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현대운문

폭포 - 이형기

열공햐 2021. 6. 19.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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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 나는 맹목(盲目)*의 물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폭포 - 이형기 

*단말마 : ‘임종(臨終)’을 달리 이르는 말. 숨이 끊어질 때의 모진 고통.

*석탄기 : 고생대 데본기와 페름기의 중간에 있었던 지질 시대의 하나. 거대한 양치식물이 많았고 파충류와 곤충류가 나타났다.
*복안 : 곤충(昆蟲), 새우, 게 따위의 눈처럼 여러 개의 낱눈이 모여서 된 눈

*맹목 : 장님, 소경, 봉사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관념시
• 성격 : 서정적, 관념적
• 제재 : 폭포
• 주제 : 존재에 대한 비극적 인식
• 특징 :
 ① 관념적 이미지로 자연적 소재를 바라보고 있음.
 ② 동음 반복, 통사 구조 반복을 통한 내재적 운율을 획득함.
• 구성 :
 1연 : 시퍼런 칼자국 – 산에 형성된 칼자욱과 같은 폭포
 2연 : 벼랑의 직립 – 벼랑에 형성된 폭포
 3연 : 장수 잠자리 – 폭포의 모습
 4연 : 맹목의 눈보라 – 무언가에 떨어져 흩어지는 폭포
 5연 : 2억 년 묵은 칼자국 – 변하지 않는 폭포

 

 

이형기(李炯基, 1932년 12월 19일 ~ 2005년 2월 2일)

  대한민국의 시인으로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대표 시로는 《죽지 않는 도시》, 《낙화》, 저서로는 시집 《적막강산》, 《그해겨울의 눈》이 있다. 1957년 한국문학가협회상을 수상했다.

 

  1950년 『문예(文藝)』지를 통해 16세 중학생 시절에 등단했으며 한국 문단에서 천재문사로 불려왔다. 그는 1956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였고, 『연합신문』·『동양통신』·『서울신문』 기자, 『대한일보』 정치부장·문화부장, 국제신문 편집국장, 부산산업대 교수, 동국대 국문과 교수,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였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이후 55년에 걸쳐 시(詩)뿐만 아니라 비평과 소설, 수필 등에 걸쳐 창작 활동을 펼쳐왔다. 본격적인 시인으로서의 자각을 얻게 된 계기는 세 번째 시집 『꿈꾸는 한발(旱魃)』에 이르러서이다. 시인은 이 시집의 서문에서 “비로소 시인이란 자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토로하면서 “시란 필경 언어로써 구축되는 가공(架空)의 비전”(『꿈꾸는 한발』자서)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자연발생적 서정을 중시하는 전통시와 결별하였다.

 

  시인으로서의 철저한 자각에서 배태된 부정의 언어는, ‘현대성’의 선구로 간주되는 보들레르와 셰스토프, 카뮈와 같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항한 서구시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론과 시론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그의 문학세계를 요약할 수 있는 시론적 명제는 묵시록적 의식과 우로보로스의 미학이다.

 

  이형기가 시론적 수준에서의 구체적인 논의를 개진하게 된 것은 1962년 『현대문학』에 평론 「상식적 문학론」을 연재하던 무렵부터 시작된 활발한 평론활동을 발단으로 한다. 그의 시론적 입장은, 『감성의 논리』(1976), 『한국문학의 반성』(1980), 『시와 언어』(1987) 등의 저술을 거쳐, 시창작 입문서라 할 수 있는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1991), 『시란 무엇인가』(1993), 그의 마지막 시집 『절벽』(1998)과, 고희기념 시선집인 『낙화』(2002), 『아포리즘집: 존재하지 않는 나무』(2000)에 아포리즘 형식으로 표명되어 있다.

 

  『감성의 논리』를 비롯한 5권의 시론집과 다양한 저술들 속에는 세 개의 범주로 묶여지는 중요한 시론적 이슈가 자리 잡고 있다. 첫째는 현대라는 공간에서 시라는 것이 가지는 세계관적 의미와 언어예술행위로서의 시의 개념에 관한 학술적인 시론이다. 둘째는, 시적인 분석을 위한 가이드로서, 특히 현대시의 수사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평론적 시론이다. 셋째는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1991), 『시란 무엇인가』(1993)와 같은 창작론적인 가이드 혹은 시집에 분재된 방식으로 표명된 시론적 단상이다.

