 하고 있는 옥란을 힘껏 떼밀어서 어머니 위에다 넘어뜨리고는 발길로 방문을 냅다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던 것이다.

  그 며칠 동안이 가장 고비였던 모양으로 그 뒤부터는 어머니의 기침이 터뜨려지는 것을 보기만 하면 나는 그녀의 ‘봉수야, 날 죽여다오’를 기다리지 않고 미리(그때는 대개 옥란이 이미 나와 어머니 사이를 가로막듯 하고 나타나 있게 마련이기도 했지만)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와 버릴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미리 자리를 늘 피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나 그렇지 못할 경우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었다. 여기서 먼저 우리집 구조를 한 마디 소개하자면, 부끄러운 얘기지만, 세 평 남짓 되는 (그러니까 꽤 넓은 편이긴 한) 방 하나에 부엌과 헛간이 양쪽으로 각각 붙어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우리 세 식구는 먹고 자고 하는 일에 방 하나를 같이 써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전날 술을 좀 과히 마셨다거나 몸이 개운치 못하다거나 할 때에도 내가 과연 그렇게 까치 소리를 신호로 얼른 자리를 뜰 수 있게 될진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다 또 한 가지 해괴한 일은 어머니의 기침이 멎어짐과 동시 나의 흥분이 갈앉으면 나는 어느덧 조금 전에 내가 겪은 그 무서운 충동에 대하여 나 자신이 반신반의를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나는 왜 그러한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었던가, 그것은 정말이었을까, 어쩌면 나의 환각(幻覺)이나 정신착란 같은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나에겐 이러한 의문이 치미는 것이다.

  그런대로 까치 소리와 어머니의 기침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대개 방문을 박차고 나오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문을 박차고 나온다고 해서 나의 흥분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느냐 하면 그렇지는 물론 않았다. 방문 밖에서, 어머니의 까무러치는 소리를 듣는 것이 방 안에서 직접 보는 것보다도 더 견딜 수없이 사지가 부르르 떨릴 때도 있었다. 다만 방 안에서처럼 눈앞에 어머니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당장 목을 누르려고 달려들 걱정만이 덜어질 뿐이었다.

  그 대신 검둥이(우리집 개 이름)를 까닭 없이 걷어찬다거나 울타리에 붙여 세워 둔 바지랑대를 분질러 놓는 일이 가끔 생겼다.

  어저께는 동네 안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떨어뜨려 깨었다. 그때 마침 술도 얼근히 돌아 있었고, 상대자에 대한 불쾌감도 곁들어 있긴 했지만, 의식적으로 술잔을 깨뜨릴 생각은 전혀 없었고, 또 그렇게 해서 좋을 계제도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까작까작하는 저녁 까치 소리가 들려 오자 갑자기 피가 머리로 확 올라가며 사지가 부르르 떨리더니, 손에 잡고 있던 잔을(술이 담긴 채)철꺽 떨어뜨려 버린 것이다. 아니 떨어뜨렸다기보다 메어쳤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루 위에 떨어진 하얀 사기잔이 아무리 막걸리를 하나 가득 담고 있었다고는 할망정 그렇게 가운데가 짝 갈라질 수 있었겠느냐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나 자신의 일에 대하여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지만 이것은 결코 발뺌이나 책임 회피를 위한 전제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선 나 자신이 어떻게 해서 어머니의 기침에 말려들게 되었는지 그 전후 경위를 있는 그대로 적어 보려고 한다. 여기서 미리 고백하거니와 나는 한 번도 어머니를 미워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돌아온 뒤, 날이 갈수록 어머니가 더 측은해지고 견딜 수 없이 불쌍해졌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봉수야, 날 죽여 다오'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그냥 고통을 못 이겨 울부짖는 넋두리만은 아니라고 차츰 깨닫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내가 죽고 없어야 옥란이도 시집을 가고 너도 색시를 데려 오지."

하는 어머니의(가끔 토해 놓는) 넋두리가 어쩌면 아주 언턱거리 없는 하소연만은 아니라고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옥란의 말을 들으면(내가 군에 가고 없을 때) 위뜸의 장생원 댁에서 옥란을 며느리로 달라는 것을 옥란이 자신이 내세운 '오빠가 군에서 돌아올 때까지는'이라는 이유로 거절 아닌 거절을 한 셈이지만, 누구 하나 돌볼 이도 없는 병든 어머니를 혼자

두고 어떻게 시집갈 생각인들 낼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 그녀의 실토였다. 뿐만 아니라 정순이가 나(봉수)를 기다리지 않고 상호(相浩)와 결혼해 버린 것도, 아무리 기다려 봐야 너한테 돌아올 거라고는 주야로 기침만 콜록거리고 누워 있는 천만쟁이(어머니) 하나뿐이라는 그의 꼬임수에 넘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호는 내가 이미 전사를 했다면서, 그 증거로 전사통지서라는 것까지(가짜로 꾸며서) 정순에게 내어 보이며 결혼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순이는 상호의 꼬임수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바로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주야로 기침만 콜록 거리고 누워 있는 천만장이'보다도 나의 전사통지서 때문이라는 편이 옳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정순이를 놓친 원인이 반드시 어머니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나도 어머니의 넋두리를 곧이곧대로 듣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그 '알 수 없는' 야릇한 흥분에 정순이와, 그리고 상호가, 전혀 관련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하여간 나는 여기서 그 경위를 처음부터 얘기할 차례가 된 것 같다. 내가 군에서 (명예 제대를 하고)돌아왔을 때-그렇다, 나는 내가 첨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부터 얘기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우리 동네에 들어서면서부터의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 내가 우리 동네 어귀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내 눈에 비친 것은 저 두 그루의 늙은 회나무였다. 저 늙은 회나무를 바라보자 비로소 나는 내가 고향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던 것이다. 저 볼 모양도 없는 시커먼 늙은 두 그루의 회나무, 그것이 왜 그렇게도 그리웠을까, 그것이 어머니와 옥란이와 정순이들에 대한 기억을 곁들이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 그것이 고향이 가진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오오, 늙은 회나무여, 내 마을이여, 우리 어머니와 옥란이와 그리고 정순이도 잘 있느냐-나는 회나무를 바라보며 느닷없는 감회에 잠긴 채 시인 같은 영탄을 맘속으로 외치며 동네 가운데로 들어섰던 것이다.

  나는 지금 '어머니와 옥란이와 그리고 정순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정순이와 어머니와 옥란이라고 차례를 바꾸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그렇게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순이에 대한 그리움 하나 때문이라고 해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병들어 누워 있는 어머니께 대한 불효자요, 가련한 누이동생에 대한 배신자같이도 들릴지 모르지만, 나로 하여금 그 마련된 죽음에서 탈출케 한 것은 정순이라는 사실을 나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마련된 죽음'과 거기서의 '탈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하여간 나는, 나를 구세주와도 같이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와 누이동생들 앞에 나타났다.

