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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239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 신석정, '들길에 서서' ≪문장(文章)≫ (1936. 9.) *부절히(不絕히) : [부사] 끊이지 아니하고 계속.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리 갈래:자유시, 서정시 성격:비유적, 의지적, 희망적 제재:저물녘의 들길 주제:현실의 어려움을..

문학/현대운문 2021.03.19

부벽루(浮碧樓) - 이색

부벽루(浮碧樓) 이색(李穡) 昨過永明寺 (작과영명사) 暫登浮碧樓 (잠등부벽루) 城空月一片 (성공월일편) 石老雲千秋 (석로운천추) 麟馬去不返 (인마거불반) 天孫何處遊 (천손하처유) 長嘯倚風岉 (장소의풍등) 山靑江自流 (산청강자류)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성은 텅 빈 채로 달 한 조각 떠 있고 오래된 조천석 위에 천 년의 구름 흐르네. 기린마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데 천손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가? 돌다리에 기대어 휘파람 부노라니 산은 오늘도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영명사 : 평양 금수산에 있는 절. 고구려 광개토왕이 지은 아홉 절 중의 하나라고 전함 *부벽루 : 평양 모란봉 아래 절벽, 대동강 변에 위치한 누각으로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조천석 ..

문학/고전운문 2021.03.18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

문학/현대운문 2021.03.18

김소운 '특급품' 전문

특급품 김소운 일어(日語)로 '가야'라고 하는 나무―자전(字典)에는 '비(榧)'라고 했으니 우리말로 비자목이라는 것이 아닐까. 이 비자목으로 두께 여섯 치, 게다가 연륜이 고르기만 하면 바둑 판으로는 그만이다. 오동(梧桐)으로 사방을 짜고 속이 빈―돌을 놓을 때마다 떵떵 하고 울리는 우리네 바둑판이 아니라, 이건 일본식 통나무 기반(基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비자는 연하고 탄력이 있어 두세 판국을 두고 나면 반면(盤面)이 얽어서 곰보같이 된다. 얼마 동안을 그냥 내버려 두면 반면은 다시 본디대로 평평해진다. 이것이 비자반의 특징이다. 비자를 반재(盤材)로 진중(珍重)하는 소이(所以)는, 오로지 이 유연성을 취함이다. 반면에 돌이 닿을 때의 연한 감촉―, 비자반이면 여느 바둑판보다 어깨가 마치지 않는다는..

문학/현대산문 2021.03.17

장진 '웰컴 투 동막골' 시나리오 대본 전문

아름다운 전쟁... 차마 말하지 못한 환타지 welcome to dong-mak gol 웰컴 투 동막골 “신비의 마을 동막골에 오신걸 환영 합니다” LG 아트센터 12월 공연 기획 film it suda 장진 作, 演出 1 intro 어두운 무대.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는 발자국 소리다. (물론 이 소리는 무대 가까이에 있는 앞 열 관객들만 들을수 있겠지) 이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남자가 무대위에 오른다. 그는 이 연극을 만든 연출가일수도 이 작품을 쓴 작가일수도 있다. 그는 무대 가운데에 서서 관객을 아우르는 시선으로 지금부터 들려줄 자신의 이 긴 얘기의 시작을 정돈한다. 그리고... 그의 입이 열린다 작가 출판사로부터 전화를 받은건... 오늘 아침 일찍이었습니다. 눈을 뜬게 그 전화벨이었으니까요. ..

문학/현대산문 2021.03.17

도봉 -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 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박두진, '도봉'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사색적, 서정적 • 특징 1.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의 전개 2. 영탄적, 독백적 어조 3. 자연과 인간의 상호 조응적 관계 • 구성 - 1단락 (1 - 3연) : 외로운 배..

문학/현대운문 2021.03.17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 박남수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방공호 위에 어쩌다 핀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호(壕) 안에는 아예 들어오시질 않고 말이 숫제 적어지신 할머니는 그저 노여우시다 -진작 죽었더라면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지 않았으련만...... 글쎄 할머니 그걸 어쩌란 말씀이셔요. 숫제 말이 적어지신 할머니의 노여움을 풀 수는 없었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인제 지구가 깨어져 없어진대도 할머니는 역시 살아계시는 동안은 그 작은 꽃씨를 받으시리라. - 박남수,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문명 비판적, 고발적, 주지적, 희망적, 의지적 • 표현 : 대화체, 스피노자의 격언을 원용 • 어조 : 할머니에 대한 애정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담긴 어조 • 구성 : 수..

문학/현대운문 2021.03.16

성에꽃 - 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여. - 최두석, '성에꽃'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서정적, 사회 비판적(현실 참여적), ..

문학/현대운문 2021.03.16

봄을 맞는 폐허에서 - 김해강

어제까지 나리든 봄비는 지리하던 밤과 같이 새벽바람에 고요히 깃을 걷는다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축축하게 젖은 땅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은 어이도 이리 쓸쓸하여…… 볕 엷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어 깨어진 새검파리*로 성을 쌓고 노는 두셋의 어린 아이 무너진 성터로 새어가는 한떨기 바람에 한숨지고 섯는 늙은이의 흰 수염은 날린다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불어가는 바람에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오-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솟는 눈물이여! 그러나 나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보았나니 철벽을 깨트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까지 오―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 - 김해강, '봄을 맞는 폐허에서' *새검파리 : 깨어진 사기그룻 조각.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

문학/현대운문 2021.03.12

식목제 - 기형도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속에 섞여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

문학/현대운문 202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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