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방공호 위에
어쩌다 핀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호(壕) 안에는
아예 들어오시질 않고
말이 숫제 적어지신
할머니는 그저 노여우시다
-진작 죽었더라면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지 않았으련만......
글쎄 할머니
그걸 어쩌란 말씀이셔요.
숫제 말이 적어지신
할머니의 노여움을
풀 수는 없었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인제 지구가 깨어져 없어진대도
할머니는 역시 살아계시는 동안은
그 작은 꽃씨를 받으시리라.
- 박남수,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시낭송 | 감상하기 |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문명 비판적, 고발적, 주지적, 희망적, 의지적
• 표현 : 대화체, 스피노자의 격언을 원용
• 어조 : 할머니에 대한 애정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담긴 어조
• 구성 : 수미상관(반복과 변조)
• 특징
① 전쟁에 대한 비판의식을 동화적 분위기의 작품 속에 표현함
② 할머니의 혼잣말과 화자의 대답이 대화적 상황을 이룸
• 표현 : 대조 - 전쟁의 참혹함과 할머니의 정성스러운 마음(애정의 숭고함이 채송화라는 작은 사물을 통하여 전쟁의 비정함, 야만스러움과 대조)
• 제재 : 할머니, 꽃씨
• 주제:
① 애정의 숭고함, 따뜻한 사랑 (허준의 '잔등'이라는 소설 연상)
② 전쟁의 폭력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
• 출전 : 시집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
이해와 감상
대개의 서정시에는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이 없고 짤막한 장면만 제시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장면의 모습도 일정한 상황을 이루기 마련이다. 그것을 시에서는 작중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를 이해하는데 긴요한 작중 상황은 무엇일까? 어떤 할머니가 채송화 꽃씨를 받고 있는데, 작중화자가 그 사실을 노래한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불충분하다. 할머니는 보통 시절에 흔히 있는 꽃밭에서 꽃씨를 받고 있는 중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어휘는 '방공호'이다. 방공호란 전쟁 중에 공습을 피하기 위해 파 놓은 것이다. 이 방공호는 지금 사용 중인가? 둘째 연을 보면 이에 대한 답이 나올 수 있다. '호 안에는 아예 들어 오시질 않고'란 구절로 보아 이 방공호는 현재 사용 중인 것이며,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셋째 연에 가보면 사정이 더 확실해진다. '할머니는 진작 죽었더라면~~~'이라고 말한다. 즉,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전쟁 속에서 할머니는 차마 보지 못할 끔찍한 일들을 다 보고 한탄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이 시의 작중 상황은 '끔찍한 희생과 파괴를 낸 전쟁이 아직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한 할머니가 방공호 위에 우연히 핀 채송화의 꽃씨를 받고 있는 장면'
이런 상황을 아는 것이 시를 이해하는 데 어째서 중요한가? 이 시의 핵심은 전쟁의 참혹함과 조그만 생명이라도 아끼는 할머니의 정성스러운 마음의 대조에 있다. 시인은 다른 꽃도 아닌 채송화를 이 시에 등장시켰다. 채송화는 꽃 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는 꽃이다. 더욱이 전쟁 중의 방공호 위에 우연히 핀 채송화쯤이야 보통 사람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갖은 끔찍한 일을 겪으면서도 할머니는 조그만 생명의 아름다움까지 사랑하고, 내일을 위하여 그 씨앗을 받아 두는 알뜰함을 보인다. 전쟁은 사람들에게서 희망과 사랑과 내일에 대한 소망을 모두 빼앗아 가 버렸지만 이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은 굳게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애정의 숭고함이 채송화라는 작은 사물을 통하여 전쟁의 비정함, 야만스러움과 대조되는 데에 이 시의 의미가 놓인다. 작품 속에 간접적으로만 암시되어 있는 작중 상황을 바르게 알아 내지 못한다면 이러한 의미는 밝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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