  내가 동네 복판의 회나무 밑의 우물가로 돌아왔을 때, 우물 앞에서 보리쌀을 씻고 있던 옥란이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 처음 한참 동안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멀거니 나를 바라보고 있더니 다음 순간 그녀는 부끄럼도 잊은 듯한 큰 소리로 '오빠'를 부르며 달려와 내 품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껴 울었던 것이다. 일 년 반 동안에 완전히 처녀가 된, 그리고 놀랄 만큼 아름다워진 그녀를 나는 거의 무감각한 사람처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어쩌면 이다지도 깨끗한 처녀가 거지꼴이 완연한 초라한 군복 차림의 나를 조그마한 거리낌도 꾸밈도 없이 마구 쏟아지는 눈물로써 이렇게 반겨 준단 말인가. 동기. 아, 그렇다. 그녀는 나의 누이동생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만큼 옥란의 행복을 빌어 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켜 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나는 옥란을 따라 집 안에 들어섰다.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는 뜰! 처음부터 무슨 곡식 가마라도 포개져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때같이 우리집의 가난에 오한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엄마, 오빠야"

  옥란은 자랑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놀란 듯이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주름살과 꺼풀뿐인 얼굴은 두 눈만 살아 있는 듯, 야릇한 광채를 내며 나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기침이 터뜨려질 것을 저어하는 듯, 입은 반쯤 열린 채 말도 없이, 한쪽 손을 가슴에 갖다 대고 있었다.

  "어머니."

  나는 군대 백(카키빛의)을 방구석에 밀쳐 둔 채,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냐든가, 기침병이 좀 어떠냐든가, 하는 따위 인사말도 나는 물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눈에 뻔히 보이지 않느냐 말이다. 병과 가난과 고독과 절망에 지질린 몰골.

  "구,군대선 어땠냐? 배가 많이 고, 곯잖았냐?"

  어머니는 가래가 걸려서 거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묻는 말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성이 난 듯한 뚱한 얼굴로 맞은편 바람벽만 멀거니 건너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단 말이냐. 어머니가 낳아서 길러 준 운전한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왔단 말이냐. 그녀의 병을 치료할 만한 돈이라도 품에 넣고 왔단 말이냐. 하다못해 옥란이를 잠깐 기쁜게 해줄 만한 무색 고무신이나마 한 켤레 넣고 왔단 말인가. 그녀들은 모르는 것이다. 내가 그녀들을 위해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정순이를 위해서, 아니, 정순이와 나의 사랑을 위해서, 군대를 속이고, 국가를 배신하고, 나의 목숨을 소매치기해서 돌아왔다는 것을 그녀들이 알 리 없는 것이다.'

  "엄마, 또 기침 날라, 자리에 누우셔요."

  옥란이는 어머니의 상반신을 안다시피 하여 자리에 눕혔다.

  "오빠도 오느라고 고단할 텐데 잠깐 누워요. 내 곧 밥 지어 올게."

  옥란은 나를 돌아다보며 이렇게 말할 때도, 방구석에 밀쳐 둔 군대백엔 굳이 외면하는 듯했다. 그것은 역시 너무 지나친 기대를 그 백속에 걸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에게는 헤아려졌다.

  나는 백을 끄르기로 했다. 옥란이로 하여금 너무 긴 시간, 거기다 기대를 걸어 두게 하기가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내가 쓰던 담요와 군복."

  나는 백을 열고, 담요와 헌 군복을 끄집어내었다. 그리고는 내복도 한 벌, 그러자, 백은 이내 배가 홀쭉해져 버렸다. 남은 것은 레이션 상자에서 얻어진(남겨 두었던) 초콜릿 두 갑, 껌 두 매듬, 건빵과 통조림이 두세 개씩, 그리고 병원에서 나올 때, 동료에게 선사받은 카키빛 장갑(미군용)이 한 켤레였다. 나는 이런 것을 방바닥 위에다 쏟아놓았다.

  그러나 백 속에는 아직도 한 가지 남아 있었다. 그것은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나는 그것만은 옥란에게도 끌러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 든 것은 여자용 빨강빛 스웨터요, 내가 군색한 여비 중에서 떼내어 손수 산 것은 이것 하나뿐이란 말도 물론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나는 방바닥에 쏟아 놓았던 물건 중에서도 초콜릿 한 갑과 껌 한 매듬을 도로 백 속에 집어넣으며,

  "이것뿐야. 통조림은 따서 어머니께 드리고 너도 먹어 봐. 그리고 이것 모두 너한테 소용되는 거면 다 가져."

했다.

  "……."

  옥란은 처음부터 말없이 내 얼굴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원망하는 눈이기보다 무엇에 겁을 집어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없지만...... 넌 나를 이해해 주겠지?"

  "아냐, 오빠, 난 괜찮지만......"

  옥란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끝도 맺지 않은 채 방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역시 토라진 거로구나. 정순이한테만 무언지 굉장히 좋은 걸 가져 왔다고 불평이겠지. 그래 난 괜찮지만 어머니까지 무시하고 정순이만 생각하기냐 하는 속이겠지.'

  나는 방바닥에 쏟아 놓은 물건들을 어머니 앞으로 밀쳐 두고, 접어진 담요(백에서 끄집어 낸)를 베개하여 허리를 펴고 누웠다. 그녀가 섭섭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만, 나로서도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점심 겸 저녁으로, 해가 설핏할 때 '식사'를 마치자 나는 종이로 싼 것(스웨터)과 초콜릿을 양복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오빠, 잠깐."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던 옥란이 나를 불러 세웠다.

  "정순 언닌……."

  옥란은 이렇게 말을 시작해 놓고는 얼른 뒤를 잇지 못했다.

순산, 나는 어떤 불길한 예감이 확 들었다. 그것은 내가 집에 돌아온 지 꽤 여러 시간 되는 동안 그녀의 입에서 한 번도 정순이 얘기가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

  "결혼했어."

  "뭐? 뭐라고?"

  당장 상대자를 집어삼킬 듯한 나의 험악한 표정에, 옥란은 질린 듯 한참 동안 말문이 막힌 채 망설이고 있더니, 어차피 맞을 매라고 결심을 했는지,

  "숙이 오빠하고……."

  드디어 끝을 맺는다.

  "뭐? 숙이라고? 상호 말이냐?"

  "……"

  옥란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나의 얼굴을 똑바로 지켜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인다.

  "그렇지만 정순이 어떻게……."

  나는 무슨 말인지 나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리다 입을 닫쳐 버렸다.

