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 나리든 봄비는 지리하던 밤과 같이
새벽바람에 고요히 깃을 걷는다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축축하게 젖은 땅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은 어이도 이리 쓸쓸하여……
볕 엷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어
깨어진 새검파리*로 성을 쌓고 노는
두셋의 어린 아이
무너진 성터로 새어가는
한떨기 바람에
한숨지고 섯는 늙은이의
흰 수염은 날린다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불어가는 바람에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오-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솟는 눈물이여!
그러나 나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보았나니
철벽을 깨트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까지
오―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
- 김해강, '봄을 맞는 폐허에서'
*새검파리 : 깨어진 사기그룻 조각.
시낭송 | 감상하기 |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감상적, 애상적, 비탄적
• 구성
1~2연 : 봄빛이 가득한 상황이지만 쓸쓸한 옛 뒤안
3~4연 : 폐허의 공간에 찾아온 봄
5~6연 : 폐허 속에서 가져 보는 희망
• 주제 : 폐허에서 봄을 맞아 느끼는 심회
• 출전 : <영랑시집>(1935)
이해와 감상
김해강은 활동 초기, 프로 문학 운동이 왕성할 때에는 동반 작가로서 경향적인 시를 많이 발표하였으나, 1930년대 후반부터는 순수 서정 시인으로서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통한 한국의 전통적 서정 세계를 주로 노래하였다. 이 시는 그의 초기시 세계를 잘 보여 주는 경향적 작품이다.
*경향시 : 사회주의 사상에 많이 기울어진 시 특정한 사상이나 주의(主義)를 선전하려는 목적이 강한 시. 주로 사회주의 사상에 부합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에 감상적인 개인주의 시에 대한 반발로 등장
어제까지 나리든 봄비는 지리하던 밤과 같이
새벽바람에 고요히 깃을 걷는다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축축하게 젖은 땅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은 어이도 이리 쓸쓸하여……
1∼2연은 간밤의 봄비가 그치면서 봄빛이 가득한 세상을 보여 준다. 그러나 봄비는 지리한 밤과 함께 새벽바람에 물러가고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땅 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을 돌아본 시적 자아는 그저 쓸쓸함을 느낄 뿐이다. 이 때, '옛 뒤안'은 단순히 집 뒤의 공터라는 의미보다는 그 동안 식민지 시기의 온갖 고난과 역경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볕 엷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어
깨어진 새검파리*로 성을 쌓고 노는
두셋의 어린 아이
무너진 성터로 새어가는
한떨기 바람에
한숨지고 섯는 늙은이의
흰 수염은 날린다
3∼4연에서 시적 자아의 시야는 집 밖의 세상으로 확대된다. 그 곳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이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 놀고 있는 한가로운 장소이지만, 회한에 잠겨 '한숨지고 섯는 늙은이'의 흰 수염이 바람에 날리는 '무너진 성터'로서, 봄을 맞는 폐허의 구체적 공간적 배경이 된다. 그러나 이 때의 '무너진 성터'는 폐허의 대유적 표현이며, 이는 곧 나라를 잃은 망국의 국토를 상징한다.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불어가는 바람에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오-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솟는 눈물이여!
그러나 나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보았나니
철벽을 깨트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까지
오―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
5∼6연에서 시적 자아의 현실 인식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시적 자아는 그대로 폐허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다시 찾아온 봄에 의탁해 막연하나마 희망을 실어보낸다. 그러나 정면으로 맞서지도 나서지도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은 고작 두근거리는 가슴 속에 눈물을 삼키는 회한으로 표현된다. 그렇지만 그는 '새벽바람에 달음질 치는 동무'를 봄으로써 이러한 막연한 희망에서 구체적인 현실적 방법의 모색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 동무는 아마도 남몰래 노동 운동을 하거나 지하 정치 운동을 하는 젊은이리라. 시적 자아는 드디어 '철벽을 깨뜨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를 '가슴을 바쳐' 기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의 이 작품은 '이 폐허에도 봄은 찾아 왔건만'의 표현에서 보듯 두보(杜甫)의 시 <춘망(春望)>의 모티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시는 전반부의 봄을 맞는 비관적 정조에서 벗어나 주체의 현실적 자각을 획득함으로써, 현실을 뚜렷이 응시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마지막 연의 '그러나 나는'에서 보듯, 시상의 전환과 함께 분명하게 시적 자아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는 점은 이러한 현실 인식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경향시의 대표적 특징인 것이다.
춘망(春望) - 두보
춘망(春望) - 두보 나라는 깨어졌으나 산하는 그대로 성(城)에 봄 들어 초목이 우거졌네 시절을 느껴 꽃도 눈물을 쏟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도 놀라네 봉화가 삼월에도 이어져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 값 흰 머리는 긁을수록 짧아져 도무지 비녀를 못 이길 지경이네 |
원문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
두시 언해 (1481년) 나라히 파망ᄒᆞ니 뫼콰 ᄀᆞᄅᆞᄲᅮᆫ 잇고 잣 아ᇇ 보ᄆᆡ 플와 나모ᄲᅮᆫ 기펫도다 시절을 감탄(感嘆)호니 고지 누ᇇ므ᄅᆞᆯ 셔리게코 여희여슈믈 슬후니 새 ᄆᆞᅀᆞᄆᆞᆯ 놀래노다 봉화(烽火)ㅣ 석 ᄃᆞᄅᆞᆯ 니ᅀᅥ시니 지ᄇᆡᆺ 음서(音書)ᄂᆞᆫ 만금(萬金)이 ᄉᆞ도다 셴 머리ᄅᆞᆯ 글구니 ᄯᅩ 뎌르니 다 빈혀를 이긔디 묟ᄒᆞᆯ ᄃᆞᆺᄒᆞ도다 |
*두보가 아내와 자식을 만나러 가다 안녹산의 군대에게 붙잡혀 장안에 연금되었을 때인 757년에 지은 작품으로, 1481년(성종 12년) 간행된 《분류두공부시언해》(일명 두시언해)에 한국어로 번역(언해)되어 실렸다.
*시의 배경 : 안사의 난으로 8년 간의 전란에 시달려 많은 농민들이 죽고, 나라의 정치 제도는 무너지게 되며 당은 쇠퇴기로 접어들게 된다. 또한 위구르족 등 이민족에 의해 수도 장안이 함락되면서 당나라 전 국토가 유린당하며 황폐해진다. 이 전란으로 인해 전국의 인구는 293만 호로 13년 전의 890만 호에 비해 70%의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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