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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 '유자소전' 일부

유자소전(兪子小傳) -이문구 〈전략〉 5 1970년, 내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예총회관의 문인협회 사무실에서 협회 기관지 「월간 문학」을 편집하고 있을 어름이었다. 어느 날 난데없이 유자가 불쑥 찾아왔다. 10년도 넘어 된 해후였다. 이산(怡山)의 시처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했더니, 그는 재벌 그룹 총수의 승용차 운전수가 되고, 나는 글이라고 끄덕거려 봤자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가 없는 무명 작가가 되어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가 잡지를 보다가 우연히 나를 알아보고, 그 잡지사에 전화로 내 소재를 찾는 번거로운 절차를 무릅쓰고 찾아온 데에는 그 나름의 속셈이 한 가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대학 교수의 부인이 된 자기 누이동생을 내게 중매해 봤으면 하고 찾아본 것이었..

문학/소설전문 2020.09.29

설총 '화왕계' 문제

화왕계 문제 ※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신은 옛날에 화왕(花王)1)이 처음 왔을 때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화왕을 향기로운 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삼춘을 당하여 예쁜 꽃을 피우니 이는 다른 꽃보다 유달리 뛰어났다 합니다. 이에 가까운 곳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탐스러운 영기(靈氣)2)와 요요한3) 향기를 풍기므로 온갖 꽃들은 분주히 화왕을 뵙고자 하였으며, 오직 그 뜻을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합니다. 이 때, 한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붉은 얼굴, 옥 같은 이에 깨끗한 옷으로 몸을 단장하고 홀로 맵시있게 화왕의 앞으로 나와 말하였습니다. “첩은 흰 눈 같은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대하며, 봄비에 목욕하여 때를 씻고 상쾌한 맑은 바람을 쐬고 사는데 이름..

문학/고전운문 2020.09.29

성석제 '오렌지맛 오렌지' 전문

오렌지 맛 오렌지 성석제 비읍은 편집부에 새로 들어온 1)신참치고는 아는 게 많았다. 그런데 그가 아는 건 모두 조금씩 틀렸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보다는 사전이나 그 사전을 끼고 십 년 이상 먹고 살아온 우리를 의심하는 쪽을 택해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실수를 할 때마다 그의 별명을 그 실수를 상징하는 말로 바꾸어 줌으로써 복수를 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비읍 씨. 일 안하고 아침부터 거기서 뭐 해요?” “차장님. 저 문방구 앞에서 우산 들고 있는 아가씨 다리 참 죽여 줍니다. 가히 뇌살적이군요.” “비읍 씨. 이거 비읍 씨가 교정 본 거죠? 그렇게 2)뇌살 좋아하면 3)쇄도(殺到)를 살도라고 하지 왜 그냥 놔 뒀어요?” “하하하...

문학/소설전문 2020.09.25

구효서 '카프카를 읽는 밤' 전문

카프카를 읽는 밤 -구효서 그녀는 아주 밝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패션 용어를 빌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이트 핑크/플레어 라인 실루엣을 걸치고 있었다고 해야 맞겠다. 지루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용어는 내가 그녀와 작별하고 대략 32시간정도 경과한 뒤 광주 고속버스 터미널 구내매점에서 산, 매일경제 신문사 발행 에서 발견했다. 를 산 건 거의 충동적인 동기에서였다. 표4에 장 콕토의 연필 데생인 듯한 카프카 초상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것이다. 을지서적 주식회사의 기업 광고였다. 서울행 버스에 올라 좌석을 확인하고, 카드를 섞듯 타르륵 책을 넘기다 우연히 패션 정보란을 보았다. 색깔만 조금 달랐을 뿐 그녀가 입었던 것과 똑같은 모양의 옷을 옥소리라는 탤런트가 입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x라인 실..

문학/소설전문 2020.09.25

이동하 '파편' 전문

파편 이동하 죽음이란 어차피 그런 것이라고는 해도 숙부(叔父)의 경우는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부음(訃音)에 접한 것은 저녁상을 막 물리고 난 때였다. 오토바이를 부르릉거리며 온 사내가 종이쪽지 하나를 훌쩍 던져 주고 사라졌는데, 그것이 바로 숙부의 죽음을 알리는 부음이었던 것이다. 막 배달된 석간 신문을 대하듯 나는 그 쪽지를 열어 보았다. ― 부 친 별 세 종 수 가로로 가지런히 늘어놓인 낱말들을 그렇게 여섯 글자로 쉽게 조립되었다. 밖은 춥고 어두웠다. 크고 찬 손이 갑자기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끼고 나는 잠시 몸을 떨었다. 아내가 현관 불을 껐다. “무슨 전보예요?” 불안한 얼굴로 아내가 물었다. 거실의 밝은 불빛 아래서 나는 다시 내용을 확인했다. 부친 별세 종수 ― 그밖에 달리 해독될 여지란 ..