옥란이 안타까운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숙이 오빠가 속였대, 오빠가 죽었다고……."

  "뭐? 내가 주, 죽었다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다짐해 물으면서도 일방, 아아, 그렇지, 그건 어쩌면 정말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속으로 자기 자신을 조롱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오빠가 전사를 했다고, 무슨 통지서래나 그런 것까지 갖다 뵈더래나."

  옥란도 이미 분을 참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순간, 나는 눈앞이 팽그르르 돌아감을 느꼈다. 그때 만약 상호가 내 앞에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당장에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졸라 죽였을 것이다. 다음 순간, 나는 어디로 누구를 찾아간다는 의식도 없이 삽짝 쪽으로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그러나 삽짝 앞 좁은 골목에서 큰 골목(회나무가 있는)으로 접어들자 나는 갑자기 발길을 우뚝 멈추고 섰다. 그와 거의 동시 누가 내 팔을 잡았다. 옥란이었다. 그녀는 나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빠, 들어가."

  그녀는 내 팔을 가볍게 끌었다.

  나는 흡사 넋나간 몸뚱어리뿐인 듯한 나 자신을 그녀에게 맡기다시피 하며 그녀가 끄는 대로 집을 향해 돌아섰다. 돌아서지 않으면 어쩐단 말인가. 내가 그녀를 뿌리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와 목적에서일까. 그렇다. 나에게는 그녀의 손길을 뿌리칠 수 있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었다. 내가 없어진 거와 마찬가지였다. '내'가 있었다면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동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일단 가련한 옥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옥란이 시키는 대로 방에 들어와 누웠다. 아랫목 쪽에는 어머니가, 윗목 쪽에는 내가, 이렇게 우리는 각각 벽을 향해 돌아누워 있었다. 나는 흡사 잠이나 청하는 사람처럼 눈까지 감고 있었지만, 물론 잠 같은 것이 올 리 만무했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짙어지고, 바람이 좀 불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마친 옥란이 물을 두어 번 길어 왔고, 나는 눈을 감고 벽을 향해 누운 채 이런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저녁 까치가 까작 까작 까작 까작 울어 왔다. 어머니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기침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나는 물론 그때만 해도 까치 소리는 까치 소리대로 회나무 위에서 나고 어머니의 기침은 기침대로 방 안에서 터뜨려졌을 뿐이요, 때를 같이(전후)한대서 양자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다고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그 길고도 모진 기침이 끝날 때가지 그냥 벽을 향해 누운 채, '오오, 하느님, 봉수야, 날 죽여 다오' 하는 소리가지 다 들은 뒤에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어머니의 등을 쓸어 준다거나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네 보지도 못한 채, 그냥 방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집 앞의 가죽나무 위엔 별까지 파랗게 돋아나 있었다. 내가 막 삽짝 밖을 나왔을 때였다. 담장 앞에서 다른 동무와 무엇을 소곤거리고 있던 옥란이 또 나를 불러 세웠다.

  "오빠, 어딜 가?"

  "……"

  나는 고개만 위로 꺼떡 젖혀 보였다.

그러자 옥란은 내 속을 알아채었는지 어쩐지,

  "얘가 영숙야."

하고 자기 앞에 서 있는 처녀를 턱으로 가리켰다.

  '영숙이가 누구더라?'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잠깐 스쳐 갔을 뿐, 나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냥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이와 거의 같은 순간에, 영숙이 나를 향해 몸을 돌리며 머리를 푹 수그려 공손스레 절을 하지 않는가. 날씬한 허리에 갸름한 얼굴에 옥란이보다도 두어 살 아래일 듯한 소녀였다.

  '쟤가 누구더라?'

  나는 또 한번 이런 생각을 하며, 역시 입은 열지도 않은 채 그냥 발길을 돌리려 하는데,

  "오빤 아직 면에서 안 돌아왔어요."

하는 소녀의 목소리였다.

  순간, 나는 이 소녀가 바로 상호의 누이동생이란 것을 깨달았다. 내가 군에 갈 때만 해도 나를 몹시 따르던 달걀같이 매끈하고 갸름하게 생긴 영숙이. 지금은 고등학교 이삼학년쯤 다니겠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소녀를 한참 바라보고 섰다가 역시 그냥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오빠, 영숙이한테 얘기해 줄 거 없어?"

  '그렇다, 달걀같이 뽀얗고 갸름하게 생긴 소녀, 그녀는 정순이나 옥란이를 그때부터 언니 언니하고 지냈지만, 그보다도 나를 덮어놓고 따르던, 상호네 식구답지 않던 애, 그리고 지금도, 내가 군에서 돌아왔단 말을 듣고 기쁨을 못 이겨 찾아왔겠지만, 그러나, 나는 무슨 말을 그녀에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냥 돌아서 버리려다,

  "오빠 들옴 나 좀 만나잔다고 전해 주겠어?"

  겨우 이렇게 인사땜을 했다.

  "그러잖아도 올 거예요."

  영숙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맑았다. 나는 '부엉뜸'으로 발길을 돌렸다 옥란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순이 친정 사람들의 얘기를 직접 한번 들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정순이네 친정 사람들이라고 하면 물론 그 어머니와 오빠다(아버지는 일찍이 죽고 없었다). 그리고 오빠래야 정순이와는 나이 차가 많아서 거의 아버지같이 보였다. 나와 정순이는 약혼한 사이와 같이 되어 있었지만(우리 고장에서는 약혼식이란 것이 거의 없이 바로 결혼식을 가지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언제나 윤이 아버지라고만 불렀다. 윤이 아버지는 이날도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으나 면구해서 그런지 정순이 말만은 입 밖에 내비치지도 않은 채, 전쟁 이야기만 느닷없이 물어 대었다. 나는 통 내키지 않는 얘기를 한두 마디씩 마지못해 대꾸하며 그가 따라 주는 막걸리를 두 잔째 들이켜고 나서,

  "근데 정순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이렇게 딱 잘라 물었다.

  "그러니까 말일세."

  그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대답이랍시고 이렇게 한마디 던져 놓고는,

  "자, 술이나 들게."

  내 잔에다 다시 막걸리를 따라 주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야 어디 술을 좋아하는가? 이런 거 한두 잔이면 고작이지. 그런 걸 자네 대접한다고 이게 벌써 몇 잔째야? 자, 어서 들게, 자넨 멀쩡한데 나 먼저 취하면 되겠나?"

  '정순이 일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데 웬 술 이야기가 이렇게 길단 말인가.'

