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 239

김동인 '붉은산' 전문

붉은산 김동인 그것은 여(余)가 만주를 여행할 때 일이었다. 만주의 풍속도좀 살필 겸 아직껏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그들의 사이에 퍼져있는 병(病)을 조사할 겸해서 일 년의 기한을 예산하여 가지고 만주를 시시콜콜이 다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XX촌이라 하는 조그만 촌에서 본 일을 여기에 적고자 한다. XX촌은 조선사람 소작인만 사는 한 이십여 호 되는 작은 촌이었다. 사면을 둘러보아도 한 개의 산도 볼 수가 없는 광막한 만주의 벌판 가운데 놓여있는 이름도 없는 작은 촌이었다. 몽고사람 종자(從者)를 하나 데리고 노새를 타고 만주의 촌촌을 돌아다니던 여가 그 XX촌에 이른 때는 가을도 다 가고 어느덧 광포한 북극의 겨울이 만주를 찾아온 때였다. 만주의 어느 곳이나 조선사람이 없는 곳은 없지만 이러한..

문학/소설전문 2021.01.07

이상 '봉별기' 전문

봉별기 이상 1 스물세 살이오―――삼월이오―――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아직 기를 펴지 못한 청춘이 약탕관을 붙들고 늘어져서는 날 살리라고 보채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다. 여관 한등 아래 밤이면 나는 늘 억울해 했다. 사흘을 못 참고 기어 여관 주인 영감을 앞장 세워 밤에 장기 소리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 게서 만난 것이 금홍이다. "몇 살인고?" 체대가 비록 풋고추만 하나 깡그라진 계집이 제법 맛이 맵다. 열여섯 살? 많아야 열아홉 살이지 하고 있자내까. "스물한 살이에요" "그럼 내 나인 몇 살이나 돼 뵈지?" "글쎄 마흔? 서른아홉?"..

문학/소설전문 2021.01.07

이청준 '병신과 머저리' 전문

병신과 머저리 이청준 화폭은 이 며칠 동안 조금도 메워지지 못한 채 넓게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돌아가 버린 화실은 조용해져 있었다. 나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형이 소설을 쓴다는 기이한 일은, 달포 전 그의 칼 끝이 열살배기 소녀의 육신으로부터 그 영혼을 후벼내 버린 사건과 깊이 관계가 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수술의 실패가 꼭 형의 실수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피해자 쪽이 그렇게 생각했고, 근 십 년 동안 구경만 해 오면서도 그쪽 일에 전혀 무지하지만은 않은 나의 생각이 그랬다. 형 자신도 그것은 시인했다. 소녀는 수술을 받지 않았어도 잠시 후에는 비슷한 길을 갔을 것 이고, 수술은 처음부터 절반도 성공의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사건은 형에게서뿐 아니라 수술중엔 어..

문학/소설전문 2021.01.07

계용묵 '백치 아다다' 전문

백치 아다다 계용묵 질그릇이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고 들렸는데 마당엔 아무도 없다. 부엌에 쥐가 들었나? 샛문을 열어 보려니까, [아 아아 아이 아아 아야------.] 하는 소리가 뒤란 곁으로 들려 온다. 샛문을 열려던 박씨는 뒷문을 밀었다. 장독대 밑 비스듬한 켠 아래 아다다가 입을 헤 벌리고 납작하니 엎뎌져 두 다리만을 힘없이 버지럭거리고 있다. 그리고, 머리 편으로 한 발쯤 나가선 깨어진 동이 조각이 질서 없이 너저분하게 된장 속에 묻혀 있다. [아이구테나!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년이 동애를 또 잡았구나! 이년아, 너더러 된장 푸래든! 푸래?] 어머니는 딸이 어딘가 다쳤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데 가는 동정심보다 깨어진 동이만이 아깝게 눈에 보였던 것이다. [어 어마! 아다아다 아다 ..

문학/소설전문 2021.01.07

김동인 '배따라기' 전문

배따라기 김동인 좋은 일기이다. 좋은 일기라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 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 못 할 위엄을 가지고, 높이서 우리 조고만 '사람'을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는, 그런 교만한 하늘은 아니고, 가장 우리 '사람'의 이해자인 듯이 낮추 뭉글뭉글 엉기는 분홍빛 구름으로서 우리와 서로 손목을 잡자는 그런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이다. 나는, 잠시도 멎지 않고 푸른 물을 황해로 부어 내리는 대동강을 향한, 모란봉 기슭 새파랗게 돋아나는 풀 위에 뒹굴고 있었다. 이날은 삼월 삼질, 대동강에 첫 뱃놀이하는 날이다.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물 위에는, 결결이 반짝이는 물결을 푸른 놀잇배들이 타고 넘으며, 거기서는 봄향기에 취한 형형색색의 선율이, 우단보다도 부드러운 봄공기를 흔들면서 날아온다. 그러..