 

  이러한 시론적 입장은 1963년에는 이어령과의 문학논쟁에서 이미 제기된 평론표절과 모방문학론 문제에서부터 맹아를 엿볼 수 있다. 이형기는 1960년대 한국 문단을 뜨겁게 달구었던 순수논쟁, 참여논쟁에서 예술가의 개성적 자유를 옹호하고, 순수문학의 치열한 시정신을 강조했는데, 이 같은 문학세계는 이후 줄곧 견지되었다.

 

  이형기의 시세계를 개괄적으로 바라보면 3단계 정도로 규정된다. 초기시의 자연발생적인 낭만적 순수 서정의 모습으로부터 ‘복수의 미학’ 혹은 ‘독의 미학’으로 평가되는 악마적인 감수성을 내보이는 중기시를 거쳐, 허무와 폐허의 현실을 직시한 문명비판자 혹은 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후기시의 ‘모순과 파멸의 미학’에 이르기까지 극적으로 전개된다. 날카로운 언어적 직관을 내보이는 중기의 시세계는 1998년에 발간된 『절벽』에서 엿보이며, 실존의 탐구와 허무의식으로 전개되는데, 이 시집은 “소멸에 대한 인식과 불교적 인식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평가되며 이는 그의 후기시를 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초기시는 내밀한 서정성을 주조로 한 시들로, 『적막강산』과 『돌베개의 시』가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시들은 자연에 개인의 감상을 투영하는 서정적 요소를 짙게 가지고 있지만, 서정적 자아와 자연과의 일치를 지향했던 기존의 청록파류의 시와는 다른, 지적이고 날카롭고 정제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이후 이형기는 모더니스트로서 자의식과 시적 방법론적 필요를 자각하면서, 『꿈꾸는 한발』에서부터 악마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상상력과 일상적 인식을 전복하는 파괴와 부정의 언어를 실험하였다.

 

  부조리한 현대적 삶에 대한 치열한 인식하에 상상력의 영구혁명이란 명제를 마련한 것도 이 시기에 해당된다. 파괴와 부정의 미학이 두드러진 중기시 『꿈꾸는 한발』, 『풍선심장』, 『보물섬의 지도』와 같은 시집은, 세기말적 파멸의식, 문명비판과 생태의식이 엿보이는 『심야의 일기예보』, 『죽지 않는 도시』 등의 시세계의 기반이 된다.“시란 본질적으로 구축해놓은 가치를 허무화 시키는 작업이며 시에 절대적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절망을 확인할 때만이 꿈은 꿈으로써 참답게 존재한다.”, “허무의 세계에서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란 절망을 확인하는 일뿐이다.”라는 시인의 아포리즘처럼, 불교와 모더니즘 정신을 통해 끝없는 미적 혁신을 감행해온 그의 문학적 태도를 요약한다.

 

  이형기는 전통 서정시의 유약한 화법을 극복하는 강인한 남성적 화법을 구사하면서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문명적 현상에 대항하는 단독자로서의 자유의식을 지향한다. 특히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군사독재 시대의 암울한 정황을, 선전적인 참여시의 어법이 아니라 파괴적 이미지 속에 용해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는 순수논쟁, 참여논쟁에서 이미 표면화된 그의 예술지상주의적 자유의식의 자연스런 발로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인식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부조리한 사회와 문명적 폭력과 폐해에 대한 자각이 심화되면서 그로테스크한 언어실험은 문명비판적 시각과 결합되어 그 강도와 깊이를 심화시켰다.

 

  1990년대에 발표된 『심야의 일기예보』와 『죽지 않는 도시』에는 현대 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비극적 인식이 포스트모던한 수사로 형상화되어 있다.  파괴와 위악으로 대표되는 중기의 시세계는 1998년에 발간된 『절벽』에서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보여주었다. 시인의 투병 기간 중에 지어진 이 후기 시편들은 허위의 현대성에 대한 회의와 부정, 실존의 상처를 힘겹게 뚫고 나온 말들이 깊이 있는 존재론적 탐구와 허무의식으로 심화되고 있다.

