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회고적, 성찰적, 자조적, 영탄적
- 제재 : 젊은 날의 삶
- 주제 : 젊은 날의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
- 특징 : 미래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과 고백체의 어투, 감탄형 어미를 사용하여 반성의 내용을 강조함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방황과 번민으로 젊은 날을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조적 성찰, 통렬한 자기반성을 미래의 어느 시점을 가상으로 담아낸 작품으로 화자는 시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삶에 대한 후회와 성찰을 담고있다.
화자는 먼 훗날 되돌아보게 될 자신의 삶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질투뿐인 삶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여기서 ‘질투’의 의미는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한 채 욕망으로 번민했다는 뜻이다.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등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삶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감탄형 어미를 반복 사용해 '젊은 날에 대한 탄식과 반성'을 드러낸다. 그래서 삶의 주체로서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작품이다.
미래의 ‘나’가 현재의 ‘나’를 반성적으로 바라보며 성찰하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은 현재에 대한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하는 효과가 있다. 시인은 미래의 시점을 통해 젊은 날을 깊고 넓게 조망하고 성찰하며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1,2행은 미래에 바라볼 현재 '나'의 모습으로 '떨어뜨리리'라는 미래형 시제를 사용해, 미래의 입장에서 현재를 반성하는 화자의 상황이 드러나 있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3~6행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를 통해 생산과 창조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 머뭇거렸구나'는 헛된 이상에 매달려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머뭇거려 온 모습을 의미,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가 나타난다.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7~11행에서는 질투뿐인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탄식'은 후회밖에 없음을, '청춘' 미래에서 바라본 '현재'로 화자의 젊은 시절을 상징한다.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 보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라는 표현을 통해 아무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고, 내가 희망한 것은 오로지 질투뿐이었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적 태도가 드러난다.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12~14행에서는 스스로도 사랑하지 않았던 삶에 대한 성찰로 '짧은 글'은 반성의 기록을, '사랑'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미래의 나'를 통해 평가와 반성을 하고 있다.
‘나’의 젊은 시절은 감각적인 언어와 감탄형의 어미로 성찰하고, 절망과 비극의 정조를 통해 구체화되는데, 이는 지칠 줄 모르고 헤맨 ‘나’의 삶이 타인에 대한 질투였을 뿐 나 자신을 사랑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인은 자신을 사랑할 줄 모랐던 삶에 대한 뼈저린 후회와 반성을 ‘미래의 나’의 자조섞인 목소리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헛된 이상에 매달려 무언가를 이루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기만 했던 자신의 청춘에 대한 자조감은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 뿐이었구나'와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라는 시구에서 절망적인 탄식으로 이어진다.
이 시구는 젊은 날의 사랑과 열정을 통째로 부정하는 고통스런 고백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사랑하라는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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