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속에 섞여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때의 헛된 집착으로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稙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 기형도, '식목제'
*목책(木柵) 말뚝 따위를 죽 잇따라 박아 만든 울타리. 또는 잇따라 박은 말뚝.
*입상(立像) 서 있는 모습으로 만든 상(像).
시낭송 | 감상하기 |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율격 : 내재율
• 성격 : 회상적. 상징적
• 어조 : 연민과 회상의 어조
• 구성
1행~13행 : 아득한 과거의 삶에 대한 회상
14행~26행 : 무상하고 절망적인 현재의 삶
27행~36행 : 과거 회상을 기반으로 한 앞으로의 삶
• 제재 : 나무 심기
• 주제 : 유년의 아픔에 대한 회상
• 출전 : <입 속의 검은 잎>(1989)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나무를 심은 뒤에 떠오르는 상념(想念)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작품 속에 나오는 내포 청자(聽者)인 ‘너’는 화자가 이제 막 심은 조그만 나무인데, 화자는 이 나무를 향해 연민을 표현하고 있다. 이 나무는 유년 시절의 화자 자신을 의미하며, 이 시는 유년의 고통스런 기억을 회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화자는 그 시절의 고통과 절망감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라는 말로써 관조적인 성찰과 생(生)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가 앞으로도 영원히 그 유년의 아픔을 잊지 못할 것임을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라는 반어적인 표현이 커다란 울림을 이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나무의 과거, 현재, 미래 속에서 자신의 삶을 떠올리고 있다. ‘흙 속’의 뿌리는 현재와 미래의 삶의 기반이 되고 바탕이 되는 과거의 삶, 경험, 기억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과거는 자신의 삶의 뿌리이지만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며 ‘숨죽여 세워’ 둔 우울한 것들이다. 그리고 현재의 삶의 공간은 ‘이파리’로 자라고 있는 모습인데, 이 역시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 절망적인 것이다. 미래 또한 뻗어 나가는 ‘줄기’로 형상화되고 있으나 유년의 기억 때문에 ‘소스라치’면서 좌절되고 만다. 이와 같이 시적 화자는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공간을 나무의 성장이라는 수직적인 공간으로 그리면서 우울하고 절망적인 삶을 노래하고 있다.
작가 기형도(1960. 3. 13. ~ 1989. 3. 7.)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언론인이다. 경기도(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송림면 연평리 392번지의 피난민 가정에서 3남 4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인 1965년에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 701-6호)로 이사하였다. 특히 대표 시 <안개>는 소하동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였다고 한다.
서울시흥초등학교, 신림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197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문학 동아리인 연세문학회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경기도 안양시의 모 부대에서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교 4학년 때인 1984년 10월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일했다.
시집 출간을 앞두고 있었으나 1989년 3월 7일 새벽 4시,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파고다극장에서 소주 한병을 든 채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당시 만 28세로,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다. 그렇게 "입속의 검은 잎"은 데뷔 이후 첫 시집이자 유고작으로 남았다.
그는 천주교 수원교구 안성추모공원에 묻혔다. 뇌졸중은 일종의 가족력으로, 그의 아버지가 이로 인해 쓰러진 것에 대해 자신도 그럴 것이라는 비관적인 사고를 생전에 가졌다고 한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 입속의 검은 잎 - 詩作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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