 

  불꽃같은 시혼을 불사르듯 시인이 병상에서 써낸 『절벽』 속의 시편들은, 불교의 공의 정신과 소멸이라는 존재의 궁극성에 대한 심문을 던져주는, 그의 이전 시들을 총괄하는 완성판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삶은 끊임없는 소멸을 전제로 주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에 의해 나타나고 촉발되는 것이다.

 

  시집 밑바탕에 깔려있는 연기(緣起)와 공(空)의 세계는, 이형기의 시가 도달한 존재론적 미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특히 『절벽』 속에 수록된 아포리즘 「불꽃 속의 싸락눈」은 50년 동안 갈무리해온 그의 시적 입장의 총결산이다. 그의 시론을 가장 간명하게 요약할 수 있는 핵심은 ‘우로보로스의 미학’과 ‘묵시록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묵시록적 상상력이 지향하는 것이 안정적이고 억압적인 의미질서의 해체라면 우로보로스의 미학이 추구하는 것은 소멸과 생성이 상호 전화(轉化)하는 창조의 싸이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형기는 감각이 돋보이는 치밀한 언어구사와 더불어 정서의 단순성을 극복하고 존재에 대한 내밀한 자기인식을 추구해온 시인이다. 이형기의 초기 대표작인 이 시 역시 정교한 언어구사를 통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개인의 치열한 존재인식을 감각적 심상으로 잘 그려내 서정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같은 제목의 김수영(金洙暎)의 시 《폭포》 '폭포'를 준열한 정신적 높이의 표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주관의 비극적 정서를 그려낸 이 시와는 전혀 다른 사회참여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형기(李炯基))]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폭포에서 떠오르는 관념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을 형상화한 시이다. 시인은 정교하면서도 섬세한 언어 구사를 통해 일상적 삶에서 느끼는 존재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시의 대상인 '폭포'는 산의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폭포'는 단순히 자연적 소재가 아니라, 시인의 뛰어난 상상력에 의해 관념적인 이미지를 대입시킨 형상물이다.


  또한 이 시의 발화 주체인 화자 '나'는 시인 자신이 아닌 '산'이다. 전통적인 인식과 달리 이 시에서 자연은 아름답게 드러나지 않는다. 산 자체가 화자가 되어 고통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1연에서 '그대'사람이고 '나'이다. 자신의 몸에 칼자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시퍼런 칼자욱'의 모습은 주체인 '산'의 입장에서 보면 '지울 수 없는 고통의 멍에'이다.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2연에서는 섬뜩한 속도감과 벼랑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연속된 '벼랑의 직립'에서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를 피우며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은 '현실적 고통으로 인해 끝없이 절망하는 실존적 존재인 인간의 삶'의 모습이다. 화자는 벼랑에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에서 시퍼런 칼자욱을 떠올리며, 그로 인한 ‘단말마’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3연에서는 벼랑을 타고 내리는 폭포의 모습이 석탄기의 장수잠자리로 묘사되어 드러나고 있다. 추락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또다시 '하늘 높이 날'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비극적 모습이 미약한 '장수 잠자리'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 나는 맹목(盲目)의 물보라 

 

  4연에서는 폭포의 물방울을 박살 나는 장수잠자리의 ‘복안’에 비유함으로써 화자가 인식하는 비극적 정서를 형상화하고 있다. 내가 자랑할 것은 내가 멸망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들이 박살나고 맹목(장님)이 돼버린 물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5연에서는 떨어지는 폭포의 시퍼런 물줄기가 자신에게는 아주 오래된 상처라고 절규하고 있다. 이는 존재에 대한 시인의 비극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 시는 자연 현상을 객관적 시각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적 체험을 바탕으로 비극적 정서를 주관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폭포’는 단순히 자연적 소재가 아니라, 시인의 뛰어난 상상력에 의해 관념적인 이미지를 투사시킨 형상물이다. 즉, 시인은 ‘폭포’라는 일반적 자연 현상의 세심한 관찰을 통해 실존적 존재인 인간의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보여 준다. 또한 그러한 시인의 인식은 이 시의 시어와 어조를 통해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시인은 떨어지고 부서지는 폭포의 모습에서 현실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을 포착해 낸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천재교육, 수능특강, 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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