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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현대운문 64

해당화 - 한용운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습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 한용운, '해당화' *경대(鏡臺) : 거울을 버티어 세우고 그 아래에 화장품 따위를 넣는 서랍을 갖추어 만든 가구.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상징적, 여성적, 독백적, 애상적 • 제재 : 해당화 • 주제 : 돌아올 기약을 어긴..

문학/현대운문 2021.03.24

두견 - 김영랑

울어 피를 뱉고 뱉은 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에 지친 작은 새, 너는 너른 세상에 설움을 피로 새기러 오고 네 눈물은 수천 세월을 끊임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쪽 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 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젓한* 이 새벽을 송기한* 네 울음 천 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이고, 하늘가 어린 별들 버르르 떨리겠구나. 몇 해라 이 삼경(三更)*에 빙빙 도는 눈물을 씻지는 못하고 고인 그대로 흘리웠느니, 서럽고 외롭고 여윈 이 몸은 퍼붓는 네 술잔에 그만 지늘꼈느니*, 무섬증 드는 이 새벽까지 울리는 저승의 노래 저기 성(城) 밑을 돌아나가는 죽음의 자랑찬 소리여, 달빛 오히려 마음 어둘 저 흰 등 흐느껴 가신다. 오래 시들어 파리한* 마음마저 가고지워라. 비탄의 넋이 붉은 마음만 낱..

문학/현대운문 2021.03.23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푸른 산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 신석정, '들길에 서서' ≪문장(文章)≫ (1936. 9.) *부절히(不絕히) : [부사] 끊이지 아니하고 계속.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리 갈래:자유시, 서정시 성격:비유적, 의지적, 희망적 제재:저물녘의 들길 주제:현실의 어려움을..

문학/현대운문 2021.03.19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

문학/현대운문 2021.03.18

도봉 -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 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박두진, '도봉'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사색적, 서정적 • 특징 1.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의 전개 2. 영탄적, 독백적 어조 3. 자연과 인간의 상호 조응적 관계 • 구성 - 1단락 (1 - 3연) : 외로운 배..

문학/현대운문 2021.03.17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 박남수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방공호 위에 어쩌다 핀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호(壕) 안에는 아예 들어오시질 않고 말이 숫제 적어지신 할머니는 그저 노여우시다 -진작 죽었더라면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지 않았으련만...... 글쎄 할머니 그걸 어쩌란 말씀이셔요. 숫제 말이 적어지신 할머니의 노여움을 풀 수는 없었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인제 지구가 깨어져 없어진대도 할머니는 역시 살아계시는 동안은 그 작은 꽃씨를 받으시리라. - 박남수,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문명 비판적, 고발적, 주지적, 희망적, 의지적 • 표현 : 대화체, 스피노자의 격언을 원용 • 어조 : 할머니에 대한 애정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담긴 어조 • 구성 : 수..

문학/현대운문 2021.03.16

성에꽃 - 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가 금지된 친구여. - 최두석, '성에꽃'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서정적, 사회 비판적(현실 참여적), ..

문학/현대운문 2021.03.16

봄을 맞는 폐허에서 - 김해강

어제까지 나리든 봄비는 지리하던 밤과 같이 새벽바람에 고요히 깃을 걷는다 산기슭엔 아즈랑이 떠돌고 축축하게 젖은 땅우엔 샘이 돋건만 발자취 어지러운 옛 뒤안은 어이도 이리 쓸쓸하여…… 볕 엷은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어 깨어진 새검파리*로 성을 쌓고 노는 두셋의 어린 아이 무너진 성터로 새어가는 한떨기 바람에 한숨지고 섯는 늙은이의 흰 수염은 날린다 이 폐허에도 봄은 또다시 찾어 왔건만 불어가는 바람에 뜻을 실어 보낼 것인가 오- 두근거리는 나의 가슴이여! 솟는 눈물이여! 그러나 나는 새벽바람에 달음질치는 동무를 보았나니 철벽을 깨트리고 새 빛을 실어오기까지 오― 그 걸음이 튼튼하기만 비노라 이 가슴을 바쳐 ― - 김해강, '봄을 맞는 폐허에서' *새검파리 : 깨어진 사기그룻 조각.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

문학/현대운문 2021.03.12

식목제 - 기형도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소리 단단히 묻어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속에 섞여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

문학/현대운문 2021.03.11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 황동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 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뒷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굴리고 싶어진다. 노점에 쌓여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람들 모든 것 떨어지기 전에 한 번 날으는 길 위로 -황동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시낭송 감상하기 핵심 정리 • 주제 : 이상을 향한 전진의 의욕 • 제재 : 바퀴 • 성격 : 암시적, 상징적, 주지적, 사회비판적 • 표현 : 반복법, 상징법 • 시상의 전개 * 제1연..

문학/현대운문 202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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