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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문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김승옥 1. 축전(祝電) [가하] 오빠. 부호(符號)라는 걸 만든 이에게 평안 있으라. 엉망진창이 된 나의 감정을 감정의 뉘앙스라는 점에서는 완전히 인연 없는 의사(意思) 전달수단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이 신기함이여. 그렇지만 고향의 누이는 꽃봉투 속에 든 전문(電文) ―을 읽을 게 아니냐고? 맙쇼. 어깨 한 번 으쓱하면 다 통해 버리는 감정표시를 양영화에서 나는 좀 더 먼저 배운걸. 2. 프로필 김형. 우리는 취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닐까요? 그렇지만 자칭 소설가라는 그 작자는 술에 취해서 벌개진 얼굴을 제법 심각하게 찌그러뜨려 가지고, 허지만, 형씨, 우리는 그리워하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닐까요? 그렇게 대답하며 이 작자는 자기의 턱에 듬성듬성 난 수염을 손으로 슬슬 ..

문학/소설전문 2021.01.19

임철우 '아버지의 땅' 전문

아버지의 땅 임철우 쫓겨가는 한 마리 딱정벌레처럼 트럭은 저만치 들판 가운데로 난 황톳길을 따라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고르지 못한 노면에서 바퀴가 튀어오를 때마다 덜컹대는 쇳소리가 들려 왔고 꽁무니로 부옇게 마른 먼지가 피어올랐다. 덮개 없는 트럭의 뒤칸에 홀로 쭈그려 앉은 채 실려 가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유난히도 자그맣게 오그라들어 있어 보였다. 뒤칸에 적재된 알루미늄 식깡들이 이따금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금속성의 광선을 되쏘곤 했다. 풀잎들이 저마다 윤기를 잃어 가고 있는 들녘과 차츰 잿빛으로 퇴색해 가기 시작하는 야산의 정지된 풍경 속에서 그것은 안간힘을 쓰며 집요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단 하나의 운동체였다. “더럽게 운도 없는 녀석이군. 전입해 온 지 보름만에 초상을 치르다니.” 바지를 까내리..

문학/소설전문 2021.01.19

김동리 '까치소리' 전문

까치소리 김동리 단골 서점에서 신간을 뒤적이다 『나의 생명을 물려 다오』하는 얄팍한 책자에 눈길이 멎었다. ‘살인자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생명을 물려준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나는 무심코 그 책자를 집어 들어 첫장을 펼쳐 보았다. ‘책머리에’라는 서문에 해당하는 글을 몇 줄 읽다가 나도 어릴 때는 위대한 작가를 꿈꾸었지만, 전쟁은 나에게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어 주었다는 말에 왠지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비슷한 말은 전에도 물론 얼마든지 여러 번 들어 왔던 터이다. 그런데도 이날 나는 왜 그 말에 유독 그렇게 가슴이 뭉클해졌는지, 그것은 나도 잘 모를 일이다. 위대한 작가를 꿈꾸었다는 말에 느닷없는 공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나는 그 책을 사왔다. 그리하여 그날 밤, 그야말로 단숨에 독파를..

문학/소설전문 2021.01.19

이청준 '서편제' 전문

서편제 이청준 차례 서편제 소리의 빛 작가 노트 ‘의 희원’ 선학동 나그네 작가 노트 ‘우리의 영혼 위에 날아오르는 학’ 서편제 남도사람․1 이청준 여자는 초저녁부터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줄창 소리를 뽑아대고, 사내는 그 여인의 소리로 하여 끊임없이 어떤 예감 같은 것을 견디고 있는 표정으로 북장단을 잡고 있었다. 소리를 쉬지 않는 여자나, 묵묵히 장단 가락만 잡고 있는 사내나 양쪽 다 이마에 힘든 땀방울이 솟고 있었다. 전라도 보성읍 밖의 한 한적한 길목 주막. 왼쪽으로 멀리 읍내 마을들을 내려다보면서 오른쪽으로는 해묵은 묘지들이 길가까지 바싹바싹 다가앉은 가파른 공동 묘지―그 공동 묘지 사이를 뚫어나가고 있는 한적한 고갯길목을 인근 사람들은 흔히 소릿재라 말하였다. 그리고 그 소릿재 공동 묘지 길의..

문학/소설전문 2021.01.19

서정인 '강(江)' 전문

강(江) 서정인 "눈이 내리는 군요." 버스 안. 창쪽으로 앉은 사나이는 얼굴빛이 창백하다. 실팍한 검정외투 속에 고개를 웅크리고 있다. 긴 머리칼은 귀 뒤로 고개 위에 덩굴 줄기처럼 달라붙었는데 가마 부근에서는 몇 낱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섰다. "예. 진눈깨빈데요." 그의 머리칼 위에 얹힌 큼직큼직한 비듬들을 바라보고 있던 옆엣 사람이 역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목소리가 굵다. 그는 멋내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얀 목도리가 밤색 잠바 속으로 그의 목을 감싸 넣어 주고 있다. 귀앞머리 끝에는 면도 자국이 신선하다. 그는 눈발 빗발 섞여 내리는 창밖에 차츰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다. 버스는 이미 떠날 시간이 지났는데도 태연하기만 하다. "뭐? 아, 진눈깨비! 참 그렇군." 그들 등 뒤에서 털실로 ..