나는 또 한번 같은 말을 되풀이해 물으려다 간신히 참고, 그 대신, 그가 따란 놓은 술잔을 들어 한숨에 내었다.. "자네야 동네다 다 아는 수재 아닌가? 지금이라도 서울만 가면 일등 대학에 돈 한푼 내지 않고 공부시켜 주는, 거 뭐라더라? 장학상이던가? 그거 돼서 집에다 도루 돈 부쳐 보내 가며 공부할 거 아닌가? 머리 좋고 인물 좋것다, 군수 하나쯤야 떼논 당상이지. 대통령이 부럽겠나 장관이 부럽겠나. 그까진 시골 처녀 하나가 문젠가? 자네 같은 사람한테 딸 안 주고 누구 주겠나, 응? 우리 정순이 같은 게 문젠가? 그보다 몇 곱절 으리으리한 서울 처녀들이 자네한테 시집오고 싶어서 목을 매달 건데…… 그렇잖나? 내 말이 틀렸는가?"

  나는 그의 느닷없이 지루하기만 한 말을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

  "그런데 정순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먼저와 같은 질문을 다시 한번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정순이는 상호한테 갔지. 갔어. 상호 같은 자야 정순이한테나 어울리지. 그렇잖나? 자네는 다르지. 자네야 그때부터 이 고을 어떤 처녀든지 골라잡을 만치 머리 좋고, 인물 좋고, 행실 착하고……유명한 사람이 아닌가?"

  "그게 아니잖아요?"

나는 상반신을 부르르 떨며 겨우 이렇게 항의를 했다. 내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다른 것을 깨달았는지 그도 이번엔 말을 그치고 나를 잠깐 바라보고 있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자네가 전사를 했다기에 그렇게 된 걸세. 지나간 일 가지고 자꾸 말하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참게, 자네가 이렇게 살아올 줄 알았으먼야…… 다 팔자라고 생각해 주게."

  "그렇지만 정순이가 그렇게 쉽사리 속아넘어가진 않았을 텐데……."

  "여부가 있나, 정순이야 끝까지 버텼지만 상호가 재주껏 했겠지. 나도 권했고…… 헐 수 있나? 하루바삐 잊어버리는 편이 차라리 날 줄 알았지. 저도 그렇게 알구 간 거고……."

  "알겠습니다."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윤이 아버지는 깜짝 놀란 듯이 따라 일어나며,

  "이 사람아, 그러지 말고 좀 앉게. 천천히 술이라도 들며 얘기라도 더 나두다 가세."

  나는 그의 간곡한 만류도 듣지 않고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상호는 출장을 핑계로, 내가 돌아온 지 일주일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직접 그의 집으로 찾아가면 출장을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나, 주막에 나가 알아보니, 면(사무소)에서는 만난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면(사무소)으로 찾아가서 그의 출장 여부를 알아보기도 난처한 점이 많았다.

  그러자 그가 출장을 간 것이 아니라, 면에는 출근하되 자기 집으로 돌아오질 않고 읍내에 있는 그의 고모 집에 묵고 있으면서 어쩌다 밤중에나 몰래 (집엘) 다녀가곤 한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그 무렵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하여 동구에 있는 주막에 늘 나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내가 주막 앞에 앉아 장기를 두고 있는데 저쪽에서 상호가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그것도 당장 그렇게 알아본 것이 아니고, 술꾼 하나가 저게 상호 아닌가 하고 귀띔을 해줘서 돌아다보니 바로 그였던 것이다).

  나는 장기를 놓고 길 가운데 나가 섰다. 그가 혹시 모른 체하고 자전거를 달려 주막 앞을 지나쳐 버리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나는 길 가운데 버텨 선 채 잠자코 손을 들었다.

그도 이날은 각오를 했는지 순순히 자전거에서 내리며,

  "아, 이거 누구야, 봉수 아닌가?"

  꽤나 반가운 듯이 큰 소리로 말을 건네며 내 손까지 덥석 잡았다.

  '나야. 봉수야.'

  나는 그러나 입 밖에 내어 대답하진 않았다.

  "언제 왔어?"

  '정말로 출장을 갔다 지금 돌아오는 길인가?'

  이것도 물론 입 밖에 내어 물은 것은 아니다.

  "하여간 반갑네. 자, 들어가지, 들어가 막걸리나 한잔 같이 드세."

  그는 자전거를 세우고 술청으로 올라서자 주인(주모)을 보고 술상을 부탁했다.

  나는 그의 대접을 받고 싶진 않았지만, 그런 건 아무려나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일단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보기로 했다.

  주막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에게 시선을 쏟았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따라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나 자신을 달래며, 흥분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자, 들게. 이렇게 보니 무어라고 할 말이 없네."

  상호는 나에게 술을 권하며 이렇게 말을 건넸다.

  '할 말이 없네'―이 말을 나는 어떻게 들어야 할까. 이것은 미안하단 말일까, 그렇지 않으면 뭐라고 말할 수도 없이 반갑단 뜻일까. 물론 반가울 리야 없겠지만, 옛 친구니까 반가운 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권하는 대로 잠자코 술잔을 들었다. 물론 맘속으로 좀 꺼림칙하긴 했으나 그것과는 전혀 별문제란 생각에서 인달 술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주로 어느 전선에서 싸웠는가, 중공군의 인해전술이란 실지로 어떤 것인가, 이북군의 사기는 어떤가, 식사 같은 건 들리는 말같이 비참하지 않던가, 미군들의 전의(戰意)는 어느 정도인가, 그들은 결국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그의 질문은 쉴 새없이 계속되었으나 나는 그저 글쎄, 아냐, 잘 모르겠어, 잊어버렸어, 그저 그렇지, 따위로 응수를 했을 뿐이다. 나는 그가 돈을 쓰고 징병을 기피했다고 이미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더불어 전쟁 얘기를 하기는 더구나 싫었던 것이다.

  그러는 중에서도 술잔은 부지런히 비워 냈다. 나도 그 동안 군에서 워낙 험하게 지냈기 때문에 막걸리쯤은 여간 마셔야 낭패 볼 정도론 취할 것 같지 않았지만, 상호도 면에 다니면서 제 말마따나 는 게 술뿐인지, 막걸리엔 꽤 익숙해 보였다.

  "그 동안 주소만 알았대도 위문편지라도 보냈을 건데, 참 미안하게 됐어."

  ‘그렇다, 주소를 몰랐다는 것은 정말일 것이다. 내가 소속된 부대는 한군데 오래 주둔해 있지 않고 늘 이동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위문편지가 문제란 말이냐.’

  나는 이런 말을 혼자 속으로 삭이며 또 잔을 내었다.

  내가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전혀 알 리 없는 그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영숙이가 말야. 자네 기억하지, 우리 영숙이 말야, 정말 그게 벌써 고삼(高校三年)이야, 자네한테 위문편질 보내겠다고 나더러 주솔 가르쳐 달라지 뭐야. 헌데 나도 모르니까, 옥란이한테 가서 물어 오라고 했더니, 옥란이 언니도 모른다더라고 여간 안타까워하지 않데.”