문학/소설전문 2020.09.25

최윤 '푸른 기차' 전문

푸른 기차 - 최 윤 「이 사람에 대한 충분하고도 만족스러운 자서전을 위한 어떤 자료도 없음을 나는 확신한다. 이것은 문학으로서는 수리할 수 없는 손실이다.」 ―허먼 멜빌, ‘법률서기 바틀비’ 아 ―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이상, ‘권태’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해 충분하고도 만족스런 어떤 자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은 아닐 것이다. 그의 삶은 흔적 없고 매끄러우며 아무에게도 이해되지 못할 것이며 어쩌면 이해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삶의 애호가도 아닐 것이며 그렇다고 염세가도 아닐 것이다. 그는 고함치지 않으며 흥분하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

문학/소설전문 2020.09.24

오상원 '유예' 전문

유예 오상원 몸을 웅크리고 가마니 속에 쓰러져 있었다. 한 시간 후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손과 발이 돌덩어리처럼 차다. 허옇게 흙벽마다 서리가 앉은 깊은 움 속, 서너 길 높이에 통나무로 막은 문 틈 사이로 차가이 하늘이 엿보인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냄새로 짐작하여 그리 오래 된 것 같지는 않다. 누가 며칠 전까지 있었던 모양이군. 그놈이나 매한가지지, 하고 사닥다리를 내려서자마자 조그만 구멍으로 다시 끌어올리며 서로 주고받던 그자들의 대화가 아직도 귀에 익다. 그놈이라고 불린 사람이 바로 총살 직전에 내가 목격하고 필사적으로 놈들의 사수(射手)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던 그 사람이었을까……. 만일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또 어떤 사람이었을까……. 몸이 떨린다. 뼈 속까지 얼음이 박힌 것 ..

문학/소설전문 2020.09.24

하근찬 '흰 종이 수염' 전문

흰 종이 수염 하근찬 아버지가 돌아오던 날 동길이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다른 다섯 명의 아이와 함께였다. 아이들은 모두 풀이 죽어 있었다. 어떤 아이는 시퍼런 코가 입으로 흘러드는 것도 아랑곳없이 눈만 대고 깜작거렸고, 입술이 파랗게 질린 아이도 있었다. 여생도 둘은 찔끔찔끔 눈물을 짜내고 있었다. 축처진 조그마한 어깨들이 볼수록 측은했다. 그러나 동길이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두 주먹을 발끈 쥐고 있었다. 양쪽 볼에는 발칵 불만을 빼물고 있었고, 수박씨만한 두 눈은 차갑게 반짝거렸다. '울엄마 일하는데 어떻게 학교에 오는공. 울아부지 안제 돈 많이 벌어 갖고 돌아오면 다 줄낀데 자꾸 지랄같이.....' 동길이는 담임선생의 처사가 도무지 못마땅하여 속으로 또 한번 눈을 흘겼다. 쫓..

문학/소설전문 2020.09.24

이청준 '줄' 전문

줄 -「줄광대」 이청준 1 “여봐.” “…….” “여봐, 자?” “…….” 나는 여자를 버려두고 담배에다 새로 불을 붙였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는 여자가 먼저 약속을 어겨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밤이 한결 더 조용해진 것 같다. ─빨리 불 끄고 자요. 아까 여자는 슈미즈 바람이 되자마자 재촉을 해댔다. ─이봐, 난 네가 여자기 때문에 돈 주고 사온 게 아니야. 여자는 이불 깃을 턱으로 끌어 올리더니 한참 눈을 껌벅이고 있었다. ─혼자 있기가 뭣해서 부른 것뿐이니까 여기서 밤을 지내주기만 하면 돼. 여자는 그제야 조금 웃었다 ─당신은 좀 이상한 분이군요. ─대신 나보다 먼저 자서는 안 돼. 여자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눈을 감아버렸다. 삼백 원이면 싸다고 생각했다 몇..

문학/소설전문 2020.09.24

장끼전 전문

장끼전 하늘과 땅이 비로소 열릴 때 만물이 번성하니, 그 가운데 귀한 것은 인생이며 천한 것은 짐승이었다. 날짐승도 삼백이고 길짐승도 삼백인데 꿩의 모습을 볼라치면 의관은 오색이오 별호는 화충이다. 산새와 들짐승의 천성으로 사람을 멀리하여 푸른 숲속 시냇가에 휘두러진 소나무를 정자 삼고, 상하로 펼쳐진 밭과 들 가운데 널려 있는 곡식을 주워 먹고 살아간다. 그러나 임자 없이 생긴 몸이라 관포수(官砲手)와 사냥개에게 툭하면 잡혀가서 삼태육경 수령방백 새와 들짐승과 다방골 제갈동지들이 싫도록 장복(長服)하고 좋은 깃 골라내서 사령기(使令旗)에 살대 장식과 전방 먼지털이며 여러 가지에 두루 쓰여지니 그 공적이 적다 하겠는가? 평생을 두고 숨어 있는 자취와 좋은 경치를 보고자 하여, 구름 위로 우뚝 솟아오른 높..

문학/소설전문 2020.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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