문학/소설전문 2021.01.07

김동인 '발가락이 닮았다' 전문

발가락이 닮았다 김동인 노총각 M이 혼약(혼인하기로 한 약속)을 하였다―. 우리들은 이 소식을 들을 때에 뜻하지 않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M은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세태가 갑자기 변하면서 혹은 경제 문제 때문에, 혹 은 적당한 배우자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혹은 단지 조혼(결혼 적령기 전에 혼인함)이라 하는 데 대한 반항심 때문에, 늦도록 총각으로 지내는 사람이 많아 가기는 하지만, 서른두 살의 총각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아직껏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채근(어떤 일의 내용을 캐어 밝히거나 따지어 독촉함) 비슷이, 결혼에 대한 주의를 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M은 언제나 그런 의논을 받을 때마다(속으로는 매우 흥미를 가진 것이 분명한..

문학/소설전문 2021.01.07

고전소설 '박씨전' 전문

박씨전 명(明)나라 숭정 연간에 조선국(朝鮮國)에 한 재상(宰相)이 있으니, 성은 이(李)요 이름은 득춘(得春)이라. 이득춘은 어려서부터 학업을 힘써 문장(文章)을 성공하매 이름이 일국에 진동(振動)하고, 또한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는지라. 이러므로 소년등과(少年登科)하며, 차차 승천(陞遷)하여 외직(外職)으로 경상감사, 물망(物望)으로 함경감사, 내직(內職)으로 좌의정을 지냈다. 상공이 집으로 돌아와 그 아들 시백(時白)에게 문필(文筆)을 힘써 권하니,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시서백가(詩書百家)를 무불통달하며, 또한 계교(計巧)와 술법(術法)이 장안에 제일이라. 상공이 심히 사랑하니, 만조백관(滿朝百官)이 뉘 아니 치사(致辭)하리오. 상공이 또한 바둑․장기와 옥저(玉笛) 불기를 잘하는지라. 꽃을 향하여..

문학/소설전문 2021.01.07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전문

메밀꽃 필 무렵 이효석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마을 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뭇군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 있으나 석윳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춥춥스럽게 날아드는 파리떼도 장난군 각다귀들도 귀치않다. 얽둑배기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코 동업의 조선달에게 낚아보았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봉평장에서 한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 있을까.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 "오늘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렷다?"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달이 그날 산 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허..

문학/소설전문 2021.01.07

김유정 '만무방' 전문

만무방 김유정 산골에, 가을은 무르녹았다. 아람드리 로송은 삑삑이 느러박엿다. 무거운 송낙을 머리에 쓰고 건들건들. 새새이 끼인 도토리, 뼛, 돌배, 갈입들은 울긋불긋. 잔듸를 적시며 맑은 샘이 쫄쫄거린다. 산토끼 두놈은 한가로히 마주 안자 그물을 할짝거리고. 잇다금 정신이 나는 듯 가랑입은 부수수, 하고 떨린다. 산산한 산들바람. 구여운 들국화는 그 품에 새뜩새뜩 넘논다. 흙내와 함께 향깃한 땅김이 코를 찌린다. 요놈은 싸리버섯, 요놈은 입 썩은 내 또 요놈은 송이-----아니, 아니 가시넝쿨속에 숨은 박하풀 냄새로군. 응칠이는 뒷짐을 딱지고 어정어정 노닌다. 유유히 다리를 옴겨노흐며 이나무 저나무 사이로 호아든다. 코는 공중에서 버렷다 오므렷다, 연실 이러며 훅, 훅 굽웃한 한 송목미테 이르자 그는 ..

문학/소설전문 2021.01.07

채만식 '레디메이드 인생' 전문

레디 메이드 인생 채만식 1 "뭐 어디 빈자리가 있어야지." K사장은 안락의자에 폭신 파묻힌 몸을 뒤로 벌떡 젖히며 하품을 하듯이 시원찮게 대답을 한다. 두팔을 쭉 내뻗고 기지개라도 한번 쓰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 눈치다. 이 K사장과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공손히 마주앉아 얼굴에는 '나는 선배인 선생님을 극히 존경하고 앙모합니다' 하는 비굴한 미소를 띠고 있는 구변 없는 구변을 다하여 직업 동냥의 구걸(求 乞) 문구를 기다랗게 늘어놓던 P……P는 그러나 취직운동에 백전백패(百戰百敗)의 노졸(老卒)인지 라 K씨의 힘 아니 드는 한마디의 거절에도 새삼스럽게 실망도 아니한다. 대답이 그렇게 나왔으니 인제 더 졸라도 별수가 없는 것이지만 헛일삼아 한마디 더 해보는 것이다. "글쎄올시다.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

문학/소설전문 2021.01.07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