  ‘그렇지, 영숙인 물론 너보다 나은 아이다. 그러나 영숙이가 무슨 관계냐 말이다. 영숙이보다 몇 곱절 관계가 깊은 정순이 문제는 덮어 놓고 왜 영숙이는 끄집어내냐 말이다.’

  나는 또 술잔을 내면서, 이제 이쯤 됐으니 내 쪽에서 말을 끌어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정순이 말일세, 어떻게 된 건지 간단히 말해 줄 수 없겠는가?”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러나,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입을 떼었다.

  상호는 들고 있던 술잔을 상 위에 도로 놓으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리고는 짧게 한숨을 한 벗 짓고 나더니,

  “여러 말 할 게 있는가. 내가 죽일놈이지. 용서하게.”

  뜻밖에도 순순히 나왔다. 이럴 때야말로 술이 참 좋은 음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와 나는 한동네에 같이 자랐으며, 국민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동창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상대자의 성격이나 사람됨을 잘 알고 있는 편이다. 그는 나보다 가정적으로 훨씬 유여했지만 워낙 공부가 싫어서 고등학교까지를 간신히 마치자 면 서기가 되었고, 나는 그와 반대로 줄곧 우등에다 장학금으로 대학까지 갈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내가 그에게 친구로서의 신의를 잃은 일은 없었고, 또 그가 여간 잘못했을 때라도 솔직하게 용서를 빌면 언제나 양보를 해주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우정과 나의 성격을 알고 있는 그는 정순이 문제도 이렇게 해서 용서를 빌면 내가 전과 같이 양해를 할 것이라고 딴은 믿고 있는 겐지 몰랐다. 그러나 이것만은 문제가 달랐다.

  “자네가 그렇게 나오니 나도 더 여러 말을 하지 않겠네. 그러나 이것은 자네의 처사를 승인한다거나 양해를 한다는 뜻이 아닐세. 그건 그렇다 하고 나도 내 태도를 결정하기 위해서 자네하고 상의할 일이 있어 그러네.”

“……?” 

  그는 내 말뜻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간단히 말할게. 정순이를 한번 만나 봐야 되겠어. 이에 대해서 자네의 협력을 구하는 걸세.”

  나는 말을 마치자 불이 뿜어지는 듯한 두 눈으로 상호를 쏘아보았다.

  그는 역시 나의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멍하니 마주 바라보고 있다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려 버렸다.

  "……”

  “대답해 주게.”

  내가 단호한 어조로 답변을 요구했다.

  그가 겁에 질린 사람처럼 나의 눈치를 살펴 가며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안 된다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은 자네 상상에 맡기겠네. 어차피 결말은 자네 자신이 보게 될 것이니까. 다만 자네를 위해서 말해 주고 싶은 것은 자네같이 안온한 일생을 보내려는 사람이라면 극단적인 행동은 피하는 것이 좋을 걸세.”

  “자넨 나를 협박하는 셈인가?”

  상호는 갑자기 반격할 자세를 취해 보는 모양이었다.

  “……” 

  나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를 한참 동안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보다도 더 부드럽고 더 낮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자네에게 어떤 형식으로든지 보복을 한다거나, 어떤 유감이나 감정 같은 것을 품어 본다거나 그런 것은 단연코 없네. 이 점은 나를 믿어 주어도 좋아.”

  “그렇다면……?”

  "내가 정순이를 한번 만나 보겠다는 것은 자제에 대한 복수라든가, 원한이라든가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젤세. 아까도 말하지 않던가. '그건 그렇다 하고'라고. 과거지사는 과거지사대로 불문에 붙이겠다는 뜻일세."

  "그렇다면 꼭 정순이를 만나 봐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내가 과거지사를 불문에 붙이겠다는 것은 자네와 정순이의 관계에 대해서 하는 말일세. 나와 정순이의 관계나 나 자신의 과거를 모조리 불문에 붙이겠다는 뜻이 아닐세. 나는 정순이와 맺은 언약이 있기 때문에 정순이가 살아 있는 한 정순이를 만나 봐야 할 의무가 있는 거야.”

  “그 동안에 결혼을 해서, 남의 아내가 되고, 애기 엄마가 돼 있어도 말인가?”

  “물론이지. 남의 아내가 돼 있든지, 남의 노예가 돼 있든지, 내가 없는 동안,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생긴 일은 불문에 붙인다는 뜻일세.”

  여기서 상호는 자기대로 무엇을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고 나더니,

  “자넨 너무 현실을 무시하잖아?”

  이렇게 물었으나 그것은 시비조라기보다 오히려 어떤 애원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현실? 그렇지, 자넨 아직, 전장엘 다녀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자, 보게 이게 현실인가 아닌가?”

  나는 그의 앞에 나의 바른손을 내밀었다. 식지(食指)와 장지(長指)가 뭉턱 잘라지고 없느, 보기도 흉한 검붉은 손이었다.

  “자네는 내가 군에 가기 전의 내 손을 기억하고 있겠지, 지금 이 손은 현실인가 꿈인가?”

  “참 그렇군. 아까부터 손을 다쳤구나 생각하고 있었지만, 손가락이 둘이나 달아났군. 그래서야 어디?”

  “자넨 손가락 얘길 하고 있군. 나는 현실 얘기를 하는 거야. 손가락 두 개가 어떻단 말인가? 이까진 손가락 몇 개쯤이야 아무런들 어떤가? 현실이 문제지. 그렇잖은가? 그렇다 정순이가 이미 결혼을 한 줄 알았더면 나는 이 손을 들고 돌아오진 않았을 거야. 자넨 역시 내가 손가락을 얘기하는 줄 알고 있겠지, 그러나 그게 아니라네. 잘못 살아 돌아온 내 목숨을 얘기하고 있는 걸세. 이제 나는 내 목숨을 처리할 현실이 없다네. 그래서 정순이를 만나야 되겠다는 걸세. 이왕 이 보기 흉한 손을 들고 돌아온 이상, 정순이를 만나지 않아서는 안 되네. 빨리 대답을 해주게.”

  “정 그렇다면 하루만 여유를 주게. 자네도 알다시피 나 혼자 결정할 문제도 아니겠고, 우선 당사자의 의사도 들어 봐야 하겠지만, 또 부모님들이 뭐라고 할지, 시하에 있는 몸으로서는 부모님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는 문제겠고, 그렇잖은가?”

  나는 상호의 대답하는 내용이나 태도가 여간 아니꼽지 않았지만 지그시 참았다. 그를 상대로 하여 싸울 시기는 아니라고 헤아려졌기 때문이었다.