문학/소설전문 2021.01.19

김학철 '종횡만리' 전문 일부

종횡만리 김학철 1. 장사보위전(1938) 적군의 발광적인 공격을 일단 물리치고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처참한 수라장으로 벼해 버린 야산 밑에서, 조선의용군의 분대장 양수봉이 전장의 뒷거둠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포탄에 중동이 뭉청 끊겨져나간 나도밤나무 등걸에다 목덜미만 거북살스레 기댄 채 몸져누워 있는, 중상을 입은 듯 싶은 일본 병사 하나를 발견하였다. 양수봉은 워낙 천품이 너그러운지라 그 부상한 적병을 아군의 붕대소로 데려가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곧 행동으로 넘어갔다. 부상한 적병은 가까이에 인기척을 느낀 모양으로 힘없이 감았던 눈을 거슴츠레 떴다. 네 눈이 마주쳤다. 양수봉이 저도 모르게 무춤 발을 멈추는 것을 보자 그 일본 병사는 성한 손으로 피에 젖은 군복의 호주머니를 더듬었다. 그 동작을 양..

문학/소설전문 2021.01.14

강소천 '꿈을 찍는 사진관' 전문

꿈을 찍는 사진관 강소천 따사한 봄볕은 나를 자꾸 밖으로 꾀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어젯밤만 해도 내일은 일요일이니 어디 나가지 말고, 방에 꾹 들어박혀 책이라도 읽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정작 조반을 먹고 나니, 오늘은 유달리 날씨가 따뜻했습니다. 나는 스케치북과 그림 물감을 가지고 뒷산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굉장히 그림을 잘 그리거나 그림에 취미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빈손으로 가기는 싫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들고 앉아 그 따사한 봄볕에 책을 읽는 것은 한층 더 싱거울 것 같았습니다. 봄을 그리려고 산에 오른 이 서투른 화가는, 좀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는 것보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리하여 내 눈이 맞은편 산허리에 갔을 때, 거기에는 활짝..

문학/소설전문 2021.01.14

황석영 '아우를 위하여' 전문

아우를 위하여 황석영 뭔가 네게 유익하고 힘이 될 말을 써 보내고 싶다. 네가 입대해 떠나간 이제 와서 우울한 고향 실정이나 우리의 지난 잘잘못을 들어 여기에 열거해 놓자는 건 아니야. 아무 얘기도 못해 주고 묵묵히 너를 전송했던 형의 답답한 마음을 이해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우리가 지금쯤은 의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어떤 문제를 확실히 해두고, 또한 장래를 굳게 믿기 위하여 내 연애 이야기를 빌리기로 한다. 너는 십구 년 전에 내가 누구를 사랑한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아마 놀랄 거다. 따져봐. 내 열한 살 때가 아니냐. 에이, 이건 오히려 형의 달착지근한 구라를 읽게 됐군, 하며 던져 버리지 말구 읽어주렴. 너 영등포의 먼지 나는 공장 뒷길들이 생각나니. 생각날 거야, 너두 그 학교를 다녔으니까..

문학/소설전문 2021.01.14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전문 일부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한다'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양귀자 두 명의 일꾼은 아침 여덟 시가 지나서 들이닥쳤다. 일의 시작은 때려 부스는 것부터였다. 두 사람이 덤벼들어서 함부로 두들겨 깨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는 그 요란한 소리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망치질 한 번에 여기저기로 튕겨나가는 타일 조각과 콘크리트 파편 때문에라도 더 이상은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목욕탕과 잇대어 있는 주방도 어수선하기론 마찬가지였다. 목욕탕에서 옮겨 온 세간살이가 옹색한 부엌을 더욱 비좁게 만들고 있었다. 그 속에서 아내는 인부들 점심상에 내놓을 푸성귀를 다듬고 있었다. 은혜는 여태껏 텔레비전에 매달려 있는 채였다. 취학 전의 어린애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인데 그로서는 토옹 볼 기회가 없었으므로 아이가 화면에서 나오는 대로 따라 노래를 부..

문학/소설전문 2021.01.14

현진건 '운수 좋은 날' 전문

운수 좋은 날 현진건(玄鎮健)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 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하여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를 동광 학교(東光学校)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첫번에 삼십 전, 둘째 번에 오십 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 한 김 첨지는 십 전짜리 백통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문학/소설전문 202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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