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돌쩌귀(경첩) : 문짝을 여닫게 하기 위해 문설주에 달아 둔, 쇠붙이로 만든 암수 두 개로 된 한 벌의 물건.
시낭송 | 감상하기 |
핵심 정리
• 갈래 : 산문시, 서정시, 이야기시
• 성격 : 서술적, 낭만적, 토속적, 신화적
• 심상 : 초록, 다홍의 색채 심상이 선명히 대비되어 있음.
• 어조 : 서사적이며 평이한 어조
• 구성 : 짤막한 이야기 속에 한 여인의 인생 전체를 담아 놓은 '서사적 구성'
- 1연 : 순간적인 오해로 신부를 버리고 달아난 신랑
- 2연 : 달아난 신랑을 기다리다 재로 변한 신부
• 제재 : 신부(新婦)
• 주제 : 여인의 정절(貞節)
이해와 감상
한국 여인의 매운 절개를 놀랍도록 담담하고 짧은 이야기체로 엮었다. 여인의 절개란 어김없이 고통과 슬픔, 한(恨)의 여운을 남기는데, 이 작품에서는 강렬한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전혀 괴로움과 한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묘한 안정감을 준다.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첫날밤의 신부가 신랑의 오해로 말미암아 소박을 당하였지만, 40년인가 50년 -이 시간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한다 하겠다.- 이 지난 뒤까지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고, 우연히 들린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 이로써 여인네의 정절의 삶이 완성된 것이다.
이 시의 강렬한 인상은 이미 생명이 없는 존재이면서도 고스란히 제 모습대로 앉아 있는 ‘초록 재와 다홍 재’의 신부에 연유한다. 오히려 철부지이며 지각 없는 신랑에 비해 철저히 유교적인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매서운 신념을 지닌 신부는, 그러나 현실적인 열녀(烈女)의 세계를 뛰어넘는다. 신부는 ‘초록 재와 다홍 재’가 되어서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 남음으로써 육(肉)의 세계를 넘은 영(靈)의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서정주 문학의 독특한 미학(美學), 즉 현실적 세계관이었던 유교의 정절이 교묘한 토속적 심미 의식(審美意識)을 통해 신화적 세계관의 경지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 가요 '정읍사'와 관련된 망부석 전설, 신라시대 박제상의 아내가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치술령 고개 위에 선 채로 돌이 되었다는 전설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이 시는 혼인 첫날밤에 생긴 오해로 인해 신부가 40~50년을 첫날밤 모양 그대로 앉아 있어야 했고,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는 비극적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신비주의적인 내용에다 다분히 관능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어 읽는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은 재가 되어버리는 신부의 비극으로 인해 그저 웃어 버릴 수만 없게 만든다. 또한 40~50년 동안 신방을 기다리고 있던 신부에게서 고전적 절개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신부의 수동적이고 침착한 기다림과 신랑의 조급성이 대립됨으로써 처절한 비극이 유발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한 신랑에게 신부는 40~50년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저항으로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은 자기 소멸이라는 더 큰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다시 말해, 신랑은 자신의 성급하고 지각없는 판단으로 인해 신부를 소박한 채 40~50년을 철저히 잊어버리고 지냈지만, 그 무관심은 신부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비극을 탄생시킨 것이다. 40~50년이란 그 긴 세월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우연히 들른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매운 재’로 내려앉는 신부의 소리없는 반항이 나타나면서 비로소 신랑은 ‘안쓰러운’ 뉘우침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록 재’와 ‘다홍 재’는 신부의 영적 존재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작품을 한 차원 상승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철저한 속물적 근성의 신랑에 대비되는 신부는 전통적인 윤리관을 대변하는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현세적․육체적 세계를 초월하는 영적(靈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작가 서정주(徐廷柱, 1915년 5월 18일 ~ 2000년 12월 24일)
시인. 전북 고창 출생.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 궁발(窮髮), 뚝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1936). 1936년 불교전문 중퇴. <시인부락> 주간. 흔히 ‘생명파’ 혹은 ‘인생파’로 불리며 토속적, 불교적, 내용을 주제로 한 시를 많이 쓴 시인이다. 탁월한 시적 자질과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해방 전후에 걸쳐 한국 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및 반인륜 행적과 신군부 치하에서의 처신 등으로 역사적 평가에 있어 논란의 대상이다.
1948년 동아일보 사회․문화부장. 서라벌 예대․동국대 문리대 교수를 역임.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장. 1976년 명예 문학박사(숙명여대). 1979년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1979년 동국대 대학원 명예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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