  “내일 이 시간까지 알려 주게, 정순이를 만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나는 씹어뱉듯이 일러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튿날 저녁에 영숙이가 쪽지를 가지고 왔다.

  

  작일(昨日)은 여러 가지로 군(君)에게 실례되는 점(點)이 많았다고 보네. 연(然)이나 군의 하해(河海)같은 마음으로 두루 용서해 주리라 신(信)하며, 금야(今夜)에는 소찬이나마 제의 집에서 군을 초대하니 만사 제폐하고 필(必)히 왕림해 주시기 복망(伏望)하노라.

                                                죽마고우 상호 서

 

  내가 상호의 쪽지를 읽는 동안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영숙이 발딱 일어나며,

  “오빠가 꼭 모시고 오랬어요.”

  새하얀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미안하지만 좀 기다려 줘.”

  나는 영숙에게 이렇게 말한 뒤 옥란을 불러서 종이와 연필을 내어 오라고 했다.

 

   자네의 초대에 응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네. 어저께 말한 대로 정순이를 만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내일 오전 중으로 다시 연락해 주시게. 만약 정순이가 원한다면, 그때 영숙이를 동반해도 무방하네.

                                                봉수 

 

  내가 주는 쪽지를 받자 영숙은 공손스레 머리를 숙여 절을 하고 돌아갔다.

  이튿날 저녁때에야 영숙이 다시 쪽지를 가지고 왔다. 오빠는 오전 중으로 전하라고 일러 두고 갔지만, 자기가 학교에서 돌아온 시간이 늦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노라고, 영숙이 정말인지 꾸며 댄 말인지 먼저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쪽지엔 역시 상호의 필치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군의 회신(回信)은 잘 보았네. 연이나, 정순이 일간 친정에 근친갈 기회가 도래(到來)하여 영숙이를 동반코 왕복게 할 계획이니 그리 양해하고, 그 시기는 다시 가매(家妹) 영숙을 시켜 통지할 것이니 그리 아시게.

                                                상호 서

 

  이틀 뒤가 일요일이었다.

  영숙이 와서 언니가 친정엘 가는데 자기도 동행하게 되었노라고 옥란을 보고 넌지시 일러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왜 나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옥란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리는지를 곧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나는 옥란에게 그녀들이 떠나는 것을 보아서 나에게 알려 주도록 부탁해 두고 오래간만에 이발소로 가서 귀밑까지 덮은 머리를 쳐냈다.

  면도를 마친 뒤, 옥란의 연락을 받고 내가 '부엉뜸'으로 갔을 때는 점심때도 훨씬 지낸 뒤였다.

  내가 뜰에 들어서자, 장독대 앞에서 작약꽃을 만지고 있던 영숙이 먼저 나를 발견하고 알은체를 하더니, 곧 일어나 아랫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순이 그 방에 있음을 알리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더니, 정순이, 아, 그 어느 꿈결에서 보던 설운 연꽃 같은 얼굴을 내밀었다.

  순간, 나는 그녀가 무슨 옷을 입고 얼굴의 어디가 어떻다는 것을 전혀 의식할 수 없었다. 다만 저것이 정순이다. 저것이 아, 설운 연꽃 같은 그것이다, 하는 섬광 같은 것이 가슴을 때리며, 전신의 피가 끊어 오름을 느낄 뿐이었다. 나는 그 집 식구들에 대한 인사나 예의 같은 것도 잊어버린 채 정순이가 있는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하여 나는 방문 앞에 한참 동안 발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같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순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고개를 아래로 드리운 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영숙도 정순이를 따라 몸을 일으키긴 했으나, 요 며칠 동안 나에게 보여 주던 그 친절과 미소도 가뭇없이, 이때만은 새침한 침묵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들에게서, '들어오세요'를 기다릴 수없다고 알자, 스스로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방에 들어가도, 그리하여, 스스로 자리에 앉은 뒤에도, 그녀들은 더 깊이 얼굴을 수그린 채 그냥 서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실상, 그녀들이 서 있건 말건 그런 것보다는 나 자신 갑자기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누르느라고 어깨를 들먹이며, 고개를 아래로 곧장 수그리기에 여념이 없을 정도 였다.

  내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엔 그녀들도 어느덧 자리에 앉은 뒤였다.

  ‘이것은 분명히 꿈이 아니다. 나는 정순이를 보았다. 아니, 지금도 정순이는 바로 내 눈앞에 앉아 있지 않은가. 그렇다. 정순이다. 정순이다. 나는 이제 후회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울부짖음이 내 마음속을 지나가자 나는 비로소 이성(理性)을 돌이킨 듯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하여 정순의 얼굴을 비로소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정순은 물론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이마를 바라보는 것이라도 좋았다.

  “정순이!” 

  내 목소리는 굳게 떨리어 나왔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진 모르지만, 이 자리에서만이라도 옛날대로 부르겠어. 용서해 줘요, 영숙이도.”

  내가 이까지 말했을 때, 나는 또 먼저와 같은 울음의 덩어리가 가슴에서 목구멍으로 치솟아 오름을 깨달았다. 나는 그것을 참느라고 이를 힘껏 악물었다. 울음의 덩어리는 목구멍을 몹시 훑으며 뜨거운 눈물이 되어 주르르 흘러내렸다. 소리를 내며 흐느껴지는 울음보다는 그것이 차라리 나았다. 나는 손수건을 내어 천천히 눈물을 훔친 뒤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괴로운 것만치 정순이도 괴로울 거야. 내 이 못난 눈물을 보는 일이 말야. 그러나 내가 정순이를 만나려고 한 것은 이 추한 눈물을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야. 이건 없는 것으로 봐줘. 곧 거둬질 거야.”

  나는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연기를 두어 모금이나 천천히 들이켜고 나서 말을 시작했다.

  “하긴 이 자리에 앉아 생각하니, 내가 전선에서 생각했던 거와는 다르군. 이럴 줄 알았더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정순이를 그리고 영숙이도 그렇겠지만 너무 오래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내 얘기를 간단히 할게.”

  나는 이렇게 허두를 뗀 다음 내 바른손을 그녀들 앞에 내놓았다.

