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시낭송 | 감상하기 |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자아 성찰적, 교훈적, 설득적, 비판적
• 어조 : 설득적이고 의지적인 어조
• 제재 : 슬픔, 기쁨
• 주제 : 이기적인 삶에 대한 반성 촉구,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추구, 소외된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 촉구
• 표현 :
① 의인화 기법을 사용하여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음.
② ‘-다’와 같은 단정적 어미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단호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음.
• 구성
1~6행 : 소외받는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7~13행 : 가난한 이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에 대한 비판
14~19행 : 진정한 사랑과 화합을 위한 의지 표현
• 출전 : <슬픔이 기쁨에게> (1979)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슬픔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이기적인 삶의 자세를 반성하고, 사랑을 위해서는 슬픔이 필요하다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기쁨'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이기적인 존재이고, '슬픔'은 남의 아픔을 보듬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자신의 행복에 취해서 자신만의 안일을 위해 남의 아픔에 무관심하거나 그 아픔을 돌볼 줄 모르는 이기적인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청자인 '너'는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일 수 있다.
'모든 진정한 사랑에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은 슬픔을 어머니로 하고 눈물을 아버지로 한다. 사랑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고통 때문이다'
라고 시인은 말한다.
'슬픔'의 시인 정호승은 인간을 옹호하고 민중을 신뢰하는 낙관주의적 태도와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따스한' 작품 세계를 펼쳐 준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슬픔의 내용을 확장시키거나 깊게 하는 일에 몰두하는 시인으로, '슬픔'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시적 사색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전통적인 정서인 한이나 비애의 세계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으로, 그는 이 '슬픔'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의 아픔, 전쟁이나 분단, 독재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상처까지도 끌어안고 따뜻이 위무(慰撫, 불행한 사람이나 수고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어루만지어서 달램)해 준다. 이처럼 그는 현실의 모순 아래서 고통받고 있는 삶을 노래하면서도 그 삶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는 미래 지향적 자세를 보여 준다는 면에서 그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중 시인으로 평가하는데 망설임이 없게 한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에 실려 있는 대표작으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운명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화자인 '나'로 대치된 시인은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서 있다. 그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세상 속으로 고단한 길을 떠난다.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에서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다시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통해 그가 그토록 기다리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슬픈 것들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될 때이다. 이처럼 슬픔에서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시인의 밝은 눈은 자신의 '인생을 내려놓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에다 '슬픔', '기다림', '아름다움'이 저녁 들길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고즈넉하고 쓸쓸함의 정서는 이 시를 더욱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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