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구자명씨
고정희
맞벌이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씨
일곱 달 된 아기엄마 구자명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시낭송 | 감상하기 |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동정적, 비판적, 의식적
• 어조 : 여성의 힘든 삶에 대한 연민을 담은 목소리
• 특징
- 영화의 오버랩 기법처럼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 출근 버스의 풍경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을 상상적으로 유추하고 있다.
- 주인공을 팬지꽃에 비유함으로써 삶의 고단함을 표현했다.
• 구조
- 1연 : 출근버스에서 정신없이 졸고 있는 일곱 달 아기 엄마 구자명씨
- 2연 : 가족 때문에 언제나 밤잠을 설치는 구자명씨
- 3연 : 강요된 여성의 희생 위에서 구축되는 가정의 안식
• 주제 : 일방적인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
• 출전 : <여성 해방 출사표>(1987)
작가 고정희
시인 고정희는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15년간 <실락원 기행>, <초혼제>,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여성해방 출사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등 모두 10권의 시집을 발표한다. 고정희의 시세계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상실현을 꿈꾸는 희망찬 노래에서부터 민족민중문학에 대한 치열한 모색, 그리고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적 탐구와 정열을 감싸 안는다. 그 모든 시에서 생명에의 강한 의지와 사랑이 넘쳐난다.
고정희의 이와 같은 치열한 역사의식과 탐구정신은 5·18 광주 항쟁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즉 그녀는 전통적인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와 민중의 고난과 그 고난 속에서 다져지는 저항의 힘을 힘차게 노래하였던 것이다. 현실사회의 개혁과 더불어 새로운 글쓰기의 혁명은 이처럼 고정희에게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삶의 지향점이었다.
이토록 정직하게, 줄기차게, 자유를 향한 이념을 불태우며 민족, 민중, 그리고 여성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고정희의 문학가로서, 여성운동가로서의 실천은 한국 문학사에 대단히 중요한 귀감이 될 것이 틀림없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페미니즘 위에 서 있는 작품으로 <여성사 연구>연작시 6편 중 제5편에 해당한다. 이 시를 담고 있는 시집은 ‘여성 해방 출사표’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시를 쓴 시인 고정희는 흔히 우리 문학사에서 첫 번째 페미니즘 시인으로 평가된다.
이 시는 가사 노동과 직장 생활이라는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리는 어느 여성의 고달픈 하루 일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침 일찍 먼 곳으로 출근하면서 출근 버스 안에서 졸고 있는 모습, 퇴근 후에도 가족을 위해 쉴 틈조차 없이 일하는 '구자명씨'의 모습은 어쩌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집안일과 직장 생활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의 여성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러한 여성의 고통을 '잠'이라는 소재, '팬지꽃', '안개꽃'의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문학사 #최초 #페미니즘 #시인 #고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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