  “이것 봐요. 이게 내 손이야. 식지와 장지가 분질러져 나가고 없잖아. 덕택으로 나는 제대가 돼 돌아온 거야. 이런 손을 갖고는 총을 쏠 수 없으니까. 그런데 말야. 이게 뭐 대단한 부상이라고 자랑하는 게 아냐. 팔다리를 송두리째 잃은 사람도 있고, 눈, 코, 귀 같은 것을 잃은 놈들도 얼마든지 있는데 이까짓 거야 문제도 아니지. 아주 생명을 잃은 사람들은 또 별도로 하더라도. 그런데 내가 지금 와서 뼈아프게 후회하는 것은 역시 이 병신된 손 때문이야. 이건 실상 적에게 맞은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조작한 부상이야. 살려고 목숨만이라도 남겨 가지려고. 아아, 정순이 요렇게 해서 지금 여기까지 달고 온 내 목숨이야.″

  나는 얘기를 하는 동안에 나 자신도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힘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 뒤 한참 동안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정순이와 영숙이도 먼저보다 훨씬 대담하게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나는 연기를 불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소속된 부대는 ○○사단 ○○연대 수색대야. 수색 중대. 정순이는 이 말이 무엇인지를 모를 거야. 그 무렵의 전투 사단의 수색대라고 하면 거의 결사대라는 거와 다름이 없을 정도야. 한번 나가면 절반 이상이 죽고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야, 어떤 때는 전멸, 어떤 때는 두셋이 살아서 돌아오는 일도 흔히 있었어. 그러니까, 원칙적으로는 교대를 시켜 줘야 하는 거지. 그런데 워낙 전투가 격렬하고 경험자가 부족하고 하니까 교대가 잘 안 되거든. 그 가운데서도 내가 특히 그랬어. 머리가 좋고 경험이 풍부하대나. 나중은 불사신(不死身)이란 별명까지 붙이더군. 같이 나갔던 동료들이 거의 다 쓰러졌을 때도 나는 번번이 살아왔으니까. 얘기가 너무 길군. 나는 생각했어. 정순이를 두고는 죽을 수 없는 몸이라고, 내가 번번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도 정순이 때문이라고, 거기서 나는 결심을 했던 거야. 사람의 힘과 운이란 아무래도 한도가 있는 이상, 기적도 한두 번이지 결국은 죽고 말 것이 뻔한 노릇 아닌가. 위에서는 교대를 시켜 주지 않으니까. 결국 죽을 때까진 죽을 수밖에 없는 일을 몇 번이든지 되풀이해야 하는 나 자신의 위치랄까, 운명이랄까, 그런 걸 깨달은 거야. 거기서 나는 결심을 했어. 정순이, 정순이를 두고는 죽을 수 없다고, 나는 내가 꼭 죽기로 마련되어 있는 운명을 내 손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고. ……이런 건 부질없는 얘기지만 정순이, 나는 결코 죽음 그 자체가 두렵지는 않았어. 더구나 생사를 같이하던 전우가 곁에서 픽픽 쓰러지는 꼴을 헤아릴 수도 없이 경험한 내가 그토록 비겁할 수는 없었던 거야. 국가 민족이니 정의 인도니 하는 건 집어치고라도, 우선 분함과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라도 얼마든지, 죽고 싶었어, 죽어야 했어. 정순이가 아니더라면 물론 그랬을 거야."

  나는 잠깐 이야기를 쉬었다.

  정순이는 아까부터 벽에 이마를 댄 채 마구 흐느끼고 있었고 영숙이도 손수건으로 두 눈을 가린  채 밖으로 달아나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돌아와 보니 정순이는 결혼을 했군. 나는 지금 정순이를 원망하려는 건 아냐. 상호의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것도 듣고 있어."

  "아녜요, 제가 바보예요. 제가 죽일년이에요."

  정순이는 높은 소리로 이렇게 외치며 또다시 흑흑 흐느껴 울었다.

  "그런데 지금부터가 문제야. 나는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야. 내 목숨을 말야. 나는 이렇게 해서 스스로 훔쳐 낸, 그렇지 소매치기 같은 거지. 그렇게 해서 훔쳐 낸 내 목숨이 이제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이 됐거든. 내가 이 목숨을 가지고 이대로 산다면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용서받을 수 없는, 국가 민족에 대한 죄인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불쌍한, 그 거룩한 그 수많은 전우들, 죽어 넘어진 놈들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산단 말인가. 배신자란 남에게서 미움을 받기 때문에 못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외로워서 못 사는 거야. 정순이가 없는 고향인 줄 알았더라면 나는 열 번이라도 거기서 죽고 말았어야 하는 거야. 전우들과 함께 그들이 쓰러지듯 나도 그렇게 쓰러졌어야 하는 거야. 그것도 조금도 괴롭거나 두려운 일이 아니었어. 오히려 편하고 부러웠을 정도야. 이 더럽게 훔쳐 낸 치사스런 이 목숨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저를 차라리 죽여 주세요. 괴로워서 더 못 듣겠어요."

  정순이는 소리가 나게 이마를 벽에 곧장 짓찧으며 사지를 부르르 떨고 있었다.

  "정순이 들어 봐요. 나는 상호에게도 말했어. 내가 없는 동안 상호와 정순이 사이에 생긴 일은 없었던 거와 같이 보겠다고, 정순이가 세상에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면 정순이가 나와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그 동안에 있은 일은 없음으로 돌리겠어. ……정순이, 상호에게서 나와 주어. 그리구 나하고 같이 있어. 우리는 결혼하는 거야. 이 동네서 살기가 거북하다면 어디로 가도 좋아. 어머니와 옥란이도 버리고 가겠어. 전우를 버리고 온 것처럼."

  "그렇지만 그 집에서 저를 놓아 주겠어요?"

  정순이는 나직한 목소리로 혼잣말같이 속삭였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훔쳐서 돌아온 거나 마찬가지지. 결심하면 돼. 그밖엔 길이 없어. 그렇지 않으면 내 목숨을 돌려 줘야 해. 이건 내 것이 아니냐. 정순이와 같이 있기 위해서만 얻어진 목숨이야.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도 무서운 반역자의 더럽고 치사한 목숨인걸. 잠시도 달고 있을 수 없는 추악한 장물이야. 어디다 어떻게 갖다 팽개쳐야 좋을지 모르는 추악한 장물이야. 정말야, 두고 보면 알걸."

  "무서워요."

  정순이는 아래턱을 달달달 떨고 있었다.

  "무서울 게 뭐야. 정순이 첨부터 상호를 사랑해서 결혼을 했다거나 지금이라도 사랑하고 있다면 별도야. 그렇지 않으면 내 목숨에 빛을 주고 두 사람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거니까 어디까지나 정당한 일이지 잘못이 아니잖아? 알겠지? 응? 대답을 해줘."

  "……"

  정순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끄떡해 보였다.

  이때 영숙이 방문을 열었다.

  "언니, 저기……."

  문 밖에는 정순이 올케(윤이 어머니)가 진지상을 들고 서 있었다.

  "국수를 좀 만들었어. 맛은 없지만…… 그리고 아기씬 안에서 우리하고 같이 할까?"

  그녀는 국수상을 방 안에 디밀어 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정순이는 국수상을 다시 들어 내 앞에 옮겨 놓으며, "천천히 드세요. 그리구 그 일은 제가 알아 하겠어요."

