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대운문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열공햐 2021. 2. 2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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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핵심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작가 : 백석

성격 : 체념적, 회고적, 향토적, 서정적, 사변적

특징 

향토적 소재를 활용하여 정서를 표현함.

흰 바람벽이 마치 영상을 담아 내는 영화의 스크린과 같은 기능을 하여 한 편의 영상시를 보는 느낌을 줌.

어조 : 외롭고 쓸쓸한 삶에 고단해하면서도 자기 성찰의 담담한 어조.

구조 

 - 1~6: 바람벽에 오고가는 외로운 생각들

 - 7~16: 어머니와 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림

 - 17~23: 시적 화자의 운명론적 체념

 - 24~29: 시적 화자의 마음 속에 그려보는 자기 위안의 생각

흰 바람벽

어머니

추운 겨울 배추를 씻음

운명에 대한 체념과 자기 위로

사랑하는 여인

가족과 함께 대구국을 먹음

 

해제 : '흰 바람벽'은 자기 내면의 스크린이라고 볼 수 있다. 시적 화자는 늙은 어머니와 사랑하는 여인을 흰 바람벽에 떠오른 상상 속에 대비시키면서 자신의 운명에 체념하고 자기를 위로한다.

제재 : 바람벽

주제 : 슬픔과 외로움을 딛고 시인으로서의 소명을 이루려는 의지

출전 : <문장>(1941)

 

 

 

이해와 감상

  이 시에서 화자는 현실의 공간인 방에서 자신의 피폐하고 외로운 모습과, 어머니와 사랑하는 여인의 그리운 모습들을 떠올리고 있다. 여기서 흰 바람벽이라는 소재는 마치 화자의 내면 세계를 그대로 보여 주는 영사막과 같다. ‘흰 바람벽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나가기도 하고, 흰 바람벽을 통해 시인의 내면이 담담하고 솔직하게 고백되기도 한다. 이 시는 일정한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으며, 연 구분이 없이 의식의 흐름의 기법으로 서술되어 있다.

 

  쓸쓸하고 외로운 생각 속에서 화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않는다. 반대로 세상 가장 귀한 것들을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만들어진 것이 하늘의 이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화자는 그 자신을, 현실과는 화합할 수 없는 높은존재로 묘사한다. 현실적으로 소외되었다는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하늘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내세운 것은,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고귀한 정신적 세계에서는 결코 패배하지 않겠노라시인의 비장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석우리 민족의 삶을 표현하는데 민속적이고, 향토적 소재를 많이 사용한 시인으로 그의 시에서 '감주, 대구국' 등 음식물이 나오는 것은 가난한 시대의 굶주림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추운 날 배추를 씻는 늙은 어머니와 아이를 옆에 끼고 지아비와 대구국을 먹는 여성을 흰 바람벽에 떠오른 상상 속에서 대비시키면서 자신의 운명에 체념하고 자기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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