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날더러는
흙이나 파먹으라 한다
날더러는 삽이나 들라 하고
쑥굴헝에 박혀
쑥이 되라 한다
늘퍼진 날 산은
쑥국새 울고
저만치 홀로 서서 날더러는
쑥국새마냥 울라 하고
흙 파먹다 죽은 아비
굶주림에 지쳐
쑥굴헝에 나자빠진
에미처럼 울라 한다
산이 날더러
흙이나 파먹다 죽으라 한다
-정희성, '저 산이 날 더러 - 목월 시 운을 빌려'
*굴헝 : ‘구렁1’의 방언(제주) - 1. 움쑥하게 파인 땅. 2.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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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애상적
• 특징 :
① 시구 및 특정한 조사나 어미 등을 반복하여 시적 리듬감을 형성함.
② 수미상관의 구조를 통해 구조적 안정감, 의미 강조, 운율 형성, 여운을 줌.
③ 산이 화자에게 말을 하는 형식을 활용하여 힘들게 살아가는 화자의 처지를 부각함.
• 구성 :
1~2행 : 산이 흙이나 파먹으라고 함.
3~5행 : 산이 쑥이 되라고 함.
6~9행 : 산이 쑥국새마냥 울라고 함.
10~13행 : 산이 아비, 에미처럼 울라고 함.
14~15행 : 산이 흙이나 파먹다 죽으라고 함.
• 주제 : 화자가 처한 힘든 삶의 현실, 가난하고 소외된 삶에서 느끼는 절망
작가 정희성(鄭喜成, 1945년 ~ )
시인, 경상남도 창원 출생, 용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2년부터 숭문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6년 민족문학작가회의 16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1981년에 제1회 「김수영문학상」, 1997년에 「시와시학상」, 2001년에 제16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문단에 나온 지 40여 년 가까이 지났는데, 시집을 다섯 권밖에 내지 않은 과작 시인이다.
“ …
박봉을 털어 《시인》지를 낸다는 이도윤이 옆에 와서
시 두 편만 달라는데 그것도 안 주느냐고 성화다
시 두 편이면 내 일년 농사라고
그거 털어주면 나는 거지라고… ”
— 〈임진각에서 얻은 시상〉,《돌아다보면 문득》(문학과지성사, 2008)
시집
《답청》(1974)
《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작과비평사, 19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작과비평사, 1991)
《詩를 찾아서》(창작과비평사, 2001)
《돌아다보면 문득》(창비, 2008)
이해와 감상
산이 날더러는 / 흙이나 파먹으라 한다 / 날더러는 삽이나 들라 하고 / 쑥굴헝에 박혀 / 쑥이 되라 한다
늘퍼진 날 산은 / 쑥국새 울고 / 저만치 홀로 서서 날더러는 / 쑥국새마냥 울라 하고
흙 파먹다 죽은 아비 / 굶주림에 지쳐 / 쑥굴헝에 나자빠진 / 에미처럼 울라 한다
산이 날더러 / 흙이나 파먹다 죽으라 한다
이 작품은 박목월의 「산이 날 에워싸고」의 시상 전개 방식과 유사한 전개 방식을 통해 힘들게 살아가는 화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시이다. 박목월의 「산이 날 에워싸고」는 화자의 소망을 ‘산’이 화자에게 명령하는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화자의 소망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희성의 작품은 ‘산’이 화자에게 명령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화자가 처한 힘들고 비참한 삶의 현실을 강조하여 드러내고 있다.
산이 파먹으라고 명령한 흙이 상징하는 의미는 '가난한 삶'이다. 흙은 파내는 삽에는 '고된 노동'의 의미가 담겨있다. 쑥굴헝은 '벗어나기 힘든 처지', 쑥은 '힘없고 나약한 존재'로 화자는 고달픈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이처럼 산은 화자에게 냉소적으로 절망적인 현실을 인식시켜, 땅이나 파며 가난한 생을 이어가야 하는 숙명의 구렁에서 비극적인 절망을 느끼고 있다. 노동만 하다 죽은 아비처럼, 배고픔의 구렁에 빠진 어미처럼 지독하고 가난한 삶을 살다가 울라고 한다. 끝내 '흙이나 파먹다 죽으라'는 말은 마치 순순히 따르고 있으라는 의미로만 다가오진 않는다.
시인은 《저문 강에 삽을 씻고》라는 시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주로 내가 사는 시대의 모순과 그 속에서 핍박받는 사람들의 슬픔에 관해 써왔지만, 그것이 진정한 신념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데 이르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긴다."라는 말을 했다.
이 시에는 노동자들의 저항 정신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산이 우리에게 흙이나 파먹다 죽어버리라고 했을까?
아래는 이 작품의 원작인 '박목월-산이 날 에워싸고'이다. 이 작품과의 공통점은 1)화자에게 말하는 방식과 2)유사한 통사구조의 반복 3)변형된 수미상관이며, 차이점은 1)원작은 긍정적 시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2)이 작품은 부정적 시어를 사용하고 있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청록집》(1946)
시인의 말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주로 내가 사는 시대의 모순과 그 속에서 핍박받는 사람들의 슬픔에 관해 써왔지만, 그것이 진정한 신념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데 이르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긴다. 이러한 성과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한 시대의 사회적 모순이야말로 바로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원동력이며 억압받는 사람들의 슬픔이 어느 땐가는 밝은 웃음으로 꽃필 것임을 나는 믿는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80년대의 처음부터 너무 큰 충격을 받아왔던 탓일까.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되었고, 감각의 촉수는 그만큼 무뎌져 있었다. 살아오면서 모서리가 닳고 뻔뻔스러워진 탓도 없지 않으리라. 입술을 깨물면서 나는 다시 시의 날을 벼린다. 일상을 그냥 일상으로 치부해버리는 한 거기에 시는 없다. 일상 속에서 심상치 않은 인생의 기미를 발견해내는 일이야말로 지금 나에게 맡겨진 몫이 아닐까 싶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외친다. 나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지 않고 당신들의 당신들의 당신들의 가슴을 울리기를 기대하면서.
《詩를 찾아서》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미움의 언어에 길들어왔다. 분노의 감정이 나를 지배하는 동안에만 시가 씌어졌고 증오의 대상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나는 나의 말로부터 해방되고 싶고 가능하다면 나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됐으면 싶다. 이제 길을 나서기는 했는데 나와 내 말이 어디에 가 닿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돌아다보면 문득》
세상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
누구 말이던가. 문득 이 말이 떠오른다.
나는 병이 없는데도 앓는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스스로 세상 밖에 나앉었다고 생각했으나
진실로 세상일을 잊은 적이 없다.
세상을 잊다니! 세상이 먼저 나를 잊겠지.
일탈을 꿈꾸지만 나는 늘 제자리 걸음이다.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는 이 막막함이란 '거울나라의 엘리스'만 겪는 고통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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