이렇게 속삭이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국수상엔 손도 대지 않은 채 담배 한 가치를 피워 물자 밖으로 나와 버렸다.

 

  정순이한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기 낳고 살던 여자가 집을 버리고 나오려면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일 리 없다고는 나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끝없이 날만 보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다는 것은 나도 안다. 남편이나 시부모 이외에 아기도 걸리고 친정도 걸리겠지만, 죽느냐 사느냐 한 가지만 생각해야 한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한시바삐 결행 바란다.

 

  나는 이렇게 쪽지에 써서 옥란에게 주었다.

  "이거 네가 정순이 언니한테 남 안 보게 전할 수 있거든 전해 다오. ……역시 영숙이한테 부탁할 순 없겠지?"

  "요즘은 우물에도 잘 안 나오니 어려운 거야. 영숙인 오빠를 너무 좋아하지만 아무렴 저의 친오빠만이야 하겠어?"

  옥란은 쪽지를 접어 옷 속에 감추며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옥란도 좀체 정순이를 직접 만날 기회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대로 영숙이와는 자주 왕래가 있어보였다.

  "영숙이한테 무슨 들은 말 없어?"

  "걔도 요즘은 세상이 비관이래?"

  "왜?"

  "그날 정순이 언니하고 셋이서 만났잖아? 자기는 누구 편이 돼얄지 모르겠대. 그리구 슬프기만 하대."

  "자기하고 관계없는 일이니까 모르면 되잖아?"

  "그렇지도 않은 모양야. 걘 책도 많이 읽었어. 오빠 한번 만나 주겠어? 오빠가 잘 부탁하면 걘 무슨 말이라도 들을지 몰라……."

  "……"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옥란에게 쪽지를 맡긴 지도 닷새나 지난 뒤였다. 막 저녁을 먹고 났을 때 영숙이 정순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저의 계획을 집안에서 눈치채어 버렸습니다. 저는 지금 꼼짝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저는 영원히 봉수 씨를 배반할 마음은 아닙니다. 다시 맹세합니다. 언제든지 봉수 씨가 기다려 주신다면 저는 반드시 그 일을 실행할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간도 쓸개도 없는 썩은 고깃덩어리 같은 년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죽지 못해 살아있는 불쌍한 목숨이올시다. 부디 용서해주시고 너무 조급히 기다리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정순이 올림

 

  나는 편지를 두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내용이 복잡하다거나 이해하기 힘든 말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무언지 정순이의 운명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정순이는 이런 여자였어. 참되고 총명하고 다정하고 신의 있는, 그러나, 강철같이 굳센 여자는 아니었어. 순한 데가 있었지. 환경에 순응하는, 물론 지금도 그녀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환경에 순응하고 있는 거야. 그녀를 결정하는 것은 그녀 자신의 이지이기보다 그녀를 에워싼 그녀의 환경이겠지.'

  나는 편지를 구겨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영숙을 불렀다.

  "숙이 나한테 전한 편지 누구 거지?"

  "언니 거예요."

  영숙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대답했다.

  "무슨 내용인지도 알지?"

  "……"

  영숙은 갑자기 얼굴이 홍당무같이 새빨개지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난 영숙일 옥란이같이 믿고 있어. 알면 안다고 대답해 줘, 알지?"

  "……"

  영숙이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가 없더라도 옥란이하고 잘 지내 줘."

  나는 무슨 뜻인지 나 자신도 잘 모를 이런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곤 밖으로 훌쩍 나와 버렸다. 나는 어디로든지 가버릴 생각이었던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어디로든지 꺼져 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집 뒤를 돌아 나갔다. 우리집 뒤부터는 보리밭들이었다. 보리밭은 아스라이 보이는 산기슭까지 넓은 해면같이 출렁이고 있었다. 지금 한창 피어오르는 보리 이삭에서는 향긋한 보리 냄새까지 풍겨져 오는 듯 했다.

  내가 보리밭 사잇길을 거의 실신한 사람처럼 터덕터덕 걷고 있을 때, 문득 뒤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왔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뒤돌아볼 만한 관심도 기력도 잃고 있었다. 그렇게 걷는 대로 걷다가 아무 데나 쓰러져 버렸으면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검푸른 보리밭 위로 어스름이 덮여왔다.

  그 어스름 속으로 비둘기뗀지 다른 새뗀지 분간할 수도 없는 새까지만 돌멩이 같은 것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문득 나는 내가 어쩌면 꿈속에서 걸어가고 있는 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발을 멈추고 섰다. 그리하여 아까 날아가던 새까만 돌멩이 같은 것들이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다.

  "오빠."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잠긴 목소리였다. 영숙이었다. 나는 영숙의 얼굴을 넋나간 사람처럼 어느 때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슬프다는 거냐? 나하고 슬픔을 나누자는 거냐?'

  나는 혼자 속으로 영숙이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영숙도 물론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오빠, 제발 죽지 마세요. 제가 사랑해 드릴게요. 오빠를 위해서 오빠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오빠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어요.'

  영숙의 굳게 다문 입 속에선 이런 말이 감돌고 있는 듯 했다.

  다음 순간 영숙은 내 품에 안겨 있었다. 그보다도 내가 먼저 영숙이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고 하는 편이 순서일 것이다. 그러자 영숙이 내 가슴에 몸을 내던지다시피 하며 안겨 왔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내가 영숙에게 갑자기 왜 다른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그것은 나 자신도 해명할 길이 없다. 아니 그보다도 갑자기 야수가 돼버린 나에게, 영숙이 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 반항을 하지 않았는지 이 역시 해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하여간, 나는, 다음 순간, 영숙을 안고 보리밭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녀의 간단한 옷을 벗기고 그 새하얀, 천사 같은 몸뚱어리를 마음껏 욕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숙은 어떤 절망적인 공포에 짓눌려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야릇한 체념 같은 것에 자신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간혹 들릴 듯 말 듯한 가는 신음 소리를 내었을 뿐 나의 거친 터치에도 거의 그대로 내맡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 이미 실신상태에 빠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보다도 역시 자기의 모든 것을, 생명을, 내가 그렇게 원통하다고 울어 대던 것의 대가로 치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까치가 울었던 것이다. 까작 까작 까작 까작 하는, 어머니가 가장 모진 기침을 터뜨리게 마련인, 그 저녁 까치 소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 나의 팔다리와 가슴속과 머리끝까지 새로운 전류 같은 것이 흘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까작 까작 까작, 까작 그것은 그대로 나의 가슴속에서 울려 오는 소리였다. 나는 실신한 것같이 누워 있는 영숙이를 안아 일으키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그녀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하여 다음 순간 내 손은 그녀의 가느단 목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대표명작·김동리』, 지학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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